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201a 울산강의-출애굽기 25장 : 흔적
20130201a 울산강의-출애굽기 25장 : 흔적
이름 : 한윤범(IP:14.39.134.60)
20130201a 울산강의-출애굽기 25장 : 흔적
(강의:이근호) 목사
출애굽기 25장 19절, 20절, 21절 할 차례입니다. 제가 읽어볼게요. “한 그룹은 이 끝에, 한 그룹은 저 끝에 곧 속죄소 두 끝에 속죄소와 한 덩이로 연하게 할지며 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 이렇게 돼있지요.
현대그룹 또는 삼성그룹이 이 그룹들이 그룹을 알겠습니까? 여기 나와 있는 그룹은 천사를 두고 이야기하거든요. 대기업이 또는 중소기업이 여기 있는 그룹들을 모른다면 인생 헛 산 겁니다. 속죄소가 여러분들이 아시겠지만 오늘은 본격적으로 속죄소, 이게 무엇이냐를 살펴봐야 됩니다.
옛날 어른들이 이런 말을 해요. 말조심해라. [말이 씨가 된다.] 이 말을 정리를 해보면, 지금 내가 내뱉는 말이 나의 미래의 운명을 결정짓는다는 그런 뜻입니다. 장래가 어떻게 될 이냐는 그 문제는, 지금 내가 말을 조심스럽게 해서 괜찮게 하게 되면 그것이 나중에 내 운명을 결정짓는다고 하는 거예요. 지금 내가 말을 괜찮게 하고 좋게 했다면 나의 장래도 내가 말한 것에 대해서 좋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된다는 어떤 논리적인 과학적인 증거가 있습니까? 없지요. 어린애에게 “너, 커서 뭐될래?” “대통령.” 대통령 되려면 순서 기다려야 돼요. 오늘 2학년 1반 대통령 될 아이 다 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2학년 2반. 2학년 4반 애 대통령 되려면 평생 기다려도 못 돼요. 실제로 말이 씨가 된 증거가 없습니다.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 진짜 확실한 진리라면 한두 번 성공해서는 안 되고요. 실패할 경우가 없어져야 돼요. 말을 이렇게 했는데 다른 결과가 나왔다. 이런 경우가 있으면 그건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백조가 하얗다. 이게 진리가 되려면 백조 백 마리 잡아서 다 봐야 돼요. 이름이 백조 아닙니까? 하얀 새니까 하얀 새 가운데서 검은 백조 봤습니까? 영화에는 있어요. [블랙스완]이라 해서 있는데. 그 내용이 뭐냐 하면, 좋은 역만 맡는 사람이 나쁜 역도 맡고 싶어서, 발레를 하는데 너무 좋게 역할만 하는 주인공이 식상이 나는 거예요. 그런데 라이벌 되는 나쁜 역할하는 것 보니까 연기 좋다고 칭찬하니까 은근히 욕심내서 자기도 나쁜 역할을 하고 싶다는 거예요. 이게 말이 씨가 되어서 나중에 진짜로 나쁜 역할을 하는 과정에서 자아가 완전히 깨어지고 마귀 들렸다고 할까요, 정신병에 걸린 그런 영화, 그게 블랙스완이라고 유명한 영화잖아요. 보진 않았지만 그 내용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제가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을 오늘 지성소와 연관해서 주목하는 바가 있어요.
사람들이 말이 씨가 된다고 하지만 과학적인 증거는 없습니다. 그런데 말이 씨가 된다는 그것이 먹힐까요? 예수 믿으라 하면 안 믿고 말이 씨가 된다는 말에 우리는 뭔가 굴복하고자 하는 의도가 뭐냐? 결국 이것은 인간은 불안정하다. 인간은 불안정한 것에 머물러있는 게 아니고 불안정한 것이 안정을 추구하면서 더욱더 이 과정이 불안정해져요. 불안정한 것을 안정으로 바꾸고 싶은 여망에 의해서 여기에 뭔가 미신이라든지 우상 같은 것이 마구 동원되는 거예요. 우상이다. 이건 말도 안 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불안정한 내가 그런 것을 취해서라도 뭔가 안정을 취하고 싶다는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지금 내가 불안정하지만 언젠가 내가 안정되기 위해서라면 무슨 수라도 다 할 용의가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가져와. 내가 그걸 믿어줄 테니까 어쨌든 간에 나를 안정되게만 한다면 나는 뭐라도 할 용의가 돼있다고 할 때 거기에 동원되는 게 뭐냐? “너, 말조심해라. 말이 씨가 된다. 지금 말 함부로 해서 나중에 저주 받으면 어떻게 할래?” “그래 맞아. 말조심해야 돼.”라는 식으로 그게 수용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지성소를 보죠. 오늘 해야 될 지성소. 지성소라 돼있고 또는 속죄소. 지성소 속에 속죄소가 있으니까. 지성소 속에 언약궤가 있고 언약궤 뚜껑을 속죄소라 합니다. 상자가 있는데 그 상자 뚜껑을 속죄소, 죄를 씻는 장소가 되는 거예요.
