흩어지리라 130127
흩어지리라 130127
이름 : 이근호(IP:119.18.69.144)
흩어지리라 (나 3:16-19)
이근호
13-01-27 15:21
흩어지리라
2013년 1월 27일 본문 말씀: 나훔 3:16-19
(나 3:16, 개역) 『네가 네 상고를 하늘의 별보다 많게 하였으나 황충이 날개를 펴서 날아감과 같고』
(나 3:17, 개역) 『너의 방백은 메뚜기 같고 너의 대장은 큰 메뚜기 떼가 추운 날에는 울타리에 깃들였다가 해가 뜨면 날아감과 같으니 그 있는 곳을 알 수 없도다』
(나 3:18, 개역) 『앗수르 왕이여 네 목자가 자고 네 귀족은 누워 쉬며 네 백성은 산들에 흩어지나 그들을 모을 사람이 없도다』
(나 3:19, 개역) 『너의 다친 것은 고칠 수 없고 네 상처는 중하도다 네 소식을 듣는 자가 다 너를 인하여 손뼉을 치나니 이는 네 악행을 늘 받지 않은 자가 없음이 아니냐』
앗수르 나라의 등장은 이스라엘에게는 숨 막히는 장벽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뜻과 포부를 펼치는데 있어 앗수르라는 강대국이 버티면서 설쳐대는 그 위세에 이스라엘은 눌려지낼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숨막히는 현실은 곧 새로운 의미의 광야 같은 상황입니다. 즉 살기는 살아야 하는데 강대국이 너무 괴롭해서 못사는 겁니다.
마치 순수하고 곱고 아름답고 낭만적으로 학창생활을 보내려는 아이에게 학교 내에서 일어나는 폭력 분위기는 지옥같은 상황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같이 폭력을 행사해서 꺾을 수 있는 실력도 되지를 못합니다. 즉 “왜 세상은 나홀로 곱게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는가”입니다.
북쪽 이스라엘을 호시탐탐 노리던 앗수르는 결국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사람들을 죽이고 많이 이들을 노예로 쓰기 위해 잡아갔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못된 나라 앗수르를 크게 키워서 이스라엘을 삼키게 하신 주체자가 곧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그렇게 심한 구박을 하게 하시는 걸까요? 왜 곱게 천국으로 보내시지를 않는 겁니까? 그것은 유에서 유에서 거저 건너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유→무→의 방식으로만 천국에 들어가게 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향한 뜻입니다. 그런데 바로 유→무로 나아가는 작업에 대해서 인간들은 감당치를 못하는 겁니다.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따먹은 존재에 대해서는 생명나무 과실을 허락지 않았습니다. 이 원칙은 요지부동으로 하나님께서 고수하십니다. 하나님이 벌이시는 모든 작업에 있어 이 원칙이 적용됩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그냥 자기 백성 자체를 사랑했다면 이러한 원칙마저 스스로 포기하고 철수시켰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러지를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애굽을 통해서 처음으로 만들어지면서 자기 백성들을 곧바로 약속의 땅으로 넣어주지를 않았습니다. 광야를 것을 통과케 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광야라는 순서를 생략하고 바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않게 하시는 걸까요?
그것은 이미 약속의 땅에는 이스라엘 백성들로서 감당할 수 없는 적들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애굽에서 살던 사고방식으로는 그들을 이겨낼 수 없다고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에 막강한 민족들로 포진케 한 겁니다. 애굽에서 통용되는 삶의 원칙은 곧 힘으로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 방식 외에는 다른 몸이 익은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광야를 통과케 하므로서 진정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려주셨습니다. 광야에는 물이 없습니다. 양식도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과연 사람이 생존이 가능하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으로 도로 돌아가자고 모세에게 극단적으로 대들었습니다.
지극히 당연히 뿜어져나오는 애굽 속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위을 열어서 생수를 주시고 매일 빠짐없이 만나를 하늘에서 내려주셨습니다. 물론 안식일 앞두고서는 이틀치를 주셨습니다. 이것은 약속의 땅에서 사는 방식을 미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려주시는 겁니다. 애굽에서 통하는 삶의 방식과 전혀 다른 겁니다.
