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 70명 130109
장로 70명 130109
이름 : 이근호(IP:119.18.69.144)
장로 70명 (겔 8:10-13)
이근호
13-01-09 21:12
장로 70명
2013년 1월 9일 본문 말씀: 에스겔 8:10-13
(겔 8:10, 개정) 『내가 들어가 보니 각양 곤충과 가증한 짐승과 이스라엘 족속의 모든 우상을 그 사방 벽에 그렸고』
(겔 8:11, 개정) 『이스라엘 족속의 장로 중 칠십 명이 그 앞에 섰으며 사반의 아들 야아사냐도 그 가운데에 섰고 각기 손에 향로를 들었는데 향연이 구름 같이 오르더라』
(겔 8:12, 개정)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의 장로들이 각각 그 우상의 방안 어두운 가운데에서 행하는 것을 네가 보았느냐 그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지 아니하시며 여호와께서 이 땅을 버리셨다 하느니라』
(겔 8:13, 개정)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다시 그들이 행하는 바 다른 큰 가증한 일을 보리라 하시더라』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멸망 당하기 몇 년 전,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로 하여금 유다 백성들이 성전에서 무슨 가증한 짓들을 하는지 보게 하셨습니다. 에스겔이 보니 과연 제사장이나 장로 70명과 여러 명이 우상 섬기는데 열중했습니다. 바로 이런 짓들이 성전이 필히 망해도 마땅하다고 하시는 겁니다.
하지만 인간들의 입장에서 보면, 우상을 좀 섬기면 어떻습니까? 사람들이 세상 살기가 참 힘듭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태양신이라든지 담무스라는 신은 다 실생활과 관련된 신입니다. 곡물의 신이지요. 풍성한 수확을 위해 섬기는 신으로 유명했습니다. 이런 신들을 섬긴다는 것은 그 신 자체를 위함이 아닙니다.
다 인간들 자기를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의 세상살이란 항상 불안정하고 위태위태합니다. 모든 사태가 들이닥쳐서 고만고만한 지금의 형편마저 침몰시킬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런 불안감에서 인간들은 절로 절대적인 존재를 상정하고 그 앞에 자신들의 솔직한 바람을 바치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불안하니까 그리고 공포스러우니까 말입니다. 그냥 가만 있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잘 할 수 있는 공손함과 겸손함과 성실함을 어떤 식으로도 성의를 표하여 알 수 없는 신에게 아부를 하고 싶은 겁니다. 신년초에 점을 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만일의 사태를 위하여 미리 대비하고 싶은 겁니다.
이런 차원에서 교회마다 신년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기독교 신자라서 차마 노골적으로 점보려 갈 수는 없으니 그 대신 전지전능하다는 하나님에게 정성을 다하고 마음을 모아 미리 뇌물쪼로 헌금을 드려서 사전에 액운을 지우고 싶은 겁니다. 즉 화나 재앙이나 저주는 오지 않고 오로지 축복, 축복만 오는 한 해를 바라는 마음에서 신년초에 간절이 교회에 나가서 기도를 올립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게 다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스러운 일입니다. 저주를 피하려고 하는 짓들이 실은 이미 저주받았기에 나오는 몸짓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70명의 장로들은 백성들을 가르치고 행동에 모범을 보여야 하는 지도자에 속합니다. 제사장은 말씀을 바르게 가르칠 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백성들과 합세해서 우상을 섬기는 이유는, 유다 나라의 특수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인 나라에서 지도자란 백성들로 하여금 행복하게 살게 하는 일을 해야 될 자들입니다. 백성들이 요구하는 것을, 백성들이 원하는 바를, 백성들이 하고 싶은 것을 들어줄 수 있는 자들이 지도자입니다.
그래야 지도자들은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유다 나라 백성들은 우상을 섬기고 싶어합니다. 지도자들은 그 백성들과 편승하여 나라의 단결과 평화를 위해 같이 우상을 앞장 서서 섬기고 있습니다. 과연 이스라엘에게 있어 장로가 이런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허용될까요?
