믿음의 자취(롬 4:9-13)
믿음의 자취 130217
이름 : 이근호(IP:119.18.69.144)
믿음의 자취(롬 4:9-13)
이근호
13-02-17 13:21
믿음의 자취
2013년 2월 1일 본문 말씀: 로마서 4:9-13
(롬 4:9, 개역)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롬 4:10, 개역)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롬 4:11, 개역)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롬 4:12, 개역)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에게도니라』
(롬 4:13, 개역)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믿음에도 눈에 보이는 실체나 증거가 있으면 훨씬 수월하겠다는 생각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의 자부심도 여기서 나오는 겁니다. 그들에게는 과거 하나님께서 친히 만들어주신 ‘이스라엘 나라’는 실체가 있었습니다. 전 한 나라가 통으로 전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그런 실체를 하나님께서 실제로 만들어주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들이 그 나라의 후손으로 태어나기만 하면, 그리고 자기 나라가 이스라엘이라고 인정하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점을 참으로 믿음의 증표로서 수월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 나라에서는 백성이 되는 자격으로서 개인의 신체로 표시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할례입니다.
할례를 받았는지 아니받았는지는 바지를 내려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문신처럼 신체 자체에 믿는자 라는 표시를 하는 것이 우리 인간들 입장에서 얼마나 든든하고 믿음직스럽고 안심이 되겠습니까? 그런에 오늘 본문에서는 이 모든 것이 믿는 자가 구원받게 하는 표시는 아니라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7:19에 보면,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을 대하면서 주의할 것은, 할례 없는 자들이 “나는 할례를 안 받아도 돼”라고 자랑해서는 아니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무할례자’도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할례 없는 것이 자랑거리가 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마치 십일조 안하는 것이 마치 대단한 믿음의 소유자인 것처럼 행세해서는 아니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할례의 진정한 의미가 뭐란 말입니까? 오늘 주보 뒤편에 제가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언약은 율법으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아 난 것이다’에서 여기에 4개의 생소한 단어가 등장합니다. ‘언약’, ‘율법’, ‘믿음’, ‘의’ 같은 겁니다. 하나의 요소가 이탈된다면 나머지 요소가 갖고 있는 본래의 뜻을 위반될 것입니다. 그 정도로 이 네 가지 단어는 뭉쳐져서 어느 하나를 그 자리에서 독립적으로 뺄 수가 없습니다. 이는 흔히들 “믿음, 하나만 알면 돼”라는 주장이 틀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이 흔히 쉽게 생각하는 믿음의 증표들은 ‘병나음을 얻는 것’ ‘귀신이 나가사는 것’, ‘물 위를 걷는 것’ ‘산이 옮겨져서 바다에 빠지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는 언약, 율법, 믿음, 의 같은 것들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참 믿음을 설명하시는 겁니다.
마태복음 7:22-23에 보면,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믿음의 증표는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언약, 그 자체를 위하여 우리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달리 말해서, 나의 구원을 위하여 내가 믿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언약을 위하여 믿음이 생겨나게 되어 있는데 그 믿음의 생겨났음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했던 할례라는 율법입니다.
11절에 보면,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문장을 이렇게 읽으시면 아니됩니다.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니'라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즉 '믿음의 표'란 표 자체를 부정하는 의미에서 표를 동원시킨다는 뜻입니다.
즉 표가 있더라도 표를 부정하라는 말입니다. 이는 표가 없이는 믿음은 믿음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표란 실체를 지시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졌다고 여기는 모든 것을 부정하는 표가 바로 믿음의 표라는 겁니다. 할례 받은 자는 할례 받은 것을 부정하고, 할례 받지 아니하는 자는 할례 받지 않는 것을 고마워해서는 아니된다는 말입니다.
표. 기호란 사라짐을 전제로 하는 흔적입니다. 믿음의 조상이란 아브라함 일생에서 최초로 '사라짐'을 드러내는 계기가 마련됩니다. 사람이란 자신의 몰두한 일이 생기면 믿음을 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양치기 소년’ 이야기를 아시지요? 양치는 소년이 산 위에서 심심해서 마을 사람들을 속여보려고 했습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늑대가 오지도 않았는데 늑대가 나타났다고 소리쳤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양치기 소년이 말하는 그 ‘늑대’라는 소리와 그 소리에 부합하는 실체, 곧 실제로 나타난 늑대를 보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늑대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는 정말 그 소년에게 늑대가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이미 산 밑의 마을 사람에게는 소년의 늑대는 단지 ‘소리’로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믿는 자는 바로 이런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산 위에서는 늑대가 실제로 나타나서 양들을 잡아먹어도 산 밑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가 우리 죄를 용서한다고 해도 세상 사람들에는 단지 소리로만 그러하고 십자가 사건도 옛날 한 때에 있었던 일에 불과합니다.
일종의 흔들리는 술잔에 담긴 술의 표면 현상에 불과합니다. 술잔을 잡고 흔들대면 그 순간만 “찰랑찰랑” 할 뿐입니다. 그러나 그 술잔을 다시 테이블 위에 두면 다시 고요해집니다. 정말 술잔에서는 여전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아브라함 자체를 없애는 사건이 일어난 겁니다.
