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취]2013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7강
[녹취]2013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7강
이름 : 오용익(IP:183.105.212.7)
제 7강
나라가 없으면 역사가 없습니다. 역사가 없는데 이 사람들은 억지로 역사를 이끌어 왔어요. 문제가 있습니다. 드디어 노선의 갈림길의 각도가 벌어집니다. 스가랴에서 이야기한 것은 역사 없는 메시아와의 만남인데 그 뒤에 마카비의 등장 혹은 인수인계 받은 사람들은 역사 있는 유다나라를 갖추어서 메시아를 맞이할 준비를 했습니다. 그들의 핑계는 이것입니다. “율법대로 살면 언젠가는 메시아가 우리에게 찾아올 것이다.” 찾아오기는 해요. 찾아오기는 하는데 그들이 오히려 메시아를 죽일 수밖에 없는 양상으로 찾아오게 되지요.
스가랴 4장 6절에 보면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스룹바벨이 해야 될 일이 뭐냐, 9절에 보면 “스룹바벨의 손이 이 전의 지대를 놓았은즉.” 성전을 지으라고 한 것은 그것으로 기념촬영이 끝났어요. 기념촬영으로 역사를 마감시켰습니다. 이제부터 거기서 나오는 것은 역사가 나오는 것이 아니고 묵시로 나오는 거예요. 사람의 능, 사람의 힘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으로 드디어 모든 역사를 뛰어넘는 묵시가 스룹바벨의 성전으로부터 개시가 되는 겁니다.
역사 없이 시작된다는 이 말자체가 굉장히 난해합니다. 뭔가 시작이 있다는 것은 끝이 있는 것이고 그 시작과 끝 사이를 역사라고 언급할 수 있는데 “역사 없다. 하지만 시작된다.” 할 때에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마무리되느냐, 하는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어떤 방법을 쓰느냐하면, 스룹바벨성전에서 역사를 다 벗겨내는 거예요. 벗겨내게 되면 그동안 투입된 역사가 스룹바벨성전을 거치면서 철거되고 제거되는 역사로 바뀌게 되는 겁니다. 여기서 나왔던 것은 배척하는 역사지요.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십자가는 미는 힘이 있다.” 이렇게 보면 됩니다.
십자가에서는 미는 힘이 나와요. 역사적인 안목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들어가려고 하고 그런 식으로 하늘나라를 세우려고 하는 모든 것을 십자가가 밀어내는 거예요. 십자가는 뭐냐 하면, 옛날 성전에 있었던 언약궤의 완성이 십자가거든요. 모세언약의 완성이 새 언약이잖아요. 언약궤의 완성이 십자가고 그 언약궤가 들어 있는 것이 성전이라면 스룹바벨 성전은 역사를 떼어 내면서 장차 스룹바벨이 완료될 때는 모든 역사가 심판받아서 떨어져 나가야 된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면 스룹바벨 성전을 역사적으로 계속 이어보겠다 하는 그 모든 짓들은 오히려 밀어내는 힘에 의하면 다 적이 되고 악한 것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스룹바벨 안에 이미 역사를 이기는, 역사를 밀어내야 하니까, 역사를 이기는 힘이 이미 그 안에 들어 있는 거예요. 이것을 가지고 순(筍), 씨앗, 어떤 씨앗이 스룹바벨 안에 잠복되어 있다가, 이것이 역사를 밀어내는 블랙홀이니까, 뭔가 역사가 부정당하고 역사가 떠밀린다는 의미가 나오면 나올수록 병행해서 순도 그 모습을 점차 드러낼 거예요.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헤롯이라는 이 사람은 돈 주고 사서 왕이 되고 난 뒤에 말도 못할 짓들을 했어요. 아내만 해도 열 명입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이 자기 전통을 고수하니까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로 이루어진 산헤드린을 정치적으로 잘 다스리지 못해서 로마로부터 “너 똑바로 못해? 다른 사람으로 왕 바꾼다.” 이렇게 되면 곤란하거든요.
그래서 헤롯은 로마를 위해서 세금을 잘 거두어야 되고 산헤드린의 귀족들이 상공업을 차지하고 있으니까 그들을 잘 구슬려서 세금징수를 잘 해서 로마에게 잘 상납하는 한 현재 자신이 다스리는 지역인 분봉왕의 지위, 속령의 왕이라는 지위는 대를 이어 세습하면서 왕 행세를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유대인의 마음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성전을 짓습니다. 이것이 헤롯성전이에요. BC19년부터 지었는데 예수님 당시에도 다 못 짓고 그 당시 46년 지었다고 하는데 후에 완성되기는 AD 62-64년입니다. 짓다가 중단되었다가 또 짓다가, 자기 맘 대로에요.
“그러면 목사님, 이 성전과 스룹바벨 성전은 관계가 없으니까 이 이야기는 하지 맙시다.”하고 나올 수가 있겠지요? 하지만 이 전체가 떠밀리는 역사라면 의미가 있는 거예요. 이것이 성전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도대체 어느 성전에 오신다는 말인가? 예루살렘의 스룹바벨 성전은 이미 기념사진으로 끝났어요. 색 다 바랬어요. 스룹바벨이 사라짐과 함께 그 성전도 같이 깨져버립니다. 70이레에서 세 토막 나면서 두 개의 관절이 드러나잖아요. 7+62+1이죠. 깨지는 것이 성전건립과 황폐와 관련되어 있어요. 성전이 어떻게 세워졌다가 어떻게 깨어지는가?