세상적인 단체에 있어 스스로 책임자라고 여기는 자들은 타인의 눈에 솔선수범을 모습을 보이려고 합니다. 혹시나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봉사 일에 칭송하면서 같이 감동, 감화 받아서 모든 사람들이 함께 자진해서 봉사에 나서기를 고대하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희생적인 일을 하게 되면 다른 사람들은, 그 사람에게 일을 맡기고 빠져버립니다.
“당신은 일을 잘하지만 나는 당신처럼 못하니 당신 혼자 다 하소”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일을 책임지고 하는 자가 은근히 부화가 납니다. “어, 나는 그동안 남들로부터 이용당했네? 나만 바보되었잖아”하고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게 됩니다. 그래놓고 “그래 나도 이 일에 책임 안 질거야. 나만 바보로 살 수는 없어”라는 식으로 나옵니다.
따라서 어떤 일에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것은 남들로부터 이용당했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만 하게 됩니다. 자신의 희생과 자신의 노고를 타인들은 도리어 놀려먹는 거리로 삼는 것에 대해서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오르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지도자들은, 남들이 모르는 특수 정보를 통해서 자신이 희생한 댓가를 나름대로 철저하게 챙기게 됩니다. 바보 안되기 위해서입니다.
과연 유다 나라의 지도자인 장로들도 그래야 할까요? 민수기 11:24에 보면, “모세가 나가서 여호와의 말씀을 백성에게 고하고 백성의 장로 칠십 인을 모아 장막에 둘러 세우매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그에게 임한 신을 칠십 장로에게도 임하게 하시니 신이 임하신 때에 그들이 예언을 하다가 다시는 아니하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성신이 임한 자들이 장로였고 바로 이런 상황은 결국 모든 구원될 자들은 궁극적으로 그렇게 되어야 될 상황인 것을 미리 알려주셨다는 겁니다. 누가복음 7장에서 어떤 여인은 울면서 예수님의 먼지 덮힌 발을 씻어줍니다. 이것을 지켜 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난합니다.
어떻게 거룩한 자가 소문이 안 좋은 더러운 여인으로부터 봉사를 받느냐는 겁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많은 용서받은 자가 많이 사랑하는 법이다”고 말입니다. 진정한 거룩이란 더러움을 더욱 드러내면서 용납하십니다. 즉 참으로 성령을 받은 자의 봉사는, 봉사를 하면 할수록 자신이 더욱더 죄인인 것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용서와 은혜는 오직 예수님의 희생을 근거로 주어지는 혜택이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이 인생 살 동안에 제공된 모든 것이 자신이 잘나서, 받을만 해서 받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에 근거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평소에 그 희생과 고통과 쓴 잔을 잊고 살아가는 자신을 생각해보면 늘 울면서 봉사해서 시원찮은 겁니다.
바로 이런 상태에서는 부러움이나 공포 같은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당연히 저주받아도 마땅한 존재임이 확인되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저주로 일관되어야 될 인생이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인하여 용서로 일관된 인생으로 전환되었으니 이 감사 안에 할 말을 잃는 겁니다.
오늘날의 성전은 성도의 마음입니다. 이 성전 안에 돈과 인기와 세상 권력을 추구하는 악마적 충동으로 가득 들어 있는지를 살펴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그들을 털어놓으면서 살아야 합니다. 기도 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진작 죽어야 될 자가 오늘도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습니다. 목숨 붙어있을 동안에도 하나님에게만 은혜의 공로를 돌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3-01-11 06:46
22강-에스겔8장 10-13(장로 70명)130109-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8장 10절에서 13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60페이지입니다.
