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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6강-나2장13(하나님의 대적자)130113-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나훔

6강-나2장13(하나님의 대적자)130113-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한례(IP:203.90.42.222)

6강-나2장13(하나님의 대적자)13011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나훔 2장13절입니다. 구약성경1300페이지입니다.

나훔 2:13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 대적이 되어 네 병거들을 불살라 연기가 되게 하고 네 젊은 사자들을 칼로 멸할 것이며 내가 또 네 노략한 것을 땅에서 끊으리니 네 파견자의 목소리가 다시는 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옛날에 제가 교회 처음 다닐 때 그때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교회에서도 들은 듯 같아요. 고난 주일날 들은 것 같은데 그 이야기를 들을 때 20대 초반에 들었을 때 어떤 감이 오느냐 하면, 예수님을 죽인 자는 나쁜 자고, 그 나쁜 자에 의해서 예수님이 죽었고,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쁜 자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지만 좋은 쪽에 속해 있는 나, 나 같은 좋은 쪽에 속한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나쁜 쪽에 가서 억울하게 돌아가시고, 그걸 좋은 쪽에 있는 우리한테 혜택을 줬다. 저는 그런 식으로 처음에 이해를 했었어요.

그런데 제가 그렇게 생각한 이해가 실제로 교회에서 생활하면서 남들과 별로 다르지 않았어요. 예수 안 믿는 나쁜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였고, 그 나쁜 사람에 의해서 죽었던 예수님의 그 고귀한 피가 생산되기 때문에 그 피는 우리 착한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렇게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적용이 되니까 일 저질러 놓은 가룟 유다부터 유대인부터 나쁜 인간들이 저질러 놓고, 혜택은 우리한테 돌아온다. ‘야! 하나님이 우리 생각해 주는구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성령을 받고 복음을 알고 보니까, 내가 예수님을 죽였다는 사실! 그것을 나쁜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나중에 성경 로마서 5장을 보니까 나와요. 모든 사람은 죄에 속했으며, 할 때 그것은 나는 죄인이 아니라고 따로 좋은 쪽으로 빼냈는데, 빼낼 수가 없고 예수님을 미워하고 무시하고 멸시했던 그쪽에 이미 우리도 포함이 돼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이야기가 이렇게 되는 겁니다. 나쁜 사람한테 예수님이 돌아가신 것이 아니고 모두가 나쁜데, 그 나쁜 사람 중에 하나가 난데, 바로 내가 죽인 예수님이 도리어 찾아와서 예수님을 죽였던 나를 도로 살리는 식으로 구원한다는 겁니다. 앞의 이야기하고 다르죠? 그래서 나중에 성경을 좀 더 보니까 사도바울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알고 살았던 그 사도바울이 막상 예수님이 자기를 건질 줄이야, 이건 자기의 예측에는 도저히 그게 들어있지 않은 거예요.

자, 근본부터 내가 예수님에 대해서 믿는다고 생각했고요. 열심히 봉사했거든요. 예수 믿는다고 생각하고 또 하나님 믿는다고 생각하는데, 벌써 예수님에 대해서 그렇게 잘못 생각했다는 그 자체는 나중에 더 생각해 보니까 그것이 잘못이라고 여겼던 그 죄부터 새롭게 출발을 시키더라 이 말입니다.

유치원 운동회 보면 재밌는 일이 있어요. 애들이 철이 없어서 출발선에 서서 나란히 똑같이 땡! 하고 달려야 되는데 어떤 애는 철이 없어서 자기 엄마 품속에서 중간에 뛰어가서 1등 하려고 뛰어간다고요. 출발선을 중간에 뛰어들지 말고 옆에서 새지 말고 마라톤을 하던 달리기를 하던 출발선에 같이 나란히 서서 출발을 시키는 겁니다. 그 출발선이 우리는 십자가 졌다 하니까 이거는 나하고 상관없고 중간에 끼어들면 되는 줄 아는데, 그게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에 죽이게 한 유대인 선에, 유대인이 죽였던 그 선에 우리를 놓고 거기서 새로 시작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유대인은 예수를 왜 죽였는가? 그때부터 물음이 성립되고 답변도 거기서부터 흘러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유대인이 왜 예수님을 죽였는가? 우리는 전에는 그걸 모르고 유대인이 무조건 나쁘다. 에이, 나쁜 인간. 그런데 우리는 유대인 아니야, 착한 사람이야. 이렇게 생각했는데 이제는 유대인을, 바리새인을 이해하게 되는 거예요. 사두개인을 이해하게 되는 거예요. 그들의 출발선이 무엇이기에 그들은 예수님을 죽였던가?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어째서 그들은 우리하고 똑같은 인간인데 하나님을 죽이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는가?

