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취]2013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10강
[녹취]2013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10강
이름 : 한윤범(IP:14.39.134.60)
2013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10강
(강의:이근호 목사)
히브리서 1장 1절에 보면,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하고, 히브리서 8장에 보면, 구약에 있는 것은 모형이고 그림자라고 돼있어요.
그렇다면 우리가 이번에 했던 에스라, 느헤미야도 모형이고 그림자입니다. 모형이고 그림자인데 이게 역사거든요. 여러분들이 이해가 잘 안 될 거예요. 역사는 흐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모형이라는 것은, 설계사무소에 가면 모형이 있잖아요. 고정돼있어요. 하나님께서 흐르는 시간을 모형으로 잡았는가? 시간을 냉동 동결시켜버립니다. 시간을 냉동 동결시켜야 세 토막으로 나눌 수가 있어요.
동결시키는 방법이 느헤미야 13장에 나옵니다. “그 날에 모세의 책을 낭독하여 백성에게 들렸는데”라고 돼있지요. 냉동 동결시키는 방법이 모세언약을 주입하면 역사가 얼음이 돼버려요. 딱딱한 고체가 돼버립니다. 왜냐하면 율법 안에서는 모든 것이 갇혀있기 때문에. 분명히 흐르는 시간인데 단단해져서 마치 부산사람들은 상어돔배기라고 하죠. 끊어서 팔잖아요. 시간을 얼려놓고 그것을 동결시키는데 그 동결하는 방법이 모세언약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보면 돼요. 이스라엘이 흘러오는 모든 역사를 하나님께서 바사 왕을 통해서 느헤미야를 보내줘서 이 시스템을 모세언약에 의해서 나라가 만들어진다면 이렇게 만들어진다는 결정체를 만들어버려요. 그것이 세 가지 조건인데 할례와 안식일, 십일조. 할례 안에는 제사장 중심의 제도 그리고 여기는 성전이 있어야 제사장이 할 일이 있잖아요. 성전, 제사장, 신체에서는 할례를 행하고 안식일, 십일조. 이것이 모세언약으로 국가 시스템을 유지하는 겁니다.
여기서 왕이 빠졌죠. 왕은 모세언약의 완성형으로 다윗자손이 여기다 채워야 되기 때문에 비워놓는 겁니다. 모세언약은 다윗언약에 비해서 대비하는 것, 준비하는 것, 동결된 상태에서 그 다음에 진짜 하나님이 왕으로 오셔서 이 율법에다 마저 채워주시면 진짜 하나님 나라, 하나님이 그리워하시던 그 나라가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것이 냉동 동결되는데 역사를 냉동 동결시키고 그다음에 14-14-14로 이걸 토막을 내는 거죠. 토막 낸 기준이 뭐냐 하면, 바로 다윗언약에 준해서 토막을 냅니다. 토막 낸다는 것은 어떤 댐을 세워놓고 모든 이스라엘 역사를 집어넣습니다. 집어넣은 상태에서 냉동 동결시켜놓고 이걸 토막 내는 칼이 묵시란 칼로 잘라냅니다. 묵시라 해서 천사가 와서 잘라내는 게 아니고 이제는 완료되었다, 완성되었다는 티를 내는 거예요. 충분히 역사가 더 이상 진척되지 않아도 상관없다. 왜? 이미 완성의 상태에 도달했기 때문에. 다윗의 자손이 오면 완성이 상태에 도달되는 겁니다.
이걸 토막 내보니까 여기 다윗도 죽었으니까 다윗자손도 개인적으로 비워있고 나중에 다윗에 속했던 모든 이스라엘도 통째로 흔적도 흩어져버리고 없어요. 그러면서도 나머지 14대는 역사에 등장하지 않는 케이블을 깔아서 나중에 성령과 마리아의 만남을 통해서 드디어 다윗의 자손, 진짜 왕이 등장합니다. 그게 로마서 1장에서 복음이라고 했지요. 다윗의 혈통에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났다.
역사에 등장하지 않는 역사가 무슨 말이냐 하면, 이걸 아셔야 돼요. 역사의 주인공은 주체는 항상 인간들입니다. 인간들의 수고와 행함으로 역사를 일구어나가는 거예요. 그런데 전혀 역사의 눈에 띠지 않고 역사에서 사라진 것처럼 모든 게 끊어진 것처럼 허면서도 결국 지하케이블을 통해서 불쑥 솟아오르듯이 난데없이 묵시적인 칼질을 해버리는 그러한 연결고리, 하나님께서는 왜 역사 속에 숨어있는 모습으로 왔느냐?
그것은 1656년에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란 작품 이야기했지요. 하나님께서 역사라고 여기는 것은 인간들이 역사라고 납득이 가기 때문에 역사가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납득이 된다는 것은 인간들은 자기 행위를 다시 되받아서 우리가 역사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도록 거울을 장착한다고 했지요. 거울이란 그 자체는 어떠한 영상이 보이지 않지만 거기에 비추는 반사되는 인간은 자기의 모습으로 자기한테 환상과 꿈을 꾸고 희망을 갖는 겁니다.
