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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3강-에스겔9장 1-2(살육하는 기계)130116-이 근호목사자유게시판에스겔

23강-에스겔9장 1-2(살육하는 기계)130116-이 근호목사

이름 : 이한례(IP:203.90.42.222)

23강-에스겔9장 1-2(살육하는 기계)130116-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9장 1절에서 2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60페이지입니다.

에스겔 9:1-2

“그가 또 큰 소리로 내 귀에 외쳐 이르시되 이 성읍을 관할하는 자들이 각기 죽이는 무기를 손에 들고 나아오게 하라 하시더라 내가 보니 여섯 사람이 북향한 윗문 길로부터 오는데 각 사람의 손에 죽이는 무기를 잡았고 그 중의 한 사람은 가는 베 옷을 입고 허리에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찼더라 그들이 들어와서 놋 제단 곁에 서더라”

거룩한 성전의 놋 제단 곁에 설 수 있는 그러한 존재, 사람이 아닙니다. 천사들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천사들의 손에 인간들을 살육하는 기계를 들게 만들어서 여섯 천사를 통해서 예루살렘을 작살을 내고 묵사발을 만들려고 하는 겁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공자나 맹자 책, 소위 스승들의 그런 어떤 교훈 집처럼 그렇게 봐버리면 그 책에는 인간이 인간에 대해서 인간이 어떻게 해야 될 것, 인간이 지혜로 가르치는 내용, 주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그 내용만 나옵니다.

그런데 인간이 인간들끼리 읽는 그 교훈들조차도 우리는 밥 먹고 사는 게 우선이기 때문에 감당이 안 되죠. 그래서 공자 맹자도 못 지키고 불경에 나오는 그런 것도 못 지켜서 그러는데, 성경은 여기 천사까지 동원시켜 버립니다. 우리보고 어쩌라는지 모르겠어요. 천사까지 동원해서 사람에 대해서 생각하는 거, 그것도 우리한테는 상당히 버거운 문젠데, 천사까지 동원해서 우리 인간이 천사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대접해야 되는지, 어떤 식으로 천사의 하는 일에 우리가 관할되고 연계되는지 그것까지 다 계산하고 다루려면, 천사와 좋은 관계 이루려 한다면 우리는 더욱 더 난감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두 가지의 그러한 힌트를 통해서 이렇게 여섯 천사까지 나타나서 하나님의 지시에 따른다는 것이 우리 인간 세계에, 이스라엘에게 무슨 의미가 되는가, 두 가지의 증거로서 파악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1절에 나오는 “각기 살육하는 기계”라는 말이 나옵니다. 기계는 감정이 없습니다. 기계는 울고불고 그런 거 없습니다. 어릴 때 제일 먼저 만난 기계는 방앗간이나 정미소의 기계를 제일 먼저 만나죠. 안 그러면 들에 가면 트렉터, 경운기나 이런 기계죠. 어릴 때 그런 기계들, 특히 방앗간이나 큰 정미소에 갈 때 부모님 손잡고 거기 가보면, 옛날에는 방앗간이나 정미소 하면 부자 아닙니까? 그런데 어릴 때는 그게 제일 큰 공장인 거예요. 그 공장에 사람은 작고 기계는 엄청나게 큽니다. 그런데 발동기를 픽픽 걸어서 드디어 기계 벨트에 걸어서 돌아가면 그 거대한 기계가 마구 돌아가는데 자칫 실수해서 손이라도 넣고 발이라도 끼면 당장이라도 죽을 판 이예요. 그 기계의 그 첫 느낌, 첫 인상, 아주 냉혹하다는 것, 냉정하다는 것, 봐주는 게 없다. 그리고 무섭다는 거, 시키는 대로 하기 때문에 융통성이 손톱만큼도 없다는 거죠.