에스겔 8:10-13
“내가 들어가 보니 각양 곤충과 가증한 짐승과 이스라엘 족속의 모든 우상을 그 사면 벽에 그렸고 이스라엘 족속의 장로 중 칠십 인이 그 앞에 섰으며 사반의 아들 야아사냐도 그 가운데 섰고 각기 손에 향로를 들었는데 향연이 구름 같이 오르더라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의 장로들이 각각 그 우상의 방안 어두운 가운데서 행하는 것을 네가 보았느냐 그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지 아니하시며 이 땅을 버리셨다 하느니라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다시 그들의 행하는바 다른 큰 가증한 일을 보리라 하시더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최종적으로 멸망하기 5년 전, BC591년에 하나님께서 에스겔로 하여금 이스라엘 예루살렘을 다시 한 번 보게 하는 겁니다. 멸망 직전에 그들이 어떤 식으로 하나님의 성전에서 행동했는지를 에스겔로 하여금 목격하게 하는 겁니다. 이렇게 그들이 목격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멸망시키는 것과 그들의 행동하는 것이 다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에스겔올 통해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에스겔이 예루살렘에 가니까 그들이 뭘 하고 있었는가? 본문에 장로 70명과 사반의 아들이 나오는데 사반이라는 사람은 요시아 왕 때의 제사장입니다. 요시아 왕과 더불어 우상을 부쉈던 그 제사장의 아들 야아사냐도 장로 70명과 더불어서 한참 우상 섬기는데 열중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방이 하나 나오는데 그 방의 이름이 뭐냐, 우상의 방입니다.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성전에서의 행동이란 우상의 방에서 열심히 우상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두고 하나님께서 가증스러운 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성경에서 우상섬기는 것을 가증스럽다고 하는데 우상을 좀 섬기면 안 되는 겁니까? 우상 좀 섬기는 것이 뭐가 문제입니까? 우상이라는 것은 성경에 보면 원래 없는 것이라 되어 있는데, 원래 우상이란 없는 것이고 하나님은 한 분 밖에 없다고 하는데 그 한 분밖에 없는 하나님이 마음을 크게 써서 인간들이란 원래 그런 것이라고 하면서 통 크게 넘어갈 수도 있지 않습니까? 어른 같은 심정으로 말입니다. 인간들이 우상 섬긴다고 일일이 갋아야 되겠습니까?
인간들 입장에서는 우상 섬기는 이것이 단지 우상이 좋아서 섬기는 것이 아니고 사는 것이 힘들어서 섬기는 겁니다. 14절에 보면 “그가 또 나를 데리고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는 북문에 이르시기로 보니 거기 여인들이 앉아 담무스를 위하여 애곡하더라.” 담무스라는 신은 곡물신입니다. 겨울이 되면 다 죽지만 봄이 되면 다시 모든 것이 싹이 트고 피어나지요. 그때 유대의 아줌마들이 이 담무스 신을 섬겼습니다. 정성을 다했지요. 인도와 중국 사이에 부탄이라는 나라가 있습니다. 네팔 옆에 있는 그 부탄이라는 나라는 인구의 90퍼센트 이상이 불교를 신봉하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각 가정마다 불교제단을 모셔놓았어요. 아침마다 거기서 복을 빌고 정성을 바치는 겁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산다는 것이 뭘까요? 산다는 것에서 그 사람이 하는 짓을 따지면서 살게 되면 결국 전쟁밖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경제는 물론이고 항상 힘을 합쳐야 되거든요. 힘을 합쳐서 서로 돕고 서로의 필요를 제공할 때 이 세상에서 안심하고 행복하게 살 수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불교를 믿든 이슬람을 믿든 그런 것을 꼭 터치 해야 되겠습니까? 사람의 취향이 갖가지라서 하나님보다 부처가 좋다고 한다면 부처 섬기면서 살 수 있는 것이거든요. 자기가 좋아하는 부처 섬기면서 남에게 해코지만 안하면 되잖아요.
