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취]2013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4강
[녹취]2013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4강
이름 : 서경수(IP:121.176.190.236)
2013 겨울수련회 4강
교회에서 개인적인 감정에 북받쳐서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께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언급했습니다. 이것은 사적인 영역인데, 국가마저 자신을 위한 국가여야 한다는 그 욕망에서 나온 기도이기 때문에 ‘그 나라와 그 의’와는 무관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자기 사는 것이 우선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6장에서는 ‘공중 나는 새를 보라. 들풀을 보라. 주님이 친히 기르신다. 너희들이 입을 것과 마실 것을 구하는데 이것은 이방인이 구하는 것이다. 너희는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모든 국가는 자기의 사적인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주변을 이용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시는 것이지요. 이방인이 아닌 너희들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모든 생명은 주께서 친히 기르신다. 그 전통과 뿌리는 바로 시편 2편에 나오는 기름 부은 자의 나라가 그 면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목사들이 설교를 할 때 개인의 사적인 욕망을 부추기는 것도 문제지만, 개인이 성경을 볼 때 내 소망을 이루려는 마음으로 보는 것도 역시 문제입니다. 그래서 레위기는 건너뛰고 재미없는 구절은 그냥 지나갑니다. 성경은 내가 기대했던 말씀이 아니고,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은 내가 원한 하나님이 아니었으며, 특히 갈라디아서 6장 14절 말씀 -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이렇게 나오면 우리 생각과 격차가 점점 벌어지지요.
우리교회 목사님은 예수 믿고 복 받은 것을 자랑하라고 하는데 성경은 왜 십자가만 자랑한다고 하는지 점점 거리가 멀어집니다. 우리 생각에는 교회에 부자도 많고 학식 있는 자도 많고, 권세 있는 자도 많으면 좋겠는데, 고린도전서 1장에는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라고 했습니다.
왜 성경말씀은 우리 생각과 점점 거리가 먼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 자신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엄마들의 자식 사랑은 지독합니다. 만약 자식이 지옥 간다면 엄마는 자진해서 천국도 포기하고 지옥으로 가서 자식을 돌볼 것 같아요.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가정을 지켜주는 세퍼트(독일 개 이름)용으로 주님을 생각합니다.
이런 오류를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하는 겁니까? 시편 2편의 해답은 마태복음 1장 족보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부러뜨리는(꺾는) 것입니다. 두 군데는 절단 냅니다. 마태복음 1장 족보는 14대, 14대, 14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세 마디가 생겼어요. 그리고 절단면이 두 곳입니다.
흘러가는 시간을 중간에 끊는다는 개념은 독특한 개념입니다. 시간은 흘러가면 없는 거예요. 없는데 뭘 절단합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흘러간 것을 없다고 여기지 않고 미래에 준해서 과거를, 계속 새로운 역사를 창출하는 긴 꼬리로 본 거예요. 지금의 무엇인가를 알려면 과거까지 연결시켜줘야 지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의미를 안다는 겁니다.
교회에 처음 나와서 성경을 읽으라고 해서 처음 읽기 시작한 마태복음 1장은 정말 재미가 없지요.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고, 이렇게 계속 흘러갑니다. 자기 집 족보도 모르는데 남의 집 족보를 알려고 하니 얼마나 짜증이 나겠습니까? 그런데 고지식한 사람은 이 말씀을 외운다고 난리를 칩니다.
마태복음 1장 17절을 보면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 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 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 네 대러라.”
14☓3=42로 해서 총 42대라고 하면 간편할 것인데, 왜 이렇게 14대, 14대, 14대라고 했는가? 42대로 초점을 두지 말라는 겁니다. 중간에 끊어진 점을 주목하라는 것입니다. 끊어지는 시점에 하나님이 역사를 어떤 식으로 사용하는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그동안 이스라엘이 이방나라의 흉내를 내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의 14대는 이방나라와 차별화 되는 이스라엘인데, 솔로몬부터 바벨론이 망할 때까지의 14대는 이방나라를 모방할 수 없는 재료를 가지고 억지로 모방에 나선 거예요. ‘그 나라와 그 의’는 세상 나라로는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억지로 시도하다보니까 세상 나라에 복속되고 종속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희망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이방나라에 포로 잡아 가셨다는 그 사실. 의도적으로 포로 잡히도록 개입하셨던 그분의 작업이 있었는데, 그것이 다윗 언약입니다. 나라는 망해도 하나님의 약속은 살아 있습니다. 씨앗만 있으면 열매를 맺을 수가 있어요. 그 씨앗에 의해서 포로 잡혀 갔단 말이지요.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 잡혀 갔을 때 하나님의 언약도 같이 포로 잡힌 것입니다.