2절 끝에 보면 여섯 사람이 살육하는 기계를 잡았는데 이 여섯 사람이 잡은 기계는 어디 써먹을 기계냐, 그 힌트가 그 중에 한 사람이 “놋 제단 곁에 섰더라” 이렇게 돼 있어요. 여섯 천사가 한 조가 됐는데 ‘여섯 천사여, 당신들은 뭘 하려고 왜 이 세상에 떴습니까?’라고 물을 때 천사 같으면 우리한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놋 제단에 서서 먹 그릇을 가지고 놋 제단 곁에 섰다.’ 라는 이걸 통해서 기계가 어디 써먹을 기계인지 감 잡아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기계가 있는데 기계는 반드시 용도가 있게 마련이고, 그 기계의 용도는 도대체 무슨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 냉혹한 기계, 사정 안 봐주는 기계를 휙휙 돌리느냐, 그것은 놋 제단이라는 제단의 설립 취지와 이게 부합되는 쪽으로 기계를 사용할 겁니다.

그러면 놋 제단이 설치될 때 그 놋 제단이 존재하는 취지가 뭐냐, 그것은 이사야 6장 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 대목은 이사야가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서 평소에 늘 가는 성전이지만 갑자기 거기에 하나님이 나타납니다. 몸이 아프니까 차분하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것을 어떤 분은 좋게 생각하지만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사야가 평소에 늘 있던 성전에 그냥 보통 날처럼 업무에 의해서 들어갔습니다. 거기는 놋 제단이 있고 성소가 있죠. 그런데 난데없이 거기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봤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세 명의 천사가 나타났고 날개가 두 쌍 가진 천사가 나타났고 하나님을 호위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나타난 천사는 사람 편이 아니었습니다. 천사는 사람을 배려하지 않습니다. 냉혹한 기계 같아요.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합니다.

천사가 만약에 여기 안 나타났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해합니다. 어떻게 오해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일은 우리 손에 맡겼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옳은 주장이다.’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맡기면 될 일을 여기에 우리가 초대하지도 않은 천사까지 개입시켰다는 말은 곧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이제 인간들아, 손을 떼도 괜찮다.’는 거예요. 왜냐 하면 이사야가 고백하기를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천사가 등장한다. 이 말은 이제는 인간에게는 처벌 받을 일만 남아 있는 거예요. 천사가 어떤 일을 할 때는 병행해서 뭐가 등장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놋 제단도 함께 등장한다는 사실, 이걸 에스겔 초반에서는 하나님의 보좌와 더불어서 천사가 활동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이런 거예요. 천사가 우리 인간에게 말을 건다면 이렇게 하는 거예요. ‘인간들아, 나 천사인데 너희에게 나타났다. 그런데 내가 너희에게 나타난 것은 너희의 편리를 봐주기 위해서 나타났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마라. 너희들은 이제 묵사발 될 거야.’라는 겁니다. 왜 그런 이야기를 해야 되느냐 하면 신명기 28장에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셨거든요. 우리가 알다시피 말씀으로 천지를 만들었으니까, 세상이란 것은 말씀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신명기 28장에 보면 초반에 이 말씀을 듣는 자는 나가도 복을 받고 들어와도 복을 받는다 했어요. 그런데 15절부터 나온 걸 보면 ‘니가 이 말씀을 안 지키게 되면 나가도 저주받고 들어와도 저주 받는다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들은 이런 생각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때려 봐, 때려 봐. 내가 말씀을 안 지키고 싶어서 하나님, 뭐 어쩔 건데? 어쩔 건데?’ 그렇게 나오죠. 그렇게 나올 때 그때 ‘천사가 동원됐다,‘ 라고 한다면 결국 천사가 동원된 것은 딴 게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정확한가를 징벌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처벌이고 심판이란 수단을 통해서 인간에게 묵사발 만들고 인간을 심판함으로써 역시 하나님은 인간편이 아니고 말씀을 생생하게 드러내는 데는 하나님이 일절 양보가 없다는 하나님의 본래 취지를 천사가 충분하게 보여주는 겁니다.

