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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녹취]2013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9강자유게시판요한복음

[녹취]2013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9강

이름 : 오용익(IP:183.105.212.7)

제 9강

에스라도 9장, 느헤미야도 9장에 보면 공통점이 있어요. 일괄적으로 회개를 하게 되는데 회개할 멘트를 에스라도 느헤미야도 같은 취지로 하게 됩니다. 이것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회개하면 구원받습니까? 회개하면 구원받습니까, 이 질문자체가 사실은 잘못된 질문이에요. 회개하면 구원받습니까, 라고 할 때 회개, 하면, 구원, 받는다, 이 넷 중에 어느 것을 강조하느냐에 따라서 말이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게 되거든요. 에스라 느헤미야 입장에서는 그들이 회개만 했을 뿐인데 구원받습니까, 라는 질문을 제가 던져보는 거예요.

회개만 하면 구원이 되는 겁니까? 안되지요. 회개한다고만 해서 구원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러면 회개 없이도 구원이 될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도 병행해서 던질 수가 있어요. 회개 없이 구원될 수가 있습니까? 그것도 없거든요. 그러면 회개라는 것이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로되……, 수학이 나오니 골치 아프지요. 어찌되었든 모든 요건을 전부 충족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요건으로서 들어가야 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회개해서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일단 회개는 했는데 아무 소식이 없다? 그럴 때 얼마나 뻘쭘하겠습니까? 상당히 난처하지요. 괜히 회개했지요. 아무 소식도 없는데.

신약성경에 보면 이런 것이 있어요. 요한복음에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요 3:5)에서 “물과 성령으로” 요한복음은 세례요한을 예수님 사이에 집어넣어 버려요. “만일 하늘에서 주신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요 3:27)다고 해서 예수님과 세례요한을 한 세트로 해서 그 당시에 활동하시거든요. 그래서 물과 성령은 한 세트가 되는 거예요. 요한1서 5장에 보면 하나가 더 있어요. “증거 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요1 5:8) 물과 피와 성령, 역사에서 메시아가 다녀갔다는 증거는 오직 세 가지 밖에 없다는 겁니다.

물은 회개거든요. 물은 회개, 피는 십자가 죽으심, 그것을 알려주는 성령, 이것이 증거라는 말이지요. 오늘날 한국교회는 뭐냐 하면, 방언, 병 고침, 부자 됨, 이것 아닙니까? 이것 없으면 성령 못 받은 거예요. 노벨평화상 받겠다는 사람 보세요. 나처럼 방언 못하면 성령 못 받은 것이고 병 못 고치면 성령 못 받은 것이고 만사형통해서 부자가 못되면 그것도 성령 못 받은 것이죠. 자, 성경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칩시다. 방언, 병 고침, 그리고 축복,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입니까? 물과 성령과 피,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입니까, 라고 물으면 어느 쪽을 선호할까요? 다 이거(방언, 병 고침, 부자 되는 것) 얻으려고 교회 오지요.

요한 1서에서는 이것을 가지고 적그리스도라고 하는 거예요. 적그리스도니까 이왕 지옥 갈 것 노벨상 100개줘도 상관없어요. 노벨상 타고 “아이고 뜨거워라.” 그러면 되지요. 물과 피와 성령으로 했다는 말은 그만큼 이 세상이 만만치 않았다는 뜻이에요. 곱게 이야기해서 하나님의 구원이 성취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회개부터 보겠습니다. 회개했으면 구원받는가? 그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회개했는데 구원이 안 오면 어떻게 할까요? 참 난처한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케 하시는 회개가 있고 자기가 혼자 회개해놓고 구원을 기다리는 회개가 있어요.

보험회사에서 서류를 만들어서 사인하세요, 하면 보험금 타는데 자기 집에서 스스로 만든 서류로는 보험금 안줍니다. 그것은 누가 작성했어요? 본인이 작성한 거예요. 여러분이 지게차를 보세요. 콜라박스가 있다면 지게차에 달린 두 개의 날카로운 발이 박스에서 나옵니까, 지게차에서 나옵니까? 지게차에서 두 개의 날이 나와서 덜렁 들어버리지요. 삐리리리리, 하면서 실어내잖아요. 이걸 보면 나도 저거 한번 해봤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요. 밑에서 받쳐주는 거예요. 밑에서 뾰족하게 나온 이 발이 받쳐줄 때 이것이 진짜 회개입니다.

