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대구강의 1] - [피 86] - 법과 피
[13 대구강의 1] - [피 86] - 법과 피
이름 : 구득영(IP:203.223.97.152)
[13 대구강의 1] - [피 86] - 법과 피
13,01,07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258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마. 법과 피 - 십자가에서 눈을 돌리게 되면, 인간은 자기 내부에 자리를 잡고 있는 규칙을 붙잡게 되어있다. 법이란 경계짓기이다. 법은 경계선을 만든다. 나와 너의 경계를 법을 가지고 지정한다.
◈ 사형은 법으로 이루어진다 !!
여기에 보면 '법과 피' 라고 되어있는데, 이게 서로 어떤 관계냐는 것이다. 사실은 간단한데, "사형은 법으로 이루어진다" 라는 것이다. 피를 흘렸다는 것은 곧 죽음이고, 그렇게 죽는 이유는 법 때문인데, 즉 뭔가 죽을 죄가 있기 때문에 죽는다는 말이다. 이 세상에 사람이 태어나서 모두가 죽는데, 그렇게 죽는 데는 이유가 다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기의 죄 값으로 죽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방금 제가 '자기 죄' 라고 했는데, 그러면 죄가 많은 사람이 있고 적은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어떻게 되느냐는 말이다. 하지만 죄가 많고 죄가 적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인간들이 하는 주장이고, 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생명나무를 따먹지 못하면 다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 차별이 없느니라 !!
로마서 3장에 보면 '차별이 없다' 라고 하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게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왜 그렇게 차별을 두는지 모르겠는데, 죄를 많이 지은 자, 적게 지은 자, 그리고 많이 의로운 자, 적게 의로운 자로 말이다. 즉 성화를 하는데 70퍼센트, 50퍼센트라는 것이다. 그러니 산 정상에 올라가는데 있어서 어떤 사람은 내신등급이고 A이고, 어떤 사람은 B라는 것이다. 진리에 이르는데 말이다.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 3: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롬 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그렇다면 왜 이렇게 계급을 짓고 계층을 만드느냐는 것이다. 참으로 한심스러운 일인데, 결코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단 여기에는 조건이 있는데, '내' 안에 있으면 차별이 있지만, 각자 각자로 있을 때는 분명히 차별이 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없다고 하면 말이 안 되는데, 어떻게 성폭행범과 구제를 하는 사람이 같을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 예수 안과 예수 밖 !!
그렇게 자기 안에 있으면 차이가 있는데, 그런데 성경말씀에 보면 '예수 안'에 있으면 차이가 없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빨리 예수 안에 들어가면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예수 안에서는 차이가 없다고 했을 때 누가 화가 나겠는가? 그동안 마일리지를 많이 쌓은 사람들이 화가 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난번에 대한항공에서 마일리지 제도를 없앤다고 하니, 그동안 비행기를 많이 타서 마일리지 포인트를 많이 쌓아둔 사람들이 데모를 하고 했는데, 왜냐하면 자기들이 그동안 쌓아놓은 마일리지가 소용이 없으니 말이다. 자기들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행동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 안에서는 차별이 없는데, 남자나 여자나, 어린아이나 노인네나,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직업에 불문하고 말이다. 세리와 창기들도 천국에 가니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 안에서는 차이가 없는데, 하지만 예수 밖에 나오면 분명히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전부가 다 자기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으로 들어가면 되지 않겠느냐고 할지 모르겠는데, 우리 인간은 그런 쪽으로 머리가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 안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자기 것을 버리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가지고 들어간다는 말이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말씀인데, 그것을 한번 적어보면, "많이 용서함을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 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여기서 사랑만 건지면 되는데, 하나님은 결코 손해를 보는 장사는 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고 사랑을 받아야 하는데,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을 위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에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사랑을 받으려고 하면, 용서를 받았다는 것이 그대로 사랑으로 이어지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눅 7: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 여러분, 제발 봉사하세요 !!
연초에 보면 목사들이 "교회에 봉사하세요" 라는 소리를 많이 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봉사를 하라고 강조하면, 그것은 교회에서 목회를 하는 것인데, 즉 교회목회에 성공을 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교회에서 설교시간에 잔소리를 많이 하게 되면 말이다.
그렇게 목사들이 "믿었으면 봉사를 하세요. 은혜를 받았으면 봉사를 하세요. 그게 당연한 도리입니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우리교회를 보면 어떠한가? 11시가 예배시작 시간인데 11시 반에 오니, 그러면 예배준비는 누가하고 난로를 누가 피우느냐는 것이다. 난로가 자기가 알아서 자동으로 피워지는가?
그런 것이 아닌데, 그래서 거기에 대해서 목사가 잔소리를 하게 되면 교인들이 봉사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무엇인고 하니, 그러면 교회는 망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복음을 아는 목사는 교회가 망하지 않기 위해서 애를 많이 써야 한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교인들이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 사랑이 없는 상태에서, 즉 용서를 모르는 상태에서 봉사를 하게 되면, 그러면 봉사는 나오기는 나오는데, 하지만 그러한 봉사는 반드시 마일리지를 요구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마일리지를 말이다.
그러면 그런 교회는 더 이상 예수님과는 상관이 없는데, 그 교회에서 누가 헌금을 많이 했고, 지분을 많이 가지고 있고, 오랫동안 새벽기도를 많이 나오고, 누가 교회에 얼굴을 많이 내밀었는지, 예배시간에 11라도 누가 10시에 미리 와서 봉사를 하는지, 그런 시합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교회가 아니고 일종의 회사인데, 구원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말이다. 그러니 이런 부분에 대해서 목사는 굉장히 신중하고 조심해야 하는데, 물론 말은 맞는 것 같은데, 믿음이 있으면 봉사를 해야지, 봉사를 하지 않으면 되느냐고 이야기하는 것이 말이다.
◈ 봉사는, 주님이 주시는 효과로만 !!
하지만 봉사는 베드로전서 4장의 말씀 그대로인데, 진짜 봉사는 목사가 잔소리를 해서 나오는 봉사가 아니고, 오직 예수님이 주시는 힘으로 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게 어려우니(?) 좀 쉬운 말로 하면, "봉사는 주님이 주시는 효과로 나오는 것이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봉사는 본인이 하는 것이 아닌데, 주님이 힘을 주셔야 한다는 것이다.