남 괴롭히거나 남의 것 훔치거나 살인하지 않고 남에게 피해 안주면서 불교 믿으면서 마음 어질게 먹고 마음 낮춰가면서 서로 도와주면서 사는 것, 이것이 얼마나 다정한 이웃이고 훌륭한 사회입니까? 그것이 뭐가 문제인데요? 하나님이 참 까칠하지요? 사람인 이상 힘들 때는 어딘가 강력한 힘에 의지하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부탄이라는 나라에서 부처 섬길 때 그냥 하지 않고 뭔가 모양을 갖춰놓고 하지요. 부처상 만들고 깨끗한 곡물 바치고 정화수 떠놓고, 그냥 맹숭맹숭하게 하는 것보다 정갈한 형식 갖춰서 자기 마음 표현하게 되면 그것이 훨씬 정신집중이 되어서 마음을 한곳에 모으도록 유도할 수 있는 거예요.
우리 집 어려울 때마다 도와주는 할머니가 있는데 그 집에 들어가 보니 불상이 모셔져 있더라, 또는 마리아를 섬기고 있더라, 그것이 무슨 큰 허물이 됩니까? 사람이 자기 취향 따라 종교를 가지거나 안 가지는 것은 자기 자유인데 그것을 가지고 우상을 섬긴다고 꼬집어서 지적을 해야 하고 그것을 시비 걸 이유가 뭐가 있습니까? 여기에 나오는 장로 70명 그리고 제사장도 우상을 섬겼는데 이 사람들은 요새처럼 그냥 가게처럼 교회 차려놓고 손님 모시는 목사 같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 당시는 유다나라 자체가 종교국가예요.
앞에 있는 종교 떼버리면 남는 것은 국가거든요. 국가의 지도자가 밤이고 낮이고 해야 될 것은 뭐냐, 백성들 편하게 사는 것 그 것 외에는 다른 생각하면 안돼요. 백성들도 그것을 알아요. 저 지도자가 자기 배만 챙기는지 아니면 백성들 편에 서서 백성들 행복하게 해주려고 애쓰고 노력하고 작은 나라지만 단합시키려고 애쓰는지 백성들이 뻔히 다 알아요. 그래서 지도자급에 있는 장로들과 제사장들은 뭘 원하느냐, “백성들이여, 여러분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섬겼으면 좋겠습니까? 다른 신을 섬긴다고요? 예, 섬기세요.” 그거 섬겨서 나라가 하나 되고 단합되고 평화롭게 된다면 그게 유다나라로서는 사는 보람이고 그게 행복이잖아요.
집안중의 어떤 이는 교회 가고 어떤 이는 절에 가더라, 그걸 가지고 아버지가 몽둥이 들고 네가 절에를 가, 하고 때릴 필요가 뭐가 있어요? 자식이 둘인데 하나는 교회 가고 하나는 절에 간다, 너 같은 자식 없다, 호적 파가라, 이렇게 때리고 싶더라도 절에 가는 애는 공부도 1등이고 서울대학도 합격이고 거기다 사법고시도 합격하는데 교회 가는 애는 바보인지 병신인지 공부도 못해 몸도 비실비실하고 아무것도 못한다면 남들 앞에서 어느 자식을 자랑하겠습니까? “우리 애는 공부도 못하고 몸도 비실비실해도 교회 하나 잘 나갑니다.” 이것이 자랑이 되겠습니까?
그렇지 않고 절에 간다는 이야기는 빼고 “우리 애가 이번에 판사가 되었습니다.” “자식도 잘 키웠네요. 역시 엄마가 그렇게 기도하더니. 지금 절에 나가지만 나중에 철들면 다 교회 가겠지.” 이런 마음이 간다 이 말이지요. 이것이 백성의 마음이고 인간의 마음인데 그것을 아버지가 “너는 사법고시고 뭐고 다 치워라. 하나님도 안 믿는 것이 무슨!” 하고 몽둥이를 들 수 있는 아버지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우상 섬긴다고요? 인간은 자기가 섬기고 싶은 것 자기 맘대로 섬기든지 말든지 놔두면 되지 그것을 꼭 하나님이 따지고 나서야 하겠습니까? 인간이 철없는 것 다 뻔히 아시면서. 좀 섬기면 어떤데요, 좀 섬기면.