제가 어린아이 이야기할 때 “엄마, 태어나기 전에 어디 있었어?” “너는 하늘나라에 있었어.” 질문하는 것은 누가 한 거예요? 어린아이가 질문한 거고 어린아이가 그런 질문할 때는 나는 여기 분명히 있다. 있음을 키워서 나의 역사로 확장시키겠다는 나름대로 노림수가 있는 거예요. 어느 정도 확장시키느냐 하면, 마치 내가 앞으로 계속 있을 것처럼 마치 나는 없었던 적이 없는 것처럼 지금도 우리는 계획을 꾸미는 겁니다. 만약에 오늘 가다가 내가 없어진다면, 지금 은행통장이라든지 이런 것, 저런 것 모든 계획, 이것이 아무 소용이 없는 거죠. 절벽에 나락에 떨어지니까.
그러나 인간이 어떤 행동할 때는 내일도 내가 있고 모레도 내가 있고 한 달 뒤에서 내가 있다고 간주하고 지금의 계획을 시도하는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하면, 강남스타일이에요. “갈 때까지 가볼까~” 계속 나는 살아있을 것이고 살아있는 한 역사의 주인공이다. 나는 이것 포기 못한다. “갈 때까지 가볼까~ 옵빤 지옥스타일~”
율법은 동결시켜놨습니다. 아무리 길고 날아봐야 죄 안에 갇혀있고 심판 아래 있다. 냉동상태에요. 더 이상 역사의 진척이란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늘나라가 왔다. 마지막 심판의 나라가 왔다. 이제는 교체될 나라가 등장했다. 회개하라. 어디에서? 나는 역사의 주인공 노릇을 했다는 자체는 내가 말씀의 위력을 모독한, 모세언약을 모독한 나보다 더 중요한 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더 중요하고 그걸 이용하려고 했던 내가 역사의 주인공 된 그 자체에 대해서 우리는 잘못 생각했다고 회개하는 겁니다. 어떻게? 물속에 들어감으로써 깜깜해지고 죽음 속에 들어가는 거예요. 우리는 절망입니다.
그런데 물속에 같이 들어오신 분이 계시죠? 같이 예수님도 요단강에 들어왔는데 예수님한테는 하늘의 문이 열리고 비둘기 같이 은혜가 왔습니다. 우리한테는 비둘기가 없어 독수리 똥만 있을 뿐이지 아무것도 없어요. 비둘기 같이 성령이 오니까 이제는 하늘과 땅이 유일하게 내통하고 소통하는 창구가 되었습니다. 이걸 마가복음에서 복음이라고 이야기한 겁니다. 꽉 막혔다. 숨이 막혔는데 숨이 트이는 거예요. 하늘이 열리면서. 성경은 그런 스토리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역사는 에스라, 느헤미야에서 스톱. 스톱할 때 그냥 스톱하면 안 되고 스톱해야 될 이유가 모세언약의 효과가 여기까지 더 이상 없어요. 그러면 그 효과를 보여주기 위해서 느헤미야 10장을 봅시다. 오늘 참석해야 마지막 다 마무리가 되는데 드라마 끝도 안 보고, 영화 끝도 안 보고 일찍 나가버리면 안 되는데.
느헤미야 10장에 보면, “그 인친 자가”라고 나오죠. 인쳤다는 의미가 성경에 여러 군데 나오는데 구약에는 드물게 나오고 신약에는 역사가 끝난 시점이기 때문에 많이 나옵니다. 고린도후서에도 성령이 인쳤다는 말이 나오는데 제가 소개하려는 인치심은 고린도전서 9장 2절에 나오는 그 말씀을 제시해드리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니 나의 사도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인쳤다 할 때 느헤미야 10장에서는 모세언약의 완료로서 인친 거죠. 그런데 고린도전서 9장 2절에 나온 인친 것은 예수 안에서 인 친 거죠. 느헤미야 10장에서 역사의 마지막에서 대기상태에서 역사적 입장에서 인친 거고 그 다음에 고린도전서 9장에 나오는 것은 이미 묵시 안에서 인친 것이고. 어느 것이 효과가 더 낫겠습니까? 대기상태에 있는 것은 메시아가 안 왔으니까 아직까지 미흡함이 있잖아요. 하지만 예수 안이라는 것은 종결된, 다윗언약의 완성 또는 다윗의 자손 왕으로 오신 안에 인친 거죠. 인친 시스템이 어떠한 관계성을 보여주느냐가 중요한 겁니다. 인쳤다는 말은 그냥 도장 하나 찍었다는 이런 뜻이 아니고 인쳤다는 것은 인을 치고 인을 받는 사이에 어떤 연줄이 있어서 이게 끊어지지 않느냐가 중요한 거죠.
