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취]2013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5강
[녹취]2013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5강
이름 : 서경수(IP:121.176.190.236)
2013 겨울수련회 5강
지금까지의 강의 흐름을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했는데 개인의 자격으로는 그 나라와 의를 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는 그 나라와 의 이전에 어떤 나라에 소속이 되어 있고, 들어갈 마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할 때 우리에게 “네가 열심히 하라.” 또는 “바르게 하라.” 그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네가 지금 어떤 나라에 소속되어 있는데, 그 나라에게 벗어나서 지금 예수님이 생각하는 그 나라 의를 구하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떠나는 방법도 모르고 떠날 마음도 없고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숙달함으로 적응되는 나라거든요. 계속 연습하고 이 땅에서 합당한 사람이 되려고 하는데, 숙달만 하고 또 호명을 받아서 어떤 자리를 마련하고 하는 이 노릇이 언제 끝납니까?
나중에 늙어서 “당신 실력으로는 안 됩니다.” 라고 한다면, 누구에게 호명 받지 못하면 그동안 뼈 빠지게 일했는데 그게 다 날아가잖아요. 노동은 시장입니다. 노동시장에서는 자기가 애 쓴다고 찾아주는 게 아니에요. 그 노동의 가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호명해 줄 때만 자신이 유효하지, 아무리 상품을 잘 만들어 놓아도 그 상품을 찾는 사람이 없으면 그것은 쓸모없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을 떠나면 될 것 아닌가? 떠날 데가 어디 있어요? 아무데도 떠날 곳이 없습니다. 숙달해서 적응하는 것도 나중에는 별 의미 없고, 누가 나를 사용해 주지 않으면 나 혼자 용쓰는 것이고, 그렇다고 내가 먼저 세상을 피하려고 하니까 피할 곳도 없고 그런 경우 에스라, 느헤미야 공동체의 의미가 뭐냐?
이것은 도피하는 장소도 아니고, 하나님 말씀대로 잘 적응하는 장소도 아니에요. 과연 율법의 말씀은 성취 되는구나 하는 것을 확인하는 곳입니다. 사람은 실패해도 말씀은 실패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겁니다. 그래서 떠나거나 적응할 필요 없이 말씀이 찾아와서 “이게 너 자리야!”하고 우리 자리를 지정해 주면 그 자리에 있으면 됩니다.
그동안 내가 살기 위해서 말씀을 보니까 감당도 못하고 말씀을 지키지도 못했는데, 순서가 바뀌는 거예요. 우리는 떠나도 말씀은 영원하니까 그 말씀이 진짜 내 본래의 자리를 찾아준다면 우리는 피조물로 그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에스라, 느헤미야 이 율법의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자리를 찾아가도록 하시는 거예요.
에스라, 느헤미야, 스가랴, 학개 이 사람들은 바벨론에 잡혀 있다가 바사 나라가 되면서 고레스에 의해서 다시 고국으로 귀환합니다. 포로들이 귀환 할 때 이 사람들은 제정신이 아닙니다. 어떻게 해서 왔든지 어떤 곳에 머물러 살면 그 장소에 정이 들고 이웃도 생기고 단골도 생깁니다. 이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아무리 고국이지만 떠난 지 오래 되었고, 고국에 돌아간다고 해도 다시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포로가 귀환한 숫자가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1차 귀환자가 도합 42,360명이고, 2차 귀환자가 5,000명, 3차 귀환자는 숫자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귀환하지 않은 사람들은 뭔가? 그들은 정신이 똑바로 박힌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믿는 것도 다 살려고 하는 것 아닙니까? 내 삶을 힘들게 하면서까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정신 나간 짓이에요. 여러분은 정신 빠짝 차리세요. 내 생활에 곤란을 느끼면서 하나님을 믿는 그런 무모한 짓을 하면 안 되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국에 돌아오는 대신 이집트로 갔습니다. 왜냐? 그 나라가 자유롭고 살기 좋기 때문에 그것으로 많이 갔습니다. 고국으로 귀환한 수의 10배, 20배 사람들이 부강한 나라 이집트로 갔습니다. 그곳에 가서 게토(유대인 집합 장소)를 만들어서 서로 협력하면서 사업을 벌였고, 금융사업도 하면서 잘 먹고 잘 살았어요.