(벧전 4: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벧전 4: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벧전 4: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 현숙 씨, 커피값 좀 내세요 !!
쉬운 예를 들어보면, 서로 연애를 할 때는 효과가 무엇인고 하니, 바라보기만 해도 좋아서 "현숙 씨! 근호 씨!" 라고 하는데, 그렇게 서로 좋아서 죽고 못하는 사람이 커피 값을 내려고 할 때는 서로 먼저 내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효과라는 것이다. "어라, 너는 내 대신에 커피 값을 내는 봉사를 하네?" 라는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어떻게 당신을 위해서 나를 좀 사용하면 안 되겠습니까?" 라는 간절함, 그런 간절함이 있다는 것은, 그것을 본인이 잘나서가 아니고 본인에게 뭔가가 뒤집어 씌어졌다는 것이다. 물론 성령이 씌어졌다고 할 수 있는데, 그렇게 뒤집어썼으니, 그런 뒤집어쓴 티를 팍팍 내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목사가 잔소리를 해서 봉사를 하게 되면 그만 봉사의 리스트가 작성되는데, 즉 "다음 중에서 봉사에 해당되는 것과 되지 않는 것을 표시하세요"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거기서 빠진 것은 봉사를 해도 봉사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리스트에 있는, 즉 예배시간이 되기 전에 청소를 한 것은 봉사가 되고, 거기에 없는 것은 안 되고 말이다.
◈ 성령께서는, 인간들이 생각하는 리스트를 벗어나 !!
그래서 설교자는 교회는 없다고 생각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할 뿐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10년이든 20년이든 뭔가가 있었지만, 하지만 지금은 없다고 여기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증거하게 되면, 목사의 잔소리가 아닌 성령께서 효과를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효과는 목사가 생각했던 리스트를 빗나간다는 것이다. 리스트에 들어있어야, 즉 식사당번을 해야 봉사라고 생각하는 우리들의 상식을, 즉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을 다 피해서 가버린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주께서 쓰시기 때문에 말이다.
예를 들어서, 과거 처녀 마리아가 있었을 때 그 당시 제사장이 "어이, 처녀 마리아는 이리와 봐. 너는 하나님께 봉사해야 하는데, 그러니 지금부터는 결혼도 하지 않고 결혼해라" 라고 해서, 그렇게 해서 하는 봉사가 있는가? 그건 말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령께서 일을 하시는데 있어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을, 즉 봉사를 많이 해서 교회를 키우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대목을 모두 다 피해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7장에서 예수님께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라고 하셨는데, 무슨 의미인가?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봉사를 했습니다. 기적을 행했습니다" 라고 할 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는가? "나는 너거들을 모른다" 라고 하셨는데,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가?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마 7: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들은 하나님의 일이라는 항목들을 미리 작성을 했는데, 즉 "이렇게 봉사를 했으니 이건 하나님의 일이고, 체크"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자기가 생각했던 항목에 아다리가 되면 봉사라고, 그렇게 다들 같은 인간들끼리 모여서 규정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백 날을 그렇게 규정을 해본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주님께서 인정을 해주지 않는데 말이다. 그것은 자기 잘남의 효과인데, 하지만 주님의 효과는 무엇인가? "나도 그것을 할 수 있다" 라는 것을 주님께서 하지 못하게 만드신다는 것이다. 우리교회의 경우에도 봉사를 하고 싶어하는 분들이 많이 있지만, 주께서 못하게 하신다는 것이다(ㅋㅋ).
자기가 그것을 하고 싶어하면 주님께서는 "나는 다른 것을 해" 라고 하시는데, 왜냐하면 "나도 봉사를 할 수 있습니다" 라고 하게 되면 그만 마일리지가 쌓이게 된다는 것이다. 항상 행함이 나오고 말이다. 아무리 십자가의 은혜로 100퍼센트 구원이라고 하다가도, 교회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나는 얼마나 했노? 나는 이만큼 했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것은 전혀 말씀과 맞지 않다는 것이다.
◈ 새해에는 저주를 받으세요 !!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법과 피의 만남은 "니는 죽을 값을 하고 살았다" 라는 것인데, 즉 "니는 법적으로 죽어도 마땅하다" 라는 것을 언급한다는 말이다. 특히 이렇게 새해를 맞이해서, 새해와 연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성경은 "새해에는 저주를 받으세요" 라고 말씀한다는 것이다. 십자가 마을에도 여기게 관한 글을 하나 올려야 하겠는데, 이것이 정말로 예쁜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성경말씀 어디에 나오는고 하니, 물론 꼭 새해라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무엘하 16장 10절에 보면 다윗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것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는 것이다. 종종 이야기를 해도 너무 어려워서 그런지 몰라도 자꾸만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삼하 16:10) 왕이 가로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삼하 16:11) 또 아비새와 모든 신복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
◈ 이스라엘을 이긴 골리앗을 소년 다윗이 만난다 !!
제가 천천히 하겠는데, 소년 다윗이 누구를 만나는데, 누구인가? 골리앗을 만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골리앗은 어른들이 처리하지 못한 골리앗인데, 막강한 사울의 군대가 감당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러면 골리앗은 이긴 자이고 이스라엘은 패배자가 되는데, 그러니 "이스라엘을 이긴 골리앗을 소년 다윗이 만난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소년 다윗이 골리앗을 그만 이기는데, 여기에 누가 개입하시는고 하니, 이 부분이 중요한데 말이다. 만군의 하나님이 개입하시는데, 그 만군의 하나님은 기능이 있다는 것이다. 그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전쟁 하나는 끝내주게 하신다는 것이다. 만군의 하나님은 말이다.
◈ 야곱은 혼자가 아니야 !!
이것이 창세기 32장에 보면, 야곱이 형 에서와 헤어지고 나서 얍복 강가에서 누구를 만나는데, 천사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전에 보면 '마하나임' 이라는 이름으로 일컬어지는 수많은 천사들을 만난다는 것이다. 또 그 이전에 잠을 자다가 사닥다리에서 천사를 만난다는 것이다.