오늘 설교 제목이 뭐냐, 하나님의 대적자입니다. 하나님의 대적자라고 할 때 우리는 거기서 자기는 해당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왜 죽였던가를 더욱 더 성경을 통해서 파악해 보니까 바로 교회의 목사가 바로 유대인이고, 바리새인으로서 교인들을 자기와 똑같은 유대인으로, 바리새인으로 양성했는데 그중에 20대 초반에 걸려든 것이 바로 저였어요. 왜, 저는 교회 다니면서 나는 착한 쪽이고 나쁜 쪽은 유대인이며 예수님은 그쪽에서 죽고, 우리는 혜택 입는다는 생각을 살아가면서 아무도 거기 이의 들어가는 사람이 없고, 전부 다 같이 한통속으로 움직이고 있어요. 목사, 장로나 전부다. 야! 이게 문제가 보통 문제가 아니구나. 이렇게 되죠.

그래서 오늘 수련회를 앞두고 떠나기 전에 가만히 생각해 보니 옛날 목사들의 하던 행위가 또 기억이 나요. 옛날 제가 교회 다녔을 때 목사들이 수련회나 세미나 간다 하면 그냥 곱게 안 갑니다. 목사 목소리 톤이 바뀌어야 되죠. ‘성도여러분~ 제가 오늘 집회 나갑니다. 여러분들은 참석해주셔야 되는데 구태여 참석 못하는 분은 이번 수련회 잘 되라고 열심히 집에서 기도해주셔야 됩니다.‘ 이러죠. 그런데 그걸 ’열심히 기도해주시라‘고 하는 것을 눈치 빠른 (초자들은 모르고) 장로급이나 장급들은 ’아, 목사님 하시는데 가서 중간에 꿀차라도 타야 되는구나.‘ 이것도 오래 다니면 알아요. 그런데 초자는 그것도 몰라서 ’우리는 기도하면 되는구나.‘ 아휴, 그렇게 알아듣는다니까요. 기도하라는 말이 아니고 수고했다고 봉투에 돈 넣어오라는 그 이야기라니까. 목사가 그렇게 하고 있는데 당신들은 뭔가 성의를 표해라 그 이야기예요.

그런 이야기를 오늘날 교회 다니는 사람들한테 이야기해 보세요. 그들이 말합니다. ‘그게 뭐 나쁘냐.’ 합니다. 교인들이 목사 섬기는데 그게 뭐가 나쁘냐. 그렇게 나와요. ‘나쁜 사람에 의해서 예수님이 십자가 돌아가셨고 우리는 착한 쪽이고 나쁜 쪽에 의해 죽었고 그 혜택은 좋은 우리한테 주어진다.‘ 라는 그게 뭐가 나쁘고 그게 정상이 아니냐고 그들은 이야기해요.

여러분이나 저나 우리 그런 것을 다 겪었습니다. 하나님의 원수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 이게 오버 같은 느낌이 들고 또는 이게 무리한 해석처럼 그렇게 느껴지는데 실제로 로마서 5장에 보면, 그렇게 안 돼 있어요. 로마서 5장 10절에 보면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돼 있거든요. 그러면 그 아들을 제대로 아들로 파악하려면 우리가 어느 자리에 들어가야 되느냐 하면 요 말씀 문장에서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자리에 서 있어야 이 원수 같은 원수, 이 웬수 같은 웬수를 위해서 그 아들의 죽으심이 우리에게 얼마나 놀라운 감격으로 다가오겠느냐 이 말이죠.

