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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녹취]2013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8강자유게시판느헤미야

[녹취]2013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8강

이름 : 오용익(IP:183.105.212.7)

제 8강

성전이 우리 몸이라면 성전은 하나입니까, 두 개입니까, 세 개입니까? 어떤 마을에 성령 받은 사람 셋이 파견되었다 합시다. a라는 사람, b라는 사람, c라는 사람, 세 사람입니다. 우리 몸이 성전이니 a, b, c 세 사람이 다 성전이라면 성전이 세 개가 되지요. 이게 과연 가능하냐는 말입니다. 성전 지었다, 그 성전이 예수님 몸이었다, 이제 십자가 영이 옴으로써 우리 몸이 성전 되었다, 그래서 에스라 느헤미야의 성전의 기능, 그 취지는 오늘날 우리 몸이 성전 됨으로써 완료가 된다, 그런데 문제는 그 성전이 ……, (동영상카메라 켜는 것을 잊는 통에) 다시 합니다.

에스라 느헤미야에 있어서 그 성전이 완료되면 건물이 아니고 인격이라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 안에서 성전이 되고 우리는 예수님의 지체가 되는데 그렇다면 어느 마을에 성령 받은 세 사람이 활동을 한다면 이 마을에서만도 성령이 벌써 몇 개입니까? 성전이 세 개가 되지요.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더 성전다울까? 어느 쪽으로 가야 과연 성전의 영광을 더 볼 수 있느냐.’ 이렇게 측정이 되어버리면, 약간 시시한 성전과 생글생글한 성전, 시니컬한 성전, 히죽거리는 성전, 별 볼일 없는 성전, 이런 식으로 된다면 아주 희한한 현상이 일어나잖아요.

그렇다면 그것은 우리 몸이 성전이라고 우겼지만 그 해석은 잘못된 겁니다. 그래서 이 성전에 대해서 우리가 좀 안다고 했지만 성전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지요. 그러면 성전이란 것이 뭐냐? 거룩과 속된 것이 만나는 유일한 장소가 성전입니다. 성전이 아니면 거룩과 속됨이 만날 수가 없어요. 거룩과 속됨의 만남의 유일한 곳이 성전인데 “너희는 거룩한 성전이다.”라고 할 때에 성전은 속됨이 만나야 성전인데 속됨이 사라져 버리면 이것이 과연 성전이냐 하는 거예요. 아예 하나님은 내려오지 말고 하늘나라 그 자체로 거룩이니까 그 거룩이 성전이라면 지상의 인간들은 완전히 제켜놔야 성전이 성전답게 되거든요.

왜, 더러운 것이 섞이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일부러 언약궤를 주셔서 이스라엘 사람과 동행하면서 성전을 만들어냈습니다. 성전을 만들어 냈으면 거룩과 속됨이 만나줘야 되는데 성전이 거룩하다 하는 의미에 있어서의 이 속됨의 공간은 없어질 것인가, 그대로 살아 있느냐, 그런 문제가 있어요. 만약에 속됨이 없어진다면 한 번 성령 받아서 성전 된 사람은 일체 완벽하게 죄를 짓지 않아야 계속 성전으로 유지가 되는 겁니다. 만약에 조금이라도 죄 지은 것이 있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거룩하다, 에 흠집이 나게 되니 이것은 성전으로서의 제 구실을 못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성전 되기 이 전보다 조심을 더욱더 많이 해야 되지요. 이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에요.

제가 전에 강의도 했지만 자본주의사회에서 내가 산다는 것은 남이 무너졌다는 것을 의미하거든요. 나는 남에게 해코지 안하려고 하는데 본의 아니게 은행에 돈을 갚는 순간 다른 사람이 파산해 버렸다는 말이지요. 그럴 경우에 그런 나쁜 짓을 했으니 우리는 그 순간만큼은 졸지에 거룩한 성전이 안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손 놔버리면 에스라, 느헤미야 해석도 안 될뿐더러 성경전체의 해석에 있어서 크게 미진한 것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문제를 먼저 하고 에스라 느헤미야를 해석해 봐야겠습니다.