그런데 멸망했던 본토로 돌아온다는 것은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성전을 다시 세운다고 봉사를 했는데, 그 후에 제정신 가진 사람들이 인수 받아서 그 일을 계속 했습니다. 제정신 돌아온 사람들이 하는 일은 뭔가? 돈 받고 권력을 쥔 사람들입니다. 요하난, 요셉, 야손, 멜레니우스, 티나누스 1세, 얀네우스, 헤롯 등등. 이들은 제정신으로 산 사람들인데 돈 주고 제사장직을 유지했던 사람들입니다. 그 나라가 바로 유대 나라입니다.
지난 시간에 한 것을 복습해 봅시다. 병원이 없는데 병원이 생겼다. 군대가 없었는데 군대가 생겼다. 학교가 없는데 학교가 있다. 교회가 없는데 교회가 있다. 없는데서 뭔가 생겼다를 누가 셈합니까? 셈하면서 우리는 주체가 되지요. 그러면 병원, 학교, 교회 이 모든 것을 하나로 모을 때 이것이 국가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국가는 이렇게 헤아리는 내가 있음을 확인시킬 수 있는 국가가 되는 것입니다. 없다, 있다를 헤아림으로써 우리는 무엇을 감추는가 하면, 나는 결코 없었던 적이 없는 그런 존재인 것을 이렇게 헤아리면서 확인하는 거예요. 사람이 “저기에 뭐가 있네.” 할 때는 나는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존재인 것처럼 그렇게 행동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주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교회도 포함되고 하나님도 포함 되지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영원하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을 헤아리는 나는 옛날부터 없었던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을 염두에 둔 생각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전부 나를 위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국가 없는 교회 없다. 국가 없는 신앙은 없다. 국가가 최고다. 그러면 국가를 유지시키기 위해 나는 수단과 방법을 다 사용한다. 이것이 인간들이 자기 주체를 살릴 수 있는 제정신입니다.
그런데 나의 주체를 포기하고 오직 말씀은 말씀대로, 약속은 약속대로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은 제정신이 아니지요. ‘하나님이 말씀으로 지정해 준 그 자리가 내가 있을 곳입니다.’ 라고 한다는 것은 자기 주체를 포기하고, 내가 세상을 헤아리지 말고 ‘말씀이 보시기에 이 세상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라고 모든 권한을 말씀 쪽에 넘기게 되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 정상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이 에스라, 느헤미야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 귀환한 것입니다. 귀환해서 그들이 무슨 일을 했는가 하면, 성전을 세웠습니다. 성전을 세웠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애들아, 옛날 이곳에 하나님의 성전이 있었거든. 그런데 그 성전은 파괴되었어. 우리는 지금 파괴된 자리에 다시 돌아온 거야.”라고 주변사람과 그 자식들에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면 자식들이나 주변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그 때 우리가 왜 망했지?” 질문이 다르지요. “앞으로 우리가 어떤 희망을 가질 것인가?” 이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이 우리에게 제대로 지적해 주는 우리의 지정된 장소입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새로운 희망을 갖자.” 이것은 엉터리입니다.
희망을 갖자고 할 이유가 없습니다. 희망을 갖자고 한다면 그 공동체 자체가 자기 주체를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마저 이용하는 꼴이 되지요. “왜 우리는 망해야 하는가?” 이 자리를 고수해야 합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 말씀에 의해서 발각되어서 벌을 받아야 하는가?” 그 자리가 우리의 영원한 고향이어야 합니다.
