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녹취]2013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2강자유게시판[수련회]

[녹취]2013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2강

이름 : 한윤범(IP:14.39.134.60)

2013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2강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에 제가 언급한 것은,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나라, 일단 그 나라에 대해서 이스라엘이 부러워했고 그쪽 나라와 같이 되기 위해서 그쪽 나라의 종교를 굉장히 신봉할 수밖에 없었고 정말 이방신을 섬겨도 나라만 크게 잘 되면 그것이 하나님의 복이라고 여기고 싶은 심보가 결국 이스라엘로 하여금 스스로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원수의 백성으로 자초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비록 껍데기는 여호와를 섬겨도 사실은 마음은 딴 데 가 있는 거예요. 우리도 바알 섬겨서 저 나라처럼 될 수 있다는 쪽으로 간 거예요. 바알신의 특징은 요새 말로 CEO 같은 거예요. 신도 기능별로 있어서 그냥 노는 회장님 격의 신이 있는 반면에 실제적으로 일을 다 처리하는 그런 CEO, 기업형 사장님이죠. 이게 바알신입니다. 회장님급에 속한 신은 마르둑신입니다. 아까 아라랏 산 이쪽 나라에서 대유행했던 신이 바로 이 바알신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이 바알신을 섬기는 이유는 이게 기업형이면서도 계급을 갖고 있는 신이 돼요. 계급의 질서를 정립할 수 있는 그런 것을 요청하는 신이 되는 겁니다.

사람들이 왜 이런 신을 좋아했느냐 하면, 그 당시 지도자급들이 좋아하죠. 밑에서는 안 좋아하고. 왜 왕들이 이런 신을 좋아했느냐 하면, 하늘과 밑에는 땅이 있는데 동양이나 서양이나 마찬가지에요. 인간이 이 땅에서 하늘의 뜻을 펼칠 때 하늘의 뜻과 일치 된다는 이유 때문에 복을 받는다고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 그렇다면 바알신의 특징은 하늘의 질서가 있는데 그 질서를 그대로 베껴서 지상에 위계질서를 세우게 되면 하늘과 지상에 인간의 뜻 사이에 어떤 마찰도, 충돌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 시대를 유럽에서는 봉건사회라고 하거든요. 철저하게 계급화 되어 있으면서도 내가 허드렛일을 하는 것도 하늘이 내려주신 질서다. 이걸 내가 거역하면 하늘에 계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벌을 내리신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서양 16세기,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이후에 나온 기독교강요에서 캘빈의 주장에 의하면 지상의 계급도 하나님이 주신 소명일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제시했습니다.

교회 성직자만 소명이 아니고 사람들이 각자 자기가 하는 그 일도 신이 주신 소명이기 때문에, 신이 주신 소명이라는 규정은 무엇을 염두에 두고 하느냐 하면, 사람들이 교회 와서 성직자에게 무릎을 꿇을 때만 영광이 되는 게 아니고, 그 당시 천주교 자체가 종교국가 아닙니까. 그러니까 교회 내의 위계질서는 신의 질서를 그대로 베꼈다고 보고 있습니다. 아시죠? 신부들이 예배드릴 때와 공 찰 때, 골프 칠 때 복장이 다르잖아요. 신부들의 걸치는 게 많잖아요.

걸치는 모양새는 어디서 베껴온 겁니까? 구약성경에서 온 거예요. 그들의 핑계는 그렇습니다. 일반 사람들이 문자를 해독 못하기 때문에 문자를 해독하기 위해서 스테인드글라스에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로가 구약성경 내려가듯이 이제는 몸에다 구약성경을 그려 넣는 거예요.

그러면 그걸로 사람들이 또 무식해. 그러면 연극을 보여줄 필요가 있어요. 그러면 옛날 아론 제사장이 향불 들고 설치면 밑으로 꺼지는 연기는 없잖아요. 위로 올라가잖아요. 위로 올라가게 되면 위에 올라가는 그것을 마치 자기 정성의 가현체로 이미지 주입을 하는 거예요. 올라간다, 올라간다 하면 내 마음도 올라간다. 거기다 헌금 바치면 헌금에다 분위기 깔아주면 내 헌금도 하나님의 보좌에 올라간다. 내일쯤 되면 가시적인 성과가, 반대급부가 있겠지.

그런 식으로 할 때 그러한 쇼가 벌어지는 이벤트가 벌어지는 그 공간과 그 시간대는 구약에서 말하는 안식일 때가 적당하고 구약에서 말하는 거룩한 성전이란 장소가 거룩한 거예요. 시간적인 거룩과 공간적인 거룩을 눈에 보이도록 해줌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일상의 생활에서 벗어나서 그 날만큼은 정화수 떠놓는 마음으로 하루를 온전히 주께 바치는 거예요. 주께 온전히 바쳐놓고 일주일 따낼 복을 얻는 거예요. 얼마나 신부들이 대중들을 위해서 즐겁게 봉사를 하겠어요.

