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의존교회130111a,b (사는 것이 우선)―이 근호 목사
서울 의존교회130111a,b (사는 것이 우선)―이 근호 목사
이름 : 김창길(IP:210.2.60.74)
서울 의존교회130111a (사는 것이 우선)―이 근호 목사
살후 1: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살후 1:2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여기에 보면 교회라는 단체가 나옵니다. 사도 바울이 편지를 할 때 모든 사람에게 편지 한 것이 아니고 교회라고 해당된 사람들에게 편지를 하지요. 그런데 교회라는 게 세상에 꼭 있어야 됩니까? 없어도 사는데 지장이 전혀 없지요. 교회가 없는 곳을 보니까 가슴이 답답하고 뭐 그렇습니까?
사도 바울이 사람을 볼 때에 차별되게 사람을 보는 겁니다. 교회이냐 아니면 교회 아니야 두고 차별을 두는 거죠. 사도 바울이 편지의 내용을 보면 사람 사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럼 사람 사는 것이 우선이 아니면 뭐가 우선인데요? 사람이 이 세상사는 게 우선이지 그것 말고 뭐가 중요한데? 사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 아닙니까? 돈 벌어서 사는 것, 장가가고 시집가고 취직해서 아파트사고 사는 것 그것만 하면 됐잖아요. 그것 필요하니까 하나님이 필요하지 그것 말고 무슨 하나님까지 뭐 필요합니까?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라고 할 때 사도 바울이 감안해서 생각한 것이 있어요. 무엇을 감안하느냐 하면 예수님이 다녀가시고 교회 생겼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이 다녀가실 때 곱게 다녀간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인데 하나님이 다녀갈 때 곱게 다녀간 게 아니고 사람들이 그 아들을 죽여서 없애 버렸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포도원 비유가 있는데 하나님께서 처음에 종들을 그냥 보냈어요. 때리고 다치게 했어요. 마지막에 아들을 보내니까 저 아들만 죽이면 이 포도원은 내 것이 된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머릿속에 생각한 게 뭐냐 하면 옛날에는 예수님이 계셨는데 지금은 예수님이 없고 교회가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계실 때 사람들이 예수님을 상당히 불신하고 안 믿었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죽여서 그냥 없애 버렸죠. 그러면 그것으로 일이 끝났나? 하는 문제에 대해 사도 바울은 끝나지 않았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특수한 존재로 이 땅에 오신 것처럼 이제 예수님이 떠나고 난 뒤에 이 땅에 또 다시 특수한 존재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교회라는 거예요. 그 교회에 편지를 하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이 사는 것이 우선이지 아침에 눈뜨면 할 것이 뭡니까? 아침에 눈뜨면 사랑하는 사람을 부릅니까? 아침에 눈뜨면서 시작하는 것이 사는 거예요. 저녁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가서 자고 잘 때 뭐라 합니까? ‘내일 일어나서 또 돈 벌어야지’그거 외에는 뭐가 있습니까? 사는 게 전부지 말 같은 소리를 해야지 사람이 사는 게 우선이고 돈 좀 여유 있고 시간 남으면 교회 부흥에 좀 가보고 하는 것이 그게 인간이 사는 거잖아요.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향하여 사도 바울이 편지하기를 너희에게 편지 하는데 너희들 사는 게 우선이지? 너희들은 딴 거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 생각하지 말고 밥 먹고 사는 거 우선이고 돈 버는 게 우선이지? 그 다음에 시간이 여유 있게 남거든 하나님을 섬기던지 놀러가던지 그것은 네 마음대로 하되 사는 게, 돈 버는 게 우선이라고 편지를 구구절절 그렇게 했습니까? 데살로니가 교인들이여 오늘도 얼마나 벌고 살았느냐? 그것을 편지 한 거예요? 그런 편지를 할 것 같으면 특수성이라는 게 없어요.
사도 바울은 말 합니다. 이 땅에서 아직도 예수님같이 교회가 있다는 것은 이것은 충격이라는 거예요. 이것은 놀라운 사실이라는 거예요. 왜냐 하면 사람들은 사는 게 우선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교회라는 게 애당초 그것은 없어도 될 문제이고 또 없어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뭔가 교회가 생겼다는 말은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믿는 사람이 생겼다는 말은 지금 예수님은 안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지금 활동하고 있다는 뜻이거든요.