그래서 인쳤다는 것을 우리가 현재 상황 속에서 설명하기 위해서 제가 이런 예를 들겠습니다. 촌에 집에 대청마루가 있잖아요. 거기에 액자에 여러 사진, 특히 애들이 많을 때는 보기가 혼잡해요. 그 애가 그 애 같고. 나중에 중력에 의해서 밑에 내려앉아 있고. 옛날 교복 입고 찍은 사진도 있고, 까까머리로 찍은 사진도 있고. 보면 육군사관생도복 같은 것 입고 찍은 것도 있어요. 자식들이 다섯 명 있다면 거기에 빛바랜 사진들이 있어요. 그게 인친 거예요.
무슨 뜻이냐 하면, 지금 대청마루에 걸려있는 사진 안에 둘째 아들이 고등학교 교복 입고 서 있다. 지금 내가 보는 순간 그 아들은 서울에 직장에서 교복 입고 서 있습니까? 아니지요. 벌써 세월이 지났고 고향 부모 집에 사진이 어떤 모습, 어떤 자세로 찍혔는지 관계없이 지는 마음대로 까불고 놀고 있잖아요. 그러면 움직이지 않는 사진 속의 아들은 같은 아들이 아닙니까? 동일인물이죠. 하지만 서울 직장에서 까불고 있는 것은 움직이는 거고, 그냥 고향 집 늙은 아버지 집에 있는 것은 동결된 상태고. 인쳤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니가 얼마나 까불어도 주님 보시기에는 고정된 걸로 보는 거예요. 도장 찍힌 것. 네가 어떤 활동을 하든 관계없이 너는 결국 내 앞에서는 이런 상태로 나의 자식이라는 겁니다.
느헤미야 10장에 “그 인친 자는 하가랴의 아들 방백 느헤미야와 시드기야, 스라야, 아사랴, 예레미야, 바스훌” 나는 성경에 이런 대목 나오면 아나운서 시험 칠 때 다른 시험문제 필요 없고 이걸 빨리 읽어보라고 하면 될지 싶어요. 십자가마을 사람 이름도 못 외우는데 우리교회 교인들 이름도 못 외우는데. 그러나 이들이 인을 쳤다는 것은 이들 입장에서는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최고의 축복을 받은 겁니다. 내가 어디 가서 뭘 까불어도 무슨 행동을 해도 주님께서는 예수 안에서는 얼음, 채널고정, 얼음 이렇게 되잖아요.
예수 안에 있는 것을 신약성경에는 성령 안에 있다 합시다. 마지막 시간이지만 약간 어려운 것 해봅시다. 갈라디아서 3장 2절에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성령을 받았구나, 끝. 이런 게 아니고, “너희는 성령을 받았나?” “받았습니다.” “혹시 율법의 행위로 받았어요?” 이렇게 묻는 거예요. 율법이란 거룩한 거고 선한 겁니다. 무시할 수 없어요. 하나님 주신 거니까. “혹시 하나님이 주신 것 잘 지켜서 성령 받았어요?”라고 사도 바울이 묻는 거예요. 무슨 답변을 기대하면 묻지요?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결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지금 십자가라는 완성의 효과와 율법이라는 미완성의 효과 사이의 차이로 십자가를 믿고 있는지 점검하는 거예요. “혹시 성경말씀을 지켜서 구원받고 천국 가는 거예요?” 아닙니다. “그러면요?” “십자가에서 나온 성령을 믿게 되어서 했습니다.” “그렇지요. 앞으로 제군은 뭘 자랑합니까?” “십자가만 자랑하겠습니다.” 인친 거예요. 예수 안에서.
그러나 사도 바울의 측정, 그리고 하나님의 측정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의 권면과 명령들이 많거든요. 여기서 눈속임해서 성령 받았다고 우기는 사람들 사도 바울의 명령과 훈계에서 전부다 넘어집니다. 가짜가 색출이 돼요. 인침을 받지 않고도 인침을 받은 것처럼 행세했던 모든 이단들이 전부다 색출이 됩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지금 성령을 받았다. 하늘나라 왔다. 에스라 이후에는 뭐가 의미 없어요? 역사지요. 역사 속에 주님께서 거울을 박아놨기 때문에 역사에서 우리가 찾고자하는 것은 역사의 주인공으로서 이 역사 만드는데 얼마나 내가 기여했는데 내 행함이 얼마나 보태서 이런 역사란 찬란한 실적을 남겼는가? 거기에 관심이 있지요.
지금 그것이 모세율법에 의하면 에스라, 느헤미야는 율법을 지킨 게 아니고 율법 앞에 모든 걸 발각당할 준비, 노출돼있는 상태지요. 자기 게 없는 거예요. 율법에 의해서 말씀에 의해서 됐습니다. 70년 만에 돌아오리라는 예레미야에 준 약속 때문에 결국은 율법이 밀어서 율법에서 우린 벗어날 수 없는 입장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는 게 에스라, 느헤미야에요.