그런데 캘빈이 등장해서 신부한데 가지 말고 네가 만인제사장인데 왜 신부한데 가느냐고 했어요. 인기 짱이에요. 이건 강남스타일 이전에 최고의 히트 상품입니다. 지금 계산한다면 조회수가 20억 될 걸. 신부만이 소명 받았기 때문에 일상 모든 것이 신부의 손을 거쳐야 거룩으로 전환되거든요. 왜? 구약의 제사장이니까. 그것도 모르는 것은 무식한 구약도 모르는 인간이라고 매도당하기 십상이란 말이죠. 적어도 교회를 다니고 영세를 받고 세례를 받았으면 구약이 어떤 것이란 걸 알아야 된다 말이죠. 그걸 모르면 짐승 취급 받거든요. 구약이란 제사장 섬겨서 하늘의 복을 따내고 천국에 가는 그거잖아요.

그런데 캘빈은 루터한테 배워서 말하기를 성직자만 거룩한 것이 아니고 여러분도 거룩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손들고, “그렇다면 캘빈 선생이여, 질문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배를 추구하는 그런 직업이 아닌데 이 더러운 직업도 신부를 통해서 목사를 통해서 정화되어서 비로소 거룩으로 인정받을 것 아닙니까?” 분명히 질문했을 거예요. 캘빈은 말합니다. 이거는 여러분이 어떤 직업, 개망나니 하든, 백정을 하든 관계없습니다. 다만 그 직업을 통해서 여러분들의 잘못을 깨닫거든 모일 때마다 떡을 떼서 목사가 주는 떡 하나 먹으면 그것은 회개가 됩니다.

가만히 이야기 들어보니 신부가 하는 일이 뭔가 간소화되면서 어디로 계속 이어져있습니까? 목사로 이어졌을 뿐이고 전혀 완전히 탈피했다는 느낌이 안 들지요. 간판만 천주교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로 바뀌었을 뿐이지 맨 성만찬 주관하는 것은 사찰집사가 못 하잖아요. 전도사 아줌마가 못하죠. 심지어 전도사도 못해요. 성만찬 할 때는 이웃 목사를 초빙해서 나중에 갈 때는 봉투를 줘야 돼요. 예의상. 요새는 일년에 두 번 하거든요. 그러니까 미리 회개하면 안 돼. 바보야. 차곡차곡 죄 쌓아놓았다가 성만찬 할 때 한꺼번에 다 풀어야 돼. 그런 요령이 필요해. 그러니 바뀌자 해놓고 달라진 게 없지요.

앗수르 나라가 너무 잘 사니까 잘 사는 게 진리고 잘 사는 게 성공이잖아요. 세상에서. 제가 의존교회에서 강의할 때 했잖아요.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사는 게 우선이 아니었다고. 그런 말 던져놓고 내가 물었어요. 사는 게 우선이지 사는 게 우선이 아니라니 뭐가 우선입니까? 말 같지 않은 소리. 사는 게 우선이잖아요. 다 밥 먹고 살자는 짓 아닙니까. 사는 게 기본이고 살고 여유 있으면 교회 나가잖아요. 사는 게 우선이지 뭐가 우선인데. 그러니까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희한한 인간이란 말이죠. 그야말로 에스라, 느헤미야는 숨어있는 나라에요.

다시 정리할게요. 이스라엘은 망했다. 왜 망했느냐? 기존 나라가 부러워서 망했다. 얼마나 부러웠는지 그들의 종교까지 수입해서 껍데기는 여호와인데 알맹이는 뭐냐? 바알종교를 수입해서 한 거예요. 그 체제와 그 절차를 그대로 한 겁니다. 이런 식으로 했더니만 간증과 간증의 연쇄 고리죠. 이런 식으로 하면 어떤 사람이 복 받는다고 하더라. 그러면 그 교회에서는 그게 진리가 되는 거예요.

왜? 성공이 진리고, 소유가 진리기 때문에 그래요. 가진 게 진리가 되기 때문에. 많이 가지면 축복을 많이 받은 사람이고 적게 가지면 축복을 못 받은 사람이고 뭔가 인생이 꼬인 사람이고 뭔가 풀어야 될 필요성이 있는 사람이란 말이죠. 안 풀리면 꼬여서 집구석이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컨디션을 먹든지 먹어서 속을 풀어줘야 돼요. 그래야 그 다음부터 무슨 일을 해도 만사형통이 되서 잘 풀리는 집이라 해서 휴지도 그런 게 있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교회 오는 것은 앗수르 나라처럼, 바벨론 나라처럼 우리도 잘 풀리는 집, 뭘 해도 잘 풀리는 집. 그런 나라가 이스라엘이 되지도 못하고 되려고 시도하다 망한 나라에요. 이스라엘 나라가. 따라서 기존의 나라를 답습한다는 것은 에스라, 느헤미야에게는 있을 수 없습니다.

에스라, 느헤미야는 분명히 총독입니다. 자기 위에 고레스 왕이 있었고 그 나라는 페르시아 왕입니다. 에스라, 느헤미야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하나님께서 왜 바벨론이나 페르시아 나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멸망케 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이중으로 돼있다는 거예요. 슬슬 어려워진다.

