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강-에스겔10장 1-8(네 바퀴 사이에서)130130-이 근호목사
25강-에스겔10장 1-8(네 바퀴 사이에서)130130-이 근호목사
이름 : 오용익(IP:183.105.212.7)
25강-에스겔10장 1-8(네 바퀴 사이에서)130130-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10장 1절에서 8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61페이지입니다.
에스겔 10:1-8
“이에 내가 보니 그룹들 머리 위 궁창에 남보석 같은 것이 나타나는데 보좌 형상 같더라 하나님이 가는 베옷 입은 사람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그룹 밑 바퀴 사이로 들어가서 그 속에서 숯불을 두 손에 가득히 움켜 가지고 성읍 위에 흩으라 하시매 그가 내 목전에 들어가더라 그 사람이 들어갈 때에 그룹들은 성전 우편에 섰고 구름은 안 뜰에 가득하며 여호와의 영광이 그룹에서 올라 성전 문지방에 임하니 구름이 성전에 가득하며 여호와의 영화로운 광채가 뜰에 가득하였고 그룹들의 날개 소리는 바깥뜰까지 들리는데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음성 같더라 하나님이 가는 베옷 입은 자에게 명하시기를 바퀴 사이 곧 그룹들 사이에서 불을 취하라 하셨으므로 그가 들어가 바퀴 옆에 서매 한 그룹이 그룹들 사이에서 손을 내밀어 그 그룹들 사이에 있는 불을 취하여 가는 베옷 입은 자의 손에 주매 그가 받아 가지고 나가는데 그룹들의 날개 밑에 사람의 손 같은 것이 나타났더라.”
오늘 본문에 보면 뭔가 이질적인 것이 서로 섞여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룹이란 천사입니다. 성전이란 원래 사람들만 있는데 여기에 천사가 있고 또 천사만이 아니고 가는 베옷 입은 사람도 끼어있습니다. 천사와 사람이 함께 할 수 있는 성전, 분주하게 여기에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섞여 있습니다. 이 부분은 생중계가 연결되면 다시 하겠습니다. 이렇게 될 때 이 성전이 기존에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성전과 어떤 차이성을 보이게 되는 겁니다. 본문이 좀 긴데 그림으로 묘사한다면 이러합니다.
지금 대대로 이어오는 건축물 성전이 있습니다. 갑자기 기존에 있던 성전과 이질적인 다른 성전의 모양새가 등장한 거예요. 그런데 새롭게 등장한 이 성전이 전혀 성전 같지가 않습니다. 어떤 하나님의 보좌의 형상이 있고 또 천사들이 있는데 자꾸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거예요. 본문에 나오는 가는 베옷 입은 이 사람도 사실은 사람이 아니고 천사입니다. 뭔가 기존에 있는 성전 말고 따로 천사들이 움직일 때 간단하게 말해서 “여러분, 둘 중에 어느 것이 성전입니까?”라고 묻는 거예요. 둘 중에 어느 것이 제대로 성전의 기능을 하고 있는 성전입니까,를 묻는 거예요.
오늘날 우리 입장에서는 이렇게 성경을 보고 있으니까 “그거야 천사들이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서 보좌가 나타나고 음성이 들리고 그룹들 사이에서 숯불을 취하는 이것이 성전이지요.”라는 말을 하게 되지요. 만약에 우리가 그렇게 나온다면 하나님께서 “그래, 이게 성전이지? 그렇다면 네가 지금 지어놓고 다니고 있는 성전을 현재 등장한 이 성전을 위해서 파괴하고 없애버려도 너는 거기에 동의하겠는가?” 할 때 우리는 이래야 돼요. “예, 동의합니다. 동의하고말고요.” 이렇게 나오시면 정상입니다. 제대로 된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이 성전, 천사들이 활동하고 있으니까 이게 진짜 성전인데 이 성전이 눈에 안 들어온다든지 이게 안 믿어질 경우에는 가차 없이 어떤 성전을 유지해야 되느냐하면, 인간들이 건물 지어놓고 예배당이라고 이름 짓고, 거기서 예배순서 정하고 헌금 거두고 전도하고, 그런 활동으로 역사 속에 계속 이어져 나가는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붙잡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떤 사람은 “목사님, 두 개 다 하면 안 됩니까?” 이렇게 물을 수가 있거든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이 둘 다를 용납하지 않고 하나님의 보좌에서 나온 진짜 성전의 활동이 인간들이 성전이라고 우기는 그것을 불질러버리거든요.