이미 회개케 하신다면 이미 구원이 시작이 된 겁니다. 지금 회개가 뭔지는 설명 아직 안했고 어쨌든 간에 회개란 것은 구원하는 그 바탕으로 이미 주님께서 주시는 겁니다. 이렇게 주시는데 문제는 왜 회개 없이는 구원이 안 되는가, 하는 거예요. 회개 없이 구원이 안 되는 이유는 인간보고 반성을 촉구해서 개과천선하라는 뜻이 아니고 회개 자체가 구속사속에 포함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건져낼 때는 “네가 잘했구나. 잘했기에 건진다.” 이런 구원은 아예 없다는 거예요. 전적으로 못했다, 라는 것을 들통내면서 동시에 이 사람을 건져 가거든요. 전적으로 못했다, 할 때 회개는 다른 것이 아니고 “정말 못한 것이 맞습니다.” 하는 반응과 더불어 주께서는 건지는 겁니다.

세례요한은 선지자 계열이거든요. 그래서 회개할 때 그냥 회개하라, 가 아니라 반드시 회개의 영이 와야 회개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세례요한이 세례줄 때 물속에 들어간 사람은 다 회개의 영을 받았습니까? 아니지요. 그것은 아닙니다. 세례요한의 물세례를 받았다고 구원되어 버리면 예수님이 필요치 않은 것이 돼요. 그러면 세례요한의 물세례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저렇게 일방적으로 사람을 물속에 풍덩 잠기게 하는 것처럼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성령에 풍덩 잠기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세례를 주신다, 그것을 앞당겨서 물이라는 물질을 통해서 미리 보여준 것이 물세례입니다.

성령시대가 오게 되어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게 되면 지금의 물세례라는 것이 필요한가, 라는 문제가 있어요. 그 점에 대해서는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주지 아니”(고전 1:14)했다고 했어요. 이유가 뭐냐, 예수님이 아무에게도 세례를 주신 적이 없어요. 그렇게 해놓고 괄호열고 예수님이 주신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줬다, 그렇게 한 거예요. 주님께서 물동이 여섯 개를 가지고 무엇을 무엇으로 바뀌게 했습니까? 물이 포도주로 바뀌었지요. 우리가 구원되려면 집에 물동이 준비해서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내야 되는 겁니까?

예수님께서 하시는 것을 똑같이 한다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어요. 똑같이 할 자격도 안 되고 할 필요도 없다는 그것이 바로 세례요한의 물세례인 겁니다. “너만 하나? 우리도 하면서 예수님 기다린다.” 라는 것을 주님께서 용납한 적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에스라 9장이나 느헤미야 9장에 나오는 그 회개는 “우리가 이런 일을 새삼스럽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께서 이렇게 다 했습니다.”라는 고백이 그들의 회개였습니다. 사람이 물속에 들어갈 때는 “가만있어 보세요. 물속이 추울 텐데 뭐라도 하나 입고 들어가겠습니다. 떠밀지 마소. 왜 그리 급한지 몰라. 하여간 떠밀지 마세요. 내가 알아서 들어가니까 뒤에서 물이나 퍼 주세요.” 이렇게 요령을 따지고 방법이나 생각하면서 물세례를 받을 수가 없다는 말이지요.

물세례 주었다, 거기는 ‘어떻게’가 성립이 안돼요.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왔다, ‘어떻게’가 성립이 안돼요. 나풀나풀 내렸는지 소복소복 내렸는지가 의미가 없어요. 그들이 회개했다, 어떻게? 꿇어앉아서? 두 손 모으고? 몇 분 동안? 이게 성립이 안 된다니까요. 오히려 회개라는 것은 내가 꿇어앉든지 손을 들든지 그런 것과 회개하고 상관이 있다, 없다?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를 고백하는 그것이 회개에요. 그러면 편하게 회개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방법 이야기 하지 말라고 해놓고 방법 이야기를 했네요.

마태복음 6장의 주기도문을 보세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 이것을 몇 번 외우는가? 그럴 필요 없습니다. 이것을 빨리 외울 것인가?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러면 내용을 음미하면서?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그것을 하게 하신 분이 하나님 자신인 것을 아는 순간 ‘어떻게’가 떨어져 나가지요. “나는 오늘도 주기도문을 이런 식을 했습니다.”하는 말이 두 번 다시 안 나오지요. ‘오늘도 주기도문을 외웠는데 혹시 너무 빨리 외웠나?’ 이런 식은 주기도문의 의미가 전혀 없습니다.

하게 하심으로서 나는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되새길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 쪽에서 마련한 거예요. 결국 이런 논리겠지요. 사는 것 전부가 회개요, 행하는 것 전부가 회개요, 까부는 것 전부가 뭐가 된다? 회개가 되는 거예요. 회개는 눈물하고 아무 상관이 없는 거예요. 인생사는 것이 전부 다 회개의 삶을 사는 거예요. 범사에 늘 회개하면서 사는 거예요. 회개라는 것은 “내 쪽에서 할 것은 전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주께서 일방적으로 다 알아서 처리해주시니 우리는 황공무지할 뿐입니다.” 라는 겁니다.