7이레는 성전 세워라, 62이레는 깨져라,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진짜 원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지상성전이 아니고 메시아가 와서 하는 제사만이 받는다, 그렇게 되거든요. 이것이 ‘70년’이 아니고 ‘70이레’거든요. 70년은 뭐냐, “너희들은 실패했지만 약속은 승리한다.” 이것이거든요. “너희들의 능력으로 들어갈 수도 없고 너희들은 죽어도 말씀은 살아 있다. 다윗은 죽어도 다윗 언약은 살아있다. 언약은 생생하다.” 언약 그 자체에 의해서 완성되는 거예요. 언약궤가 블레셋 나라에 잡혔을 때 언약궤를 무기로 사용했던 이스라엘도 망하지만 누구도 망합니까? 언약궤를 이스라엘에 대한 승리의 기념물로 갖고 있던 블레셋도 언약궤 때문에 곤욕을 당합니다.
블레셋, 요즘말로 팔레스타인이죠.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과 전쟁하기 위해서 원자탄이나 미사일 같은 무기는 준비할 것도 없어요. 그냥 언약궤로 승리하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왜 안 됩니까? 십자가가 역사를 밀어내는 힘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미 역사는 끝이 났습니다. 스룹바벨 기념사진으로 역사는 끝이 났어요. 그 다음에 더 나은, 더 멋진, 신에 합당한 역사, 없거든요! 그런 역사적으로 한 것들은 이미 없습니다. <회복>이라는 선교영화를 봤어요. 이스라엘에서 유대인들이 회개해서 기독교신자가 되어서 정통유대인 하시딤과 마찰을 일으키면서 현지의 텔아비브 혹은 예루살렘 등지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들이 힘들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언젠가는 메시아가 예루살렘에 오실 것을 기다린다는 영화입니다.
아, 참! 역사를 밀어내는 십자가를 이해 못하고 있어요. 인간의 힘으로 이루어내는 그 역사가 아직도 의미가 있다면 스룹바벨 성전이 이렇게 종결되지가 않습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마카비나 계속되는 역사에 어떤 의미가 있어야 되지요. 하지만 예수님이 바리새인들 보고 ‘너희 아비는 마귀’(요 8:44)라고 했잖아요. 바리새인이 마귀라면 다른 사람들도 다 마귀입니다.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도 아깝지 않게 여기는 하시딤 출신들입니다. 세상이 헬라화 되는 것, 세속화되는 것을 반대하고 저항하기 위해서 수천 명이 처형당하는 것도 불사하는 그들이 마귀의 자식이라면 도대체 마귀의 자식 아닌 이들은 누구라는 말입니까?
역사가 끊어진 것은 혈통이 끊어진 것이고 바로 그것이 십자가가 밀어내는 힘으로 혈통을 끊은 것입니다. 다른 혈통이 필요합니다. 다른 혈통인 스룹바벨과 예수님사이의 그 혈통의 이어짐은 요셉에 의해서 새롭게 개설된 케이블로 이어지는 거예요. 전혀 나라에 보탬도 안 되고 전혀 하늘나라에 대해서 그 당시에 호응되지 않는 숨겨진 케이블 같은 느낌을 우리가 받거든요. 스룹바벨 성전에서 외부로 올라올 때 헤롯성전이 떠밀리는 의미가 있는데 사도행전 1장 4절을 누가 읽어주세요. 하여간 역사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스가랴의 묵시, 다윗언약이 들어 있는 묵시로 참여됩니다.
사도행전 1장 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뭔가 부탁한 것이 있어요.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거기 지명이 하나 나옵니다. 어느 장소를 떠나지 말라고 합니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했다면 그 예루살렘에 스룹바벨 성전보다 더 큰 성전이 지어지는 겁니까? 아니지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니 거기서 무슨 대통령이 나오는 거예요? 아닙니다. 위에서 오지요. 뭐가 옵니까? 예루살렘에 약속하신 것이 위에서 오는데 그게 뭡니까? ‘성령의 세례를 받으리라.’