이 숯불이 그냥 숯불이 아니거든요. 그룹들이 움직이고 천사들이 움직이는데 그 안쪽에서 사람 손이 나와서 숯불을 취해서 예루살렘 성전을 완전히 불 질러 버립니다. 하나님의 보좌와 지상의 인간들이 만든 성전인 예배당, 둘 다 나란히 평화롭게 공존하면 별 문제가 없는데 하나님의 성전이 이렇게 등장했다는 것은 기존의 성전, 기존의 인간 활동에 대해서 전면 부정하고 나서는 거예요. 전면 부정해버리면, 기존에 인간들이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드린 것은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에 의해서 부정당하는 성전이라면 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나타나셔서 기존의 모든 성전을 무시하고 파괴하는 이유가 뭔지, 그것을 아셔야 돼요.
그것은 우리가 성전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겨서 구원받겠다는 그 구원의 경로 자체를 하나님께서 가위표 하는 거예요. 지금 생중계 안 된다는 표시(×)가 오고 있잖아요. 지상에서 하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는 거부해버리는 겁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을 섬긴다는 그것이 하늘나라까지 도달되지 못한다는 단적인 확실한 증거를 말해주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아주 쉽게 예를 들겠습니다. 어제 제가 목욕탕에 갔어요. 연세가 한 칠십 다섯 쯤 되어 보이는 할아버지가 계셨어요. 여탕은 잘 모르겠는데 남탕에 가면 수건을 끼워서 등을 밀수 있는 도구가 있어요.
등에 손이 안 닿으니 저도 그것을 애용하거든요. 그런데 나보다 먼저 할아버지가 그것을 가지고 등만 미는 것이 아니라 발바닥까지 하고 있더라는 말이지요. 내가 화가 나서 옆에 딱 서 있었어요. 손이 안 닿을 때 그 부분만 밀라고 마련해 놓은 것을 가지고 이 분은 다리며 팔이며 요가동작을 취해가면서 하고 있는 거예요. 혼자 독점해서 10분도 넘게 하고 있어요. 옆에 서 있으니까 눈치를 채고 그만 가버렸어요. 그것을 보고 마침 제가 뭘 생각했느냐, 요한복음 13장을 생각했어요. 발만 씻은 사람은 이미 전신을 다 씻은 것(요 13:10)으로 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 할아버지는 요한복음 13장을 잘 모르는 것 같아요. 내가 나를 구원하려면 지금 나에게 때가 어느 부위에 있으며 내 죄가 어디에 있는 것을 알기에 이 죄가 용서받았다면 그 다음에 이쪽 죄도 용서 받아야 되고, 이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마태복음 5장 29절, 30절에 나오지요.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소고기 부위별로 각 뜨듯이 자르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요한복음 13장에서는 발만 씻어도 몸 전체가 깨끗하다고 하지요. 발만 씻을 때 베드로가 참 중요한 이야기를 했어요. “주여 내 발 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요 13:9)라고 했어요. 인간의 성전이 불타버려야 할 이유가 나옵니다. 인간이 자기가 관리해서 구원을 시키려면 평소에 자기가 자기를 어떻게 죄를 씻는지를 선입견으로 알고 있어요. 인간이 맹탕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오른 눈이 범죄 하면 빼버리라고 했으니까 왼쪽 눈은 정상이라는 뜻이겠지. 만일에 왼쪽 눈이 범죄 하면 이것도 빼야지.’ 이렇게 부분적으로 이야기 하는데 예수님은 발만 씻어도 전신이 다 씻은 것이 된다 할 때에 그 말을 사람들은 이렇게 오해합니다.
‘아하, 발만 씻어도 발 씻은 것이 퍼져서 전신이 용서 되는구나.’라고 자기가 알고 있던 공간범위에서 생각했던 그 죄 용서 법을 예수님 말씀에 마중 나가서 잘못되게 해석해 버립니다. 주님께서 ‘발만 씻어도 전신이 건전케 된다.’고 아무리 이야기해 줘도 우리가 우리 자신을 관리하는 방법, 우리의 죄용서 방식을 유지하고 있으면 그것은 전혀 주님의 뜻하고는 무관한 겁니다. 결론이 뭐냐, 우리가 주님을 섬겨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주님께서 하시는 방식은 우리 인간들이 나를 평소에 깨끗하게 유지하는 방식을 불 질러 버립니다.