우리는 모세는 과거 이야기고 도망쳤다고 했는데 그 율법이 끝까지 따라와서 율법이 우리보다 먼저 앞장서서 우리를 가로막은 겁니다. “헤이” 하고 율법이 호명한 거예요. 너는 빼도 박도 못해. 율법 안에서 못 빠져나와. 가로막은 거예요. 에스라, 느헤미야가. 성전도 마찬가지고. 성전이 무의미한 게 아니구나. 십일조, 다 무의미한 게 아니다. 이런 걸 통해서 그들을 가로막은 거예요. 하지만 그들은 완벽하게 지키지는 못했습니다. 왜? 그들은 말썽이 일어나니까. 어쨌든 간에 그게 취지가 아니고 역사는 여기까지, 끝.
에스라, 느헤미야에서 귀환할 때 이게 만약에 자기 힘으로 독립한 것 같으면 자기한테 역사의 주인공이라고 하겠는데 다시 돌아오게 된 것이 누구 덕입니까? 여호와를 모르는 하나님께 벌 받아야 될 짐승 같은 제국, 바벨론과 그 이후의 나라 페르시아, 바사나라를 누가 지배했습니까? 다윗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모든 것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서 전혀 우리의 적이라고 여겼던 바사나라의 지도자 다리우스, 거기에서 모든 지원금을 받아가면서 타의에 의해서 성전을 지었잖아요. 자랑할 게 뭐. 귀환된 그들이 역사의 주인공에서 사실은 빠져야 돼요. 빠지고 그 빈 자리에는 다윗언약의 완성자, 미지의 어떤 누구, 거울을 남겨놓고 떠나간 사람, 나중에 인간을 역사에 내가 갇히게 했다고 정체를 드러낼 마지막 때 메시아, 그분의 자리가 있으면서 에스라, 느헤미야는 대비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역사의 주인공은 이미 우리는 끝났다. 그러니까 십자가를 믿는다고 해놓고 막상 사도 바울이 권면과 지시와 명령이 나오니까(이래서 인간들이 숨어도 숨을 수가 없어요.) 슬슬 이 말씀은 제가 지켰다고 등장하는 거예요. 율법 안에는 뭐든 심판했다고 분명히 했고 우리는 율법에서 죽은 자라고 분명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사도 바울이 명령과 지시를 주니까 “이것은 예수 믿고 난 뒤에 지켜야 되겠구나.”라고 하게 되면 그 말씀에 대한 행함으로 구원을 받고 새로운 자기만의 신앙역사, 연조가 드디어 개시가 되는 겁니다.
얼음 어디 갔어요? 냉동 동결 어디 갔습니까? 살인하지 말라 하니까 저는 아직 살인하지 않았다고 하는 거예요. 니가 살인자야. 저는 살인한 적 없습니다. 니가 살인자야. 도적질하지 마라. 로마서에 나오거든요. 저는 도적질 아직까지 안 했습니다. 니가 도둑놈이야. 음행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저는 음행, 간음하지 않았습니다. 니가 간음자야. 산상설교와 똑같아.
복음 안다, 십자가 안다, 나는 성령 받았다. 안 믿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에 나오죠.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배치된 것들이다. 우린 이미 그리스도만 자랑할 뿐이지 세상의 주식이 얼마고 그런 것도 자랑하지 말고 그런 것들은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니까 너도 그 줄기를 타라 이런 뜻이에요. 복음 안다, 십자가 안다, 성령 안다. 우리는 같은 형제인데 왜 형제를 내치느냐 하는데 막상 사도 바울의 명령과 지시를 하니까 막 살면 안 된다고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갈라디아서 다시 해봅시다. “니가 성령을 받은 것이 십자가에서 나온 것인지 니가 수고했다고 성령 줬느냐? 혹시 네가 말씀 잘 지켜서 성령 받아 구원받는 것 아닌가?”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그러면 네가 구원받는 것은?” “십자가의 공로입니다.” “그럼 너는 어떻게 되는 거야?” “저는 십자가에 그리스도와 레슬링 하다가 죽었습니다.”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다. 이런 성령을 안 받은 상태에서 성령 받았다는 티를 내면서 스쳐지나가는 거예요.
얼마 전에 지구에 혹성이 다가온다 했잖아요. 그런데 나사에서 그냥 스쳐지나간다고 했거든요. 그러니까 와서 십자가에 부딪칠 뻔하다가 그냥 스쳐지나간 거예요. 그건 접촉사고 있는지 블랙박스에 보면 다 찍혀 나와요. 갔다가 부딪쳐놓고 십자가 안다는 겁니다. 그러면 남는 것은 자신이 자기 구원의 역사에 주인공이 나에요. 자기 부인이 안 되는 겁니다. 자기 부정이 안 되고. 나는 십자가 알고 이제는 말씀대로 살아야 영광을 돌리지. 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개혁주의신학, 그쪽으로 가라 가. 그래놓고 복음 안다, 뭐 안다.