이스라엘이 이중으로 돼있다는 겁니다. 어떻게 이중으로 돼 있느냐 하면, [전체를 갖고 있어도 부분보다 적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부분이 전체를 이긴다. 지금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큰 것, 더 큰 앗수르가 북쪽 이스라엘을 멸망하고 바벨론이 남쪽 유다나라를 멸망하게 되면 앗수르와 바벨론이 이스라엘보다 크지요. 큰 것을 선망하기 때문에 큰 것한테 먹히게 한 거예요. 이스라엘 생각은 큰 것이 작은 것보다 항상 위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앗수르나 바벨론보다 더 커야 된다고 생각을 하게 된다면, 이것은 진정 이스라엘을 놓친 게 돼요. 하나님께서는 큰 것에 잡아먹히면서 잡아먹힌 작은 부분이 오히려 큰 것보다 더 크다는 새로운 원리를 가동하기 시작합니다. 잡아먹었다고 생각한 것이 도리어 삼킴을 당하는 방식으로 이스라엘을 구성합니다.

그 원리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신약성경 348페이지, 디도서 1장 12절, “그레데인 중에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장이라 하니” 에피메니데스라는 철학자가 한 말입니다. 그레데 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라고 했어요.

에피메니데스가 그레데 사람입니다. 자기가 한 말은 거짓말일까요, 참 말일까요? 자기가 한 말이 거짓말이 된다면 결국은 거짓말이 모여서 참 말이 되는 거예요. 이것은 아까 이야기한 배중률에 어긋납니다. 참 된 것은 참되고 거짓 것은 거짓돼야 되는데 이것은 거짓말이 참 말이 되니까 사람들은 참 진리에 대해서 난감해 할 수밖에 없고 사람은 진리를 확보하지 아니하면 살 이유도 모르게 돼요.

그 점을 이야기할게요. 사람이 참과 거짓을 구분하는 이유는, 이렇게 구분하는 본인이 항상 참되다는 존재를 그런 식으로 자꾸 이런 일을 통해서 보장받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내가 참되기는 참 돼. 그런데 참되다는 것을 뭔가 증명해야 되는데 그렇지. 참됨은 참되고 거짓됨을 거짓되다고 이야기함으로써 나는 참되면 나는 이 세상에 살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런 마음으로 사람은 살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참될 경우에는 하늘과 땅 사이에 인간은 하늘이 도와주고 땅에서 받쳐주기 때문에 반드시 재물이 늘어나고 부귀가 늘어나겠지요. 그러면 앗수르가 우리나라보다 잘 산다. 바벨론이 잘 산다. 그럴 경우에는 만약 바벨론, 앗수르 없을 경우에는 그래 나는 참되다고 버틸 수 있는데 갑자기 주변에 나보다 잘 살고 풍부한 나라가 와버리면 그쪽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눌리잖아요.

눌린다 함은 그쪽은 나도 참되지만 더 참되고 나도 진리지만 더 진리기 때문에 잘 먹고 잘 사는 나라일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내가 지금보다 더욱더 참되기 위해서는 그들이 믿는 하나님, 그들이 섬기는 방식을 받아들여야 돼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안 보이고 단지 눈에 띠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들만 각양각색이기 때문에 어느 방식을 채택하느냐에 따라서 축복받을 가능성이 농후한 방식을 인간은 채택하게 돼있습니다.

교회란 간증집회로 부흥하는 거예요. “여러분, 이런 방법 있고, 저런 방법 있는데 이 방법 쓰면 부자 되고, 이 방법 쓰면 쫄닥 망합니다. 어느 방법을 쓰겠습니까?” 이 이야기가 목사의 주된 설교의 테마에요. 왜? 교인들이 그걸 듣기 위해 오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온 게 아니고 자기 잘 되기 위해서 오거든요. 교회 오는 것도 일종의 노동이에요. 노동은 반드시 대가 없는 노동은 미쳤습니까? 죽 쒀서 개 줍니까? 죽 쒀서 개 안 주려면 분명히 교회 나오기 힘든 시간 바치고 돈 바치고 하려면 30배, 60배, 100배라는 뭔가 보장이 될 때 재미가 나서라도 갈 것 아니냐 말이죠.

예수님은 말했습니다. “적은 무리여 두려워하지 말라. 하늘나라가 너희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런 언질을 했을까요? 또 예수님은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주변에 이리와 뱀들을 많이 만날 것이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라. 그들이 너희를 체포할 것인데 그때 이야기하는 것은 네가 아니고 네 안에 성령이니라.” 남들 보기에는 우리는 숫자가 세 명이고 저쪽은 백 명이라면 분명히 백 명은 전체고 세 명은 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세 명 속에 있는 성령은 백 명보다 더 큰 거예요.

방향을 봅시다. 이스라엘은 앗수르 나라를 부러워했습니다. 그래서 유다나라 아하스는 앗수르에서 수입했어요. 방향성이 그냥 육적이고 세상적인 것을 지향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큰 것을 지향하는 사람에게 큰 걸 주는 게 너는 네 속에 있는 것이 저쪽보다 더 큰 것을 왜 자꾸 깔고 뭉개느냐는 이야기에요. 어린양의 피는 앗수르 제국에 없어요. 어린양의 피는 바벨론에 없습니다. 에스라, 느헤미야는 이걸 간파한 거예요.

여기도 에스라, 느헤미야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고 스룹바벨이 등장하지요. 예수아 등장하지요. 학개, 스가랴. 학개, 스가랴는 직접 나서지는 않아요. 직접 나서지는 않지만 스룹바벨을 통해서 성전을 짓고 재건하는 의미를 선지자를 통해서 준 거예요. 보통 그전에는 선지자가 나서서 일했잖아요. 그러나 평가위원으로서 학개, 스가랴입니다. 지금 니들이 하는 일은 이런 의미로서 장차오실 묵시적인 메시아와 연결돼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바로 학개와 스가랴입니다.