에스라 9장이나 느헤미야 9장에서 왜 그런 회개를 할 수 있었느냐, 그 때 문제가 장소문제였습니다. 장소 문제에 대해서 에스라 9장이나 느헤미야 9장에 보면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에스라 9장 7절에 보면 “우리의 열조 때로부터 오늘까지 우리 죄가 심하매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우리와 우리 왕들과 우리 제사장들을 열방 왕들의 손에 붙이사 칼에 죽으며 사로잡히며 노략을 당하며 얼굴을 부끄럽게 하심이 오늘날 같으니이다.”라고 하지요. 그리고 10장 1절에 “에스라가 하나님의 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심히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 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

온 백성들이 심하게 통곡했어요. 일종의 군중심리입니까? 어른이 우니까 너무 슬퍼서 덩달아 우는 겁니까? 엄마가 우니 애도 따라서 우는 식인가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땅을 자기가 사는 땅이라고 본 거예요. 자기가 사는 땅 같으면 자기들이 일한 몫으로 얻으면 되는데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뭔가 징벌과 심판을 내렸습니다. 그러면 눈치 챘어야 됩니다. 이 땅이 우리가 살기 위한 땅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땅임을 감 잡아야 하는데 그들은 다시 그 땅에 옴으로서 비로소 감을 잡는 거예요.

“우리가 있을 땅도 아니고 우리가 들어갈 수도 없는 땅인데 건방지게도 우리가 이 땅에 발을 딛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처지에 비해서 얼마나 넘치는 사랑인지 우리는 얼굴이 부끄러울 뿐입니다.” 그 장소가 그런 장소이기에 성전까지 지었는데 그 장소가 초라한 성전이에요. 여기 느헤미야에 나오는 것을 보면 너무 성전이 초라해서 한쪽은 좋다고 울고 한쪽은 슬퍼서 우는데 좋다고 우는 것과 슬퍼서 우는 것과 섞여서 대체 잘 분간이 안 된다고 되어 있어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족장들 중에 여러 노인은 첫 성전을 보았던 고로 이제 이 전 지대 놓임을 보고 대성 통곡하며 여러 사람은 기뻐하여 즐거이 부르니 백성의 크게 외치는 소리가 멀리 들리므로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들이 분변치 못하였느니라.”(스 3:12, 13)

우는 소리는 들리는데 좋아서 우는지 슬퍼서 우는지……. 마치 오늘날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에서 유대인들이 이상한 복장을 하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예루살렘이 회복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울 때 좋아서 우는 것인지 슬퍼서 우는 것인지 잘 알 수 없는 것처럼. 나이 든 사람들이 보면 그 성전이 어떻게 보입니까? 굉장히 초라한 거예요. 젊은 사람들은 모르지만 이미 먼저 큰 것을 본 사람들은 “아이고! 사람들아, 저건 옛날 성전의 반도 안 된다. 참 서글프다. 우리가 죄지어서 이런 수모를 당하는구나.” 하면서 울고 “아, 본격적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줘서 이 땅에 왔구나. 신난다.” 이래서 기뻐서 울고, 어쨌든 울음이 뒤섞였어요.

이런 것은 다시 한 번 뭘 생각하게 하느냐하면, 하나님이 계속해서 지시하고 관여하고 명령하고 개입하는 그 거룩한 땅에 우리가 들어섰다는 그 느낌이 한결같이 그들에게 회개의 동기가 되는 겁니다. 내가 들어설 수 없는 땅인데 황송하게도 들어서게 했다는 그것이 회개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가 사는 것 자체가 회개고 밥 먹는 것을 비롯해서 모든 것이 회개가 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믿으면서 살게 된 것에 대해서 범사에 모든 일에 대해서 감사하면 그것이 바로 회개하는 삶이 되는 겁니다. 어떤 일이라도 이것은 나에게 주제넘은 것이고 과분한 것이고 고마운 것이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아까 지게차 이야기를 했는데 세례요한의 경우에 회개의 영을 줬지만 에스라 느헤미야에서 지게차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뭐냐, 옛 땅, 옛날 그 때 그 땅으로 돌아오는 거예요. 거기에 비해서 이집트로 가서 자기 몸 하나 살기를 원했던 사람들은 뭘 잃어버렸습니까? 그 땅에 있지 않기에 하나님의 개입을 온 몸으로 느낄 수가 없는 겁니다. 좀 힘들더라도 잘 참으세요. 뭔가 정리할 것은 하고 넘어가야 됩니다. 구약 1306페이지를 봅시다. 성전 지으라고 하면서 이 예언을 하는 거예요.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또한 만국을 진동시킬 것이며 만국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영광으로 이 전에 충만케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학 2:6-9)라고 했다 이 말이지요. 이것을 그 땅에 돌아오지 않고 자기들끼리 잘 사려고 그냥 도망친 사람들, 회당이 있는 사람들에게 그런 체험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없지요. 본인이 선택해서 돌아오지 않았기에. ‘내 몸만 살면 그만이지 뭐. 메시아야 언젠가는 오겠지. 그때 온다고 믿으면 되겠지.’ 이런 경우에 그들은 세상 영광만 추구할 뿐이지 학개의 이 말씀을 그 현장에서 받을 수가 없는 겁니다.

