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강-에스겔10장 9-14(천사의 모양새)130206-이 근호목사
26강-에스겔10장 9-14(천사의 모양새)130206-이 근호목사
이름 : 오용익(IP:183.105.212.7)
26강-에스겔10장 9-14(천사의 모양새)130206-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10장 9절에서 14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62페이지입니다.
에스겔 10:9-14
“내가 보니 그룹들 곁에 네 바퀴가 있는데 이 그룹 곁에도 한 바퀴가 있고 저 그룹 곁에도 한 바퀴가 있으며 그 바퀴 모양은 황옥 같으며 그 모양은 넷이 한결 같은데 마치 바퀴 안에 바퀴가 있는것 같으며 그룹들이 행할 때에는 사방으로 향한 대로 돌이키지 않고 행하되 돌이키지 않고 그 머리 향한 곳으로 행하며 그 온 몸과 등과 손과 날개와 바퀴 곧 네 그룹의 바퀴의 둘레에 다 눈이 가득하더라 내가 들으니 그 바퀴들을 도는 것이라 칭하며 그룹들은 각기 네 면이 있는데 첫 면은 그룹의 얼굴이요 둘째 면은 사람의 얼굴이요 세째는 사자의 얼굴이요 네째는 독수리의 얼굴이더라.”
성경을 보면서 유교나 불교의 경전처럼 자기가 지킬 수 있는 내용의 문장들이 나오기를 은근히 기대하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종이 듣겠나이다.’ 하는 식으로 말씀을 지켜서 구원되어 보겠다는 사람에게는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는 난감하기 짝이 없습니다. 뭘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우리보고 뭘 시키면 하겠는데 여기 나와 있는 에스겔 10장 9절에서 14절은 뭘 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뭘 하라는 것이 없잖아요. 그러면 교회 목사님들은 교인들 보고 뭘 많이 시키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니 이것을 하세요.’라는 그것이 원천인지 아니면 뭘 하라는 것이 하나도 없고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일합니다, 그것이 원천인지 어느 쪽이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서 가장 원형을 보여주는 것인지, 이것부터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는 뭘 시키는 대로 할 마음의 준비가 다 되어 있는데 정작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은 시키는 것이 아니고 우리 인간이 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이 친히 이렇게 일을 하신다, 이렇게 나와요. 그러면 그것을 보고 우리는 어쩌라고? 거기에 대한 성경의 답변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일을 하시는 그 여파가 지금 네가 나라고 하는 그것을 만들어 냈다고 하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현재 형성되어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지시하면 그 지시를 듣고 뭔가 내 쪽에서 실천에 옮기고 말씀을 생활화해서 반듯하게 살게 되면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이 “음, 나에게 영광이 되는구나. 참 착하구나. 내가 복을 줄게.” 이런 식의 종교패턴에 익숙해지고 사회에서도 뭔가 주면 받는 것이 있다는 식으로 하는데 내가 뭔가 움직이고 숨 쉬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도한대로 움직이고 있다고 했을 때 우리 쪽에서 새삼스럽게 내가 뭘 한다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이 하는 일을 훼방하는 식이 되어버립니다.
하나님은 일 따로 하고 나는 내 일 따로 해서 중간 쯤 해서 맞춰서 합당하면 복주고 합당하지 않는다면 벌을 주는 식, 하나님께서 그런 식으로 일을 하시냐는 말이지요. 오늘 본문의 경우에는 그것 때문에 성전이 불타고 망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성전 만드는 것을 허락했을 때는 숨겨져 있는 원래 하나님의 뜻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오해했어요. 성전을 짓고 그 성전을 유지하고 보수하고 지탱하고 있으면 그 성전이 있는 한 계속해서 복은 끊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오해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성전을 허락하고 그 성전은 파괴되어야 할 성전으로 일처리를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열두 제자를 택하여 제자 삼았습니다. 제자 삼아서 베드로에게 신앙 고백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제가 있는 한 주께서 고난 받는다든지 죽는 것을 제가 막겠습니다.’(마 16:22) 하는 식으로 나오니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우리가 이 말을 들으면 그런 말까지 하실 것이면 애초부터 베드로를 제자로 삼지 말아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지요.
