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30111b-히1장1절(마지막에) - 이 근호 목사
안양20130111b-히1장1절(마지막에) - 이 근호 목사
이름 : 공은주(IP:211.211.100.169)
안양20130111b-히1장1절(마지막에) - 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합시다. 첫 시간 끝에 본체의 형상이라 되어 있어요. 자, 여기서 어려워요. 형상이라는 말은 재료가 있고 재료를 조립하니까 어느 모양새 나온 걸 형상이라 합니다. 구리가지고 사람 상을 만들었다. 그럼 구리는 뭐가 되겠어요? 재료. 구리를 그냥 놔두면 사람모습 아니잖아요. 다듬으니까 모양새가 나왔지요. 그럼 모양 자체는 재료입니까? 아닙니까? 아니지요. 재료는 구리고, 그 모양새 이것을 형상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거 이해되시지요.
그 다음 문제 질문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그 생각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참 어렵지요. 귤이 있지요. 이게 식물세포로 돼 있지요. 그럼 식물세포가 다 귤입니까? 대나무도 있고, 코스모스도 있지요. 아니지요. 식물세포 중에서 이렇게 다듬어지니까 이걸 우리는 귤이라 부르지요. 그러니까 귤 모양새는 형상이라 하고 재료는 뭐다? 그냥 식물세포지요. 이 생각 맞습니까? 틀립니까? 그 생각은 틀렸습니다.
모든 상식으로 합당하고 그러니 인간은 죄인이라 하는 것은 그 순간 잊어버려요. “아, 구리는 재료, 형상은 하나님이 봐도 맞는 거다.” 라고 할 때 깜빡 뭐를 잊어요?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잊어버리는 순간이 되는 거예요. 귤은 식물세포로 돼 있고 재료로 돼 있고, 모양새는 둥그렇고 작게 돼 있다. 크면 호박 되니까 아니다. 이렇게 작아야 귤이다. 이게 귤의 형상이다. 이리 보거든요. 주의 형상 다르고 곰의 형상 다르고 사람의 형상 다르듯이 재료는 같더라도 모양새는 다르다. 이 생각이 틀린 생각입니다. 그러면 이게 틀린 생각이라면 그러면 바른 생각은 뭐냐, 이렇게 질문해요. “너는 그것이 왜 옳다고 생각했는가?”를 추궁을 해요.
이것이 구리로 만들었고, 형상은 동상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고 하는 근거는 뭐냐 하면, ‘그러니까 하나님 저를 벌하시면 안돼요.’ 라는 게 담겨있어요. 인간에게서 나온 것에 대해서 하나님 벌하시면 안 됩니다. 라는 것이 깔려있다 말이지요. 그런데 선악과 따먹은 존재는 어떻게 된다? 죽으리라 했지요. 그러면 구리가 재료고 구리로 만든 동상도 형상이라고 여겼던 내가 어떻게 된다? 저주 받아서 지옥에 가야 되는 거예요.
헨델이 메시아를 작곡했잖아요. 놀라운 찬양곡을 했지요. 그런데 만약 헨델에 성령이 안 오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작곡하고 어디 가야 돼요? 지옥 간다니까요. 본인은 얼마나 억울합니까? 천재적인 재능가지고 음표해서 하나님께 할렐루야! 할렐루야! 찬양했는데 가기는 지옥 갔다. 하나님께 “저는 하나님께 메시아로 영광 했는데 왜 안 됩니까?” 그거는 영광이 안 된다는 거예요.
왜냐 하면, 3절에 보면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지요. 영광은 누구만 영광이 돼요? 아들만 영광이 되는 거예요. 여기에 대해서 만약에 그런 생각을 했다면 헨델은 도전한 겁니다. 악마의 심보로 도전한 거예요. 아까 첫 째 시간에 그 사람과 똑같은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만 영광인데 예수 믿는 나도 영광에 착한일할 수 있고 선한 일할 수 있다고 끼려고 하는 거예요. 예수님만 붙어있어야 할 곳에 이것저것이 달라붙어 있는 형국이다 말이지요.
3+5=8이다, 맞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은 참 잘했다고 ㅇ표를 해요. 어떤 사람은 3+5=9라 해요. 이것은 x표 하지요. 참 못 했어요. 잘라버리는 거예요. 우리의 기준은 3+5=8이 되어야 되고, 3+5=9는 틀린다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이것이 다 틀렸다는 거예요. 그러나 틀린 이유를 인간이 압니까? 모릅니까? 아무도 모르지요. 인간이 십자가에 들어가기 전에 지가 아무리 바르게 예수님 믿고 해도 그 자체가 틀렸다는 사실을 내가 예수님 십자가 믿는 게 틀린다는 사실을 본인은 몰라요. 성령을 받지 않으면 그걸 몰라요. 하나님 믿고, 삼위일체 믿고 이 모든 게 죄라는 사실을 몰라요. 내가 도둑질하는 것은 나쁜 짓이고, 예수 믿는 것은 착한 짓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 자체가 나쁜 짓인데. 거기에 뭐가 들어있는가 하면, “하나님, 저를 벌하시면 안돼요.” 이게 들어있어요. “십자가는 예수님 혼자 지시고 저는 십자가 안 져도 되지요?” 라고 하는 거예요.