사무엘상 5장 1절을 보겠습니다. “블레셋 사람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가지고 에벤에셀에서부터 아스돗에 이르니라.”
언약궤는 블레셋 사람이 가지고 있을 물건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이나 블레셋 사람이나 다 바보에요. 언약궤, 언약의 상자. 아카시아 나무에 금박을 입힌 그 상자만 있으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이스라엘이 오해한 언약궤를 블레셋이 빼앗아서 자신들의 신당에 두었더니 블레셋에 난리가 났습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이 항상 승리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승리한다는 뜻은 아니에요. 왜냐?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믿는 자신을 믿고 있다는 것을 언약궤가 밝혀냅니다. 십계명을 준 것은 십계명을 지키면 내가 잘 될 것이라는 그 오해를 십계명이 폭로시키는 겁니다.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린 거예요.
영화 [다이하드 3]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 범인들이 폭탄을 장착해 놓았는데 폭파 시간이 임박해서 주인공이 그것을 해체해야 되는데 빨간 선을 끊을지 파란 선을 끊을지 고민을 합니다. 그 때 뉴욕 시경이 빨간 선을 끊으면 된다고 말합니다. 그 소리 듣고는 주인공이 파란 선을 끊어버립니다. 그 결과 성공적으로 폭발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마련한 폭탄은 파란 선이냐, 빨간 선이냐가 아니라 어떤 선을 끊어도 폭파되도록 만들었습니다. 왜냐 하면, 언약궤 자체가 폭파되기 위해서 이 땅에 잠입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의 승리는 다른 것이 아니고 언약궤가 드디어 그 실상을 공개하는 날 이 세상과 더불어 자폭하는 그 날이 이 세상에서 역할을 다 수행한 날입니다.
스데반 집사가 어느 고등학교 졸업했는지 아십니까? 모르지요. 저도 몰라요. 스데반이 돌잔치 할 때 실, 돈, 연필 중에 무엇을 쥐었는지 그것도 모릅니다. 어쨌든 스데반의 부모는 그 아들이 훌륭하게 자라 이 땅에서 승승장구하기를 기대했겠지요. 그런데 스데반 집사가 진짜 스데반 집사다운 모습은 돌에 맞아 죽는 그 순간 그의 잠복된 역할이 다 발휘되었습니다.
스데반의 최후는 마태복음 16장 24절 이하의 말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바로 그 대목입니다.
이 말씀을 어느 누가 지킬 수 있습니까? 학교 졸업장을 받고 나오면 다 꿈과 포부가 있는데 돌에 맞아 죽으려고 학교에서 공부하는 사람 봤습니까? 열심히 기술을 배우면서 이 기술 배워서 돌 맞아 죽겠다고 하는 사람 있습니까? 그런 사람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어떤 말씀도 지키지 못합니다.
그런데 스데반 집사가 그런 길로 간 것은 그가 주의 말씀을 순종해서가 아니라 주께서 스데반 집사를 그런 길로 유도한 거예요. 이처럼 유도하는 직업이 있는데 그게 바로 ‘도선사’입니다. 도선사는 큰 배가 부두에 접안할 때까지 작은 배로 길을 인도하고 자기는 빠져나갑니다.
제가 가락교회에 갈 때 잠실역에 내려 8호선으로 갈아타는데, 그곳 지하 상점을 지나는데 30, 35, 40 이렇게 표기된 상자가 있어요. 저는 이게 무엇인지 궁금해서, 자세히 보니까 여자 구두 크기를 표시해 놓은 거예요. 30(230mm) 사이즈는 따로 모아놓고, 35(235mm) 사이즈 따로 모아놓고 ‘만원’이라고 써 놓았어요.
30, 35, 40으로 표기되어 있어요. 신발을 살 사람은 자기 사이즈에 맞는 상자 앞에 가겠지요. 하나님은 아무에게나 구원받으라고 구걸하시는 분이 아니고 거기에 맞는 사람만 부르도록 앞서서 도선사들을 파견하는 거예요. 지옥 갈 사람은 지옥으로 인도하고, 천국 갈 사람은 천국으로 인도합니다.