그러니 자기가 원수가 아닌 곳에 가니까 뭐도 갖다 버린 셈이 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의 그 취지와 의미도 완전히 놓치게 되는 거예요. 제가 지난 금요일 날 안양 강의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린애들이 겨울에 밖에 못 나오니까 안에서 놀면 유리창에다 일부러 심심해서 자기 코나 뺨을 유리창에 밀착해서 댑니다. 그러면 아무리 뾰족한 코라도 유리창에 대버리면 유리창 바깥에서 보면 돼지 코가 되거든요. 뺨은 이그러지면 예쁜 얼굴도 이그러진 뺨이 되게 애들이 그렇게 장난을 친다 말이죠. 자기는 코 댔으니까 모습을 못 보지만 유리창 바깥에서 보면 흉한 돼지 코가 돼 있다 이 말이죠.

인간들이 종교생활해서 교회에서 열심히 나쁜 사람은 십자가 죽였다. 그런데 우리는 착한 사람이라 착한 사람 구원하려고 그렇게 됐다. 이런 식으로 착해지려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꼭 십자가를 이미 본 사람한테는 이게 뭐냐, 일그러진 돼지 코 모습 이예요. 자기 딴아 아무리 노력해도 유리창 바깥을 벗어나지를 못해요.

하나님의 원수와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은 그 안에 유리라는 장벽이 있어서 저쪽에서 이쪽을, 이쪽에서 저쪽을 인간 힘으로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이게 또 성경에 있어요. 성경에 없는 게 없어요. 성경은 만물이 다 들어있어요.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보면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이쪽에서 보면 저쪽 것이 돼지 코로 보이고, 저쪽에서 보면 이쪽 것이 돼지 코로 보이고, 이쪽에서 보면 저쪽이 죽은 자가 되고, 저 사람들이 보면 이쪽은 죽은 자가 되고, 그 가운데 있는 유리창은 바로 십자가로 말미암아 둘러쳐 있는 장벽이죠.

하나님의 원수 된 자가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서 스스로 도 닦아서 불교처럼 하면 스스로 자기가 해탈에 이르러서 원수 아닌 자로 돌아온다? 그건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이유가 뭔가, 저는 이것을 몇 년 전에 알았어요. 뭘 알았느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인데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원수 된 자리에서 그 넘을 수 없는 벽을 넘어서 우리를 구원했다. 그전까지는 그렇게 알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렇게 생각을 해보니까 하나님의 십자가가 우리가 원수 된 자리에서 옮기는 정도가 아니고 아예 원수라는 것을 양산해 낸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구원론이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이 자기 일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원수를 양산해 내요. 만들어내더란 말이죠.

그런 식으로 보니까 뭐가 풀리느냐 하면 왜 홍해바다에서 애굽 군사가 왜 꼭 뒤따라 와야 되는가가 밝혀졌어요. 홍해바다가 있는데 히브리인들은 홍해바다를 건넜습니다. 애굽 군사가 약이 올라서 ‘에이, 따라가 잡아야지.’ 하고 따라가다 와보니까 홍해바다가 열려있습니다. 바로의 장수가 ‘돌격’ 코앞에 있으니까 빨리 가서 잡으라고, 저들도 건너갔으니까 우리도 건너갈 수 있다고 건너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멀쩡하던 홍해바다가 갑자기 침몰돼서 다시 합쳐버리니까 홍해바다에 다 빠져죽었습니다.

자, 여기서 전에는 뭐냐, 아! 애굽 군대들이 강퍅했다. 교만했다. 거길 어디를 따라가느냐, 이런 인간들의 행동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을 그 깊은 밑바닥에는 뭐가 깔려 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애굽 군사로 하여금 구원받는 히브리인과 대조되도록 비교되도록 마주치게 해서 그렇게 마주치게 해야만이 하나님이라는 분이 양쪽 다를 지금 관리하고 있다는 점이 드러나게 하는데 있습니다. 문장이 길어서 말이 어려운데,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전에 제가 20대 초반에는 교회 다닐 때는 ‘하나님 저 왔습니다. 어떻게 하면 죽어서 천당 갈 수 있습니까?’ 목사가 ‘십자가 져서’ ‘야, 십자가 믿으면 나는 구원받는구나.’ 그런데 그 십자가가 뭐냐 하면 ‘십자가 누가 죽였지? 그 착한 사람을, 오, 유대인이 죽였어요? 아유, 나쁜 유대인. 유대인은 나빠서 예수님을 죽였지만 우리는 너무 착해서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그 영접한 행위로 영접한 착함으로 우리는 구원받는다.’ 이렇게 생각했다 이 말이죠.