예수님은 활동하고 있고 인간들은 밥 먹고 사는 게 우선이고 둘 중에 누가 이기는가 한번 보자 이 말이죠. 세상에 모든 사람들은 사는 게 우선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뒷전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활동 안 하고 있으면 그 말이 옳아요. 예수님이 활동을 하니까 분명히 사는 게 우선인데 사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하는 그런 고백을 하는 희한한 인간들이 등장하는 거예요. 그것도 데살로니가에요. 사도 바울은 분명히 안 믿을 것이라고 그냥 던져 봤는데 그것을 주워 먹고 믿는 사람들이 있더라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믿게 되면 어떤 상황에 빠지게 되느냐 하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세상이 어둠이 오고 혼돈이 오고 세상은 악하고 예수님만이 유일한 생명이라 하는 그 상황이 그대로 되풀이 돼서 반복되는 겁니다. 단순히 교회와 성도가 하나 있다고 끝이 아니고 성도가 하나가 등장하면 사람이 등장한 것이 아니고 성도를 성도되게 만드는 그 아우라, 그 환경, 그 영역, 그 힘, ‘사는 것이 우선이다.’ 이것은 모든 인간이 그렇게 봐요. 이것은 광야에서 예수님이 시험받을 때 이미 악마가 전략을 그렇게 꾸몄어요. 돌이 떡 되게 하는 것이 우선이다. 예수야! 정신 차려라! 배고프면서 무슨 짓을 해! 우선 돌이 떡 되게 해 놓고 먹고 보지 사람은 다 살자고 하는 짓인데 라고 했던 그것을 시험이라 하는데 예수님에게는 시험이 될지 모르지만 우리한테는 그것은 생활입니다.
그게 왜 시험입니까? 그것은 당연한 이야기지요. 김연아 보고 김연아야 너는 피겨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중요해 하면 이런 소리는 이런 소리는 김연아 보고 이런 하는 소리가 아니에요. 김연아야 피겨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어! 세상에 세계선수권 앞두고 무슨 소리를 하고 있어요? 애들이 내일 시험 치는데 아들아! 딸아! 시험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 이런 소리해서 시험 망칠일 있습니까? 엄마 핑계 데고 나 엄마 때문에 공부하나도 못해서 시험 못 쳤다. 이런 핑계를 만들 작정이에요? 기도 빡세게 해서 좋은 점수 받도록 기도해라 네 맘 때는 시험 잘치고 공부 잘하는 게 최고다! 이게 바로 상식이고 생활이 되는 겁니다.
시험 치면 뭐하겠노? 시험 잘 쳤다고 인기 있다고 출세했다고 소고기 사먹겠지. 그래서 시험 잘치고 출세해서 취직했다, 취직하면 뭐 하겠노? 돌이 떡 되게 하고 사람들에게 인기 얻고 부러움을 얻고 그래서 세상부귀영화를 차지하는 것 아닙니까? 문재인 후보가 하나님, 떨어지게 해서 감사합니다. 하는 문재인 후보 같으면 문제 있지도 않아요. 안 문제에요. 내가 여자한테 지다니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사도 바울은 편지 하는 대상이 누구냐 하면 사는 것도 우선이 아니고 돈 버는 것도 우선이 아니고 세상의 명예도 우선이 아니고 인기 얻는 것도 우선이 아니고 공부 잘하는 것도 우선이 아니고 성도 본인조차도 내가 왜 이렇게 사는가! 놀라는 어떤 새로운 영역이 예수님에 의해서 새롭게 조성된 겁니다. 새로 조성되면서 이 안에서 예수님이 증거 했던 그 복음의 소식이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있다 말입니다. 복음이 살아있는 것이 우선이라는 겁니다.