유에서 무로 전환하는데 있어 전혀 애굽에서 익숙한 것들이 눈에 보이면 아니됩니다. 즉 교회 다니면서도 교회가 보이면 안되고 천국이 보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교회란 바로 유에서 무로 전환되는 장소입니다. 복음을 들려지고 그 모임을 통해서 사람들을 비롯해서 자기 자신들이 얼마나 친 세상적인가를 충실하게 경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선악과 따먹은 자기 자신을 계속 사수하는 방식으로 버티는 바가 됩니다. 이렇게 되면 기껏 애굽으로 되돌아가는 방식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막강한 앗수르 나라를 이스라엘 앞에 배당시키므로서 천국이란 인간의 힘으로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0:13에 보면,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 앗수르와 같은 천국을 가로 막는 장벽을 신약 시대에서 끊임없이 파도처럼 밀려들게 하십니다.
이럴 때 성도는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요? 누가복음 18:1-8에 보면,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개무시 당하면서 버텨내는 힘을 가지고 ‘믿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이란 항상 주변에 ‘개무시’하는 세력의 상주를 염두에 두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나 이방인 백부장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안겨주는 세상적인 장벽을 통해서 그 장벽 너머 존재하는 천국에 대해서 충분히 우리 자신들을 유로 자처하지 말고 무로 살아감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성도에게 있어야 유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 자신을 늘 쳐주시는 그 능력입니다.
즉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라는 사실에 도리어 고마워하고 감사해야 한다는 겁니다. 자기 자신의 붕괴,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흩어져 무너지게 하듯이 천국을 가로 막는 장벽도 무너지게 하시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무엇이 복음의 광채를 가로막고 있는지를 살펴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3-01-28 19:57
강-나3장16-19(흩어지리라)13012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나훔 3장 16절에서 19절 말씀입니다. 구약성경 1301페이지입니다.
나훔 3:16-19
“네가 네 상고를 하늘의 별보다 많게 하였으나 황충이 날개를 펴서 날아감과 같고 너의 방백은 메뚜기 같고 너의 대장은 큰 메뚜기 떼가 추운 날에는 울타리에 깃들였다가 해가 뜨면 날아감과 같으니 그 있는 곳을 알 수 없도다 앗수르 왕이여 네 목자가 자고 네 귀족은 누워 쉬며 네 백성은 산들에 흩어지나 그들을 모을 사람이 없도다 너의 다친 것은 고칠 수 없고 네 상처는 중하도다 네 소식을 듣는 자가 다 너를 인하여 손뼉을 치나니 이는 네 악행을 늘 받지 않은 자가 없음이 아니냐”
나훔이 오늘로 마지막 대목인데 설교자 입장에서 나훔이란 이름도 낯선 선지자 이름을 오늘날 현대 사람들에게 그 속 내용을 제대로 전해야 되겠는데 어떤 식으로 전해야 되느냐, 거기에 대해서 상당히 고민하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간추려서 나름대로 알기 쉽게 알짜배기만 이렇게 쏙쏙 전달합니다.
나훔은 앗수르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앗수르는 북쪽 이스라엘을 삼킨 나쁜 나라입니다. 여러분들을 유치원생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쉽게 합니다. 아주 나쁜 나라예요. 앗수르가 그 당시에 하나님이 세운 나라 이스라엘을 망하게 한 나쁜 나라인데, 이게 오늘날에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오늘날 신약 성경에 보면 바로 이단, 또는 권세, 또는 다른 복음, 또는 사이비 설교자, 이런 식으로 표현이 되는 거예요.