그런데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해서 예수님한테 그런 소리를 들어야 되는 대상으로 삼으시면서 기어이 그 베드로에게 일을 시키고 기어이 천국으로 구원해 내십니다. 그렇게 되면 그 와중에 뭐가 빠지게 되느냐, 내가 열심히 잘 섬기고 내가 하나님 일을 잘 했기에 구원 받았습니다, 하는 그 요소는 깡그리 빠지게 되는 거지요. 예수님께 베드로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1-32)
이것이 단순히 독려차원이 아니고 실제로 그렇습니다. 베드로가 그러하면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기도하는 그 기도발의 효과에 대해서 신경 쓰는데 지금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는 그 효과에 대해서는 우리가 내가 기도한다는 이유 때문에 안 믿는 경우가 굉장히 많아요. 주님께서 지금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게 되면 주님의 기도의 효과와 우리 자신이 드린 기도와 한번 경쟁해 보자는 말이지요. 누구 기도의 응답으로 우리가 구원되는지. 사람이 자기 기도를 열심히 해서 구원받아 버리면 이것은 예수님의 증인이 아니고 자기 잘남의 증인 되어버려요.
방금 이야기한 것이 뭐냐, 신약시대의 이야기라면 신약시대에 예수님이 하신 그 원리가 이미 구약부터 있더라는 그 말이지요. 구약의 에스겔 10장 오늘 본문에 그것이 나와 있거든요. 오늘 본문 19절에 보면 “그룹들이 날개를 들고 내 목전에 땅에서 올라가는데 그들이 나갈 때에 바퀴도 그 곁에서 함께 하더라 그들이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는 동문에 머물고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그 위에 덮였더라.”라고 되어 있어요. 성전에 있어야 될 하나님의 영광이 어디로 옮기느냐 하면 방금 이야기한 하늘나라 보좌, 천사들이 있는 보좌로 하나님의 영광이 옮겨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단도직입적으로 오늘 본문이 의미하는 것이 뭐냐, 이렇게 물으신다면 간단하게 하는 답변은 이겁니다. 하나님의 보좌는 이 땅에서 움직이더라는 말이지요. 그 움직인다는 증거가 뭐냐, “내가 보니 그룹들 곁에 네 바퀴가 있는데.” 바퀴가 있다는 거예요. 바퀴가 하나의 조각품처럼 다듬어놓은 바퀴인가, 아니면 제 기능을 발휘하는 바퀴인가가 중요하겠지요. 그 뒤에 11절에 보면 “그룹들이 행할 때에는 사방으로 향한 대로 돌이키지 않고 행하되 .” 지시가 떨어지면 지시한 그 방향으로 곧게 나아가더라는 말이지요. “그룹들의 날개 밑에 사람의 손 같은 것이 나타났더라.” 이 그룹들을 조종하는 숨어 있는, 그룹들과 그룹들 사이에서 본체는 안보이고 손만 보이는데, 인간신체 전체는 안 보이고 사람 손 같은 것이 나와서 바퀴를 구동시키고 바퀴의 방향을 정하고 목표를 정하고 일을 지시하고 추진하는 이 모든 조종기능을 하는 기관이 바퀴뭉치 틈 사이에 있는 거예요.
하늘나라 보좌 같으면 하늘나라에 있어야 될 보좌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게 땅에 내려왔어요. 땅에 내려오면서 무엇과 교체가 되느냐하면, 지상에 있는 인간들이 지었던 성전과 교체가 돼요. 그걸 달리 이야기하면 하나님의 보좌가 이 땅에 와서 움직인다는 말은 지상의 보좌는 이제는 없어져야 되고 파괴되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보좌가 하는 기능은 뭐냐, 성전파괴에요. 성전을 부숴버리는 겁니다. 지금 이 계시가 떨어진 때가 BC 591년, 서서히 성전이 다 불타기 6년 전이에요.