사도 바울의 명령, 지시만 던져보면 들통 다 나요. 그런데 복음 안다고 우기니 환장할 지경이에요. 제가 얼마나 답답했으면 안양공부에서 그이야기로 한 20분 보냈습니다. 이근호 목사의 문제점은 인간을 전적으로 죄인으로 보더라. 그게 문제점이다. 왜 사람이 믿고 난 뒤에 행한 것을 인정하지 않느냐? 누가 역사의 주인공입니까? 자기 행해서 남 구원 줍니까? 자기 행한 것 자기 구원에 보탬 된다고 하는 거예요. 마일리지 쌓는다고 하는 거예요.
그 마일리지 왜 쌓습니까? 아직까지 냉동 동결이 안 됐어요. 내 역사는 백날 해봐야 율법 안에 갇힌 죄밖에 안 되는 역사라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유는 간단해요. 믿을 수 없기 때문에. 믿음이 없기 때문에. 믿을 수 없으니까 대체로 뭐하느냐? 착한 행함으로 영광 돌리자고 나오는 거예요. 착한 행함으로 영광 돌리자, 그 문장을 따와서 성경에 로마서 찾아서, “봐라 사도 바울도 착한 행함으로 영광 돌리자 했잖아. 그러니까 사도 바울 이야기나 내 이야기나 똑같잖아.”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좋은 질문했어요. 이영욱이란 분이, “사도 바울은 ‘나’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왜 십자가마을은 자제를 하느냐?” 했어요. 목사님들은 신학교 조직신학에서 배웁니다. 신학교에 가면 이런 걸 배워요. 성경에 나타나지 않는 예수님의 행동도 계시냐는 대목이 나와요. 사도 바울이 쓴 편지도 많고, 요한도 쓴 편지가 많은데 그것도 하나님의 계시에 들어가느냐, 안 들어가느냐고 그걸 토론하는 거예요. 이게 계시냐, 계시 아니냐가 왜 중요한 문제냐 하면, 성령께서 일할 때 성령께서 친히 쓰신 성경책으로만 일하느냐 아니면 성경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사도 바울의 다른 편지나 예수님의 다른 말씀으로도 성령께서 앞장서서 일하시느냐? 그 문제에 들어간 겁니다.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니죠. 이런 걸 배우기 때문에 목사가 어깨에 힘들어가는 거예요. 아마추어는 저리 가. 니들은 몰라. 그러나 배우면 뭐합니까.
성경이 친히 성령으로 쓰셨을 때 성경이 만약에 예수님의 계시다, 사도 바울 본받자 하면 성경이 계속 추가됩니다. 성경이 기록된 의미가 없어져버려요. 부록이 있어야 돼요. 업그레이드를 해야 돼요. 계속해서 제4판, 제5판하고 계속해서 추가가 되는 겁니다. 이제 고고학자들이 빛을 발하지요. 여러분 사도행전 28장 그 뒤가 궁금하지 않습니까? 이럴 수도 있을 것이고. 마가복음 뒤에 어떻게 끝났는지 모르죠. 드디어 고고학적 발굴했습니다. 추가합시다. 성경이 정경으로 추가한 것은 325년 회의에서 됐기 때문에 우리도 지금 회의해서 정하면 됩니다. 이런 식으로 막 나오는 거예요.
그것은 인간들이 교회라는 시스템, 정치적 시스템을 만들 때는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진짜 부록을 넣고, 안 넣고 결정하는 것은 교회에서, 주교단에서 결정하는 게 아니고, 목사가 결정하는 게 아니거든요. 넣어줄 생각도 안 하고 있는데 저희들끼리 김칫국 마시고 있는 거예요. 성령께서 넣어줄 때는 반드시 얼음, 역사의 냉동 동결을 전제로 하고 하는 겁니다. 에스라, 느헤미야 동결해서 그 다음부터 계시가 없어요. 나중에 세례요한이 와서 400년 뒤에 떨어지거든요.
그 중간은 뭐냐? 그 중간에는 예수님을 핍박할 만한 역사가 숙성돼야 됩니다. 예수님을 죽여줘야 됩니다. 그냥 죽이는 게 아니고 역사라는 질이 이렇게 더러운 질이구나. 그리고 역사의 주인공은 자기들끼리 신앙의 이름으로, 하나님 믿는다는 이름으로 역사를 만드는 그것이 오히려 예수님의 피를 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 말을 요한복음 식으로 말하면 나랑 같이 죽으면 나랑 같이 산다. 그 원리입니다. 성경 구분 아무것도 아니야.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영생이 없다. 그러면 우리는 죽으려니 아까운데. 이렇게 하잖아요. 주님께서 너는 이미 죽은 자야. 네가 목숨 끊는 걸 죽었다고 생각하는 건 2차원 해석이지만 3차원적 하나님 입장에서 죽었다는 말은 율법에 갇혔으면 빼도 박도 못하고 이미 그 안에서 모든 자가 죽은 것이에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을 때 모든 자는 이미 죽었다고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 나오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미 죽은 자로 보는데 우리가 자꾸 역사의 주인공으로 주체자로 등장하는 것은 신전에서 신을 보지 못하고 거울에 자기 모습을 되비추면서 자기 역사를 자기가 경배하기 위해서 오늘도 성경책 들고 교회 나오고 설교 듣는 거예요. 그러니까 모든 인간은 자기가 거룩한 성전이 돼버려요. 누구를 신봉한다? 태양 같은 어버이가 자기야. 자기를 섬기는 신전, 그걸 성경에서는 탐심이 곧 우상숭배니라. 탐심이 어느 기업체에서 생산돼요? 어느 공장에서 주문하는 겁니까? 탐심은 자동적으로 속에서 나오게 돼있어요. 계속 나오죠.