스데반 집사가 없었다면 그에게 돌 던지는 사람도 없었겠지요. 돌 던질 만한 설교를 해놓고 자기는 천국으로 가버리고 저쪽은 지옥으로 인도하고. 돌 던진 사람은 딱 35 사이즈에 맞는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남들로 하여금 이 자리가 너의 자리라고 분명히 지정해 주라고 성도들을 보낸 것입니다.
제가 이번에 말하면 3번째 하는 것인데 미안해서 더 말하기 싫지만,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편지하면서 ‘사는 것이 우선인데 그것이 우선이 아닌 사람이 있다니 놀랍구나!’ 그런 말을 했단 말이지요. 인간은 사는 것이 우선이지 그보다 더 우선적인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데살로니가에 믿음으로 살면서 환난 받는 사람이 생기니까 이게 웬 기적이냔 말이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항상 하나님 앞에 우리 죄를 폭로시키는데, 나에게 그런 일을 일으키는 분이 있다면 그분과의 관계성 속에서 살겠다는 것이 성령이 아니고서는 그런 기적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에게 편지를 주고, 35 사이즈가 안 맞으면 빨리 40 사이즈로 바꾸란 말이지요. 이해도 할 수 없는 편지를 쥐고 있지 말고 그 편지 이해할 수 있는 사람에게 주란 말이지요. 편지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있기에 편지를 보낸 것 아닙니까. 사도 바울이 구걸하는 것이 아니고 ‘이 편지 받을 사람 있어요?’라고 묻는 거예요.
라캉은 이런 말을 했어요. “모든 편지는 반드시 수신자가 있기 마련이다.” 편지를 받고 이해할 사람이 없었으면 로마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이런 편지를 쓰지 않았어요. 모든 사람이 거부할 수밖에 없는 이 내용. 그런데 이것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생명의 말씀이다’라고 기쁘게 받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 거란 말이지요. 그 사람을 찾아가는 거예요. 말씀이 알아서 찾아갑니다. 그러기에 듣든지 아니 듣든지 외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도선사입니다.
14대, 14대, 14대. 이런 재미없는 이야기를 끄집어내면서 이 복음을 이해할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주셨기 때문에 이것과 시편 2편의 ‘모든 군왕들이 혈기를 내면서 기름 부은 자를 공격하겠다’는 그러한 속성이 어떤 관계가 있는가?
아브라함에서 다윗 때가되면 언약이 종결됩니다. 다윗에게 언약을 주었지만 이 다윗 언약은 다윗 때에 생긴 것이 아니고 그 이전에 차근차근 다윗 언약을 구성해 온 것입니다. 구성하면서 어떻게 하는가? 도선사를 보내서 계속 길을 이끌어 주셨습니다. 그 사람이 남자가 아니고 여자 2명 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장에 보면 “유다는 다말에게서(3절)”라고 ‘에게서’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리고 5절을 보면 “살몬은 라합에게서”라고 했어요. 두 개의 ‘에게서’로 방향을 다른 쪽으로 돌립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전부 여자입니다. 왜 여자냔 말이지요? 혈통이 남자 중심이기 때문에 혈통이 갖고 있는 본성, 모든 질서는 형통 중심으로 굳어지려는 성향이 있어요.
1절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해놓고, 아브라함이 누구를 낳습니까? 이삭을 낳았지요. 생물학적인 의미의 낳음이 아니에요. 여자는 일종의 부하 직원입니다. 직원들이 서류를 작성한다고 해서 서류에 사인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시한 것은 위에서 지시했고 직원은 지시에 따라 서류를 만들었을 뿐 사인은 윗사람이 합니다.
사인을 하는 사람이 책임자가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다는 말은 이삭을 낳기 위해서 하나님은 책임자로 사라를 준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을 책임자로 세웠고, 그러면 사라는 뭔가? 사라는 독립적인 자기 주체를 하나님 앞에서 인정치 아니하고 아브라함에 속한 여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는 마이너스 남자(-남자)입니다. 남자에게서 나온 여분의 그 무엇이 여자입니다. 마이너스 남자가 여자라는 말은 남자가 자기보다 더 초과적인 일을 할 때는 여자도 한 몫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남자가 일이 없을 때는 여자도 없는데, 남자가 하나님에 의해서 초과적인 일을 할 때는 여자가 동원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없어요. 아브람이죠.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바뀔 때, 제가 할례를 설교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바뀔 때 여기에 무엇이 개입되는가 하면 할례 언약이 개입됩니다. 아브람이라는 육적인 것에 하나님의 약속이 추가되면 아브라함이 된단 말이지요.