이런 자리에서 그들은 제일 먼저 성전을 지었습니다. 말이 성전이지 사실은 신전입니다. 신전은 [신+전]이죠. 여러분, 신을 본 적이 있습니까? 많은 사람이 신을 믿는다고 할 때 결국 신은 안 보이고 신전만 보이지요. 신은 없어요. 신전만 있어요. 신전을 지어놓고 사람들이 뭐라고 사기를 치는가 하면 ‘여기에 신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돈을 모아 신전을 크게 지으면 큰 신이 있는 것처럼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 허황된 것인 신전을 없애면 될 것 아닌가? 신전을 없애면 신을 어떤 식으로 믿을까요? 신전만 덜렁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전에서 매일 이벤트가 벌어집니다. 신전이 없다면 이벤트 할 사람도 없고 제사장도 없는데 그러면 어떻게 신과 접속합니까? 난처한 문제입니다.
여기에 대안이 뭐냐? 제정신으로 에스라, 느헤미야 공동체를 인수했던 사두개인과 바리새인 두 계파들은, 특히 바리새인들은 뭐라고 하는가 하면, “우리에게는 율법이 있다.” 이렇게 주장했어요. “비록 신전은 없어도 율법이 있으니까 율법이 우리를 살린다.” 이 말이 맞습니까, 틀렸습니까? 틀렸습니다.
‘율법이 먼저 있고 그 후에 우리가 있다’는 것과, ‘율법이 있어야 우리를 살린다’는 것은 정 반대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율법을 매개로 삼는 것과 율법 자체가 우리가 살아있는 것 이상으로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면 우리가 살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아직 덜 살았다는 이야기고, 내가 어떤 형편에 있든지 말씀이 살아있으면 그 관계로 이미 우리는 죽어도 사는 관계라는 것은 완전히 격이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사두개인, 바리새인 이 사람들은 율법 하나 가지고 자기를 살릴 수 있는 희망을 가지기 위해서 자기를 지배하는 강대국에 돈을 주고 자기 권력을 지탱시킨 것이 바로 중간기(말라기 이후와 예수님 사이)의 형편이었습니다. 돈 주고 권력을 사서 “너는 왜 돈 주고 권력을 샀는가?” 하니까 죽여 버리고, 돈으로 권력을 사니까 방법은 간단하지요. 안디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 이런 사람들에게 돈을 주고 야손은 제사장직을 샀습니다.
멜레나오스라는 사람은 베팅을 하듯이 야손보다 더 많은 돈을 주고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오니아파와 도비아파가 있는데 파들이 권력을 쥐려면 당시 시리아가 지배를 했는데, 그 시리야에 돈을 더 주고 사면 그 권력을 쥘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권력으로 하는 일이 뭔가? 율법을 유지하는 거예요. 왜? 율법을 유지해야 유대 나라 정체성이 지속되기 때문에.
그 정체성 지속해서 뭐 할 건데? 역사가 만들어지잖아요. 그러면 역사 만들어서 뭐 할 건데? 역사의 끝에 메시아가 온다는 겁니다. 바보 같은데 가만히 보면 제정신이라. 그런 희망을 가질 이유가 없어요. 희망 안 가져도 구원 받는데 왜 구태여 희망을 가져야 합니까?
에스라, 느헤미야, 학개, 스가랴, 다니엘, 말라기 이런 사람들은 희망을 가질 이유가 없었어요. 왜냐? 말씀이 움직이고 있고, 그 말씀이 스스로 알아서 결정타를 날리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그 말씀에 의해 움직여지면 저절로 그 나라에 이미 들어간 셈이 되잖아요.
지금 유대인들은 천국 가는 입구를 못 찾아 환장했어요. 그 나라와 그 의에 들어가려면 우리가 속한 이 나라에서 벗어나서 그 나라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제정신 가진 유대인들은 돈을 주고 권력을 사서 율법을 유지하면서 아무리 용을 써도 지금 내가 헤아리는 이 국가라는 주체, 내 주체를 위한 국가라는 경계선을 넘어설 수가 없어요.
한계라는 말과 지평이란 말이 달라요. 한계라는 말은 한계선 너머를 볼 수 있지만, 지평은 다가서면 지평선이 멀어지기 때문에 지평선 너머를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저쪽 그 나라와 의에 다가설 수 있는 출입구가 없단 말이지요. 입구를 발견하지 못하니까 그냥 그 자리에서 맴도는 거예요.