학개라는 사람은 스가랴보다 3개월 앞장서서 활동한 사람이에요. 학개가 스가랴 보다 3개월 선배입니다. 학개가 먼저 활동한 뒤에 스가랴가 맞장구를 쳐서 “성전은 이것으로 되었다. 이 성전은 폼이고 장차 올 진짜 묵시적인 성전은 상상도 못하게 엄청나게 온다.”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이 땅에 와서, 옛날 버림받고 쫓겨났던 그 땅에 다시 와서 회개하고 우는 그 사람들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그 말이지요.

그러면 정리해봅시다. 세례요한이 회개의 영으로 해서 물세례를 받지요. 그러면 물만 받으면 됩니까, 안 됩니까? 그 때 그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봤던 그 심정으로 물세례를 받게 되면 이것은 회개하는 물세례거든요. 그러면 이 물세례 속에서 그들이 할 것은 “아이고, 차가워라. 물 퍼부어도 너무 부었다. 나는 헤엄도 못 치는데 너무 깊이 빠뜨리는 것이 아닌가.” 이런 식으로 물속으로 들어가면서 자기 생각을 하겠어요, 안하겠어요? 못하지요. 이것은 물의 세계이며 심판의 세계이고 죄의 세계에요. 내가 여기서 나와서 뭘 하겠다는 독자적인 미래계획이나 앞으로의 비전 같은 것은 용납이 안 됩니다.

학개 같은 경우에 그 땅에서 회개하면서 성전 짓는 사람은 “하나님이여, 이제 더 이상의 소원이 없습니다. 더 이상의 낙도 없습니다. 오직 이 성전처럼 영광된 성전이 하늘에서 내려오면 학개 선지자 말씀대로 우리는 족합니다.” 하는 반면에 이 땅에 돌아오지 못하고 다른 데서 그냥 살겠다고 이집트로 가고 또 다른 데로 가버린 사람들, “적당히 하다가 나중에 찾아가면 되지”라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자기 살 궁리가 남아 있는 거예요. 가끔 고향 그립다고 하겠지만 막상 사는 것은 자기 사는 것이 우선이잖아요. 그런데 여기에 돌아온 사람들은 제정신이 아니에요. 그들이 돌아와서 뭘 잊어버려요? 내가 앞으로 밥 어떻게 먹고 살고, 이런 것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뭘 기다립니까? 장차 이 성전을 가득 채울 하늘의 묵시적인 영광만, 그 말씀만 온 몸에 채울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 사람들이 구원받았다는 말이 아니고 이 회개하는 집단이 무엇의 원형이 되느냐하면, 세례요한의 물세례의 원형이 된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과도기적이지요. 혼자 열을 냈는데 이해가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세례 받았잖아요. 그 때 세례요한이 “예수님은 죄도 없으신 분이 왜 오셨습니까?” 할 때에 예수님 하신 말씀이 “내가 물세례 받아야 모든 의가 완성된다.”(마 3:15) 했지요. 죄 속에 입수가 될 때에 인간은 뭘 하든지 간에 죄인으로 정립이 되는 거예요. 물세례라 하는 것은 “너는 뭘 해도 죽을 죄인이 맞다”고 단정 짓는 것이 물세례입니다. 요새는 세례식을 할 때 물을 뿌리지요. 우리 교회 어느 집사님 세례 줄 때 물을 너무 뿌려서 나중에 “미안합니다. 제가 너무 많이 뿌렸지요.” 하고 사과했습니다. 사실 바가지로 부어도 괜찮은데.

이 물의 세계가 진짜 세상입니까, 물 바깥의 세계가 진짜 세상입니까? 진짜 세계는 하나님의 계시가 접속 될 때만 진짜 세계가 나타나요. 물의 세계에 잠긴 이 사람만이 제대로 현실을 아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 당시에 세례요한에게 시비 걸려고 온 사람들이 있었지요. “어이! 당신 어느 신학교 출신이야? 당신은 누구 허락 받고 선지자 노릇하는데?” “실례지만 누구십니까?” “우리? 바리새인, 우리는 국회의원, 알지, 로마에게서 정식으로 부여받은 세금징수권을 갖고 있다는 것.” 그들은 자체적인 경찰권도 갖고 있어서 세금을 잘 안낸다든지 이 조직에 반대하면 로마 총독의 이름으로 체포해서 죽일 수도 있어요.

