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것이 우선 130111
사는 것이 우선 130111
이름 : 이근호(IP:119.18.69.144)
김창길(IP:210.♡.60.74)
13-02-11 23:03
서울 의존교회130111a (사는 것이 우선)―이 근호 목사
살후 1: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살후 1:2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여기에 보면 교회라는 단체가 나옵니다. 사도 바울이 편지를 할 때 모든 사람에게 편지 한 것이 아니고 교회라고 해당된 사람들에게 편지를 하지요. 그런데 교회라는 게 세상에 꼭 있어야 됩니까? 없어도 사는데 지장이 전혀 없지요. 교회가 없는 곳을 보니까 가슴이 답답하고 뭐 그렇습니까?
사도 바울이 사람을 볼 때에 차별되게 사람을 보는 겁니다. 교회이냐 아니면 교회 아니야 두고 차별을 두는 거죠. 사도 바울이 편지의 내용을 보면 사람 사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럼 사람 사는 것이 우선이 아니면 뭐가 우선인데요? 사람이 이 세상사는 게 우선이지 그것 말고 뭐가 중요한데? 사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 아닙니까? 돈 벌어서 사는 것, 장가가고 시집가고 취직해서 아파트사고 사는 것 그것만 하면 됐잖아요. 그것 필요하니까 하나님이 필요하지 그것 말고 무슨 하나님까지 뭐 필요합니까?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라고 할 때 사도 바울이 감안해서 생각한 것이 있어요. 무엇을 감안하느냐 하면 예수님이 다녀가시고 교회 생겼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이 다녀가실 때 곱게 다녀간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인데 하나님이 다녀갈 때 곱게 다녀간 게 아니고 사람들이 그 아들을 죽여서 없애 버렸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포도원 비유가 있는데 하나님께서 처음에 종들을 그냥 보냈어요. 때리고 다치게 했어요. 마지막에 아들을 보내니까 저 아들만 죽이면 이 포도원은 내 것이 된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머릿속에 생각한 게 뭐냐 하면 옛날에는 예수님이 계셨는데 지금은 예수님이 없고 교회가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계실 때 사람들이 예수님을 상당히 불신하고 안 믿었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죽여서 그냥 없애 버렸죠. 그러면 그것으로 일이 끝났나? 하는 문제에 대해 사도 바울은 끝나지 않았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특수한 존재로 이 땅에 오신 것처럼 이제 예수님이 떠나고 난 뒤에 이 땅에 또 다시 특수한 존재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교회라는 거예요. 그 교회에 편지를 하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이 사는 것이 우선이지 아침에 눈뜨면 할 것이 뭡니까? 아침에 눈뜨면 사랑하는 사람을 부릅니까? 아침에 눈뜨면서 시작하는 것이 사는 거예요. 저녁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가서 자고 잘 때 뭐라 합니까? ‘내일 일어나서 또 돈 벌어야지’그거 외에는 뭐가 있습니까? 사는 게 전부지 말 같은 소리를 해야지 사람이 사는 게 우선이고 돈 좀 여유 있고 시간 남으면 교회 부흥에 좀 가보고 하는 것이 그게 인간이 사는 거잖아요.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향하여 사도 바울이 편지하기를 너희에게 편지 하는데 너희들 사는 게 우선이지? 너희들은 딴 거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 생각하지 말고 밥 먹고 사는 거 우선이고 돈 버는 게 우선이지? 그 다음에 시간이 여유 있게 남거든 하나님을 섬기던지 놀러가던지 그것은 네 마음대로 하되 사는 게, 돈 버는 게 우선이라고 편지를 구구절절 그렇게 했습니까? 데살로니가 교인들이여 오늘도 얼마나 벌고 살았느냐? 그것을 편지 한 거예요? 그런 편지를 할 것 같으면 특수성이라는 게 없어요.
사도 바울은 말 합니다. 이 땅에서 아직도 예수님같이 교회가 있다는 것은 이것은 충격이라는 거예요. 이것은 놀라운 사실이라는 거예요. 왜냐 하면 사람들은 사는 게 우선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교회라는 게 애당초 그것은 없어도 될 문제이고 또 없어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뭔가 교회가 생겼다는 말은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믿는 사람이 생겼다는 말은 지금 예수님은 안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지금 활동하고 있다는 뜻이거든요.
예수님은 활동하고 있고 인간들은 밥 먹고 사는 게 우선이고 둘 중에 누가 이기는가 한번 보자 이 말이죠. 세상에 모든 사람들은 사는 게 우선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뒷전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활동 안 하고 있으면 그 말이 옳아요. 예수님이 활동을 하니까 분명히 사는 게 우선인데 사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하는 그런 고백을 하는 희한한 인간들이 등장하는 거예요. 그것도 데살로니가에요. 사도 바울은 분명히 안 믿을 것이라고 그냥 던져 봤는데 그것을 주워 먹고 믿는 사람들이 있더라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믿게 되면 어떤 상황에 빠지게 되느냐 하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세상이 어둠이 오고 혼돈이 오고 세상은 악하고 예수님만이 유일한 생명이라 하는 그 상황이 그대로 되풀이 돼서 반복되는 겁니다. 단순히 교회와 성도가 하나 있다고 끝이 아니고 성도가 하나가 등장하면 사람이 등장한 것이 아니고 성도를 성도되게 만드는 그 아우라, 그 환경, 그 영역, 그 힘, ‘사는 것이 우선이다.’ 이것은 모든 인간이 그렇게 봐요. 이것은 광야에서 예수님이 시험받을 때 이미 악마가 전략을 그렇게 꾸몄어요. 돌이 떡 되게 하는 것이 우선이다. 예수야! 정신 차려라! 배고프면서 무슨 짓을 해! 우선 돌이 떡 되게 해 놓고 먹고 보지 사람은 다 살자고 하는 짓인데 라고 했던 그것을 시험이라 하는데 예수님에게는 시험이 될지 모르지만 우리한테는 그것은 생활입니다.
그게 왜 시험입니까? 그것은 당연한 이야기지요. 김연아 보고 김연아야 너는 피겨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중요해 하면 이런 소리는 이런 소리는 김연아 보고 이런 하는 소리가 아니에요. 김연아야 피겨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어! 세상에 세계선수권 앞두고 무슨 소리를 하고 있어요? 애들이 내일 시험 치는데 아들아! 딸아! 시험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 이런 소리해서 시험 망칠일 있습니까? 엄마 핑계 데고 나 엄마 때문에 공부하나도 못해서 시험 못 쳤다. 이런 핑계를 만들 작정이에요? 기도 빡세게 해서 좋은 점수 받도록 기도해라 네 맘 때는 시험 잘치고 공부 잘하는 게 최고다! 이게 바로 상식이고 생활이 되는 겁니다.
시험 치면 뭐하겠노? 시험 잘 쳤다고 인기 있다고 출세했다고 소고기 사먹겠지. 그래서 시험 잘치고 출세해서 취직했다, 취직하면 뭐 하겠노? 돌이 떡 되게 하고 사람들에게 인기 얻고 부러움을 얻고 그래서 세상부귀영화를 차지하는 것 아닙니까? 문재인 후보가 하나님, 떨어지게 해서 감사합니다. 하는 문재인 후보 같으면 문제 있지도 않아요. 안 문제에요. 내가 여자한테 지다니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사도 바울은 편지 하는 대상이 누구냐 하면 사는 것도 우선이 아니고 돈 버는 것도 우선이 아니고 세상의 명예도 우선이 아니고 인기 얻는 것도 우선이 아니고 공부 잘하는 것도 우선이 아니고 성도 본인조차도 내가 왜 이렇게 사는가! 놀라는 어떤 새로운 영역이 예수님에 의해서 새롭게 조성된 겁니다. 새로 조성되면서 이 안에서 예수님이 증거 했던 그 복음의 소식이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있다 말입니다. 복음이 살아있는 것이 우선이라는 겁니다.