기껏 한다는 짓이 신은 모르니까 신전만 짓는 거예요. 왜? 사람은 여기에 속아 넘어가고 여기에 자금이 투입되니까. 사람이 이 세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기껏 마지막으로 하는 일이 뭔가 하면 신전을 키움으로써 신의 나라에 접근하겠다는 바벨탑 쌓는 그 사고방식에 재탕 그 이외에는 없습니다.
십자가마을이 커지면 하늘의 별을 땁니까? 그냥 죄인만 모였을 뿐이지요.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말씀이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말씀을 빙자해서 단체를 키운다는 것은 자기 주체는 영원하다는 것을 확인하는 그런 악마적 발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없어질 때가 되면 없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말씀을 가리지 않습니다. 언젠가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납니다.
에스라, 느헤미야 이 공동체는 이미 말씀이 우선이기에 이것이 그 나라와 그 의입니다. 그 나라와 그 의가 만들어졌다는 것은 다른 기존 세상의 핵심을 해석하는 모델이 됩니다. 다른 세상을 해석할 수 있는 유일한 기본 모델로써 에스라, 느헤미야 공동체가 성립되는 겁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해석한다는데 해석이란 의미가 뭐냐? 통일성을 풀어내는 거예요. 뭔가를 해석한다는 것은 풀어내는 거예요. 양파를 해석하면 어떻게 되지요? 껍질을 벗기면 되지요. 양파를 해석하니까 그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양파 껍질만 있는데 문제는 양파가 없는 거예요. 희한하지요.
양파 껍질밖에 없는데 사람들이 양파 껍질을 다시 조립해 놓고 그것을 양파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듣는 양파가 기분 나쁜 게 “너희들은 양파라고 하지만 우리는 양파 껍질뿐이다.”라는 거지요. 그런데 그것을 왜 양파라고 하는가? 그것은 셈하고 헤아리는 내 주체의 통일성을 위해서 너도 나처럼 동일성을 갖추라고 내가 양파 껍질을 모아 양파라고 해석을 해버린 겁니다.
이 세상에 개는 없어요. 세프트, 불독 이런 것들을 모아놓고 개라고 하는 거예요. 이것들을 일괄적으로 셈하고 집합시킴으로 말미암아 나에게 저것을 해석할 수 있는 권한이 있고 내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고 인정하고 싶은 거예요.
에스라, 느헤미야가 세상을 판단할 때 에스라, 느헤미야에게 판단 받습니까, 아니면 에스라, 느헤미야와 함께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판단 받을까요? 말씀에 의해서 판단되는 거죠. 그러면 에스라, 느헤미야가 시도했던 기본 취지가 뭔가? 세상을 해석하는데, 해석하는 것은 다이나마이트를 설치해서 세상을 폭파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교회에 늘 청소하시는 집사님이 계십니다. 이분이 청소하지 않으면 내가 해야 하는데, 이 집사님이 하시는 일이 뭔가 하면 바위에 폭탄을 설치하고 터뜨리는 거예요. 요즘은 서천에서 일하시는데 금요일까지 일하고 토요일이면 집으로 돌아옵니다. 주말에 만나는 부부지요.
바위에 폭약을 집어넣고 폭파시키듯 에스라, 느헤미야를 집어넣고 주변 나라를 전부 폭파시킵니다. 그러면 해석이 됩니다. 각기 자기 나라를 보면서 “우리나라는 영원하다.”고 하는데, 말씀이 그 나라에 들어가면 폭탄 역할을 해서 폭파됩니다. 그 폭파시키는 폭탄의 힘이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겁니까? 에스라, 느헤미야에서는 성전을 지으라고 하면서 그 성전에 폭파의 힘이 있어요.