만약에 우리보고 주님께서 십자가 진다면 질만한 이유가 있어 지라고 했잖아요. 십자가 안 지고도 구원 받을 계략을 우리가 꾸미는 거예요. 십자가 안 지고도 구원 받을 계산한다 말이지요. 그냥 십자가 믿어주는 걸로 때우자 이 말이거든요. 이게 마귀가 마지막 카드입니다. 마귀가 마지막 던지는 조카가 뭐냐 하면, 예수님 믿어 주는 거예요. 마지막 카드 예수님 믿어 주고, 성령 받았다고 우기고, 그러면서도 마음속에는 예수님 없고, 내가 이 정도까지 하는데 설마 날 버리겠는가, 하는 겁니다.
그러나 히브리서11장을 미리 당겨서 이야기하면,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믿음의 선배들이 있지요. 공통점이 있어요. 자기가 하나님을 믿은 적이 없어요. 믿음이 나를 만들어내는 거예요. 믿음이란 분이 예수님인데, 예수님이 나를 만들어가다 보니까 내가 했다하는 게 없다는 거예요. 내 뜻이라 하면 나는 절대로 바로 공주의 왕자로서 만족하지 고난 받지 않습니다. 내가 내 뜻이라면 절대로 방주 만들지 않고, 내 뜻대로 하면 절대로 할 수 없어요. 내 뜻이 아니기에 방주 만들었어야 했고, 내 뜻이 아니기에 바로 공주의 아들 됨을 청함을 거부했어야 했고, 내 뜻이 아니기에 톱에 켜임을 받은 거예요. 미쳤다고 톱에 켜임을 받고, 태어날 때부터 이사야 돌 잔치할 때부터 “니 실 쥘래? 책 볼래? 돈 쥘래? 톱 쥘래?” 이런 거 없잖아요.
예를 들면 이사야가 톱에 잘렸다면 이것은 절대 본인의 의사가 아닙니다. 다윗이 돌 못 던져서 환장해서 ‘아이 씨~ 돌 던질 데 없나?“ 하고 환장해서 골리앗과 싸운 게 아니에요. 대구강의에서 했잖아요. 만군의 하나님이 개입했다고요. 그러면 도대체 나보다 누가 더 세다? 믿음이 더 센 거예요. 그게 바로 믿음이에요. 그러니까 나보다 더 센 것을 선악과 따먹은 인간으로서는 용납이 안 됩니다. 따먹은 값을 한다고 마귀가 요번에는 뭐 될꼬? 신 될게. 마귀는 나에게 힘을 줘야 돼! 알았어. 이리 되는 거예요.
나보다 더 센 분에게 일방적인 뜻에 의해서 나는 일방적으로 놀아난다는 것이 얼마나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지요. 잠언서에 나오지요. 부한 자도 누가 지으시고? 가난한 자도 하나님이 지었다. 우리는 이왕이면 부자 돼서 구원받고 싶지요. 그러나 부자 돼서 구원받는 사람도 있고, 부자 돼서 지옥 가는 사람도 있고, 가난해서 구원받는 사람 있고, 가난해도 지옥 가는 사람 있는 거예요. 그런데 가난한 자나, 부자나 공통점이 있어요. 내가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수용하는 사람들이에요. 나보다 누가 더 세다? 누가 더 넓다? 하나님이 더 크시고 넓은 거예요. 누가 주를 이기랴, 고린도전서에 나오지요. 누가 감히 주를 이기겠는가? 누가 주보다 강하겠는가? 올 한 해 2013년도에도 늘 주님이 강해지시길 바랍니다.
여기에 보면, 3절 끝에 봅시다.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다, 했지요. 우리 중에 누가 하나님 우편 중에 앉아있습니까? 아무도 없지요. 그러니까 보세요. 우리가 주님을 따라 잡으려고 애써도 주님 하는 것을 우리가 흉내 낼 수가 없습니다. 격이 달라요. 노는 게임이 달라요. 우리가 하는 찬양, 기도 그 정도 수준 아니고 아예 하나님 우편에 앉아버립니다.
그 다음에 3절에 보면, 죄를 정결케 하시는 일을 하시고 우리는 죄 용서 받을 뿐이지 우리 스스로 우리 죄를 정죄할 수 있는 그런 재주가 없어요. 정화수 떠 논다고 우리 죄가 없어지고 하지 않잖아요. 그러면 죄를 많이 지면 정화수 한 드럼을 놓겠다. 풀장을 만들지. 정화수를 국립과학수사대에 분석해 보세요. 그게 얼마나 박테리아 대장균이 많은지. 그게 무슨 정화수입니까?
인간에게는 인간의 지평이라는 게 있어요. 지평이라는 말은 인간의 한계성을 두고 지평이란 말을 해요. 인간의 한계가 있다. 이런 말 보다는 현대철학에서는 인간의 지평이 있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인간의 한계가 있다와 인간의 지평이 있다, 와는 다릅니다. 한계가 있다하면 여기까지 한계네, 하고 한계를 알 수가 있어요.
그런데 지평선을 보세요. 지평선을 만나려고 아무리 가다서도 지평선을 가면 지평선도 같이 분명히 한계는 있는데 손에 잡히지를 않아요. 달을 잡는 거와 같아요. 여기 지평선이 있었는데, 가보면 마치 지평선은 저리 가있어요. 시크릿 가든의 OST있잖아요. 한 발자국 다가서면 두 발자국 물러서고, 바람 같은 사랑, 이 거지같은 사랑, 나오잖아요. 보세요. 한 발자국 다가서면 물러가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어디에 있다? 여전히 뭔가 지평에 있다. 내가 요 정도하면 착한 일이라 하는 것은 고 정도 지평선이 고 정도 밖에 안돼요.