아브라함을 죽이고 단지 아브라함을 천국과 연결시키는 매개체, 곧 이삭만 부각되는 사건이 일어난 겁니다. 바로 이와같은 일의 취지와 동일하게 일어나는 것이 곧 믿음현상이라는 겁니다. 여호수아 7장에서 아간은, 사람들이 전혀 보고 있지 않는 틈을 타서 여리고 전쟁의 전리품들을 자기 것으로 삼았습니다.
이렇게 되면 살아계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이는 전쟁이 아니라 아간 본인이 살아남겠다는 전쟁으로 전한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숨어있던 아간을 색출하여 죽여버리므로서 언약의 살아있음을 증명하셨습니다. 오늘날 바로 아간같은 존재가 우리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관여한 일이 아니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채로 살아갑니다.
바로 이런 우리를 양치는 소년으로 바뀌어서 늑대에게 늘 물려죽게 하시는 바로 그 관계가 믿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죽고, 중보자되시는 예수님만 늘 살아 점령하고 있음을 나타내보이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언약의 살아있음을 보이는 재료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3-02-19 23:41
21강-롬4장 9-13(믿음의 자취)13021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4장 9절에서 13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243페이지입니다.
로마서 4:9-13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 뿐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에게도니라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사람들이 믿는다는 것은 어떤 실체가 있기 마련인데 구약에서는 실체가 있었어요. 믿는 단체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있었어요. 그 국가에 소속되면 믿는 사람이 되고 여호와를 아는 사람이 되고 그 이스라엘 국가가 아니면 하나님의 믿는 백성이 아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국가라는 그 실체가 있게 되면 믿음에 대해서 이해하기기 굉장히 쉽지요. 어느 가정이 만약 교회를 다 다닌다면 그 가정의 자식이 된다든지 아내나 남편이 된다면 자동적으로 믿는 가정에 소속이 되기 때문에 ‘나는 믿는 가정에 소속되었기에 자동적으로 믿는다.’ 하게 되면 얼마나 쉽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난지 8일 만에 전부 다 할례를 받는데 할례를 안 받는다고 합시다. 남자의 생식기 끝을 잘라내는 것을 할례라 하는데 그 사람은 이스라엘의 혈통을 받더라도 할례가 없으면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할 수가 없겠지요. 국가라는 것, 그 믿음의 실체에 소속되면 무조건 믿는 백성이다, 굉장히 간단합니다. 더욱더 간단한 것은 바지 벗겨 보고 할례가 되어 있다면 믿는 사람이 맞다, 이것이 얼마나 수월한 겁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믿음의 표시가 뭐냐 하면, 할례가 아니라 무할례자, 신체에 문신처럼 새긴 할례가 없다 할지라도 그 사람은 믿는 자가 될 수 있다, 이렇게 나오니까 듣는 사람들이 얼핏 들으면 기분 좋다 하다가도 차라리 할례 받는 것이 훨씬 편하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나 죽어도 천국 가는 거야. 한 번 보여줘? 바지 한 번 내려 봐?” 이게 얼마나 수월합니까? 그런데 할례가 없는 상태에서 “나 구원 받았어.” “그래? 구원 받은 표 내 봐.” “없어.” “구원 받은 표가 없는데 어떻게 네가 믿음이 있는지 알 수가 있겠어?” “글쎄. 그냥 믿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차리라 구약 때가 더 좋았지요. 차라리 그 때가 더 편리한데 지금 신약 때에 와서 “나는 믿어.” “왜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데?” “나는 나의 행함을 의지하지 않고 나는 나의 믿음을 믿는 거야.” “네 믿음을 네가 믿어버리면 네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지 그것을 누가 알아주는데?”
가만 보면 오히려 신앙이 있는 것인지 아닌지, 믿음이 있다고 해도 내가 믿는다고 우기면서 믿는 것인지 이것이 헷갈리게 되고 자신감이 상실되는 거예요. 왜 하나님께서 옛날처럼 쉽게 할례를 행하고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에 소속되고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족보가 되는 이것이 훨씬 더 믿는 것처럼 쉽게 받아들일 수가 있는데 왜 그걸 철폐시켰느냐 하는 겁니다. 더 혼동스럽고 헷갈리고 당황스럽고 난감하게 만드느냐는 말이지요. 그것은 할례 받은 것이 믿음의 표시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뭔가 실체가 있어요. 교회라는 실체, 교회 등록하고 6개월이 되었다, 세례(할례) 줘서 세례 받았다, 우리 가정이 기독교 집안이다, 나는 모태신앙이다, 라고 하는 것이 믿음의 궁극적인 표시가 될 수 없고 내가 믿는다고 확신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사도바울이 하고 있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유대인이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고린도전서 7장 19절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그러니까 우리가 할례를 안 받잖아요. 할례 안 받았다고 해서, “우리는 할례 같은 것 안 받잖아.”라고 자랑하지 말라는 그 말입니다.
