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겨울수련회 130115
2013년 겨울수련회 130115
이름 : 이근호(IP:119.18.69.144)
한윤범(IP:14.♡.134.60)
13-01-19 11:34
2013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1강
(강의:이근호 목사)
기도합시다.
낯선 장소지만 다시 말씀으로 모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인생이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오늘밤이라도 본향인 천국에 갈 수 있도록 성령께서 저희들을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에스라라는 이 책이 어느 수풀 속에 잡혀있는가? 역대상, 역대하 그 뒤에 있습니다. 에스라, 느헤미아 끝나고 바로 시작되는 게 뭔가? 에스더 그 다음에 되고 욥기가 나오거든요. 역대상, 역대하,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는 전부다 역사에 관한 이야기고 그 다음에 나오는 욥기는 어떤 인물에 관한 이야기로 그렇게 배치가 돼있습니다.
역사라 하는 것은 역사에 대해서 엑기스만 알고 역사 자체를 알맹이만 빼먹고 버리면 그만이지 않느냐고 생각할 겁니다. 역사란 지나간 과거 이야기기 때문에. 과거를 현재 사는 사람이 다시 경험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에스라가 됐든 어떤 역사가 됐든 성경은 역사라 하지 않습니다. 그건 하나님의 계시라고 이야기합니다. 역사라고 할 때는 지나가면 그만이지만 하나님의 계시가 될 때는 되풀이가 돼요. 하나님의 원리가 되풀이가 됩니다. 지나간 역사는 없다는 거예요. 천 년이 하루같이 하루가 천 년처럼. 네 선에선 지나간 걸로 보이지만 나는 지나난 걸로 보지 않고 너희들에게 된 통으로 뒤집어씌우겠다고 나오시는 거죠.
그러면 에스라, 느헤미야 이런 것은 분명히 지나간 건데 우리가 어떻게 그 역사 속에 뛰어들 건가? 라고 생각할 겁니다. 에스라, 느헤미야의 원칙을 우리에게 뒤집어씌우면 우리가 구태여 과거 그때로 돌아갈 필요가 없는 겁니다. 실제로 에스라, 느헤미야로 우리가 돌아갈 방법도 없어요. 시간인데 어디로 갑니까? 장소 같으면 이스라엘 있지만 시간은 이미 흘러가버리면 추억이지 그때 그 상황이 만들어지지는 않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역사가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라면 제가 되풀이 된다고 했지요. 그러면 되풀이 될 때는 어떤 원칙으로 되풀이 되는가? 그것을 아시면 되는 겁니다. 에스라의 계시인데 역사란 형식으로 하나님의 계시가 이 안에 있습니다. 역사란 이름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한다면 거기에 그때 무슨 일이 있었던가 하는 이야기에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어려워집니다. 에스라, 느헤미야 시대에 그때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어떤 일이 있었느냐 하면, [나라 같지도 않는 나라] 나라긴 나라인데 나라 같지도 않는 나라. 이걸 같잖지도 않다고 이야기하죠. 참 웃기네. 이게 무슨 나라야 할 정도죠. 나라라고 이야기하면서 나라 같지 않는 나라 그러면서도 세상 모든 나라를 해석하는 그런 기능을 한다. 나라 같지도 않은 나라인데 이 나라가 기존의 모든 나라를 평가하고 심판의 권한을 가진 나라, 그 나라가 바로 에스라, 느헤미야가 세웠던 나라입니다.
나라 같지도 않아요. 어떤 나라라고 이름 지을 수도 없는데 기존의 모든 나라를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나라가 되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니들은 심판을 받아 봤어? 그래서 나라가 몽땅 망해본 적이 있어? 안 망했으면 말을 하지 마!” 그러면 기존의 나라가, “우리도 망했어. 이웃 나라한테 망했어.” 이쪽에 에스라, 느헤미야가, “이웃 나라한테 망한 것 말고 하나님한테 망한 폭삭 망해봤어? 안 망해봤으면 말하지 마.”
하나님에 의해서 이스라엘 나라가 완전히 망했습니다. 망했다는 표현을 흩어졌다, 흩어진다는 식으로 표현한 거예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하는데 흩어져서 다 죽었어요. 나라 자체가 완전히 폭발해서 파편들이 다 튀었습니다. 튀어진 현장에서 이걸 다시 주워 모을 때 심판으로 튕겨나간 그 파편들을 무슨 수로 다시 모읍니까? 하나님의 심판으로 조각조각 나버렸는데 그걸 다시 모으려면 심판보다 더 센 위력으로 모아져야 심판을 극복하고 모아진 나라가 될 거란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에 의해서 된 통으로 얻어맞은 나라는 이스라엘 나라 외에는 없습니다. 그들은 깨어져도 자신의 힘으로 다시 모았어요. 사람의 힘으로 깨어졌기에 얼마든지 사람의 힘으로 다시 모아질 수가 있습니다. 십자가마을이 폭파가 됐을 때 다시 모은다면 그 폭파했던 그 힘을 능가하는 힘이 있어야 처음부터 하나님이 손대서 폭파시켰다는 것이 증명이 됩니다. 슬슬 말이 또 어려워진다.
하나님이 모았을 때는 너희들을 깨뜨렸던 당사자가 다시 모으기 때문에 깨어질 때의 하나님이나 모으는 하나님이 하나가 된다면, 하나님에 의해서 조성된 나라라는 것을 확실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들 나라 중에서 “내가 알아서 왔습니다. 내가 알아서 기어들어왔습니다.” 이런 소리 하게 되면 이것은 다른 나라를 심판하는 권한이 없어요. 그런데 그 정도는 다른 나라도 충분히 해내요. 이것은 다른 나라를 평가하고 다른 나라를 심판하려면 다른 나라 구성에 대해서 흉내도 못내는 요소가 그들에게 있어야 돼요.
신약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나라의 백성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19장에 보면, 너희는 거룩한 백성이라 하는데 하늘나라가 너희 것이다. 거기에 보면 뉘앙스가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면 하나님의 백성이거든요.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내 힘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왔다는 여기서 완전히 삭제가 돼야 됩니다.
예를 들어서 혼인잔치에 갔다. 혼인잔치에 사람들이 모여 있더란 말이죠. 주최 측에서 “여러분들 여기 왜 오셨지요?” “임금님 아들 잔치하는데 와 봐야지요.” 이런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왜 오셨습니까?” “그저 길거리에서 놀고 있는데 그냥 오라고 했잖아요.” 그냥 막 부른 거예요. 그냥 막 불러서 왔기에 내가 여기 왜 있느냐는 것은, 내가 이유를 댈 수가 없고 부르신 분이 이유를 나한테 뒤집어씌워야 됩니다. 그런 고백만 할 뿐이에요. 그게 아들이 혼인잔치에요. 그게 하늘나라의 구성요건입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은 바로 신약시대 이야기에요. 지금 우리는 신약시대에 막 진입하려는 시점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이스라엘 요소와 신약에 방금 이야기한 혼인잔치, 막 불렀다는 요소, 중간에 과도기적으로 이스라엘 요소와 이쪽 요소가 같이 융합, 포함돼있겠지요. 이 점에서 에스라, 느헤미야를 파악할 수 있는 준비단계가 서서히 갖춰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다시 이야기하면 이스라엘이 망해야 중간과정이 되고 신약으로 가는데 이스라엘이 안 망하고 하늘나라 만들기는 없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이스라엘이 망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고요. 그러니까 지금 이스라엘 나라가 차지하고 있는 땅은 솔로몬과 다윗의 영토가 아니지요. 심지어 예루살렘이란 지역도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그 다음에 이슬람 세 파트 또 한 파트는 그리스 정교회에서 차지해요. 예루살렘이란 옛날 다윗의 수도가 넷으로 구역이 나누어졌습니다. 1920년대 상하이가 프랑스령, 영국령, 일본령 등으로 나누었듯이 각각 자기 자치구역이 따로 있었잖아요.