요한복음 11장을 보겠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제자들이 가로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저희는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줄 생각하는지라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신대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요 11:11-16)

단어사용에 있어서 서로 시각이 안 맞지요? 우리 다 같이 죽으러 가자, “새해 저주 많이 받으세요.” “목사님도 저주 많이 받으세요.” 뭔가 단어 사용이 같은 사용인지 상당히 궁금해집니다. 이점을 해석해줘야 입체적인 해석을 가지고 에스라 느헤미야를 ‘신약의 우리 몸이 성전’이라는 것과 연관을 지을 수 있습니다. 이 해석이 정립되지 아니하면 에스라 느헤미야는 그냥 과거의 일로 끝나버려요. 그러면 에스라 느헤미야는 성경으로서의 가치가 없지요. 이런 점을 우선 이해하기 위해서 회화에 있어서 원근법을 말씀드립니다.

원근법이란 그림 속에 소실점을 둬서 보는 이로 하여금 입체감을 느끼게 하는 도구가 원근법입니다. 이 원근법이 중세를 지나면서 근세에 처음 나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반발 했어요. 왜 사기를 치느냐, 라고 나온 거예요. 캔버스는 2차원이지요. 그렇다면 2차원을 그대로 나타내 줘야 좋은 그림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2차원 바탕에 3차원을 담아버리면 이것은 화가가 관객들을 속이고자 하는 나쁜 의도가 개입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나 화가는 말하기를 “이 그림은 2차원을 통해서 3차원을 사실적으로 나타낸 것뿐이다.”라고 이야기하지요. 현대에 와서는 그림을 그릴 때 3차원으로 그리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고 2차원 그대로 그리면 아주 못 그리는 그림이거나 취학 전 아동의 그림밖에 안되잖아요.

그러면 원근법이 나오기 전의 그림은 어떤 것인가? 그냥 2차원이죠. 신화적인 인물이나 성경속의 인물을 그냥 수평적으로 세워 그리는 겁니다. 2차원이기에 2차원으로 해줘야 이 그림 자체는 신에게 영광 되는 그림이 되는 거예요. 사람을 속인다는 것은 곧 신을 속인다는 것인데 화가가 되었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고려해서 2차원에 맞게 2차원으로 그려야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 어느 쪽이 맞아요? ‘어, 저 그림은 깊이를 가졌네.’ 하게 되면 바탕은 아무리 봐도 평면임에도 불구하고 3차원 그림을 그렸으니 사람을 혼란케 하고 정직하지 못한 어떤 작품이 이 세상에 출품된 것이 돼요.

데니스 가보르(Dennis Gabor, 1900, 6, 5-1979, 2, 8)라는 영국의 물리학자가 홀로그램이라는 것을 발명해서 노벨물리학상을 받았어요. 홀로그램이란 어떤 물체에 대해서 기준파(스크린에 쏘는 파)와 물체파(물체에 쏘는 파)를 2중으로 쏘는데 이때 이 두 개의 파 사이에서 간섭(둘 이상의 파동이 만나서 일어나는 현상)이 일어나고 이때 일어난 간섭무늬가 발생하는데 이 간섭무늬를 저장한 필름을 홀로그램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입체로 보이게 되는데 입체로 보인다는 것은 뭐냐, 두 개의 시선을 가지는 거예요. 두 개의 시선, 두 개의 시각을 가지는 겁니다. 두 개의 시각을 그대로 살려버리면 거리감과 깊이감이 생생하게 살아 있지요.

이게 바로 입체영화(3D) 혹은 입체그림이잖아요. 요한복음 해석에 있어서 예수님은 두 개의 시선을 가질 것을 제자에게 요구합니다. “내가 죽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익히 죽음을 알고 있는 인간들이 생각하는 죽음의 의미와 내가 살아 있는 쪽에서의 죽음이라는 서로 다른 시각을 이제는 너희들도 가질 필요가 있다.”고 한 거예요. 그것을 가지고 오늘 본문에서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라.”라고 한 거예요.