왜, 할례 안 받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니까. “우리교회는 십일조 강조 안하더라. 그러니까 기분 좋아.” 십일조 안하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십일조 하는 것도 물론 아무것도 아니듯이. 십일조 안하는 것을 자랑삼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말이지요. 결국 로마서에서 예수님이 사도바울을 통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이 세상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겁니다. 괜히 믿는 사람이 있다고 우기는데 사실은 ……, 갑자기 그 생각이 나네요. 노래 가사에 보면 술잔에 술이 있다면 그것을 보고 찰랑찰랑, 하잖아요. 찰랑찰랑 대더라도 그냥 놔두면 고요해지고 조용해지잖아요.
아무 일도 일어난 적이 없어요. 다만 뭐만 있느냐하면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외치는 사람들만 있을 뿐이에요. 이 이야기는 진짜 이스라엘에 있어서 뭔가 일어났다, 홍해가 갈라졌다, 하지만 막상 그 때만 지나면 홍해, 한 때 있었지만 지금은 아무 일도 없어, 그렇게 되는 거예요. 진짜 믿음은 아무 일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왜 나에게 아무 일이 생기느냐, 하는 그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분명히 백 명, 천명, 만 명이 세상을 똑같이 보고 있어도 그들 눈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다, 그 때 그 일이 일어났었지. 찰랑찰랑, 그 때 잠시 술잔이 찰랑거렸을 뿐이지 다시 술잔 놓아버리면 고요해지는데요.
유대인들은 할례 받은 것을 가지고 이것을 계속 우려먹으려고 하고 이것을 가지고 버티고 할례 받은 것을 가지고 우리나라만 천국가고 나머지는 다 지옥 간다고 큰 소리 치는데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할례 받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야, 할례 받은 너희가 지옥 가는 거야.” 요즘 식으로 한다면 “우리는 교회 가서 예배드려.” 이렇게 한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교회 가서 예배드리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야.” 결국 하나님께서 믿는 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제발 양치기 소년이 되라는 겁니다.
‘양치기소년’이란 이솝우화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양을 치고 있으니 혼자 심심하잖아요. 마을 사람들을 재미로 골려먹기 위해서 소년이 늑대가 온다 하니까 그 소리만 있을 뿐이에요. 그 마을 사람들은 늑대를 본 적이 없어요. 다만 마을 사람들은 소년이 늑대가 나타나서 양을 잡아먹었다는 그 소리만 있을 뿐이지요. 그 소리를 듣고 그 소리에 맞는 실체가 있는 줄로 알고 몽둥이 들고 달려오니 “심심해서 거짓말 했어요. 미안해요.” 하니 어른들이 화를 내면서 “거짓말 하지 마.” 하고 내려갔어요.
그 다음에 또 심심한 거예요. 또 늑대다, 하니까 ‘이번엔 진짜겠지.’ 하고 와보니 또 늑대는 없어요. “왜 그랬어?” “내가 미쳤나 봐요. 심심해서 그랬어요.” 세 번째로 늑대가 온다고 하니까 이번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어요. 그 아무도 오지 않는 양치기소년, 제발 그런 자리, 세 번째 해도 안 오는 그 자리에서 비로소 일이 있었어요. 내 말이 아무에게도 안 먹힌다는 그 사실이 믿는 자의 기쁨이에요. 졸지에 양치기 소년이 되어버리고 아무에게도 내 말이 먹히지 않는 거예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 죄를 용서했고 사흘 만에 부활함으로써 우리는 의의 나라에 갑니다, 아무도 안 믿는 거예요.
아무도 안 믿는데 그 사람들이 아무도 안 믿는 이유가 아무리 예수가 어쩌고 소리만 있을 뿐이지 실제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마을 사람들이 확신하고 있을 때 왜 하나님은 나에게 늑대를 보내시는 거예요? 아무도 안 믿는데! 왜 하필 세 번째에 진짜 늑대가 나타나신 겁니까? 이게 바로 믿음의 표시가 된다는 거예요. 환장할 지경입니다. 믿는 것 좀 알아주면 좋겠는데. 처음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귀신 쫓아내고 병고치고 물 위를 걸으시고, 난리 났습니다. 예수님 따라다니는 사람들 많았어요. 5천명을 먹이시는 기적 베푸실 때 진짜 임금님이 왔다, 메시아 나셨다, 당신이 오실 자니 뭐니 하면서 우르르 모였지요.
정작 예수님의 예수님 됨, 진짜 예수님을 알 수 있는 기회는 제자들마저 다 예수님 곁을 떠난 그 후입니다. 달랑 남은 분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가까운 제자들도 다 떠나버리고 예수님 열두 제자는 아니지만 글로바라든지 다른 제자들은 실망하고 보따리 싸서 자기 고향으로 가버렸지요. 예루살렘을 떠나서 다들 귀농한다고 “아이고, 예수도 한때 예수였지. 그때 젊을 때 열광적으로 예수 따랐지. 바보같이 내가 미쳤어 정말. 인간이 경험부족으로 그런 것이지. 내 꾀에 내가 속아 넘어가서 그런 거야.”라고 두 제자가 엠마오로 내려갈 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더디 믿는 너희들아, 내가 약속대로 살아났다고 했잖아.” 하고 자기 자신을 드러냅니다.