쓴 약은 캡슐에 담잖아요. 캡슐이 예쁩니다. 애들이 가지고 놀만도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빤질빤질한 캡슐을 가지고 손에 가지고 놀아도 손에 묻어도 감기가 걸렸을 때는 아무 효과가 없잖아요. 그것을 깨뜨리고 그 안에 담겨있는 365개의 알약을 집어넣어야 감기가 낫잖아요. 이 복음이라는 것을 가지고 놀 것이 아니고 복음을 터뜨려 버리면 복음 안에 있던 예수님의 모든 취지가 성도 안에, 교회 안에 그대로 흘러들어 옵니다. 흘러들어오면 예수님이 제자를 뽑았던 것처럼 예수님이 이 교회를 붙드는 이상은 새로운 교회가 예수님의 복음의 근거지로서 작동을 가동을 시작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세상은 사는 것이 우선이라는 취지에서 누가 죽었는가? 예수님이 죽었거든요. 죽었던 예수님이 부활 하셔서 복음의 능력으로 다시 찾아온 곳이 바로 교회이고 성도라면 성도의 삶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싸웠던 그 싸움을 지속적으로 되풀이 돼서 반복돼서 이 시대에 싸우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본인이 원해서가 아닙니다. 본인은 계속해서 사는 것이 우선이고 싶어 해요. 그게 자기 육의 본성에 맞으니까 또 나는 그렇게 되고 싶으니까 사람들 특이하게 산다는 것은 불편한 일입니다. 그냥 무리들 속에 섞여서 눈치 못 채게 밭에 뭉쳐놔서 큰 강에 진흙탕 흘러가듯이 그냥 눈에 안 띄게 흘러가면 그게 속이 제일 편해요. 꼭 집어서 어이 라고 한다면 그것은 실제로 부담되는 겁니다. 경찰관이 길을 가다가 많은 그 사람 가운데 어이 거기 아저씨 봅시다. 하면 괜히 쫄립니다. 아니 나? 이럽니다. 아니 아저씨! 아니 내가 뭘 잘못했는데? 이렇게 나온다 말입니다.
‘택하여 너를 지목하여 세웠나니’이것은 예수님이 옛날 제자들에게 했던 그 멘트들을 그대로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에게 지적해 버립니다. 그러면 이 성도는 세상적으로 가고 싶어도 자기 멋대로 주님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팔자가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으로 살지만 성도는 뭐로 사느냐? 안 살아요. 못 살아요. 사는 게 아닙니다. 말씀으로 산다. 은혜로 산다 하는 게 아닙니다. 그냥 죽지요. 뭘 살아요? 돈으로 살고 떡으로 사는 방식으로 사는 방법은 없어요. 말씀으로 죽고 복음으로 그냥 죽어가고 있는 겁니다. 살 생각은 하지 말아야 돼요. 왜 그러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살려고 오신분이 아니고 떠나기 위해서 오셨거든요. 떠나기 위한 능력이 이 사람에게 임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예수님의 곳에 합류기 위해서 이곳을 후다닥 떠나는 겁니다.
떠날 때 그냥 곱게 조용하게 못 떠나게 만들어요. 어디 부딪끼게 만드는데 그게 뭐냐 하면 여기 6절에 봅시다.
살후 1:6 너희로 환난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살후 1:7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어느 동네에 성도가 있다. 누구 집에 성도가 있다는 말은 착하다, 바르게 산다, 훌륭하다, 빈틈이 없이 예의가 바르다, 예절 바르다, 많은 사람을 구제한다, 그게 성도의 모습이 아닙니다. 윤리 도덕이 성도의 표시가 아니에요. 성도의 표시는 환란 받고 고난 받는 겁니다. 그것도 사기 쳐서 고난 받는 게 아니고 복음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 이것이 유일한 성도의 표시가 되는 겁니다. 제가 여기서 유일한이라고 말하는 것은 뭔가 있어요. 고린도후서 11장 12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나오는데 저 사람들은 사도가 아니다. 너희들은 주의해라 저 사람들은 사기꾼 악마의 졸개야 너희는 마귀를 아예 교회에 당회장으로 모셔놨어! 저 생각사람이 전 하는 복음은 복음이 아니고 다른 복음이고 저 사람이 말하는 성령은 성령도 아니고 다른 영이고 저 사람이 말하는 예수는 예수가 아니고 가짜 예수다. 나, 사도는 진짜 사도인데 이유가 뭐냐 하면 나는 복음으로 고난 받기 때문이다. 간단한 문제에요. 그런데 저 사람은 고난으로 자기 돈 벌고 밥 먹고 살려고 시도하고 있다 말이죠.
우리를 살리는 게 목사 살리고 집사 살리는 게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은 예수님과 더불어 늘 죽어 가는 것에 대해서 영광스럽게 생각하라는 게 복음입니다. 죽어 가고 있으면서 아이고 신난다. 이러한 희한한 고백을 내 뱉을 수 있을 때 그것은 인간의 능력이 아니고 예수님이 주신 십자가의 능력이 임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아이 좋아 내가 어서 주님 앞에 갈 수 있다니 아이 좋아’그렇게 되는 거예요.
제가 새해를 맞이해서 십자가마을에 덕담을 썼지요. 새해 저주 많이 받으세요. 그렇게 하니까 댓글에 목사님도 저주 많이 받으세요. 이렇게 썼어요. 순진한 건지 놀리는 건지 모르지만 여하튼 감사했어요. 사람이 저주의 자리에 가 있어야 이미 받은 복을 새롭게 따내는 것이 저주 자리에 같이 있으니까 복주세요. 이게 아니고 저주 자리에 가 있어야 이미 받은 복이 비로소 새롭게 느껴지는 거예요. 체험 되어 지는 거예요. 안 받아도 있는 그 자체가 복을 이미 받고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는 것이 바로 그 순간입니다.
탕자가 집에 왔을 때 가락지 끼고 좋은 옷을 입고 거리에 나설 때 탕자가 집에 와서 소고기 국 먹었잖아요. 그럴 때 사람들이 ‘야 너 복 받았구나’할 때 탕자가 뭐라 합니까? 이것은 내가 뭘 잘해서 받는 복이 아니고 이미 아버지 집에 언제가 돌아오면 가락지 끼우고 옥 끼우고 아버지가 그냥 너한테 해주기로 이미 준비된 거죠. 그 준비된 것을 걸쳤을 뿐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사는 것이 우선이라는 이런 동네에 너무 오래 돌아 다녔어요. 강남 스타일 뒷골목 돌아다니면서 너무 남들처럼 사는 게 있는데 하나님의 십자가 영을 받고 난 뒤에 이제는 이 생활 청산하고 주님 집에 가니까 이것은 내가 행하지도 않았는데 이미 준비된 이미 마련된 게 있어요. 마련된 것 비록 전자레인지도 없고 냉장고도 없다 할지라도 주님께서 죽어도 사는 영생의 나라, 영생의 천국이 이미 생명나무 따먹을 때 돈 얼마주고 샀어요? 요새 사과, 부사 10개 만원 한다는데 이거 얼마 줬어요? 생명나무 돈 주고 따 먹었습니까? 생명나무 천사가 돈 내라 하면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요한계시록 22장에 값을 다 치룬 거예요.