성전이 불타면 인간들 입장에서는 어떻게 되느냐하면, 하나님과 인간이 유일하게 통하는 장소, 유일하게 연결된 장소, 인간이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면 다른 장소에 가서는 안 되고 성전에 있을 때만 하나님의 복이 내려온다는데 그 복이 내려오는 지정된 장소가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없어진다면 복은 어디서 받습니까? 복을 준다는 말입니까, 안준다는 말입니까? 모세가 시내 산에서 돌판 갖고 왔습니다. 백성들은 기다렸어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으니 이제는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복된 관계로 이어질 것이라고 지레짐작을 했지요.
그런데 막상 40일 후에 모세가 내려올 때는 하나님의 돌판을 가져왔지만 그 돌판은 깨어졌습니다. 복은 없는 거예요 괜히 김칫국만 마신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났다는 것은 무슨 의미냐, 복 줄게, 가 아닙니다. 너희는 복 받을 자격도 없는 것이 복을 달라고 했으니 그 자격 없는 너희를 정죄하고 파괴하겠다는 겁니다. 그 복을 저주로 바꾸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지상에 나타나신 거예요. 죄 지어 놓고 복을 기대한다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두었을 때 인간은 선과 악을 알기 위해서 따먹으려고 덤벼들었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열매는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선악에 대해서 내가 모른다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선악에 대해서 알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알 필요가 없어야 되는데 그들은 선악에 대해서 하나가 되었으니 하나님 쪽에서의 조치가 필요한데 선과 악을 안다는 그 자체를 죄라고 규정할 수밖에 없어요. 죄라는 것이 거기서 나온 겁니다. 선이 무엇이냐, 악이 무엇이냐를 제대로 해 보라는 것이 아니라 선악을 알게 된 그 자체,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그 자체가 죄가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인간들은 반발했지요. 반발하면서 자기 나름대로 천국의 관계를 이어보겠다는 모든 시도가 나왔고 그것이 성전이었고 그 성전을 하나님이 허락해놓고 오늘 본문에서 그것을 부수고 깨버리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성전을 깨기 위해서 왔던 하나님의 보좌, 이 지상에 나타난 천하들의 집합으로서의 기능은 어떤 식으로 지상의 성전을 깨는가? 어떤 기능을 발휘하느냐는 이 본문의 내용에 나오는 여러 가지의 사실들을 통해서 밝혀집니다. 13절에 보면 “내가 들으니 그 바퀴들을 도는 것이라 칭하며.”
여기서 다시 한 번 설교 처음으로 돌아가서 정리하고 이 부분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처음에 뭐라고 했느냐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를 마음 준비가 되어 있어요. 지시만 하면 내가 실천에 옮겨서 복을 따내겠다는 마음 준비가 되어 있는데 막상 성경을 펼쳐보면 가장 원리적이고 원천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이 이 땅에서 어떤 짓을 하든지 간에, 선에 대해서 혹은 악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행동을 하든지 간에 세상 모든 일은 하나님 쪽에서 실시해서 그냥 결과로서 주어질 뿐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자는 말입니다. 시켜만 주시면 종이 듣겠나이다, 하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나름대로 하시는 일이 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이 땅에서 구원을 받는다든지 못 받는다든지, 천국을 간다든지 지옥을 간다든지 하는 이것은 우리가 하기 나름이 아니라 하나님 하기 나름이고 하나님 하신 일의 결과, 여파로 인하여 그 결과가 나온 겁니다. 우리는 어떻게 행하자, 하는 것보다도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어떤 일을 하십니까, 에 더 관심을 가지고 주목해야 돼요. 그리고 그것을 믿어야 되지요. 그래서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겁니다. 그러면 어떤 일을 하시는가? 13절에 보니까 “내가 들으니 그 바퀴들을 도는 것이라 칭하며.”라고 되어 있지요.