그러면 이제 성전 이야기를 해봅시다. 성전은 신전이지요. [신+전]입니다. 이스라엘의 성전문제는 그냥 인간들이 전을 지어놓고 신을 초청하는 입장이 아닙니다. “하나님, 신전을 지었습니다. 여기 편안히 계십시오.”라고 할 때, 하나님은 “나는 사람이 지은 전에 거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안 들어갔습니까? 성전에 계셨잖아요. 왜 하나님이 이랬다저랬다 하십니까? 일관성이 없어요. 거하지 않겠다고 하셨으면 그곳에 안 계셔야하는데 왜 들어가시냔 말이지요.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또 있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여, 우리에게도 왕을 주십시오.” 라고 했고, 사무엘 선지자는 “이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하나님이 왕을 주십니다. 왜 주시는가?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는 식입니다. 떡 먹고 체하라고.
“하나님이여, 저는 하나님을 이해합니다. 하나님을 더 잘 모시기 위해서 왕을 주옵소서.” 라고 하니까, 하나님이 “네가 나를 이해한다고? 그러면 너희들이 날 제대로 이해하도록 해줄게.”하고 왕을 허락해서 왕을 통해서 나라를 폭파시켜 버립니다. 폭파되고 난 뒤에 “아, 진짜 하나님은 이런 분이구나.” 하고 깨닫게 하시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하나님은 더러운 인간과 같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전 이전에 회막을 만들어 놓았는데, 거기는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어요. 제사장만 들어가는데, 제사장도 피를 바르고 들어갈 수 있지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어요. 그만큼 거룩의 장막을 쳤기에 거룩하지 못한 사람들은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더러운 인간들과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을 것으로 느끼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 속에 들어왔어요. 이것은 모든 주체를 폭파시키러 오신 겁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을 만나고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서울 안 가본 사람들이 서울은 어떻고 이야기를 하는데, 정말 하나님 만난 사람은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손으로 지은 전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들어왔어요. 들어왔다는 말은, 이 신전(건물)을 인물로 바꿔요. 건물에 들어오되 이 건물을 폭파시키고 그 현장에 인물이 드러나게 하는 그 과정에 하나님이 개입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희들 속에 들어오시기는 하는데, 너희들이 지은 건물에는 안 들어가지만, 건물 밑에 터널을 파서 그 건물을 붕괴시키면서 그 현장에서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게 하는 방식으로 내가 너희에게 가겠다.
그러면 새롭게 건물을 파괴하면서 등장한 인물은 무엇이 가능합니까? 죄 있는 인간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용도의 하나님으로 오시는 거예요. 더러운 인간과 거룩한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거예요. 유대인의 율법에 의하면 이것은 상상도 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더러운 인간이 거룩한 하나님과 함께 있을 수 있느냔 말이지요.
율법에 의하면 거룩한 것도 주변에 더러운 것이 있으면 오염이 됩니다. 그래서 반드시 손을 씻어야 돼요. 유대인들이 예수님 앞에서 손을 씻으니까 예수님은 손 씻는다고 잔소리를 해요. 그러면 어쩌란 말입니까? 율법에서 손을 씻으란 말은 피부만 씻지 말고 네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말씀인데, 인간이 무슨 수로 마음을 씻을 수 있습니까?
이 말은, 하나님이 우리 속에 들어올 때 우리 쪽에서 하나님께 다가가는 방법은 없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우리에게 접근하시는 겁니다. 우리 쪽에서 하나님께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안 다가서면 됩니다. 내가 다가설 수도 없는데 주님도 안 다가오시면 어떻게 되는가? 그러면 더러운 채로 가만히 있으면 되지요.
사람들은 자신을 더러운 채로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아요. 더러우면 깨끗하게 하는 그런 아이디어를 자체적으로 끄집어냅니다. “내가 죄 짓고 이 정도 벌 받았으니까 이제 사업을 시작해도 설마 저주는 받지 않겠지? 죄로 말미암아 벌도 받았고, 그동안 반성 많이 했으니까 또 저주 받지는 않겠지.” 라고 스스로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아이디어를 끄집어냅니다.