값을 다 치러서 이것은 마치 내가 심어놓은 과일처럼 내 마음대로 실컷 따 먹는 거예요. 이것은 이제 실수 할 이유가 없어요. 왜? 선악과가 없으니까 우리를 죽게 할 어떠한 요건도 거기에는 없습니다. 강도? 살인자? 마귀? 한쪽으로 몰아쳐서 다 집어 넣었어요. 지옥에 가면 유황불 속에 우리를 유혹했던 모든 것들이 거기에 다 있어요. 그러니까 데살로니가에 편지할 때는 성도한테 뭐라 하느냐 하면 이 세상은 지옥에 포위 되었다는 것을 감안 하라는 겁니다. 지옥에 포위 되었다는 것을 감안 하라는 그 근거가 뭐냐? 예수님께서 이 땅에 풍덩 빠졌을 때에 바로 평소에 점잔은 사람들도 예수님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이 손을 봐야겠다 싶어서 검은 독거미 때가 사방에서 몰려온 것처럼 예수님이 있는 지점에서 모든 독거미들이 벌벌 기어가면서다 죽이려고 있습니다. 거짓말 아니에요. 동방박사 올 때 동방박사가 천사 이야기 안 했으면 죽었습니다. 예수님 가정에서 아기 예수가 태어났을 때 헤롯이 베들레헴에 두 살 밑에 애들을 다 죽였어요. 그게 뭡니까? 뭔가 노리는 게 있다는 거예요.
동방박사가 뭐 따라 왔습니까? 가이드 없어요. 뭐 따라 왔습니까? 별 따라 왔습니다. 하늘의 별이 어디에 스톱했습니까? 예수님이 태어난 그 자리에 스톱했습니다. 이 세상의 진정한 블랙홀 중심부를 예수님이 끌고 온 거예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올 때 뒤에 탯줄 같은 게 있는데 그게 하늘나라의 중심부, 하늘나라의 태초의 모든 계획이 다 있는 그 설계도, 설계도 사이에 탯줄 같은 게 연결되어있어서 예수님이 이 땅에 내려오실 때 그 뒤쪽에 있는 내용물도 예수님과 더불어 이 땅에 쏟아진 겁니다. 그것을 요단강에서 성령의 세례 받았다는 거예요. 성령의 세례를 받아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서 하늘나라에 가득되어있던 공개되어야 될 그 모든 미래의 역사 종말과 계획들이 예수님 때문에 전부 다 와르르 예수님 쪽으로 다 쏟아져 온 거예요.
쏟아져 와서 십자가 달릴 때 다 이루었기 때문에 이제는 남은 역사, 이 세상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이 계획했던 그 스케줄대로 그대로 진척됩니다. 그 스케줄 중에 하나가 포함된 것이 뭐냐 하면 내가 떠나고 나로 인하여 특이한 존재가 발생 될 것이다. 이름을 교회라고 하고 그 머리는 여전히 내가 머리가 되고 그들은 하나의 지체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오징어 몸통이라면 교회는 뭡니까? 오징어 다리입니다. 오징어 다리는 절대로 다리 미끈한 것 자랑하지 않습니다. 몸통 자랑하게 되어 있어요. 몸통 자랑하면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씩씩 거리면서 자랑하지요. 나 예수님 때문에 인생 망쳤습니다. 이런 식으로 자랑합니다. 나 예수님 때문에 사는 게 우선이라는 보편적인 이런 모든 사람이 공통적인 이런 사고방식에서 나는 많은 수모와 환란을 받고 있습니다.
책임지세요. 어떡하지? 내 인상 어떡하지? 때로는 납득이 안돼요. 왜 내 인생을 이렇게 버려놨냐? 이 말이죠. 내가 원 하는 것은 이쪽인데……. 남들은 지금 살려고 설치는 마당에 같이 따라 붙여도 돈 더 벌까 말까인데 주님께서는 남들 가는 그 행렬 쪽으로 따라가지 못하게 너 빠져나와 하고 빠져 나와서 보니 몇 명 되지도 않아요. 찾는 이가 적으니이다. 네가 숫자가 적다고 두려워하지 말라 너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있다 이런 식으로 뭔가 자꾸만 우리가 의도하는 쪽으로 의도적으로 주께서는 받아주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 쪽에서 나오는 그 뜻을 의도적으로 뜻을 끄집어 내놓고 그 뜻을 의도적으로 뭉게므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지속적으로 필요하다는 거예요. 예수 믿을 때 한번 필요하고 그 다음에 그 긍휼로 우리가 버티는 것이 아니고 매일같이 주님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주의 나라에 도착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겁니다. 작년에 많이 믿었다고 올해는 대충 믿자 이런 게 없어요.
예수님께서 늘 우리가 예상 못할 새로운 길을 열어줍니다. 그러면 그 길은 길이 있어서 가는 게 아니고 우리를 통해서 그 현장에서 길을 새롭게 만들어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자신을 점선으로 봅시다. 점선으로 보는 것이 주님의 손에 의해서 점선이 실선으로 바뀌어 가면서 우리가 예상 못한 다른 길이 나오는데 그 길도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고 주께서 우리의 상황에서 새로운 길 만들어서 그 길이 천국으로 통하는 길로 가는 거예요. 제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이제 예수님 우리 알아서 가겠습니다. 하는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말라는 겁니다. 우리가 알아서 하면 또 다시 지옥으로 갈 수 밖에 없는 게 우리의 본성입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후서 교회를 사도 바울은 하나의 없는 데서 생긴 교회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AD 51년경에 데살로니가 북쪽, 이것을 마케도니아라 합니다. 지금도 마케도니아가 있지만 여기 이탈리아가 있고 아드리아 해가 있고 여기 지금의 골치하픈 나라 그리스가 있고 터키가 있고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그 다음에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쭉 있습니다. 이쪽 마케도니아가 영토가 지명이 나뉘었어요. 아가야하고 고린도로입니다. 이 고린도에서 편지를 썼습니다. 사도 바울이 실로하고 데살로니가로 다녔습니다. 지금도 데살로니가가 이 지방에서 제일 큰 도시에요. 하늘에서 본 풍경 이슬로니카가 나오는데 인구가 많아요. 높은 건물도 있고 데살로니가를 거쳐 고린도에 와서 디모데 네가 사람들을 잘 관리해 봐라 맡겨 놨다 이 말입니다. 맡겨 놓으니까 이런 소식도 있지만 사실 사도 바울도 나왔는데 환란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환란 받는데 왜 예수 믿는데 환란이 있는가? 그 이유 정도는 사도 바울이 알려 주셔야 되겠습니다.
그럴 때 사도 바울은 생각 했습니다. 원래는 자기가 전도하기 전에 교회고 뭐고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없는데 자기가 말씀을 전하니까 세상에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는 족속들이 등장한 거예요. 이것은 말이 안 되는 겁니다. 사는 것이 우선이다. 누가 안 믿어요? 다 믿어요. 그런데 예수 믿고 죽읍시다. 이것은 아무도 안 믿을 거예요. 아무도 안 믿는 것을 증거하게 했는데 그 뒷수습은 사도 바울은 손을 떠난 겁니다. 사도 바울이 손수건을 던지니까 죽은 자가 살아났잖아요. 여러분 이것이 기적의 전부 라고 생각하십니까? 죽은 자가 살아나도 인간 자체는 달라지지 않아요. 진짜 기적들은 병 낫고 귀신 좇는 게 기적이 아니고 병도 안 낫고 귀신도 모르는데 어쨌든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이 믿어지더라 이 말입니다.