골로새서 2장에는 할례를, 예수님이 십자가 질 때 할례의 의미가 충족되지요. 예수님이 십자가를 졌다는 것은 죽음이잖아요. 그러니까 자살하면 안 되고, 하나님이 죽이시는 죽음을 집어넣으니까 사는 존재가 됩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나는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산 자의 하나님이 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 뭐냐?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바꿔 줌으로써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우주에 전개될 수가 있습니다. 우리 없어도 하나님은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필요한 것은, 우리는 예수님의 여자로서 예수님의 마이너스 일을 할 때 우리는 필히 5분 대기조로 투입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종으로 동원되고, 종은 제 할 일을 했을 뿐이지 종이 대접 받을 이유는 없습니다. 아까 주체의 정점은 셈(count)을 할 때라고 했지요. 주체는 항상 없음에서 있음으로 나옵니다. 있음을 셈할 때 나에게 의미가 됩니다. 꽃을 꽃이라고 부를 때 나에게 의미가 됩니다. 꽃이 있어도 내가 그 꽃을 부르지 않으면 나에게 그 꽃은 없는 거예요.
이별 후 가장 슬픈 것은 ‘잊혀 진 사람’이 될 때입니다. 미워하는 사람이 아니고 잊혀 진 사람. 없는 존재지요. 없는 존재를 주체가 부르면서(셈하면서) 비로소 없는 것을 있게 했으니까 나에게는 의미가 향기처럼 다가오는 것입니다.
단막극을 보면 이런 것이 있어요. 어떤 남자가 유치장에 갇혀 있는데, 그 남자를 못 잊어 여자가 찾아갑니다. 남자는 여자가 유치장을 찾아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알고 이런 말을 합니다. “이제 날 찾아오지 마라. 찾아오면 영영 너를 안 본다. 알겠지?” 여자의 대답은 “찾아올 거야”
여자가 이런 말을 할 때는 이미 남자의 마음을 알고 “당신이 남자로서 하는 일에 내가 마이너스 남자로서 당신 일에 동참하겠다.”는 것이지요. 만약 내가 안 찾아오게 되면 그 후에는 그 남자가 주체를 발휘할 수 없잖아요. 아무도 안 찾아오면 허공에게 “다시는 찾아오지 마라.”이렇게 할 수는 없잖아요.
예수님이 성령을 보내셨는데, 그 성령을 사랑의 영이라고 합니다. 무서운 말이에요. ‘사랑의 영’을 좋게 여기면 안 됩니다. 사랑의 영이란 것은 네가 할 일을 빼앗아 버리겠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먼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지 않는 관심사를 빼앗아 어떤 일을 하든지 주의 일을 하도록 돌리겠다는 것입니다.
제가 칼빈 이야기하면서 한 가지 빠뜨린 게 있어요. 성직자만이 소명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하는 일이 다 소명이라고 했는데, 사람이 하는 일이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주체사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칼빈은 몰랐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만 붙이면 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줄 알고 칼빈은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회유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일을 통해서 그것이 제거되어야 할 일인데, 고집을 부리면서 그 일을 하고 있구나, 그러나 다 제거된다 할지라도, 백수가 되어도 우리는 역시 자기가 주체인 것을 확인하고 싶은 그런 일에만 몰두할 수밖에 없는 우리인 것을 주님이 알게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과거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언급을 하는 것입니다.
방향을 바꾸는데 여자가 개입이 됩니다. 개입 되면서 남자 계열로 역사를 굳히려 하는 남자들이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합니다. 그 중 하나가 3절에 나오는데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유다와 다말의 관계는 부부사이가 아니고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니까 별 거부감이 없는데, 이런 이야기로 조선왕조실록에 나온다고 생각해 봅시다. “세종대왕은 자기 며느리와 관계해서 누구를 낳았다.”고 한다면 이게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후대 학자들이 이런 내용을 발견했다면 이런 부끄러운 기록은 제거했을 거예요.