안 오면? 안 오면 어떻게 할 건데요? 자, 성령의 세례가 약속인데 안 왔다고 칩시다. 성령이 안 왔다고 칠 때에 사람들은 어떤 입장에 있습니까? 그냥 역사에 묶여 있겠지요. 인간은 혈통중심이고 역사 밖으로 못나가니까. 그렇다면 성령의 의미라 하는 것은 결국 위에서부터 주지 아니하면 아무도 받을 수 없다는 스룹바벨 성전의 기본취지가 무형으로, 그냥 아무것도 없이 그냥 오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인간이 사로잡혀서 빼도 박도 못하는 그 역사라는 것, 역사의 마지막 블랙홀의 지점이 바로 예루살렘인거예요. 예루살렘의 의미가 그동안은 새롭고도 발전된 역사, 더 나은 역사, 아직도 희망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역사가 있는 것이 아니고 역사는 의미가 없었습니다, 를 보여줄 수 있는 새로운 것과의 만나는 지점으로서의 예루살렘인 겁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그러면 뭔가 위로부터 약속된 것이 오실 것이다.” 지금 일의 전개를 잘 이해를 못할 수도 있는 분들에게 물어봅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으면서 성령을 기다린 그 기간이 얼마지요? 며칠 동안 기다렸더니 왔습니까?” 성경에는 “몇 날이 못 되어서”라고 되어 있지요. 그 답변을 우리는 거두어들여야 돼요. 우리가 성령을 받기 전에는 몇 날이 의미가 있어요. ‘아직도 안 오네? 아, 약속이 부도가 난 것이 아닌가?’ 주님 믿는다, 믿는다, 해도 막상 와야 믿지요. 사람은 역사적일 경우에만 믿어요. 역사적인 것이 있을 경우에만 차후적으로 믿어요. ‘어, 있네.’ 하고 믿는 거예요.
그런데 미리 믿는 사람은 없어요. 미리 기다리기는 하지만 그것은 증거가 없지요. 미리 기다릴 수는 있지만 미리 믿을 수는 없는 거예요. 이제 믿음이 없는 것이 들통 나는데 몇 날이 되어든 일단 와버리면 묵시는 지난 역사를 소급해서 묵시적의미로 이것을 해석해 버립니다. ‘진짜 몇 날을 기다리라 하더니 실제로 몇 날을 기다렸구나.’ 하게 되면 아직도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이에요. 성령을 받게 되면 그 며칠을 기다렸다는 것이 ‘괜히 기다렸어. 기다릴 필요도 없는데.’ 주님의 오심이 앞뒤로, 전체적으로 눈 덮이듯이 다 덮어버리면 역사 속에서, 역사의 주체로서 역사를 기다리던 이 모든 것들이 다 부끄러운 짓으로 전환되고 말아요.
‘그 때 괜히 초조했어. 이렇게 올 것을 왜 그렇게 믿음 없이 초조하게 기다렸는가?’ 오히려 반성이 되고 후회가 되는 겁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올라갔습니다. 여기에 누가 있었지요? 엘리야와 모세지요. 이쪽에 셋, 저쪽에 셋, 삼자씩 대면하는 것 같아요.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이렇게 짝을 맞추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뽑은 지도 모르겠어요. 미팅 나가서 짝 안 맞으면 곤란하잖아요. 모세나 엘리야같은 경우에 그들이 시계를 차고 왔겠느냐는 거예요.
제 글에 “지옥에 가서 달력장사 하는 것은 아예 부질없는 짓”이라고 했습니다. 시간이나 역사가 있을 때는 달력장사가 의미 있는데 지옥에서 무슨 2013년도가 의미가 있으며 2014년도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미 역사가 끝난 입장인데. 만약 엘리야하고 모세가 대화중에 “형님! 올해 나이 몇 살 드셨습니까?” 한다면? 이런 것은 묻는 것이 아니에요. 천국에서는 나이를 물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살았다, 하는데서는 어떤 요소가 빠지는가, 나이가 몇 살인가, 역사가 몇 년 되었는가, 운전경력이 얼마나 되는가, 신앙이력이 얼마나 되었는가, 이런 것은 다 빠집니다.
역사 자체가 우리에게 죽음을 안겨줬기 때문에 이미 죽은 자들은 역사와 더불어 죽었고 산다는 것은 역사입장에서 사는 것이 아니고 몇 년도에 살았다는 것이 아니라 묵시 입장에서 사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제 생일이 6월 이십 며칠이라고 아예 말을 안 하잖아요.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게 다 의미가 없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입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기대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지정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은 뭐하는 장소다? 약속된 묵시를 만나는 장소로서 예루살렘은 여전히 중요했던 거예요.
그러면 묵시가 오고 난 뒤에는 예루살렘을 떠나야 돼요, 안 떠나야 돼요? 이제는 떠나야지요. 이제는 떠나야 됩니다. 안 떠나면 궁둥이 차 버립니다. 떠나야 돼요, 이제는. 이제는 역사를 포함한 묵시가 도달한 곳이 전부 다 뭐가 됩니까? 그 때 묵시를 만났던 예루살렘이라는 장소가 되는 거예요. 그때는 가는 곳 마다 예루살렘이 되고 가는 곳 마다 거기가 묵시의 약속이 주어지고 전달되는 장소가 되는 겁니다. 구원 받으려고 여기서 예루살렘까지 갈 이유가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면 그 장소가 바로 묵시가 임하는 예루살렘이 되는 거예요.
방금 이러한 결론에 도달되기 위해서 예루살렘은 새로운 묵시의 완성이라는 의미가 그 안에 응축될 필요가 있거든요. 예수님께서 태어나셔서 어디로 달려가느냐, 예수님의 전 역사가 어디를 지향해서 달려가는 역사인가, 예루살렘에서 일을 마치고 싶어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이 예수님의 일대기입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으로 가려면 마을버스 몇 번 타야 됩니까? 직행 몇 번 탈까요? 버스파업 하면 늦을 수도 있어요. 심야버스 탈까요? 예루살렘에 가 봐야 얼마 안 되거든요.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한 2백 킬로쯤 됩니까?