그처럼 예루살렘도 현재 그렇게 돼있어요. 소유권 등기가 복잡하게 돼있습니다. 워낙 많은 나라가 예루살렘을 탐을 내서 자기 종교적인 본토로 삼는다고 전쟁을 하다보니까 역사적으로 굉장히 복잡한 긴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십자군운동 때는 모조리 15만 명 죽여 버리고 유럽의 귀족들이 차지했다가 나중에 이슬람이 덮쳐서 그들이 차지했다가 이래 당하고 저래 당하고 복잡해요.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나라가 망했다는 것은 현재 이스라엘도 알고 있어요. 그런데 여기서 계열이 두 개 나옵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망했으니까 우리도 주변 나라들처럼 나라 만들자고 해서 하나님이 심판했지만 인간적으로 다시 이스라엘을 회복하자는 쪽의 노선이 하나 있습니다. 이걸 A라는 노선이라면, 다시 옛날 이스라엘을 회복하자. 예레미야가 70년 만에 돌아와서 나라 세운다고 하니까 우리는 믿고 옛날 영화를 회복하자. 지금도 유대교인들은 다윗이 감람산에 재림해서 다윗 왕 같은 다윗의 자손 메시아가 와서 나라 세운다고 아직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유대인만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보수적인 미국에 있는 부흥 운동하는 세대주의나 오순절 계통은 다 그렇게 알고 있어요. 거기서 노벨평화상도 나오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 이스라엘에서 나오는 것은 기존의 나라와 같이 이스라엘을 만들자는 쪽이 있고 에스라, 느헤미야는 나라 같지 않은 나라죠. 이것은 기존의 나라와는 달라도 너~무 달라. 나라인지 아주 애매모호해요. 그런 노선으로 가는 거예요.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 천국으로 이어지는 겁니다. 이걸 B노선이라면 A라는 노선 사이에 분명히 서로 같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사건이 있는데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 사건이에요.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가 아니라고 죽였던 사람은 기존에 자기들이 생각한 그 나라에 비해서 절대로 예수님은 메시아가 될 수 없다. 예수님이 주장하는 나라는 우리가 기대했던 그 나라가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B노선, 예수님 노선이죠.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B라는 노선에 속하려면 천국을 기다린다고 될 문제가 아니고 어디로 가야 되느냐 하면, 이스라엘이 망했던 그 지점으로 다시 돌아가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릴 그런 자격도 없다는 걸 분명히 확실하게 알아야 돼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때 멸망시킨 그 취지가 뭐냐? 자기 나라인데 자기가 쳐버려요. 이게 말이 됩니까? 그 원리는 이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계속 이어져나갈 건데요. 하나님이 자기 나라를 자기가 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아마 그 당시 사람들이 뭔가 하나님을 잘못 믿었겠지. 지금도 교회 목사들이나 신학자들이 다 그렇게 생각해요. 그들이 뭔가 잘못이 있어서 쳤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아닙니다. 신명기 끝에 보면 원래 망하는 나라를 하나님께서 만드셨어요. 망하라고 만들어놓은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이 교회 왜 만들었는지 압니까? 망하라고 교회 만들었어요. 제대로 망한 사람은 하늘나라를 뚜렷하게 확실하게 보고 있고, 아직도 교회가 안 망한 쪽은 아직도 교회에 미련 갖고 있고. 그저 새해에 저주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것은 창세기 2장의 선악과 따먹은 인간으로서는 그동안 버티고 온 것도 다행이다. “진작 망해야지.”라는 식으로 이스라엘 망할 때 바탕을 창세기까지 다 바닥을 연결시켜서 이스라엘 망한 걸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망한 이유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 망한 이유를 아는 사람은 그것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다시 규합되기 때문에 안 거예요. 다시 아까 이야기할게요. 하나님께서 망하게 한 이유를 안 사람만이 되돌아온 사람이에요.
예수님께서는 그런 비유를 탕자란 비유로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본인이 아버지 집을 떠났습니다. 이제는 아버지 집과 본인과 아무 상관이 없어요. 왜? 돈이 있으니까. 내가 받을 유산을 미리 당겼으니까. 이제는 아버지는 별 볼일 없어요. 아버지란 존재는 나한테 돈을 남기는 한에서 아버지인데 돈이 나한테 있으니까 아버지는 없는 거예요. 그런데 돈을 다 썼다. 그건 아버지를 다 쓴 거예요. 돈을 다 썼다는 것은 아버지 주신 유산을 다 쓴 거고 동시에 아버지마저 다 써버렸어요. 이제는 아버지도 없고 달랑 자기만 남아있는 거예요. 그래서 탕자가 집에 갈 때는 아들의 자격으로 가지 않습니다. 혹시 아르바이트 자리나 있을까 싶어서 갔거든요. 그런데 세상에 내 쪽에서는 아버지가 없는 존재인데 아버지는 아들이 어디 멀리 가더라도 계속해서 있는 존재가 되는 거예요.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구원받고 싶어서 구원하는 게 아니고 창세전부터 구원받기로 작정돼있기 때문에 구원에 필요한 요건들을 자꾸만 충족시켜주고 리필해주는 겁니다. 리필이란 말이 적당하네. 죄 용서받았는데 또 죄 지면 거기다 죄 용서를 또 리필해주고. 그걸 사자성어로 무한리필이라 해요. 그것은 우리가 착하니까 용서받는 게 아니고 우리라는 이 자리가 이미 주님에 의해서 할당된 자리고 그 자리에 총책임자가 우리가 아닙니다. 나의 구원의 책임자는 내가 아니기 때문에 내 구원을 위해서 내가 뭔가 애쓴다는 것은 자기 주제파악을 못 한 거예요.
박근혜 인수위원회가 만약에 위원 중에 하나가 법무부에 상주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에요? 지금은 이명박 정부이지만 좀 있으면 박근혜 정부로 바뀌기 때문에 인수하기 위해서 미리 가 있잖아요. 우리 안이 성전이 된 이유는 우리 안에 인수위원회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인수위원회는 성령이에요. 박근혜 영이에요. 성령이 보증으로서 인을 친다고 고린도후서 2장에 나오지요. 보증으로 들어와 버리면 우리는 내 인생을 내 소유로 등기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망하는 절차를 거쳐야 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건질 때 족집게로 건지는 것이 아니고 무슨 정보를 깔아두고 그 정보에 준해서 우리를 구원하는데 그 정보가 십자가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마저 심판받았다면 너도 그 심판 경험에 동참하지 아니하면 아들의 나라에 올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이런 생각들이 머리에 안 들어오는 이유는 자꾸 내 쪽에서 죽고 난 뒤에 더 좋은 나라에 가려는 그런 시도를 하기 때문에 그래요. 오늘 아침도 그런 이야기했지만 천국은 위락시설이 있는 곳이 아니에요. 노인 복지시설 갖춘 곳이 아닙니다. 우리가 원하는 시설 갖춰놓은 곳이 아니에요. 화장실이 필요하고 그런 것 없습니다.