예수님이 그래서 체포되었잖아요. 로마군한테 체포된 것이 아니고 그 당시 누구에게? 그 당시의 사설 용병들, 회당에서 부리는 경비요원들에게 잡힌 거예요. 그만한 권한을 로마가 따로 줬습니다. 로마의 통치는 전체를 다 간섭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로마는 변경에 무역도시를 만들어서 그들로부터 세금을 거두는 것으로 로마는 운영하고 대신 그들 주변의 무역국에 자치를 제공하는 겁니다. 그래서 로마는 법의 나라입니다. 아무리 이방인이라도 법적으로 정립되면 시민권을 주게 되어 있었습니다. 노예라도 늘 노예가 아니라 일정기간 군에 복무하고 나면 나중에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는 자격을 줬어요. 항상 법으로 공평하게 한다는 것이 로마의 통치이념입니다.

그 로마가 그들의 속령에 세세하게 개입을 안 합니다. 일단 그들의 전통을 충분히 존중해주되 다만 세금만큼은 거두어서 너도 살고 나도 살자는 식으로 넓은 제국을 안정되고 평화롭게 다스릴 수 있다고 본 겁니다. 그걸 로마의 평화시대(Pax Romana)라고 해서 5현제, 아주 지혜로운 황제가 다스릴 때 가장 평화로웠습니다. 그 황제들이 공통점이 있어요. 예수쟁이들 다 잡아 죽였다는 겁니다. 그렇게 어진 임금인데 예수 믿는 사람한테는 어질지않았어요.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시편 2편 1-3) 그 원칙대로 그대로 가는 거예요.

물의 시대속의 현실에 들어와 버리면 여기서는 전부 다 죽어 마땅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구원 받느냐 하는 문제지요. 구원 받습니까? 물과, 그 다음에 뭡니까? 성령으로 거듭나야 되지요. 그런데 물세례 안 받고 예수님에게 성령세례 받은 경우는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지요. 사도행전에 보면 이방인들이 물세례 없이도 성령세례 받았잖아요. 만약에 요단강에서 물세례 받아야 성령세례 받으려면 비좁아서 다 수용 못합니다. 번호표 나눠줘야 돼요. 또 요단강이 별로 깊지도 않답니다.

물세례의 의미는 “너희들이 알고 있는 이 현실은 현실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것은 너희들이 알고 있는 현실은 꿈꾸는 환상의 세계이고 진짜 현실은 하나님의 계시의 조명발을 받아야 진짜 현실이에요. 그래서 에스라 느헤미야에서의 문제는 땅의 문제에요. “우리가 죄지은 땅에 와 보니 정말 우리가 잘못된 것을 알겠습니다.” 세례요한은 “우리가 물속에 잠겨서 죽어 마땅한 것을 아니까 정말 우리는 죄인 맞습니다.”라는 공통점을 갖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을 시비 걸고 온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와서 누구 허락을 받고 이런 짓을 하느냐고 했어요.

여기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사고방식을 우리가 생각해야 돼요. 왜냐, 예수님께서 그들을 많이 거론했기 때문에 그들 생각이 뭐가 잘못되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생각을 따져봅시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의견이 조금 다른데 취지는 같습니다. 다윗 자손이 메시아로 온다는 것이 약속이기에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할 것은 혈통의 순수함을 유지해야 된다는 것은 양쪽의 공통된 의견입니다. 혈통의 순수함이란 것은 기본 요소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할례를 행해야 되고 안식일을 지켜야 되고 그 다음에 십일조나 성전 세를 내야 된다는 겁니다.

다윗 혈통의 순수성을 유지해야 된다는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다윗 자손이 왕으로 오시는데 당장 그 당시 형편상 왕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시리아의 셀류코스 왕에게 가서 대제사장의 임명을 허락해 달라고 합니다. 다만 왕 직에 처하도록 해달라고 하는 거예요. 일단 혈통은 다윗자손 혈통이 대제사장이 되었습니다. 물론 멜레네우스 같은 경우는 베냐민 출신이기 때문에 돈 주고 직을 사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반대가 심했어요. 어쨌든지 다윗자손의 혈통만큼은 유지하려고 했는데 이 사람들이 왕이라고 해도 사실은 외교상 그러하고 실제로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로 구성된 71명의 산헤드린이 모든 법률을 제정하게 됩니다.