그러니 항상 관심이 뭐냐 하면 ‘나 교회 나왔습니다. 어떻게 내가 죽어서도 복 받고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축복된 삶을 삽니까?’ 항상 자기 문제를 위하여 하나님을 이렇게 결부를 시켜왔는데, 출발선상이 내가 하나님의 원수로부터 출발하니까 이렇게 나로 하여금 착한 나도, 사실은 안착하죠. 착한 나도 하나님의 원수 자리에 두게 하시는 그 자리로 하나님께서 예수님 스스로 주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일부러 필연적으로 깔아놓은 장치가 된다 이 말이죠. ‘네가 어떻게 구원받았으니까 너 좋지?’ 이게 아니라 ‘예수님이 누군지 알았으니까 너 좋지?’ 이렇게 돼야 이게 정답이다 이 말입니다.

운전면허 시험 볼 때 코스 있잖아요? 저는 운전면허 시험 볼 때 코스 시험 보는 게 불만이었어요. 내가 알아서 연습해서 운전이 되면 운전 면허증을 그냥 내주는 게 옳다고 생각하는데, 이건 내가 아무리 운전 잘해도 그 코스에서 이탈하지 않아야 운전 면허증이 나와요. 얼마나 약 오릅니까? 나는 내가 잘한다 하면 나라에서 알아서 ‘운전 잘하세요?’ ‘잘 합니다.’ ‘여기 있습니다.’ 이렇게 주게 되면 내 자존심이 상하지 않는데 나는 내 딴아 아무리 운전을 잘한다 해도 그 코스에 떨어지면 운전 잘하는 것이 나라에서는 운전 잘 못하는 것이 돼요. 혼자서 팔공산에 가서 입구에 동화사 주차장 넓은데 혼자서 운전 잘했어요. 잘했는데 뭡니까? 6번이나 떨어졌는데. 혼자서는 잘해요. 잘하는데 실기 시험 6번 떨어졌으니 면허증이 안 나오죠. 그런데 그 당시에 아내는 혼자서는 벌벌 떨면서 하는데 단 한 번에 돼 버렸어요. 이건 불합리해도 너~무 불합리해요. 운전 잘하는 나는 운전 면허증 없고 운전 초보인 아내는 운전 면허증 있고, 대외적으로 남들이 보기에 나는 운전 못하는 걸로 돼 있고 아내는 운전 잘하는 쪽으로 이게 곡해돼 버리고, 코스가 나라에서 지정된 코스에 들어와야 되는 이유가 이것이 운전 면허증 발급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만큼 나라의 자존심이 달린 거예요.

나라라는 게 개인에게 맡겨버리면 자기 잘났다고 자기 주먹 흔듭니다. 그러지 말고 개인보다 더 위에 있는 권위 있는 나라가 나서서 ‘치워라, 개인이 잘 하는 건 다 묵살’하고 나라가 정해준 코스에 합격한 사람만 주겠다고 할 때 누구의 이름이 필요 하느냐. 나라의 이름이 필요하잖아요.

주기도문 보세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그 이름을 영화롭게 하옵시며” 주기도문을 아침에 일어나서 외우게 되면 하루일과의 모든 근심 걱정이 다 사라집니다. 왜, 눈만 떴다. 제가 서울 가서 그런 강의 했는데 강의 제목이 뭐냐 하면 ‘사는 것이 우선이다.’ 가 제목 이예요. 그래서 제가 그 제목을 끄집어내면서 교인들에게 이야기했죠.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사도바울이 편지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사는 것이 우선이 아닌 이런 사람이 있다. 참 희한합니다. 라고 편지를 했다는 거예요. 그걸 설명하면서, 그 이야기를 운을 떼면서 그 의존 교회 교인들에게 물었죠. 사람이 사는 것이 우선이지, 그럼 사는 것이 우선이 아니면 그럼 뭘까요? 사람이 사는 것이 우선이지 사람 사는 이유가 사는 게 우선인데, 사는 것 빼놓고 뭐 중요한 게 뭐가 또 있습니까? 하고 잠시 침묵을 지켰어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제 말이 맞는 거예요. 교회고 예수고 그런 것은 치렁치렁 붙어있는 장식품, 악세서리 아닙니까? 떼 내버리면 결국 남는 게 뭐냐, 사람들이 왜 삽니까? 사는 게 우선이니까 사는 거예요.