천국에 없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선악과나무가 없어요. 악한 것이 없어요. 해와 달이 필요가 없습니다. 그게 우리 때문에 필요 없는 줄 알아요? 예수님 때문에 그게 철거된 거예요. 없어진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오해하기를 그저 얻어먹고 사는 주제에 자기 때문에 그게 없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뭔데 우리를 위해서 그런 시설을 마련합니까? 정말 천국이 우리를 위한 곳이라고 거기에 반드시 당구장 있어야 돼요. 안양에 계시는 윤덕규 집사님은 나이 67세인데 지난 목요일에도 아침 10시에 가서 오후 4시까지 치고 왔답니다. 당구 없었으면 어떻게 했는지 몰라. 복지시설에서 치신답니다. 한 당구 하시는 모양이에요.
당구를 만약에 신봉한다면 천국에 가도 지옥 가고 싶어 환장합니다. 도저히 살고 싶어도 못 살아요. 심심해서. 스마트폰이 있습니까, 개콘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즐길 게 없는데. 심심해서 한 번은 생명나무에 헤엄치다가 선탠하다가 과실 따먹어봐야 맨 그 맛이고 식상해서 맛도 없고. 주님께 면류관 던지는 것은 순번제로 해서 조짜서 하는 게 천국입니까? 차라리 지옥 가서 하나님 원망하는 재미로 하나님 헐뜯는 재미로 사는 게 훨씬 편해요. 요새 복지시설 다 돼있습니다. 저래서 천국 어떻게 가려는지 몰라. 그렇게 재미있어요.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멸망한 것은 인간은 어떤 식으로도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히 한 겁니다. 탕자가 될 때 믿음 생기는 게 아니에요. 탕자는 탕자일 뿐이지 탕자라고 믿음 생기는 게 아닙니다. 인간은 원래부터 믿음이 없었던 거예요. 제가 인간이 믿음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드리겠습니다.
나는 누구를 믿는다고 보통 이야기하죠. 나는 너를 믿는다 할 때 반드시 전제되는 조건이 하나 있어요. 나는 네가 아니고 너는 내가 아니다가 반드시 전제돼있어야 돼요. 이걸 아리스토텔레스의 모순율이라 하거든요. 너는 나이든지, 너 아니든지 나는 나 아니든지 너 이든지 둘 중에 하나다. 이걸 배중률이라 해요. 그 다음에 또 한 가지 동일률이 있는데 나는 항상 나다. 일반 사람이 들어보면 이 말이나 저 말이나 똑같은 말이에요. 그래? 그렇지. 그래서? 어쩌라고? 결국 남는 건 그거거든요.
나는 나다. 반대해? 반대 안 해. 그럼 오케이. 나는 나이든지 나는 내가 아닌 것이 아니든지. 둘 중에 하나다. 나는 내가 아니고 너는 내가 아니다. 그래서? 그래서 어쩌라고? 이건 아무것도 아닌 상식의 문제기 때문에 이걸 철학이라고 따지는 철학자가 웃긴다고 생각하겠지요.
문제는 여기서 간단하게 풀리는 게 아니에요. 나는 너를 믿는다 할 때 반드시 조건이 동일률, 배중률, 모순율에 의해서 나는 너와 같지 않을 경우에만 믿는다가 성립해요. 그렇다면 나는 예수를 믿는다 할 때는 무슨 이야기입니까? 나는 나고, 예수는 예수고, 나는 예수가 아니고 예수는 내가 아니라는 것을 전제로 할 때 믿는다는 말을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믿는다, 무엇을 믿는다는 리스트 가운데 나를 집어넣어보자. 나는 나를 믿는다. 이게 반칙이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믿는다 할 때는 반드시 내가 아닐 경우에만 믿는다는 말을 쓰는데 나는 나잖아요. 그럼 나는 난데 내가 나를 믿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결국 나는 나를 믿는다는 말이 쓸데없는 소리 한 거예요.
왜 그 소리를 나 보고 이야기하고 남 보고 이야기하는가? 뭐가 그렇게 결핍을 느껴서 무엇이 미흡해서 뭐가 불안해서 무엇이 걱정이 되어서 나는 나를 믿는다. You raise me up해서 나는 믿는다. 나는 할 수 있다. 너, 왜 그래? 왜 쓸데없는 소리하는 거야. 왜 다짐에 다짐을 하느냐 말이죠. 왜 그런 소리 하는데?
나는 예수를 믿는다. 나는 너를 믿는다. 나는 학교를 믿는다. 교회를 믿는다. 하나님을 믿는다 할 때 이 믿음이란 내용이 나를 믿을 때 믿음 내용이 아니에요. 같은 믿음이란 용어를 쓰지만 같은 게 아닙니다. 그럼 같은 게 아니라면 나는 나를 믿는다는 이 말을 기준으로 봅시다. 나는 나를 믿는다는 것이 원래 본심이에요. 중요한 대목이니까 잘 들어보세요. 나는 나를 믿는다. 이것은 변치 않는 말하나 안 하나 당연한 겁니다. 그렇다면 이것 빼놓다 나머지는 다 거짓말이 되는 거예요. 나는 예수를 믿는다는 말이 거짓말인 이유가, 실은 예수를 믿고 있는 나를 믿는다는 뜻이에요. 어디서 거짓말이에요. 믿음도 없으면서. 교인들이 전부다 그래요. 피에로는 웃고 있지만 전부다 가면무도회에요.
두 사람이 대화를 합니다. 반갑습니다. 우리는 의견이 일치됐습니다. 니 마음대로 의견이 일치돼. A라는 인간이 B한테 이야기한 것은 전부 자기한테 이야기한 거예요. B도 자기에게 이야기했죠. 둘이 그냥 헤어지기 섭섭하니까 “이번에 의견이 잘 됐죠. 우린 계약이 성사되었습니다.” 저희끼리 계약하고 했어요.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라 하잖아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약속을 주신 것은 어느 인간도 약속을 믿지를 못하게 돼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치면서 이게 믿음이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심판하면서 “믿음 보고 싶지? 이게 믿음이야.” 하나님이 자기 하나님을 죽여 버려요. 그리고 이야기하기를 “너희들이 너희 자신을 죽일 수 있니?” 다른 말로 해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수 있느냐? 택도 없는 소리에요.
오늘 아침에도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나는 나를 잊어야 한다고 했는데 나는 나를 잊었을까, 안 잊었을까 판단하려면 내가 설정돼야 되고 설정되어서 “맞아. 나는 잊은 상태야. 아니야. 덜 잊었어.” 그걸 판정해야 될 나를 또 하나 새로 만들게 돼요. 그러니까 인간에게 있어서 믿음이란 애초부터 그야말로 자기 자신을 믿는 겁니다. 나는 나를 믿는다는 여기서 한 발자국도 벗어난 적이 없어요. 볼을 잡아당긴다고 떨어지지는 않잖아요. 잡아당기고 놓으면 다시 원래 자리에 붙어있지요. 목사님이 와서 “믿으세요.” 하고 볼을 당기지만 놓으면 도로 붙어버려요.