성도의 차이점은 탐심이 안 나오는 게 아니에요. 탐심과 더불어서 성령이 나오면서 내가 율법을 통해서 탐심을 의도적으로 유도해냈다고 속삭여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동행이죠. 누가 나와 함께 동행할까~ 최성수의 동행. 엠마오 내려가는 제자들과 주께서 동행하면서 “집에 왜 가는데? 가서 뭐할 건데?” 이렇게 물으시는 것.
성도는 탐심이 없는 사람이 아니고 탐내지 말라는 순간 내 의사도 물어보지 않고 내 속에 잠자고 있던 욕심이 등장하면서 “이제 들켰네.” 하고 등장하는 거예요. 고린도전후서에 나오는 모든 것, 특히 고린도전서 7장의 한 대목을 읽어드릴 테니까 또다시 부끄러워합시다. 7장 36절에 보면, “누가 자기의 처녀 딸에 대한 일이 이치에 합당치 못한 줄로 생각할 때에 혼기도 지나고 그같이 할 필요가 있거든 마음대로 하라 이것은 죄짓는 것이 아니니 혼인하게 하라”
혼인이 무엇에 해당되는 겁니까? 방금 읽어도 무슨 뜻인지 몰라요. 성경이 이만큼 어려운가요? 혼인이 무슨 짓이다? 죄짓는 것이다. 드디어 너는 혼인하고 싶어서 환장했지. 숨어있는 죄성을 이 말씀을 성령을 통해서 하게 하니까 들통 난 거예요. 예수고 하나님이고 치우고 나는 결혼이나 할란다. 벌써 세 살 때부터 했지. 여섯 살부터 엄마 화장품 찍어 바르면서 나는 왕자님과 결혼할거야. 했잖아. 천사가 와서 열두 시에 무도회에 참석할까 싶어서 신발도 관리하고. 신발 신고 왕자와 결혼하려고. 그 왕자가 재벌 3세 아닙니까. 드라마에 나오잖아요. 그 드라마가 남의 이야기 같으면 드라마 보겠습니까? 그걸 쳐다보고 있다는 것은 저 드라마가 나의 거울이다. 내 생각과 똑같네. 다들 그러니까 설마 그게 죄일까 했지요. 성경말씀은 뭐라 합니까? 결혼했어요? 죄지었다고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이미 결혼했는데 어쩌겠어요.
그래서 하는 말이 우리 딸 결혼식 할 때 서경수 목사님한테 부탁하고 싶은 게 고린도전서 7장 28절입니다. “장가가도 죄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가도 죄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의 고난이 있으리니” 이걸 주례사로 하는 거예요. 아이고, 아이고. 결혼식에서 우는 거예요. 아이고, 자식아. 니가 이러한 불행을 자초하다니. 우리 집안에 이런 비극이. 니가 결혼을 한다고 니가 제 정신이야. 우리 다같이 통성 기도합시다. 이런 식으로.
샌더스란 신학자 등 신학자들은 지금 사도 바울이 결혼을 안 해서 결혼 재미를 몰라서 이런 소리를 한다고 했어요. 신학자들이 도대체 박사학위 딴 돈이 아까워. 완전히 마귀의 앞잡이야. 그 인간들은. 역사 동결을 몰라요. 우리가 있다는 것은 죄에 발각되기 위해서. 그 죄 중에 하나가 결혼하는 것이 포함이 돼있단 말이죠. 아니 그것보다도 내가 내 역사의 주인공이 되어서 천국에 들어가겠다고 사전에 만반의 시험 칠 준비하는 죄가 십자가를 모독하는 거예요. 죽은 자가 시험 쳐봐야 무슨 소용 있느냐 이 말이에요.
죽은 자는 시험지 들고 가다가 죽으면 돼요. 자기 이름도 못 쓰고. 하지만 인치심이란 것은 바로 지게차에서 나온 두 개의 날카로운 발판이 있는 거예요. 내가 강의하면서 큰 실수 했어요. 지게차 노래가 [엘리사를 위해서] 인데. 그 소리가 지게차에서 나오는 걸 알면 베토벤이 기절했을 거예요. 그게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입니다. 너를 위해서 바쳐가는 거예요. 우리는 냉동 동태니까.