이것을 심판의 불로 완전히 태워버려야 돼요. 사람들이 그게 안돼요. ‘열심히 하려고 했는데 이것은 모자라네. 그 모자라는 부분은 주께서 채워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그것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핑계에 불과하고 내가 나를 섬기는 것밖에 안돼요. 그동안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한 것은 사실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고 자기가 하나님 섬기는 그 방식을 섬긴 거예요. “하나님이여, 저는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깁니다. 이 방식에 대해서 나는 옹호 하니 하나님도 내 방식에 대해서 박수쳐주시고 옹호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라는 식으로 성전을 유지해 왔던 겁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이렇게 하십니다. “그것이 성전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섬기는 방식도 아니고 제사법도 아니다. 진짜 하나님의 보좌에서 나온 진짜 성전의 진면목은 너희들이 섬기는 방식이 아니고 너희들이 섬기는 그 방식을 부정하는 것, 없애버리는 것이 진정 하나님의 하나님다움이 뚜렷하게 보일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 되는 겁니다. 눈에서 비늘 벗듯이 뭔가 내 방식으로 앞에 장식된 그것을 치워버려야 되고 그것을 제켜 버려야 돼요.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님의 보좌가 나타나서 성전을 만든다 하는데 이 성전은 어디서 나왔는가?
시편 36편 9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보좌가 나왔다는 것은 하나님의 원천이 나왔다는 뜻입니다. 그 원천에서 쏟아져서 활동하는 것은 그룹들이고 천사들이에요. 그리고 베옷 입은 자에게 나타나서 활동하는 겁니다. 에스겔 10장 6절부터 봅시다. “하나님이 가는 베옷 입은 자에게 명하시기를 바퀴 사이 곧 그룹들 사이에서 불을 취하라 하셨으므로 그가 들어가 바퀴 옆에 서매 한 그룹이 그룹들 사이에서 손을 내밀어 그 그룹들 사이에 있는 불을 취하여 가는 베옷 입은 자의 손에 주매 그가 받아 가지고 나가는데 그룹들의 날개 밑에 사람의 손 같은 것이 나타났더라.”
진짜 성전에서는 어떤 일들이 있느냐?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천사들, 그룹이 있어요. 천사들 옆에 바퀴가 있는데 이 바퀴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좌우사방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에 비해 인간들이 만든 성전은 그냥 이 자리에 있는 거예요. 그냥 한 장소에 있고 사람들이 거기에 모여들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성전은 그것이 아니고 움직이고 찾아가는 거예요. 오늘 설교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입니다. 너무 어려운데요, 찾아가서 어떤 기능을 합니다.
사람은 예배당이 있으면 거기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지만 여기 천사들은 기능 없이는 움직이지 않아요. 움직일 때는 어떤 기능이 있는 것인데 그 기능이 뭐냐, 삭제입니다, 삭제. 백지, 빈 공터로 만들어버리는 겁니다. 이 대목이 어려워서 쉬운 예로 들겠습니다. 여기 벽돌로 세워진 벽이 있는데 그 중간에 창이 있어요. 창은 벽돌로 되어 있지 않고 유리로 되어 있습니다. 벽돌로 죽 이어지다가 중간에 없네, 다시 창을 지나니까 똑 벽돌, 벽돌로 이어진 벽이 나온다. 그러면 창은 이게 벽이냐, 아니면 빈 공간이냐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창문, 창, 창이라 하는 것은 외부와 내부를 서로 통하게 하잖아요. 하나님께서 자신의 보좌, 자신의 성전, 이것을 시편 36편에서 모든 생명이 그 원천에서 나온다고 하니까 생명을 주시는 원천이 되는 하나님의 보좌, 이 성전을 지상에 혹은 역사 속에 나타낼 때는 그 나타낸 지점이 어떻게 되느냐하면, 하나의 창문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있는 것도 삭제해버려요. 없애는 겁니다. 그러면 거기에 분명히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고 뭔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 불타 없어졌네, 그 뜻은 하나님이 여기에 작업을 하셨구나, 라는 뜻입니다.