그런데 예수님의 지평선은 어디까지입니까? 태초부터, 창조 전 부터, 세상이 끝날 까지 그 지평선이 다를 보잖아요. 다를 보시는 그 입에서 나오는 멘트, 그 말씀을 지 코앞에서 붙들고 있는 인간이 그걸 지켜낸다 이 말입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예요. 여기 떡이 있는데요. 떡이 맛있을 때, 떡 만든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합시다.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떡을 잘 만든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뒤에서 뒤통수 날아옵니다. 왜 그렇게 이야기합니까? 지가 아는 지 동네, 인덕원 근처에서 안양근처에서 떡은 최고지요. 그런데 세계 떡 대회 해봤습니까?
어느 가수가 선배가수 앞에서 이런 소리합니다. ‘내가 세계에서 노래 잘 부르는 10명의 가수 중에 한 명입니다.‘ 라고 했다가 욕 되게 얻어먹었어요. 선배가 ’야, 야, 니가 세상을 모른다.“ 그 소리에 후배가 쏙 들어갔어요. 지는 젊을 때, 한창 잘 나갈 때, 그 소리하는 것은 자신감이 있어 했거든요. 인생을 살아보니까 날고 기는 사람의 국내에서도 안 보여주는 노래다 말이지요. 해외에는 놔두고. 인생을 나중에 40대, 50대 지평가지고 인생을 논한다. 나중에 죽을 때 되면, 사람은 결국은 한 마디에요. 소고기 먹으면 뭐하노? 그거라니까요. 잘났다 못났다 도 죽음이란 그 앞에 인간은 똑같아요. 똑같아.
죄 값은 사망이다. 뭐만 진리입니까? ‘죄 값은 사망이다.’ 라는 말씀만 진리에요. 우리는 그 진리 안에 지평선 안에 우리는 거기에 들어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증거 할 것은 나 이만큼 믿었다, 잘 지켰다, 하지 말고 내 행한 거, 착한 거, 이 따위 소리, 이제는 착한일 할 수 있다, 이게 아니고 오직 말씀만이 진리입니다. 나는 그 앞에서 나의 현재의 지평선 밖에 모르기 때문에 그 격차가 뭐다? 결국은 죄이다. 나는 뭘 해도 죄인입니다.
그 말씀의 주인공이 누구냐, 모든 말씀은 누구를 소개하고 있습니까? 예수님 소개지요. 그래서 그걸 합쳐서 보면, 예수님 안에 모든 말씀이 들어있고 곧 예수의 말씀이고, 말씀이 예수님이니까 그 앞에서 우리는 뭘 해도 죄인이고, 그 우리가 미처 몰랐던 죄까지 주님께서는 3절에 보면,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신 겁니다. 이걸 여러분들이 아신다면 우리는 히브리서를 통해서 도대체 나는 내 지평선을 벗어난 적도 없고 기껏 생각한 것이 우물 안의 개구리밖에 안 되는 요 정도밖에 모르는 죄인인데, 어떻게 그 죄를 무슨 수로 정결케 했습니까? 라고 묻게 되면, 그 다음 내용이 히브리서 내용의 전부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오직 찬양 받으실 분은 누구 밖에 없습니까? 예수님 밖에 없다는 겁니다. 올 해 2013년도 우리는 정결케 받은 자로서 푸짐하고 그냥 무던하게 푸근하게 그저 세월아 내월아 하는 대로 사시면 되는 겁니다. 우당탕탕하던 집구석 불나던 관계없어요. 그냥 살면 항상 저주의 자리에 가게 되어 있습니다. 저주의 자리에 가있으면 주께서 말씀대로 이미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게 하시고 알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할 때도 아주 넉넉하고 자리 쭉 펴고 편안하게 강의 들으시면 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5절 봅시다. 1절부터 4절 이해되셨지요? 오직 그리스도 앞에는 이것저것을 벗겨낸다는 것. 쓸데없는 거 다 벗겨내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원형이다. 본체의 원형이 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원형 또는 형상이라는 말이 나왔으니까 아까 그 형상하고 우리의 형상하고 잘못됐다, 했습니다. 구리로 동상 만드는데 동상의 모양새는 형상이고, 구리는 재료다, 하는 그 생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입니다. 그건 우리 인간들의 상식이지요. 그건 잘못됐다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이라 하는 것은, 뭐가 없느냐 하면, 재료라는 것이 여기서는 허용치 않습니다. 형상 있으면 재료가 있다, 이런 생각은 예수님한테는 허용이 안 됩니다. 그러면 뭐가 되느냐 하면, 형상은 하나님의 일을 그대로 베껴서 지상의 일을 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형상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 하는 것은 우리는 그냥 모양새잖아요. “야, 니 형상 좋다.” 하는 이 말은 니 모양 좋다 하는 말이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은 형상이 없으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일만 하시는 분이에요. 이 지상에서. 물론 하늘나라에 보좌가 있지요. 그러나 이 땅에서는 형상에서는 일로서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요한복음에 나오는 말씀처럼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내 하는 일을 통해서 아버지를 알라, 이리하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사람들은 아버지를 보이라 했거든요. 도마라는 사람이. 보이라는 말은 지한테 눈이 있고 눈의 기능이 뭡니까? 보고 눈에 띠이면 믿던지, 말던지 지가 결정 하겠다 이말 이거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면 제가 믿을 용의가 돼 있다, 이 말이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은 뭐냐 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었잖아. 그런데 나를 보고도 아버지를 왜 보이라 하느냐?”라고 했다 말이지요.