법률로 치안과 조세권을 확보하는 겁니다. 외교는 제사장이 하든지 속해 있는 나라에서 알아서 하는 거예요. 제사장은 혈통적으로 왕처럼 있고 나머지는 이런 제도로 보충하면 되는 겁니다. 다윗의 혈통에 누가 오게 되어 있어요? 메시아가 오게 되어 있지요. 언제 옵니까? 이 사람들은 아직도 기다리고 있어요. 메시아가 언제 오는지는 모르지만 다윗의 혈통이 유지되는 한 온다, 그것이 율법의 엑기스라는 것 하나만큼은 대중적으로 호응을 얻고 있습니다. 사두개인은 성전보수 및 제사 드리는 일을 성전에서 하고 바리새인들은 마카비독립전쟁에 공로자들이기 때문에 귀족들은 사두개인을 옹호하고 민중들은 바리새인을 옹호해서 당신들이 우리 구원을 책임져 달라, 국가적 행정을 잘해서 나중에 메시아가 왔을 때를 대비해서 잘 해 달라, 고 하는 거예요.

이런 모델은 에스라 느헤미야에서 채택된 겁니다. 이때 바리새인은 율법을 담당했어요. 에스라 느헤미야가 성전이 없을 경우에 뭘 했습니까? 율법을 줬거든요. 사두개인들은 성전도 없으면서 잘난 체나 하다가 나중에 성전 지으면 본격적으로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게 됩니다. 그런데 왜 이들이 세례요한을 반대했을까요? 서로 협조하면 메시아가 오게 될 텐데요. 세례요한이 물세례를 주면서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회개하라, 그 다음에 뭐가 가까이 온다? 천국이 가까이 온다는 말을 했잖아요. 사실은 가까이 오는 정도가 아니고 “천국이 왔다.”는 거예요. 어떻게? ‘가까이’ 천국이 와 버린 거예요.

바리새인은 “어떻게 천국이 너에게만 오느냐?” 하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세례요한도 할 말이 없어요. 어째서 다 같이 오지 않고 세례요한 나에게만 먼저 왔지, 그것을 세례요한이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역사가 과거로부터 흘러오게 되면 메시아가 왔다는 조짐을 감안해서 이왕이면 여러 사람이 같이 구원받으면 되는데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을 일방적으로 자기 앞서 보내시고 물렀거라, 하는 식으로 자기전령을 삼으십니다. 광야에 기쁜 소식이 왔으니 이미 하늘나라가 왔다, 이렇게 하라고 누가 시켰습니까? 세례요한 본인이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그것을 시켰거든요.

세례요한은 하나님의 성령을 받아서 요단강에 있는데 거기서 예수님을 처음 만나게 됩니다. 만나는데 그때 하늘로부터 성령이 비둘기처럼 와버렸지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아무리 열광으로 제사를 드려도 이런 일은 없어요. 성령이 하늘로부터 내려온다는 이런 일은 세례요한도 생전 처음이라는 말이지요. 그리고 들리는 말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 했지요. 세례요한이 이것을 들었는지 아닌지, 어쨌든 이것은 둘이 단독콘서트를 벌이는 거란 말입니다. 만약에 세례요한이 옳다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쪽은 다 죽은 거예요.

만약 세례요한과 예수님이 벌이는 이 이벤트가 그냥 쇼에 불과하다면 이처럼 허술하고 난감한 일은 또 없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으러 오는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그 문제에 있어서 세례요한은 보통 고민을 한 것이 아닙니다. 나중에 이 고민이 옥에 갇혔을 때도 계속 되는 거예요. “혹시 예수 당신과 내가 지금 무슨 최면이 걸려서 이 짓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물었습니다. 뭔가 일이 예상대로 풀리는 게 아닌 거예요. ‘자기는 옥에 갇히고 바통 넘기고 예수님 혼자 뭘 하는 스토리였으면 처음부터 혼자 한다고 해야지 자신을 왜 보냈을까?’

여기에 대해서 세례요한은 백성들의 반응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찾기 시작합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세례요한의 거짓말 같은 이야기에 동의를 하고 밀려오기 시작하니 이것을 사소하게 여겼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소문 듣고 조사팀을 보낸 거예요. 검찰 중수부에서 온 겁니다. 대체 이게 무슨 난리인가, 한때 없어질 해프닝인가, 나라가 뒤집힐 만한 난리인가, 그것을 조사하기 위해서 왔어요. 그럴 때 세례요한이 하는 말이 “이 독사의 새끼들아!”(눅 3:7) 처음 본 사람들에게 말이 너무 험합니다. 자기가 언제 봤다고. 아무리 성령 받은 세례요한이지만 말을 너무 함부로 놔버리지요. “이 독사의 새끼들아! 임박한 진노를 피하려고 날 찾아왔나? 그래 맞아. 진작 날 찾아왔어야지.” 찾아온 사람들은 지금 회개하러 온 것이 아니고 조사하러 왔는데.