밤입니다. 밤이 없는 곳입니까, 어두운 곳입니까? 밤은 없는 것이 아니고 밤에도 건물들이 그냥 있지만 어둡기에 그것들이 있는지를 모르지요. 아침이 되면 건물도 나무도 나타나잖아요. 밤은 분명히 그 안에 뭐가 있는데 어둡기에 안 보이잖아요. 창이라는 것이 뭐냐, 애초부터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고 이런 이야기를 하라고 창이 있는 거예요. ‘전에 뭔가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와서 그 있는 것을 지워버렸다.’ 왜 지웠을까, 한다면 그렇게 지울 때 그곳이 유일하게 하늘과 땅이 연결되는 지점이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지상의 성전은 뭐냐, 예배당 짓지 말고 집에서 모일까요? 아닙니다. 집에서 모여도 마찬가지예요. 교회가지 말고 집에서 인터넷이나 들을까요? 성전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 쪽에서 지워버리니까 아예 내가 알아서 교회도 다니지 말고 나는 없다, 이런 식으로 할까요? 그것 아니에요. 주님께서 친히 삭제하고 없애는 그 지점이 유일하게 하늘과 숨통 트여지는 곳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일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 드릴게요. 사람은 성전을 만들든지 뭘 하든지 세상을 볼 때 자기의 확장으로 봅니다.
말씀으로 만든 성전이 따로 있어요. 오늘 본문의 경우에 말씀에 의한 성전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성전 지을 때 자기 돈을 투자를 해서 짓잖아요. 그러면 그 예배당은 내가 돈을 냈기 때문에 결국 나의 확장이에요. 여기에 피아노 기증하신 분이 계십니다. 지금은 안 계시지만 그 분이 만약 이 교회 왔다면 ‘아, 저 피아노 내가 기증한 것이다.’ 그렇게 한다는 말이지요. 그러니 헌금이든 뭐든 자기가 낸 것은 반드시 자기를 떠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영역이 넓혀졌을 뿐이에요. 하나님을 위해서 헌금한다, 봉사한다, 이것이 제발 나에게서 떨어졌으면 좋겠는데 아무리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 쪽으로 가라고 백날 해 봐야 다시 내가 한 것으로 되돌아오게 되어 있어요.
나는 나를 삭제하지 못합니다. 이 이야기를 하려고 그렇게 어려운 이야기를 했어요. 나는 나를 삭제하지 못해요. 나로 호 떠났잖아요. 나로 호 떠나도 내일 새벽 세시 되면 또 관찰해요. 위성교신 잘 되는가 또 살핍니다. 떠나도 떠난 것이 아니에요. 나로 호는 고흥을 떠났어도 그 로켓은 대한민국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그것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이게 자기 확장이에요. 그런 성전은 왜 성전이 아니냐 하면, 원천은 주님의 진짜배기 보좌에서 나와야 생명의 원천인데 인간은 자기가 살아 있으니까 이 생명을 끈적끈적 확장시켜서 이어놓고 그것으로 하늘나라까지 도달해 보겠다는 거예요. 바벨탑, 내가 바벨탑이에요.
어떤 목사님이 설교할 때 이렇게 잘 설교했어요. “여러분, 사람이 많이 모이면 더 지혜롭게 된다고 생각합니까?”라고 묻고 “사람이 많이 모였다고 지혜로운 것이 아닙니다.” 라고 했어요. “사람이 많이 모여서 뛰어난 아이디어를 모으면 뭐가 될까요? 그것은 자기 이름을 하늘에 닿게 하는 아이디어만 나옵니다.” 제대로 이야기한 거예요. 혼자 있을 때 하나님 섬기는 것 같지만 두 명, 세 명 자꾸 모이면 결국 자기가 있는 그 교회를 첨탑으로 올려서 하늘까지 도달해 보겠다는 자기 몸짓을 키우는 것뿐이에요. 자기 몸짓 키웠던 장미란 선수도 결국 은퇴했는데.
사람은 자기 삭제가 안돼요, 자기 삭제가. 신앙생활 오래해도 자기삭제가 안돼요. 그러니까 자꾸 “내가 드렸습니다, 내가 이만큼 섬겼습니다, 봉사했습니다, 전도했습니다.” 자기 삭제가 안 되니까, 원천인 위에서 내려오는데 이것은 밑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유다에게 약속을, 언약을 줬습니다. 언약은 중간이 인간이 잘못해서 취소되면 안 되거든요. 언약은 하나님의 언약이기 때문에 성실과 열심을 하나님 쪽에서 내셔서 반드시 그 언약을 이뤄야 되겠고 인간은 자꾸 딴 생각만 해서 바벨탑을 쌓고 자기 확장을 하고 있어요.