지금 하나님이 성전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하시고는 들어 왔어요. 사람들 입장에서 하나님이 성전에 계신다는 것이 완료라고 생각하는데 완료가 아니고 “나는 너희들의 성전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만드는 다윗의 가문 안에 들어가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어렵습니다. 가문이란 역사고 역사는 시간입니다. 어떤 장소에서는 ‘~안에’라는 말이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신약에서 ‘예수 안’은 어느 장소입니까? 공간적 범주로 이해 됩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라고 했는데, 예수 안의 반지름이 얼마나 됩니까? 면적을 계산할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시켜서 “예수 안”이라는 말을 했는데, 그 말에 책임을 져야 될 것 아닙니까. 안과 밖이라는 공간 개념을 사용할 때는 그냥 말만 뱉지 말고 그것을 해석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제공해 주셔야 우리가 납득이 되어 ‘믿습니다’라는 말을 할 수가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해놓고, 그 안이 무엇이냐에 대한 속 시원한 답변이 없어요.
기껏 내놓은 것이 ‘예수 안은 곧 성령 안이다.’ 갈수록 태산입니다. ‘성령 안’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자, 이렇게 이해해 봅시다. 여름에 구청에서 차량을 동원해서 모기약을 뿌립니다. 뿌연 연기가 생기겠지요. 아이들은 재미있다고 그 모기약 차량 뒤를 따라갔는데, 어느 위치에 가야 모기약 안에 있고, 어느 위치가 되면 모기약 밖에 있는 겁니까?
성령이 어느 장소에 있다고 하면, 만약 이곳에 성령이 임하시면 이 얇은 벽돌 바깥에는 성령이 없는 거예요? 성령이 문을 못 열고 나오는 겁니까? 뭘 그렇게 따지냐? 그냥 넘어가자고 하는데, 그렇게 넘길 수가 없어요. 분명하게 따져야 돼요.
위의 이야기는 범주론적으로 해석하는 것이고 실존론적 해석이 있어요. 실존론적이라는 것은 돌발사태,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이걸 설명하면서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이 ‘성령 안’을 언급하면서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하면, ‘바람’을 거론합니다. 바람은 불면 그만입니다. 바람 불었던 장소에 가서 백날 서있어도 그 바람이 불지 않습니다.
실존이라는 것은 ‘흐르는 강물에 두 번 목욕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 때 타이밍이 안 맞으면 소용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다가서면 물러가고, 물러서면 다가오는 겁니다. 야곱은 하나님과 씨름을 했습니다. 당시는 얍복강이라는 공간이 있었지만 지금은 실존적으로 우리에게 덮치는 겁니다.
덮치면서 우리를 겨냥하는 게 있어요. 바람이 왔을 때 우리는 어떻게 압니까? 성령은 영으로 오시기 때문에 반드시 우리가 육이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이유도 원인도 따지지 마세요. 성령이 임하면 무조건 우리가 육인 것이 발각됩니다. 그리고 육이 하는 별별 짓(십일조, 봉사, 기도, 헌금 등등)이 구원에 전혀 보탬이 안 되고, 내가 하는 어떤 짓(살인, 강간, 사기 등등)도 구원에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인을 한다고 해서 지옥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 육이니까. 육은 육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는 것이 이미 확정되어 있어요. 우리가 스스로 육을 만들 수가 없고 바람(성령)이 다가올 때 비로소 우리는 육이라고 규정 받게 됩니다. 성령이 와서 육임을 깨닫게 될 때, “주여, 나의 행함은 다 죄였고 나는 죄인의 괴수입니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이런 고백이 나옵니다.
로마서 3장 20절에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라는 말씀이 있는데, 우리는 비곗덩어리입니다. 사람으로 간주하지 않아요.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너는 영을 위해서 필요한 육체’임을 규정받게 됩니다.
에스라, 느헤미야 공동체는 그들이 율법을 지키는 자가 아니라 율법 앞에 발각당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 그런 단체로 율법의 공동체, 성전의 공동체입니다. 에스라, 느헤미야 공동체가 이렇게 구성된 것은 말씀이 일방적으로 지시해서 몰아넣어서 그렇게 된 것이고, 그렇게 몰아넣은 그 공동체가 주변에 있는 모든 국가를 율법에 준해서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자로 솟구쳐 올라오지요.