지성소, 속죄소는 말이 씨가 된다가 안 먹힙니다. 네가 말을 어떤 식으로 지껄였든가 상관없이 네 운명은 네 말한 대로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이게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그전에 우리가 속죄소를 모를 때는 우리는 불안감을 어떻게 하든 해소하기 위해서 지금은 불안하지만 나중에는 안정하기 위해서 우리는 온갖 것들을 동원시켜야만 했단 말이죠. “그래. 말이 씨가 돼. 조심해야 돼. 함부로 말했다가는 되돌아와서 너한테 주어지면 저주 받는 거야. 그렇지. 나는 저주받으면 안 돼. 남이 저주받는 건 괜찮지만 내가 저주받는 건 싫어.”
벌써 떨림의 증세, 정신분석학적으로 하면 이상한 증세, 정신분열증 증세, 온 증세가 발작을 한 거예요. 그 모든 불안정한 심리상태가 지성소라는 게 등장하면 뭐가 날아가 버립니까? 말이 씨가 된다는 것이 일소에 날아가 버리죠. 안 날아가시는가? 날아가 버려야 돼요.
“목사님, 어떻게 하면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까? 어떻게 하면 성령의 충만을 받습니까?” 그 말은, 말이 씨가 되니까 지금 내가 어떤 말을 하고 어떤 걸 믿고, 행동하면 내 장래는 안정권에 들어가겠느냐고 묻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목사님, 어떻게 기도하면 기도가 응답되겠습니까? 신앙생활 어떻게 하면 나와 내 자식들과 내 가정이 화목하겠습니까?”라고 묻는 것은 말이 씨가 된다는 이런 유형의 원리와 원칙들을 나한테 막 퍼부어달라는 거예요. 삽으로. 주일날 예배드릴 때마다 목사님 말씀을 통해서 불안정한 나를 안정권에 들도록 하기 위해서 해달라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는 뭡니까? 지성소, 속죄소. 나대지 마라. 설치지 마라. 너의 구원은 네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와 아무런 관계없어요. 이 말을 제일 싫어하는 게 마귀입니다. 마귀는 온갖 율법을 동원해서 지성소, 속죄소의 의미를 어쨌든 간에 이 광채를 막을 수만 있다면 자기 나름대로 대 성공이에요.
구원은 우리의 말이나 우리의 행동과 상관없습니다. 그러니까 말이 씨가 된다. “당신, 말한 대로 저주받아.” 이런 협박과 공갈을 수용하지 마세요. 협박과 공갈은 계속 주어지는데 수용하면 안 돼요. 그걸 수용하는 경우는 우리 마음속에 지성소, 속죄소가 없으면 그 빈자리에 날아다니는 귀신 열댓 마리가 들어와서 우리를 괴롭힙니다. 지금도 영적 싸움을 하니까. 영적 싸움의 무기는 많이 아는 게 아니에요. 이 기쁜 소식이 들어있으면 이미 이긴 사람이고. 이 기쁜 소식 없으면 아무리 고상하고 깊이 있는 신학해도 마귀가 빙그레 웃습니다.