우리가 우상을 좀 섬기면 어떤가, 우상 좀 섬긴다고 해서 우상이 없다는 것을 뻔히 아시는 하나님이 그것을 가지고 화를 낸다면 그 하나님이 이해 안 되는 이상한 하나님이지요. 우상을 섬긴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교회 집사고 권사지만 신년 초에 점집에 가서 점 한 번 쳐 봤다, 궁합도 좀 봤다 이 말이지요.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합니까, 하고 싶은 걸. 목사가 그것을 알고 “우리가 교회 다니면서 점 같은 것 보면 안 됩니다.” 그러면 교회 장로나 집사들이 뭐라고 합니까? “그러면 난 하나님 안 믿지 뭐.” “하나님 안 믿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내가 믿기 싫은데 그만두지 뭐. 그동안 믿어준 것만 해도 하나님이 고마운 줄 아시오. 내가 안 믿고 싶은데도 억지로 믿으라고? 치워버리지 뭐.”
이렇게 나오거든요. 오늘날 교인들이 그렇게 나온다고요. “여러분, 이렇게 하는 것은 우상숭배입니다.” 하면 “지금 나와 주는 것도 고맙다고 여기세요.” 그렇게 한다니까요. 이렇게 따져서 교회 몇 명 나오겠습니까? 다 가버리는데. 여기서 인간의 종교성이라 하는 것은 어떤 누구도 말릴 수가 없습니다. 본문의 장로 70명이나 제사장도 하나님 믿는다, 믿는다 하지만 사실은 백성들에게 존경받고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우선되는 거예요. 그래서 같이 백성들이 좋아하기 때문에 성전 벽에다 우상들을 새겨놓은 겁니다. 15절, 16절에 보면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그것을 보았느냐 너는 또 이보다 더 큰 가증한 일을 보리라 하시더라 그가 또 나를 데리고 여호와의 전 안뜰에 들어가시기로 보니 여호와의 전문 앞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약 이십 오인이 여호와의 전을 등지고 낯을 동으로 향하여 동방 태양에 경배하더라.”
17절에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보았느냐.” 이 뒤에 나오는 대목을 죽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데리고 “저 한 번 봐라. 저런 짓을 하고 있다.” 그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분노하시는 그 심정을 땅에 있는 우리는 헤아리지를 못해요. 왜냐, 우리가 당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어떻게 잘 섬길까, 이런 생각은 아예 없어요. 이 땅을 살되 즐겁고 편하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것, 이것이 우선이라는 말이지요. 이것이 우선이니까 점치고 싶을 때 뭔가 섬기고 싶을 때 장난삼아 섬기는 것은 내 맘이라는 말이지요.
이 중간에, 70인 장로들과 지도자들은 그 안에 있는 겁니다. 아무리 우리가 따져도 우상섬기는 것이 나쁘다, 라고 할 수 있는 이유를 어떤 사람을 끌어 모아도 성경 말고는 그 이유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왜 우상을 섬기지 말아야 됩니까? 왜 인생을 살면서 말씀대로 우리가 다 지켜야 합니까? 그 이유를 대 보세요.”라고 할 때 성경을 덮고서는 그 이유를 못 댑니다. 각자 인격이 있고 자존심이 있으니까. 오늘 본문에 하나님이 에스겔 보고 “저것 봐라. 저런 나쁜 짓 하는 것 좀 봐라.” 이런 소리를 해도 사람들 귀에 그게 들어오지도 않아요.
제가 누누이 이야기하지만 그래서 이 유다나라가 특수한 나라입니다. 민수기 11장 24절에 보면 거기에 70장로가 나옵니다. 70장로에게 하나님의 성신이 임해요. 유다나라가 특수하다는 말, 이스라엘이 특수하다는 말은 장로가 그냥 장로가 아닙니다. 장립집사 되어서 연수 5년쯤 채우고 그 다음에 돈 좀 냈다고 장로 시켜주고, 오늘날 한국교회의 그런 장로가 아니에요. 돈 냈다거나 봉사 좀 했다고 해서 시켜주는 그런 장로가 아닙니다. 봉사라 하는 것은 책임감을 가지고 하거든요. 그런데 책임감이 언제 떨어지는가 하면 자기가 이용당했다고 생각할 때 책임감이고 뭐고 다 손 놔버립니다.