진작 좀 드러내시지, 진작, 돌아가시기 전에. 사람들이 원하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기적은 병 고치는 것과 귀신 쫒아내는 것과 물위를 걷는 것과 산이 옮겨져 바다에 빠지는 그런 것들을 원하는 겁니다. 그러면 믿어주겠다는 거예요. 그러나 정작 오늘 로마서 4장에 나오는 용어들은 어떤 용어냐 하면, 제가 주보에 네 가지 용어를 채용했어요. “언약은 율법으로 난 것이 아니고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오늘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여기에 네 가지 생소한 단어가 등장합니다.” 이렇게 해서 네 가지 단어를 적어 놓았는데 첫 번째는 언약, 두 번째는 율법, 세 번째는 믿음, 네 번째는 의. 우리는 언약, 율법, 믿음, 의를 원하는 것이 아니에요.
첫 번째는 병 고침, 두 번째는 부자 되기, 세 번째는 귀신 쫓아내는 것, 네 번째는 만사형통, 이런 것을 원한다는 말이지요. 이런 네 가지, 이런 싸(4)가지, 싸가지는 아니고 이런 네 가지를 원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언약, 율법, 믿음, 의, 이것이 신문이나 방송에, 9시 뉴스에 나오는 용어입니까? 이것이 수능 시험에 언어영역에 나오는 이야기인가요? 수능시험은 치우고 교회 목사의 설교에 이것이 나오던가요? 병 고침, 부자 되기, 잘 먹고 잘 살기, 그런 싸가지, 네 가지만 나오잖아요. 그런데 막상 사도바울이 믿음을 설명할 때는 언약, 율법, 믿음, 의, 이런 것의 조합이에요.
“여기서 하나의 요소가 이탈한다면 나머지 요소가 갖고 있던 본래의 뜻을 위반하게 될 것입니다.”제가 주보에 이렇게 적어놓았어요. “네 가지 단어가 뭉쳐 서서 어느 단어 하나를 독점적으로 뺄 수가 없다.” 그러니 “나는 믿습니다.” 해 놓고는 “언약에 대해서는?” “몰라요.” “율법에 대해서는?” “몰라요.” “의에 대해서는?” “몰라요.” 그게 무슨 믿는 것입니까? 언약, 율법, 믿음, 의, 이것이 같이 뭉쳐져 있는 조합인데. 어떻게 그 하나를 뺄 수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나는 병을 고쳤습니다. 나는 예수 믿고 부자 되었습니다.”
왜 그런 싸(4)가지, 네 가지를 가지고 거기서 믿음을 뽑아내느냐는 말이지요. 정작 사도바울은 그런 식으로 이야기한 적이 없는데. 그것은 인간들이 양치기소년이 되기 싫어서 그런 거예요. 나는 믿었기에 이렇게 부자 되었다, 병 고쳤다, 이것을 남 앞에 내세워서 내 믿음을 타인에 의해서 새삼스럽게 보호받으려고 하고 인정받으려고 하는 거예요. 우리는 살아계신,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으로부터 인정받으면 끝인데 그게 우리의 본성에 안 맞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주님보다 남들이 알아주는 믿음 있는 자가 되고 싶은 이 본성, 이것이 바로 유대인으로 하여금 할례를 자랑하게 만든 겁니다. 유대인으로 하여금 율법을 자랑하게 만든 거예요.
우리교회 교인 몇 명인가, 헌금 얼마 나오나, 예배당이 몇 평인가, 이런 것들이 마치 뭐와 같은지 알아요? 유대인들의 율법과 같은 겁니다. 사도바울은 알고 있어요. 예배당 46년 지었을 때에 제자들이 46년 지은 성전보고 위축되어 있다는 것을 다 알고 있어요. 그리고 그것을 헐어버리라는 것, 그 46년 된 그 예배당을 헐어버리라고 하는 그 이유, 160년이나 지었다는 그 유럽의 쾰른 대성당, 그런 예배당을 헐어버리라는 그 말씀이 그 성당에 다니는 사람들의 귀에는 들어오지가 않습니다. 그것이 내가 믿는다는 하나의 표시로서 내세우고 싶기 때문에 그래요. 양치기 소년이 되기 싫은 겁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주님께서 하시는 일은 뭐냐, “이 세상에 아무 일도 정말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일어났을 그때는 찰랑찰랑 이었지요. 찰랑찰랑은 다시 원상태로 고요하게 되어버렸어요. 뭐, 뭐, 무슨 일이 있었는데? 뭐? 예수님의 부활? 그 때 한 때였지. 성령? 그 때 한때뿐이지 지금 무슨 일이 있는데? 지금은 언약과 율법과 믿음과 의. 이런 것 가지고 믿음의 표시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고 이 시대의 십자가의 복음의 능력은 바로 이런 것을 새롭게 바라보고 이해하는 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겁니다.
그렇다면 언약과 율법과 믿음과 의, 이 네 가지 조합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자신의 사라짐, 없어져가는 겁니다. 10절에 보게 되면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라고 되어 있지요. 제가 정신 바짝 차려서 다시 읽겠습니다.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읽느냐 하면,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할례시에 맏은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라고 읽는 거예요.