그건 뭐냐 하면,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게 되면, “에이, 마리아 닮은 사람, 키는 몇 센티” 이리 나오는 거예요. 왜냐 하면 평소에 사람의 형상대로 보는 식으로 예수를 보기 때문에 그냥 예수님의 형상을 빤히 보는 거예요. 보고, 하나님일까? 아닐까? 저건 선생님인데, 이리 생각한다니까요. 본인의 형상화 생각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잘못된 시선가지고 예수님을 보니까 예수님의 형상인 것이 안 보이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님의 형상인데, 사람의 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예수님의 형상이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내 하는 일을 통해서 내가 아버지와 함께 있다는 것을 네가 알라, 이 말이에요. 보고서 믿을 생각하지 말고 내 하는 일을 통해서 니가 믿어라, 이 말입니다.
그런 적당한 예는 아닌데요. 쉽게 하기 위해서 예를 들게 되면, 선을 부모가 알아서 보고 자식들에게 인계하듯이 그냥 결혼시킨 경우가 많이 있잖아요. 실제로 대구의 봉화에 근무할 때, 봉화의 어떤 공무원인데, 어릴 때 부모가 가문의 하나의 전통으로서 어른들이 선보고 좋다 해서 아들한테 떠맡긴 거예요. 아들은 부모한테 효도한다는 기본적인 양심에서 결혼해 놓고, 애까지 낳아놓고 정말 살기 싫은 거예요. 보기는 봐도 보기 싫은 거예요. 그래서 서울에다가 진짜 사랑하는 여자 만나서 이 여자랑은 그만 뒀지요. 왜냐 하면, 마음에 안 드는 걸 어떻게 합니까? 지가 선택했거든요. 강제로.
그런데 만약에 예수님을 봅시다. 진짜 여자가 예수님처럼 생겨서 너무 마음에 안 들어요. 그런데 그 여자가 막상 와가지고 얼굴도 보기 싫고 영 마음에 안 드는데 하는 일을 보니까 항상 자기가 예상 밖의 놀라움을 제공하는 일을 합니다. 항상 지가 예상했던 지평, 아마도 내가 이렇게 하면 여자는 이렇게 나올 것이다. 하는 남편이 생각하는 지평이 있잖아요. 지평 외에 속하지 않는 다른 일을 했을 때, 남자는 깜짝 깜짝 놀라는 거예요. 잠언서에 나오지요. 아내를 주신 자는 여호와가 줬다. 니가 생각하는 지평 넘어 어떤 세계가 있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아내를 준 거예요. 그걸 지평의 융합이라 합니다. 두 개의 지평이 서로 만나는 거예요.
지평의 융합을 하게 되면, 이제는 나의 세계가 아니라 너의 세계마저 나의 세계 되면서 자기 한계 속에 자기 지평 안에 있던 한계를 상대방을 통해서 극복할 수가 있어요. 극복한다는 말은 뭐냐, 나는 내 안에서 잘했다 하는 짓인데, 당신을 만나고 보니까 내가 얼마나 마음이 높았고, 교만했다는 것을 깨닫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봉화에 있는 공무원은 다른 여자 찾지 말고, 비록 마음에 안 들더라도 살아가면서 내가 미처 생각 못한 다른 일을 발견하는 그 재미로 부부생활을 해야 되는데, 그것마저 없다 그 말이에요. 이야기 들어보니까 정말 살기 싫어. 정말 보기 싫어요. 보고 싶다가 아니고 정말 너무 보기 싫어. 서로가 불행해져요. 결국은 갈라섰습니다. 아~ 참, 아버지한테 효도하지 말라 그 말이에요. 왜 그 당시에는 효도할 수밖에 없는 게 지 지평이 우리는 유교집안이니까 아버지 말을 들어야 복이 온다는 거, 사실은 맘에 드는 게 아니고 혹시 살아계신 어떤 우주의 신께서 아버지에게 효도했다고 복 줄게, 하는 이런 자기 이익과 관련이 있어요. 말은 안 해서 그렇지 다 있다고요. 사람들이 복하는 것도 다 지 잘해달라는 그런 노림수 때문에 당하는 거예요. 누구 핑계 댈 것도 없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은 눈으로 목격해서 믿는 게 아니라 했지요. 그럼 방금 제가 한 말 정리하게 되면, 예상 밖의 일, 그런데 예상 밖의 일은 항상 우리를 놀라게 하는데, 기쁨으로 놀라게 할까요? 슬픔으로 놀라게 할까요? 그거는 그 때 그 때 달라요. 그거는 몰라요.
휴대폰을 놔두고 왔다. 아, 미치겠다. 슬프지요. 하나님께 원망되지요. 하나님이여, 그 때 내 머리를 자극해서 챙기도록 못 해주시고 왜 안 챙깁니까? 하나님께서 내 머리를 주관하지 않으셔서 잊어버렸잖아요. 했는데 그 휴대폰이 주머니에서 나왔을 때, 아! 하나님께서 잃었다가 얻었다는 기쁨을 주시려고 잠시 잃었다고 착각할 뻔 했구나! 주께 감사합니다. 이리 되는 거예요. 그것도 예상 밖의 일이에요. 그런 것도 앞으로 건망증 생겨서 부지런히 일어날 겁니다. 계속 그런 일이 깜짝 깜짝 놀랄만한 일과 더불어서 그 놀랄만한 일이 내 예상하지 못한 다른 식으로 해결될 때 오는 그 기쁨을 이건 또 보너스에요. 예상 못한 기쁨을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머리가 허옇다고 고민하고 있는데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는데 “니, 우리 머리에 비해서 완전히 새까맣다.“ 할 때 갑자기 예상 못한 칭찬을 받을 때 갑자기 업그레이드되는 이 기쁨! 주께서 주신 기쁨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 그러니까 우리는 그냥 하나님이 갖고 노는 노리개에요. 노리개. 웃었다가 울었다가 사랑할 때가 있으면 미워할 때가 있고, 좋고 기쁠 때가 있으면 울 때가 있고, 전쟁할 때가 있으면, 화평할 때가 있고, 세상은 마치 파도처럼 돼서 우리는 그 안에 떠있는 물 분자에 지나지 않아요. 결국은 주님의 지평과 우리의 지평이 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다음에 6절 봅시다. 4절 끝에 보면,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이리 되어 있는데, 여기서 기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요새 하도 자본주의에서 기업하니까 회사를 이야기하는데, 이 기업은 회사가 아닙니다. 저는 처음에 교회 갈 때, 기업이라 하니까 아브라함 때 무슨 기업체가 있었는가 했는데, 기업이 그런 기업이 아니고 이것은 유산, 유산을 줬다.