“삼총사, 무기가 그거야? 칼 들고 설치는 거야?” 자동소총으로 쏘면 삼총사고 뭐고. 인디아나 존스란 영화에 보면 이집트 자객이 칼 들고 설치니까 허리춤에서 권총으로 쏘니까 칼 들고 해도 소용없네요. 복음은 권총입니다. 말이 씨가 된다는 것은 부엌칼. 옛날 제 어릴 때 홍콩영화에 유명한 검객, 장유. 한 번 쓱 뺐다 넣었는데 열댓 명 막 죽어요. 어릴 때 소원이 그거에요. 나도 언제 저렇게 칼싸움 잘 했으면. 이소룡도 영화 [정무문]에서 죽을 때 폼 잡고 공중에 떴는데 일본군 총 맞아 죽어요.
복음은 한 방입니다. 복음은 총알 한 방입니다. 이건 수련해야 돼요. 무림의 고수처럼 금강산에서 단련해야 됩니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오늘도 숫돌에다 칼 갈고 있어요. 마귀가 우리에게 연습하고 연단하고 훈련하고 습득하고 신앙생활 잘 하는 기발한 걸 배우면 안정권에 든다는 거예요. 미래가. 잘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나오는 거예요. 잘하면 구원받으면 안 돼요. 잘하다가 중간에 만약에 타락하게 되면, 그러면 끝나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이 자기가 언제 타락할지 모르잖아요. 그때 목사가, “말이 씨가 되는 겁니다.” 이렇게 나온다니까. 그러니까 말조심하고 행동 조심하게 되면 근근이 은혜가 유지되다가 말 좀 실수했다싶으면 지옥 가는 거예요.
지성소라는 것이 한 방에 기쁜 소식인 이유가 있어요. 지상에 이스라엘이 있어요. 여기는 시내 산에서 율법을 줬습니다. 율법은 시간성이 없어요. 출애굽기도 율법이고, 말라기도 율법 이야기하고 있어요. 신약에도 율법이야기하고 있어요. 율법 자체는 시간성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시간성을 느껴요. 옛날에 홍해에서 나왔을 때, 전에 우리가 홍해에서 나왔을 때 이후에는, 나중에는 이런다고요. 그렇다면 사람들은 ‘전에’는 과거라 하고 ‘나중’이니까 미래라 하면 ‘지금’은 현재가 되겠지요. 과거-현재-미래, 이 세 시제 또는 시간상태를 시간 있음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생각해봅시다. 여기에 홍해 있을 때 홍해 건널 때도 옛날 포로 됐었다, 과거. 지금 홍해 건넌다, 현재. 그리고 홍해 건너고 난 뒤에 뭐가 있을까? 이건 미래. 과거라고 여겼던 그 지점에서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름대로 과거, 현재, 미래가 있지요. 그렇다면 홍해 건널 때 과거와 지금 이스라엘이 광야 아닙니까. 광야 때 과거가 계속 살아있는 겁니까? 아니면 하나 때문에 하나를 취소하는 겁니까? 아니면 모조리 다 이미 지나버렸으니까 쓸데없는 겁니까? 여러 가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쉽게 예를 들면, 이순신 장군이,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고 할 때 그 과거가 누구에게 의미가 있느냐 하면, 이순신 장군 논문 쓰는 사람, 이순신 장군을 모델로 삼고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역사 선생님들은 의미가 있는데 영어 선생님한테 그게 의미가 있습니까? Don't speak my death to our enemies. 영어로 이야기할 필요가 있어요? 없단 말이죠.
그러니까 이순신 장군이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나름 멋들어졌지만 지금 나에게는 들은 적도 있어. 지금 나한테는 그런 과거가 나한테 붙어있는 과거가 아니잖아요. 그러면 그 과거는 과거가 아니었다는 말입니까? 사람은 과거에 어떤 일이 있던지 간에 지금 현재 나한테 필요한 것만 따로 차출해서 뽑아서 나름대로의 과거라고 따로 만들어요. 이제 슬슬 결론 나왔지요. 인간은 시간 속에 있다고 분명히 했잖아요. 틀렸습니다. 시간은 현재 내가 만들기 나름입니다. 반칙이죠. 역사란 내가 만들기 나름이에요.
제가 언제 주일오후 설교에 그런 게 있지요. 인간의 안구는 일초에 다섯 번 깜빡인다고 했지요. 슥 보고 다섯 번 사진을 찍었어요. 그러면 다섯 번 찍은 게 기억이 나야 되는데 석 장은 잊어버렸어요. 그러면 일초에 두 장 남지요. 두 장으로 나름대로 세계관, 현실관을 만들어요.