그런데 그 길 가는데 왜 그리도 그 세월이 먼지, 길어도 너무 길어요. 3년이라는 세월을 거쳐서 그 예루살렘에 도달됩니다. 그 3년 동안 차비가 없었습니까, 버스 편이 없었습니까, 가는데 경찰이 못 가게 막았습니까? 왜 그렇게도 주께서 예루살렘 가는 길을 막았습니까? 사실 그 전에 두 번 이상 들락 달락 했지요. 그러나 그것은 예루살렘의 의미가 아니고 진짜 예루살렘의 의미를 이루려면 역사라는 양탄자를 자기 몸에 둘둘 감아가면서 십자가질 때 역사와 함께 죽는 그 작업이 필요했던 겁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은 오늘 죽어도 어디 간다? 역사를 초월해서 오늘 죽으면 네가 나와 함께 어디 간다? 낙원에 가는 거예요. 예수 믿는다는 것은 예수 안에 우리 역사도 다 함께 들어 있는 겁니다. 이미 우리가 살만큼 살고 죽는 것이 아니고 죽는 그 날이 살만큼 산 그 때에요.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엿장수 맘 대로라고 하는 거예요. 엿 얼마나 줍니까, 하는 것은 엿장수가 가위 철컥 철컥 돌려가면서 자기 맘대로 주는 거예요. 기분 좋다 하면 길게 자르고 기분 나쁘면 짧게 잘라주고, 엿장수 맘 대로에요.
역사를 끝내는 것은 왜냐,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슥 4:6)된다는 거예요. 신으로 되는 그 시점이 예루살렘의 역할을 다 하는 시점이 되는 거예요. 그 전에 역사를 둘둘 감아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서 1장을 봅시다. 여러분이 지금 참 피곤하신데 이제부터 어려운 것을 해야 됩니다. 힘든 것을 보고 있는 제가 힘들 수가 있겠네요. 로마서 1장 3절을 여러분이 힘들기에 제가 봉사하는 취지로 읽겠습니다. 지금 로마서는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앞에 복음이 뭐냐, 해 놓고는 그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복음이란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라고 했거든요.
여기서 두 가지 모순 된 내용이 나옵니다.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으면 그 혈통은 안 죽어야 되고 안 죽는다면 메시아가 아닙니다. 혈통으로 나신 것을 죽음이 마감 지어줘야 돼요. 그러면 무엇이 끝납니까? 혈통도 예수님의 죽음으로 “더 이상 혈통 없다.”로 마감되어야 됩니다. 둘둘 감아야 돼요. 아들예수님 죽으심 안에는 혈통으로 구원받는 기회는 더 이상 없다, 없는 거예요. 예수님죽음으로 마감되는 그 안에 혈통은 더 이상 없는 겁니다. 이 취지는 14대, 14대, 14대, 처음 언약 밖에서 올라왔던 이 14대의 취지가 붕괴될 때는 성전붕괴와 함께……, 그러니까 언약이 이스라엘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을 잡아 죽이는 외곽에 있는 나라에 작용해서 이스라엘은 완전히 언약을 버렸지만 외곽의 나라를 언약으로 상대해서 모든 이방나라를 제거하는데 여기서 성전이 무너져버리지요.
성전이 무너졌으니까 성전 무너진 사이와 그 다음의 14대, 그러니까 성전 무너진 그 14대에서 그 다음의 14대까지는 점선으로 혈통이 표현됩니다.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 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 네 대러라.”(마 1:17) 이스라엘 국가를 재건한다는 의미가 아니고, 예루살렘의 스룹바벨 성전을 다시 크게 짓는다는 의미로서가 아니고 그냥 아슬아슬하게 혈통만 이을 뿐이지요. 이 혈통이 큰 나라를 이루어서 어떤 혈통은 크게 되었다는 식이 없어요. 그냥 스룹바벨로 기념사진 한 방 찍고 그 다음부터는 그냥 고요함, 그냥 적막이에요.
그 적막 속에서 네 번째 여자가 마지막 터미널에 기다리고 있었지요. 그 여자 이름이 뭡니까? 마리아, 마리아라는 여자가 거기 준비되어 있고 요셉은 혈통을 끌고 옵니다. 둘 사이가 서로 사랑하는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관계에서 자식이 나와 버리면 14대-14대-14대가 아니고 14대-14대-250(?)세대, 이렇게 되겠지요. 이 혈통은 마리아에서부터 끊어져서 거기서부터 소급되어서 그 혈통에 작용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는 족보가 나타나지 않아요. 마리아에서 소급되어서 작용되기에 이 역사적 족보에는 그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아요. 스룹바벨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사랑하는 사이란 말이지요. 이 사랑하는 사이에 누가 끼어듭니까? 아서라, 말아라, 하고 누가 끼어들지요? 성령이 끼어들지요. 성령과 함께 누구도 끼어들고, 천사도 끼어들어요. 이걸 좀 설명해야 됩니다. 여러분이 전에도 들었겠지만 못 들으신 분들을 위해서 다시 합니다. 스가랴가 스룹바벨성전 짓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어디로 날아간다, 역사가 아니고 묵시로 날아가요. 묵시로 날아가게 되어서 사람의 손으로나 능으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신으로 한다면 하나님의 언약은 노는가, 천만의 말씀입니다. 사람의 손과 능을 대신해서 여기에 누가 활동하는가, 천사가 활동하지요.