사람의 시각부터 먼저 합시다. 사람의 시각은 ‘죽음이라는 것은 잠자는 정도가 아니고 완전히 죽어버린 그것이다.’ 인간의 시각에서 잠자는 것과 죽는 것이 전혀 같지 않습니다. 분명한 차이가 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는 단어를 사용할 때 분명히 같지 않다, 라는 것에다 같다는 식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지금 나사로는 잠자고 있다, 그 잠자고 있다는 것의 반대말이 뭐냐, “깨우러 가자” 그래서 제자들은 그것을 듣기를 깨우러 가자는 그 깨움이 가능하면 분명히 죽은 것은 아니죠. 왜, 죽으면 못 깨우니까. 그러니까 깨우러 가자고 하신 것은 ‘지금 나사로가 깊이 잠들었구나.’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왜, 잠자는 것과 죽는 것이 다른 시각이기에. 일단 이렇게 해 놓고 예수님께서 두 번째로 “나사로가 죽었다.”라고 했어요. 그러면 이쪽의 잠자는 것의 언질을 주시고 또 죽음에도 언질을 주셔서 “두 개의 시각이 같지 않다는 생각을 네가 접어라. 예수님에게는 그것이 같다.”라고 보는 거예요. 예수님에게는 잠자는 것과 죽는 것이 같은 거예요. 예수 믿고 죽는 것은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 죽는 것은 죽음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것입니다. 이것을 “너희로 믿게 하려 하심이라.” 아직도 안 믿어요. 우리는 죽는 것이 무서워요. 그렇지 않다면 왜 그렇게도 살려고 애를 씁니까?

주께서는 우리의 일방적인 하나밖에 없는 시각에 홀로그램을 줘서 두 개의 입체적 시각을 제공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죽는 것과 사는 것이 다르다는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기 전에 우리 이름만 있을 경우에나 나오는 것이기에 이것은 육이 되겠고 이 육의 시각은 한계가 있고 문제가 있을 경우에만 그것이 성령, 영이 되겠지요. 그러니까 성령 받은 사람은 육을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과 같이 ‘아, 이런 것은 육이었다. 육의 시각이었고 저런 것은 영의 시각이었다.’ 해서 두 개의 시각을 다 가지시기 바랍니다.

두 개를 다 가져야 돼요. 우리가 의인되고 난 뒤에 죄를 버리지 말고 의인 되고 난 뒤에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와 짝이 되는 죄가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죄란 뭐냐, 그 죄란 행함을 자랑하는 자기 의가 죄가 되는 거예요. 그것이 예수님 입장인데 만약에 주님의 영적인 입장을 생각 못하면 죄가 뭡니까? 내가 착한 일 하는 그 나머지 모든 것은 죄가 되겠지요. 선악과를 따먹었으니 내가 알고 있는 선과 대비되는 것이 죄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 시각을 가지는 자체가 육에 갇혀 있는 셈이 되고 그것은 예수님의 말에 대해서 다 곡해할 수밖에 없어요.

윤리 도덕은 전부 다 육의 시각이에요. 행함으로 구원받지를 못하거든요. 그래서 이런 입체적인 시각을 가지고 그 다음에 에스라 느헤미야의 성전을 소급해서 다시 해석을 해야 됩니다. 이 해석을 하려고 지금 7시간 걸렸어요. 에스라 느헤미야 정리한 교재가 나와 있습니다. 이것 읽어버리면 5분이나 걸릴까요? 십분 쯤 되겠네요. 그러나 이것이 무슨 해석입니까? 이것은 단선이지요. 그러면 역사책인데 에스라 느헤미야 잊어버려도 그만이지요. 적어도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복선적인, 입체적인, 예수님의 영적인 사람이라면 영적사람 다운 육적해석과 영적해석의 차이나는 그것을 둘 다를 봐야 되지요.