그러니 이 사실을 부모들이 아셔야 될 것은 부모들이 자식에게 “너는 예수를 믿어야 돼.” “걱정하지 마. 믿고 있어. 엄마, 아빠 걱정하지 마. 나는 엄마, 아빠 모습대로 예수 잘 믿고 있는 거야.” 성경에 나오는 말씀대로 “주여, 저들이 하는 말을 저희들도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하나이다.” 우리 여기서 정리합시다. 믿음은 없는 겁니다. 애매한 것 정리했습니다. 전부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믿을 뿐이지 어떤 인간도 믿지를 못하는 거예요.
믿음은 없는 거예요. 믿는다는 말은 전부다 거짓말입니다. 하나의 가면이에요. 어디 가려면 마스크 쓰잖아요. 어떤 사람은 두 개 쓴 사람, 세 개 쓴 사람 있는데 그것은 누구나 세상 살다보면 서너 개 달라붙어요. 어린애는 얇지만 어른 되면 두꺼워서 어느 가면을 써야 될지 이 자리에서 어떤 가면을 바꿔 써야 될지 나중에 그것도 헷갈리게 돼요.
에스라, 느헤미야는 나라는 나라인데 나라 같지 않아요. 왜냐하면 여기에 왕이 없어요. 왕이 없어도 제사장은 있을 게 아닌가? 있지요. 그게 바로 제사장입니다. “아, 그 제사장.” 이렇게 생각하면 안 돼요. 이미 이스라엘 망할 때 왕도 망했고, 제사장도 망했고, 선지자도 다 망했어요.
그러면 여기에 말하는 나오는 주제가 뭐냐? 총독입니다. 교재 봅시다. 스룹바벨, 에스라, 느헤미야, 사람들 등장하죠. 총독이이에요. 세상에서 말하는 총독이 맞습니다. 총독의 기능은, 총독은 파견이 되거든요. 파견자가 갑이고 총독은 을이란 말이죠. 분명히 파견한 사람이 있는데 에스라, 느헤미야에 나오는 스룹바벨이란 총독으로서의 일은 지시자가 숨겨져 있어요. 어디에, 어느 장소에, 어느 동네에? 미래에 숨겨져 있어요.
그렇다면 바사 왕, 페르시아죠.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BC539에 고레스가 파견했으니까 스룹바벨보다 더 높은 사람이 맞잖아. 그리고 총독이니까 결국 아무리 에스라, 느헤미야가 나라를 만들어도 바사나라, 세상적으로 페르시아 나라의 일개 조공을 바쳐야 될 속령에 불과하지 않느냐고 생각하는데 뜸 들이지 않고 미리 말씀드리면, 이것은 율법이 파견한 총독이라고 보시면 돼요. 율법을 지켜야 될 이스라엘은 망해도 율법은 살아있네.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사람한테는 안식일과 십일조는 어떻게 되는가? 여전히 안식일, 십일조는 살아있어요. 어느 누구도 아무리 복음 안에 있어도 안식일, 십일조를 지킬 수가 없습니다. 십일조를 무슨 수로 지킵니까? 안식일을 무슨 수로 지킵니까? 십일조, 안식일 이런 것은 우리로 죄를 더욱 죄 되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십일조, 안식일이 언제 유효하냐 하면, 언제 필요하냐 하면, 십일조, 안식일을 지킬 수 있다는 가짜를 색출해서 지옥으로 보내기 위해서 그럴 경우에만 율법으로서 기능이 필요한 거예요. 아예 못 지킨다고 하면 될 건데 지킬 수 있다고 나온다면 가짜 뽑아내는 거예요.
율법의 나라입니다. 율법의 나라가 에스라, 느헤미야가 생각했던 숨겨진 나라입니다. 그 지도자 스룹바벨 총독이라 하는 것은 역사적으로는 페르시아, 바사나라의 고레스에게 속해져있어요. 제가 진도 빨리 나갈 수 있지만 이런 대목에서는 여러분들이 취약성이 있어서 천천히 하겠습니다.
현재 이탈리아가 여기 있고 시실리 섬, 크레타 섬 있고, 그리스, 마케도니아, 아가야. 이쪽으로 터기, 지중해. 티그리스 강, 유프라테스 강이 갈라져 나오고 강 사이를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페르시아 만, 현재 이란이 되겠죠. 카스피 해, 흑해 있고. 그 다음에 이쪽에 홍해와 페르시아 만 사이가 아라비아 반도거든요. 앗수르란 나라에 수사가 수도인데 니느웨란 상업적 도시가 있어요. 미국으로 하면 뉴욕이고, 수사는 정치적 수도 워싱턴이고. 이쪽에 있는 앗수르가 이란부터 터키까지 접수를 했습니다. 앗수르가 BC609에 망하는데 이 시대를 철기시대라 합니다. 그전은 청동기시대고. 청동기에서 철기로 넘어가는데 페니키아라 하는 베니게 나라가 있는데 해적들이에요. 그 다음에 청동기시대는 망하고 철기시대로 들어가는데
철기시대, 청동기시대 구분이 무슨 의미냐 하면, 보통나라는 자기가 과수원하면 과실 먹으면 돼요. 그런데 싸움이 일어났다. 사과 던지고 싸웁니까? 그러면 보리 많이 키우면 보리집단 던지며 싸우겠네요. 청동기고 철기고 하는 그 기준은 역시 남의 것을 약탈하는데 있어서 사용되는 무기의 재질이 무엇인가가 중요한 겁니다. 어설프게 구리와 주석 섞어서 나의 칼을 받으라고 하는데 여기에 강철 검을 만들어서 싸우면 게임이 안 되잖아요.
금속과 기술의 발달은 광산을 누가 확보하느냐에 있고, 광산을 확보해도 광물을 캐내는 노예를 확보해야 되고 그 다음에 그 광물을 본국으로 이동할 때 상인들을 보호해야 될 호위병들을 누가 장려하느냐에 따라서 국가가 커지는 겁니다. 몸집이 커진다는 것은 거의 대부분이 불로소득이라고 보면 돼요. 노동은 네가 해라. 차지하기는 우리가 하겠다.
이런 나라에서 이스라엘 나라가 있습니다.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서 망하고, 남쪽은 앗수르가 609년에 망하고 난 뒤에 최종적으로 586년에 유다가 망해요. 망한다는 말은 이스라엘은 청동기도 상관없고, 철기도 상관없고 이방나라 동네에서 하는 노는 이야기지 이스라엘은 꾸준하게 여호와만 섬기면 여호와가 책임지는 이유가,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적과 맞닥뜨리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속에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 나라와 싸우게 돼있어요.
애굽에서 나올 때 애굽 군대가 히브리인들을 상대해서 총 쏘고, 활 쏘고 했습니까? 출애굽기에 보세요. 그들이 홍해에 빠져 죽은 것은 그들 눈에는 히브리인들을 좇아간다고 했지만 사실은 보이지 않는 여호와의 이름을 공격하는 것이다. 따라서 애굽은 여호와 이름을 적으로 상대했던 애굽의 병사에요.