천사가 활동하게 되니 천사의 활동은 역사로 쳐주지를 않습니다. 천사가 활동하는 그 기간에 지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마카비시대, 헬라화된 유대인들이 자기들 딴에는 역사를 이끈답시고 아주 망나니같은 짓을 했잖아요. 돈 주고 권력을 사는 등 온갖 이방이 하는 짓을 다 하고 있을 때 그냥 천사가 날아왔어요. 천사가 날아와서 하는 일이 뭐냐? 천사가 세상 끝까지 날아갑니다. 세상을 사각형으로 봤어요. 사각형은 네 모서리가 동서남북으로 있지요. 동서남북을 이렇게 잡는다면 천사가 가는 곳이 세상 끝이에요. 이것을 보자기로 본다면 천사가 보자기 한 모서리를 쥐고 가는 거예요. 이불 홑청 끼울 때 네 모서리를 단단히 잡고 펴면서 “똑바로 잡으란 말이야.” 하잖아요.
천사가 이렇게 모서리를 쥐고 펴게 되면 이것이 묵시세계지요. 묵시세계 밑에는 인간들이 낑낑거리면서 역사를 이어보려고,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메시아를 만나보겠다고 자기 딴에는 준비 많이 하고 있는 거예요. ‘이쯤 되면 오겠지.’ 하고 있는데 그 묵시의 보자기를 펼치고 거기에 납을 부어버립니다. 납은 뭐냐, 저주의 심판입니다. 이것은 뭐냐, 묵시라 하는 것은 역사를 방치하고 묵시가 전개되는 법은 없다는 겁니다. 역사를 놔둔 채 그냥 묵시를 들추는 법은 없고 반드시 역사를 부정하면서 묵시가 오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그 묵시는 사람은 활동하지 않지만 주님의 지시를 받아서 천사가 와서 이것을 펴는데 이것을 펼 때 스룹바벨을 따라서 올 때, 이것을 축구에서 투톱이라 하잖아요,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의 두 종을 세우는 겁니다.
이렇게 세워놓았을 때 그분들이 하는 일은 뭐냐, 역사를 심판하는 일을 하는 거예요. 이제 이 두 분 뒤에 오시는 다윗의 자손이 이 혈통이 되니까 그분이 메시아로 오셔서 심판하려면 반드시 뭐가 있어야 되느냐, 심판 할 수밖에 없다는 증거물을 확보해야 돼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는 그 긴긴 시간에 무슨 일을 하는 겁니까? 인자가 사람들에게 이렇게 배척받고 밉상 받았다는 것을 있는 대로 다 받아내요. 다 받아내서 사람들이 결국 자신의 판단과 평가로 메시아를 죽일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거예요. 저들이 나를 죽이는 것이 아니고 내가 알아서 죽는다고 요한복음 10장에서 이야기하지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 10:17,18)
예수님이 알아서 스스로 죽는 거예요. 이렇게 죽음으로서 “역사는 메시아를, 하나님을 죽인 그 역사인데 아직도 그 역사에 미련을 못 버리고 아직도 거기에 희망을 품고 있구나.” 메시아라는 한 남자가 죽었는데 그 것을 생각 못하고 이 역사 속에서 이 네 모서리 안에 갇힌 주제에 어디로 이민가고 어디서 무슨 장사를 해야 내가 행복해지는가, 매날 이렇게 세상 것을 찾고 있다는 말이지요. ‘세상 끝 테마여행’, 비행기 타고 쭈르르 달려가서 오늘은 스페인, 죽 달려가서 오늘은 브라질, 이러면서 온 세상 다 구경하고 있더라는 말이지요.
여러분, 세상 끝에 가봐야 하루일상 다 마찬가지입니다. 거기도 게스트하우스 있고 술 팔고 밥 팔고, 우리 하루 사는 일과와 똑같아요. 한비야처럼 여행 백날 해 봐야 어디가도 사람 사는 것 똑같습니다. 밥 먹고 살고 돈 좋아하고 손님 왔다고 반가워하고, 그것뿐이에요. 묵시로 가려면 그냥 가면 안 되고 묵시적 인간이 돼야 되거든요. 묵시적 인간이 되려면 뭘 받아야 되느냐하면 예수님처럼 성령을 받아야 돼요. 예수님처럼 성령을 받게 되면 그들이 가는 곳이 어떤 지점이든 묵시가 임하는 지점이 되고 이미 완료된 묵시의 심판이 거기에 적용시키는 기능을 하게 될 거예요.