그렇게 될 때 그 세계관이란 지금 나의 시간관으로, 그게 세계란 공간이니까. 나의 공간이나 나의 시간이라는 것은, 내가 생각한 내 시간을 옹호해주는 식으로 일방적으로 만들어버립니다. 그것으로 율법을 듣게 돼요. 율법과 마주치게 됩니다. 그러면 율법은 뭐냐? 갈라디아서 3장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인됐잖아요. 아브라함 빼면, 믿음으로 의인되잖아요. 이게 시대에 따라서 이 원칙이 달라질까요? 안 달라집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식이 태어나면 내가 생각하는 세계관과 내 자식의 세계관이 다릅니다. 열 명이 있다면 열 명이 다 달라요. 과거에 홍해가 어떤 의미였던가? 열 명이 다 달라요.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그 이순신 장군의 말이 역사 선생님이 보는 것과, 영어 선생님이 보는 것과, 국어 선생님이 보는 것과, 체육 선생님이 보는 것이 다 달라요. 의사가 보는 것과, 변호사가 보는 것도 다 다릅니다. 의사 같으면 내가 옆에 있었으면 살렸을 텐데. 변호사 같으면 이순신 장군 죽고 난 뒤에 연금 얼마 받았는지 몰라. 목사 같으면 복음 들어야 되는데 지옥 가고. 참 안 됐다. 다 다르단 말이죠.
지금 사람들이 무리하면서 상당히 억지를 부리는 게 뭐냐 하면, 자기 나름대로 조작된 시간관이 있는데 거기다 하나님의 원칙,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억지로 쑤셔 넣는 거예요.
작은 종이박스에 커다란 물건을 집어넣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찢어지겠죠. 이 쑤셔 넣는 것과 찢어지는 이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라 이 말입니다. 십자가 사건이 다른 게 아니고 네가 고집하는, “하나님, 이게 현실 맞습니다. 하나님 웃기지 마세요. 내가 현실이라면 현실입니다.”라고 우기는 종이봉투, 또는 봉지가 진짜 주님을 영접할 때 이게 찢어지면서 “나는 세상을 잘못 읽었습니다. 나는 내 위주로 세상을 봤습니다. 내가 바로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그 심정, 그게 십자가 사건이에요.
이 다음 이야기는 더 어렵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단회성입니다. 십자가 사건이 나중에는 반복성이 돼요. 사도 바울은 십자가 질 때 옆에 있지도 않았어요. 강도 두 사람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했잖아요. 그것 무리수 아닙니까? 억지 아닙니까? 오버한 것 아니에요? 괜히 자기 믿음 좋은 척하고 그런 멘트 날리는 것 아닙니까?
원리를 알아야지. 나도 흉내 내자.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고 나도 하자. 따라할 문제가 아니라니까. 성경 흉내 낸다고 믿음 있는 게 아니고 성경의 모든 말씀이 체험돼야 되거든요. 체험 안 되면 그걸 위조라 하는 거예요. 위조수표 열 장 갖고 있는 것과 진짜 수표 한 장 갖고 있는 것은 차원이 다르지 않습니까. 진짜 십자가의 체험을 갖고 있는 것과 십자가 연구한다고 책 백 권 읽는 것과 이거는 차원이 달라요. 자기가 찢어져야 됩니다.
십자가는 큰데 우리가 갖고 있는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종이박스는 작단 말이죠. 그러니까 찢어질 수밖에 없지요. 작구나 하고 돌아가면 지옥 가죠. 그런데 작은지 안 작은지 와 봐야 알 것 아닙니까. 넣어보니까 진짜 작아. 찢어져버린단 말이죠. 왜 그러느냐 거예요. 왜 하나님께서 일을 십자가로 하시느냐?
방금 제가 한 이야기는 인간들이 생각하는 시간과 공간은 자기 위주로 조작된 것이다. 인간은 그게 한계에요. 인간은 그 한계 밖으로 못 나갑니다. 아무리 고상하게 생각해도 자기 위주에요. 이스라엘이 아무리 연구해도 이스라엘 자체가 붕괴해버립니다. 폭발해버려요.