바퀴가 돈다는 겁니다. 바퀴의 기능이 두 가지가 나와 있어요. 하나는 도는 것이고 하나는 행하는 겁니다. 바퀴가 본래 돌게 되어 있지요. “그 바퀴들을 도는 것이라 칭하며.”라고 한 것은 돌아라, 하고 명령한다는 뜻이에요. “바퀴야 돌아라!” 8절에 봅시다. 그룹들의 날개 밑에서 사람 손이 나왔지요. 신체 전체는 나오지 않고 그냥 사람 손만 나왔습니다. 이 손만 나와서 추동력과 가동력이 있어서 천사들의 뭉치로 되어 있는 하나님의 보좌를 세상에서 활동을 시킵니다. “바퀴들아, 굴러가라.” 그리고 10절에서는 행하라고 지시했지요. 10절에서는 행하라고 지시했고 13절에서는 돌아야 된다는 겁니다.
바퀴들이 도는데 이 바퀴들은 어디에 박혀 있는 바퀴인가, 천사들에게 박혀 있는 바퀴입니다. 천사들은 바퀴에 의해서 움직이게 되어 있다는 뜻이에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것은 천사들에 관한 것인데 그것보다도 우리 인간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가 궁금하지 천사들이 어떻게 하는 그것이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방금 우리가 보았던 성경 본문은 지금 깨어질 하나님의 성전을 대치하는 성전입니다. 따라서 그 성전에 하나님의 능력이 작용하게 되면 여기 있는 그룹들, 천사들은 쉬지도 않고 부지런히 계속해서 돌아간다는 거예요. 앞으로 질러가기도 하고 돌아가기도 하고.
성경 본문 찾아보면 무슨 뜻인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8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여기에 보면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은 본인이 어디로 가야할지 어떤 땅에 가야할지 본인이 정하지를 않았어요. 아브라함은 사람 아닙니까? 우리 같은 사람이거든요. 신년계획이 있을 것이고 자기 포부가 있을 것이고 꿈을 가질 만 하다 그 말이지요. 그런데 성경에 보니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자기 계획, 목적성, 희망, 기대 다 접게 한 것이 뭐냐, 믿음이라는 말을 해요.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그랬다는 거지요. 믿음이라는 것이 아브라함을 가동시키고 움직이게 만드는 힘으로 작용하는 거예요. 믿음이라는 것이 생김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이 믿음을 가지는 것이 아니에요. 믿음이라는 것이 아브라함을 다루고 세상에 활동을 시킨 겁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믿음대로 살고 마무리가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이 나에게 믿음을 주셔서 믿음이 나를 이끌었고 일을 시켰고 결국 믿음을 주신 분이 나를 마중 나오고 믿음 주신 분을 내가 만나게 되고 그 분의 나라에 영원히 함께 살게 됩니다.” 라는 거지요.
곶감이 있지요. 옛날 곶감은 곶감과 곶감 사이에 꼬챙이가 꽂혀 있거든요. 곶감이 열 개가 있으면 꼬챙이가 연결시키듯이 아브라함의 하루하루, 아브라함의 한 달 한 달이 아브라함 본인이 결정하고 목적하는 것이 아니고 꼬챙이가 있는 거예요. 그 믿음이라는 꼬챙이죠. 옛날 식인종들이 사람 꼬챙이로 꽂아서 바비큐하는 것처럼 아브라함은 믿음을 주신 분에 의해서 양쪽으로 달랑달랑 들려서 자기가 원치도 않는, 자기가 갈 바를 모르는 곳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거예요. 이것이 오늘 본문에 보면 이것을 인간에게 적용시키기 이전에 이미 구약에서 하나님이 천사들을 그런 식으로 부리고 계신 겁니다.
천사들을 부릴 때 여기서 바퀴라고 했잖아요. 바퀴는 도는 것이니까 천사들은 도는데 행하기는 앞으로 행하고 뒤로 돌이키지 않았다고 하지요. 천사들이 뒤로 돌이키지 않는 것은 바퀴가 그렇게 작용해서 그런 거예요. 천사들은 어떤 의미에서 바퀴위에서 항상 같은 일을 되풀이하는 반복적인 행동, 반복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거예요. 천사 나름대로 “옛날에 그거 다 해 봤습니다. 이제는 그런 일 하니 지겹고 다른 하고 싶습니다.”라고 생각하는 그것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르는 천사의 모습이 아니에요. 어제도 했던 일을 오늘도 하고 오늘 했던 일을 내일도 하고 내일 했던 일 모레도 하고 계속 똑같은 일을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신, 하나님의 능력이 임한 천사는.