그 취지가 바로 스룹바벨이라는 취지에 부합되는 겁니다. 스룹바벨 성전으로 말미암아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슥 4:6) 된다는 그 취지가 복음을 전할 때 마다 나오는 거예요. “사람은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하고 오직 네가 구원받음은 성령의 선물로 된 것이다.”라는 그 스가랴의 이야기가 계속 주어지게 되는 겁니다. 에스라 느헤미야의 성경이 많지만 거기서 예수님께서 인용한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사도바울이 그 대목을 인용한 것이 있어요, 없어요? 한 구절도 없어요, 한 구절도.
그러면 에스라 느헤미야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학개서와 스가랴에서는 주님이 인용했습니까, 안했습니까? 엄청 인용했어요.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보면 저작권 허락도 없이 스가랴를 마구 인용해 놓았어요. 천사들이 막 날아다니고 나귀 탄다는 것도 스가랴에 나오는 이야기고 이렇게 스가랴의 구절들을 인용한다고요. 역사는 기념사진으로 끝나요. 역사는 길고 묵시는 짧다고 생각하는데 도리어 그 반대가 되었어요. 역사는 아무리 길어도 인용할 것이 없고 묵시는 두고두고 뽑아내고 또 뽑아내서 화수분처럼 계속 나와요. 나오고 또 나올 수 있는 여건이 같은 시대를 살았던 학개와 스가랴에서 많이 나오는 겁니다.
다시 봅시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에 올라가는데 3년 걸렸다, 왜 그렇게 오래 걸렸습니까? 버스 편이 없었나요? 걸어도 가도 그 정도는 쉽게 가겠습니다. 무엇이 필요했던가? 역사를 칭칭 감고 올라가는 일이 필요했다. 역사를 칭칭 감고 올라간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역사 속에서 내 뿜을 수 있는 모든 죄악은 자기 몸에 전부 다 칭칭 감고 올라가야 된다. 이제부터 약간 어려운 것을 합시다. 이스라엘이 멸망하는데 누가 도와줬습니까? 말이 좀 이상하지요. 이스라엘이 멸망하는데 누가 도왔습니까? 북쪽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BC 722년에 망했고 남쪽 유다는 BC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했지요.
이스라엘이 멸망하는데 누가 도와줬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작용을 받아서 그렇게 했지요. 그러면 묻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는데 누가 도와줬습니까? 결정적인 것은 가장 가까이에 있던 제자 중에 한 사람 “네 할 일 해야지.”(요 13:27) 라고 했던 가룟유다였고 그것보다 한발자국 멀어지면 가야바라는 그 당시 대제사장이었는데 그 자리도 역시 돈 주고 산거예요. 돈 주고 샀다는 것은 그 자리에 앉으면 그만큼 뭐가 나온다? 돈이 나오는 거예요. 국회의원 왜 하려고 합니까? 돈이 나오는 자리이기에 하려고 하는 거예요. 대제사장 자리가 돈이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뭐냐, 제사장이 있어야 율법을 지키는 전통과 역사가 살아 있고 그러면 메시아가 이 역사의 선 위에 올 것이 아닌가, 라고 보는 거예요.
역사를 계속해서 부지하는 그것이 예수로 하여금 역사를 청산할 수 있는데 이바지 한 겁니다. 오늘도 교회는 역사를 주장함으로써 예수님의 십자가복음을 전하는데 아주 중대한 이바지를 하고 있는 거예요. 일곱 교회에 역사가 있습니까? 일곱 교회는 분명히 나오는데 역사가 없잖아요. 일곱 교회는 역사를 위해서 나온 것이 아니고 교회의 묵시적 속성이 뭐냐, 왜 교회마저 멸망해야 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일곱 교회가 있잖아요. 교회가 그러면 돼요. 제가 주일에도 이야기했습니다. 알프스에 몽블랑 산이 있는데 거기 눈이 오잖아요. 암석에 눈 덮인 이것을 역사라고 한다면, 이것이 교회 역사라고 한다면 역사라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사람의 능력의 집합체 아닙니까?
어렵습니까? 역사라 하는 것은 항상 회고지요. 회고적인 것인데 이것이 실적입니다. 내가 이 실적을 이루기 위해서 얼마만큼을 했는데 내가 이만큼의 실적을 이룬 것을 봐서 나에게 이런 의미가 있구나, 라고 되돌아보는 순간 뭐가 발생해요? 역사가 딱 정립되는 거예요. 그런데 역사라는 것이 눈사태가 일어나듯이 무너지게 되면 말갛게 그리스도의 값 주고 산 교회가 나오겠지요. 역사라는 것은 미끄러지고 쓸려 내려가야 된다는 말이지요. 이미 묵시니까 왜 역사가 멸망할 수밖에 없는가, 하는 조로 성령께서 예수님을 데려갑니다. 그 이유는 역사가 어떤 점에서 멸망 받아야 마땅한가를 예수님을 잠입시켜서 낱낱이 밝혀주는 것이 예수님의 공생애 3년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들까지 포함해서 다 예수님의 말을 이해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그들 나름대로의 역사관이 있기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역사관에 부응하는 식으로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어요. 주님께서 그 역사를 치는 언어를 사용했는데 인간들이 그 언어를 받아서 오히려 자기 역사에 집어넣으려 하니까 제자들이 뭐라 하느냐하면 “예수님, 우리가 나중에 하늘나라 갈 때에 우리 중에서 높은 자리에 누가 앉겠습니까?”(마 20장) 하는 이야기, 변화 산에서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에 빌라 세 채를 짓겠습니다.”(마 17:4) 하는 이야기, 빌라를 지어서 뭐 할 건데요? 빌라를 지어서 우리 역사를 한번 이어봅시다, 아주 아름다운 역사를 이어봅시다, 그런 뜻이거든요.