나훔의 앗수르라는 이 나라는 옛날 나라니까 잊어버리자. 이렇게 하시면 안 되고, 이런 나라가 등장했다 하는 것이 지금도 이런 하나님의 원수 같은 그런 세력이 지금도 작용하고 있으니까 우리 성도로서는 분간을 해야 됩니다. 라는 뜻이라고 분간을 해줘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앗수르 나라가 이스라엘을 삼킬 때 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만든 나라가 앗수르 나라한테 삼킴을 당했느냐 하면 이런 겁니다.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우리는 천국이 곧 보이지만 천국에 가려면 우리 힘으로 이겨낼 수 없는 극복할 수 없는 앗수르 같은 막강한 장벽이 항상 우리에게 놓여 있어요. 이것을 신약성경에서 뭐라고 하느냐, 시험이다. 테스트다. 유혹이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 대목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2~13절에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이렇게 돼 있어요. 지금 이런 이야기는 얼른 들어보면 상당히 기분 좋아지는 내용인데, 한 번 더 가만히 생각해 보면 기분 나쁜 이야기예요. 왜냐 하면 천국을 보내주려면 아주 곱게 온실 속에 크는 어떤 꽃송이처럼 아주 우아하게 그렇게 천국으로 보내주실 수도 있는 하나님이 왜 자꾸 감당할 만한 시험을 어떻게, 어떻게 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는 피할 길을 주시고 그렇게 어떤 난관이라든지, 장벽이라든지, 힘든 상황이라든지 왜 자꾸 뭔가 파도처럼 밀려오니까 그걸 물론 피할 길을 주신다는 그 취지는 우리가 고맙겠는데, 아예 그런 병 주고 약 주는 것 말고 아예 병이 안 오면 약도 필요 없지 아니한가 이 말이죠.
천국에 가려면 우리가 많은 환난을 당해야 된다고 사도바울이 사도행전에서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아예 환난 없이 천국 가는 그런 방법 없겠습니까?
앗수르라는 나라는 이스라엘에게는 하나의 장벽 같은 거예요. 감당 자체가 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방금 제가 던진 질문 있죠? 왜 환난 없이 그냥 곱게 가면 안 되느냐, 하는 그 이야기에 대해서 제가 설명을 해줘야 이 앗수르가 망하게 된 것을 같이 기뻐할 수가 있거든요. 앗수르 망하는 것을 기뻐한다는 말은 오늘날 이단이 이단으로 들통 나는 것을 기뻐한다. 같은 취지인데요.
왜, 환난을 거쳐야 되느냐 이 말이죠. 오늘 주일학교도 그런 설교했는데 홍해를 건너고 난 뒤에 천국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홍해 건너고 난 뒤에 천국이 아니고 광야 나왔습니다. 왜 광야가 나와야 하느냐 이 말입니다. 그 광야 없애버리고 바로 가나안 땅에 젖과 꿀이 흐르고 포도송이가 두 사람이 져도 못 질 정도로 풍성하게 열리는 그 열매, 왜 그렇게 못하느냐 이 말이죠. 우리 장로님 농장에다 포도 심어놓으니까 나중에 장골이 두 명 들고 나가도 포도송이를 못 들 정도로 한다면 그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 좋다고 천국도 안 가고 영천에서 산다고 하시면 곤란하지만.
왜 하나님께서는 광야를 빼시고 바로 가나안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면 되는데, 광야가 왜 있느냐 이 말입니다. 이걸 알기 쉽게 하시는 방법은 할 수 없이 TV 드라마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드라마가 좋아서가 아니라 쉽게 하는 방법이니까 할 수 없어요.
MBC 월화 드라마 ‘마의‘라는 게 있어요. 말 고치는 의사가 나중에 사람 고쳤다는 이야긴데, 그 마의라는 드라마에 최근 장면에 보게 되면 중국의 왕 부인이 아파서 힘도 못 쓰고 누워있어요. 미모는 되는데 사랑받고 싶어서 남편 사랑이 끊어질까 싶어서 걱정이 늘어지는 황후 아줌마가 있는데 그 아줌마를 백 이성인가 의사가 고칩니다. 조선에서 온 한의사가 고칩니다. 외과 수술을 하는데 부황 떠도 소용없어요. 아줌마는 마취시켜서 엎어져 있고 등짝에다 청공, 구멍을 뚫어요. 한의가 외과 하는 것 처음 봤어요. 보약만 파는 줄 알았는데 외고도 하는 모양이라. 구멍을 뚫어서 뼈가 썩어가고 있는 데다 한약재를 직접 쑤셔 넣기 위해서 다지고 다져서 쑤셔 넣어요. 딱 말미를 5일을 줘서 못 고치면 니 목숨 날라 가고 드라마도 끝나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4일째 그걸 집어넣습니다. 그러면 그 동안에 황후 아줌마는 뭐했느냐, 엎어져서 자빠져서 마취돼서 그냥 잤죠.