영웅은 영웅으로 남아야지 영웅의 수치스런 이야기는 불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족보는 과거에서 의미가 내려오는 것이 아니고 저 위에서(미래에서) 적절하게 당겨주는 역사이기 때문에 새로운 노선에 대해서 점수를 주는 거예요. 다말이 개입되지 않고 너의 족보로 계속 갔더라면 너희는 지옥에 쳐 박혀 있다는 것입니다.
미래가 와서 현재의 우리 앞길을 ‘그 나라 의’쪽으로 인도하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사랑의 영)이 그렇게 하십니다. 성령은 십자가 질 때만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십자가 지지 않는 성령은 가짜입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소유하라고 주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끌고 가기 위해서 준 것입니다.
성령이 와서 가만히 있는 경우는 없어요. 우리를 끌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도록 잡아당깁니다. 에베소서 2장 6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성령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땅의 것에 관심을 기울이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은 생각지 말라(골3:2).”고 하시면서, 성령께서 도선사가 되어서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미래로 통하는 길을 모릅니다. 누가 와서 안내해주지 않으면 우리는 캄캄합니다. 10년 안내 받았는데 그 이후 안내하시는 분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가? 지옥 가야 합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말합니다. ‘10년 동안 안내 받았으면 그 다음에도 오게 되어 있다. 믿으라.’
우리가 기껏 안내 받아도 90년 정도입니다. 천년, 만년 안내 받는 것이 아닙니다. 90년 살다가 주와 함께 있으면 그 때는 안내원이 필요 없습니다. 살아 있을 동안에 안내 받기 때문에 방향을 위로 바라보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땅의 것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어렵고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왜? 이 세상 욕망의 맛을 들였기 때문에 그 달콤한 맛을 우리가 잊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수시로 생각합니다. 내가 예수 믿는 것이 스스로 착각에 빠진 것은 아닌가? 안 믿어도 되는데 괜히 분위기에 휩쓸려, 없는 예수를 있는 것처럼 착각해서 믿는다고 스스로 최면을 거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것도 성령께서 이런 생각을 갖도록 하십니다.
‘그래, 내가 착각을 했어. 선택 과목인데 필수 과목으로 착각을 했다. 사는 일이 급하지 믿는 것이 급한 것이 아니야.’ 이런 생각이 들거든 접어세요. 접어보면 당장은 편한데, 그렇게 살다가 죽으면 어디에 가지? 아무리 세상에서 쾌락을 누리고 권세를 가졌다 해도 결국은 죽는데, 죽으면 과거의 권세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를 뜯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월이 가면 갈수록 자꾸 뜯겨나갑니다. 몸이 점점 무너지고 붕괴합니다. 전도서 12장에 나오지요. 허리도 구부러지고, 이(맷돌질)도 시원찮고, 눈(창)도 침침하고, 이 모든 것이 해체 과정에 있단 말이지요. 순서표만 쥐고 순서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태어날 때 왜 태어났는지 모르는 것처럼 해체 과정에서 누가 날 이렇게 만드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성경 말씀을)믿지 않으려고 하니까 대책이 없어요. 그 때 우리는 다시 한 번 죽음이란 것과 접속하게 됩니다. 인간에게 접속(마주침)이 제일 중요합니다. 영화 [접속]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 한석규와 전도연이 극장 앞에서 접속 될까, 말까 하다가 접속되고 영화가 끝나지요. 접속하지 않았으면 영화가 안 되지요.
그 영화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모든 것이 우연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자꾸 이성적으로 따지지만 되어가는 일은 따져서 되는 일이 아니고 우리의 만남은 전부 우연이에요. 필연을 가장한 우연이에요. 그 우연한 만남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우연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서 여자가 등장하는 족보, 이것은 유다가 주도권을 쥘 수 없고 여자가 개입되어 이제부터 족보의 주도권은 방향을 바꾸어서 다말에게 주도권이 있다고 해서 다말을 집어넣습니다. 이 주도권 우위가 어디에서 끝나는가 하면 16절입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여기에서 (마리아가)나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알아서 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 “마리아에게서” 났으니까 뭐가 없습니까? 남자가 없는 상태에서 태어났습니다. 여기에서 세상 족보와 차이가 나는데, 세상 족보는 남자가 주도권을 쥐고 가는데 특이하게도 다윗 언약의 나라에서는 여자가 주도권을 쥐게 됨으로 말미암아 남자의 주도권을 주장하는 세상 나라에게 마음껏 공격받고, 허물어지고, 부서지기를 허용하는 겁니다.