빌라를 지으면 여기는 엘리야 빌라, 여기는 예수님 빌라, 여기는 모세 빌라, 나중에 추워서 얼어붙어서 파이프 터지면 그거 고치러 올라가야 할 텐데요? “예수님, 추우십니까? 보일러에 기름 더 때야 하는데 기름 주문하겠습니다.” 이렇게 그 빌라 관리해야 됩니까? 이것은 자기 역사 속에 일방적으로 엘리야와 예수님과 모세를 집어넣으려고 하는 거예요. 그럴 때 세분 이야기한 내용은 빌라 짓는 이야기가 아니고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서 이야기한 겁니다. “예수님 언제 죽어야 됩니까?” “좀 기다려 봐라.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 그 때라는 것은 역사가 거덜나는 때입니다.
스룹바벨성전에서 역사가 고정되면서, 시간이 이렇게 있다면 이 묵시가 위해서부터 하나님에 의해서 내려오지요. 내려오면 이 역사는 천사들이 예언한 그 묵시에 의해서 전부 다 심판의 대상으로 결정 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향한 곳이 어디냐, 예루살렘이지요. 예루살렘으로 예수님이 올라가셨는데 그 예루살렘에 온 목적이 뭐냐 하면, 예루살렘은 다윗의 혈통, 다윗의 자손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셔서 예루살렘에 진입을 시도했습니다. 예루살렘에 들어갔을 때 다윗의 혈통으로 오셔서 예루살렘을 청소했잖아요. 청소를 했으니 비둘기 팔던 사람들이 다 나갔습니다.
그렇게 청소를 했으면 예루살렘이 깨끗하게 되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재림할 때 이곳 예루살렘에 재림하십니까? 어떻게 되는 겁니까? 예수님께서 청소하시는 이유는 예루살렘의 취지가 언제 완성이 되느냐와 연관되는데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예루살렘이 흡수되면서 진짜 예루살렘을 다시 토해내게 되는 거지요. 그렇다면 제자들보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한 것은 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모든 것이 완료되었다는 그 증거를 잡으라는 말입니다. 그 증거가 뭐냐 하면, 예루살렘의 역사가 이어지는 것이 아니고 뭐가 옵니까? 성령이 와버리는 거예요.
성령이 와버리면 더 이상 역사가 필요 합니까, 필요 없습니까? 필요 없다는 말은 자기 능력과 자기 노동도 필요 없지요. 그러면 제자들은 땡 잡은 겁니다. 더 이상 필요치 않아요. 아까 제가 성령이 왔다는 증거가 뭐라고 했습니까? 성령이 오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지요? “너는 육이야.” 라는 통보지요. 육이 육 되기 위해서는 성령께서 십자가를 앞장세워서 육이라고 우리를 치면 우리는 더 이상 역사를 이끌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겁니다. 역사를 이끌 이유가 없으면 역사가 소급해서 회고적으로 역사가 사라진 겁니다. 역사가 사라지면 과거에 나의 신앙경력이 얼마이고 교회를 몇 군데 세웠다는 이 자체가 남아 있으면 안 되지요.
성령께서는 먼지 털이를 가지고 늘 탈탈 털어냅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것이 뭐냐, 늘 우리 속에 남아 있는 과거에 대한 역사를 자꾸 털어내는 거예요. 털어내게 되면 우리는 천사처럼 묵시적 존재가 되어버리죠. 고린도전서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들이 왜 재산 문제 가지고 다투느냐? 너희들은 천사도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천사도 부러워할 신분이면서도 기껏 돈 문제 가지고 형제들과 싸우고 고소하면 되겠느냐.”(고전 6:1-3)하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천사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전지전능한 것이 아니고 이 역사를 같은 입장에서 심판할 수 있는 안목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여보, 오늘 라면 끓였는데 너무 라면이 짜네요.” 남편이 그 소리 듣고 “괜찮아요. 뭘 그까짓 거 가지고.” 이것이 천사에요. “라면 국물 먹었다 치고 잘 버렸어. 그런데 그 라면국물 버릴 때 다이아반지도 같이 버린 것 같네.” “괜찮아요. 그까짓 다이아반지 그냥 받았다 치면 되는 거예요.” 물론 속은 쓰리죠. “여보, 우리 애 성적이 또 떨어졌지요?” 하면 “괜찮아요. 떨어져도 자기보다 못한 애도 더러 있겠지요.” “그런데 완전 꼴찌인데요.” “괜찮아요. 그것도 다 주의 뜻으로 생각해야지요.” 하여튼 제정신이 아닙니다. 미친 거지요. 그렇게 되도록 하는 겁니다.