그래서 우리 생각은 이렇습니다. 자기 백성을 그냥 홍해에서 건져왔잖아요. 그러면 손 털면 그만이어요. “내 백성 건졌지. 너희는 못 따라오지. 약 오르지. 집에 돌아가.” 이러면 될 문제인데 그것은 히브리인들 입장이에요. “큰일 날 뻔했다. 바닷물이. 안 그랬으면 다 죽을 뻔했어.” 하고 그냥 가면 될 텐데 하나님은 인간의 구원문제가 중요한 게 아니고 하나님이 여기 있음을 드러내는데 우리를 데리고 활용할 뿐이었어요.
따라온 그들을 홍해에 몰살하게 된 것은 히브리인들을 건드린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히브리인들과 함께 있는 누구와 함께 있는 게 중요하다. 함께 있는 여호와 이름을 건드리면 너희는 죽는다는 뜻이에요. 성경에 모든 것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가 있는 것이지 우리 위해서 주님 있는 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실 경우도 우리에게 어떤 일을 시키는 경우도 우리 자존심을 위해서 주는 일은 없습니다. 그건 마귀들이 제공한 거고. 진짜 일은 내가 나의 힘으로 살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고백케 함으로써 다른 사람과 차별화시킬 경우에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거예요.
그렇게 은혜를 주기 위해서 항상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절대로 예측 못하는 것을 우리에게 주셔서 내가 하나님을 스스로 가로막는 일이 없도록 사전 작업에 들어갔어요. 그걸 기도라 하고 그 기도의 핵심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그 다음에 뭐죠? “그 이름이 영화롭게 하옵소서.” 이거잖아요. 그러니까 이방인 기도는 항상 자기 쪽으로 회수하는 쪽으로 저것 주옵소서. 이것 주옵소서. 반복해서. 그럴 때 주님께서 너한테 뭐가 있어야 되는지 미리 안다.
그러니까 그따위 기도하지 말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을 영화롭게 하옵소서.” 그 기도하라는 게 주의 뜻인데 그 기도를 하라니까 우리교회고 십자가마을이고 아무도 기도를 안 해. 참 재미나는 현상이에요. “목사님, 기도할 게 없습니다.” 그동안 나는 나를 위해서 살아왔다, 나는 나를 믿는다는 식인가요?
이스라엘 나라가 586년에 멸망당한 것은 성경에 분명히 나와 있어요. 이 나라한테 멸망당한 것이 아니고 애굽 나라가 누굴 공격하다가 홍해 빠져 죽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 공격하다 빠져 죽었어요. 이스라엘이 애굽 나라 짝이 난 거예요. 자기가 모신 하나님을 자기가 믿지 못해서 공격한 겁니다. 왜 믿지 못했느냐 하면, 주변 나라는 너무너무 잘 살아요. 심지어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해요. 그 선악과 따먹은 자질이 어디 갑니까? 실력이. 하도 없이 사니까 꾹 참고 살 뿐이지요.
전에도 강의했잖아요. 촌에서 살 때 텃밭에 시금치나 먹고 살지. 하던 사람이 유산을 많이 받아서 촌에 안 살고, 광주에 안 살고, 부산 안 살고. 사모님도 만약에 강남에 산다면 완전히 하루아침에 강남스타일로 바뀝니다. 놀 때는 머리 풀고 노는 여자 다 돼버려요. 갈 때까지 가볼까요? 강남스타일은 정해 논 게 아니에요. 누구나 강남에 살면 마음속으로라도 강남스타일 되게 돼있어요. 가락교회에 나오시는 윤덕규 집사님은 송파구에 살다가 지금은 완전히 안양스타일이 돼버렸어. 사람은 그 사람이 사는 동네에 따라서 스타일이 거기에 융화되기 마련입니다.
나라는 것은, 내가 소속돼있는 환경이 무엇을 말해주느냐는 거예요. 이게 앗수르 나라입니다. 너무너무 잘 살아요. 얼마나 잘 살았으면 아하스 왕은 종교까지 앗수르 종교로 바꾸었습니다. 왕이 종교를 바꾼다는 말은, 왕의 임무는 백성들의 행복을 충족시키는 임무잖아요. 왕이 종교를 바꿨다는 말은 사실은 백성들이 은근히 왕에게 그걸 요청하고 있었고 이미 분위기 상 안 바꾸면 자기가 정권 테러당할 입장에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멸망당할 때는 왕만 당하는 것이 아니고 온 백성이 함께 당하는 것은 분위기가 그런 식으로 형성된 겁니다. 그 속에서 선지자들이 얼마나 노고가 많았겠습니까. 전혀 사람들이 선지자의 말을 이해를 못하죠. 선지자는 천상회의에 참석하고 온 사람이기 때문에. 선지자는 하늘나라 인수위원회에 참석하고 왔거든요. 밑에는 정권 바뀔 생각도 없는데요. 육에서 나온 것은 육으로, 아까 게장 먹었지요. 게처럼 옆으로 가는 거고 선지자는 위로 가겠다는데 무슨 수로 위로 갑니까? 기껏해야 위로 가는 대신 옆으로 가는 것으로 때우려고 억지를 부리죠.
그래서 이스라엘이 멸망을 함으로써 이스라엘은 새로운 전기를 마련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세웠다. NO. 그것으로 안 돼.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의해서 망했다. OK. 이제는 하나님에 의해서 망한 나라가 하나님이 세웠다와 결합되면서 새로운 이스라엘은 망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긍휼로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이제는 무결점으로 나라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망하게 한 것은 뭐가 부러웠다? 세상 나라가 부러웠다. 이제는 새로운 나라가 용솟음치면서 주변 나라는 그 빈터에 던지게 돼있습니다.
옛날에는 이 나라가 강성하니까 이스라엘이 부러워했는데 이제는 이스라엘이 솟구쳐올 때 다른 이방나라들이 이스라엘을 부러워할 때가 올 것이라고 미가나, 하박국이나 작은 선지자 책에 이사야에 보면 장차 야곱의 영광이 여호와의 영광이 빛날 것이라는 말로 그렇게 선지서가 끝이 나죠. 이 말에 대한 또 곡해와 오해 그것은 두 번째 시간에 계속 시작됩니다.
한윤범(IP:14.♡.134.60)
13-01-19 11:35
2013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2강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에 제가 언급한 것은,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나라, 일단 그 나라에 대해서 이스라엘이 부러워했고 그쪽 나라와 같이 되기 위해서 그쪽 나라의 종교를 굉장히 신봉할 수밖에 없었고 정말 이방신을 섬겨도 나라만 크게 잘 되면 그것이 하나님의 복이라고 여기고 싶은 심보가 결국 이스라엘로 하여금 스스로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원수의 백성으로 자초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비록 껍데기는 여호와를 섬겨도 사실은 마음은 딴 데 가 있는 거예요. 우리도 바알 섬겨서 저 나라처럼 될 수 있다는 쪽으로 간 거예요. 바알신의 특징은 요새 말로 CEO 같은 거예요. 신도 기능별로 있어서 그냥 노는 회장님 격의 신이 있는 반면에 실제적으로 일을 다 처리하는 그런 CEO, 기업형 사장님이죠. 이게 바알신인데 아까 이집트 아라랏 산 이쪽 나라에서 대유행했던 신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이 바알신을 섬기는 이유는 이게 기업형이면서도 계급을 갖고 있는 신이 돼요. 계급의 질서를 정립할 수 있는 그런 것을 요청하는 신이 되는 겁니다.