사도바울도 그걸 알고 있어요. 사람이라 하는 것은 누구나 사는 게 우선이고 그게 전부예요. 시작도 사는 것이고 끝도 사는 것이고 어떻게 하면 돈 벌어서 살아남는가, 그게 전부인데, 왜 데살로니가에 있는 교인들은 그게 너무나 당연한데 당신들은 어떻게 되어서 왜 그 당연한 것을 뒤집느냐 이 말입니다. 그걸 사도바울은 뭐냐, ‘너희들이 성령을 받았구나.’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해요. 강의하면서 이런 이야기하는데 데살로니가에 편지를 줄 테니까 너희들이 성령 받아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다. 라고 편지를 주거든 편지를 받아보고 ‘아이고, 이거 나한테 해당되는 게 없네.’ 하거든 편지도 읽지 말고 다른 사람한테 주라 이 말입니다. 왜, 그 편지에 해당되는 사람이 있을 게 아니냐 이 말이죠. 그 사람에 해당되는 사람이 바로 진짜배기 데살로니가 성도예요.

성경은 사람들에게 꼬시는 책이 아니고 본인한테 해당 안 되거든 그 편지를 남한테 해당되는 사람에게 전달하라 이 말이죠. 본인이 읽지도 않으면서 쥐고 있지 말고. 다시 할게요. 데살로니가에 편지를 쓴 것은 사람은 사는 게 우선입니다. 대통령 투표해도 딴 게 우선이 아니고 내가 우선이고, 세상에 모든 것이 내 사는 게 우선 이예요. 예수님 생각요? 진짜 모기보다 작게 해요. 하나님 생각? 하나님 생각은 사흘에 2초? 일주일에 5초나 생각하나? 생각 안 합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나머지 99.9%가 ‘나도 한번 살아보자.’ 이게 전부라니까요. 이게 인간이거든요.

그런데 여기서 누가 개입했다? 성령이 개입해 버리니까 졸지에 사는 것이 우선인 게 맞는데 나도 인정하는데 오! 성령이 그걸 그만두지 않고 뭔가 사는 것보다 더 우선되는 게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는데 거기에 사도의 편지가 와보니까 ‘야! 성령 받은 사도도 우리가 당하는 변화에 대해서 이미 익히 알고 있구나. 그렇다면 이 편지는 하나님의 편지 맞다. 아!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건져가는구나.’ 하는 것을 온몸으로 같이 기뻐하는 거예요. 그래서 데살로니가 인들은 환난 가운데 기뻐하는 거예요.

그 환난 가운데 기뻐하는 것, 그것은 바로 오늘 본문과 관련된 게 뭐냐 하면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는 겁니다. 여기에 나오는 본문의 내용은 이런 거예요. 앗수르가 옛날에 자기가 나라를 정복해 놓고, 니느웨가 앗수르 수도입니다. 니느웨는 어디 있느냐 하면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강이 두 개 있어요. 북쪽에는 티그리스 강이고 남쪽에는 유프라테스 강인데 니느웨는 북쪽 강에 붙어있는 옛날 큰 도시입니다. 그 도시에서 발달해서 이집트부터 큰 제국을 이뤘습니다. 그 제국을 이루면서 그들은 뭣을 했느냐 하면 모든 나라를 약탈을 했어요. 약탈을 하면서 조공을 보낸 사람을 오늘 13절에 보면 ‘파견자’라는 명칭으로 돼 있습니다. 이 파견자에 의해서 앗수르 제국이 모든 나라를 약탈을 했습니다. 일제 시대 때 일본에 있는 파견자가 와서 조선에 있는 목재부터 석탄, 귀금속, 금 다 캐가듯이 그때 총독이 파견자거든요. 마찬가지로 너 앗수르가 BC 622년인가 그때 바벨론과 메대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당하면서 그 너희들이 남한테 파견자를 보내서 약탈했던 꼭 그 식으로 너를 정복한 나라가 너희에게 그걸 요구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복음의 취지가 뭐냐 하면 우리가 언제 하나님의 원수입니까?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이면서도 원수 아닌 척 하면서 하나님을 모독하고 멸시 했던 그런 시절로 우리가 대우받으면서 ‘아! 내가 옛날 저랬었었지.’ 깨닫는 식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원수의 자리로 출발선을 같이 놓는 그런 식으로 일한다 이 말입니다.