(창 32:1)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더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창 32:2)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그리고 여호수아가 약속의 땅에 가는데, 옆에 보니 칼을 든 건장한 한 사나이가 나타나서 "무릎을 꿇어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분이 곧 천사장 미기엘, 즉 전쟁을 담당하는 천사가 또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야곱에 가는 곳에 혼자 남겨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 5:13)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웠을 때에 눈을 들어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섰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
(수 5:14) 그가 가로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 여호수아가 땅에 엎드려 절하고 가로되 나의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수 5:15)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 얘들아, 수호천사다 !!
왜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옛날의 서양동화에 보면, "우리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혼자가 아니라 항상 옆에 수호천사가 있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 수호천사라고 그려놓은 것을 보면 다 작은 아이라는 것이다. 생후 6개월 정도의 갓난아이 정도인데, 고추가 있는지 없는지 구분도 잘 되지 않는 말이다. 그렇게 발가벗고 있는 요정과도 같은 모습인데, 그런데 정작 여호수아가 만난 분은 아주 무시무시한 분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전쟁을 하는 기능 속에서 이스라엘은 싹이 튼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을 사도바울은 '영적 전쟁' 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도바울은 자기 자신을 두고 "나는 지금 평화가 아닌 죽기 살기로 전쟁을 하는 가운데 있다" 라고 하는데, 즉 "복음인가? 복음이 아닌가?" 라는 싸움을 하는 말이다. 자기는 그런 영적 전쟁을 하는 기운 속에, 그런 회오리 속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소년 다윗의 경우에도, 자기도 나름대로 꿈이 있다는 것이다. 그 당시에 다윗은 양을 치고 있었으니 좋은 목장을 가지는 것이 꿈일 수가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만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개입하심으로 인해서 골리앗을 만나고, 그 승리가 소년 다윗에게도 돌아갔다는 것이다.
◈ 이기고 또 이기고, 끝까지 이긴다 !!
물론 여기까지는 어렵지 않는데,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승리가 나중에 패배로 이어지겠는가? 아니면 승리와 승리의 연속으로 이어지겠는가? 일단 여러분에게 이것을 묻고 싶은데, 물론 정답은 둘 중의 하나인데 말이다. 즉 "처음에 골리앗에게는 이겼지만, 나중에 사울에게는 졌다" 라고 되는 것인지, 아니면 "골리앗에게도 이기고, 또한 사울에게도 이겼다" 라고, 그렇게 승리가 끝까지 계속해서 이어지느냐는 말이다.
양 장로님, 둘 중에서 하나인데, 어느 것이죠? 계속해서 승리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소년 다윗이 이긴 것이 골리앗인데, 그런데 그 골리앗은 누구를 이겼는가? 이스라엘을 이겼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영적 안목이 중요한데, 이렇게 이스라엘이 골리앗에게 패배했다는 말은, 이스라엘과 만군의 하나님과 서로 나쁜 관계로 접어들었다는 것까지도 간파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골리앗에게 진 것이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과 좋지 않은 관계로 돌입했다는 것이 첫 번째이고, 그 다음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이렇게 전쟁에서 패배를 했을 때, 그것은 그렇게 패배를 했을 만한 기존의 사고방식이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 사울의 사고방식이, 즉 사울이 "우리가 왜 골리앗에게 졌지? 소년 다윗도 이긴 골리앗을 말이야" 라고 하는, 그것을 차후에 누구를 만나는고 하니, 소년 다윗과의 엮인 관계를 통해서, 비로소 사울과 그 집단들이 평소에 가지고 있던 사고방식의 불신앙이 드러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즉 "아하,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가 될 수밖에 없구나" 라는 것을 도출해낸다는 것이다.
◈ 여호와여, 주의 성실하심이 주를 둘렀나이다 !!
그런데 나중에 이 다윗에게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지게 되는데,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시편 89편에 그러한 내용이 나오는데, 즉 하나님께서는 "내가 다윗과 약속을 하겠는데, 그 약속은 성실성이 있게 반드시 이루겠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시 89:3)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나의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며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시 89:4) 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 네 위를 대대에 세우리라 하였다 하셨나이다(셀라)
(시 89:5) 여호와여 주의 기사를 하늘이 찬양할 것이요 주의 성실도 거룩한 자의 회중에서 찬양하리이다
(시 89:6) 대저 궁창에서 능히 여호와와 비교할 자 누구며 권능 있는 자 중에 여호와와 같은 자 누구리이까
(시 89:7) 하나님은 거룩한 자의 회중에서 심히 엄위하시오며 둘러 있는 모든 자 위에 더욱 두려워할 자시니이다
(시 89:8)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이여 주와 같이 능한 자 누구리이까 여호와여 주의 성실하심이 주를 둘렀나이다
◈ 다윗의 혈통으로 나신 것이 곧 복음 !!
그리고 주일오전 시간에 로마서 1장을 설교를 하면서, 다윗의 혈통으로 나신 것이 복음이라고 했는데, 그러니 육에서 난 사람은 자기 잘난 체를 하고, 육에서 영으로는 전혀 해석해낼 수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즉 육 외에 다른 곳에서 온 것은 육의 논리로는 전혀 따라잡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연결이 안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육 외에 다른 데서 온 하나님의 어떤 기운(?)은 육을 어떻게 하는고 하니까, 육을 죄인 중의 괴수로, 즉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라고 하는데, 그렇게 일괄적으로 처리를 해주어야만 비로소 저쪽이 해명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하, 육의 논리를 따져서 착하게 살아보자" 라고 해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도 무지막지한 협박처럼 들린다는 말이다. "심해도 너무 심하네. 나도 착하게 살아보려고 나름대로 애를 무척 쓰는데, 그런데 의인이 단 한 명도 없다고 하는 게 말이 되는가? 그래도 두 명 정도라도 있다고 하면 몰라도 말이야"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까, "복음은 너희들의 손을 타지 않았다" 라는 것인데, 복음은 하나님의 성실성으로만, 즉 하나님의 약속으로만 주어지고, 그 성실성은 그냥 성실하다는 차원이 아닌 구체적인 증거가 있는데, 그것이 다윗의 혈통과 관련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오늘날 대한민국 사람이 약속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 혈통이 아니라, 그것은 제쳐두고 다윗의 혈통을 믿는다는 것이다. 족보가 다른데, 모두가 '다' 씨 성으로 바꾸든지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에 와서 떡을 얻어먹고 예수님을 믿고 천당에 간다는 것은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 것은 사도바울이 사도가 되기 이전에 유대교에서 다 해본 것인데, 즉 육을 조져서 영적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할례와 안식일을 지켜서 말이다. 즉 육으로 조작해서 천국까지, 그렇게 해서 메시야를 만나게 해주겠다는 프로그램은 이미 유대교에서 해왔던 것이란 말이다. 그런 것에 최고로 몰입한 사람이 사울이란 사람이고, 그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 바울이 되는데, 그러니 그쪽은 이미 아니라는 것이다. 유대인 쪽은 아니라는 말이다.