지구에 유성이 날아올 확률이 높다는 겁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유성이 많이 날아와서 지구가 폭발해야 되는데 폭발 안 하는 이유는, 지구 쪽으로 날아오는 유성이 지구보다 훨씬 큰 목성이 버티고 있어서. 태양계 자체가 은하계를 1억5천만 주기로 돈답니다. 은하계가 피자 판이거든요. 얇은 피자 판이란 이유가 처음부터 빅뱅으로 된 증거거든요. 편평한데 넓이는 있는데 깊이는 없는. 태양계가 은하계 변두리에 있거든요. 공전하면서 유성이 많은 지점도 통과하고 유성이 희박한 곳도 통과하는데 유성이 빨려 들어오는 그걸 목성이 막아준단 말이죠. 천문학자들이 연구해서 이렇다고 알지만 목성이 만약에 안 막아주고 유성이 지구와 충돌하면 폭발해버려요.
천문학자들은 지구는 전 우주에 비해서 너무나 작다. 그러면 된 겁니까? 그러면 진리를 안 거예요? 지구는 작고 지구는 먼지 같고 태양계가 수천 억 개 있는 게 우주다. 그래서 우리는 굉장히 작고 왜소하다. 그러면 그게 복음이고 진리입니까? 불교도 그걸 알고 있거든요. 지금 그런 소리가 진리가 아니고 진짜 뭔가 유성 날아와서 지구가 폭발할 때 이건 지식이 아니고 온 몸으로 체험이 되잖아요.
예수님이 십자가 지심으로 우리는 용서 받았다. 그거야 성경책에 있는데 그걸 누가 몰라요. 그게 진리 맞느냐 이 말입니다.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믿으면 나는 십자가의 피로 용서받는다. 그 고백을 세 사람, 네 사람 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다 구원받습니까? 아니에요. 진짜로 십자가 앞에서 나는 죄인이라는 걸 아는 사람과 그런 이야기가 성경에 있다고 아는 사람은 이건 아직도 자기 자신이 안 깨졌다는 거예요.
그래서 진짜 예수 믿는 사람은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내가 예수 믿으면 구원받겠다는 그것도 수작에 불과하다는 것은 자기가 알고 있는 거예요.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구원하는데 구원하는 방식이 물론 너 때문에 내가 죽었다는 방식으로 구원한다고 해야 되고, 그 뒤에 이 말 붙이면 안 돼요. “그걸 내가 압니다.” 이런 토를 붙이면 이건 무지무지 수상한 사람이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율법을 알았어요. 지성소를 알고 속죄소를 알았습니다. 속죄소 있음으로 우리 죄를 용서받는다는 걸 알았어요. 그러면 그들이 구원받은 백성입니까? 그들이 속죄소 때문에 구원받는다는 걸 알고 있는 이스라엘이 나중에 BC576에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합니다. EBS에서 바벨론이란 특집으로 제국이야기를 1편, 2편, 3편 했어요. 해봐야 성경적으로 이야기하는 것보다 고고학적으로 이야기하는 건데.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지금 망해야 될 이스라엘에게 지성소를 줬다는 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는 속죄소가 있기 때문에 용서받는다는 건 오해였습니다. 진짜 그들이 속죄소의 위력을 아는 것은, 그들과 함께 있는 속죄소에 의해서 봉투가 찢어져야 돼요.
우리가 십자가를 알아요? 그러면 십자가에 의해서 우리 자신이 폭파될 때 제대로 아다리 된 사람입니다. 제가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이게 찢어지면 찢어진 봉투를 제발 봉합하려고 하지 마세요. 문방구에서 스카치테이프 사서 찢어진 걸 다시 붙이려고 하지 마세요. 그냥 찢어진 채로 그대로 사세요. 그런데 우리 인간이 얼마나 얍삽한지 주님한테 혹성에 의해서 완전히 찢어진 것을 내가 그 모습이 꼴보기 싫어서 매일같이 가지런히 정리를 해요.
달에 분화구가 많지요. 그런데 왜 지구는 말끔합니까? 달은 지구보다 작음에도 온 천지에 분화구가 있어서 그걸 멀리서 보면 토끼가 방아 찧는 모습이잖아요. 가까이 보면 분화구 천지 아닙니까. 그런데 지구는 왜 말짱해요? 그게 지구에는 바람이 불기 때문에 그래요. 바람이 불어서 먼지를 흩어 보내서 그래요.