그런데 유산과는 좀 달라요. 유산은 아버지 것을 “얘! 아들아, 오너라 아버지 것을 이제는 네 거다.” 어떤 물건을 넘겨주는 것이 유산이잖아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유산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물건을 넘겨주는 게 아니고 우리 자체가 유산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유산을 받아서 소유하는 게 아니고 나는 새로운 피조물을 내가 받아서 새로운 피조물 내가 소유하는 게 아니고 내 자체가 그냥 하나님의 믿음에 의해서 믿음의 증인으로서 만들어져가는 관리대상이 되는 겁니다.
내가 주님을 관리하는 게 아니고 주님이 나를 다듬는 관리대상이 되는 거예요. 다듬는 관리대상으로 삼는 거예요. 그래 놓고 우리를 내가 만든 기업이다 하는 거예요. 구약에 보면, 아브라함의 기업이 뭡니까? 아브라함의 유산이 누구지요? 이삭이지요. 아브라함이 키웠던 양, 소가 아닙니다. 그걸 주는 게 아니고 이삭 자체가 유업이에요. 왜? 아버지의 믿음 때문에 생긴 거니까. 이삭이 있고 받는 게 아니고 이삭 아예 없을 때에요. 사람이 있어야 받지, 본인도 없는데 뭘 받아요. 없는데 이삭을 낳음으로서 이삭 자체에 유업이 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이삭의 유업은 누가 됩니까? 에서가 됩니까? 야곱이 됩니까? 야곱이 되는 거예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 계열이 뭐냐? 요게 바로 약속의 기업이라, 약속의 유업이라 되는 거예요. 죽었더라가 죽었다가 아니고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나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라 하는 이 말은 현재 살아있는 사람의 하나님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살려 줄 경우에만 나의 약속의 열매로서 비로소 산자고 그 산 자를 살게 하신 것이 바로 하나님이고, 그럴 때 하나님과 너 사이는 유산의 관계다, 유업의 관계다, 이 말입니다. 그게 아브라함의 언약입니다.
그냥 사시면 된다니까요. 그냥 사시면 알아서 유업으로 만들어 내요. 뭐라고? 내가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이 고백이 자발적으로 나오도록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자발적으로 나오는데 그걸 하루 열 대 번 미리 당겨서 해버리니까 이거는 전혀 새롭지도 않고 그저 내 지평 안에 있는 내 주머니 밖에 안돼요. 성경 안다고. 여호와 증인처럼.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하는 것은 내 지평에서 나오면 안 되고 내 넘어 있는 지평에서 일이 터져서 나와야 내 지평마저 몽땅 그 분에게 안길 수 있잖아요. 네 거는 내게 아니고 주님의 겁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이리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가난하다 생각하지 말고 받친다는 생각에서는 부자나 가난한 자나 차이가 없습니다. 귤 밭이나 사과 밭이나 마찬가지에요. 돈 바치나 종이 바치나 마찬가지에요. 누구를 향하여 라는 점에서는 같은 기업의 모습이기 때문에 현재 내가 가진 게 얼마나 가지고 너무 낙담하거나 좌절하거나 인생 실패했다고 그렇게 슬퍼하거나 노하지 마세요. 엮어져야 돼요. 자기 과시하지 말고 자기를 인도하신 주님을 증거 하면 되는데 우리는 그것을 가위로 다 잘라버리고, 니만 십자가마을 복음 십자가 아나, 나 좀 알아줘 하는 식으로 나오니까 그건 들어주면 안돼요.
오늘 오다가 기차간에서 이단들이랑 상황이 벌어졌어요. 넷이 모여서 여호와 증인 같아요. 앉아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내가 시끄럽기를 기다린 건 아니지만, 떠든 거 지나가는 안내양 보고 조용하라고 전했어요. 그런데 지날 갈 때는 안 떠들거든요. 불러서 지금까지 계속 떠들었는데 저 쪽에 있는 인간 전화까지 했습니다. 안내양은 안 가려해서 내가 가서 조용히 하라고 해버렸어요. 넷이 발끈했어요. 나중에 대전에서 내리면서 나보고 가면서 학식도 많아 보이는데 떠들어서 미안합니다. 지금 내를 비꼬는 거 같은데. 비꼬는 게 아니고 진심으로 미안합니다. 그런데 너무 학식이 많아서. 이렇게 하는 기라, 진작 비꼬려면 입 다물고 그냥 가세요. 그 소리한 여자가 데리고 갔는데.
그런 일들에 대해서 제가 굉장히 아낍니다. 귀하게 여기는 것이 복음 연구에 그 일을 발생시켰잖아요. 발생시킨 일을 여기다가 집어넣어 버려요. 예약감이 되도록 주께서 만들어 놨어요. 내 지평 바깥에. 예상 못한 바깥에. 그렇게 이 말씀을 전하도록 조치를 이렇게 하신다니까요. 얼마나 감사한지.