네가 오히려 큰 것을 가다가 방향이 큰 것, 좋은 것, 잘 사는 것, 방향이 이쪽으로 가다가 방향이 어디로 바뀝니까? 오히려 우리 속에 있는 성전으로 바뀌죠. 성전에 어린양이 있으니까. 성전으로 바뀌면 방향이 이쪽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성전을 위한 일에 하나의 심부름꾼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러면 고레스 왕은 뭐가 돼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종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내 종 고레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로마서 13장에 보면, 세상 권력자들을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이 부리시는 종이죠. 종님을 섬기면 안 돼요. 정작 섬기는 것은 내 안에 세상보다 더 크신 성령, 그 성령을 주신 예수님을 섬기기 위해서 그들이 교통정리도 해주고 필요한 조치들을 해주시는 겁니다. 이렇게 좋은 수련장도 마련해주면서. 누가? 바벨론이. 신용협동조합이 해주셔서 우리는 그냥 고맙다고 할 뿐이지 잘 보일 필요는 전혀 없는 겁니다. 방향성이 문제입니다. 지향성이 문제고 방향이 반대로 바뀌어야 돼요.

하나님의 종들의 특징을 보게 되면, 자기를 잊는다는 겁니다. 옛날에 제가 젊을 때 밤중에 하는 라디오 프로그램 중에 [밤을 잊는 그대에게] “이종환입니다.” 하고 나오는 게 있어요. 저와 여러분들은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게 돼요. 그런데 이 성경이 언제 끝나느냐 하면, 자기 자신이, “정신 차려야지!” 이렇게 될 때는 드디어 하나님의 일은 중지가 되는 겁니다.

교회 봉사할 때 언제 봉사가 끝나느냐 하면 지가 쪼다가 아닌가 하고 생각할 때 집사님, 수고하십니다. 해놓고 어슬렁거리면서 “아이고. 쪼다야 너 혼자 일해라.” 이런 식으로 뭔가 이용당한다는 생각이 들 때 그것도 불현듯 들 때 “미쳤나. 내가 봉사하게.” 하고 안 합니다. 자기를 잊으면 종이 되는데 자기를 잊지 않으면 자기가 주인이 되는 거예요. 정신 차리면 주인 되고 정신없으면 종 돼요. 그래서 정신을 못 차린 상태를 취한 상태라 하고 에베소서 5장에 보면, 너는 술에 취하지 말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성령에 취하라. 술에 취하면 개 됩니다. 성령에 취하면 천사가 돼요.

그래서 사도 요한이 천사한테 절하니까 천사가 나에게 절하지 말라하죠. 그리고 사도 바울 일행이 병고치고 하니까 사람들이 주님의 사자라고 절하니까 “저한테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제가 당신을 구원한 게 아닙니다.”라고 한 거예요. 그래서 유효기간은 뭐냐? 자기를 잊을 때까지만 유효기간입니다. 주의 일의 봉사가. 그래서 누가 봉사할 때 항상 아슬아슬해요. 언제까지 가겠노?

그래서 사람들이 자기를 잊지 않은 상태에서 봉사해버리면 그 다음에 뭘 노리느냐 하면, 감화, 감동에 스스로 자기를 구심체라고 자부하게 됩니다. “내가 봉사하는 것 봤지? 나를 본받아서 봉사 안 하면 너희들 죽어?” 그러면 봉사하는 게 아니고 작업 거는 게 돼요. “슬슬 이 교회는 내가 접수했지. 나 아니면 이 교회는 안 되는 거야. 이제는 내 말 무조건 따라.” 그렇게 되면 자기희생적인 행동이 하나의 계기가 되어서 주변에 감동, 감화되면 나처럼 되면 이 교회는 다같이 희생 될 거라고 그렇게 하는데 그런 것은 사기꾼들이나 하고 우리교회는 택도 없어요. 우리교회 교인들이 도사인데. 이것 간파 다하고 있습니다. 우리교회 교인들은 봉사해서 고맙네. 싫어. 하지 마.

에스라, 느헤미야에서 가장 난해한 부분은 스룹바벨이 총독이지만 그 다음 총독이 느헤미야에요. 느헤미야는 총독이면서도 월급을 안 받았어요. 삯도 받지 않고 일했습니다. 산발랏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뭐하는 사람이냐 하면, 그리심 산에 성전을 세워서 너희들은 예루살렘에 성전 세울 때 우리는 그리심 산에 성전 세우겠다고 버틴 사람이에요. 이 사람이 그렇게 에스라, 느헤미야를 공격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사마리아 여인이 뭐라고 합니까? “우리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 산에서 예배드리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드리는데 어느 쪽에서 할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둘 다 아니라고 했지요. 둘 다 아니라고 한 것은 너는 예배드렸느냐, 안 드렸느냐 상관없이 그런 식으로 할 시기는 내가 온 이상 끝났다. 언제 드리느냐, 어느 장소에서 드리느냐, 어떻게 드리느냐? 이 삼종 세트 그것은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는 의미 없는 질문입니다.