강도는 구원받는데, 세리와 창녀는 구원받는데 왜 멀쩡한 인간들이 자기 죄인인 걸 모릅니까? 다같이 죽어가고 있으면서. 그것은 자기 내부에 어떤 악마적 요소가 자꾸 돌아서면 자기 관리, 자기 절제, 자기 청소를 해대는 거예요. 주께서 십자가를 폭파시켰으면 십자가의 흔적이 남을 것 아닙니까? 흔적이 남으면 남은 채로 고마워하면 그만인데 그게 죄악 된 본성이 꼴보기 싫은 거예요. 주께서 원하는 것은 상한 심령이라고 다윗은 성신 받아서 그런 고백했는데 오늘날 우리는 늘 상한 심령은 싫은 거예요. 십자가 알 때 회개하고 다시 정상으로 돌아가고 싶단 말이죠.
그래서 지성소는 뭐냐? 오늘 강의 제목을 쓰려고 합니다. 이게 흔적. 오늘 녹음 올릴 때 제목이 흔적입니다. 지성소는 흔적이다. 지성소는 물체가 아닌 거예요. 흔적의 특징은 우발성입니다. 우발성은 두 가지 기능이 있어요. 하나는 없는데서 생겼다는 것과 두 번째는 이게 없어진다는 거예요. 그냥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으면 흔적이란 말을 하지 않습니다.
여기 물이 있잖아요. 강의를 하다보니까 컵이 움직여서 이렇게 갔다 할 때 제가 목이 말라서 “어, 아까 여기 물 있었던 것 같았는데.” 이게 흔적이죠. 처음부터 컵이 여기 없었으면 흔적조차도 없지요. 하나님이 인간을 부술 때 우리 봉투를 찢을 때 망치 들고 오시는 것이 아니고 뭐로 우리 역사를 완전히 부정하느냐 하면, 흔적으로 왔다가 흔적만 남기고 그냥 흔적으로 사라지면서 인간들이 생각하는 영원한 것들은 전부다 부실한 것이라는 것이라고 고발하는 식으로 주께서 일을 하시는 거예요.
한 가지 예를 들면, 싸이의 [강남스타일] 조회수가 10억이 넘었지요. 그런데 이번 3월에 만약에 싸이가 노래를 발표했는데 10억은커녕 10만 명도 안 봤다고 했을 때 싸이란 가수가 감사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망했다고 끝났다고 하겠지요.
분명히 인간의 생각에서는 과거는 없는 거예요. 과거는 과거일 뿐이고, 현재 있는 것은 현재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아서 없는 거고. 인간의 과거, 미래라 하는 것은 이미 없어졌고, 아직 오지도 않은 건데 현재를 현재 되기 위해서 그냥 현재로 끌어당긴 거죠. 그렇다면 싸이가 생판 처음 나온 가수라면, “아니 10만 명이나?” 하고 고마워할 건데 10만이 뭐야. 10억도 했는데. 없어진 것 때문에 믿어지지 않는 거예요. 이건 뭐냐 하면, 인간은 하나님을 믿는다, 뭘 믿는다고 할 때 나의 영원함, 나는 영원해야 된다는 그 고집 때문에 모든 것을 뒤틀리게 만들고 전부다 엉터리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그런 속성이 인간에게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지성소 주던 제사, 십계명을 주던 그 모든 것은 인간이 자기 고집 때문에 모든 것은 뒤틀린 채로 해석이 주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 해석이 엉터리라고 들춰내기 위해서 바람처럼 나타났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는 하나님의 우발적인 흔적이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우리가 어떤 더러운 성격을 갖고 있는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 시간에, 우리 손에 잡히지 않는, 나의 세계관에 절대로 포착되지 않는 방법으로 와서 그냥 가버리는 거예요.