이러한 말씀이 갖고 있던 하나는 용서요, 하나는 무서운 처벌, 이 양면성, 그러면 사전에 그걸 이야기를 해줘야지, 이렇게 우리는 핑계를 대요. ‘하나님이 그렇게 무섭게 나오신다면 사전에 그런 것을 좀 언질이라고 줬으면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잘 지키지 않겠습니까?’라고 핑계 아닌 핑계를 대죠. 그럴 때 하나님은 이야기합니다. 놋 제단이 폼으로 있는 줄 아느냐? 놋 제단이라 하는 것은 놋은 무서운 밑에 있는 화롯불을 견디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놋을 견뎠지만 놋 위에 누워있던 어린양과 소와 염소의 제물은 그 무서운 심판의 불을 견디지 못하고 홀라당 다 죽어버렸어요. 피와 기름은 골라내고 나머지는 다 태워버렸습니다.

죽음이란 뜻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너를 남기지 않겠다는 뜻 이예요. 우리가 여기 있잖아요. 존재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죽을 때 ‘하나님, 저 왜 죽이십니까? 나는 오래 살 줄 알았는데.‘ ’나는 너를 남기지 않겠다.‘는 뜻으로 하는 거예요. 이것을 로마서 12장 1절에 보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적 제사를 드리는 제물로 삼겠다는 겁니다. 제물용이었습니다.

우리가 제물용이 되려면 우리가 누워야 될 장소가 필요한데 그것이 뭐냐 놋 제단입니다. 그 놋 제단에 누워보면 비로소 우리는 애초부터 심판받아야 될 자라는 것을 느끼게 하죠. 이스라엘에게 천사가 왔다는 것은 천사는 이 세상에 편을 서지 않습니다. 천사는 어디까지나 사람 편에 서지 않고 하나님 편에 섭니다. 그래서 방향이 사람이 요청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인간을 향하여 방향이 하나님 쪽에서 인간 쪽으로 내려오는 노정 속에 천사가 우리에게 보이는 겁니다.

야곱이 잠을 잘 때 천사가 사다리 타고 내려온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천사가 내려왔다, 이 말은 이젠 니가 죽을 때가 됐구나. 그런 뜻입니다. 하나님의 매서운 맛을 볼 때가 됐다 이 말입니다. 그럼 그전에는 너희들이 ‘이 말씀대로 바르게 살아야지.’ 했다가 이제는 천사가 개입했다는 그 시점이 된다면 ‘나는 너희들에게 볼일이 없다. 나는 너희들이 기껏 해봤자 나는 너희들이 무슨 생각으로 무슨 짓으로 하는지 다 알았다. 들통 났어. 너희들은 이제 말씀이 주는 혜택을 날라 가 버리고 이제 남아있는 것은 말씀이 주는 처벌만 남아있는 대상이야.’라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고 손에 기계를 들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기계의 용도를 알려주기 위해서 천사 중 하나가 놋 제단 곁에 섰습니다. 이사야 6장 6절에 보면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이렇게 돼 있습니다. 이사야가 천사 세 명을 보았는데 그 중에 한 천사가 제단으로 가서 퍼렇게 핀 숯을 가지고 들고 와서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라고 하는 이사야의 그 입을 지져버립니다.

그러면 이사야의 입 부위는 뭐로 점령돼 있느냐 하면 ‘나는 화로다 망하게 된 사람’이라는 그 고백이 우표딱지처럼 딱 붙어있는 셈이 돼 버려요. 무슨 말이냐 하면 만약 이사야가 복음을 전하면 다른 사람들이 ‘네가 우리보다 더 잘난 게 뭐가 있느냐?’ 이렇게 따질 수가 있잖아요? 그럴 때 이사야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 입술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하는 증거가 내 입에 달려있다. 나는 너희보다 나아서 이걸 전하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은 사람 앞에서 사람만 보고 살아가지만, 나는 천사가 와서 입을 지지는 한 천만, 만만 군중 앞에 있더라도 그런 것은 다 배추밭이고, 나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전하는 말씀만 너희들에게 일방적으로 전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선지자의 실존입니다. 선지자의 자세고 태도입니다.