다윗에게 언약이 임하고 사울에게는 임하지 않는데, 그런데 그 뒤에 나오는 성경 스토리에 대해서는 일반 교인들이 이해를 하지 못하는데, 그래서 "사울은 왜 다윗을 잡아먹지 못해서 환장하는가?" 라고 하는데, 그것은 바로 골리앗과 소년 다윗에 엮여지는 것이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냥 하나님이 아니고 말이다.
◈ 지금은 영적 전쟁 중 !!
이런 용어개념은 일반 교인들에게 설명하기가 참 곤란한데, 교인들은 그냥 "하나님을 믿습니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과연 그게 어떤 하나님이냐는 것이다. 만군의 하나님인데, 그렇다면 만군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여러 천사를 거느린 하나님인가? 그게 아니라 전쟁을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무슨 전쟁인가? 영적 전쟁인데, 그것은 바로 복음과 비복음의 전쟁인데, 즉 "십자가인가? 행함인가?" 라는 전쟁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기운 속에 지금 우리가 놓여있는데, 지금 전세금이 오른다고 난리인데, 그리고 대학 등록금이 비싸다고 데모를 하는데, 하지만 우리가 그런 전쟁을 할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정희는 박근혜를 떨어뜨리기 위해서 이번 대선에 나왔다고 했는데, 그런 전쟁이 아니라는 말이다.
◈ 복음은 아는 사람이 없어요 !!
가락교회의 김 집사님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자기 회사의 직원들이 30명이 넘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 중에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없고, 복음을 아는 사람은 더 더욱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라고 했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 집사님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자기 회사의 직원들을 보면, 요즘 젊은 아이들이 인생을 왜 사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몰라도 너무 모르는데, 물론 여기서 젊은 아이들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을 이야기하는데, 갓 20살을 넘긴 아이들이 아니고 말이다.
젊은 아이들이 회사에서 하는 말하는 것이 행동을 보면, 그들의 모든 사고방식이 그냥 회사에서 일을 하고 퇴근해서는 술이나 마시면서 즐기는, 그냥 그것으로 끝이라는 것이다. 도대체 인생이라는 것이 무엇이며, 자기들이 왜 사는지를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어디 가락교회 집사님의 회사에만 국한된 이야기이겠는가? 믿는 가정의 경우에도 역시나 마찬가지인데, 도대체 성경에서 무엇이라고 하는지, 물론 설명을 해주어도 듣지를 않겠지만, 사실상 설명해주는 사람도 거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영적 전쟁을 하고 있는데, 그 영적 전쟁은 그냥 교회를 키우는 게 아니라, "십자가인가? 행함인가?" 라는, 다른 말로 하면 "교회는 키우는 것인가? 아니면 교회는 없다고 생각하는가?" 라고 하는, 즉 교회는 아예 없다고 하는, 말씀을 전하는 현장이 교회라고 하는 인식으로 살아가는지, 그런 전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 무조건, 끝까지 이김 !!
지금 우리가 "새해에는 저주를 받으세요!" 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데, 소년 다윗과 골리앗이 만나도록 만군의 하나님께서 개입을 하셨는데, 그러니 만군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소년 다윗이 전쟁에서 무조건 이긴다는 것이다. 끝까지 이기는데, 심지어는 우리야 장군을 죽여도 이기고, 밧세바와 간통을 해도 이긴다는 것이다. 그렇게 항상 이기는 것은 주님의 언약적인 성실함 때문이라는 것이다.
노아언약으로 인해서 노아가 방주를 만들었는데, 거기 방주에 비가 새는 것을 보았는가? 비가 새면 큰 일이 나는데, 그러니 방주 안에서는 언제나 이긴다는 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 안에 있으면 항상 차별이 없이 의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야말로 완벽한 이김인데, 끝이 좋으면 모든 것이 다 좋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로마서 8장의 말씀처럼,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과 같은 것으로, 그것을 일종의 긴 창으로 보면, 그런 것으로 제 아무리 쑤시고 찔러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그렇게 해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빈틈이 없는데, 다윗은 항상 승리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8장 37절에 보면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롬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롬 8: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롬 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서 넉넉하게 이기는데, 그런데 우리는 그것만을 챙기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와 다윗과의 그 성실하심, 즉 하나님의 열심으로 그것이 얼마나 이어져있는지, 그것을 우리가 눈으로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제도 그런 설교를 했는데, 눈길을 가다가 그냥 '꽝' 하고 넘어져서 정형외과에 입원해있는데, 그것이 바로 "주께서 기르시나니" 라는 것이란 말이다. 주님이 기르시는 방법도 참 요란스러운데, 뼈를 마구 골절시켜놓고 기르신다는 말이다. 그렇게 당해봐야 주께서 기르신다는 것을 본인이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도 성령을 받아야 알지만 말이다.
◈ 사울 집단이 다윗에게 압박을 가하는 이유는?
아무튼 항상 이기기 때문에, 이런 '이김' 이라는 것은 나중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이김을 미리 앞당겨서 차츰 차츰 보여주기 위해서, 이 사울 집단이 이스라엘 내부에서 다윗에게 이겨보려고 차츰차츰 압박을 가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울 쪽의 사고방식이 곧 "새해에 복 많이 받으세요"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사무엘하 16장에 보면, 다윗이 사울에게도 당하지만 아들인 압살롬에게도 당하는데, 여기 5절 이하에 보면 사울족속에 속한 '시므이' 라는 자가 다윗을 저주하는데, 사울은 죽어도 사울의 집안은 아직도 큰 소리를 친다는 것이다. 이 시므이가 마치 개가 짓듯이 '왈왈왈' 짓는데, 즉 "니가 사울을 제치고서 왕이 되더니만 꼴 좋다" 라고 말이다.