그걸 갈라디아서 3장에서는 율법이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믿음으로 의인 되지요. 그런데 왔다 사라지는 게 있어요. 430년 후에 율법이 와서 잠시 나타났다가 그 다음에 율법은 몽학선생이란 말로 사라지지요. 왔다가 사라져버리는 거예요. 그걸 통해서 “나는 너하고 안 놀아. 네가 생각하는 어떤 것도 나와 안 맞아.” 그게 우발성이며 우리에게 흔적으로 남는 겁니다. 흔적이라 하는 것은 지금 실체가 없다는 거예요. 없는데 다녀간 거예요. 다만 우리 속에 흔적만 남아있어요. 이 말은 우리 손에 잡히지 않고 있다는 거예요.
잡히지 않는다면 잡히지 않는 것이 진리입니까? 현재 잡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 진리입니까? 어느 게 진리에요? 잡히지 않는 게 진리지요. 그러면 잡히지 않는 게 진리인데 그게 도망 가버렸으니까 현재 우리가 잡았다고 여기는 것은 진리입니까, 비 진리입니까? 비 진리지요. 바로 비 진리임을 알려주기 위해서 주께서 그렇게 우발성으로 온다 이 말이죠. 몇 분 걸렸나 모르겠다. 40분 걸렸다.
우리의 모든 것은 비 진리에요. 비 진리인데 우리는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너, 말조심해라. 말이 씨가 되서 연초에 말 잘못하면 연말에 저주받아.”라는 것에 우리가 주눅 든다는 것은 결국 무슨 뜻이에요? 가짜임에도 진짜인 체하는 더러운 세상, 말도 안 되는 고집. 모든 말씀은 우발성인데 사람들은 그 우발성과 흔적을 듣고자 하지 않아요. 현재 쥐고 있는 것을 현재 내가 갖고 있는 것이 얼마나 확장시키고 넓히느냐에 우리는 올인합니다. all-in 이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도박 게임사이트에 보면, 얼마 걸 겁니까? 오십만 원, 백만 원, 삼백만 원, 제일 마지막에 올인, 다 거는 걸 이렇게 해놨어요.
사람들은 지금 불안정합니다. 불안정한 것을 안정되게 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계속 쥐고 끌고 가는 거예요. 끌고 가면서 내가 구원받을 수 있다면, 내가 천국 갈 수 있다면 어떤 말씀이라고 들을 준비가 돼있어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그 심보에 말려들겠어요? 안 말려들지요. 그냥 바람으로 왔다가 흔적만 남기고 우리 손에 잡히지 않고 그냥 날아가 버리지요.
날아가 버리니까 우리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예수 믿는다고 그것을 고정화시키고, 나는 지성소가 뭔지 안다는 것을 고정화시키고, 고정화시킨 그 자리, 볼트로 조이는 자리가 뭐냐? 비 진리의 바탕 위에 십자가란 이름, 언약이란 고상한 것 다 집어넣어서 조이는 거예요. 단단하게. 도망치지 말라고. 헌금으로 조이고, 전도했다고 조이고, 봉사했다고 조이고, 예배 참석했다고. 이게 아마 복 될 거야. 왜? 말이 씨가 되니까. 지금 내가 주일에 교회 잘 다니면 연말에 복이 있을 걸. 볼트로 단단히 조이는 거예요.
그 짓을 우리 선배 격인 누가 했겠어요? 같은 육이에요. 같은 아담의 족속이에요. 바로 이스라엘이 그걸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건 이스라엘 역사를 보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가? 무슨 일이 있었는가?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우리가 이야기입니다. 제발 주님을 붙잡지 마세요. 주께서는 주님의 약속대로 우리를 건지십니다. 우리가 행동과 말조심하고 교회 봉사한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나쁜 일하고 착한 일로 옮긴다고 그걸 근거로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성경을 잘못 해석하다보니까 사실은 성경말씀이 좋고, 예수님이 좋아서가 아니라 내가 좋아서 좋은 나를 내 힘으로 천국에 보내기 위해서 기껏 해낼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안 돼요. 그저 붙잡는 거고, 말씀을 실천에 옮기는 거고 바리새인 하는 짓들을 하는 것밖에 없어요. 주님은, “제발 네가 너에 대해서 손 털 수 없나? 내가 너를 건져줄게.” 그러니 제발 네가 너를 건져낼 생각하지 말란 말이죠.