교회 청소하는데 자기만 하거든요. 가만 보니 남들은 하나도 안 해요. 자기가 청소할 때 남들이 호응도 해주는 것을 기대했는데 아무도 안하는 거예요. 그럴 때 처음에는 이 교회 청소 내가 다 책임진다고 했는데 내가 책임진다는 이 사실을 주변 사람들이 다 이용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지금 이용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그만 때려치우는 거지요. 성신 받은 겁니까?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요시아 시대에 우상을 부수는데 앞장섰던 그 제사장의 아들이 오늘 본문에서는 우상 섬기는데 지도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사반이 그 당시에 우상을 부수는데 앞장섰던 것은 책임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시아 왕이 책임을 지고 “우상 다 부숴! 내가 책임질게.” 그래서 시키는 대로 한 거예요. 요시아 왕이 죽은 뒤에 왕들이 다 엉망인 판에 미쳤다고 내가 책임지겠나, 남들에게 욕 안 얻어먹을 만큼 하겠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누가 시켜서 해버리면 하나님이 시키지 않는 이상은 그냥 흉내만 낼 뿐이라니까요. 혹은 자존심, ‘혹시 내가 이렇게 봉사하면 남들이 잘한다고 격려해주면 내가 중심인물이 되고 계기가 되어서 우리교인들이 다 봉사하는 사람이 되겠다.’ 이런 계산을 하고 있는데 우리교회 보통 교회입니까, ‘너나 해라.’
헌금도 마찬가지에요. ‘어, 헌금 하네. 그럼 나는 안 해도 되겠네.’ 이렇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이스라엘 나라가 특수한 것은 70인이 그냥 장로가 아니고 하나님의 성신이 임해버린 거예요. 하나님의 성신이 70인에게 임했을 때 회막에 나가지도 않고 진중에 있던 두 사람이 성신 받고 그냥 진중에서 예언을 하니까 한 소년이 모세에게 일렀어요. 그때 여호수아가 모세에게 “못하게 해야 합니다.” 했을 때 모세가 하는 말이 “모든 사람들이 다 이와 같이(선지자) 되기를 원한다.”(민 11:29) 했습니다. 세상적인 단체 같으면 “나 장로입니다. 제가 희생적인 본을 보이겠습니다. 여러분도 제 희생적 모습을 보고서 ‘저렇게 하는 것이 예수 잘 믿는 것이구나.’ 하고 여러분이 저에게 감동감화 받아서 교회를 잘 끌어갑시다.” 이것이 멸망 받을 교회입니다.
장로라 하는 것은 기름 부은 자, 성령이 임해버리면 뭐가 생각나느냐하면, 하나님의 희생이 있었고 그 희생을 근거로 해서 나에게 희생의 영이 임한 거예요. 쉽게 말해서 내가 지금 살아가는 모든 것이 다 은혜인데 그 은혜가 그냥 은혜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당장 죽어도 좋고 굶어도 좋은데 하나님께 희생한 그 긍휼로 내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을 제공받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 많이 용서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는 그 원리에 의해서 봉사가 되는 겁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울면서 귀한 향유를 뿌리면서 눈물 쏟아가면서 자기 긴 머리털로 예수님의 그 먼지 나는 발을 씻었습니다.