질문할 때 “언제 드리면 됩니까, 뭘 얼마나 바치면 됩니까, 무슨 봉사를 하면 됩니까?” 하고 묻지 말고 누구십니까? 사울 예수님 만나고 했던 그 질문, “주여 누구십니까?” 그 다음에 답변이 뭡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그걸로 충분한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속에는 나는 예수님을 핍박하는 당사자라는 것이 계속 유지만 된다면 자기를 잊은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이에요.

나는 나를 믿고 나는 내 믿음 밖에 뛰어나간 적이 없고 아무리 하나님을 섬겨도 섬기는 그 자리에 주목되는 인물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내가 오히려 나한테 가장 크게 다가오는 예쁘장한 브라우니, 개 같은 존재, 가장 예쁜 존재는 무릎 꿇고 멋있게 경배하는 내가 나의 경배의 대상이 되는 거예요. 그런 자아를 날마다 되풀이해서 이걸 회개라 하는데요. 되풀이해서 그렇게 반복시키는 능력은 오직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전에 요한복음 21장을 제가 언급할 때도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찾아와서 내 양을 먹이라 할 때 그냥 양을 먹이라 하지 않고 베드로한테 물음을 재촉하죠.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할 때 베드로가 지가 사랑한다고 염치없어서 하지 못해요. 사랑한다 해놓고 배반했기 때문에. 그래서 바톤을 넘기죠. 누구한테? 내가 사랑한다고 하지 않고, “주께서 아십니다.” 한 거예요. 그걸로 이야기 끝난 게 아니고 바톤을 주께 넘길 때에 주님께서 그 바톤을 잡으시고 그렇다면 내 양을 섬기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주님을 배반한 입장에서 양을 줬을 때는 결국 그 양은 자기 양이 되고 싶어도 될 수 없죠. 왜? 오히려 양아 나한테 배워라. 나는 이렇게 예수님을 배반한 인간이다. 너도 마찬가지야. 이 배반했다는 것을 늘 알고 있을 때만 우리는 계속해서 진짜 100프로 주의 양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나는 늘 주님을 배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양. 주님의 양만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이 자기의 감동, 감화의 주체로 등장해버리면 결국 그 양은 누구의 노동의 대가가 되죠? 그 양은 자기가 기도하고 자기가 심방하고 자기가 애쓴 자기 양이기 때문에 나중에 교회 갈라지면 대가리 숫자 세어서 권리금 더 받아야 된다니까. 내가 와서 교인 이만큼 불려놨으니까 전별금 더 챙겨야 된다니까요. 결국 그것은 주님께 봉사한 것이 아니고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서 한 거잖아요. 그걸 다섯 자로 ‘보이스피싱’이라고 합니다. 완전히 은행 잔고에 돈이 자기 앞에 오는 거예요. 예수를 상품화시켜서 자기 지갑에 돈 채우는 인간들이에요.

그런데 그런 목사들 그렇게 위대하고 존경스럽게 한 것이 교인들이거든요. 왜 그런 줄 알아요? 본인들도 평소에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똑같은 목사가 옴으로써 정당화되잖아요. 니 꼬라지, 내 꼬라지 반갑다 친구야. 둘 다 하나님 팔아먹고, 장로직 팔아먹고, 예수 팔아먹고. 둘 다 자기 배만 채우는 거예요. 왜? 성공이 진리고 실패는 벌 받는 거고, 저주 받은 거고. 높은 자리가 축복받은 거고 낮은 자리로 떨어지면 저주받은 거고.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하고. 그 성질 어디 갑니까?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 그런 것은 하나님께로 온 게 아니라고 했거든요. 요한일서에서 하나님께로 온 게 아니라는 말은, 내게 속한 자만 하나님 말을 듣고 같은 말을 들어도 내게 속하지 않은 사람은 그걸 못 알아듣게 돼있다는 분류작업의 일환으로서 그런 말씀을 한 거예요.

생각해보세요. 이스라엘이 망했다. 사람들은 교회에서 망했다는 취지를 전혀 놓치고 있어요. 이스라엘 망했다. 예수님 계시다. 연결이 안 되니까 다 때려치우고 과거라고 치워버리고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 오후에도 그런 설교했습니다만 저도 20대에 교회 처음 나올 때 그랬어요. 목사님이 십자가 이야기 다 해요. 유대인 나쁜 사람에 의해서 십자가 졌지만 우리들은 좋은 편이기 때문에 십자가 지신 혜택은 우리한테 넘겨주어서 죄 용서받고 구원받는다고 이야기했단 말이죠.

그러니까 그때 20대 초반인데 나쁜 유대인, 철도 없는 유대인, 아주 악마의 종 악질 유대인,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요. 유대인들이 예수 죽였다고. “나같이 착하질 못하고 왜 그들은 악해서 자기 메시아를 죽였을까? 나쁜 사람. 목사님, 우리는 착하지요? 그러니까 복 받았지요?” 이렇게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예수님을 미워했던 자에게 찾아와서 구원하는 것이 십자가였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원수 된 자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아들을 죽이신다고 할 때 반드시 로마서 5장에 있는 문장은, 우리가 원수 된 자에 가 있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아들을 죽이시는 취지를 모르게 돼있어요. 자기가 원수가 아니고 착한 사람으로 돼있으니까 착한 사람 입장에서 하나님의 아들 죽었다고 백날 외워봐야 그것은 전혀 아들 죽으심의 의미를 모르는 거예요. 예수를 안 믿은 거예요.