그 모든 모습을 마치 회개하는 사람의 일종인 것처럼 한 거예요. “그래. 너희 같은 독사의 자식들도 구원받을 수 있어. 왜,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다. 타작마당이 있는데 알곡은 곳간에 들이고 가라지는 불에 태운다.”라고 다른 사람한테는 가만있다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오니까 더 예민한 반응을 보입니다. 누가복음이나 마가복음 같은 경우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내려오고 세례요한과 예수님이 한 세트 같은 느낌이 들게 하면서 “복음이 나타났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바로 땅의 한계를 넘어서 회개가 땅에서가 아닌 위에서 본격적으로 주어진다는 겁니다. 그것은 세례요한의 물세례는 폼이었고 그 물세례라는 그림자의 실체인 예수님이 받은 성령의 세례가 무엇을 배경으로? 물세례를 배경으로 성령의 세례가 비둘기처럼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이야기 끝났어요. 지금까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여기에 대해서 어떤 낌새를 못 챘다는 것은 그들이 노선을 잘못 잡은 거예요. 엉뚱한 노선을 시도한 겁니다. 그러면 세례요한의 노선은 뭐냐, 세례요한의 노선은 예수님이 말라기에서 가져와요. 말라기 마지막 4장 5절에 보면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누구를 보낸다고 합니까?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그렇다면 여기에 엘리야가 와야 되는데 엘리야가 오지 않았어요. 엘리야가 온 것이 아니라 누가 왔습니까? 세례요한이 왔기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그들의 2차적 안목으로서는 도저히 세례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비록 세례요한이 엘리야 흉내를 내면서 광야에서 석청 먹고 가죽옷을 입고 활동했지만 그것을 엘리야로 볼 수 없었던 겁니다. 그것으로 이야기가 끝난 줄 알았는데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휘하의 민중들이 세례요한 앞에 회개하기 위해서 물로 나왔다고 한다면 이것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도 감당 못할 어떤 새 시대가 왔다는 것을 눈치 채고 조사하러 온 거예요.

“당신이 진짜 선지자가 맞느냐?”라고 하는 겁니다. 그럴 때 세례요한이 말라기 마지막을 그대로 반복하듯이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때까지는 세례요한이 예수님과 밀착된 관계가 아니에요. 그저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했는데 자기 물세례 가운데서 2차원적인 역사가 아니라 진짜 하늘에서 성령이 와 버렸으면 이미 본인이 하는 물세례조차 이젠 더 이상 의미가 없고 본인도 이제 보따리를 싸서 전을 거둬야 돼요. 그래서 진짜 엘리야는 세례요한도 아닙니다. 진짜 엘리야는 그럼 누구냐?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엘리야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보조수단으로 세례요한을 엘리야로 하고 “너는 여기서 네 할 일 끝!” 하고 없애버리는 거예요.

세례요한은 마지막 가면서 “당신이 오실 메시아 맞습니까?”(마 11:3) 라고 했지요. 예수님은 “세례요한보다 더 큰이가 없지만 천국에서는 어린아이라도 저보다 크다.”(마 11:11)라고 해서 모든 시작이 세례요한부터가 아니고 예수님이 직접 시작하는 거예요. 세례요한부터 다가서지 말고 예수님부터 세례요한을 거쳐서 다시 예수님께 돌아오는, 그래서 예수님 자신이 여호와가 되는 거예요. 이러한 면에 대해서 에스라 느헤미야는 어떤 과도기적인 의미를 줄 수 있는가? 땅의 의미에서 율법이 그들로 하여금 이 땅에 돌아오게 했다. 그리고 돌아오면서 그들은 마치 대표해서 지난 세월의 모든 죄에 대해서 유일하게 그들은 회개를 합니다. 그렇게 해놓고 일종의 가족사진처럼 달랑 한 장으로 끝나버려요. 굳어져 버렸습니다.

우리가 그냥 회개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회개를 했으면 지난 세월의 모든 것에 대해서 “우리는 잘못한 것밖에 없습니다.” 하고 달랑 사진 한 장 남기고 사라져 버려요. 하지만 이 사람들은 뭘 기다리는가? 이 영광보다 장차 더 큰 영광이 어디에 온다? 우리가 만든 장난감 같은 그 조그만 성전을 모형으로 해서 이 보다 더 큰 성전이 오게 되면 그때 우리에게 이렇게 회개케 하시는 그 취지가 맘껏 드러날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했다는 말이지요. 이렇게 끝나버립니다. 느헤미야가 끝나는 동시에 말라기도 같이 끝나버려요.