그러면 아까 그 문제로 다시 들어가 봅시다. 성전은 거룩하다, 라는 것이 무슨 이야기인가? 성전의 거룩한 것을 우리가 할당받게 된다 합시다. 성전은 분명히 하나인데 어느 마을에 성령 받은 사람이 세 사람 되어버리면 이것은 성전이 세 개가 되고 이 셋은 사람 입장에서 보면 ‘저 성전은 성질이 너무 급해.’ 라는 것, ‘저 성전은 같은 성전이라도 인물이 너무 참해.’ 라든지 ‘저 성전은 성형이 잘못되어서 코가 망가졌는걸.’ 이렇게 될 수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성전이 거룩하다는 말에서 성전이 하나인가, 둘인가, 셋인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느헤미야 4장을 봅시다. 그래서 항상 설교할 때는 두 개의 시선을 다 이야기해야 됩니다. 육으로 보는 것과 그 육의 보는 것으로 인하여 우리가 주님을 얼마나 곡해하고 있으며 그 곡해의 결과로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으며 십자가의 죽음 이후의 해석이 바로 영의 해석이고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다는 것을 항상 같이 언급을 해줘야 됩니다. 느헤미야 4장 16절에 보면 “ 그 때로부터 내 종자의 절반은 역사하고 절반은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와 활을 가졌고 민장은 유다 온 족속의 뒤에 있었으며 성을 건축하는 자와 담부하는 자는 다 각각 한 손으로 일을 하며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았는데 건축하는 자는 각각 칼을 차고 건축하며 나팔 부는 자는 내 곁에 섰었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 위에 7절과 8절에 보면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이 중수되어 그 퇴락한 곳이 수보되어 간다 함을 듣고 심히 분하여 다 함께 꾀하기를 예루살렘으로 가서 쳐서 요란하게 하자 하기로.”라고 되어 있습니다. 건축을 하는데 있어서 훼방하는 무리가 있었던 거예요. 방해를 할 때 건축 일을 하는 사람들이 숫자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한 사람같이 움직였습니다. 그렇다면 셋이든 넷이든 오직 한 사람이라고 간주하는 겁니다. 세 명이냐 네 명이냐는 의미가 없고 하나같이 움직일 때 비로소 성전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성전이 몇 개냐가 아니라 성전은 무조건 하나입니다. 천명이든 만 명이든 성전은 하나입니다. 그 하나를 하나로, 천명이든 만 명이든 하나로 볼 수 있는 안목, 그게 입체적 안목이에요. 같은 말씀에 회개하기에 그래요. 재미있지요? 한 열 명이 있는데 “너 반성할 것 이야기해줄게. 너는 학교에 빨리 오란 말이다.” 그 다음에 “너는 왜 도시락을 빨리 까먹었어?” 이렇게 되어버리면 각자 자기가 잘못한 것에 대해서만 반성하고 회개하면 그만이에요. ‘나는 일찍 오기는 했는데 도시락을 까먹었네.’ ‘나는 도시락은 까먹었지만 일찍 오기는 했다.’ 이렇게 되면 각자 다르게 되는데 느헤미야 9장이나 에스라 9장에 보면 일괄적인 선포와 일괄적인 회개를 해버려요. 이번 수련회 주제가 “잘못했습니다.”입니다.

잘못했는데 우리의 상식은 열 사람이 있다면 그 열사람의 살아온 처지와 환경이 다 다르기에 잘못을 해도 따로 골방에 210호, 211호, 이런 식으로 넣어서 “컨닝하지 마. 난 내 죄만 회개할 거야.” 해야 할 것인데 한 곳에 모아놓고 같은 소리 해버리니까 전부 다 같이 울고불고, 나 혼자 길을 간다가 아니라 전부 다 같이 울고불고 난리가 났어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살아온 환경과 역사, 가정환경과 아이큐와 DNA가 다 다른데 어떻게 동일한 말에 동일한 회개가 되느냐는 말입니다. 참 기이한 일입니다. 대체 여럿을 하나로 묶는 해법이 무엇이냐는 겁니다.