천사가 사람을 배려하지 않듯이 천사가 손에 작살내는 기계를 갖고 있듯이 선지자도 사람을 배려하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 “내가 사람들에게 기쁘게 하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에 보면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다” 했습니다. 누구? 성령 받은 사람은 다 사도바울과 같은 그러한 시선과 안목을 가지고 세상을 봐야 된다 이 말이죠.

바로 그러한 취지를 듬뿍 안고 하나님께서 이 천사를 예루살렘에 내려 보내주게 됩니다. 그런데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기계라 하는 것은 융통성이 하나도 없어요. 융통성이 없는 기계, 그 기계가 그럼 잔디를 깎는 기계를 들고 왔느냐, 그럼 실물이냐, 그게 궁금하죠. 안 궁금합니까? 천사가 손에 기계를 들고 왔는데 그 기계가 실제로 어떻게 드러나느냐 하는 겁니다. 제가 방금 힌트를 드렸습니다. 기계라는 것은 봐주는 것 없고 냉혹하고 냉정하고, 어떤 강의에서는 저는 그것을 일본의 복면 쓴 사무라이 같이, 긴 칼 등에 찬 사무라이 같다 했는데 아주 차가운 인상의 사무라이. 밤중에 길로도 안 다니고 지붕과 지붕만 휙휙 돌아다니는 인간들. 그것도 보름달 뜨는 밤에. 일본 영화 보세요. 보름밤에 등에 무서운 긴 칼 차고 그림자 내비치면서 가끔은 돌아설 때마다 달빛에 섬뜩 칼의 마광이 비치면서. 소리 없이 집집마다 다니는, 나중에 그들이 뭔가 일마치고 나오게 되면 안에는 울음소리가 벌어지고. 이건 마치 출애굽할 때 출애굽의 마지막 밤, 애굽의 장자들은 졸지에 죽어버리는, 이 집 죽으면 다음에는 그 다음 집 죽고 이 집 죽고, 누가 그런 살인 행각을 벌였던 겁니까? 그들이 바로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손에 기계 들고 있는 천사 아닙니까? 죽음의 천사.

이 죽음의 천사를 하나님께서 보낸다 할 때 이게 실질적인 그 시대는 누가 천사적인 기능을 했는가? 바로 예루살렘을 치는 바벨론, 비정한 바벨론 군사들이 그 짓을 했습니다. 6.25 때 북괴 인민군, 남쪽의 국군, 사상이 달라서 그리고 정치적 상황 때문에 어쩔 수없이 총칼을 겨눴습니다마는 동막골이라는 영화에 보면 인민군하고 국군하고 어느 강원도 산골에서는 팝콘 튀기면서 아주 좋은 관계를 하죠. 사상, 사상하지만 막상 만나 보니까 너도 나도 같은 친구 급이고 같은 말 통하는 같은 우리 한민족이고 사람이었더라는 것을 그 영화가 보여주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보낸 바벨론이 예루살렘 친 때는 이건 사람이 아니무니다. 그냥 질서정연하게 마치 움직이는 기계처럼 움직여서 예루살렘과 유다나라를 처벌하고 징벌하게 된 것입니다. 그럴 때 이 여호와 믿는 유다사람들이 단순히 그들이 칼 가지고 창 가지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을 불태워버리고 이 하나님 믿는 백성들을 사정없이 살해하는 것, 그것도 무섭지만 더 화가 나는 것은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모른다는 사실 이예요.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 감히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을 마치 곤충 다루듯이 사정없이 그야말로, 성경에 나와요. 사정없이 불에 튀기듯이 지옥 같아요. 그런 식으로 유사 지옥을 보듯 너무 잔혹하게 너무 잔인하게 할 때 하나님 안 믿는 인간들에게 하나님 믿는 우리들이 패배했다는 이 자괴감, 저는 이것을 모욕적인 심판이라고 이렇게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 모욕적인 심판이 사실은 모욕적인 구원으로서 모든 구원의 원리의 원칙이 되는 겁니다. 모든 하나님의 구원은 전부 다 모욕적입니다.