그러니 진짜배기 보좌, 하나님의 생명을 주는 성전이 나타나서 기존에 있는 예루살렘 성전을 BC586년에 다 불태워버립니다. 천사를 보내서 그룹들 사이에서 손이 나왔는데 전달받는 것이 뭐냐, 뭔가 태우는 무서운 제단의 불을 가지고 나와서 가는 베옷을 입은 천사에게 인수인계하고 그들이 심판을 베풀어서 있는 성전을 없애버렸어요. 제가 이런 이야기 하면 어떤 사람은 “그렇게 성전을 없앨 것 같으면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성전을 짓지 말라고 하지 지어놓고서 하나님이 나서서 그 성전을 없애버리면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솔로몬이 성전을 허락한 그것이 잘못이 아니냐?”고 합니다.
그런데 아까 이야기했듯이 창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고 있는데 없어진 것입니다. 밤이라 하는 것은 분명히 안보이지만 낮이 되면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뜻을 남기고 펼칠 때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실컷 우리보고 하게 해놓고 삭제시키고 또 하게 해놓고 삭제시키고 또 하게 해놓고 삭제시킵니다. 아까 생중계가 안 되어서 정신없이 했는데 다시 해 봅시다.
베드로에게 “베드로야, 너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 “왜요?” “내가 너 그냥 용서하면 용서되는 거야.” “예, 알겠습니다.” 이러면 될 것을 주님께서 “베드로야, 발을 내 밀어라.” 발을 씻기니까 베드로 하는 말이 “전신을 다 씻겨주옵소서.”라는 자기가 자기 관리하는 숨겨진, 평소에 나는 이런 식으로 예수님에게 다가가고자 했음을 들통 내는 겁니다. 베드로가 아주 중요한 인물이에요. 우리대신 좋은 소리를 많이 했습니다. 주님께서 용서하라, 하니까 베드로가 대번 하는 말이 ‘몇 번 용서해야 용서 했다고 칠 수 있습니까? 일곱 번 용서하면 됩니까?’라는 발언을 했잖아요.
얼마나 좋은 질문입니까? 우리가 말은 안 해도 평소에 생각했던 그 질문을 그대로 한 거예요. 기도를 하는데 몇 분 기도하면 됩니까? 같은 거예요. 전도를 1년에 몇 번 하면 됩니까? 같은 질문이에요. 용서를 몇 번 하면 됩니까, 일곱 번 하면 됩니까, 라고 할 때 주님께서는 그러한 질문이 나오도록 함으로써 그 베드로의 사고방식이 마귀의 생각이라는 것을 고발하면서 무시해버리지요. 그런데 그렇게 무시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런 생각이 있는 줄 알면 그런 질문 하지 말고 사전에 알려주지 사람 부끄럽게 자기본색 다 드러내게 해놓고 그것을 무시해버리면 나는 뭐가 돼?’라고 되잖아요.
그렇게 무시당한 그 현장이 바로 하나님의 양을 키우는 노하우가 되는 겁니다. “ 는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오해했는데 어이, 양! 너도 나처럼 똑같이 오해하고 있을 거야. 그런데 주께서는 그것이 잘못이라고 우리를 완전히 삭제시켜서 없애는 방식이 이제 너희에게도 그대로 임할 것이다.”라고 하는 겁니다. 베드로 이야기를 또 해봅시다. 베드로가 꿈을 꾸는데 보자기가 내려왔지요. 보자기가 안내려왔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베드로가 무슨 생각하는지 자기생각을 자기도 몰랐던 겁니다. 보자기가 내려왔는데 하나님의 율법에 따르면 못 먹는 것만 소복이 다 내려왔어요.