그저 나는 착하다에 부록으로 착한데 얼마나 착하냐? 예수 믿을 정도로 착하다. 갖다가 본드로 어설프게 붙인 것뿐이에요. 진짜 예수님의 죽으심을 안다면 내가 원수의 자리에 서야 알 수 있는데 그 원수의 자리는 아무리 죄 지어도 우리가 죄를 알 수 없게 돼있어요. 아무리 나쁜 짓을 골라 해도 우리는 여전히 사회가 나를 버렸다고 핑계대지 전적으로 나빠서 나쁘다는 생각을 전혀 못하는 거예요. 이것은 사람들이 나를 몰아넣었다. 레미제라블에 보면 빵을 훔쳤는데 그게 왜 나쁘냐? 이런 식으로.

그러니까 인간은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어느 정도로 나쁜지 알 수가 없게 돼있어요. 성령이 올 때 죄 지었든 관계없이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의 자리에서 나만 생각한다는 것을 발견할 때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아들 죽으심이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승리로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겁니다.

페르시아라는 나라, 바사나라죠. 이 바사나라는 하나님의 충실한 종으로서 잃어버린 이스라엘을 완전형으로 완전한 국가의 진짜 원형적인 모델로 세우기 위해서 종노릇하기 위해서 잠시 이스라엘을 보관한 국립은행의 보관금고 역할을 한 거예요. 잘 보관했다가 제사드릴 때 필요한 기구들까지 전부다 내주잖아요. 그중에 몇 개는 인디아나 존스가 가져갔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레이더스에 나오는. 남아있는 것은 다시 내놔요. 네 차례에 걸쳐서 쳐들어왔거든요. 두 번째 쳐들어왔을 때는 금박을 벗겨가고 세 번째는 불 질렀는데 그 많은 것을 잘 보관했다고 하나님의 충실한 종으로서 성전 지으라고 도와주고 있잖아요. 그러면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이에요? 세상 모든 것은 다 썩어빠진 멸망 받을 나라 보이지 않는 나라를 위한 보조인으로 필요한 조치였던 겁니다.

고린도전서 3장 21절부터 23절을 누가 녹음되도록 크게 읽어보세요.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임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자, 보세요. 읽는 톤 보세요. 교회에서 성경공부 좀 했던 톤 아닙니까. 이게 보통 경력으로 나올 수 없는 톤이에요. 우리교회 초자들은 이런 것도 못 합니다. 이 정도하면 아멘, 이런 게 나와 줘야 되는데. 야합하라 할 때는 내용 보고 하는 줄 알았죠?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위해서 기죽지 말란 뜻이에요. 다 그리스도 것이 되기 위해서 깔아놓은 보조 장치들인데 그것 보고 깜짝깜짝 놀라느냐 말이죠. 우리 스스로가 자신을 자신의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니까 내가 기죽지 않고 세상 사람들 중심이 되려고 하다보니까 중심도 되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의 종이 되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용해서 그리스도가 중심이라는 일에 대해서 우리가 동원된 사람이라면 우리뿐만 아니고 주변의 모든 사람들도 그리스도를 위해서 동원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21절에 보면, 그런즉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는 것은, 아직까지 도착지점에 도달하지도 않았는데 과거시험에 보러가다가 중간에 문경새재에 눌러앉아서 주모, 국밥 말아주소. 하고 주모, 너무 예쁜데. 하고 거기 눌러앉아서 결혼해버리면 과거는 누가 봅니까? 문경새재 넘어가서 충청도 제천으로 해서 한양에 들어가서 과거시험 봐야 되는데 중간에 주모 만나서 살림 차려버리면 과거시험은 누가 보는데?

중간에 만난 사람한테 실망이나 낙담하지 말란 말이죠. 애초부터 노렸으면 몰라도 사람은 그냥 만나고 헤어지고, 헤어지고 만나고 그냥 스쳐지나갈 뿐이에요. 그것은 누굴 미워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도 또한 그런 식으로 활용당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스도한테. 그리스도의 것이라. 이것이 사도 바울이 평소에 살아갔던 일기장입니다. 그게 생활태도였고 세계관이었어요.

그렇다면 니만 있으면 되는데 나라는 왜 필요한가? 이번에는 다른 동네에서 성경공부 할 때는 어떻게 했는지 봅시다. 대전 말고 다른 동네. 시편 2편 1절에서 3절까지 누가 읽어보세요. 이번엔 울산에서.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이 톤은 이상한 톤인데 이단 같아. 정상이 아니야. 영 은혜가 안 돼.

여기에 보면 말이 참 이상해요. 필리핀 국가, 영국이고 프랑스고 러시아고 태국이고 간에 자기 국가가 사업하고 경제 발전하고 에너지 확보하기 바빴지 언제 메시아 기름 부은 자를 끊으려고 그들이 신경 썼습니까? 안 썼잖아요. 나라라고 하는 것은, 존립이고 운영 자체가 급급한데 “여러분, 모입시다. 이제부터 예수쟁이 다 죽입시다.” 이렇게 그런 것 숙의하고 그런 것 모의할 그런 여력이 그런데 신경 쓸 필요 없잖아요.