그 다음에 내가 너를 낳았다, 해서 하나님의 유업으로서 아들이 이 땅에 오신 거예요. 왔는데 그걸 누가 알아봤느냐 하면 7절에 보면, 천사들이 경배했지요. 천사들이 경배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뉘앙스가 이런 언급을 하시는 이유가 천사 빼놓고는 없었다, 이 말이에요. 왜냐 하면 천사도 경배했지만, 알아보고 경배한 사람이 있다하면 무슨 사건이 터지지 않습니까? 십자가가 터지질 않아요. 십자가 안 터져버리면 이건 누가 좋을 일입니까?
자, 예수님께서 오셨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안 터져 버리면 누가 알아봐서 잘 모셨다 이리 되잖아요. 그러면 현재 인간이란 이 지평이 긍정이 됩니까? 부정이 됩니까? 부정이 안 되고 전적으로 긍정이 되잖아요. “내가 벌주려고 왔더니, 아이고, 세상에 요 인간 세계도 예수님 알아보는 인간이 있네.” 아이고, 그러면 내가 벌주면 모순되잖아요. 의인 50명 있어도 벌주니까 아브라함이 계속 카운트다운 내려갔잖아요. 10명이 있어도 벌 내리면 안 되잖아요, 할 때, 열 명도 없다고 한 거예요. 그러면 내려온 것이 10명으로 내려왔으니까 10명마저 없다는 말은 결국 한 명도 있다? 없다? 한 명도 없는 거예요. 결국. 하늘에서 유황불 내린다는 말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이 유황불 내리는 거예요. “에이, 다 타죽어라, 씨~” 되는 거예요.
유황불을 준비했다는 말은 이런 게 어려운데, 잘 들어보세요. 나쁜 짓하고 나쁜 일하고 해서 유황불 떨어진 것이 아니고 유황불은 원래 준비한 거예요. 언제까지? 한 명도 없을 때까지. 하나님은 일을 그리 하십니다. 그러면 의인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아는 순간은 의인 없지 하는 것이 의인 없는 게 아니고 그 안에 예수님을 보내야 돼요. 예수님을 살짝 보내보면 지 본색이 드러나요. 왜? 인간의 지평은 마귀가 원했던 지평이거든요. “어쨌든 니가 노력해서 하나님처럼 돼라.” 이런 노력이 신나게 이루어지는 판에 내가 하나님이다, 하고 들어왔으니까 인간은 용서될 대상이 안 되지요. 우리가 하나님 되려는 모든 노력은 완전히 조다가 되잖아요. 이것은. 부정되잖아요.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엮였던 관계는 완전히 사기라는 게 들통 났잖아요. 지금 하나님하고 사다리를 놨다고 착각했는데 진짜 하나님과 통하는 사람이 와 버리면 그럼 이 노선은 뭐가 돼요? 이거는 가짜가 되잖아요. 자기가 가짜 안 되는 수는 무슨 수밖에 없습니까? 진짜를 죽이면 되는 거예요. 진짜를.
제가 십자가마을에 글 쓰고 평소에 설교를 하면서 저도 생각합니다. 이렇게 과격할 필요가 뭐가 있는가 하는 생각,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해놓고 저주이야기를 해야 되는데, 처음부터 과격하게 티를 내야 되느냐, 이래서 나 잘났고 나 믿음 좋고 그런 티를 꼭 내야 될 필요가 있겠는가를 생각 안 할 수가 있어요? 늘 생각하거든요. 하는데 만약에 “그래, 해도 좋다.” 해 버리면 이것은 뭐냐 하면, 뭘 긍정하게 되느냐 하면, 현재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이니까 일이 잘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자기 지평에 대해서 이걸 감싸 주려는 기색이 아주 강합니다. 인간은. 굳이 말썽을 일으킬 필요가 없잖아요. 굳이.
그냥 감사합니다. 주께서 주신 은혜 감사합니다. 하고 살면 되지 굳이 말썽을 일으킬 이유가 없다 이거예요. 굳이. 그렇다고 굳이 말썽을 일으키기 위해서 일을 저지르는 그것도 내가 아는 지평선 내에서 그냥 일시적으로 몸부림치는 거 밖에 안 되거든요. 주께서 시키시는 대로 살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주께서 시키신다고 해서 잘난 것은 아니지만 돌아서면 또 내 지평 안에 들어가서 내 자랑 되는 게 뻔하기 때문에, 하더라도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할 수밖에 없어요. 다만 하고 싶다는 것이 욕망대로 하는 게 아니고 복음과 관련된 하고 싶은 것. 복음을 위해서 뭐라도 다 해야 된다는 것. “주여, 이거는 내가 이리되면 내 자존심 상합니다.” 이런 것이 있으면 안 되는 겁니다. 복음을 위해서 뭐라도 해야 된다는 것.
천사이외에는 아무도 없었지요. 십자가 사건이 난 것이, 그럼 천사는 어디에 속합니까? 이 지평에 속하지 않고 하늘의 지평에 속했기 때문에 결국은 천사와 다퉜다 이 말은 이 세상 아무도 예수님을 알아 모실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마리아하고 시몬하고 그 여자 선지자 안나하고 이런 사람들은 어떻게 알아봤느냐, 성경에 누가복음에 보세요. 그 사람들에 뭐가 임했다고 했습니까? 성령이 임했잖아요. 성령이 임했을 때는 그 사람을 칭찬하면 안 됩니다. 성령을 칭찬해야지요. 성령을 칭찬하지 말고 성령은 누구 따라 논다? 예수님, 하나님 따라 노니까 결국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지요. “아이고, 세례요한아! 너는 착하구나! 성령 받아서 그렇게 했으니까 너는 착해!” 이리 돼 버리면 세례요한은 “그래, 그래, 나는 착해 왜, 성령이 했기 때문에”. 그 사람은 성령을 소유한 게 돼 버려요. 그것은 아까 논리에 내 지평 안에 성령을 가둬놓은 셈이 되는 겁니다.