우리는 나의 역사가 있어요. 그것은 내가 이런저런 죄들이 그동안 스펙을 쌓았다는 긴 꼬리 그게 바로 우리 역사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이런데 보면 신나는 게 한두 개가 아닌데 고린도전서 6장 10절에 보면, 저는 신나는데 함부로 보지 마세요. 보면 웁니다.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술 취하라고 먹지 맹숭맹숭 술 먹습니까. 술 취한 자는 하늘나라 못 간다. 제가 왜 신나느냐 하면, 저는 예수님 믿고 술 안 먹었거든요. 그러니까 나의 역사는 아주 멋있는 역사잖아요. 그러니까 왠지 뿌듯하고, 뭔가 보람 있고 그 다음에 그와 더불어서 등장한 게 술 먹는 놈들 다 지옥 가라는 즐거움. 제가 주일날 설교에 다미앵이란 사람이 처형되는 장면을 거론했지요. 미셀 푸코 책에 나오는데 유황불로 지지니까 덜 죽어서 다른 부위를 45센티미터 걷어서 허벅지에 찔러서 죽인다 하지요. 옛날에는 사형이 축제였습니다. 춘향전에 보면 춘향을 몰래 타작하는 게 아니고 변 사또 자기 생일에 성춘향 타작하는 걸로 생일축하노래를 대신하죠.
이게 왜 축제가 되느냐 하면, 사람은 이런 게 있어요. 악이 내 손에 처단되는 그 즐거움, 내가 밉고 미운 악이 내 눈앞에 목격되는 작살되는 저주받을 때 그 속에 있던 모든 한이 다 풀립니다. 한이 왜 생기느냐? 복수를 제 때 못해서 한이 생겨요. 정 복수가 안 되면 자살해버려요. 최진실과 결혼했던 조성민이 마지막 유서에 보면, “자식들아 나를 용서하지 마라.” 이게 무슨 객기에요. 끝까지 자기 역사 찬란하게 빛내는. 죽어가면서. 아들아 못난 아비를 용서하지 마라. 어디서 많이 듣던 멘트 같기도 하고 그래요.
왜 끝까지 자기 역사를 포기 못합니까. 그것이 자살로 이어진 거예요. 수그리하면 되고 쭈그리하면 되는데 세리와 창기 되면 되는 거예요. 밑에서 성령이란 발판이 없기 때문에 자기 속에 있는 욕망과 악을 또 자기 속에서 끄집어낸 선으로 그걸 대결구조로 이어가서 어쨌든 간에 악은 숫자를 죽이고 선은 많이 스펙을 쌓아서 나중에 청산할 때 대차대조 빼기 할 때 나머지 이익 분으로 그래도 구석방이라도 넣어주세요. 이렇게 들이밀려고 한 거예요. 자기 선을 쌓는 행위 중에 하나가 교회 다니기, 예수 믿기였어요. 조성민 장례식 할 때도 성도라 해서 그런 모습이 보이잖아요.
성도라는 것이 자꾸 감추면 안 돼요. 감추면 자신이 마치 의인인 것처럼 행세하게 돼요. 의인이 돼버리면 내 살과 내 피를 마시라는 주님의 십자가가 그 순간만큼은 쓸데없는 짓을 한 거예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졌다. 그 다음부터는 니가 알아서 착한 일 해라. 내 영광 가리지 말고.” “네, 고맙습니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미 십자가 있고 내 안에 성령이 있으면 성령과 더불어서 협의해서 착한 일 하겠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를 많이 거두겠습니다.” 이렇게 나오더란 말이죠.
그러면 그것은 결국은 역사의 주인공은 성령이 아니고 자기가 주인공 노릇하면서 노림수가 뭐냐 하면, 나는 성령의 힘으로. 성령이 주인공이라고 또 위선을 떠네. 성령을 주인공이라고 하는 사람들 건드려보세요. 왈칵하지. 성령도 화내는 법 있습니까? 당신이 하는 행동이 성경에 합당한가 보자. 그러면 입이 쑥 들어가 버려요. 당신 이런 행동했지? 먹는 것 입는 걸로 족한 줄 알라. 당신 하루에 몇 번이고 몇 시간이고 먹는 것 입는 걸로 족한 알았나? 말을 못하죠.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그것 어떻게 했나? 말을 못하는 거예요. 마지막 때에 미워하지 말라 했는데 미워한 적 없어? 말을 못하는 거예요. 결국 나온 말이 그래도 예수 믿는 사람답게 최선을 다했다는 겁니다.
그 사람은 뭘 모르느냐 하면, ‘반대’와 ‘다르다’를 구별을 못하는 사람이에요. 선과 악은 반대지요. 그러나 하늘나라는 선과 악을 합쳐서 달라요. 달라도 너무 달라요. 악이고 선이고 간에 선한 분은 예수님밖에 없는 이유가, 진짜 그분은 선한 분으로 종결해버렸어요. 다 이루었으니까. 더 이상 내 앞에서 선하다는 이야기를 하지 말란 말이죠.