(삼하 16:5) 다윗 왕이 바후림에 이르매 거기서 사울의 집 족속 하나가 나오니 게라의 아들이요 이름은 시므이라 저가 나오면서 연하여 저주하고
(삼하 16:6) 또 다윗과 다윗 왕의 모든 신복을 향하여 돌을 던지니 그 때에 모든 백성과 용사들은 다 왕의 좌우에 있었더라
(삼하 16:7)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삼하 16:8)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 대신에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붙이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인고로 화를 자취하였느니라
하지만 다윗이 왕이 되지 못해서 환장한 사람인가? 그런데 사울은 왜 죽었는가? 하나님의 언약적인 법에 의해서 죽었는데, 강의 처음에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죽은 이유는 법 때문이라고 말이다. 그러니 죽게 한 법이 있는데, 그 법에 지금 사울도 말려들고 다윗도 말려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윗은 죽어도 살고, 사울은 그냥 죽으면 지옥에 간다는 말이다.
그게 곧 법인데, 이 법은 마치 양날을 가진 칼과 같아서 한 쪽은 천국으로 보내주는 법으로 작용되고 다른 쪽은 지옥으로 가는 법으로 작용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왜 천국에 왔습니까?" 라고 하면, "예수님이 보내주셔서 왔습니다" 라고, 그것은 천국에 간 사람만 이야기하게 된다는 말이다.
반면에 "당신은 왜 지옥에 왔습니까?" 라고 하면, "굳이 지옥에 오지 않아도 되는데, 일이 그만 잘못되어서 왔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자기는 지옥에 올 이유가 없다는 것인데, 즉 그 사람은 자기가 지옥에 와야할 이유를 모르는데, 그러니 그 사람은 지옥에 와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지옥에 가야하는 이유를 모른다는 것은, 그 이유를 자기 쪽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는 말인데, 그것은 바로 "천국인가? 지옥인가?" 라는 기준을 매일같이 자기 쪽에서 찾아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게 곧 사울이고, 그런 사울과 시합하는 것이 바로 다윗이라는 말이다.
다윗은 자기 행함으로 천국에 간 것이 아닌데, 다윗은 우리야를 죽이고 바세바와 통간을 했지만, 그런데 그만 천국으로 통과해버렸다는 것이다. 여자하고는 통간하고, 천국은 통과하고 말이다. 그러니까 항상 자기 자신에 대해서 미련을 두면 안 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이러한 내용이 있기 때문에, 제가 처음에 뭐라고 했는가? 교회에서 목사가 교인들을 보고 "봉사하세요. 예배시간에 일찍 오세요" 라는 말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잔소리의 효과에 불과한 것이지, 어떤 영적 전쟁 가운데 있다고 하는 것을 교인들이 수납하지 않은 상태에서 목사에게 잘 보이려고 그렇게 봉사를 하고 예배시간에 일찍 온다면, 물론 그렇게 하면 교회는 부흥이 되겠지만, 하지만 아무리 부흥이 되어도 몽땅 다 지옥으로 가고 만다는 것이다.
◈ 블랙박스에 찍힌 세상 !!
SBS에서 7시 40분에 하는 '블랙박스에 찍힌 세상' 이라는 프로가 있는데, 이번에 눈이 많이 왔을 때 그것을 보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는 것이다. 그것은 연출한 것도 아니고 있는 그대로 인데, 그냥 차가 와서 마구 박아버리는데 말이다.
자동차 중에서 'SUV' 라는 것이 있다고 하는데, 저는 차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데, 아무런 그렇게 여러 명이 타는 차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일가족이 타고 놀러 가는데, 아버지가 운전을 하고 물론 옆에는 엄마가 앉아서 "여보, 좀 천천히 가요" 라고 하면서 잔소리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뒤에는 아이들이 두 명 타고 있고 말이다. 그러니 굉장히 재미가 있는데, 여기서는 '행복, 행복. 행복' 이라는 것이 절로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만 차가 그만 빙판길을 가다가 미끄러져서 중앙 분리대를 들이박고는 전복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내부적으로 아무리 행복해도 소용이 없는데, 외부가 전혀 바쳐주지를 않으니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가족끼리, 혹은 교회끼리 모여서 "야, 우리끼리 행복하자" 라고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닥이 빙판길이라서 마구 미끄러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아무리 교회에 와서 기도하고, 달을 보고 해를 보고 비는데, 그저 자기 아이들이 잘 되고 사업이 잘 되게 해달라고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해도 소용이 없는데, 자꾸만 미끄러지니 말이다. 그러니 자기 내부만 생각하지 말고 외부에 무슨 일이 있는지, 즉 하나님의 언약이란 법을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백 날 행복해도 마지막에는 네 식구가 몽땅 지옥으로 가고 만다는 것이다.
◈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
사도바울이 결혼을 하지 않는 이유가 있는데, 즉 아내가 있어도 없는 자같이 하라고 한다는 것이다. 장로님이 잘 들으셔야 하는데(ㅋㅋ), 그리고 재산이 많더라도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고 하는데, 물론 이것은 우리에게 해당사항이 없고 말이다(ㅋㅋ). 그러니 우리는 가만히 있어도 이 말씀은 지킨 것이 된다는 것이다.
(고전 7:29)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고전 7:30)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고전 7:31)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아무튼 사울은 자꾸만 승리를 하려고 하는데, 즉 축복이 있어야 그 축복으로 자기가 살만큼 버틴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 축복이 바로 "나의 왕권은 유지가 되어야 한다" 라는 것인데, 그래서 백성들이 다윗에게 가는 것을 다 차단을 시키고, 전부를 다 자기 쪽으로 모으되, 다윗은 살려두어서는 안 되는 존재라는 것이다.
◈ 그러니 시므이 저주는?