이번에 겨울수련회 에스라, 느헤미야를 하면서 에스라, 느헤미야가 70년 후에 성전 짓기 위해서 다시 본향으로 돌아오는데 그때 그들이 독립군 나타나서 데모를 했어요? 아니면 ‘우리 하나님의 성전에 있던 기구를 돌려 달라. 돌려 달라.’ 이렇게 시위를 해서 뺏어가지고 왔습니까? 전혀 아닙니다. 하나님을 전혀 안 믿는 자들이 ‘얘들아, 너희들 하나님 믿어야지? 여호와 믿어야지, 우리가 후원해 줄게.’ 후원금 주고 다 돌아갈 여비까지 주면서 자기 나라의 노동자들도 부족한 판에 유대인 돌아갈 사람들을 다 ‘너희 고향으로 돌아가.’ 라는 이러한 인간 이상의 배려를 베풀어서 그래서 에스라 느헤미야를 통해서 그 앞서서는 그러한 스룹바벨을 통해서 자기 본향에 몇 만 명 모이게 했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렇게 했던 그 바사나라, 우리 실제 세상에서는 페르샤라 하는데 그 페르샤 제국의 사람들이 여호와를 믿었습니까? 하는 문제에 대해서 그들은 조금도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안 믿는 사람이 하나님 잘 믿는 사람들 이런 식으로 후원하고 도와줄 때, 그것을 우리가 느끼는 것은 모욕감 이예요. 우리는 하나님 안 믿는 사람보다 더 못하구나. 얼마나 찌질이 못났으면 우리가 그렇게 저주한 이방인 힘까지 우리가 도움을 받아가면서 이정도로 찌질이가 되어서 여호와를 믿는다면, 우리가 여호와를 믿을 때 멋있게 믿고 폼 나게 믿는다는 우리의 소박한 이 포부는 주님 앞에 다 날라 가 버려요.

그게 이유가 뭐냐 하면 모든 구원이 다 그래요. 흔히 우리가 알다시피 십자가로 구원받는 게 다 그런데, 구약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구원을 할 때는 폼 나게 구원하는 게 아닙니다. 찌질이로 구원 받아요.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우리에게 절망 상태를 유발시켜 버립니다. 절망 상태를 유발시켜 버리면 우리는 여기서 자괴감에 빠집니다. ‘나 하나님 안 믿을래, 내가 하나님 믿는 거 아무 소용없어. 나 안 믿을래.’ 엘리야가 그랬고 여리고성 함락도 그렇고, 홍해 건너올 때도 그랬었어요. 탕자도 그렇고,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모든 성경이 다 그래요. 예외가 없어요. 언약궤가 다윗에게 돌아올 때도 그 블레셋 나라가 원래 언약궤를 쟁취했지만 자기들이 감당 안 돼서 ‘에이 너희들 가져 가.’ 버리듯이 한 것을 주워서 언약궤를 데리고 오는 거예요.