그러면 이 말씀, 사도 바울의 권면을 어떻게 하느냐? 주께서 우리를 재료로 해서 그 말씀을 덮쳐버립니다. “나는 이 말씀을 못 지키는데 주께서 강제로 지키게 하셔서 모든 주인공은 내가 아니고 나는 주인공을 자기 잘났다고 우기는 인간이고, 주인공은 오직 예수님이 여전히 모든 것의 주인공이었고 구원받는 것도 주님이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서 다 하십니다.”라는 것을 고백하기 위해서 지금도 계속해서 우리에게 욕망을 생산해주는 겁니다.
이걸 우리가 우리의 선한 의지로 막지 말란 말이죠. 막지 말라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막 살라고 하는 이야기에요. 뻔히 막 사는데 그걸 가로막는다고 거기서 새로운 역사가 나오느냐 이 말이죠. 그러면 그쪽에서 하는 말이, “성경에 보면 사도 바울은 막 사는 게 아닌데 막 살라고 하느냐?” 사도 바울의 모든 말이 성경이 아니에요. 성경은 사도 바울의 말로 보면 안 돼요. 성령께서 하신 이야기하신 거예요.
그래서 이영욱이란 사람이, 사도 바울은 ‘나’라고 했는데 왜 안 하느냐? 그렇게 질문한 자체가 뭐냐 하면, 사도 바울 비슷하게 하기만 하면 우리도 성령 받은 사람 얼추 따라간다고 생각한 거예요. 뭔가 성경에서 인간을 따로 뽑아내요. “너도 인간, 나도 인간, 에브리바디 인간, 그러면 같이 비슷하게 가면 나도 성령 받은 사람 맞지?”라고 확인하고 싶은 거예요. 그러니까 출발점이 내 쪽에서 출발하거든요. 내 쪽에서 출발하면 이건 역사가 돼버려요.
십자가는 밀어내는 힘이 있잖아요. 하늘나라에서는 내 쪽에서 오는 걸 자꾸 밀어내는 거예요. 아침 열시에 포도원에 온 사람들, 열두 시에 포도원에 온 사람들, 오후 세 시에 온 사람들, 마지막에 오후 다섯 시에 왔을 때 주님께서 품삯을 줄 때 오후 다섯 시부터 온 사람부터 먼저 줌으로 말미암아 열 시 온 사람들, 열두 시에 온 사람들, 세 시에 온 사람들이 자기는 착한다고 여겼을 거예요. 하지만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우리는 뭐냐? 아이씨. 이용당했네.” 이렇게 생각 들 수밖에 없지요. 그게 색출작업입니다. 가짜는 바꿔버려요. 바꿔줘! 가짜는 못 들어옵니다.
목사님들이 이걸 알았더라도 걱정이 돼요. 그러면 진짜만 있는 교회라면 일단 좋기는 좋지만 장사가 안 돼. 장사가 안 되면 교회 역사가 끊어지잖아요. 왜냐하면 가짜가 와서 제비가 와서 흔들어줘야 니 마음대로 놀이를 하든, 바자회를 하든, 하나님 뜻이라고 어디 놀러가든, 내가 지옥 천당 보내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돼야 되는데 자꾸 이런 소리도 한두 번이지 가짜가 문만 열고 예배 참석하다가 나가버리고. 조금만 버티면 되는데. 그런 생각이 들게 하도록 주님께서는 목사 시킨 겁니다. 목사로 망하게 하시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 하는 일로 다 망해요. 치과의사는 치과의사하면서 망하게 하시고.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이 자기는 망하는 게 마땅하다는 걸 깨닫는 거예요.
그래서 캘빈은 틀린 겁니다. 자기 하는 일은 하나님 주신 소명이 아니고 그것은 바로 각자의 자리에서 망해야 나는 역사의 주인공이 아니고 얼음, 율법 안에 죄인밖에 안 되는데 그런 식으로 동결시킨 것은 나의 능력이 아니고 묵시의 능력입니다. 바로 요단강에 비둘기 같이 오신 성령이 수직적으로 내려오게 되면 바로 죽은 자도 밧줄 타고 내려오신 예수님의 우리의 죄를 대신 몽땅 가져가신 그 공로로 우리는 그 연줄로 끊어지지 않는 주님의 일방적인 발판 사랑으로 성령의 주심으로 선물로 준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안에서 우리는 정죄함이 없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의 역사 그것 잘 가꾸기 위해서 내 인생 찬란하게 빛내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건성으로 죄인 중의 괴수라고 빈 말만 남발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의 헛소리 듣지 아니하고 실제적으로 죄인 되게 하시는 묵시적 칼, 그 동결작용을 저희들은 성령의 역사로 알고 항상 자기를 부인하는 가운데 우리를 통해서 성령의 열매, 하나님의 열매 마음껏 맺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2013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10강.hwp (32.0K), Down: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