사람들이 왜 이런 신을 좋아했느냐 하면, 그 당시 지도자급들이 좋아하죠. 밑에서는 안 좋아하고. 왜 왕들이 이런 신을 좋아했느냐 하면, 하늘과 밑에는 땅이 있는데 동양이나 서양이나 마찬가지에요. 인간이 이 땅에서 하늘의 뜻을 펼칠 때 하늘의 뜻과 일치 된다는 이유 때문에 복을 받는다고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 그렇다면 바알신의 특징은 하늘의 질서가 있는데 그 질서를 그대로 베껴서 지상에 위계질서를 세우게 되면 하늘과 지상에 인간의 뜻 사이에 어떤 마찰도, 충돌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 시대를 유럽에서는 봉건사회라고 하거든요. 철저하게 계급화 되어 있으면서도 내가 허드렛일을 하는 것도 하늘이 내려주신 질서다. 이걸 내가 거역하면 하늘에 계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벌을 내리신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서양 16세기,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이후에 나온 기독교강요에서 캘빈의 주장에 의하면 지상의 계급도 하나님이 주신 소명일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제시했습니다.
교회 성직자만 소명이 아니고 사람들이 각자 자기가 하는 그 일도 신이 주신 소명이기 때문에, 신이 주신 소명이라는 규정은 무엇을 염두에 두고 하느냐 하면, 사람들이 교회 와서 성직자에게 무릎을 꿇을 때만 영광이 되는 게 아니고, 그 당시 천주교 자체가 종교국가 아닙니까. 그러니까 교회 내의 위계질서는 신의 질서를 그대로 베꼈다고 보고 있습니다. 아시죠? 신부들이 예배드릴 때와 공 찰 때, 골프 칠 때 복장이 다르잖아요. 신부들의 걸치는 게 많잖아요.
걸치는 모양새는 어디서 베껴온 겁니까? 구약성경에서 온 거예요. 그들의 핑계는 그렇습니다. 일반 사람들이 문자를 해독 못하기 때문에 문자를 해독하기 위해서 스테인드글라스에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로가 구약성경 내려가듯이 이제는 몸에다 구약성경을 그려 넣는 거예요.
그러면 그걸로 사람들이 또 무식해. 그러면 연극을 보여줄 필요가 있어요. 그러면 옛날 아론 제사장이 향불 들고 설치면 밑으로 꺼지는 연기는 없잖아요. 위로 올라가잖아요. 위로 올라가게 되면 위에 올라가는 그것을 마치 자기 정성의 가현체로 이미지 주입을 하는 거예요. 올라간다, 올라간다 하면 내 마음도 올라간다. 거기다 헌금 바치면 헌금에다 분위기 깔아주면 내 헌금도 하나님의 보좌에 올라간다. 내일쯤 되면 가시적인 성과가, 반대급부가 있겠지.
그런 식으로 할 때 그러한 쇼가 벌어지는 이벤트가 벌어지는 그 공간과 그 시간대는 구약에서 말하는 안식일 때가 적당하고 구약에서 말하는 거룩한 성전이란 장소가 거룩한 거예요. 시간적인 거룩과 공간적인 거룩을 눈에 보이도록 해줌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일상의 생활에서 벗어나서 그 날만큼은 정화수 떠놓는 마음으로 하루를 온전히 주께 바치는 거예요. 주께 온전히 바쳐놓고 일주일 따낼 복을 얻는 거예요. 얼마나 신부들이 대중들을 위해서 즐겁게 봉사를 하겠어요.
그런데 캘빈이 등장해서 신부한데 가지 말고 네가 만인제사장인데 왜 신부한데 가느냐고 했어요. 인기 짱이에요. 이건 강남스타일 이전에 최고의 히트 상품입니다. 지금 계산한다면 조회수가 20억 될 걸. 신부만이 소명 받았기 때문에 일상 모든 것이 신부의 손을 거쳐야 거룩으로 전환되거든요. 왜? 구약의 제사장이니까. 그것도 모르는 것은 무식한 구약도 모르는 인간이라고 매도당하기 십상이란 말이죠. 적어도 교회를 다니고 영세를 받고 세례를 받았으면 구약이 어떤 것이란 걸 알아야 된다 말이죠. 그걸 모르면 짐승 취급 받거든요. 구약이란 제사장 섬겨서 하늘의 복을 따내고 천국에 가는 그거잖아요.
그런데 캘빈은 루터한테 배워서 말하기를 성직자만 거룩한 것이 아니고 여러분도 거룩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손들고, “그렇다면 캘빈 선생이여, 질문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배를 추구하는 그런 직업이 아닌데 이 더러운 직업도 신부를 통해서 목사를 통해서 정화되어서 비로소 거룩으로 인정받을 것 아닙니까?” 분명히 질문했을 거예요. 캘빈은 말합니다. 이거는 여러분이 어떤 직업, 개망나니 하든, 백정을 하든 관계없습니다. 다만 그 직업을 통해서 여러분들의 잘못을 깨닫거든 모일 때마다 떡을 떼서 목사가 주는 떡 하나 먹으면 그것은 회개가 됩니다.
가만히 이야기 들어보니 신부가 하는 일이 뭔가 간소화되면서 어디로 계속 이어져있습니까? 목사로 이어졌을 뿐이고 전혀 완전히 탈피했다는 느낌이 안 들지요. 간판만 천주교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로 바뀌었을 뿐이지 맨 성만찬 주관하는 것은 사찰집사가 못 하잖아요. 전도사 아줌마가 못하죠. 심지어 전도사도 못해요. 성만찬 할 때는 이웃 목사를 초빙해서 나중에 갈 때는 봉투를 줘야 돼요. 예의상. 요새는 일년에 두 번 하거든요. 그러니까 미리 회개하면 안 돼. 바보야. 차곡차곡 죄 쌓아놓았다가 성만찬 할 때 한꺼번에 다 풀어야 돼. 그런 요령이 필요해. 그러니 바뀌자 해놓고 달라진 게 없지요.
앗수르 나라가 너무 잘 사니까 잘 사는 게 진리고 잘 사는 게 성공이잖아요. 세상에서. 제가 의존교회에서 강의할 때 했잖아요.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사는 게 우선이 아니었다고. 그런 말 던져놓고 내가 물었어요. 사는 게 우선이지 사는 게 우선이 아니라니 뭐가 우선입니까? 말 같지 않은 소리. 사는 게 우선이잖아요. 다 밥 먹고 살자는 짓 아닙니까. 사는 게 기본이고 살고 여유 있으면 교회 나가잖아요. 사는 게 우선이지 뭐가 우선인데. 그러니까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희한한 인간이란 말이죠. 그야말로 에스라, 느헤미야는 숨어있는 나라에요.
다시 정리할게요. 이스라엘은 망했다. 왜 망했느냐? 기존 나라가 부러워서 망했다. 얼마나 부러웠는지 그들의 종교까지 수입해서 껍데기는 여호와인데 알맹이는 뭐냐? 바알종교를 수입해서 한 거예요. 그 체제와 그 절차를 그대로 한 겁니다. 이런 식으로 했더니만 간증과 간증의 연쇄 고리죠. 이런 식으로 하면 어떤 사람이 복 받는다고 하더라. 그러면 그 교회에서는 그게 진리가 되는 거예요.