그 말은 우리의 속내를 주님께서 홀라당 다 가져가신 거예요. 8절을 봅시다.
살후 1:8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게 믿어지느냐 말입니다. 사는 게 우선인데 밥 먹고 사는 게 우선이지 이게 어떻게 믿어지느냐 말이죠. 5년 전에 믿어졌습니다. 그럼 5년 전 말고 오늘 믿어지느냐 말입니다. 9절에 보면
살후 1:9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이게 믿어지느냐 말입니다. 아이고, 믿어지고말고! 성경 한 두 번 읽었습니까? 성경 100번도 읽었기 때문에 우리 의존교회 교인들은 다 믿어집니다. 라고 이야기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 하지요. 그러면 이 앞에 신월동 시장 상인들 한번 찾아가 보기 합시다. 아니면 신월동 뱀 장사도 찾아가보고 요새는 뱀이 얼어 죽었는지 나타나지 않는데 쭉 지나 가 봅시다. 여기 병원에 의사도 지나가고 약사도 지나가고 피자집도 지나가고 하더라 이 말이죠. 어떻게 보십니까? ‘아 저 아저씨 피자 잘 만든다!’ 이렇게 보시면 안돼요. ‘저거 멸망 받을 인간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그것은 믿는 사람입니다. ‘아 우리 회사 사장님 나한테 얼마나 잘 해 주는지, 올해도 수고했다고 보너스 주는데 멸망 받을 사람이야!’ ‘우리 학교 선생님이 시집도 안 갔지만 얼마나 참하고 얼굴도 예쁜데 멸망 받을 여자에요’ 왜? 복음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홍나리, 이건희 우리나라에서 제일 돈 많은 여자와 돈 많은 남자인데 멸망 받을 여자와 남자에요.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 나오는 거지 쪽이 아니고 세상에 둘 중에 하나도 못 집어내요. 거지 쪽이 아니고 한 평생 살면서 둘 중에 하나도 못 골라서 거지 쪽이 아니고 부자 쪽에 가서 지옥 가서 나사로 말고 부자를 만나게 될 겁니다. ‘선배님 여기 와 있습니까?’ 누가 돈 벌었다, 누가 주식 대박 났다, 누가 사업해서 잘 됐다 할 때 해 봐야 뭐 하겠노 소고기 사 먹겠지 다 멸망 받을 짓이다. 8절에 보면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다음에 뭡니까? ‘주시리니’ 사람들이 요새 받는 것은 얼마나 좋아합니까? 주께서 형벌을 주시는 거예요. 택배 왔습니다. 뜯어보니 완전히 형벌이다. 흥부전에 의하면 놀부에 해당되는 박을 켰다하면 이상한 것 마귀가 나오고 해요 형벌을 주시리라
그러면 묻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방해 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돈 많은 사람이고 약사이고 의사입니까?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오늘도 우리 자신은 나의 구원을 방해합니다. 끊임없이 지독하게 방해하고 치열하게 방해 합니다. 왜? 우리는 그냥 이런 것 저런 것 잊고 그냥 사는 것이 우선이라는 교회, 성도 치우고 교회도 아니고 예수도 모르고 남들 뒤꽁무니 따라 가면서 그냥 보통사람으로 살고 싶은 것이 우리 몸이 갖고 있는 소망입니다. 다 잊어버리고 싶어요. 예수 이야기, 어렸을 때 크리스마스에 빵 주는 이야기 다 잊고 이제는 교회도 빠이빠이 하나님도 빠이빠이 우선 나 살고 보자 나는 그것만 생각한다. 그 외에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고 싶어요. 이러고 싶거든 계속 그거 하세요. 그러고 싶은데 진짜로 그런 생각 하더라! 그러면 애초부터 성령 받을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괜히 교회 와서 있는 척 하지 말고 차라리 본래의 자기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을 축하드립니다. 그러고 싶은데 아 이 환란이 오네. 사는 것이 우선이고 싶은데 복음이 우선이고 복음을 증명하는 매개체로 나를 이 땅에 살게 할 때 분명히 이것은 이론상 축복인데 내 마음은 왜 시원하지가 않아요. 이론상은 맞는데 마음은 왠지 께름칙한 게 좋은 생각이 안 들지요. 왜냐 하면 그렇다면 나의 꿈은 나도 미래는?
이제 그 점을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고린도에서 데살로니가에 편지 하면서 너희들이 환란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 환란을 없애줍니다. 하는 그런 편지를 하면 기분 좋지요? 그런데 환란을 없애준다고 편지 한 개 아니고 환란 받는 것을 알면서도 환란 받나? 환란 받습니다. 어떻게 받나? 환란 받아도 너무 받습니다. 집에 불이 났어요. 불이 났나? 불났습니다. 꺼주세요. 홀라당 타봐라 타보면 네가 하늘나라를 얻을 것이다. 이게 무슨 위로가 됩니까? 집이 불났는데 불을 꺼야죠. 주께 기도 하면 불 꺼지게 해 주고 주께 기도 하면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실 겁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사기 쳤던 그 사기꾼이 복음을 못 전하게 하기 위해서 또 목사라는 이름으로 사기를 치는 거예요. 사는 게 우선인 것을 간파해서 저 인간 내가 아는데 교회와도 예수님 사랑 안 해. 사는 게 우선인데 그러니까 그것을 공략 적으로 공격해 오면 저거는 교회 곧 팍팍 내게 되어 있어. 이미 목사들이 장사를 하면서 다 감안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도 그것은 악마의 일꾼이고 그것은 거짓사도요 마귀의 탈을 뒤집어 섰다 이 말이죠. 탈, 가면 이것은 뭐냐 하면 ‘삐에로는 웃고 있지만’입니다. 삐에로는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울고 있다 이 말 아닙니까? 교인들에게 화장을 얼마나 떡칠을 해 놨는지 가루상보다 더 해 놔서 교회에서 목사들이 가르치는 것이 화장하는 법을 가르쳐요. 자기의 속내는 돈 버는 게 우선이지만 그것을 곱게 감추고 복 받는 것이 목적이지만 감추고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식으로 티를 내는 연기학원도 아니고 연출과 연기를 훈련을 시켜 놨어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가면을 써도 가면을 얼마나 많이 쓰느냐에 따라서 집사에서 서리 집사에서 장기 집사로 진급이 돼요. 나중에 최고 가면이 쓴 사람이 목사죠. 목사는 가면을 너무 많이 써서 어느 것이 자기 얼굴인지 몰라요. 벗겨도 계속 나오니까 그래서 어떤 목사는 아예 철판을 깔아 버려요.