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꼭 구원받을 사람 같으면 폼 나게 구원시키지 않고 이렇게 처절한 패배감과 처절한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감, 왜 그런 환경 속에서 왜 우리에게 모욕적인 구원을 시켜주는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생각하는 천국을, 하나님이 준비한 천국이 아니고, 우리의 야망과 야심과 욕심에 의해서 이미지로 그려낸 천국을 염두에 두고 거기에 맞춤 메시아를 사람들이 또한 만들어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태복음 20장에 보면 포도원비유가 나오거든요. 아시다시피 아침 10시에 온 사람, 12시에 온 사람, 오후 3시에 온 사람, 4시에 온 사람, 이렇게 일군의 시간차를 두면서 예수님께서는 “천국은 이와 같으니라”라고 운을 떼시면서 그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 생각은 이렇습니다. 우리 인간들 생각은 ‘하나님께서 포도원을 만들었는데 거기에 일군을 모집해서 일을 하니까 잘했다고 품삯을 주었다. 그래서 그들은 천국 갔다.’ 우리 생각은 천국은 이랬으면 좋겠어요. ‘아! 포도원은 천국이고, 거기서 일군이라 하는 것은 천국에 영원히 살 하나님의 자기 백성이구나. 그런데 하나님, 주인이 일을 시키니까, 일을 열심히 하니까 아이쿠, 착하고 충성된 종아, 그래서 니가 천국의 상금을 받아라. 해서 한 데나리온을 받았다.’ 이건 뭐 어려운 것도 없고 원래 우리가 그렇게 생각했던 천국 가는 방식과 딱 떨어지죠.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비유를 하면서 “천국은 이와 같으니라”고 하면서 의도적으로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천국을 뒤엎는 반전을 준비해 놨습니다. 10시에 온 사람, 12시에 온 사람, 오후 3시에 온 사람, 5시에 온 사람, 해놓고 우리 생각 같으면 네 부류를 하더라도 ‘어이 아침 10시에 온 사람, 먼저 왔지?’ ‘예’ ‘약속 얼마 했지?’ ‘한 데나리온 했습니다.’ ‘그래’ ‘그렇지, 잘 알고 있네. 자, 받고 집에 가.’ 보내면 될 텐데, 그들이 다 보는 앞에서 제일 늦게 온 사람에게 먼저 품삯을 주는 그 광경을 먼저 온 노동자들이 보는 앞에서 먼저 줘 버립니다. 1시간 밖에 일 안 한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을 줬거든요. 그러니까 아침 10시에 온 사람이 계산이 팽팽 돌아갑니다. 1시간 일한 사람이 한 데나리온, 그러면 나는 아홉 데나리온. 나는 이 포도원에서 저 사람보다 여덟 시간을 더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그런데 나중에 품삯을 똑같이 줬어요. 이 똑같이 줬다는 것, 이것은 인간이 생각하는 천국에서는 이건 뒤집어질 일입니다. 제일 마지막에 1시간 일한 사람은 사실은 앞에 온 사람에 비하면 일을 안 한 겁니다. 아무것도 일한 것도 없이, 자기는 새빠지게 일했고, 그런데 동일한 품삯을 받았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에 해답을 내립니다. “천국은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 천국에 들어가는 방식 가지고 우리가 생각한다는 것은, 천국의 주인이 되시는 주님을 주인으로 삼고 싶지 않아요. 나는 천국의 주인 되신 예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천국을 당당하게 씩씩하게 가고 있는 나 자신을 나의 주인으로 삼고 싶은 이러한 악마적인 본성을 누구나 갖고 있기 때문에, 그걸 빼는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장벽을 만들어 버립니다.

어디에? 진짜 천국 가는데 장벽을 둬 버려요. 그 장벽을 둘 때 ‘하나님 보세요. 제가 이렇게 잘났습니다.’ 하고 당당하게 자신만만하면서 그 길을 가던 자에게 어! 내가 천국 가기 위해서 천국을 염두에 두고 그 천국에 합당한 방식대로 생각했는데 그래서 그 생각들이 결국은 만약에 완료가 된다면, 나는 아주 멋~있는 신앙인, 신앙인 중에서 대단한 신앙인이라고 자부하면서 그야말로 훌륭한 인격자로 도 닦아 가면서 돌변해서 변신되어서 갔다고 생각했는데,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정말 모욕적인 구원 방식을 주께서는 조치를 하시고, 그 모욕을 주기 위해서 천사를 우리 앞에 가로막고 작살을 내버립니다.

세례요한이 옥에 갇혔을 때 ‘예수님이여, 당신이 오실 메시아 맞습니까?’ 할 때 예수님께서 예를 들었어요. “눈먼 자가 눈뜨고 절름발이가 걷고 귀머거리가 듣고 죽은 자가 살아난다.” 이러한 예수님의 하신 말씀이 실제로 세리와 그리고 창녀와 그리고 하나님 모른다고 무시했던 그 이방인들, 그리고 키 작은 삭개오, 그리고 거지 나사로에서 거지, 그리고 사장님의 장부를 조작해서 돈 횡령한 불의한 청지기, 아버지의 돈을 다 홀라당 기생하고 다 날려버린 탕자, 그리고 행실이 더럽다고 온 동네 소문난 막달라 마리아. 그들과 함께 있을 때 가장 예수님은 예수님다웠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남들이 보기에 모욕적인 인생을 간다 할 때 우리는 고맙다 해야 돼요. 주님의 능력이 아니면 내가 알아서 내 인생을 실패 인생으로 나는 나설 위인이 아닙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예수님만 더 사랑하고 예수님만 부각하기 위해서 도저히 안 되는, 도저히 내가 저 자리 안 가리라고 여기는 나를 기어이 나로 하여금 절망케 하셔서 이 자리가 바로 예수님을 보여주는 합당한 옆자리로서 그 자리에 우리를 질질 끌어서 집어넣어버립니다. 그 일을 도와주는데 고마운 천사들이 동원되는 거예요. 빈손으로 오는 게 아니고 손에 기계 들고 옵니다. 타작 기 들고 옵니다.