세상 죄를 지는 어린양, 또는 언약궤, 언약궤에 속죄의 피가 담기니까 이 피 앞에 천명이 되든지 만 명이 되든지 동일하게 죄인으로 규정이 되는 겁니다. 이론상 그래요. 틀린 말이 아니지요? 그런데 여기에 회개를 했다면 피 앞에서 모든 인간이 죄인이다, 이것이 납득이 되지요. 우리 성령 받은 사람에게는 다 이해가 된다는 말이지요. 인간이 뭘 해도 완벽하지 못하기에 우리는 죄인이 맞다, 할 때 여기서 개인으로 할당이 되면서 어떻게 이것이 동일한 죄인으로 합류가 되느냐, 하는 문제가 여전히 남게 돼요.

우리가 성경 볼 때 따질 것은 세세히 따져야 되거든요. 이렇게 예를 들면 쉽네요. 제자들이 말하기를 “예수님, 하늘나라에서 누가 제일 높은 자리에 앉겠습니까?”라고 질문할 때는 너와 나가 하나가 되지 못하고 각자 분리되어 있지요. 누가 높은 자리에 앉겠습니까, 하는 이야기를 끄집어낼 때 다른 제자들이 분개했지요. “너만 좋은 자리 차지하려고? 이 배신자!” 이렇게 나온다는 말이지요. 그러데 그렇게 서로 밀고 당기는 권력싸움을 하다가 예수님이 십자가 져버리니 그 현장에 남아 있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었나요, 없었나요? 아무도 없었지요.

제가 전에 강의하기를 십자가에는 어떤 능력이 나오는데 어떤 능력인가? 밀어내는 능력이죠. 결국 이 말은 밀어내는 능력을 받은 사람은 “우리는 밀려도 합당합니다.”라고 해서 자기의 행함을 근거해서 회개하는 것이 아니고 그 하나님의 율법이라는 거룩성, 그 가치를 미처 알아 모시지 못했다는 것, 자기 일만 생각했지 자기 외곽에 율법이 버티고 있다는 것을 미리 감안하지 못한 점에 대해서 동일하게 회개하는 거예요. 나는 내가 우선이고 날 살리기 위해서 율법이 있다고 여겼는데 이제 에스라 느헤미야 시대에 하나님을 믿지도 않는 그 바사나라를 통해서 다시 한곳에 모이고 보니 너 나 할 것이 없이 우리는 그동안 율법 보다 누구를 우선 했다, 말씀보다 나를 우선했다는 점에서는 각자의 행동과 상관없이 회개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율법이 우리를 멸망시켰고 또 놀라운 것은 율법이 분명히 심판받아야 될 우리를 다시 규합하게 한 거예요.

제가 군에서 50사단에서 훈련받았어요. 군대생활 이야기하면 시간 잘 가지요. 거기서 훈련받고 34개월 근무를 하는데 그 중에서 교련 받았다고 2개월 깎아 줘서 32개월 하고 나왔지요. 저는 군에 가서 인생 끝난 줄 알았어요. 너무 오래 군 생활 하면 세상 다 바뀔 것이고 그러면 인생이 그만 끝난다고 여겼지요. 제대할 때 처음에 모였던 그 장소인 50사단에 다 예비군복 입고 예비군 모자 쓰고 역전의 용사들이 다시 모였어요. 32개월 만에 모인 거예요. 처음 자대배치 받으면서 헤어질 때는 ‘누가 백이 좋아서 후방으로 빠지나 보자.’ 이런 경쟁심이 있었는데 막상 제대하는 순간이 오니까 어디서 무엇을 하면서 어떻게 살았는지 희미한 등불 밑에서, 그런 것이 아무 의미도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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