그것이 사울 집안까지 이어져서, 그래서 '시므이' 라는 인간이 결국 누구를 저주하는가? 그가 다윗과 다윗 왕의 모든 신복을 향하여 돌을 던지면서 저주하는데, 뭐라고 하는가?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 대신에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붙이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인고로 화를 자취하였느니라" 라고 말이다.
이게 무슨 의미인가? "그래, 꼴좋다. 왕이 되어서 자기 자식도 하나 제대로 간수하지 못해서, 그 자식에게 왕권을 빼앗기나? 그것은 필연적인 코스로서 하나님께서 다윗 당신을 저주했다는 증거다" 라고 자신만만하게 사울 쪽에서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집안에서 누군가가 권력을 가지게 되면 불행이 오는데, 왜냐하면 사람이 인기를 얻고 권력을 가진다는 것은 그냥 무(無)로 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한때 내가 잘 나갔는데" 라고 하는 것이 있어서, 그게 인간을 다 망치고 만다는 것이다.
◈ 최진실과 조성민 !!
그러니 조성민이 최진실과 결혼을 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조성민이 그냥 평범한 아가씨와 결혼을 했으면 자살을 했겠느냐는 것이다. 괜히 최진실이 돈이 좀 있어 보이고 있기가 있어서 좋아 보이니, 그만 덥석 물어서 그런 일이 그만 생기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안에 "나는 내가 살린다" 라는 것이 가득하게 되면, 본인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기 싫어도, 하나님의 원수라고 지정된 자리 쪽으로 자꾸만 호감이 간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어떤 자리가 하나님의 원수의 자리인지 모르는데,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자리 쪽으로 자꾸만 가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가 아닌 곳으로만, 즉 십자가가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곳으로, 즉 행함의 자리로 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 세상은 망해도 나만 구원을 받으면 되지" 라고 하는, 그러한 생각이 바로 여기에 해당되고 말이다.
◈ 시므이의 저주를 받아들이는 다윗 !!
그래서 사울 쪽은 계속해서 뭔고 하니, 어떤 세상적으로, 즉 눈으로 확인될 수 있는, 그런 승리자의 위치를 잇기 위해서 시므이가 이렇게 다윗에게 공격적으로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그때 다윗은 자기를 저주하는데, 여기에서 다윗이 정말 좋은(?) 이야기를 한다는 말이다.
다윗이 말한 그대로를 이야기해보면, "하나님께서 저 시므이를 통해서 나에게 저주하도록 했다" 라는 것인데, 그것은 다윗 자신이 저주를 받아서 기분이 좋고 나쁘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자기가 포함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삼하 16:9)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께 여짜오되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컨대 나로 건너가서 저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삼하 16:10) 왕이 가로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 다윗은, 자기가 받는 저주를 통해서 !!
왜 그런고 하니, 하나님의 계획은 다윗 자신이 변경하거나 처리할 입장이 전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시므이를 먼저 깔아놓고, 그 시므이를 통해서 자기를 저주하는 것은, 그러한 저주를 받은 다윗 자신이 어떻게 복으로 바뀌는지를, 달리 말하면 하나님이 어떻게 저주를 축복으로 바뀌게 하시는지, 바로 그런 하나님만이 진짜 하나님이라는 것을 다윗 자신을 통해서 이 세상에 보여주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저주를 받지 않는 자리로 가려고 하는데, 그런데 그 자체가 지옥으로 가는 것이란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저주를 받는 자리에 가게 하는 절차를 통해서, 그 저주가, 그리고 다윗은 "나는 저주를 받아도 마땅하다" 라고 동참하는 상태에서, 그것이 몽땅 다 무엇으로 바뀌는가? 하나님의 언약의 성실하심으로만, 즉 십자가가로만 복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 역시, 새해에 저주를 많이 받으세요 !!
그러니 이 세상에서 새해를 맞이했다고 하는 것은, 하지만 하늘나라에 무슨 새해가 있는가? 하늘나라에는 새해가 없는데, 그런데 그런 '새해' 라는 말을 걸쳤다는 것은, 그러면 "새해에 복 많이 받으세요" 라고 하는 것은, "지옥으로 가세요" 라는 말에 다름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새해라는 인식이 잘못된 것이라고 하면, 그 다음에 만날 수 있는 단어는 복이 아니라 저주여야 한다는 것이다. 즉 "새해에 저주를 많이 받으세요" 라고 해야한다는 말이다.
왜 사람들이 저주를 받는다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고 하니까, 저주를 받을까봐 무서워하기 때문인데, 하지만 저주를 받는 것을 무서워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모독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더 이상 저주가 없다고 확성기를 가지고 귀에다 대고 "더 이상 저주는 없습니다. 일체 저주는 없습니다. 저주는 끝났습니다" 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도,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어떻게 생각하는가? "혹시 내 행동을 잘못해서 저주를 받으면 나만 손해지" 라고 나오니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법인 언약은 전혀 모르고, 자꾸 자기의 선악적인 행함을 끄집어내어서, 그것을 펼쳐놓는다는 것이다. 마치 전통시장에서 아줌마들이 물건을 펼치듯이, 그렇게 자기가 행한 것, 자기가 지금까지 마일리지로 쌓아놓은 것을 말이다. "목사가 시키는 대로 봉사를 했으니, 올해는 복을 받겠지" 라고 말이다.
그렇게 목사가 그런 식으로 잔소리를 했고, 그리고 자기는 저주를 받지 않기 위해서, 행운이 찾아오는 새해가 되기 위해서 저주를 피하는 방식으로 행함을 끄집어낸다고 하면,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다윗의 혈통을 사울의 혈통이 죽으라고 공격하는 바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 전도는, 도를 전할 때만 !!
그러니 천국에 가는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소관인데, 즉 "아버지께서 내가 오게 하지 않으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라는 것이다. 바로 예수님의 그러한 말씀을 전(傳)할 때만 "도(道)를 전했다" 라고 해서, 그것이 곧 '전도(傳道)'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요 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일전에 제가 서문교회에 가서 그러한 이야기를 했더니만, 즉 전도를 했더니만 당회장 목사가 얼마나 화를 내는지 모르는데, 그래서 행여 엉뚱한 소리를 할까 싶어서 녹음도 하고 글로 써서 돌렸다는 것이다. 나중에 들리는 말로는, 그 당회장의 아버지인 이 머시기 목사도 화를 내었다고 하는데, 그런데 그때 "새해에는 저주를 받으세요" 라는 말을 하지 못해서 조금은 아쉬웠다는 말이다.