이런 겁니다. 내가 죄인인 줄 알고 십자가 믿으면 절대로 그런 사람 구원시키지 않습니다. 내가 죄인인 것을 알고 그래서 그 죄를 알아서 ‘이 죄는 십자가 피로만 구원받는다.‘라고 믿는 사람, 내가 장담하건대 단 한 명도 천국 못 갑니다.

그럼 천국은 뭐냐, 십자가에 의해서 내가 죄인인 것을 까발려진 사람만 천국 갑니다. 이건 천기누설입니다.

제가 바로 한국교회나 이 교회가 안타까운 게 사기꾼들 이예요. 이단이 뭔지도 모르고 복음을 안다는 거예요. 이단이 뭡니까? 몰라요. 난 복음을 압니다. 그러면 복음을 아신다면 다른 복음이 뭡니까? 말을 안 해요. 왜, 사람 끌어 모으는데 급급해서. 혹시 내가 저를 이단이라 하면 그 사람이 안 올까 걱정돼서.

구원은 우리가 가고자 할 때 구원되는 게 아니고, 주께서 구원시켜줘야 구원 되는 겁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오게 하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는 그 멘트를 예수님께서 왜 날렸겠습니까? 그 말씀을 왜 했겠어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지어낸 천국, 거기서 멋있게 살아가고 있는 자기의 자아상을 거기다 합쳐서 저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겠다고 나설 때, 십자가는 밀어내는 힘이라고 했어요. 너 쪽에서 내게 오는 것을 십자가로 밀어내야 됩니다. 그런 것은 아침 10시, 12시에 온 사람 이예요.

십자가는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능력이 나오는데, 그 능력이 뭐냐, 이 잘나고 잘난 나를 완전히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하는 그 사람으로 변모시켜서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이 마지막 때에 선지자 노릇을 하게 만드시는 겁니다. 우리에게는 십자가라는 흔적, 이사야에게는 숯불로 지지지만, 그 십자가의 흔적으로 ‘네 죄는 사해졌느니라’ 이러한 인 맞음, 인 맞다. 도장 찍었다 하는 것은 수련회 마지막 10강에 보면 나옵니다. 우리를 냉동 동결시켜서 이제는 사람보다 하나님 지시 받고 살도록 성령께서 우리를 그런 식으로 이끄십니다.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할 도리를 했을 뿐입니다.”라는 것.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날마다 절망케 하시는 것은 내가 내 식으로 천당 가는 나를 만들지 말도록 주께서 강제적으로 개입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천국 가는 것은 이건 내 소관이지, 구원받는 네 소관이 아니야, 네가 생각하는 너는 따로 있고, 내가 너를 천국 가도록 합당하게 만들 거야, 그 과정 속에서 네가 생각한 것은 계속 난 짓밟을 거야. 천사와 성령을 통해서.’ 그렇게 하실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계산하고 상상한 모든 것은 예수님 십자가를 모독하는 일인 것을 저희들은 깨닫게 하옵소서. 이단이라 하면 우리 자신이 매일같이 이단처럼 살아가고 있는데, 이런 우리를 그냥 두지 아니하시고 십자가 앞에서 그마저 죄라는 것을 낱낱이 밝혀내시는 바로 그 자리가 구원의 성도의 자리인 것을 이제는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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