복음이라 하는 것은 온 인류가 다 싫어하는 거예요. 온 인류가 싫어하니까 그 온 인류 속에 누구도 포함됩니까? 우리 자신도 포함되지요. 복음은 예수님 혼자 좋아요. 아무도 좋아 하지 않아요. 구원받는 우리도 안 좋아해요. 내려서 가면 전투 싸움이 벌어지는 거예요. 누가 이기나 한번 보자 이겁니다. 기어이 우리로 하여금 저주 받는 자라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그 저주의 자리에서서 비로소 이미 준비된 혼인잔치 자리에 세상에서 내가 얻고자 하는 것 보다 훨씬 더 풍성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원하는 길로 갔으면 절대로 발견되지 않는 요소입니다. 날마다 내가 원치 않는 인생길을 가다보니까 어느 새 천국입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다 막아요. 내가 동으로 가자 하면 서로가고 서로가자 하면 동으로 가버리고 서도 동도 아니면 남쪽으로 가버리고 남쪽으로 가면 북으로 가버리고 동서남북으로 가려고 하면 공중으로 새버립니다. 내가 짐작도 못할 인생길을 계속해서 가게 만듭니다. 그래서 내 힘으로 어떤 것도 하나님 앞에 용납이나 허락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지독스럽게 다루시는가? 그것은 성령이 임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령은 그냥 오는 게 아니고 어떻게 오는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근거해서 성령이 오게 되어 있어요. 이 말은 성령이 오고 그만이 아닙니다. 성령이 왔다, 그러면 꽂혔다, 그러면 성령이 꽂이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질질 감아버리면 성령이 처음 나왔던 자리로 우리를 끌고 갑니다. 그것이 십자가인데 거기서 네가 어떤 죄를 져도 상관없이 다 이루었다 하는 그 지점으로 데려갑니다. 그것도 매일같이 데려갑니다. 그러게 되면 분명히 내 뜻대로 오늘 하루가 일이 안됐지만 그것이 주님 보시기에는 네가 모르는 인생성공입니다.
실패 했을 때 내가 원했던 성공은 거덜 나고 주께서 준비한 성공과 매치가 되게 합니다. 그리고 아침에 눈 뜨면 또 다시 내가 원하는 성공이라고 또 나가요. 그러면 또 감아요. 감아서 질질 끌려서 다시 십자가 안에 오게 됩니다. 주께서 하신 그 일이 결코 우리를 실패자로 그냥 방치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림을 그리면 우리와 주님 사이에 파이프가 있다면 우리가 올리는 것은 허락지 아니하시고 주께서 내려오시는 것은 허락 됩니다. 이 주께서 내려오는 허락이 우리가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 보다 더 우세하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이 주신 그 축복을 받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축복이 뭐냐? ‘나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축복을 받아요. 스트레스라는 게 뭐냐 하면 내가 나를 바꾸려고 하니까 스트레스를 받는 겁니다. 약간의 우울증 있는 여자가 화장을 하는데 도대체 화장을 몇 시간 앉아 있어야 만족하겠습니까? 화장이 잘됐다고 완벽히 만족할 때가 언제이겠습니까? 없습니다. 왜냐 하면 내가 기대하는 나는 이 나가 해체를 당합니다. 부셔져요. 액체가 돼요. 물렁물렁해 져요. 어디에 의해서? 시간에 의해서 내가 한 시간 전의 내 각오와 내 가치가 한 시간 후에는 벌써 물렁해 지고 변신의 변신을 해요.
다른 것으로 변신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한 시간 전에 A라는 지점에서 생각했던 그 만족도가 B가 되게 되면 그 때 만족도 만족스럽지 않아요. 시간이 나를 가만히 놔두지를 않아요. 오후 3시의 나와 오후 4시의 나와 오후 5시의 나가 시시 때마다 다릅니다. 어느 장단에 춤을 춰요? 오후 3시가 되면 2시를 그리워하고 4시가 되면 3시를 그리워하고 5시가 되면 2시를 그리워하고 있어요. 2013년도가 되면 1900 몇 년도가 그리워져요. 나라는 것을 내가 감당할 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시간이 나를 완전히 분해 해 버려요 그러다가 점점 더 세월이 가고 머리 허해지고 머리 빠지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시기만 한 게 아니고 지금도 주물럭거리고 있다 말입니다. 주물럭거려서 내가 원하는 것은 늘 파릇파릇하고 젊고 늘 세상에 최고가 되고 이런 건데 이 세상을 내가 원하는 식으로 돌아가도록 하나님께서 허락을 안 해 주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내 뜻을 방해합니다. 마태복음 26장 3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그대로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성령께서 하는 기도는 뭐냐 하면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는 기도를 성령께서 하게 하십니다. 그 기도를 하려면 준비과정이 있어요. 뭐냐 하면 내 뜻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아야 돼요. 내 뜻은 뭐냐? 사는 게 우선이에요.
내 뜻은 살아도 처음에 사는 게 우선이잖아요. 나중에 밥 먹고 살만 하면 그것도 안 돼, 나는 점점 더 지옥이 기다리고 있고 마귀가 기다리고 있는 쪽으로 나를 시간이 이끌어가고 있거든요. 살아도 성공한 사람으로 유명한 사람으로 그렇게 되고 싶어요. 이제는 밥 먹고 사는 것은 옛날이야기에요. 이왕 사는 것 남이 부러워할 존재로 사는 것, 주변 사람들이 부럽다 할 그런 존재로 사는 것 이렇게 가는 거예요. 그것을 우리는 매일같이 느껴야 됩니다.
신월동 살 때 그만그만하게 동네에 살 때 나는 욕심이 없어 하나님 이것으로 족합니다. 이렇게 하다가 누구의 양자가 돼서 유산을 받아서 200백억 재산가 돼서 이 동네 시끄럽고 더럽고 뱀 나오고 못살겠다. 강남으로 이사를 가서 살았다. 강남에 사니까 이 정도도 만족합니다. 안 돼요. 전부 다 뜯어 고치고 가방도 한 개 아니고 10개씩, 신발도 백 켤레 있고 아 저렇게 사는구나 하고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내 뜻을 내가 그런 것을 좋아할 줄이야 꿈에도 생각 못했어요. 환경이 나로 하여금 부티 나도록 그렇게 만들어줘요. 그렇게 안 되어 봤으니까 모르죠. 그렇게 부티 나게 만든 다니까요. 환경이 그렇게 조성해 줘요. 그게 바로 그 자리에 가게 했던 내 뜻이에요. 그 자리에서 가방 다 버릴까요? 주여 이것이 내 뜻인데 절대로 내 뜻대로 되지 말게 하옵소서.
사법 시험을 준비합니다. 시험을 칩니다. 벌써 우리 고시원에 몇 명 합격되고 선배가 몇 기고합니다. 시험을 칩니다. 시험을 칠 때, 기도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뜻은 시험에 합격해서 개천에서 용 났다는 소리 듣는 것이 내 뜻입니다. 주께서 아시지요? 하지만 간절히 비오니 내 뜻대로 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면 시험에 떨어지는 게 내 뜻됩니까? 그러면 내 뜻대로 안 되잖아요. 합격해 버리면……. 지금 무슨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반전에 반전입니다.
이것도 노리고 내 뜻대로 마옵시고 하면서 되겠지 이런 식으로 하지 마세요. 제 말은 기도 할 때는 반드시 자기의 숨어있는 그 마음을 다 털어놔야 돼요. 그 마음은 주께서 복음을 덫 입기 위해서 주께서 조성해 낸 뜻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마음이 나빠서 욕심을 부린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그 욕심마저도 주께서 일부러 북돋은 거예요. 네 마음에 이런 마음 있다 하고 북돋은 거예요. 율법에 보면 십계명에 보면 도둑질하지 말라 했잖아요. 하지 말라 했을 때 우리의 뜻은 뭡니까? 하지 말라 하면 더 하고 싶은 거예요. 도둑질하고 싶습니다. 기도 하세요. 하나님 도둑질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된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기도를 해야 된다 이 말이죠.