지금 무슨 뜻인지 여러분이 아시겠습니까? 예수님의 성경에서는 할례를 받은 것은 할례 때 받은 그 내 믿음을 티내라고 할례 받은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데 우리는 할례를 받아놓고는 “이 할례 받을 때 내 믿음 억수로 좋았데이.” 자기 믿음 좋다는 것을 표내기 위해서 할례를 받은 것으로 할례를 이해한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네가 믿음으로 할례를 받았느냐? 그러면 네 할례와 더불어 너도 이미 사라지고 죽어라.” 그 말인 거예요. 네가 할례 받은 나를 믿음을 위해서 죽여줘라, 그 말입니다. 할례 받았으니 나는 믿는 사람입니다, 라는 그것을 진짜 믿음이 등장하기 위해서 내가 받은 믿음도 믿음이 아니라고 이야기해서 너 자신을 사라져버리게 하라, 그 말입니다.
이게 참 보통 힘든 이야기가 아니에요. 사람은요, 자기 일에 충실할 때는 믿음은 떨어져 버렸어요. 자기 일에 충실할 때, 목사가 목회 일에 충실하게 되면 그 목사는 믿음이 없습니다. 제가 밤에 꿈을 꿨어요. 꿈 이야기하면 꼭 계시처럼 하게 되면 곤란한데. 제가 꿈속에서 KBS에 취직이 되어 있었어요.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그 KBS라는 공기업에 취업이 되니까 더 이상 믿음이라는 것은 필요치 않아요. 취직되었는데 왜 신앙 같은 것이 있니 없니 신경을 씁니까? 거기서 느낀 것은 뭐냐, 사람이 신앙생활 하지 않는 것은 분명히 신앙대신 기분 좋게 집중하는 일이 따로 있기 때문에 그래요.
아가씨가 시집가는데 신앙생활을 왜 합니까? 시집가는 게 좋은데. 자기 하는 일에 충실하게 되면 신앙은 근처에도 없어요. 어디로 갔는지 없어요. “목사님, 제가 신앙생활을 잘 못하는데 어떻게 합니까?” 할 때 신앙생활 못하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어요. KBS에 입사한 나를 부정하는 그것이 신앙의 표인 거예요. 내가 사라져야 될 이유는 사라지지 않는 분이 따로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없어졌다고 엠마오로 간 두 제자에게 주님이 등장하신 것은 사실은 네가 사라져야 되고 진짜 사라지지 않을 분, 영원히 계실 분은 바로 나 예수님이라 하는 겁니다. 이것을 가지고 두 자로 언약이라 합니다.
언약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 빼놓고 모두 사라지게 만들고 예수님만이 영원하게 만드는 그것이 바로 언약이에요. 믿음이라는 것은 그 언약의 능력에서 언약 있음에 믿음이 있게 되는 거예요. 양치기 소년이 세 번째고 네 번째고 늑대가 안 왔으면 그 소년은 그냥 별 볼일 없는 양치기 소년이에요. 그런데 첫 번째 안 오고 두 번째도 안 오고 세 번째로 진짜 늑대가 왔기에 양치기 소년은 미치고 환장하는 겁니다. 난 첫 번째 거짓말 한 것 맞습니다, 두 번째도 거짓말 한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세 번째는 진짜라고 할 때 그 사실을 진짜 들이닥친 늑대만 믿어주고 마을 사람들이 아무도 안 믿어준다는 겁니다.
바로 그 관계, 주님과 나, 그 관계만 남고 다 떨어져나가는 그 관계가 바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냥 일상, 교회 가는 것도 반복되는 일상일 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예요. 중요한 것은 언약이 살아 있다는 겁니다. 언약이 살아 있다 보니 율법도 살아 있고 하나님의 의도 살아 있고 우리 믿음이 아닌 진짜 믿음도 살아 있고, 그래서 이 네 가지가 구성되는 겁니다. 여기서 어려운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제가 설교 처음에 이스라엘은 실체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스라엘에 속하고 이스라엘 편에 속하면 그것으로 구원 받는 것으로 안심한 거예요.
자기들끼리는 양치기 소년이 아니에요. 전부 다 한편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프로야구가 너무 보고 싶은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아예 잠실 근처로 이사를 갔어요. 어떤 배우가 그랬어요. 왜 잠실 근처로 갔느냐, 잠실야구장이 있는데 집에서 야구장이 멀리 있으면 그 야구장의 주차장이 좁아서 차를 대기가 힘들었어요. 아예 야구장 근처에 이사 가서 걸어서 가려고 한 거예요. 야구 좋아하는 그 영화배우 입장에서는 야구장에서 야구하는 그것이 자기에게는 실체가 되는 거예요. 실체라는 말을 이해하시겠지요?