그리고 그 자리가 성전을 대치하는 새로운 성전의 모양새로 하나님의 보좌가 거기에 계시는 겁니다. 성전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보좌가 계시는 곳이에요. 간단하게 생각합시다. 하나님의 성전이 뭐냐, 하나님의 보좌가 계신 곳이 성전입니다. 그러면 그 성전은 뭐다? 천사들을 부린다. 어떻게? 같은 일을 반복시키되 시키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왜, 그들은 바퀴 위에서 노니까. 그러면 제가 이렇게 하면 “목사님, 그것은 천사들이나 해당될 일이지 지금 우리한테는 그렇게 일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게 나온다 그 말이지요.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고린도후서 6장 16절에 나오는 그 말씀과 연결시킬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인간이 만든 부동산, 인간이 벽돌로 지은 성전, 인간이 만든 건물 구조물은 고정된 것이거든요. 고정된 것인데 이동하는 성전이 등장했습니다. 그 성전에는 하나님의 보좌가 계시고.
하나님의 새시대의 성전은 뭐냐, 고정된 것이 아니고 이동하는 것인데 그냥 자기 맘대로 이동하면 안되고 주께서 시키는 일이 가동되어서 주께서 원하는 뜻과 목적에 맞추어서 매일같이 되풀이해서 똑같은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천사들이 어떤 생활을 똑같이 했는가? 그게 고린도후서 6장에 보면 오늘날 성도들에게 마찬가지입니다. 고린도후서 6장 15절과 16절을 보면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성도가 매일같이 똑같이 되풀이해서 해야 될 일이 뭐냐? 오늘은 치킨 집, 내일은 피자집, 모레는 부동산중개업, 그 다음엔 공무원, 그 다음엔 백수, 다시 공장취직, 이런 식입니까? 의대 다니다가 법대, 법대 그만두고 장사하고, 그런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겠어요? 하나님의 뜻은 외형적으로 직업이 뭐냐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이 반복해서 우리 속에서 터져 나오는데 그게 뭐냐, 오늘 에스겔 10장 14절에 나옵니다. “그룹들은 각기 네 면이 있는데 첫 면은 그룹의 얼굴이요 둘째 면은 사람의 얼굴이요 세째는 사자의 얼굴이요 네째는 독수리의 얼굴이더라.”
얼굴이 등장하는데 얼굴이 네 면이 있어요. 그런데 네 면의 얼굴이 다 차이가 나요. 이 차이나는 그룹들이 자기 얼굴형을 유지하면서 바퀴위에서 매일같이 되풀이하라는 하나님의 지시와 명령을 전달받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사람들이 하듯이 노조나 계모임을 조직해서 “우리가 단합하자.”라고 할 수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지시한 천사들, 사자 같은 얼굴을 한 천사도 있고 독수리얼굴을 한 천사도 있는데 이것들이 서로 “내일은 내가 사자할게 네가 독수리 얼굴 해라.”이렇게 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이 천사들은 자체적인 자기 동질성을 만들어 낼 입장이 못 됩니다.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현재 성전이 불타고 무너질 때 왜 성전이 불타고 무너졌는가?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성전에서 관리하고 예배하는 그 집단이 스스로 자기 동질성에 빠진 겁니다. 이 성전은 내 것이다, 이렇게 성전 앞에 나를 붙였어요. 그냥 성전이 아니고 나의 성전, 또는 우리들의 성전이라고. 이렇게 붙이면 그것은 딱딱해집니다. 그리고 자기가 자기에게 지시를 내리게 돼요. 내 가정이다, 내 교회다, 내 직장이다, 내 자식이다, 내 아들이다, 내 남편이다, 내가 들어가 버리면 그 상황은 이제부터 자기가 지시를 내리게 돼요.