◈ 다윗의 저주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
아무튼 다윗은 아는데, 자기를 구원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다루시는 것이 아니라, 마치 아우라처럼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데리고, 실제로 이 세상에 오시는 예수님은 이 세상과는 정반대가 되는 인식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건질 자는 건지신다는 것을, 바로 그것을 미리 앞당겨서 보여주기 위해서 언약이라는 이름으로 지금 자기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노아 때는 방주를 만들었지만, 다윗 때는 다윗이 보여주는 죄 용서함, 그것이 곧 그 당시 방주였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십자가가 곧 구원의 방주이고 말이다. 그러니 그런 십자가 목걸이를 한다고 해서 귀신이 왔다가 "아이쿠, 십자가네. 무서버라" 라고 하면서 도망을 가는가? 거기에다 마늘까지 더해서 말이다. 귀신이 마늘을 싫어한다는 것은 김장김치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말이다(ㅋㅋ).
◈ 언약 속에서, 우리가 왜 죽는지 검토되어야 !!
이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가정의 행복을 주장해도, 하지만 블랙박스로 본 세상에서는 미끄러지면 다 죽는 것처럼, 진짜 우리가 왜 죽는지는 법을, 이 법은 모세율법으로서, 그게 곧 언약인데, 그러니 언약을 알 때, 그 언약 속에서 우리 자신이 왜 죽는지가 검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개인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 전체를 죽이는 것인데, 왜냐하면 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내세우기 때문에, 예수님이 심판하시는 그 심판대 앞에서 그 누구도 예수님처럼 산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심판을 받아서 죽어도 마땅하다는 것이다. 변화산에 나타났던 모세와 엘리야도 역시 그러한데,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 언제 죽습니까?" 라고, 예수님의 별세를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눅 9:30)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눅 9:31)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
◈ 법 - '구원은 저주를 통과해야만' !!
지금까지는 비교적 쉬운 것을 공부했는데, 이제부터는 어려운 것을 한번 해보자는 것이다. 법은 장차 뒤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설명하고, 또한 그 영생을 설명함에 있어서, 반드시 저주를 통과시켜서 구원을 받게 한다는 것이다. 저주를 통과하도록 해서 말이다.
그것은 바로 창세기 3장 22절 이하에 나오듯이, 선악과를 따먹은 자에게는 의도적으로 선악과가 훼손되지 않도록, 그렇게 선악과를 따먹지 못하게 한 원리가 그대로 적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생명나무인데, 즉 예수님은 생명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법이 적용되는 것은, 반드시 저주를 통과한 자에게만 생명이 보인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말이다.
(창 3:22)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 3: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창 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그게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오는데, 즉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게 3장 10절인지 잘 모르겠는데, 갈수록 점점 더 잊어버리는데 말이다. 역시 10절이 아니고 13절이라는 것이다(ㅋㅋ).
(갈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 3: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갈 3: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갈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 예수님은, 율법의 저주로 십자가에 !!
알다시피 예수님은 율법을 다 지킨 분인데,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복을 받았는가? 전혀 그것이 아닌데, 말씀을 다 지켰는데 그 결과가 무엇이었는가? 나무에 매달려서 저주를 받을 때, 그때 "다 이루었다" 라고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 나를 따라오너라" 라고 하셨는데, 그러니 십자가라는 것은, 율법이 몰아세우니 십자가의 저주를 받는 양상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평소에 무엇을 원하는가? 저주를 받는 것은 결코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십자가를 바라보는 두 개의 눈 !!
이것은 이번 겨울 수련회에서 할 내용인데, 그것을 조금만 미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십자가라고 할 때, 성경은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서 분명히 율법의 저주로 십자가에 매달린다고 했다는 말이다. 그것은 성경적 안목이고, 다른 정치적이나 사회적, 경제적 안목으로 십자가를 보면 어떠한가?
십자가라는 형틀은 이미 로마초기부터 있었는데, 그 뒤에 마카비 시대에는 익카누스와 같은 로마의 많은 권력자들이 있었다는 말이다. 바리새인들이 자기에게 감히 잔소리를 했다고 해서 무려 800명을 십자가에 처형을 시킨 적도 있었고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기 위해서는 성경에 보면, 안나스와 가야바 대제사장도 있어야 하고, 그리고 재판을 담당해야하는 본디오 빌라도라는 로마총독, 그리고 예수님을 직접 고소를 하기 위해서 자기 제자인 가룟 유다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
그런 사람들을 끌어 모아서 영화로 만들게 되면, 그런 영화가 실제로도 있었는데 말이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는 장면을 리얼하게 보여주는데,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라고 말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십자가라고 하는데, 그리고 강도가 두 명이 있는데, 살인죄를 저지른 놈도 있고, 또한 민란을 일으킨 자도 있고, 예수님을 대신해 살아난 바라바도 등장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게 과연 십자가냐는 것이다.
그런 주장이 맞으면, 그러면 사도바울은 바보인가? 그것도 모르고 말이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그러한 바보가 전혀 아닌데, 그것을 모두 다 알고 있으면서도 뭐라고 하는가? 예수님께서 저주를 받은 것은 율법을 이루기 위해서, 즉 "율법대로 저주를 받았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도바울이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가? 십자가를 육적으로 아는 것과 영적으로 아는 것이 서로 다르다는 것인데, 즉 예수님의 안목으로 보는 십자가는 무엇을 염두에 둔다는 말인가? 육적으로 인간들이 기껏 아는 십자가를 능가하고 벗어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육적으로 제 아무리 십자가를 보아도 십자가를 모르게 하는 것이 곧 십자가라는 말이다.