그 실체 때문에 집을 옮겨서 이사까지 할 정도에요. 서울 지하철 2호선에 보면 삼성역 다음에 운동장, 신촌, 잠실 이런 식으로 나오는데 그 종합운동장이 있다는 그 실체가 야구를 싫어하는 강원도 할머니에게는 서울에 야구장이 있다고 해서 이사 갈 이유가 없습니다. 제 말을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그 배우에게는 야구장이라는 것이 허구가 아니고 그 야구장 때문에 이사까지 갈 정도로 실체가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이스라엘 사람한테는 허구가 아니고 실체라니까요. 그들에게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자체가 율법이고 하나님의 언약이고 거기에 소속되면 믿음이고 거기서 발생되는 것이 의고. 지금도 유대인들은 옛날 이스라엘을 회복하겠다고 전쟁하고 있잖아요. 핵폭탄도 만들었는데 이스라엘을 북한에 비하면 북한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북한이 이스라엘 콧 털 건드리면 거기서 미사일 쏴버립니다. 그 정도로 신앙의 실체를 잡을 수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구약을 볼 때 “‘그래, 구약 이스라엘은 실체가 있는데 오늘날 우리는 실체도 없고 믿으려고 하니 든든한 믿음의 바탕이 있어야 할 텐데 뭘 로 하지? 옳지 교회로 해야 되겠다.’ 여러분, 교회 등록하시면 구약백성들같이 실체가 있는 신앙생활을 하는 겁니다. 옛날 이스라엘이 하나님 섬기듯이 우리는 교회 잘 섬기고 목사 말 잘 들으면 여러분이 구원 받는 것이 분명하니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했을 때 그것은 바로 사도바울의 편지에 의하면 옛날 그 유대인들이 실수한 겁니다.
유대인들은 마태복음 8장에서 말하기를 “우리는 아브라함 자손이어서 천국 간다.”고 할 때 주님께서 아주 얄밉게 이야기하세요. 너희들은 천국에 못 간다고 이야기하신 것이 아니고 “당장 그 자리에서 나와,”라고 했어요. 여러분, 못 간다는 이야기보다 더 기분 나쁜 이야기가 뭔지 알아요? 그 자리 비우고 당장 그 자리에서 나와, 이것이 더 기분 나쁜 이야기에요. 거기에 “너희들은 쫒겨난다.”라고 합니다.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마 8:12) 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이야기입니까? “난 포기했어.” 이러면 덜 수치스러운데, 이스라엘이 있으니 당연이 우리가 천국을 점령한다고 했는데 “거기서 쫓겨난다.” 오늘날 교회 다니면서 구원받는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마찬가지로 ‘쫓겨나리니.’
그러면 그 쫓겨나고 남은 빈자리는 누가 차지하느냐는 말이지요. 여기서 구약의 실체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호수아 7장에 보면 여호수아 장군이 앞장서서 여리고성을 무너뜨렸어요. 이중성벽으로 된 난공불락의 성이었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언약궤를 앞장세우고 성을 도는데 마지막 일곱 번째 날에 일곱 번 도니 성이 그대로 무너져서 여리고성 쳐들어가서 그냥 접수를 했어요. 거기에 금은보화 엄청난 재화와 보물이 있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사전에 이야기했습니다. 이번 전쟁은 여호와 전쟁이니까 여호와전쟁을 수행하는 가운데 너희들은 가담 되었다는 겁니다.
남의 전쟁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간 겁니다. 하나님이 친히 벌이는 전쟁에 용병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부름 받아서 가게 된 거지요. 그러면 거기에 있는 금은이나 보물이나 외투, 이 모든 것은 전부 다 하나님께 바치라고 한 거예요. 그 당시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의 실체는 뭐냐, 제사장에게 바치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야, 이것은 우리 힘으로는 안 되는 거야. 살아계신 하나님이 살아 있어서 우리와 함께 있기에 이렇게 했다.” 하는 것을 다 알기에 모든 사람들은 금은보화가 좋은 줄 알면서도 손을 안대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간이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이 아간이라는 분이 우리한테 얼마나 고마운 분인지. 아간이 없었으면 이스라엘이 믿음의 실체라고 우리도 그렇게 생각할 뻔 했었어요. 아간이라는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이 보기에 여리고에 들어가 보니 금은보화가 엄청나게 많거든요.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여리고 사람들이 입던 수입산 외투, 명품가죽옷을 훔쳐서 가지고 나왔어요. 왜,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기에. 무슨 말이냐, 이 세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도 본 게 없기에 훔쳤습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아이 성을 치라고 했어요. 아이 성을 치려고 보니 아이성은 좀 작아보여요. 그래서 너무 많은 희생을 할 필요 없고 2, 3천만 들어가면 되겠다고 정탐꾼이 보고를 해 왔어요. 그래서 여호수아가 한 3천명만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3천명이 들어갔는데 오히려 얕잡아 봤던 적에게 습격을 당해서 도리어 36명만 죽어버렸어요. 공격이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거대한 여리고성은 쉽게 함락시켰는데 아이, 작다는 뜻으로 아이 성인데 그 작은 성에서 패배했을 때 여호수아가 울면서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패배라니 웬 말입니까? 우리가 왜 이렇게 패배했습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 하나님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생각 안한 사람이 한 사람이 있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실체가 아니에요. 그 안에 보이지 않는 눈을 부릅뜨고 계신 살아있는 하나님이 실체인데 아간이라는 사람이 물건 훔칠 때는 보는 사람이 없었어요. 물론 CCTV도 없었어요. 그야말로 완전범죄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겁니다. 하나의 물체를 빼앗는 그것이 문제가 아니고 어떻게 구원을 받느냐 하는 하나님의 방식이거든요.