그런데 마지막 5일째 돼서 백 이성 죽이네, 살리네, 하고 있을 때 그 황후 아줌마가 곱게 차려입고 와서 백 이성한테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를 하더라 말이죠. 그렇다면 그 환자였던 황후 아줌마가 죽을병에서 나서 옷을 차려입고 말을 하고 걷는 것은 이게 누구의 효과냐 하는 말입니다. 그 의사보고 ‘내가 어떻게 행해야 구원받습니까? 내가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이렇게 행해서 자기가 나중에 병 낫느냐, 그게 아니고 자기는 자빠져서 엎어져 그냥 잤다니까요. 드라마 볼 때 좀 복음적으로 보세요. 그냥 엎어져 자빠졌고, 등에 구멍 뚫어서 직접 뼛속까지 한약재를 다져 넣은 거잖아요.
바로 그 방법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신다 이 말이죠. 왜 그 황후 아줌마는 엎어져 자빠져 있느냐, 자기가 설치면 병이 낫지를 안 해요. 자기가 설치면 ‘약이 쓰다.’ 하고 약사발 집어 던지고 백 광현이 앞에 던지고 설쳐서 안 돼요. 인간을 죽여 버려야 돼요.
많은 사람들이 우리교회 왔다가 그냥 갔습니다. 온 것은 뭐냐 하면 유에서 유로 가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애굽에서 광야 없이 바로 천국으로 직행을 하려고 한다 이 말이죠. 그런데 교회 왔으면 그 다음에 유에서 무가 돼야 돼요. 자기는 펄펄 살아있거든요. 신앙생활 10년 했다고 이 교회는 뭘 시키는가, 시키는 대로 하겠다. 이러고 왔는데, 복음 앞에서는 뭐냐 하면 당신은 시키고 뭐고 자시고 없어. 그냥 죽은 자라는 거예요. 그냥 엎어져서 등짝이나 내 놔라 이 말이죠. 죽은 자!
있는데서 없는 자로 되고, 그 다음에 없는데서 그 다음에 청공 뚫어서 외부에서 투입된 약재가 유가 되어서 그 무와 만나면 그 사람은 곱게 차려입고 ‘아이고, 고맙습니다.’ 하고 행동하고 말하는 것, 새 사람 되어서 움직이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 방법을 사용하는 겁니다.
자, 이제부터 찬찬히 말씀드리겠어요. 선악과를 따먹었잖아요. 선악과 따먹은 자는 생명나무를 못 따먹는다는 것이 하늘나라 법칙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 법칙을 완전히 무시하고 선악과 따먹은 채로 거기다가 더해서 생명나무도 따먹어서 영원히 천국 가게 해주세요. 이렇게 나오더라 이 말이죠. 그걸 처음부터 허락했으면 창세기 3장에서 생명나무 가는 길을 아예 막지도 않았습니다. 출입금지! 그것도 없어요. 처음부터 그걸 허락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처음부터 허락을 안 했다니까. 선악과 따먹은 인간은 생명나무 못 따먹는다는 그 원칙은 요지부동 이예요. 그 원칙은 교회나 설교자나 그 원칙을 계속해서 제시할 수밖에 없어요. ‘당신은 선악에 대해서 압니까?’ ‘압니다.’ ‘그러면 당신은 황후 아줌마야, 안 돼, 병 들렸어.’ 다시 묻습니다. ‘선이나 악에 대해서 압니까?’ ‘압니다.’ ‘안 돼, 그러면 당신은 병 들은 거야. 당신은 이미 죽은 자야.’ 그런 사고방식, 그런 인식 가지고는 생명나무고, 요한계시록 22장에 나오는 생명나무 그 나라에 합류할 수가 없습니다. 안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살아있다고 생각하고 교회 왔습니다. 유를 무로 바꾸는 작업과 무에서 유를 다시 제공하는 그 작업을 하는데, 유에서 무로 전환하는 이 작업에 대해서 반발이 대단하게 반발이 센 거예요. 튕기는 겁니다. ‘왜 내 신앙을 안 알아주나니, 왜 내가 그동안 공들여 만든 신앙인데 이 신앙의 연조와 연륜을 왜 무시하나니, 나도 어느 정도 아는데.’