왜? 성공이 진리고, 소유가 진리기 때문에 그래요. 가진 게 진리가 되기 때문에. 많이 가지면 축복을 많이 받은 사람이고 적게 가지면 축복을 못 받은 사람이고 뭔가 인생이 꼬인 사람이고 뭔가 풀어야 될 필요성이 있는 사람이란 말이죠. 안 풀리면 꼬여서 집구석이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컨디션을 먹든지 먹어서 속을 풀어줘야 돼요. 그래야 그 다음부터 무슨 일을 해도 만사형통이 되서 잘 풀리는 집이라 해서 휴지도 그런 게 있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교회 오는 것은 앗수르 나라처럼, 바벨론 나라처럼 우리도 잘 풀리는 집, 뭘 해도 잘 풀리는 집. 그런 나라가 이스라엘이 되지도 못하고 되려고 시도하다 망한 나라에요. 이스라엘 나라가. 따라서 기존의 나라를 답습한다는 것은 에스라, 느헤미야에게는 있을 수 없습니다.
에스라, 느헤미야는 분명히 총독입니다. 자기 위에 고레스 왕이 있었고 그 나라는 페르시아 왕입니다. 에스라, 느헤미야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하나님께서 왜 바벨론이나 페르시아 나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멸망케 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이중으로 돼있다는 거예요. 슬슬 어려워진다.
이스라엘이 이중으로 돼있다는 겁니다. 어떻게 이중으로 돼 있느냐 하면, [전체를 갖고 있어도 부분보다 적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부분이 전체를 이긴다. 지금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큰 것, 더 큰 앗수르가 북쪽 이스라엘을 멸망하고 바벨론이 남쪽 유다나라를 멸망하게 되면 앗수르와 바벨론이 이스라엘보다 크지요. 큰 것을 선망하기 때문에 큰 것한테 먹히게 한 거예요. 이스라엘 생각은 큰 것이 작은 것보다 항상 위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앗수르나 바벨론보다 더 커야 된다고 생각을 하게 된다면, 이것은 진정 이스라엘을 놓친 게 돼요. 하나님께서는 큰 것에 잡아먹히면서 잡아먹힌 작은 부분이 오히려 큰 것보다 더 크다는 새로운 원리를 가동하기 시작합니다. 잡아먹었다고 생각한 것이 도리어 삼킴을 당하는 방식으로 이스라엘을 구성합니다.
그 원리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신약성경 348페이지, 디도서 1장 12절, “그레데인 중에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장이라 하니” 에피메니데스라는 철학자가 한 말입니다. 그레데 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라고 했어요.
에피메니데스가 그레데 사람입니다. 자기가 한 말은 거짓말일까요, 참 말일까요? 자기가 한 말이 거짓말이 된다면 결국은 거짓말이 모여서 참 말이 되는 거예요. 이것은 아까 이야기한 배중률에 어긋납니다. 참 된 것은 참되고 거짓 것은 거짓돼야 되는데 이것은 거짓말이 참 말이 되니까 사람들은 참 진리에 대해서 난감해 할 수밖에 없고 사람은 진리를 확보하지 아니하면 살 이유도 모르게 돼요.
그 점을 이야기할게요. 사람이 참과 거짓을 구분하는 이유는, 이렇게 구분하는 본인이 항상 참되다는 존재를 그런 식으로 자꾸 이런 일을 통해서 보장받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내가 참되기는 참 돼. 그런데 참되다는 것을 뭔가 증명해야 되는데 그렇지. 참됨은 참되고 거짓됨을 거짓되다고 이야기함으로써 나는 참되면 나는 이 세상에 살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런 마음으로 사람은 살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참될 경우에는 하늘과 땅 사이에 인간은 하늘이 도와주고 땅에서 받쳐주기 때문에 반드시 재물이 늘어나고 부귀가 늘어나겠지요. 그러면 앗수르가 우리나라보다 잘 산다. 바벨론이 잘 산다. 그럴 경우에는 만약 바벨론, 앗수르 없을 경우에는 그래 나는 참되다고 버틸 수 있는데 갑자기 주변에 나보다 잘 살고 풍부한 나라가 와버리면 그쪽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눌리잖아요.
눌린다 함은 그쪽은 나도 참되지만 더 참되고 나도 진리지만 더 진리기 때문에 잘 먹고 잘 사는 나라일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내가 지금보다 더욱더 참되기 위해서는 그들이 믿는 하나님, 그들이 섬기는 방식을 받아들여야 돼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안 보이고 단지 눈에 띠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들만 각양각색이기 때문에 어느 방식을 채택하느냐에 따라서 축복받을 가능성이 농후한 방식을 인간은 채택하게 돼있습니다.
교회란 간증집회로 부흥하는 거예요. “여러분, 이런 방법 있고, 저런 방법 있는데 이 방법 쓰면 부자 되고, 이 방법 쓰면 쫄닥 망합니다. 어느 방법을 쓰겠습니까?” 이 이야기가 목사의 주된 설교의 테마에요. 왜? 교인들이 그걸 듣기 위해 오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온 게 아니고 자기 잘 되기 위해서 오거든요. 교회 오는 것도 일종의 노동이에요. 노동은 반드시 대가 없는 노동은 미쳤습니까? 죽 쒀서 개 줍니까? 죽 쒀서 개 안 주려면 분명히 교회 나오기 힘든 시간 바치고 돈 바치고 하려면 30배, 60배, 100배라는 뭔가 보장이 될 때 재미가 나서라도 갈 것 아니냐 말이죠.
예수님은 말했습니다. “적은 무리여 두려워하지 말라. 하늘나라가 너희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런 언질을 했을까요? 또 예수님은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주변에 이리와 뱀들을 많이 만날 것이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라. 그들이 너희를 체포할 것인데 그때 이야기하는 것은 네가 아니고 네 안에 성령이니라.” 남들 보기에는 우리는 숫자가 세 명이고 저쪽은 백 명이라면 분명히 백 명은 전체고 세 명은 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세 명 속에 있는 성령은 백 명보다 더 큰 거예요.
방향을 봅시다. 이스라엘은 앗수르 나라를 부러워했습니다. 그래서 유다나라 아하스는 앗수르에서 수입했어요. 방향성이 그냥 육적이고 세상적인 것을 지향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큰 것을 지향하는 사람에게 큰 걸 주는 게 너는 네 속에 있는 것이 저쪽보다 더 큰 것을 왜 자꾸 깔고 뭉개느냐는 이야기에요. 어린양의 피는 앗수르 제국에 없어요. 어린양의 피는 바벨론에 없습니다. 에스라, 느헤미야는 이걸 간파한 거예요.
여기도 에스라, 느헤미야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고 스룹바벨이 등장하지요. 예수아 등장하지요. 학개, 스가랴. 학개, 스가랴는 직접 나서지는 않아요. 직접 나서지는 않지만 스룹바벨을 통해서 성전을 짓고 재건하는 의미를 선지자를 통해서 준 거예요. 보통 그전에는 선지자가 나서서 일했잖아요. 그러나 평가위원으로서 학개, 스가랴입니다. 지금 니들이 하는 일은 이런 의미로서 장차오실 묵시적인 메시아와 연결돼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바로 학개와 스가랴입니다.