하나님의 방식은 보이는 실체를 접수하면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전쟁에 져도 괜찮아요. 주님께서 눈 부릅뜨고 살아 있다는 것 그리고 이 모든 일은 우리 전쟁이 아니고 살아 있는 주님이 하시는 전쟁의 결과로서 구원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믿을 때 비로소 그것이 실체라니까요. 그 실체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살아 있음을 더욱 생생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배신자 아간을 집어넣은 겁니다. 이게 오늘날 믿음이라는 거예요. 믿음은 예수님 믿습니다, 십자가 믿습니다, 하나님 믿습니다, 십자가 믿습니다, 이것이 믿음이 아니고 믿음은 “내가 바로 주님이 하는 일에 아간이요 훼방자요 내가 방해자로서 끌려 들어왔습니다.”라고 내가 바로 주님의 상처고 주님의 아픔이고 동시에 우리의 상실입니다, 라는 그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족속을 불러다 여호수아 앞에 세우고 유다족속에서 세라족속을 분리시키고 세라족속에서 삽디가족을 분리시키고 그 다음에 정확하게 “아간, 네가 가져갔지?” 라고 했습니다. 그럴 때 아간 때문에 아이 성 싸움에 실패했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보고 하나님이 눈 부릅뜨고 살아 있다는 것을 거부한 이 아간을 돌로 쳐 죽일 때 그 쳐 죽인 아간은 금은보화 외투와 귀한 것을 갖고 있었어도 결국 자기 목숨을 잃고 죽임을 당했어요. 아간이 돌에 맞고 죽어가는 그 모습, 그 모습을 내 안에서 내가 재현할 때만 그게 바로 하나님 살아 있음을 증거 하는 표시라 그 말입니다.
할례? 아간이 할례 안 받았겠어요? 하지만 아간은 할례 받아도 할례 자체가 자기를 구원하는 믿음의 표시가 될 수 없었다는 겁니다. 요새 말로 하면 아간이 교회 등록했고 세례도 받았어요. 그런데 그것으로 구원 안 됩니다. 그것이 구원의 표시가 아니고 진짜 믿음이라 하는 것은 내가 할례 받을 믿음이 아니고 할례 없을 때, 믿음 없을 때의 그 모습이 항상 주님에 의해서 진작 죽어도 마땅한 그것이 내 모습이다, 라는 그것이 무 할례시에 된 믿음이라는 겁니다. 할례를 받아놓고도 그 할례를 믿지 않는 그 믿음, 양치기 소년이라도 저는 감사합니다, 라는 그 믿음.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주님의 보낸 늑대를 내가 받아서 나는 늑대한테 물려죽어도 마땅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 더 이상 내 입에서 살려달라는 말이 나올 이유도 없고 그럴 필요가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거예요. 만약에 우리가 “주여, 죄인입니다.” 하면 주께서 뭐라고 합니까? “기특하다.” 하는 줄 알아요? “그 입 다물라!” 우리의 과거는 주님의 용서 에 다 묻힌 거예요. 그런데 “주여, 죄인입니다.” 한 그것이 우리에게 믿음의 표시가 될까요? “그 주둥이 다물어라. 안 그래도 내가 너 죄인인줄 안다.”
여기 12절에 보면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 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 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에게도니라.” 언약, 율법, 믿음, 의, 이 네 가지는 어느 한 구석을 뺄 수가 없습니다. ‘나는 율법, 언약은 안 갖고 싶어. 그러나 나는 믿음은 갖고 싶어.’ 이렇게 믿음 하나만 잡아 뺄 수가 없게 되어있어요. 만약 믿음을 잡아 당겼는데 거기 언약과 율법과 의와 믿음이 한꺼번에 다 딸려 나온다면 그것이 뭐냐, 그것이 아브라함 자손에 해당되는, 아브라함노선에 해당되는 사람입니다.
그 중에 어느 것 하나를 뺄 수가 없게 되어있어요. 그 중에 어느 하나를 뺀 믿음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백 프로 엉터리입니다. 진짜 믿게 된 사람은 믿음의 자취를 밟는데 그 믿음의 장취의 조상이 아브라함이거든요.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된 이유가 아브라함의 시험이라는 것은 내가 사라졌는지를 고백케 하는 시험이에요. “네가 아직 생생하게 살아 있나?” 보는 거예요. 살았나, 죽었나를 보는 거예요. 저 죽었습니다, 하고 나오면 그게 시험에 이기는 것이고 내가 믿음 좋습니다, 하고 나오면 그것은 믿음의 시험에서 불합격 하고 탈락한 거예요.
“아브라함아! 네가 이삭이라는 자식이 있는데 그 자식을 나에게 바칠 수 있느냐?”라고 했을 때 “이게 내 자식인데 왜 내가 자식을 당신에게 바칩니까?” 이렇게 나온다면 탈락하는 이유가 인간은 자기 것, 자기소유가 있으면 믿음은 날라 가 버려요. 인간은 자기 것이 있으면 그 자기 것에 충실하기 마련이거든요. 어떤 책임감 같은 것이 있기 마련입니다. 사람이라 하는 것이 항상 자기 것에만 충실하기 때문에 자기것 외에는 어떤 일이 벌어져도 안 벌어진 일이 되어버려요. 사람은 늘 자기와 관련되어 있을 때에만 비로소 그 사건이 사건으로서 자기에게 느껴지게 되어 있거든요.