지하에 잠복되어 있던 마그마가 때가 되어 솟구쳐 올라오게 되는데, 에스라, 느헤미야가 바로 이런 말씀의 공동체가 되는 겁니다. 에스라, 느헤미야에서는 맛만 본 거지요. 그리고 BC 444년 말라기 선지자가 활동이 끝나고 나면 선지자는 다음 선지자에게 바통을 넘길 그날이 옵니다.
바통을 누구한테 넘기는가? 예수님께 직접 넘깁니다. 그런데 예수님 옆에 붙어있는 사람이 있어요. 누구냐? 세례 요한입니다. 말라기에서 세례 요한에게 바로 바통이 전달되는 것이 아니고 말라기의 바통을 예수님이 받아서 거꾸로 세례 요한에게 넘겨주지요. 그러면 세례 요한은 역사를 ‘말라기 다음에 나다.’ 라고 하지 않고 “내 뒤에 오신 분이 나보다 앞선다.”는 희한한 말을 해요. 이것은 인간의 역사를 마음대로 절단하고 휠 수 있는 그런 새로운 분이 등장하는 겁니다.
신은 없고 신전만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신전에는 신이 없어요. 인간이 만들어 낸 거예요. 이걸 지난 시간에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그림으로 설명했지요. 그림 속의 주인공은 거울이라고 했지요. 거울은 거울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없고 ‘이게 뭐지?’하고 지나가면 그 지나가는 사람의 모습이 거울에 보이는 거예요. 결국 자기를 투사해서 그 투사된 모습을 보는 거지요.
이 세상은 자기가 보고 있는 것을 되받아서 보는 그 세상만 있을 뿐이에요. 사람마다 각자 세상을 보는 것이 다 다르지요. 각자의 거울이 있으니까. 중요한 질문은 그 다음에 있습니다. “이런 거울을 심어놓고 사라진 그분은 누구야?” 거울만 남겨놓고 떠나간 사람은?
인간은 아무리 신을 찾아도 그 신의 모습은 자기 모습입니다. 원숭이 나라의 신은 원숭이 모습, 인간 나라의 신은 인간 모습. 어떤 의미에서 마귀는 머리를 굴릴 줄 모르지요. 인간은 원래 자기를 극대화해서 그것을 신으로 모신다는 것을 간파하여 그걸 상품화 시켜서 사기를 치고 있다는 것을 몰라요. 왜? 기존 교회가 다 그러니까.
거울에 어떤 사람이 슬쩍 지나가요. 그런데 그분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모습으로 지나갔어요. 올 수 없는 하나님이 죄 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오셔서 거울을 비춰보니까 사람들은 그 모습이 보기 싫다고 외면했어요. 자기들이 원하는 모습이 아니라는 거지요. 일그러진 모습으로 와서 “쓴잔을 마시라.” 이런 소리하는 신은 싫은 거지요.
뭘 줘야지 마시기는 뭘 마셔? 그리고 쓴잔은 왜 마셔? 정성 드린 만큼 보상을 주는 그런 신을 원한 것이지 부담을 안겨주는 신은 그들이 기다린 신이 아니지요.
신전에서 인물이 나올 때 여기서 시간이 휘어집니다. 시간이 절단되면서 세 토막으로 나눠집니다. 마태복음 1장 족보를 보면. 나눠지는 그 과정을 이스라엘 백성이 담당해야 됩니다. 신전(건물)이 어떻게 인물로 바뀌는지? 그런데 이 신전은 어떤 신전입니까? 깨어진 신전이고 불타버린 신전이죠.
불타버린 신전이 죄 있는 사람의 목숨이 십자가에 달려 죽는 사형의 모습으로 전환되는 것. 신전 건물은 철거되면서 철거된 그 배후에 등장하는 인물의 일그러진 모습들. 하나님의 모습. 그럴 때 신전 없이 - 신전은 그림자였고, 모형이었습니다. - 이제는 그림자 시대가 끝나고 실체가 드러나는데 이것이 너무 당혹스럽고 경악스러워요. 하나님이 이런 분인 줄 우리는 예전에 미처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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