끝나고 바사나라도 같이 끝나버립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나라가 무슨 나라라고 했습니까? 헬라지요? 헬라는 무슨 역할을 해야 합니까? 에스라 느헤미야의 남은 구조를 인수인계 받은 사람들로 하여금 절대로 선지자 노선에 끼어들지 못하도록 그들 나름대로의 2차적인 안목, 나름대로의 열심가지고 메시아까지 이어보려고 한 역사를 다 밀어내지요. 그러면 그들은 뭘 느낍니까? 자기 딴에 열심히 한다는데 가면 갈수록 돈으로 겨우 명맥을 이어가고 그저 아부하듯이 권력에 복종해야 자기 나름대로 기껏 율법 챙기는 것이 되겠지요.

그러한 상황은 진정으로 장차 이 땅에 올 영광과는 전혀 접속이 되지 못한 다른 노선입니다. 그 다른 노선은 예수님 당시의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의 노선과 전혀 다른 지평입니다, 라고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직접 와버리지요. 백성들이 감을 잡았는지 아닌지 모르겠어요. 백성들은 어쨌든지 세례요한과 예수님에 대해서 새로움을 느낀 겁니다. 기존에 교육받고 세뇌 받았던 그 노선이 아니고 그것을 깡그리 무시하고 이것은 정말 예상 밖의 새로운 노선이 나온 거예요.

그 멘트 자체도 상당히 긴급합니다. “하늘나라가 이미 왔다.” 왔으면 기다릴 필요가 있다, 없다? 더 이상 하늘나라를 기다릴 이유는 없다. 이제는 뭐하면 돼요? 오신 하늘나라 주인공을 찾아서 그 에스라 느헤미야처럼 또는 말라기처럼 그 앞에 엎드려 회개하면 되는 거예요. 그 회개하는 마당을 마련한 것이 세례요한입니다. 일단 물세례 받고 난 뒤에 예수님 영접할 수 있는 준비과정을 미리 세례요한 통해서 준 겁니다. 그 다음부터는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새롭게 주목하게 되지요.

그러면 자력으로 믿는 사람이 있었습니까? 아무도 없지요. 그런데 지게차의 발판이 어디서 나온다고요? 지게차에서 나오지요. 그때부터 예수님 만났던 사람은 세리와 창기와 귀신들린 자, 벙어리와 눈먼 자와 절뚝발이 그리고 돈만 밝히는 삭개오 그리고 성전에서 나는 죄인이라고 외쳤던 세리 그리고 울면서 나왔던 막달라 마리아, 예수님을 아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는 제자들이 아니고 예수님이 인위적으로 불렀던 38년 된 병자 같은 사람들을 채택해서 그들과 계속 접촉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것은 제자들로 하여금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3)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마 16:14)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5) 할 때 제자들이 어디를 봐야 돼요? 진짜 주님께서 내미는 회개의 자리는 세리와 창기와 불결한, 진짜 더러운 인간들의 자리거든요. 제자들은 고상하고 거룩하고 착하기 때문에 그 자리에 서려고 합니까, 안 서려고 합니까? “에이, 내가 그래도 제자인데…….” 그러니까 십자가 앞에서 전부 다 떠나야 돼요.

“백부장? 에이, 그건 이방인이잖아. 우리는 유대인이지.” 그런데 이방인은 뭐라 합니까?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눅 7:8) “이만한 믿음 못 봤다.”(눅 7:9) 예수님께서 지게처럼 내미는 그것은 기존의 혈통의 모든 노력은 다 잘못되었다는 거예요. 육적인 노선에서 메시아를 기다렸던 모든 노력은 다 잘못된 것이다. 잘못되었다면 고치면 될 것이 아닌가? 고칠 여력도 없어요. 그러면 뭐냐, 지게차 밑에서 뭐가 나온다? 콜라박스를 바짝 들어 올리는 발판이 나올 때 우리는 그 자리에서 비로소 우리 자신은 세상 어떤 것보다 더 귀한 것 속에 들려진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으로서 많이 용서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눅 7:47)는 천국의 원리를 그대로 수용하는 겁니다.

이른 아침에 온 사람, 9시에 온 사람, 12시에 온 사람, 오후 3시에 온 사람, 이렇게 앞에 해 놓고 그 뒤에 아무것도 한 일도 없는 사람에게 품삯 줘서 앞에 사람 다 삐지고 토라지게 만들면서 바로 이것이 하늘나라(마 20:1)라고 하는 이것은 바로 “모든 발판은 너희들이 노력한다고 오는 것이 아니고 뭐든지 예수님 쪽에서 제공되어야 성령세례의 효과”라는 겁니다. 내일 오전에 마지막 시간 합시다.

첨부파일 : 2013겨울수련회9강.hwp (37.5K), Down: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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