사람은 자기와 관련된 한계 안에 늘 갇혀 있는 셈이 된다 그 말이지요. 그러데 믿음이라 하는 것은 언약에서 오기에 외부에서 오는 거예요. 외부에서 왔기에 그 외부가 우리 내부에 찾아올 때 그 외부성이 우리에게서 사라지면 안 되고 오히려 내가 사라져야 돼요. 이런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면 그것이 예수 믿지 않게 되는 이유가 예수를 믿게 되면 그 매개성, 예수님의 중보자성이 나한테 살아 있어야 하는데 예수님을 믿게 되면 “예수님, 수고했습니다. 고맙습니다.” 하고 예수님을 돌려보내버리고 예수 믿는 나만 덜렁 남아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인터넷 고치는 기사입니까? TV고치고 난 뒤에 “감사합니다. 아저씨! 우리 집에서 같이 삽시다.” 이런 사람은 없잖아요. “이제 잘 나오지요? 나중에 우리 직원 아가씨가 서비스가 어떠했느냐고 묻거든 만점으로 잘 고쳤다고 이야기 좀 해주세요.” 하고 다른 집으로 가잖아요. 이게 뭐냐, 매개성, 중보자, 우리가 예수 믿는 순간 예수 믿는 내가 나의 믿음의 대체물이 되었지 정작 중보자 예수님은 사라져버린 거예요. 사람은 자기 일에만 몰두하는 성질이 있기에 예수 믿어도 예수님은 우리에게서 곧장 사라져버리는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바로 그 시험에서 떨어지면 안돼요. 그래서 13절에 보면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여기 벌써 언약이 나오지요.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라는 말을 했는데 이 말이 뭐냐 하면, “네가 구원받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언약이 언약대로 드러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이야기에요. 인간이란 존재는 인간 살리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언약을 살려내기 위해서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언약을 훼방하고 자기만 생각하는지를 대비시키기 위해서 있는 거예요.
다시 양치기 소년으로 돌아와서 늑대가 양치기 소년에게 세 번째 등장하는 이유는 양치기 소년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 늑대가 중요한 겁니다. 그것을 제가 외부성이라 했어요. 외부에서 오는 존재, 외부성이라고 한 거예요. 언약이라는 것은 인간이 타락하고 난 뒤에 언약, 생명나무에서 벌써 멀어졌습니다. 그래서 그 안에 갇혀 있는 우리는 우리 사는 것만 중요한 거예요. 지난 금요일에 의존교회에서 강의하면서 이렇게 했어요. “여러분은 지난번에 제가 강의한 제목을 기억하십니까? 여러분이 알다시피 사는 것이 우선이다, 라고 했지요?”
그 다음에 이어서 예수님의 강림의 의미가 뭐냐, 그것을 설명한다 했는데 지난달에 했던 그 사는 것이 우선이다, 그것을 다시 한 번 새겨드렸습니다. 사는 것 외에 무엇이 더 시급한 것이 있습니까? 다 살자고 하는 일이고 여기서도 살고 저기서도 살고 다 사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는 거예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내 사는 것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세상은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보는 거예요. 그러나 내가 사는 것과 관련이 없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내가 사는 것과 관련이 없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그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웬 늑대가 나타나서 우리를 물어 죽입니다. 그 늑대가 문 흔적, 이빨자국은 언약이 우리를 깨문 이빨자국이에요. 언약의 이빨자국, 그것을 십자가의 흔적이라고 합니다. “나는 제물이었습니다. 나는 주님에 의한 소제물이었습니다. 주님의 믿음은 나로 하여금 ‘내가 회개 했습니다 내가 전도했습니다, 내가 헌금했습니다, 내가 예배 참석 했습니다…….’ 하는 이 모든 것, 거기에 대해서 ”입 다물라! 그것도 언약이니라.“ 네가 무슨 일이 어떻게 꼬이고 안 되고 하더라도 그것은 바로 외부성에서, 다른 말로 하면 중보자가, 다른 말로 하면 나를 구원하는 매개자만 우리 안에 생생하게 살아있고 우리는 그냥 이 세상에서 기껏 입만 벌리는 거짓말만 하는 양치기 소년으로 남게 할 때 아무도 이 세상에서 천국으로 갈 수 없게 만드는 차단막을 형성하는 겁니다. 방화벽이죠.
아무도 침범하지 못하고 오직 택한 자에게만 주시기에 그것을 가지고 이후에 보면 ‘율법의 완성은 행함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선물,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고 선물이다.’ 이 말을 하기위해서 아브라함에게 그리고 다윗에게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않은 자, 일한 것도 없이 구원의 삼종세트,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않은 자, 일한 것도 없이, 하나님이 주신 행복을 그런 식으로 조합을 시킨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병을 고치고 기적을 베풀 때 주께서 하신 말씀이 나는 너를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요란스럽고 믿음의 능력처럼 보이는 모든 것들이 주님 보시기에는 악마의 일, 마귀의 일인 것을 저희들이 깨닫게 해주시고 정작 예수님만 우리를 가지고 드러내는 일이 지금도 쉴새 없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 우리의 하루하루 생활이 나의 생활이 아니고 주께서 만들어내시고 이끄시는 생활인 것을, 은혜만 은혜로 드러내는 생활인 것을 저희들이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