쓴 약은 캡슐에 담잖아요. 캡슐이 예쁩니다. 애들이 가지고 놀만도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빤질빤질한 캡슐을 가지고 손에 가지고 놀아도 손에 묻어도 감기가 걸렸을 때는 아무 효과가 없잖아요. 그것을 깨뜨리고 그 안에 담겨있는 365개의 알약을 집어넣어야 감기가 낫잖아요. 이 복음이라는 것을 가지고 놀 것이 아니고 복음을 터뜨려 버리면 복음 안에 있던 예수님의 모든 취지가 성도 안에, 교회 안에 그대로 흘러들어 옵니다. 흘러들어오면 예수님이 제자를 뽑았던 것처럼 예수님이 이 교회를 붙드는 이상은 새로운 교회가 예수님의 복음의 근거지로서 작동을 가동을 시작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세상은 사는 것이 우선이라는 취지에서 누가 죽었는가? 예수님이 죽었거든요. 죽었던 예수님이 부활 하셔서 복음의 능력으로 다시 찾아온 곳이 바로 교회이고 성도라면 성도의 삶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싸웠던 그 싸움을 지속적으로 되풀이 돼서 반복돼서 이 시대에 싸우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본인이 원해서가 아닙니다. 본인은 계속해서 사는 것이 우선이고 싶어 해요. 그게 자기 육의 본성에 맞으니까 또 나는 그렇게 되고 싶으니까 사람들 특이하게 산다는 것은 불편한 일입니다. 그냥 무리들 속에 섞여서 눈치 못 채게 밭에 뭉쳐놔서 큰 강에 진흙탕 흘러가듯이 그냥 눈에 안 띄게 흘러가면 그게 속이 제일 편해요. 꼭 집어서 어이 라고 한다면 그것은 실제로 부담되는 겁니다. 경찰관이 길을 가다가 많은 그 사람 가운데 어이 거기 아저씨 봅시다. 하면 괜히 쫄립니다. 아니 나? 이럽니다. 아니 아저씨! 아니 내가 뭘 잘못했는데? 이렇게 나온다 말입니다.
‘택하여 너를 지목하여 세웠나니’이것은 예수님이 옛날 제자들에게 했던 그 멘트들을 그대로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에게 지적해 버립니다. 그러면 이 성도는 세상적으로 가고 싶어도 자기 멋대로 주님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팔자가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으로 살지만 성도는 뭐로 사느냐? 안 살아요. 못 살아요. 사는 게 아닙니다. 말씀으로 산다. 은혜로 산다 하는 게 아닙니다. 그냥 죽지요. 뭘 살아요? 돈으로 살고 떡으로 사는 방식으로 사는 방법은 없어요. 말씀으로 죽고 복음으로 그냥 죽어가고 있는 겁니다. 살 생각은 하지 말아야 돼요. 왜 그러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살려고 오신분이 아니고 떠나기 위해서 오셨거든요. 떠나기 위한 능력이 이 사람에게 임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예수님의 곳에 합류기 위해서 이곳을 후다닥 떠나는 겁니다.
떠날 때 그냥 곱게 조용하게 못 떠나게 만들어요. 어디 부딪끼게 만드는데 그게 뭐냐 하면 여기 6절에 봅시다.
살후 1:6 너희로 환난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살후 1:7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어느 동네에 성도가 있다. 누구 집에 성도가 있다는 말은 착하다, 바르게 산다, 훌륭하다, 빈틈이 없이 예의가 바르다, 예절 바르다, 많은 사람을 구제한다, 그게 성도의 모습이 아닙니다. 윤리 도덕이 성도의 표시가 아니에요. 성도의 표시는 환란 받고 고난 받는 겁니다. 그것도 사기 쳐서 고난 받는 게 아니고 복음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 이것이 유일한 성도의 표시가 되는 겁니다. 제가 여기서 유일한이라고 말하는 것은 뭔가 있어요. 고린도후서 11장 12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나오는데 저 사람들은 사도가 아니다. 너희들은 주의해라 저 사람들은 사기꾼 악마의 졸개야 너희는 마귀를 아예 교회에 당회장으로 모셔놨어! 저 생각사람이 전 하는 복음은 복음이 아니고 다른 복음이고 저 사람이 말하는 성령은 성령도 아니고 다른 영이고 저 사람이 말하는 예수는 예수가 아니고 가짜 예수다. 나, 사도는 진짜 사도인데 이유가 뭐냐 하면 나는 복음으로 고난 받기 때문이다. 간단한 문제에요. 그런데 저 사람은 고난으로 자기 돈 벌고 밥 먹고 살려고 시도하고 있다 말이죠.
우리를 살리는 게 목사 살리고 집사 살리는 게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은 예수님과 더불어 늘 죽어 가는 것에 대해서 영광스럽게 생각하라는 게 복음입니다. 죽어 가고 있으면서 아이고 신난다. 이러한 희한한 고백을 내 뱉을 수 있을 때 그것은 인간의 능력이 아니고 예수님이 주신 십자가의 능력이 임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아이 좋아 내가 어서 주님 앞에 갈 수 있다니 아이 좋아’그렇게 되는 거예요.
제가 새해를 맞이해서 십자가마을에 덕담을 썼지요. 새해 저주 많이 받으세요. 그렇게 하니까 댓글에 목사님도 저주 많이 받으세요. 이렇게 썼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