자기가 지시를 내리게 되면 그 상황의 미래와 목적은 자기가 꿈꾸고 자기가 생각했던 그것을 고집하고 우기게 됩니다. “하나님이여, 이 식대로만 해 주신다면 하나님을 섭섭지 않게 해 드리겠습니다. 헌금 듬뿍 해드릴 용의가 되어 있습니다. 열심히 기도할 테니 이 식대로 되게 해 주옵소서.”라고 하나님한테 요구하면서 그러면서 하는 말이 “저는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 맞잖아요.” 하고 나오는 거예요. 그러한 인식이 에스겔 당시에 이스라엘 성전이 불타버려야 될 이유가 된 겁니다.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움직인다는 말은 움직임 속에 사자 얼굴, 사람 얼굴, 독수리 얼굴을 한 그룹들을 파견시켜놓은 것은 교체하기 위해서 들어갔고 교체하기 위해서 들어갔다는 말은 정죄 받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사자, 독수리, 이것들은 뭐냐? 12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 온 몸과 등과 손과 날개와 바퀴 곧 네 그룹의 바퀴의 둘레에 다 눈이 가득하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온 천지에 눈을 실어 나르는 거예요. 눈, 시선, 이것은 관찰이고 탐색이고 찾아내는 기능, 감시하는 것이고 수색하는 겁니다.
경찰수사대가 출동하는 것과 같습니다. 요한복음 16장에 이 기능에 대해서 이렇게 되어 있어요. 성령이 오게 되면 특징이 뭐냐, 7절, 8절에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사실은 고정되어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나름대로의 변화를 추구합니다. 그런데 고정된 것에 묶이지 않고 날마다 다양하게 변화를 주고 계속해서 변하는 그 인간 손의 바깥에 있는 진짜 보좌, 성전이 와서 침공하고 격돌하고 부딪히게 되면 인간이 나름대로 생각했던 그 모든 변화라는 것은 인간 바깥의 움직이는 그 성전 입장에서는 하나의 고정된 성전에 불과한 거예요.
고정되었다는 말은 한계가 있다, 가두어져 있다, 갇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성전에다가 자기의 뜻을 부여하고 자기의 소망, 욕망, 욕구를 부여하다 보니 “하나님이여, 내가 주인공으로 있는 이 성전은 하나님이 잘 되게 해주시되 절대 다치지 않게 해 달라.” 이렇게 되어버려요. 그러면 그것을 가지고 성전이고 교회냐 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2장 13절에 보면 ‘사단의 위’라는 말이 나와요. 12절부터 보면,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일곱 교회는 항상 이렇게 검을 가진 천사가 등장해요. 심판입니다.
거기에 사단의 위가 있는데 거기서 안디바라는 사람이 순교를 당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여기 보면 사단의 위라는 것이 고정적이에요. 이것은 세상 끝 날까지 있어야 된다고 우기게 만드는 그 자리가 있다는 말이지요. 그것이 아까 이야기한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했어요.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내가 이곳에 왜 왔지? 갈대아 우르(오늘날의 이란)에서 살던 내가 이 동네(지금의 예루살렘 근처)에 왜 왔지?’
이것은 자기 뜻도 아니고 자기 포부도 아니고 자기 소망도 아니에요. 그냥 믿음으로 온 겁니다. 믿음으로 왔으면 믿음의 목적은 뭐냐? 믿음의 목적은 내가 정한 것이 아니지요. 나를 파견하고 부리시는 그 분의 목적은 따로 있어요. 그 분의 목적은 뭐냐, “네가 어디 가든지 어떤 직업을 같든지 직업이 있든 없든 간에 너는 하나님이 거하는 거룩한 성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전이”라는 드러내는 식으로 되풀이해서 다루어지고 바퀴위에서 어딜 가든지 거길 가서 또 되풀이해서 “나는 파괴되어야 될 죄인이고 이런 죄인에게 주께서 성령이 함께 하사 거룩한 성전 되게 하신 것은 내 공로가 아니고 내 기도발이 아니라 주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하는 것을 날마다 증거 하면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움직이는 성전이 되는 거예요.