누가복음 12장에 어떤 동생이 와서 형이 내 유산을 다 가져간다고 했잖아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네가 왜 재산문제로 왔느냐? 생명은 소유의 넉넉함이 아니라고 할 때 그 동생의 잘못이 뭡니까? 지금까지 강의 들었으니까 정답이 나왔지요. 동생의 자기 세상관, 자기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경험했던 것, 사진 찍어서 그걸 구성해서 현실로 모아놓은 게 뭐냐? 아버지 유산 중에서 내 것이 있다. 그런데 형이 홀랑 빼앗아 가니까 억울하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예수님한테 의논하면 된다고 할 때 그 예수가 동생한테는 어떤 예수냐 이 말이죠. 자기 봉지가 안 찢어진 거예요. 예수님을 끌어당기면 예수님을 찾아오면 자기편이 될 줄 알았잖아요.
그 사람과 요한복음 5장에서 38년 된 병자 있었지요. 그 사람은 38년 간 찢어져있었지요. 예수님 왔을 때 “내가 제일 고참입니다.” 이랬습니까? 그냥 끝났어요. 그 인생은 내년 되면 39년 되고, 그 다음해에 40년, 그 다음에 그냥 죽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누굴 찾아왔습니까? 예수님이 그 사람을 찾아왔잖아요. 그 사람이 나았지요. 아까 누가복음 12장의 그 사람과 차이점이 뭐예요? 동생이 자기 세계관이 있잖아요. 그런데 38년 된 이 사람은 이미 봉지가 다 찢어졌어요. 처음에는 그랬겠지요. “하나님이여, 제가 무슨 잘못이 있어서 이렇게 병이 들었습니까?” 그것도 세월 지나면 몰라.
또 이야기할게요. 마태복음 9장에서 친구들이 중풍병자를 데리고 지붕 뚫고 들어왔잖아요. 그 사람이 죄 용서받으려왔습니까? 병 고치러왔습니까? 병 고치러왔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난데없이 뭐라고 합니까? 병이 나았다가 아니라 네 죄가 사해졌느니라. 이것은 묵시적 차원에서 볼 때 죄에요. 그런데 역사적 자기 세계관, 자기 현실관에서는 뭐냐? 지금 남들은 중풍에 안 걸렸는데 나는 걸렸으니까 제발 남들처럼만 해달라고 온 거예요. 어느 환자가 병원에 가서 “의사 선생님, 재벌 되게 해주세요.” 이러지 않잖아요. 병원에 올 때는 남들처럼만 걷게 해달라고 하잖아요. 그 사람은 중풍 고치러왔지 용서받으러오지 않았단 말이죠.
그런데 그런 사람을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은 도대체 누가 누굴 이용했단 말입니까? 주님이 이용해서 내가 이 세상에 죄 사하는 권세가 나에게만 있음을 알리기 위해서 사용했단 말이죠. 우리는 그렇게 주님한테 걸려들어야 됩니다. 내가 예상한 것, 우리 가정이 어려움이 있는데 기도하면 되겠지. 내 예상을 그것도 죄라고 지적해줄 수 있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죄라고 지적해줄 수 있는, 그렇게 되면 나의 시간에 얽매이지 않는 묵시적 존재가 됩니다.
시간성? 시간성 없어요. 이제는 어제도 사용하셨지만 내일도 사용하실 것이고 오늘도 사용하시고. 어제 내가 주를 믿었다. 이게 아니고, 오늘 주님 믿었다. 이게 아니고, 내일도 주를 믿었다. 이게 아니고, 어제도 주께서 사용하시고 오늘도 주께서 사용하시고 내일도 주께서 사용하시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어제 믿었다가 오늘 안 믿으면 큰일 나잖아요. 그렇게 사용하심이 믿어지는 게 믿음이에요. 내가 믿으면 구원받는다가 믿음이 아니고 믿고, 안 믿고 간에 주께서 알아서 관계성, 그렇게 믿게 하게 하실 때 믿어진다는 것, 그러니까 믿음은 우리의 행함이 아니고 주가 주신 선물이라는 것.
지금 제가 이야기한 것은 지성소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이고 지성소를 둘러싼 환경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한 우발적이고 흔적만 남기는 지성소. 그렇다면 지성소의 본 장치는 무엇을 위한 장치로서 그렇게 하는가? 그것은 10분 쉬고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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