옆에 있던 바리새인들이 그 여자를 나무라고 예수님에 대해서 못마땅해 했습니다. 저 여자가 평소에 행동을 더럽게 했는지 온 동네에 소문이 다 나 있는데 저 질 나쁜 여인이 거룩하다는 예수에게 가까이와도 어떻게 그 더러움이 거룩을 만날 수 있을까, 그것을 용납한다면 그 거룩은 거룩이 아니다, 할 때에 예수님의 취지는 이겁니다. 진정한 거룩이라 하는 것은 아무도 반기지 않는 그 더러움을 받아주는 거예요. 받아줄 때 그 결과가 뭐냐, 막달라 마리아 그 여인이 주님과 가까이 하면 할수록 내가 더욱 더 더럽다는 것을 깨닫는 식으로 봉사가 나오는 겁니다. 청소를 하면서 ‘나는 나밖에 모르는구나.’ 헌금을 하면서 ‘나는 돈만 생각하는 나쁜 놈이구나.’ 이것을 늘 깨닫게 되는 그것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시키시는 봉사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자기의 장래가 두려워서 우상 섬기는 식은 될 수가 없지요. 그 사람은 어떤 경우라도 성령이 있는 이상 우상을 섬길 수가 없습니다. 세상이 무섭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우상 섬기는 심보가 뭐냐, 무서워요. 장래가 무조건 무서워요. 한 달 뒤가 무섭고 일 년 뒤가 무섭고 모든 것이 겁이나요. 겁이 나기에 미리 앞날을 예측하고 싶어서 점을 쳐보는 겁니다. “올해 신수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올해는 사업이 좀 잘 되겠습니~까!!” 이렇게 자꾸 묻는 거예요. 점은 치고 싶은데 교회 권사나 집사나 장로가 되어서 우상 섬긴다 싶어서 그 대신 교회 목사들이 마련해 준 것이 뭐냐, 신년철야예배, 그런 겁니다, 송구영신예배.
한해 신수 위해 기도발로 하나님한테 바쳐서 이렇게 기도를 올리니 올해도 복 주옵소서, 그렇게 되는 겁니다. 사람이 복을 원한다는 것은 그만큼 무섭다는 거예요. 세상살이 무서워서 못살겠다는 거예요. 딸이 있으면 밖에 나가서 성폭행당할까 겁나고 차 블랙박스 보니까 아무 차나 언제 들이박아서 죽을까 겁나고 세상 모든 것이 다 겁나요. 유럽 경기 안 좋으면 중국 경기 안 좋고 일본 경기 안 좋고 그러면 내가 사는 집값 내려갈까 겁나고 치매 걸린 부모는 오늘도 무슨 짓 할지 겁나고 모든 것이 두려우니까 이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제발 축복해 주옵소서, 라고 하는 것, 그런 마음으로 교회 나오는 것이 바로 우상이에요.
그래서 제가 글 썼지요. “새해 저주 많이 받으세요.” 어떤 분이 댓글로 “목사님도 올해 저주 많이 받으세요.”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정죄함이 없다고 했지요. 저주가 없어요. 이것을 사람들이 말로, 머리로는 알고 있어요.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어떤 경우에도 합력해서 선을 이루기에 저주는 없는 거예요. 누가 너를 저주하리요, 내가 대신 그 안에 들어 있는데 예수님을 누가 저주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것이거든요. 우리는 예수님 몸에 붙어 있는 오징어다리 같은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몸통이고 우리는 지체인데 지체 건드리는데 몸통이 가만 있을 리가 있습니까? 이미 몸통 되시는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자신의 희생의 피를 가지고 어떤 경우라도 저주는 없다, 저주로부터 너는 해방되었다, 내가 너를 정죄하지 않는데 누가 너를 정죄하는가, 이렇게 로마서 8장에서 이야기했는데 사람들이 성령과 더불어서 그 말씀이 내 안에 들어와야 장착이 되는데 성령을 받지는 않고 말씀만 들어오다 보니 그 말씀가지고 점치는 짓을 하는 거예요.