‘내가 남자인데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는가?’ 이런 주장 하다가는 세상 나라에게 실컷 얻어맞는 거예요. 그런데 여자에게서 난 여자의 후손이 나를 살렸다는 것을 미리 안다면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내 노력으로 얻었다는 것을 떼 내는 작업을 하시는 겁니다.
어떤 식당은 특별한 서비스를 해줘요. 고기 집을 나서는데 갑자기 뭔가를 막 뿌려줘요. 알고 보니 냄새 제거하는 [페브리즈]를 뿌려줘요. 기분이 좋았지요. 그래서 우리 동네 식당에도 그런 서비스를 하는가 싶어서 식당 문을 나서도 그런 서비스가 없어요.
주님은 자기 것을 보존하기 위해서 귀하지도 않은데 귀한 척하고 들어붙어 있는 것들을 떼 내는 작업을 하십니다. 이것저것 다 떼 냅니다. 우리는 그것을 아까워하고 내 주체라고 여겼던 많은 것들을 이것저것 다 떼 내면 말갛게 남는 것은 뭐냐? 여자의 후손 때문에 하나님의 그 나라와 의가 이미 우리 안에 장착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먼지 떨어주시는데 그것도 모르고 “하나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왜 하필 접니까?”하고 대들지요.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대들었습니까? 사무엘 상,하를 보세요. 주께서 허물어버리는 그 다윗 왕국을 압살롬이 아들의 권한으로 그 나라를 상속받을 수 있는 것처럼 오해를 했지요.
세습이 가능하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혈통 중심이죠. 혈통 중심이면 이것이 역사가 됩니다. 이미 혈통이 있는 한 하나님은 이 역사를 인정한다는 생각이죠. 그러면 이런 나라가 다윗 언약의 나라와 부합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부합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정점에서 6절을 보면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아내는 여인이잖아요. 여인 앞에 남자의 이름이 2명 나왔어요. 다윗과 우리야입니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어요. 복잡합니다.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이 낳기에 솔로몬은 우리야의 자식이 됩니다. 그런데 그 앞에 ‘다윗은’이라는 말이 있어요. 그러면 솔로몬의 아버지는 다윗입니까, 우리야입니까?
이 다윗에게 언약적 개입에 의해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데, 죽은 우리야를 대신해서 다윗의 아내가 밧세바가 아니고 우리야의 아내의 남편이 다윗이 되는 새로운 왕국이 건설되는 겁니다. 혈통 중심에서 죽은 자 중심으로 바뀝니다. 죽은 자가 없는데서 만들어내는 새로운 주체.
주체라는 것은 없는 것을 있게 셈한다고 했지요. 다윗 속에 언약을 완성할 숨은 주체가 있었고, 그 숨어있는 주체가 에스라, 느헤미야로 하여금 지금 나라를 만들게 하는 거예요. 숨어있는 주체, 보이지 않는 시선. 지금 예수님이 안 보여요. 하지만 그 나라와 의는 존재합니다. 어떻게? 보이는 것을 떨어버리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다윗은 우리야가 죽을 때, 이 세상에서는 죽었지만 하늘나라에서는 살고 있거든요. 우리야가 죽음으로써 다윗이 죽은 자가 되어버려요. 다윗의 혈통이 죽지 아니하면 다윗은 구원받을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다윗 대신 우리야가 죽었지요. 누가 우리야를 밀쳤습니까?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으로 다윗이 우리야를 죽였잖아요.
사람이 만든 드라마였다면 다윗이 신하 장군 우리야를 죽이려 할 때 극적으로 그를 죽음에서 살려 하나님께서 우리야를 지켜 주셨다고 이야기를 전개 시킬 것인데,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대로 차근차근 일을 진행하시는데 우리야의 죽음이 문제가 아니라 다윗을 살려내는데 초점을 맞춥니다.
