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올 곳이 있는 자는 행복하다.(오용익의 편지글)
돌아올 곳이 있는 자는 행복하다.(오용익의 편지글)
이름 : 구자근(IP:183.105.212.7)
막내 딸 다인, 보거라.
돌아올 곳이 있는 자는 행복하다고 지난주 편지에 썼던 기억이 나는구나. 그 짧은 문장에 대한 적절한 설명이 있어야 되는데,.. 하는 걱정을 행간에서 읽었는지 모르겠구나.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 사이, 그 속에 숨은 듯 자리 잡아 찾아내기를 기다리는 ‘어떤 의미’를 이야기할 때 ‘행간’이라는 표현을 쓴단다.
언어가 서로 통하는 것은 사용하는 단어에 정해진 뜻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언어를 사용하는 ‘규칙’을 서로가 알고 있기에 통하는 거라고 학자들이 밝혀냈지. 영어를 배워야 영어가 통하고 수학을 배워야 그 숱한 기호들의 나열 속에서 의미를 찾고 ‘아하, 이 문제는 이걸 요구하는군.’ 하고 문제를 풀 수 있는 것처럼.
“돌아올 곳이 있는 자는 행복하다.”는 문장은 지난번 수련회를 아빠가 짧은 문장으로 요약한 건데, 그냥 보통 상식이나 문법으로 읽으면 집 떠나 있는 사람이 돌아갈 집이 있으면 행복하다는 소리 이상으로 들릴 수 없겠지? 그런데 이 말이 지금으로부터 2천 500년 전쯤의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전혀 새로운 의미가 실려 있다고, 아빠는 그 말을 하고 싶었단다. 하나님에게 된통으로 얻어맞고 다른 나라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70년 정도가 지나서야 다시 고국으로 감격스럽게 돌아온 그들에게 그 의미란 이렇고......
“이렇게 돌아오고 보니 떠남과 돌아옴이(인생살이 전체를 다 포함해서 하는 말, 나 한사람의 인생살이가 아니라 사람들의 전체 인생살이를 다 대변해서 하는 말, 그래서 다른 말로 하면 태어나고 죽는다는 것이, 그리고 그 안에서 뭘 한다 해도) 우리를 위함이 아니고 우리를 가지고 하나님이 이렇게 일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군요. 우리는 하나님이 이런 분이라는 것을 그려내는 ‘도화지 같은 노릇’을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만들어졌군요.”
누구나 평생토록 ‘떠나고 돌아옴’을 반복하게 된단다. 실제로 죽기까지 반복되는 그 끊임없는 떠남과 돌아옴 속에서 어떤 이는 아무 의미도 없이 반복되는 이 시계추 같은 인생의 지겨움과 허무를 감추고 혹은 잊어버리거나 달래기 위해서 덕지덕지 자기자랑과 교만과 탐욕과 위선의 먼지만 더 많이 뒤집어 쓴 채 사는 이유도 모르고 죽어가는데, 개중에는 그들과 다르게 살아가는 어떤 이들, 앞서 말한 도화지 같은 별종들이, 이 지상에 그 옛날 포로로 잡혔다가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같이 보잘 것 없는 나라이면서 보잘 것 없는 인간들이면서 너무나 행복해서 웃고 우는 사람들이 있단다.
가진 게 아무리 많아도, 또 남들 보기에 내 인생이 아무리 보기 좋고 빛이 나고 칭송의 대상이 된다 한들, 혹은 그 반대로 비난의 대상이 되고 가난뱅이가 된다 한들 내가 뒤집어 쓴 모든 것, 그것을 뒤집어 쓴 나 자신까지도 안개요 먼지 같은 것임을 점점 더 깊이 알아가는 사람, 아버지의 가산을 다 탕진하고 빈털터리로 돌아오는 탕자심정, 그 텅 빈 도화지 같은 내 마음에 아무 이유도 없이 기다려주고 아무 이유도 없이 무조건 사랑의 잔치를 그림처럼 내 인생이라는 도화지에 그려주시는 아버지(하나님)의 그 사랑을 아는 사람, 그리고 그 사랑의 한 가운데에는 어김없이 죄 없는 어떤 분이 나를 위해 대신 죽으신 죽음이, 하나님 앞에서 나 대신 흘린 피가 샘처럼 자리 잡고 있음도 아는 사람, 그래서 바로 이 피 흘린 분을 주님으로 알아보는 사람, 이 피 흘린 공로만 남기고 내 것이든 남의 것이든 다 없어져도 된다고 안도하면서 그 주님의 사랑을 분수처럼 뿜어내는 어떤 사람, 그 사람의 하는 고백이 이러하단다......
“떠남(심판)도 돌아옴(긍휼)도 주님의 작품이었군요. 다 주님을 보여주기 위한 주님의 솜씨였군요.”라고.
피할 수 없도록 되어버린 이지상의 온갖 때를 다 묻히면서 사는 것에 겁내지 말고, 오히려 그 속으로 찾아드시는 주님의 오래 참으심과 성실하심과 자신의 말씀에 충실하신 고집스런 그 성취에 놀라면서 살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흥건히, 무한리필로 쏟아지는 그 용서를 고마워하면서.
----------------2013. 1. 23. 아침에. 오 용익 아빠 씀
이근호(IP:119.♡.69.144)
13-01-23 13:25
누구에게는 청성이겠지만 이스라엘에게는 유일무이한 현실 그 자체였습니다. 현실을 현실이라고 말하는 것도, 그것을 자식에게 일러주는 것도 큰 용기와 희생이 필요한 서글픈 시대를 함께 살고 있군요.
송재원(IP:180.♡.82.67)
13-01-24 00:20
귀신들린자가 몇십년동안 귀신들린채로 살아야 했던것은 사실 주님의 의도였고, 그 귀신들림의 끝에 찾아오셔서 귀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