예수 이름으로 점치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점치고 삼위일체 부르면서 점치고 우상을 섬기는 거예요. 그러니 성령 안 받은 사람에게는 성자도 우상이고 성부도 우상이고 성령도 우상이고 전부 다 우상이고 그 교회는 우상의 단체가 되고요. 하나님께서 유다나라 성전을 망하게 하는 것은 진짜 유다나라는 성령 은 사람의 집단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민수기 11장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이스라엘 역사를 끌고 가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있다.” 그래도 주님께서는 안속아 넘어갑니다. 결국은 그들이 이스라엘나라를 망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 망하는 것이 너희들이 섬긴다는 그 여호와로 인하여 망하게 했을 때 그 망하는 지점에서 진정 주님 앞에 진정 회개하고 주님의 희생을 믿었는지 아니면 그저 자기 몸 하나 살리기 위해서 교회 나가 줬는지, 이것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멸망 속에서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그 와중의 본문에 우리가 와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합니다. “저 한 번 봐라, 좀 봐라.” 하나님 보시기에 모조리 다 우상입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우상을 섬길 수밖에 없는 이유가 성신을 안 받았고 성신을 안 받았으니 세상사는 것이 무서울 수밖에 없고 무서울 수밖에 없으니 어떻게든 자기 사는 쪽으로만 조치를 해야 돼요. 정화수를 떠놓든지 뭘 하든지, 교회 나오는 것, 봉사하는 것, 이것이 일종의 정화수 떠놓는 것이고 불교신자들이 절에 가서 비는 것과 똑같습니다. 수십 번 이야기했어요. 교회 오실 때 나는 왜 멸망되어야 됩니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 교회 나오라고 그렇게도 이야기했건만 사람들은 자꾸 “교회 나왔으니 한주는 그냥 무사히 넘어가게 해주세요.” 이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덮으려고 한번 살아보려고, 전능하시다는 그 하나님의 솜씨의 도움을 받아서 자기 몸 하나 유지해보려고 예수 믿고 하나님 거론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벗겨먹겠다는 거지요.
그런 교회는 많아요. 많은 정도가 아니라 전부 다 그런 교회에요. 결국 그런 교회가 잘된다는 말은 뭐냐, 모여라, 자기 갖고 있는 자기 우상들 다 갖고 오너라, 우상들 다 모여서 신이시여 우리들의 소원을 들어 주소서, 하겠다는 거지요. 그런데 그 소원이 뭐냐, 우상이기에 마귀잖아요. 마귀의 소원은 세 가지잖아요. 돌이 떡이 되게 하는 것, 세상에서 유명인사 되어서 인기 없고, 그 다음에 세상 좋은 것 다 갖고 싶은 것, 그런 마음을 가지고 교회 오니 속에 마귀가 들어있는 사람들끼리 그 교회에 다 모인 거예요.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진작 지옥가야 되고 백번 지옥 가야되는데 아직도 이렇게 버티는 것은 예수님이 흘리신 그 십자가 아픔과 고통 때문이고 거기서 나온 사랑 때문입니다.’ 이걸 고백하기 위해서 교회 나와야지 무슨 덕을 보겠다고, 빌어서 무슨 횡재를 해 보려고, 로또 사놓은 것 당첨되라고, 땅 사놓고 땅 값 오르게 해 달라고, 그런 식으로 온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오늘날 우리 마음이 성전입니다. 이 성전 북면이고 동면이고 조사를 해 봅시다. 온갖 곤충들과 더러운 것들이 가득 들어 있어서 하나님이고 예수고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그저 나만 좋으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자기만 생각하는, 주님 생각 안하고 자기만 좋으면 그것이 축복이라고 여기는 그 이기적인 마음, 바로 오늘날 우리를 지적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주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상을 잔뜩 품고 마귀를 모시고 교회 나왔지만 웬 은혜지 십자가의 영을 받아서 이 모든 것들이 바로 막달라 마리아 같이 가장 추하고 더러운 괴수인 것을 십자가 앞에서 비로소 고백합니다. 십자가가 항상 크게 보이게 해주시고 우리는 작아보여서 십자가의 은혜로 오늘도 살아간다는 것을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