성령께서 그렇게 기도 하게 하세요. 주여 저는 도둑질 하는 것 싫어요! 하면 주께서 놀고 있네. 솔직해라 장사 한 두 번 하나? 우리는 예수님에 의해서 이미 이 땅에 거쳐 지나 갈 때 파도가 일어나는 겁니다. 세상이 이렇게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셔서 통과해 버리잖아요. 지나 갈 때 파동이 일어나지요. 많은 파동이 일어나다가 예수님이 가 버리면 여파가 생깁니다. 이 여파가 뭐냐? 가까운 여파는 내속에 마귀가 있다 이게 여파 중에 하나에요. 성령이 와 버리면 나는 점잖고 착하고 바르게 살았고 하나님 앞에 봉사해서 복 받고 하는 것을 예수님이 통과해 버리니까 내가 몰랐던 나의 추악한 것을 노출시키는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복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흡수하면서 이것이 내 뜻인데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해 주옵소서. 다시 말해서 아버지 뜻대로 해서 다시 내 것으로 전환시키지 말고 아버지 손에 붙잡혀서 이제 주님의 것이 되게 하옵소서. 그러면 결국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냥 나를 잘났던 못났던 간에 잘나도 쓰시고 못나도 쓰시니까 나를 잊어버리는 거예요. 나를 잊어버리면 복수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 내가 없고 나는 주님의 것으로 등기되기 때문에 내 원수, 내 복수를 지금 까지 계속 챙길 이유가 없는 거예요.
사람들이 예수 믿는 것을 죽인 것은 복수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언제인가 그런 설교를 했지요. 인간이 제일먼저 노출된 것이 뭔가 하면 창세기 4장에서 살인이었고 결과는 살인의 충동은 바로 복수 심었습니다. 감히 내 제사를 안 받아? 그렇다면 하나님을 때려죽일 수는 없고 하나님과 연계 되어 있는 동생 아벨을 죽임으로서 하나님을 죽인 것으로 간주하고 싶은 그 충동이 가인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폭발해 버린 겁니다. 창세기 4장 끝에 보면 라멕이 뭐라 하냐 하면 가인을 죽인 자는 벌을 칠 배를 받지만 나를 힘들게 하면 벌을 칠십칠 배를 받는다. 나를 건들지 마! 이 말 아닙니까? 라멕만 그런 소리를 하는 게 아닙니다. 모든 인류가 그런 속셈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일이 잘 되든 못 되든 간에 인간은 세상을 통과하면서 자신의 복수심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마음껏 발휘하면서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둘이 만나든 셋이 만나든 만났으면 서로가 서로에게 복수하고 화풀이하고 가만히 있어 내 말 들어! 이런 식으로 일방적입니다. 인간이라 하는 것은 대화 소통이 차단되어 있어요. 그냥 자기 소리, 이야기만 하는 거예요. 둘 다 오해 해 놓고 우리는 통한다! 그치? 바로 같이 자기들이 일방적으로 결정해 놓고 서로 술 한잔 먹고 통한다고 우리는 형제다 하죠. 무슨 조그만 사건 있어 보세요. 형제가 어디 있어요. 다 때려 부수죠. 인간은 복수심의 화신이 됩니다. 인간이 복수한다는 말은 곧 하나님에게 복수하고 싶은 그 세력이 이미 인간 속을 쥐고 있습니다.
김창길(IP:210.♡.60.74)
13-02-11 23:03
서울 의존교회130111b (사는 것이 우선)―이 근호 목사
데살로니가 후서에 편지를 쓰면서 편지의 단어가 연결 되는데요 단어가 4절 같은 경우 ‘살후 1:4 그리고 너희의 참는 모든 핍박과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함이라’ 이렇게 되어 있는데 만약에 하나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환란과 핍박이 없는 사람 같으면 이 편지가 의미가 있겠어요? 없겠어요? 이 편지가 잘못 전달 됐네! 나한테 올 편지가 아니네! 이렇게 되지요.
편지를 보고 편지를 하란 말이 아니고 자기 편지 아니거든 읽지 말란 말이죠. 하나님께서 사람을 천국을 못 보내서 환장한 게 아니거든요. 지금 구걸하는 게 아닙니다. 좀 채워줘. 천국 텅텅 비워있다고 좀 채워 달란 말이야 이렇게 구걸하는 게 아니고 네 편지 아니거든 남의 것 들고 앉아있지 말고 빨리 편지 받아야할 사람에게 줘 이렇게 된다 말이죠.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크기 상 그게 8명만 들어가면 그만인 크기겠습니까? 수십 명이 들어가도 남을 그 방주를 달랑 8명이 들어갔을 때, 45명 타는 전세 버스에 운전사하고 차장하고 둘이 타고 가보세요. 장사 되겠어요? 대번 때려 쳐라! 이렇게 나오죠. 이래 가지고 장사 안 되잖아요. 노아가 방주 그게 지어놓고 그것도 8명이 남의 식구 없었어요. 자기식구 넣어놓고 아버지! 왜? 8명밖에 없네요? 그래 어쩌라고? 아마 하늘나라 가면 벌 많이 받겠습니다. 전도 안 했다고 이게 무슨 꼴입니까? 이렇게 했습니까? 오히려 반대입니다.
노아야 수고했다. 9번째 탈 인간 기어이 밀어냈구나? 훌륭했어! 그거 내가 봤다. 그 인간은 타서는 안 될 인간인데 자리 비웠다고 아무나 타는 게 아니지. 그래 수고했어! 9번째 인간 혹시 탈까 싶었는데 마지막 잘 밀어냈어!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아버지께서 내게 오게 하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수가 없다 했습니다. 아마 세계에서 제일 무서운 말 일겁니다. 이 말은 아무리 천국 가려고 그렇게 문 두드리고 교회에서 시키는 대로 다 해도 어림도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올수 없는 거예요. 마태복음 13장에서 하나님께서 뭐라 합니까? 이것은 너희에게는 허락되어 있지만 저 사람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이 허락이라는 말이 뭐냐 하면 백날 용 써도 소용없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그런데 이 편지를 보고 그 당시 편지입니다. 빨리 보시고 빨리 우세요. 이런 것 부탁을 못해요. 울던 안 울던 화장실에서 휴지로 쓰던 그것은 네 마음대로 해라 말이죠. 이 편지는 필히 구원 받을 사람에게만 효과 있게 쓰게 될 것입니다. 괜히 읽지도 않을 편지 갖고 있지 말고 옆에 사람 주란 말이죠. 다시 말 해서 환란과 핍박이 없는 사람한테는 이 편지 읽지 말라는 뜻이에요. 봐도 무슨 말인지 몰라요. 완전히 배짱이에요. 싫으면 말고에요.
이제부터 환란이 뭐고 핍박이 뭔지 알려 드리겠습니다. 환란 핍박하면 울고불고 하는 이런 것 가지고 환란 핍박하는데 그거 아니거든요. 아프고 하는 것은 참으면 그만입니다. 그러면 환란이 뭐냐? 예를 들면 소설 돈키호테이야기인데 돈키호테가 눈이 쌓였는데 돈키호테가 자기 애마를 가지고 하루 밤을 머물게 되었는데 눈 위에 보니까 뾰족한 것이 있었어요. 거기에 말을 묶어놨어요. 그리고 자기는 마을에 내려가 하루 밤을 잤었어요. 아침에 눈을 떠 보니까 교회 꼭대기 철탑에 말이 대롱대롱 달려서 울고 있더라 말입니다. 어제 밤에 덮여 있던 것이 다 뭐였습니까? 이것은 눈이었습니다. 눈 위에 뾰족이 나와 있으니까 자기는 말뚝 인줄 알고 맸는데 아침에 눈이 확 녹아 버리고 말이 매달려 있는 거예요. 이 뾰족한 것은 예배당 꼭대기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덮인 눈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전부 다 허상이죠. 허구적 이미지죠. 세상이라는 허구적인 이미지입니다.