자기를 잊는 것, 주체를 잊는 것, 그런 식으로 살 경우에만 본인이 전도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전도케 하시는 겁니다. 이번 시간 끝으로 한 말씀 드리지요. 베드로에게 보자기가 날아왔을 때 보자기에 담긴 것을 먹으라고 하나님이 주신 것이 있어요(행 10장). 보니까 완전히 밀림인지 정글인제 못 먹는 구더기 같은 것들만 쌓여 있습니다. 베드로가 단호하게 이야기합니다. “나 못 먹습니다.” 그게 역사에요, 역사. “하나님은 저를 어떻게 보고, 제가 얼마나 율법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인데 율법에 위반되는 것을 먹으라고 하면 됩니까?”라고 하지요.
위반하라고 먹으라고 한 거예요. 위반해도 위반 아닌 신분이 너라는 것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위반하라고 한 거예요. 세 번이나 거절하죠. “먹어라.” “못 먹습니다.”(행 10:16) 세 번 하고 그 꿈은 사라졌어요. 그 후에 딩동, 하고 벨소리 나더니 “혹시 여기 베드로라는 분이 사십니까? 저는 욥바에서 왔는데 이만저만 해서 우리 고넬료 중대장님이 모시고 오라던데요?”라고 이야기하더란 말이지요. 그렇다면 전도라는 것은 전도 이전에 뭘 없애야 돼요? 나의 자존심을 형성한 나의 역사관, 이것이 무엇을 방해한다, 하나님이 현재 벌이고 있는 구원 작업을 누가 방해해요? 내 역사가 방해하고 있어요.
내가 주님이 지금 벌이고 있는 복음을 방해하고 있는 거예요. “엄마, 성적이 또 떨어졌어.” “괜찮아. 떨어질 수도 있고 올라갈 수도 있어.” “아니 계속 내려가던데? 올라가는 적은 아예 없어.” “괜찮아. 어디까지 내려가는지 함께 지켜보자.” 속은 쓰리지만. 자식들한테 교회가라고, 이것이 예수님의 복음이라고 백날 해도 소용이 없어요. 부모가 뭔가 역사로부터 자유로운 면을 보여야 되는데 이 자유로운 면은 내가 육이다, 하는 그 짧은 순간에만 느끼지 ‘이제부터 자유다. 시험해 보자.’ 해서 “공부 하지 마! 하지 마! 괜찮아.” 하다가는 공부 제대로 안 해버립니다.
전도와 모든 선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묵시적 존재, 주님이 하시는 겁니다. 천사가 날아다녀도 천사보고 “수고한다.” 하다가는 천사에게 귀싸대기 맞는 수가 있어요. “나는 그냥 시킨 대로 합니다.”하는 것처럼 우리도 이 모든 경우가 주께서 복음 전하기 위해서, 다른 말로 하면 역사를 심판하기 위해서 천사처럼 계속해서 성령 안에서 우리를 부리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 부리는 흔적이 뭐냐, 이렇게 저렇게 우리의 역사를 털어내는 겁니다. 우리의 힘이나 능에서 오는 그 실적자랑, 이런 것을 털어내는 거예요. 육이기에 돌아서면 또 생기고 성령이 와서 털어내면 또 생기고, 그러니까 한 번 성령 받았으니 이제는 내가 알아서 한다는 것은 없어요.
성령 받아놓으면 그것도 자기 자랑한다고 내가 성령 받았다, 이걸 일기장에 또 씁니다. 그러면 또 하나의 역사가 되어버려요. 그것을 주님께서 늘 상 오셔서 털어 내시면서, 새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털어내시는 그 현장을 가지고 남한테 복음 전달하는 매개체로 우리를 활용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열두 제자나 사도들은 자기 맘대로 산거예요. 띠 띠우고 원치 않는 곳으로 계속 가는 거예요. 허리 띠 없으면 큰일 날 뻔 했어요. 띠 띠우고 원치 않는 곳으로 계속 가면 거기서 주님 믿는 사람 만나고 복음 전하고 복음 듣고 절하면 “저한테 절하지 마세요. 주께서 하셨습니다.” 하는 그 묵시적 현장의 역사, 이런 것이 바로 에스라 느헤미야가 찍었던 기념사진의 취지입니다.
스룹바벨 성전에서 블랙홀, 숨어 있어요, 역사 속 인물로 숨어 있습니다. 그런데 밑에 배열된 사람은 율법의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이구동성으로 “우리가 온 것은 옛날 우리가 멸망했던 자리, 율법은 살아 있었고 우리는 비록 부족했지만 70년 만에 돌아와서 성전 짓는 것 보니 이것은 우리 능도 우리 힘도 아니고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의 결과로서 우리가 여기 있습니다.” 그 고정된 기념사진, 그 기념사진이 오늘날 우리에게 그대로 묵시적 성취의 완료형으로서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항상 역사로서는 실패했지만 실패했다고 알려주는 그 자체가 이미 우리는 성공한 사람,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이 역사에 어떤 묵시적 사명이 제공되는 겁니다. 저녁식사 후에 계속합시다.
첨부파일 : 2013겨울수련회7강.hwp (37.5K), Down: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