성령은 우리 지평 밖에 나가 있어요. 예수님이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안 믿는 것은 용서를 받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오는 세대까지라도 용서 없다는 겁니다. 성경을 찾아봅시다. 로마서 3장 8절 봅시다.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저희가 정죄 받는 것이 옳으니라” 다 보셨지요. 질문합니다. 복음이 있는 시대에 정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복음이 온 이 시대에, 복음이 이미 찾아와서 완성한 이 시대에 정죄함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지요. 우리는 로마서 8장에 보면, 복음 안에서는 정죄함이 없지요.
그런데 방금 로마서 3장 8절에 보면 뭡니까? 정죄함이 있지요. 그럼 이 정죄함은 어디서 나온 정죄함입니까? 주께서 무조건 정죄함을 없애주는 게 아니지요. 그러면 분명히 정죄함이 있어야 되겠지요. 그러면 정죄함이 있기 위해서 복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정죄함이 없기 위해서 복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복음이라는 것은 결국은 양발차기로 필히 복음은 오냐, 오냐 해주는 것이 복음이 아니고, 구걸하는 것이 복음이 아니고, 필히 뭘 남겨야 된다? 정죄할 자를 기어이 정죄하는 능력으로만 복음이 전파되어야 돼요.
목사들이 교회에서 막 봐주기로 그냥 감싸주고 “아이고, 한 맺힌 세상 얼마나 고생 많습니까? 여러분들 이제 복 받습니다.” 이렇게 감싸줄 생각을 하지 말고 복음을 전했으면 반드시 이 복음을 안 믿는 자에게 반드시 정죄함이 꼭 따라야 되겠지요.
그러면 그 정죄함을 따라야 된다면, 그러면 그 사람의 정죄함을 안 받은 사람들, 주님 믿는 사람은 자기 지평선 내에서 믿을 능력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항상 예상 밖으로 옵니다. 지가 미리 준비해서 “야, 요 정도 믿으면 나 믿을 준비 하겠다.” 하게 되면, 그거는 믿을 수 없는 내용이 와 버려요. “하나님이여, 내가 세 바퀴 던집니다. 여기서 많이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뭐라 합니까? “니가 바위에서 나무가 뽑혀서 동해바다에 빠뜨려라.” 이런 것은 우리가 출제한 것이 아니잖아요. 주님이 출제해 놓고 믿어라, 하잖아요. 그것도 안 믿으면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는 게 된다고요.
항상 우리가 믿을 수 있는 믿음의 내용은 지평선 안에서는 없는 거예요. 그렇다면 묻습니다. 그렇다면 정죄 받는 사람이 못 믿는 것은 그 사람의 실력으로 믿거나, 못 믿거나 그 사람이 결정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결정이 안 되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셨다는 말은, 천사만 찬양했다는 말은 이 세상의 인간들의 지평선 안에서는 결정문제에서는 이미 그 안에 잘 잘못과 상관없이 외부에서 이미 결정을 내리고 따지면서 분류작업 들어간다 이 말입니다.
이거 연초부터 기분 좋은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잘못했다고 저주받는 게 아니고 이거는 우리 지평선에서 “아! 바보같이 내가 이런 잘못을 하다니! 그동안 예수 믿고 구원 받는다고 해놓은 스펙 다 까먹었다.” 자꾸 이러지 말란 말이지요. 우리가 관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에요. 구원을 우리가 마음대로 좌지우지 가위로 끊을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우리 지평선 에서는 없습니다.
외부에서 그냥 작대기 가지고 쑤셔 버리는데, 그러면 욱! 하고 들어오는 거죠. 아까 유리창 돼지 코 했잖아요. 그걸 예수 안으로 봅시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과 예수 밖에 있는 사람과의 차이는 예수 밖에 있는 사람은 절대 안에 있는 사람을 몰라요. 왜, 예수 안의 세계는 그들에게는 없는 세계입니다. 자기 지평선 안에 없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밖에 있다가 안에 들어갔기 때문에 지평이 넓어졌어요. 저거는 바로 옛날의 내 모습이고, 지금은 천지 창조한 예수님 안에 태초부터 너를 예정하사(태어나기 전에 이미 정해버렸다.) 이미 정해진 지평선 안에서 내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라고 보는 관점에서 그 지평의 융합이라 했지요. 그 지평이 융합되니까 저쪽 바깥에서 돼지 코 만들고 저 혼자 까부는 거 “우리끼리 믿음 좋지!”저희끼리 믿음 좋다고 하는 부흥회, 그 허세가 다 보인다니까요. 수가 보여요. 수가.
목사들 저리 해도 다른 거 없고 성화론은 결국 교회 장사고 사람들 끌어 모으고 빈 손 말고 돈 들고 오라하는 교회 영업하는 그거, 이게 뻔히 다 보인다니까요. 자꾸 그 사람들은 그게 아니고 순수하게 우리도 니들처럼 복음 알아서 영광 돌린다. 그냥 감사드린다고 백날 우겨도 돼지 코라, 유리창 안에 못 들어오는 거예요. 도 닦는 바리새인하고 동일하다 보면 돼요.