그것이 싹 빠져 버리니까 말을 묶어놓아야 될 장소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에서 의미하는 것은 세상은 전부 다 자기적이고 인위적이고 조작된 것이고 이유도 모르고 남 뒤 꽁무니 따라 가는 거예요. 하지만 그렇게 가면서도 인간들이 기어이 놓지 않는 것이 있어요. 그것은 뭐냐? 자아, 자기라는 거예요. 어쨌든 나는 내가 살려야 살지 나 말고 나를 살릴 인간은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한테 묻습니다. 당신이 꼭 살아야 될 이유가 뭐냐? 그것은 본인이 해답을 찾을 수가 없어요.
‘누가 당신보고 살아야 된다고 지시합니까?’ 어, 그것은 생각 안 해 봤는데요. 내가 꼭 살아야 된다고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세상은 나 혼자 길을 걷고 나 혼자 밥을 먹고 나 혼자 영화보고 나 혼자 춤을 추고……. 울고불고……. 전부 다 나 혼자에요. 나 밖에 없다는 것, 결국은 선악과 따먹고 천상천하유아독존 이 세상에 믿을 놈은 나밖에 없고 나 외에는 아무도 안 믿는다는 겁니다.
예배당 꼭대기에 나만 남고 홀라당 다 떨어지는 게 이게 허무고 허상입니다. 그렇다면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받는 환란이라 하는 것은 바로 세상의 모든 것들은 허구적인 이미지에 불과한 거예요. 그것을 미리 알아버리라는 데서 오는 마음의 그 허전함, 쓸쓸함, 외로움, 아무도 거기에 대해서 의사소통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돈키호테는 미쳐버리잖아요.
예수님께서 고난을 이야기할 때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를 행하시고 물위 걸 때는 제자들이 그렇게 외로움을 몰랐습니다. 그냥 예수님께서 세상에 너무 비정하지요. 제자들아 나간다. 하고 가 버렸어요. 그러니까 볼일 다 본거예요. 교회 세운다고 하다가 가버렸어요. 그러면 남아 있는 사람은 뭐합니까? 핵심, 구심점이 빠져 버리고 없어요. 그럴 때 제자들은 이제 할 수 없다 옛날 했던 고기 잡으러 가요.
두 번째 중요한 것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계시고 11제자가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빗대어서 다시 보는 거예요. 이것을 인간은 지향적이라 합니다. 인간은 사물을 볼 때 자기한테 의미가 되기 위해서 사물을 보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저게 나한테 어떤 이익을 줄까 생각을 하면서 그 대상을 본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놔두고 서로 이야기 하는 것을 보면 노림수를 알 수 있지요. 예수님이여 하늘나라에 임하실 때에 누가 제일 높겠습니까? 하는 것은 이미 예수님을 순수한 마음으로 보지 않았다는 거예요. 인간은 순수함이 없어요. 인간은 뭔가 가득 들어 있는 대상으로 봅니다. 순수한 것이 없습니다.
누가 제일 높습니까? 할 때에 예수님이 이야기하신 것은 너희들이 뭘 받아라. 쓴잔,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도 마시게 될 것이다. 그 이야기가 무슨 뜻인지 하나도 몰라요. 하여튼 누가 높으냐? 이게 문제에요 왜? 높으면 뭐하는데? 예수님을 두고 각자 나름대로의 생각들을 했을 때 예수님을 내가 믿을 때 내가 하늘나라에 몇 번째 높은 자리가 됩니까? 할 때 이 사람이 예수 믿는 이것을 전이라 하고 예수 믿고 하늘나라 갔을 때를 후라고 하면 자기 자신이 예수님과 함께 하늘나라 갔을 때 생각하면 후의 모습과 지금 생각하는 전의 모습이 같아요? 안 같아요? 같지요 같은 인간이죠.
이 제자들은 예수를 믿음으로서 내가 예수 믿기 이전에 인간과 믿고 난 뒤에 인간이 전혀 다를 것이라는 생각을 감히 했겠어요? 안 했겠어요? 전혀 하지를 못 합니다. 내가 예수를 믿게 되면 현재 나는 똑같은 인간인데 다만 다른 점은 내가 예수님을 내 삶으로 삼았다는 그 추가적인 하나 더 보탤 뿐이지 내 자체가 어떻게 달라진다는 생각은 못하는 겁니다. 지금 내 생각, 내 마음은 그대로 예수 믿어도 마찬가지로 이어질 것이라고 미리 당겨서 예수를 생각한 겁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떠나 버리니까 과연 그들은 예수님이 없는 상태에서 어디로 갔습니까? 고기 잡으러 간 거예요. 그동안 예수님이 있던 효과는 전혀 없습니다. 베드로 같은 사람은 예수님이 잡혔을 때에 작은 소녀가 ‘나 아저씨 아는데 저 사람하고 다니는 것 봤는데’ 했을 때 ‘쉿! 아저씨 욕보일 있나?’ ‘맞잖아요?’ ‘아니에요. 나, 저 사람 저주 합니다.’ 전혀 달라진 게 없었어요. 자기의 마음, 자기의 심성, 자기의 포부, 그대로 계속 견지하고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 놓고 귀신을 좇아냈다고 그래 놓고 예수를 따라 다닌다고 장차 하늘나라의 좌청룡 우백호를 하겠다는 그런 심보를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오늘날 한국교회 교인들하고 똑같아요. 예수님이 떠나고 고기 잡으러 갔을 때 그때 예수님이 다시 찾아옵니다. 찾아와서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 묻습니다. 베드로가 하는 말이 사랑합니다. 라는 말을 못했죠. 어떻게 하느냐 하면 주께서 아십니다. 합니다. 왜냐 하면 내가 사랑한다는 것은 내 자신이 들어도 신임할만한 사람이 아닌 것을 본인도 이제 염치가 있기 때문에 주여! 제가 빡세게 사랑합니다. 라는 말을 해도 자기 말도 자기가 책임을 못 지지요. 왜냐 하면 시간 따라서 나는 달라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시간 따라서 내가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고 또 다시 배반할지 모르니까 아예 일임을 누구한테 일임합니까? 주께서 뭐 아시겠지요! 이렇게 답변한 거예요.
그러면 그 이야기가 끝났습니까? 주께서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너는 내 양을 먹이라. 양을 먹이라고 할 때는 신실한 사람에게 양을 먹이라해야 할 텐데 베드로처럼 배반했던 사람에게 그리고 달라진 게 없이 고기 잡으러 갔던 사람에게 양을 먹이라는 이 말은 주님의 양은 베드로의 실패했다는 그것에 동참해야 그게 주님의 양이에요. 실패하지 않은 사람에게 맡길 양은 없습니다. 실패한 사람에게 맡겨둬야 그 실패한 사람은 그 양을 나의 양이라고 우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위대한 탄생에서 오디션 볼 때 너 누구를 멘토로 정해서 누구한테 가서 노래 공부할래? 나는 부활의 김태원한테 맡기겠습니다. 김태원이 노래 잘 합니까? 기타는 잘 치는데 노래는 못 하죠. 김태원이 이렇게 하죠. ‘야, 너는 절대 나를 본 받아서는 안 된다.’그것을 가르치는 거예요. 그럴 때 그 사람은 김태원의 양이 아니고 누구의 양일까요? 자기에게 양을 인수인계했던 예수님의 양이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바른 목회자입니다.