그런데 본문에 뭡니까?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이 이야기를 다른 나라 들으면, “언제? 언제 이렇게 했어? 돌아서서 여호와 신경 쓰지도 않아.” 과연 그럴까요? 에스라, 느헤미야에서 제일 중요한 데 도착했습니다. 히브리인들이 쿠데타 일으킨 건 아니에요. 히브리인들은 고분고분했고 애굽의 바로 정권에 순종의 극치를 보였습니다. 힘든 노동자의 계급이지만 이주민들에 대한 학대를 온 몸으로 받았고 그나마도 일자리 준 걸 감사해서 하루 16시간씩 노동하면서 집단생활해도 그들은 마다하지 않고 계속해서 바로 왕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끼어든 사나이가 있었어요. 그것도 나이 팔십 넘은 사나이가 등장하는데 그 사나이 이름이 뭡니까? 모세가 등장하는데 양쪽으로 다 밉상을 받습니다. 바로는 물론이고 심지어 히브리인들도 당신 끼어들어서 나라꼴이 된 적이 없다는 거예요. 왜 끼어들었느냐? 꼭 대선에 출마한 이정희 같아. 왜 끼어들었어. 왜 대선 분위기 다 망치고. 나는 박근혜 떨어뜨리려 왔다. 국가의 장래, 미래가 아니고.

그래서 오죽 했으면 히브리인들이 기도를 했겠습니까. 그것도 합심 기도했지요. “하나님이여, 모세와 아론, 낯설게 개입된 저 인간들 제발 벌 좀 내려주옵소서.” 밉상 받은 거예요.

그런데 모세 입장에서 봅시다. 모세 자기도 그 일을 안 하려고 했잖아요. 모세가 처음에 했던 안중근 의사 흉내 낼 때 그 기분이겠는데 모세가 다시 지명수배 되어서 쫓겨나고 난 뒤에는 자꾸 빼지요. 그러면 사전에 누구와 이미 이야기가 끝났다는 말입니까? 사람들은 사람들과 대결구조지만 모세는 누구와 자꾸 소통이 됩니까? 여호와 하나님이에요. 결국 기름 부은 자라는 것은 자기 백성이건 남의 백성이건 다 싫어. 둘 다 안 좋아하는 분이에요. 그런데 억지로 끼어듭니다. 기름 부은 자가, 메시아가. 메시아가 하나님 이름으로 억지로 끼어들면 여기서 분란이 일어나면서 뭐가 부각되느냐 하면, 어린양과 한판 붙을래, 안 붙을래?

애굽 나올 때 살았던 히브리인들과 죽었던 애굽 나라와 차이점은 단 하나밖에 없어요. 로마서 3장 8절에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지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저희가 정죄 받는 것이 옳으니라”

로마서 3장 8절에 보면,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은 정죄 받는 것이 옳다고 나와 있어요. 우리네 상식은 신약시대는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다시는 두 번 다시 정죄 받는다는 난폭한 언어는 없을 거라고 했는데 사랑의 사도, 자유와 긍휼을 전파한다는 그 사도 입에서 저희가 정죄 받는 것이 옳다, 마땅하다고 나와요. 정죄 없는 줄 알았는데 정죄가 있는 거예요. 어떤 경우에?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 전하면 정죄 받는 것이 당연한 겁니다. 정죄 받는 자가 누구냐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 마지막에 주님께서 오셨지요.

애굽에서 어린양이 개입됨으로써 집집마다 어린양 하나쯤은 키우기 마련이거든요. 평소에 그 어린양이 자기를 살릴 줄은 상상도 못했지요. 어린양이 털갈이 하는데 어린양이 말을 해서 내 명찰 붙여주세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 그런 어린양 봤습니까? 집에 개 키우는데 “나를 때리지 마세요. 나는 구원자입니다.” 이런 개 봤어요? 그런 개 있으면 돈 법니다.

어린양이라는 물질, 재료에다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이건 믿음이 아니면 수용 못할 의미가 주어지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복음이란 원재료는 아무것도 아닌데 그걸 누가 들어 쓰시는가에 따라서 이것이 구원의 효과, 구원의 확실한 기준으로 자리 잡는 거예요.

집안에 있는 어린양을 잡아서 피를 발랐다. 우리나라 과학수사 같으면 성분검사 들어갑니다. 아미노산이 어떻고, 무기질이 어떻고, 백날 연구에 들어가는 거예요. 오늘날 창조과학회처럼. 하나님이 창조를 어떻게 했는지 찾아보자고 창조 흔적을 찾는다고 난리에요. 곳곳에서. 그러면 증거가 나옵니까? 돌멩이를 하나 쥐니까 돌멩이에 예수 그리스도가 창조했다고 적혀있습니까?

결국 과학으로 판단한다는 것은 자기 판단을 거기다 되 투사해서 그걸 되돌려 받는 것뿐이에요. 다만 요령이에요. 이렇게 안 하고 이렇게 했더니만 더 편리하더라. 그것은 20년 전의 수술법이고 5년 전에는 이렇게 하더라. 이것은 많은 연습과 시행착오를 거쳐서 누적된 기능의 집합에 불과한 거예요. 그런데 기능의 집합이 누구 좋으라는 기능이에요? 나 좋으라는 기능이지 신이 왜 개입돼요. 신이 개입되지 않아요.