건축 구조물의 성전 개념이 움직이는 기계처럼 돌아가는 천사의 보좌가 등장함으로써 신약에서 무엇으로 바뀌는가하면, 인간자체가 기계처럼 움직이는 성전의 기능으로 전환시키는 시대가 온다는 겁니다. 어디서 뭘 하든지, 사도바울의 고백대로 하면, 무엇을 먹든지, 무엇을 마시든지, 심지어 죽든지 살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는 다루어집니다. 따라서 우리 스스로 내가 죄다 죄 아니다, 를 판정내리는 이것은 파괴되어야 될 성전에서나 통하는 원리입니다. 내가 나름대로의 계획과 목적을 갖고 있는 그것이 파괴되어야 될 옛날 육적인 속성이에요.
사람이 계획과 목적을 갖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마귀에게 시달리게 됩니다. “네 목적을 위해서 기도 얼마나 했어? 그렇게 기도해서는 올해 소망한 것 다 안 돼. 그렇게 게을러서 무슨 소망이 이루어지겠니? 너 믿음 좋아? 안 좋지. 믿음도 안 좋으면서 소원 이루어지기를 기대해? 믿음이 좋도록 신앙생활 잘 해야 하나님께서 네 소원 들어주지.” 이런 식으로 계속 시달리게 돼요. 이런 식으로 자기 성전을 자기가 관리하는 것, 이것은 파괴되어야 될 성전입니다. 우리는 천사처럼만 되면, 우리는 무익한 종으로만 살면, 그리고 우리를 할 바를 했을 뿐입니다. 우리가 갈 바, 우리가 어떻게 되는 것, 그것은 우리 소관이 아닙니다. 이미 성경에 나와 있어요. 마지막은 천국이라고.
천국 가는데 이렇게 가든 저렇게 가든 그것은 우리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고 주께서 기어이…… 강도가 되게 하든지 거지 나사로가 되게 하든지 창기가 되게 하든지 결국 주께서 그렇게 다루실 겁니다. 내 교회, 내 교회 때문에 교회가 망하고 이것은 내 집안, 내 식구라는 그것 때문에 그것이 식구를 힘들게 하고 이것은 내 인생이라는 생각이 바로 내 인생을 힘들게 만들었고 이것은 내 자식이니까 내 뜻대로 한다는 그것이 자식을 더 괴롭혔고, 있는 것은 종교적인 가식과 위선과 경건으로서 뭔가 획득하겠다는 무당적인 사고방식, 그런 것들만 장식처럼 덕지덕지 붙어서 남아 있었던 거예요.
하나님의 성령이 오게 되면 눈이 온통 달린, 눈이 천만 개 달린 성령이 오게 되면 어떤 때는 사자같이, 어떤 때는 사람같이, 어떤 때는 독수리같이, 초월적인 천사같이 와서 우리의 죄를 낱낱이 들춰내면서 “내가 너를 파괴함으로 매일같이 너를 새로운 성전으로 전환시키는 작업이 오늘도 끊이지 않고 이루어진다.”는 것, 반복적인 겁니다. 매일 같이 우리는 주님을 훼방하는 죄인에 불과하다는 것을 오늘도 깨닫고 내일도 깨닫고, 그 반복적인 행위가 오늘 본문의 천사가 하는 행위와 똑같은 거예요.
달려 있는 그 수많은 눈앞에 하나하나 우리는 노출시켜서 우리는 항상 깨어져야 되지만 그 깨어지고 세워지는 작업에 우리를 초대하고 참여시켜주신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해야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주인은 우리가 아닌데 마치 내가 나의 주인인 것처럼, 내 인생의 주인공인 것처럼, 내 역사의 주체인 것처럼 그렇게 고집을 부렸습니다. 마리아가 난데없이 임신한 것처럼, 아브라함이 난데없이 고향을 떠난 것처럼 주께서 우리를 다루어주셔서 우리의 소망은 접고 주님의 뜻과 소망만 우리를 통해서 드러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26강-에스겔10장 9-14(천사의 모양새)130206-이 근호목사.hwp (64.0K), Down: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