그러니 성령이 아니고서는, 제아무리 십자가를 목에 매달고 다니고 또한 차에 매달아 놓고 십자가를 이야기를 해도,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르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십자가에 대해서 논문을 쓰고 연구를 많이 해도 십자가를 모른다는 것이다. 정말로 십자가를 제대로 안다고 하면, 그 논문의 마지막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이렇게 연구해도 십자가를 모르는 것이고, 이것은 기껏해야 인간들이 이해하는 사울적 인식인데, 결코 다윗의 인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십자가는 오직 성령으로만 깨닫게 되는데, 그것은 곧 우리가 인간적으로,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십자가를 안다는 것 자체가 십자가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라고, 그런 고백으로서 논문을 마쳐야 한다는 것이다. (녹취자 - 목사님, 논문이 통과되기 어려울 것 같은데요?)
◈ 사도바울은, 약속과 율법을 대비시킴으로서 !!
사도바울은 이러한 저주를 언급하면서, 그것을 확장시켜나가는데, 어떻게 확장을 시키는고 하니, 여기 앞에 법이 없을 때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법과 무엇을 대비시키는고 하니까,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을 대비시키는데, 그 아브라함의 약속은 믿음으로 의롭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다고 하는 계열과, 율법이 있는데, 이 율법을 "무엇을 하라, 하지 마라" 라고 하는 행함을 요구하는데, 그런데 그 율법의 행함은 의에 이르는가? 그렇지 않은가? 이르지 못하는데, 결국 죄에 이르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지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십자가 복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이 십자가를 여기 가운데다 놓고, 아브라함의 약속도 이야기하고 또한 율법도 이야기해서, 그 두 가지 경우에서 서로가 만날 수 있는 것은, 인간들 중에서 행해서 만날 수는 없다고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 이 십자가는 저주를 받은 십자가로 간주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던 자기의 마음가짐을 율법을 통해서 완전히 노출시키기 때문에 말이다.
◈ 430년 이후에 율법이 주어진 이유는?
이야기를 하다가보니 어렵게 되었는데, 이렇게 법이 있고 그 법을 행하면 의롭게 된다는 것은, 그것은 바로 아브라함의 약속에 율법이 없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즉 아브라함에게 약속이 주어지고 430년 이후에 율법이 새로이 주어졌다는 취지를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을 이 율법을 가지고 아브라함의 언약과 마구잡이로 이어보려고 애쓰고 있다는 것이다. 되지도 않는 일을 말이다.
(갈 3: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갈 3: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
아브라함은 행함이 없이 믿음으로 의롭다고 되었는데, 그런데 인간들은 새삼스럽게 행함으로 율법을 지켜서 의에 이르려고 노력하고 있으니, 그것이 무엇을 유발시킨다는 것인가? 저주를 유발시켰는데, 그런데 고마운 것은 그렇게 저주를 유발시킨 것도 하나님이 이미 알고 계신 내용이라는 말이다.
인간은 아브라함의 약속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 믿음을 전부 무엇으로 바꾼다는 말인가? 결국에는 행함으로 믿는, 그런 믿음으로 바꿀 수밖에 없는 입장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아무리 아브라함이 어떻고 법이 어떻고 해도, 이 십자가라는 것이 없는 이상 인간은 여기 이 자리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 21절과 22절에 보면, "율법으로 말미암아서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다" 라고 하는데, 그것은 율법이 와서 죄 아래에 있었다는 것이 드러날 뿐이지, 아브라함 시대에도 여전히 그들은 어디에 갇혀있다는 것인가? 율법이 오기 전에도 그들은 여전히 죄에 갇혀있었다는 것이다.
(갈 3: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갈 3: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 아하, 역시 행함으로서의 믿음이었구나 !!
그러니 "아브라함 때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죄에 갇힌 것이 아니지 않는가?" 라는 것은, 그들이 아브라함을 분석할 때, 이미 율법적 관점에서 나오는 행함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우리 인간 속의 본질로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다. 즉 그러한 것을 뒤에 온 율법이 비로소 알려주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나도 아브라함처럼 그 하나님의 약속을 믿습니다" 라고 아무리 주장을 해도, 나중에 율법에 와서 보니, 그 믿음도 역시 행함으로서의 믿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결코 아브라함이 믿었던 그러한 믿음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 아브라함의 믿음은, 아브라함 본인도 안 돼 !!
그러면 아브라함이 믿는 믿음은 어디서 나오는가? 그것은 아브라함 본인도 안 되는데, 물론 이삭도 안 되고, 야곱도 안 되고, 우리도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 자손은 예수님밖에 없기 때문에 말이다. 바로 그 아브라함의 자손인 예수님이 오셔서 믿음을 발생시키게 되면, 그 믿음이 아브라함에게 믿음으로 미리 전달이 되어서, 그래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복잡한지 모르는데, 하지만 왜 그렇게 되는고 하니까, 그것은 자꾸만 무엇을 끊으려고 하는가? 우리가 믿는 믿음조차도 행함에 속한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냄으로서,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이 두 가지 경우를 유일하게 연결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물론 아브라함의 언약이 있지만, 그러나 제 아무리 아브라함이라고 해도 그 아브라함 언약을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아브라함 언약' 이라는 것은, 즉 "믿음으로 의롭다" 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아브라함이 사로잡혔을 뿐이지, 아브라함이 그 언약을 지켜서 아브라함이 구원을 받아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그러면 아브라함은 예수님이 오실 이유도 없고 아브라함이 예수님을 기다릴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아브라함 자기가 잘나서 구원을 받으면 그만이니 말이다. 이삭 대신에 수양이나 바쳐서 천국에 가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기에 아브라함은 예수님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요 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그것은 모세도 마찬가지이고, 엘리야도 마찬가지인데, 그들은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싸움을 다윗 때도 하고 있는데,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 벌리시는 싸움을 말이다. 물론 그것이 겉으로는 "돌팔매인가? 창인가?" 라는 것으로 보이지만, 노아 때는 "방주 안인가? 방주 밖인가?" 라는 것으로 보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사실은 무엇인고 하니까, "누구의 성실함인가?" 라는 것인데, 즉 "언약을 인간 쪽에서 지켜서 구원을 받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언약을 지켜서 우리가 공짜로 구원을 받는가?" 라고 하는, 바로 그러한 복음적인 싸움이라는 것이다.
◈ 지난 30년 동안 !!
제가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지난 30년 동안, 10년 동안의 우리교회나, 그 이전의 박사교회, 그리고 또한 그 이전의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다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