왜냐? 언약에 접속된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해야 될 그런 언약적 작용이 벌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내 죄를 폭로할 수 있는 상대의 만남을 성령께서 주선해 주십니다. 여자들에게는 자식이 그런 존재입니다. 우리 자식이 내가 예수 믿지 않는다는 것을 폭로케 하는 역할을 합니다.
자식을 낳기 전까지는 예수 잘 믿는다고 여겼는데 자식을 낳고 보니 예수님보다 자식이 더 소중해. 그 자식이 공부도 못하고 멍청한 것 같으면 “너도 죽고 나도 죽자.” 이렇게 나오지만, 자식이 공부도 잘하고 똑똑하면 그 자식이 얼마나 소중하겠어요?
하나님은 우리를 건지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쓰는지 언약적 원칙을 적용시키는데, 죽어도 사흘 만에 다시 산다는 예수님의 십자가 효과를 우리에게 적용시킵니다. 그러면 우리는 죽어도 다시 살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을 수 있는 능력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왜냐? 인간은 자기 동률성에 의해서, 나는 나만 믿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믿음이 여기에 추가되면서 그 믿음의 내용도 같이 추가돼요. “너와 같은 인간을 위해 내가 죽었다.”는 어린양의 모습으로 세상 죄 문제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어떤 착한 일을 해도 그것이 죄라는 것을 발각 당하게 됩니다.
우리는 자기 의를 도모하는 그런 집단을 안전한 나의 나라로 여기면서 그곳에서 빠져나갈 생각을 안 하고 눌러 살려고 합니다. 이런 우리를 강제적으로 찾아와서 의를 깨닫게 하는데 그것은 오직 십자가의 영이 옴으로써 그것을 발견케 합니다. 인간은 자기 눈이 감겨있기에 어떤 것도 볼 수 없습니다.
이제 언약 속에 작용하는 하나님의 주체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주체란 없는 것을 있게 하는 셈하는 식으로 오게 됩니다. 그러면 무엇과 충돌되는가? 나는 내 주체를 위해서 주변을 셈하는데, 우리가 주변을 셈할 때 나는 누구를 믿고, 누구를 믿지 않고 하는 결정 속에 하나님도 끌어들였습니다.
이렇게 내 말을 잘 듣는 하나님으로, 기도하고 십일조라는 사료를 주면 먹고 고맙다고 하는 하나님이 도리어 우리의 그런 주체를 죄라고 발각시키는 작업을 하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갑자기 장님이 되어버리죠. 내가 눈 돌릴 데가 없습니다. 내가 눈을 돌리게 되면 예수님을 잊어버리니까.
17세기 스페인의 궁정화가 벨라스케스라는 사람이 ‘시녀들’이라는 제목의 그림을 그렸어요. 그 그림을 보면 켄버스가 있고, 앞에 화가가 서 있고, 옆에 시녀들과 난장이가 있는데 여기 거울이 하나 있어요. 거울에 왕과 왕비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와 켄버스는 있는데 정작 모델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림 그릴 모델은 사라졌지요?
이게 뭐냐 하면, 주체 없음. 사람이 무엇을 볼 때, 이 세상에는 거울이 준비되어 있고 이 거울은 유리로 되어 있어서 자체적인 그림은 없어요. 거울의 모든 표면적인 영상은 내가 거울을 보게 되면 어떻게 돼요? 거울에 내 모습이 보이지요. 비어 있는 거울을 뭐로 채워야 됩니까? 내가 ‘거울 어디 있어요?’ 하고 얼굴을 내밀면 내 모습만 거울에 보이지요. 내 모습만 되비쳐 보이는 거예요.
인간의 주체란 결국 주체가 만든 환상 속에 주체를 난사하면서, 난사된 빛만 우리는 그냥 수용하며 오늘도 내일도 내 주체를 구성할 뿐입니다. 주체 속에 인간은 갇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시녀들’이란 그림이 고발한 것입니다. 그러면 주체 밖은? 없어요. 하나님도, 예수도, 교회도 전부 이 안에 있어요. 다 내가 만든 환상의 세계 속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만들어 가실 때, 이런 역사를 만들어 가는 주체의 하나님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했는가? 이 세상은 인간들의 자기 난사로 형성된 혼란의 세계, 진리가 없으니까 자기가 마음대로 진리라고 우기는 그런 세계인데, 거울을 통해 그런 세계를 보게 하신 이유는 인간을 가둬놓은 다른 세력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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