광야라 하는 것은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에 집어넣은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개 무시하는 겁니다. 어느 인간이 물 없는데서 어떻게 살 수 있으며, 어느 인간이 양식 없는데서 살 수 있겠습니까? 광야라는 통과하는 환경이 바로 물이 없고 양식이 없는 곳 이예요.
앗수르란 나라는 그 정도보다는 안 돼요. 이스라엘 나라가 앗수르한테도 지배당했는데 앗수르 나라는 그 정도보다 덜한 거예요. 진짜 광야는 앗수르 정도가 아니고 아예 물고 없고 아예 양식도 없는 곳 이예요. 이게 우리보고 살라 하는지, 죽으라 하는지, 죽으라 하는 거죠. 우리는 천국이고 뭐고 광야마저 통과할 수가 없어요. 제 목숨마저 부지를 못하게 돼 있어요. 왜 물이 없는데 어떻게 살며 양식이 없는데 어떻게 삽니까? 그런데 이상하게 40년 동안 하루도 결석 없이 거의 일주일에 5일은 하루도 빠짐없이 만나가 내렸어요. 날짜 모르는 사람은 만나 내리는 것 보고 시간 맞춰야 돼요.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빼놓지를 않아요. 꼭 만나를 매일같이 줘서 물론 5일째는 이틀 치를 주지만, 만나를 줘서 새로운 양식으로서 천국이라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하시는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약속의 땅이 텅텅 비어있는 곳이 아니고 막강한 덩치 큰 네피림보다 덩치 큰 민족들인 원주민들이 있어요.
그러니까 막상 그 땅에 들어가 봤자 젖과 꿀이 흐르고 포도나무가 잘 돼도, ‘어! 벌써 주인이 있는데, 아이고, 우리는 못 들어가요. 하고 대성통곡하고 울게 뻔하단 말이죠. 이것은 하나님께서 양식이 있어야 산다. 물이 있어야 산다는 것이 애굽에서 우리가 기껏 경험하고 감당했던 환경들 이예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하나님이 좋은 게 아니고 하나님이 양식 줄 때 좋은 하나님이고, 물주면 좋은 하나님이라는 생각. 하나님보다 누가 좋으냐? 그렇게 해서라고 살아야 될 내가 더 좋아지는 그런 몸을 가지고 지금까지 애굽에서 살아왔고, 그런데 천국은 그런 인간은 안 받아주거든요. 왜, 선악과를 따먹은 행세를 하는 인간은 생명나무를 따먹게 허락을 안 합니다.
참, 이 이야기를 수십 년간 바른 소리를 해도 바른 소리 했다고 그렇게 닦달을 내니 그럼 거짓말 해드릴까요? 거짓말을 할 수는 없는 거예요. 내가 살아야지. 습관은 뭐냐 하면 요새 말로 돈 주면 하나님을 믿겠다는 거예요. 돈 주면 산다는 것은 애굽에서 통하는 삶의 방식 이예요. 거지 나사로 보세요. 돈 없어 굶어죽었잖아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주눅이 들고 일부가 돼 있는 우리 이 몸 가지고는 이건 청나라 황후가 돼야 돼요. 엎어져서 완전히 마취돼서 죽은 자가 돼야 돼요. 다른 의사들은 영감이라 하는 그 인간은 ‘부황 뜨시면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납득이 되도록 설명을 하니까 그 드라마에서 ‘아이고, 그거 좋으네.’ 했다고요. 해보니 좀 차도가 있는 것 같은데 다시 골골 거리면서 지금 그 황후가 죽음 직전에 있다 말이죠.
그런데 그 백이성이라는 그 한의사가 하는 말이 딱 하는 말이 ‘여기 다 나가. 다 나가. 다 나가.’ 하고 다 내보냈다 말이죠. 그리고 ‘약재 나두고 다 나가.’ 그래놓고 구멍을 뚫어서 약재를 넣는다 하니까 그 황후 아줌마가 아주 강력하게 저항하죠. ‘어디 내 몸을. 어디 내 몸에 수술을 하려고 해. 어디 내 몸에 손 대?’ 그래도 마취해서 엎어놓고 당신은 황후고 뭐고 누구건 이제는 죽을 환자일 뿐 이예요. 예수님은 병든 자에게는 필요한 거예요.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듯이. 당신은 죽은 환자에다 그냥 구멍을 뚫어서 천국에서나 통하는 약재를 그냥 뼛속까지 직접 다지고, 다지고 톡톡 다져 넣어버려요. 나중에 살아서 좋아서 ‘고맙습니다.’ 하고 있다 말이죠.