여기 보면 여호와께서 친히 하나님이 네 대적이 됐다 이 말은 그러면 우리는 처음에 20대 초반에 교회 나올 때는 ‘그래 나는 하나님의 원수가 아니야.’ 나는 착한 쪽이고 원수는 유대인이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그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구원하느냐 하면 ‘네가 바로 내 원수이었었어.’ 라고 하면서 우리가 지금 복음을 전할 때 ‘ 복음 같은 소리 하네. 그 십자가가 복음이야?’ 하고 우리를 무시하고 모독하는 그들의 사고방식이 옛날 우리가 가졌던 사고방식을 그대로 우리가 목격하게 만드는 식으로 우리가 구원된다 이 말입니다.

왜 그렇게 목사님 복잡합니까? 왜 복잡하냐 하면 바로 우리는 십자가 안에는 돼지 코가 돼서 십자가 밖에 있는 사람이 십자가 안을 들여다보면 돼지 코가 돼요. 코가 찌부러진다고요. 자기 딴아 착한데 복음을 아는 쪽에서 보면 흉하기 짝이 없어요. 정말 흉해요. 하는 짓거리가 위선이고 거짓이고 나중에 알고 보면 자기 자존심 문제고, ‘여러분, 복음으로, 복음으로, 여러분들은 구원받습니다.’ 해놓고 그렇게 외쳤던 목사가 교회 일 있으면 ‘퇴직금 내줘. 내가 이교회 헌금을 얼마나 모았는데 내가 나갈 때는 그래도 이 교회 재산 반은 줘야지. 내가 이 교회 교인들 가족 수 계산해서 한 마리당 2백 원씩 쳐서……, 그렇게 복음, 복음 해놓고는 막상 자기가 하나님의 원수가 되고 예수님을 무시하고 모독하는 원수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 처음 된 자가 나중 된다는 이 말이 그 말 이예요. ‘나는 복음을 30년 알았습니다.’ 했는데 복음을 처음 듣고 믿었던 2주 째 오는 교인이 ‘목사님은 복음만 전한다 하는데 이건 평소에 사는 삶은 복음 가지고 밥벌이 하려는 그런 낌새가 있습니다.’ 하면 목사가 화를 내면서 목사가 귀싸대기를 때리면서 에이, 트라우마, 바꿔줘. 에이, 어디 천기를 누설해.‘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를 ‘다시, 다시.’ 항상 다시 출발점으로 다시 놓는 작업이 뭐냐, 이게 명언인데, ‘우리는 사는 것이 우선이다.’ 명언 중에 명언 아닙니까? 정말 지금 예배드리고 나서 가 봐요. 문만 열고 나가면 우리 일상의 24시간 뭡니까? 역시 밥 먹고 사는 게 이게 최고다. 다시 본래 자리에 항상 둡니다. 두시고 거기에 다시 성령께서 자극하게 되면 이 원수 된 자를 친히 하나님의 대적자가 난데 내가 하나님의 원수라는 걸 깨닫게 하시는 이 작업이 이미 우리가 구원받은 사람의 티를 팍팍 내게 하시는 이유가 ‘하나님 믿습니다. 복음 압니다.’ 이게 예수님 믿는 게 아니고 ‘내가 바로 하나님의 원수입니다.’라는 걸 깨닫는 그 즐거움! 이게 복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거두절미하고 우리의 24시간 관심사는 잘 먹고 잘 사는 것, 그 외 뭐가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게 일반적인데 웬 은혠지 성령께서 침투하사 그게 바로 그것 때문에 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알려줄 때 그 순간만이라도 주님이 우리보다 더 중요한 걸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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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