우리생각 같으면 그 중에 먹을 수 있는 것이 좀 있으면 못 먹는 것만 빼놓고 골라먹으면 되는데 내려온 것은 다 못 먹는 것이었다는 말이지요. 그렇게 내려왔을 때 우리는 뒤쪽 이야기를 아니까 “베드로야, 먹어라, 먹어. 먹으라면 그냥 먹으면 되는 거야.” 하겠지만 막상 우리가 베드로고 베드로가 다른 제자한테 비슷하게라도 일어난 적이 없이 자기한테 처음 일어났을 때 “베드로야, 먹으라.”할 때 베드로가 먼저 생각한 것이 뭐냐, 율법에 위반되는 것은 먹지 말아야 한다는 자기생각을 가지고 보자기를 봤어요.
보니까 거기는 율법에 의하면 못 먹는 것만 있더라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저는 먹지 않겠습니다.” 한 거예요. “저는 먹지 않겠습니다.” 하는 그 인간을 하나님께서 자기 양을 섬기는 사도로 세운 겁니다. 천사처럼 순종하는 것이 아니에요. 베드로가 인간이고 죄인이지 천사가 아닙니다. 자기고집이 있어요. “저는 먹지 않겠습니다.” 하는 그 인간이 나름대로 복음을 전파했다면 그는 계속해서 나의 이 전도가 내 구원에 이익이 될까, 보탬이 될까를 생각할 것이 아니냐는 말이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고 자기의 구원에 이르기 위한 바벨탑의 용도로서 실시하는 것뿐입니다.
내가 이 일을 함으로써 하나님이 얼마나 착하다고 할 것인가, 그러면 그 착함이 구원받는데 유리한 스펙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그 자기 확장의 사고방식이 그대로 있을 것이라는 말이지요. “먹어라.” “못 먹습니다.” 그대로 올라갔어요. ‘그러면 그렇지. 내 뜻과 주님 뜻이 같을 거야.’ 그런데 또 내려온 거예요. “먹어라.” 두 번째도 “못 먹습니다.” 세 번째 “먹어라.” “못 먹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고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고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경로로 해서 사실은 나를 섬기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는 벽돌이 되기를 원했지 아무것도 없는 빈창으로 있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밝은 대낮처럼 살기를 원하지 어두움, 내가 있는지 없는지 분간도 안 되는, 내가 있어도 알아주지 않는 그 깜깜한 어두움 속에 있는 인물이 되기를 싫어합니다. 어쨌든 나는 과시해야 되고 자랑해야 되고, 나 여기 있다고 외쳐야 되고, 내가 어두움에 잠겨 있는 있으나 마나한 존재되기를 굉장히 싫어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오셔서 성전제단에서 숯불 가지고 우리에게 집어던지면 우리는 그야말로 새까맣게 타버리면서 새까맣게 타는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는 지점이 되는 겁니다.
이제는 베드로가 움직이면서 나는 이런 인간이었습니다, 하고 움직일 때 그 베드로가 가는 그 곳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 작업이 이루어지는 그 장소가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 어려운 말씀, 고린도후서 6장 16절,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도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신다. 고집은 고집대로 피어나면서도 동시에 그 고집이 고집이라고 일깨워지면서 주님 앞에 늘 부정당하는 그 작업이 남들에게 예수의 증인노릇을 하는 하나님의 성령의 작업장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실력 키워서, 똑똑해서, 설득력 있게 전하면 그게 전도라고 생각했는데 그 방식은 이미 우리 선배 된 유대인들이 그런 식으로 해서 하나님의 성전이 홀라당 하나님에 의해서 다 타버렸습니다. 다 타버려서 재밖에 없을 때 비로소 그들은 재밖에 남지 않은 그 성전, 아무것도 없다고 했는데, 어두움인데 바로 거기서 예수님이 빛으로 등장하잖아요. 하나님의 방식은 그거예요. 내 것은 죽이고 그 죽었다고 생각하는 거기서 내가 나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쏙 뽑혀 나와서 주님의 이름으로 재 같은 죄 많은 우리가 뒤따라가면서 쓰이는 방식으로 오직 주의 구원은 진행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전이 불탔습니다. 불타게 하기 위해서 진짜 보좌가 나타났습니다. 생명은 위에서 주어지는데 우리는 잘못 생각해서 우리 쪽에서 다가가면 구원이 되는 줄 알았습니다. 사람의 생각은 사탄의 생각이라고 지적받으면서 날마다 올라오는 이 사탄의 생각을 날마다 하나님께서 지적하시고 부정해주셔서 그 작업자체가 주님의 살아계심을 증거 할 수 있는 작업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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