목회자는 한 없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실패해야 돼요. 실패하면 실패할수록 훌륭한 목회자가 되는 겁니다. 나는 인간도 아니다. 그럴 때 주께서 양을 맡겨 주게 되면 그 사람은 한 시라도 저 양은 내 소유의 양이라는 생각을 할 수가 없어요. 그게 바로 천국이에요.
이제부터 세 번째 어려운 겁니다.
‘살후 1:5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이 내용이 상당히 어려워요. 어려운데 쉽게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지금 내가 이런 행동하는 것이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가 아니고 하늘나라에 통하겠는가를 지금 물으면 돼요. 지금 내가 하는 이 행동이 하늘나라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통하겠는가를 지금 물으면 돼요. 교회에서 내가 이런 행동할 때 남들이 나를 얼마나 예쁘게 보겠느냐? 그렇게 물으면 안 되고 세상 사람들이 나를 볼 때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그렇게 물으면 안 되고 하늘나라에 이미 도달한 입장에서 지금 이 행동이 하늘나라에 적합한가를 스스로 한번 물어 보자 이 말입니다.
그러면 하늘나라에서 골프 잘 친다고 자랑한다? 그것은 하늘나라에 어울리지 않지요? 노래 잘 한다, 수학 잘 한다, 돈 잘 번다, 설교 잘한다, 암기 잘한다. 이게 하늘나라에 통합니까? 전혀 안 통하지요. 그러면 차 빼고 포 빼고 마 빼고 상 빼고 하면 그러면 남는 게 뭐가 있습니까? 내가 나 된 것은 그냥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는 것만 하늘나라에서 통하겠지요? 그것을 지금 그대로 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기준이 뭐냐 하면 하늘나라에서 통하겠지 가 기준이 되겠지요.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환란이 없이 사는, 사는 것 자체가 우선이 되는 사람에게는 모든 행동에서 목적이 뭐냐 하면 내가 이 행동을 해야만 어떤 행동을 해야만 나는 이 땅에서 밥 먹고 살 수 있는데 유리하냐. 불리 하느냐 그것만 따지게 돼요. 내가 이런 행동을 하면 남들이 나를 예쁘게 봐서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겠지? 그러니까 나는 이 행동에 나서야지! 라는 것이 기준이 돼서 알겠지요. 그것은 환란입니까? 환란 아닙니까? 그것은 세상에서 받는 고난일지 모르겠지만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하나님나라에서의 환란은 아니란 말입니다.
사도행전 14장22절에 보면
행 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그리고
롬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롬 5: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롬 5: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롬 5: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인간을 가지고 놀라요. 완전히 떡갈비에요. 도마 위에 올려놓고 이 칼날은 환란 다다닥, 이 칼날은 소망 다다닥, 이 칼날은 인내 다다닥, 온 난도질을 우리가 말씀으로 당해요. 우리는 우리 몸을 주체 못해 간들간들하고 있는데 이 몸 하나 이 세상에 밥 먹고 살기 힘든데 거기다가 하나님이 난도질을 쳐 버리는 거예요. 다다닥 다다닥 도마 위에 빨랫감 다듬이질 하듯이 박자 맞춰 말씀으로 쳐 버리는 겁니다.
우리는 온 육신에 칼질로 양념이 들잖아요. 온 육신의 말씀덩어리가 돼요. 떡갈비에 양념이 뚝뚝 떨어지듯이 말씀덩어리가 뚝뚝 떨어져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 나라의 환란을 듬뿍 품고 있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왜 이런 수모를 당해야 되는가? 그것은 교회 생기기 전에 먼저 앞서 내린 게 있어요. 그 내린 것을 예수님 당시에 ‘율법으로 저주를 흠뻑 받았다’ 이 율법이라는 게 산상설교 아닙니까? 율법으로 염려하지 마라는 말씀으로 우리가 피부가 다 벗겨져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걸치고 있는 율법의 칼날로 말미암아 완전히 피부가 다 벗겨져서 생 근육을 쏟아내면서 벌거벗은 채 질주하고 있습니다. 벌거벗고 거리를 다니고 있는 거예요. 저거 미친 거 봐라 옷도 안 입고 피부가 다 벗겨진 거 봐라! 그게 바로 예수님의 말씀으로 얻어맞는 사람들의 특징이에요. 그게 그 당시에 데살로니가 교인들입니다.
차라리 성경을 몰랐으면 천하의 위대하고 천하에 잘난 사람인데 성령을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말씀을 받아 보니까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도 간음죄에요. 마음속으로 간음해 놓고 무슨 복을 받아! 이렇게 된다 말입니다. 네가 말하고 행동으로 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네가 낙심하게 되면 차라리 네가 살인 누명 쓰고 죽는 게 났다 할 정도로 그런 식으로 나올 때 차라리 그 말씀을 몰랐으면 마음 편하게 살 것을 그게 어깻죽지가 멍 다 들었어요.
이런 말씀이 있지요. 나는 이 땅에 머리 둘 곳도 없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이 제가 어떻게 해야 구원 받겠습니까? 네가 모든 것을 팔고 나를 따라 오라 그러면 영생을 얻으리라 그런 말씀, 또 어떤 사람이 와서 형이 아버지 재산을 다 가져갔습니다. 하니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네가 생명은 소유의 넉넉함이 아니라 해서 공인중개사도 아니고 변호사도 아니고 못 받아도 냉혹하게 어디 내 앞에서 돈 이야기를 하느냐? 이렇게 된다면 교인들이 돈 문제 가지고 예수님한테 기도 하겠습니까? 예수님, 형이 다 가져갔습니다. 하면 주님께서 뭐라 하겠습니까? 네가 그따위 가지고 예수를 이용하려하냐? 하게 되면 얼마나 사람이 의지 할 곳이 없겠어요? 예수님을 믿고 모든 문제를 예수님께 해결하려고 왔다가 입에서 꺼내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꺼내서는 안 되는 이야기만 쏟아내고 있으니까 이것은 온 몸에 재봉틀 가지고 말씀으로 온 어깨 죽지를 다다닥 박아놔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문신을 새겨요. 온 피부에 신구약 성경이 다 박히도록 만들어요.
그리고 문신으로 끝나는 게 아니에요. 그 속에 잉크로 박혀있는 것이 작동하면 이게 리모컨이 되어 우리는 말씀대로 살 수 밖에 없는 입장이 되었다 말입니다. 남들은 그런 게 아닌데 말씀이 함께 있으니까 남들이 겪지 않는 일을 겪는 거예요. 예수님의 제자들 보세요. 예수님의 제자들이 고난을 받는 것은 뜻이 아닙니다. 아까 봤죠. 우리가 하늘나라 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게 된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환란을 만들어서 하늘나라 가려고 시도 했단 말입니까? 아니죠. 하늘나라 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 땅에서 환란을 겪는 것은 필수 코스 아닙니까? 당연하다 이 말이죠.
하늘나라 가려면 많은 환란이 필요하다는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사도 바울이 거기에 동원되고 인원들이 재료로서 거기에 초청을 받은 거예요. 아 그러니까 말씀이 필요하네! 라고 매일같이 느끼도록 만드는 겁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측 사망을 낳느니라.’ 이것을 다른 사람한테서 찾을 필요 없이 본인이 매일같이 욕심을 끄집어내고 이 욕심으로 인하여 마음이 괴롭고 이루어질까? 안 이루어질까? 얼마나 우리가 투쟁 했습니까? 사람이 기대한다는 자체가 자기한테는 짐이 되는 거예요. 차라리 내가 없으면 기도도 안 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