백 미터 달리기하면서 기도할 때 “하나님이여, 일등하게 하옵소서.” 이런 기도하지 “하나님이여, 왼발은 어떻게 딛고, 오른발은 어떻게 딛습니까?” 그런 것은 니가 알아서 해야지. 애초부터 빨리 달리게 해달라는 조차도 기도 내용이 될 수가 없고. 하나님 시험 잘 치게 해달라는 것도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아예 문제를 알려달라고 하지. 시험 치지 말고. 차라리 바로 합격시키면 그만이지요.

어린양 같은 것이 바로 우리에요. 우리는 아무 가치가 없어요. 다만 우리를 활용함에 따라서 귀하게 쓰시고, 천하게 쓰시는 거예요. 그리고 쓰실 때는 괜히 빼지 마세요. 되도 않은 겸손입니다.

지금 세상의 열방들은 점잖은 사람들입니다. 이번에 중국 주석 시진핑 보세요. 맹자, 노자, 공자 보는 것 같아. 얼마나 인품이 있는지. 공산당입니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세상에 열방들은 개망나니 같은 사람은 투표에서 떨어져요. 안 돼요. 다 점잖고 성실하고 백성들 위해서 봉사할 준비된 사람들, 물론 다 되는 건 아니에요. 이번에 문재인 떨어졌으니까.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본인이 어디에 질겁한다는 걸 몰아요. 그것은 육에 속한 사람은 하늘에 것이 내려오게 되면 그때부터 육이 발작을 일으키게 됩니다. 훌륭한 주기철 목사, 훌륭한 손양원 목사, 복음 전해보세요. 그들은 이단으로 돌변합니다. 십자가 복음이란 것은 이 세상 모든 인간을 죄인 만드는 거예요. 왜? 율법적 기능의 집합체니까. 율법을 다 이루었으니까 다 이룬 기능 중 하나가 십자가 앞에서 어떤 인간도 죄인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거예요.

그 기능을 신약 오기 전에 에스라, 느헤미야가 주변 국가들을 향하여 앞으로 올 메대 바사, 바벨론, 헬라 모든 국가에 대해서 진짜 율법의 나라가 너희들 나라를 멸망시키고 이 나라만이 영원할 것이라고 다니엘에 나오듯이 그런 식으로 전파할 기능을 서서히 자랑합니다. 어떻게 자랑하는가? 그건 내일 아침에 해야 돼요. 마치겠습니다.

첨부파일 : 2013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2강.hwp (55.0K), Down:28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358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12,217 우리교회 [일반] 해피 엔딩은 없다 마태복음 최고관리자 13-01-22
12,216 묻고답하기 해피엔딩은 없다 마태복음 최고관리자 13-01-22
12,215 자유게시판 6강-나2장13(하나님의 대적자)130113-이 근호 목사 나훔 최고관리자 13-01-21
12,214 자유게시판 17강-롬3장 21-24(율법외의 한의)130120-이 근호 목사 로마서 최고관리자 13-01-21
12,213 자유게시판 19강-YouTube강의(복음 아닌 신학)130117-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13-01-21
12,212 자유게시판 18강-YouTube강의(그림자 인생)130117-이 근호 목사 히브리서 최고관리자 13-01-21
12,211 묻고답하기 예수 믿는 자 로마서 최고관리자 13-01-20
12,210 우리교회 만난 사람들 130120 - 최고관리자 13-01-20
12,209 설교 율법 외에 한 의 (롬 3:21-24) 로마서 최고관리자 13-01-20
12,208 우리교회 율법 외에 한 의 20130120 로마서 최고관리자 13-01-20
12,207 강의 유튜브 강의 (8강, 9강) 기도, 믿음 아닌 것 121101 마태복음 최고관리자 13-01-19
12,206 자유게시판 [녹취]2013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10강 히브리서 최고관리자 13-01-19
12,205 자유게시판 [녹취] 2013년 십자가마을 겨울 수련회 제 6강 느헤미야 최고관리자 13-01-19
12,204 자유게시판 [녹취]2013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9강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13-01-19
12,203 자유게시판 [녹취]2013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8강 느헤미야 최고관리자 13-01-19
12,202 자유게시판 [녹취]2013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7강 스가랴 최고관리자 13-01-19
12,201 자유게시판 [중간사] - 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13-01-19
12,200 자유게시판 [녹취]2013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5강 느헤미야 최고관리자 13-01-19
12,199 자유게시판 [녹취]2013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4강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13-01-19
12,198 자유게시판 [녹취]2013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3강 마태복음 최고관리자 13-01-19
열람 ➜ 자유게시판 [녹취]2013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2강 [수련회] 최고관리자 13-01-19
12,196 자유게시판 [녹취]2013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1강 느헤미야 최고관리자 13-01-19
12,195 강의 [13 대구강의 1] - [피 86] - 법과 피 [피] 최고관리자 13-01-18
12,194 강의 중간사 , 70이레 논문 서론 130117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13-01-18
12,193 강의 유튜브 강의 (18강, 19강) 그림자 인생, 성령받지 않는 신학 130117 [신학] 최고관리자 13-01-18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