애굽에서 보통 우리는 기도만 하면 ‘돈 주이소, 돈 주이소.’ 하고 세상 사람과 똑같이 돈 달라는 소리밖에 안 하니까 주님께서는 그래가지고는 감당할 시험, 돈이라는 장벽을 우리가 넘을 수가 없는 거예요. 우리가 장벽을 넘어서야 되는데 넘을 수가 없는 거예요. 넘을 수가 없는데 가기를 어디를 가요? 어디 천국을 가요? ‘뭣이 잘못되어서 우리 가정이 어렵습니까?’ 아니 무엇이 잘못되고 잘하고가 아니라 힘든 가정 상황은 천국은 그걸 넘어서야 천국이 보인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러한 애굽적인 물결이 밀려온 겁니다.
그럼 우리는 거기서 감당을 못해서 온갖 노력을 다하죠. 갑자기 안 가던 기도원에도 가보고, 엎어져서 깁스한 몸으로, 들은 이야긴데 어떤 목사는 기도원에 가다가 개한테 물려서 개망신 당한 일도 있는데, 앗수르라는 것은 우리가 넘을 수 없어요. 이스라엘은 앗수르를 부러워하고 세상을 부러워하는 사람은 앗수르를 넘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9절에 보면 “너의 다친 것은 고칠 수가 없고 네 상처는 중하도다” 그렇게 이스라엘을 잡아먹고 이스라엘에서 그렇게 하나님 나라와 정 반대되는 다른 사고방식을 주입시켰던 앗수르 나라, 그 나라는 와르르 무너질 것이라는 겁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성경 참 어려워요.) 내용은 가장 쉽습니다. 어떤 과부가 있었는데 이 과부를 재판관이 굉장히 무시해요. 무시하는데도 불구하고 이 과부는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재판할 때 억울한 것을 풀어달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비유거든요. 그렇게 해놓고 하는 말이 “마지막 때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이게 뭐냐 하면 개 무시당해도 그것이 바로 주께서는 니가 극복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 내가 극복해서 비로소 천국이 눈앞에, 코앞에 보이도록 그렇게 조치하신 거예요.
인간이 생각하는 천국이라 하는 것은 세상에서 조작해서 만들어 낸 천국이라서 이건 허황된 환상에 불과합니다. 진짜 천국은 우리가 눈으로 보여주는 게 아니고, 내가 내 자신이 뭔가 문제 있어서 이건 진짜 죽은 자가 되고 망가져야 되고 폭파돼야 되고 하는 이러한 내가 무너져야 될 것은 나인데 저 장벽만 무너지라고 자꾸 하나님께 기도하지 말고 우리 자신이 도대체 얼마나 내가 있다는 것이 무(無)로, 이제 없어도 돼, 괜찮아, 내가 당장 죽어도 괜찮아.‘ 할 정도로 없어도 되게 하시는 그 손길, 그 작업, 그것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장벽 너머에서 우리를 붙잡아 주시고 이끌어 당겨주시는 주님의 솜씨입니다. 생명나무와 연계돼 있는 손길 이예요.
우리는 선악과를 알고 있습니다. 선악과 있는 것 가지고는 우리는 도저히 천국에 가지를 못합니다. 그렇다면 선악과 입장은 뭐냐,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이 앗수르한테 못 이겼다 하지만 신약에 오면 뭐냐 하면 바로 눈에 보이는 이 세상보다도 인자! 예수님이 주시는 그 용서하심을 세상적인 힘이 계속해서 가리는 거예요.