그 다음에 7절 봅시다. “또 천사들에 관하여는 그는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는다.” 했지요. 천사한테 가만히 앉아서 경배 받는 것이 아니고 친히 뭐를 다루신다? 천사들을 다루시는 거예요. 천사를 다룰 때, 천사를 위해서 다루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자신됨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뭘 드러내는가? 영광의 광채시오, 본체의 형상임을 눈으로 보는 게 아니고 아버지의 일로서 이 땅에 펼치는 겁니다. 그 일이 이 땅에서의 십자가 죽으심입니다. 이게 바로 마지막 때에 선지자로 했던 이것이 마지막 때, 아들을 통해서 이것을 전부 다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아들만 처다 봐라, 이것뿐이에요.
그리고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도 누굴 처다 봤습니까? 그 힘들고 어려운 인생 속에서 “누굽니까? 나 이렇게 힘들고 내 뜻대로 안 되는데?” “어! 아들이시네.” 그렇게 엮어진 그것가지고 믿음의 선배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한 것들의 실체니라, 그 본체, 실체는 우리의 지평선 바깥에서 우리의 안을 다루고 있는 겁니다.
천사들을 부리시고, 8절에 보면,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보좌 홀이니까 보좌라는 말이 나오고 다음에 홀 나오지요. 보좌 홀 하는 것은 지팡이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보좌 홀이니까 보좌는 의자를 말하고, 의자와 지팡이, 이것이 봉건국가에 가면 어디에 한 세트로 있습니까? 왕궁에 있지요. 그러니까 이런 말씀조차도 하나님께서는 왕 노릇한다고 보면 되겠지요. 왕 노릇하니까 결국은 지상에 있는 모든 왕들도 결국 부분, 모양새로 사실은 하늘의 구조 체계를 뭔가 흉내 내고 있다 하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왕궁에 있거든요. 왕이 있다. 왕이 뭐냐 하면, 알다시피 절대 권력자지요. 절대 권력자라 하는 것은 왕은 권력 있습니다. 우리는 권력 없습니다. 이 정도 아니고 절대 권력자라 하는 것은 모든 백성들을 왕자신이 원하는 대로만 다루어질 수 있는 권한이라 이리 보면 됩니다. “아이고, 왕이시여! 왕이니까 왕만 대접하고 우리는 간섭하지 마세요.” “이건 소박한 초가집의 우리 살림이니까 왕이라는 이름으로 함부로 밤중에 들어오고 하지 마세요.” 라는 것이 허용이 안돼요. 나의 지평 안에 소박하게 사는 거 용납이 안 됩니다. 들이 쑤시고 들어옵니다. 다 깨놓고 내 인생을 위풍이 많게 다 뚫어버려요. 비닐로 막아도 다 뚫어버려요. 바람이 슝~슝 불어요. 그야말로 바람 같은 사랑, 또는 거지같은 사랑, 내 뜻대로 안되니까. 거지같은 사랑, 사랑은 사랑인데 영 내 마음에 안 드는 바람이 휭휭 통하는 그런 사랑, 그런 절대 왕권으로 행사하셨다.
그 다음에 9절에 보면, “네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였으니” 여기서 너는 누구를 이야기 하는 겁니까? 예수님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 곧 너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네게 부어” 여기에 기름이란 말이 나오지요. 제가 여기 기름부음이란 논문을 길게 쓴 게 있는데, 기름이 있다, 라는 말은 다른 계열, 다른 영역에 속했다, 다른 지평에 속했다, 라는 거예요. 그래서 기름 부었다, 라는 말은 이 땅에 속한 자가 아니라는 소리에요. 성도가 뭐로 기름 붓습니까? 성령으로 말미암아 기름 부었다, 라는 말은 그들은 이 세상에 속한 자 이다? 아니다?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다, 라는 말이에요.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니까 마치 격이 천사와 같은 격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천사가 우리를 오히려 지켜준다 하지 않습니까? 중국의 무협지에 보면, 수호천사 있듯이. 수호천사가 지켜주는 것은 우리 때문이 아니고 우리가 있는 자리 때문에, 주님의 상속, 우리 자체가 예수님의 상속이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를 귀히 보는 이상으로 누가 더 귀히 봅니까? 주님이 우리를 더 귀하게 보는 겁니다. 주님은 내 걱정 안한다고 그렇게 원망하는데 그건 너무 터무니없는 생각입니다. 자식들이 흔히 말하지요. 부모는 내색 안한다 하지만, 그건 부모의 마음을 몰라서 그래요. 오히려 부모가 자식이 생각하지 못한 것을 더 챙기지요. 왜? 지평이 다루니까.
오늘 이거 하나 분명히 합시다. 넓은 지평에 계신 분이 철딱서니 없는 우리가 요것가지고 성공이니 실패니 까불고, 찢고, 좌절하고, 죽어버릴까 하는 이것을 넓은 지평에서 “아이고, 놀고 있네.” 이렇게 한다 말이지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 온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에서는 끊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주님의 기업이라면 우리는 그 말씀에 오늘도 우리를 영생으로 강제로 질질 끌고 가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세상에 속했다고 자꾸 생각합니다. 그런데 말씀에 의하면 속한 게 아닌데, 왜 자꾸 우리는 이 세상에서 승부를 보려하고 남한테 안 지려하고 비교해서 이기려하고 왜 자꾸 좁은 지평 안에서만 자기를 바라보는지, 이런 눈이 다시 열려서 주님의 열매요, 주님의 작품인 것을 이 자리가 얼마나 귀한 자리인 것을 천국에도 가야 될 자리인 것을 저희들이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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