네가 오히려 큰 것을 가다가 방향이 큰 것, 좋은 것, 잘 사는 것, 방향이 이쪽으로 가다가 방향이 어디로 바뀝니까? 오히려 우리 속에 있는 성전으로 바뀌죠. 성전에 어린양이 있으니까. 성전으로 바뀌면 방향이 이쪽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성전을 위한 일에 하나의 심부름꾼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러면 고레스 왕은 뭐가 돼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종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내 종 고레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로마서 13장에 보면, 세상 권력자들을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이 부리시는 종이죠. 종님을 섬기면 안 돼요. 정작 섬기는 것은 내 안에 세상보다 더 크신 성령, 그 성령을 주신 예수님을 섬기기 위해서 그들이 교통정리도 해주고 필요한 조치들을 해주시는 겁니다. 이렇게 좋은 수련장도 마련해주면서. 누가? 바벨론이. 신용협동조합이 해주셔서 우리는 그냥 고맙다고 할 뿐이지 잘 보일 필요는 전혀 없는 겁니다. 방향성이 문제입니다. 지향성이 문제고 방향이 반대로 바뀌어야 돼요.
하나님의 종들의 특징을 보게 되면, 자기를 잊는다는 겁니다. 옛날에 제가 젊을 때 밤중에 하는 라디오 프로그램 중에 [밤을 잊는 그대에게] “이종환입니다.” 하고 나오는 게 있어요. 저와 여러분들은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게 돼요. 그런데 이 성경이 언제 끝나느냐 하면, 자기 자신이, “정신 차려야지!” 이렇게 될 때는 드디어 하나님의 일은 중지가 되는 겁니다.
교회 봉사할 때 언제 봉사가 끝나느냐 하면 지가 쪼다가 아닌가 하고 생각할 때 집사님, 수고하십니다. 해놓고 어슬렁거리면서 “아이고. 쪼다야 너 혼자 일해라.” 이런 식으로 뭔가 이용당한다는 생각이 들 때 그것도 불현듯 들 때 “미쳤나. 내가 봉사하게.” 하고 안 합니다. 자기를 잊으면 종이 되는데 자기를 잊지 않으면 자기가 주인이 되는 거예요. 정신 차리면 주인 되고 정신없으면 종 돼요. 그래서 정신을 못 차린 상태를 취한 상태라 하고 에베소서 5장에 보면, 너는 술에 취하지 말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성령에 취하라. 술에 취하면 개 됩니다. 성령에 취하면 천사가 돼요.
그래서 사도 요한이 천사한테 절하니까 천사가 나에게 절하지 말라하죠. 그리고 사도 바울 일행이 병고치고 하니까 사람들이 주님의 사자라고 절하니까 “저한테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제가 당신을 구원한 게 아닙니다.”라고 한 거예요. 그래서 유효기간은 뭐냐? 자기를 잊을 때까지만 유효기간입니다. 주의 일의 봉사가. 그래서 누가 봉사할 때 항상 아슬아슬해요. 언제까지 가겠노?
그래서 사람들이 자기를 잊지 않은 상태에서 봉사해버리면 그 다음에 뭘 노리느냐 하면, 감화, 감동에 스스로 자기를 구심체라고 자부하게 됩니다. “내가 봉사하는 것 봤지? 나를 본받아서 봉사 안 하면 너희들 죽어?” 그러면 봉사하는 게 아니고 작업 거는 게 돼요. “슬슬 이 교회는 내가 접수했지. 나 아니면 이 교회는 안 되는 거야. 이제는 내 말 무조건 따라.” 그렇게 되면 자기희생적인 행동이 하나의 계기가 되어서 주변에 감동, 감화되면 나처럼 되면 이 교회는 다같이 희생 될 거라고 그렇게 하는데 그런 것은 사기꾼들이나 하고 우리교회는 택도 없어요. 우리교회 교인들이 도사인데. 이것 간파 다하고 있습니다. 우리교회 교인들은 봉사해서 고맙네. 싫어. 하지 마.
에스라, 느헤미야에서 가장 난해한 부분은 스룹바벨이 총독이지만 그 다음 총독이 느헤미야에요. 느헤미야는 총독이면서도 월급을 안 받았어요. 삯도 받지 않고 일했습니다. 산발랏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뭐하는 사람이냐 하면, 그리심 산에 성전을 세워서 너희들은 예루살렘에 성전 세울 때 우리는 그리심 산에 성전 세우겠다고 버틴 사람이에요. 이 사람이 그렇게 에스라, 느헤미야를 공격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사마리아 여인이 뭐라고 합니까? “우리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 산에서 예배드리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드리는데 어느 쪽에서 할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둘 다 아니라고 했지요. 둘 다 아니라고 한 것은 너는 예배드렸느냐, 안 드렸느냐 상관없이 그런 식으로 할 시기는 내가 온 이상 끝났다. 언제 드리느냐, 어느 장소에서 드리느냐, 어떻게 드리느냐? 이 삼종 세트 그것은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는 의미 없는 질문입니다.
질문할 때 “언제 드리면 됩니까, 뭘 얼마나 바치면 됩니까, 무슨 봉사를 하면 됩니까?” 하고 묻지 말고 누구십니까? 사울 예수님 만나고 했던 그 질문, “주여 누구십니까?” 그 다음에 답변이 뭡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그걸로 충분한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속에는 나는 예수님을 핍박하는 당사자라는 것이 계속 유지만 된다면 자기를 잊은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이에요.
나는 나를 믿고 나는 내 믿음 밖에 뛰어나간 적이 없고 아무리 하나님을 섬겨도 섬기는 그 자리에 주목되는 인물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내가 오히려 나한테 가장 크게 다가오는 예쁘장한 브라우니, 개 같은 존재, 가장 예쁜 존재는 무릎 꿇고 멋있게 경배하는 내가 나의 경배의 대상이 되는 거예요. 그런 자아를 날마다 되풀이해서 이걸 회개라 하는데요. 되풀이해서 그렇게 반복시키는 능력은 오직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전에 요한복음 21장을 제가 언급할 때도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찾아와서 내 양을 먹이라 할 때 그냥 양을 먹이라 하지 않고 베드로한테 물음을 재촉하죠.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할 때 베드로가 지가 사랑한다고 염치없어서 하지 못해요. 사랑한다 해놓고 배반했기 때문에. 그래서 바톤을 넘기죠. 누구한테? 내가 사랑한다고 하지 않고, “주께서 아십니다.” 한 거예요. 그걸로 이야기 끝난 게 아니고 바톤을 주께 넘길 때에 주님께서 그 바톤을 잡으시고 그렇다면 내 양을 섬기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주님을 배반한 입장에서 양을 줬을 때는 결국 그 양은 자기 양이 되고 싶어도 될 수 없죠. 왜? 오히려 양아 나한테 배워라. 나는 이렇게 예수님을 배반한 인간이다. 너도 마찬가지야. 이 배반했다는 것을 늘 알고 있을 때만 우리는 계속해서 진짜 100프로 주의 양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나는 늘 주님을 배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양. 주님의 양만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이 자기의 감동, 감화의 주체로 등장해버리면 결국 그 양은 누구의 노동의 대가가 되죠? 그 양은 자기가 기도하고 자기가 심방하고 자기가 애쓴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