한 가지 이야기 더 하겠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광주에서 그런 이야기했지만, 어떤 인쇄소를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먼 도시에 있는 자기 아들한테 유산을 남겼어요. ‘인쇄소 니가 해라.’ 해서 아버지 돌아가시니까 소식 듣고 쫓아왔어요. 인쇄소에 살피다 보니까 봉투가 하나 있는데 거기에 아버지의 글씨로 ‘열지 마세요.’라는 글씨가 봉투에 있었어요. 자식이 아버지가 친필로 그렇게 쓴 것에 대해서 존중을 해서 ‘그래 아버지가 뜻이 있어서 ‘열지 마세요.’ 했으니까 안 열겠다.‘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아버지 돌아가시고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3년이 지났는데 궁금해 죽겠는 거예요. 처음에는 아버지의 의견을 존중해준다는 식으로 ’그래 무덤에 갈 때까지는 이걸 열지 않겠다.‘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궁금해 죽는 거예요. 뭣 때문에 열지 마세요. 했을까? 혹시 내가 미처 못 받은 유산의 내용에 ’땅은 니가 해라.‘ 라든지 유산일 수도 있고 안 그러면 유화증권일 수도 있고 아버지가 자기를 시험한다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열지 마라 했는데 열었을 때 자기한테 재앙이 올 수도 있고, 겁나기도 하고 ’에이 씨, 겁날 때 겁나더라도 도저히 궁금해서 못 참겠다.‘ 해서 기어이 ’열지 마세요.‘ 라는 봉투를 탁 열어젖혔어요.
뭐가 들었느냐, 이거 중요합니다. 종이가 한 백장 들어있는데 인쇄된 백장이 뭐냐, 전부 다 큰 글씨로 ‘열지 마세요.’ ‘열지 마세요.’ 그 다음 장에도 ‘열지 마세요.’ 그 다음 장에도 ‘열지 마세요.’ 이게 왜 백장이 들어 있느냐 하면 어떤 사람이 ‘열지 마세요.’ 쓰기 귀찮으니까 인쇄소에 맡긴 거예요. ‘아저씨, 열지 마세오, 란 글자를 크게 인쇄해 주세요.’ ‘예~’ 해서 돌아가신 아버지가 ‘열지 마세요.’를 인쇄해 놓고 자기도 요 봉투는 ‘열지 마세요.’란 내용을 갖고 있는 인쇄본입니다. 하고 아버지가 표시해 놓는다고 ‘열지 마세요.’ 했는데 아들은 자기보고 손님이 맡겨놓은 물건인데 자기보고 ‘열지 마세요.’를 궁금해 하니까 한 장해도 ‘열지 마세요.’ 두 장 해도 ‘열지 마세요.’ 백장 다 ‘열지 마세요.’ 라.
이게 바로 인생입니다. 인생은 무슨 자기가 의미가 있는 줄 알아요. 의미가 있어서 캐내고 캐내 봤자 역시 캐내 봐야 애굽이고 역시 한 장 캐내 봐야 애굽이고, 두장 캐내 봐야 애굽이고, 2012년도에 애굽이고, 2013년도에도 애굽이고, 2012년도에도 돈이고, 2013년도에도 돈이고, 2050년도에도 돈이고, 결국 똑같은 돈밖에 모르는 인간들이 백장 쌓이면 100살, 90장 쌓이면 90살, 80장 쌓이면 80살, 사람이 세월 지나도 그 인간이 그 인간 이예요. 이거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눕혀 놓고 구멍 뚫어야죠. 그 수밖에 없습니다. 눕혀 놓고 구멍 뚫어서 감당할 시험 밖에는 내가 준 적이 없다. 다시 말해서 외부에서 와서 우리에게 약재를 예수님의 피로서 탁탁 다져넣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열지 마세요.’라는 그러한 아무 씨잘 데 없는 종이에 불과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무엇이 애굽이고 무엇이 천국인지를 뭣이 선악과 따먹은 세상이고, 뭣이 생명나무 따먹을 세상인지를 우리가 양쪽 다 보게 하는 것, 십자가의 약효입니다. 그 백이성은 예수님이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쓸데없는 걸로 여러 번 중첩돼 있는 우리 인생, 내일 되면 희망이 있을까, 모래 되면 희망이 있을까, 하지만 살아봤자 그날이 그날인 것을, 주여 광야에 살면서 돈 없이 못 산다는 사고방식에 인 박혀 있는 저희들, 주께서 친히 피 없이는 못 산다고, 피가 생명인 것을, 새로운 약재가 저희 온 몸에 퍼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