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괴하는자 130106
파괴하는자 130106
이름 : 이근호(IP:119.18.69.144)
파괴하는 자 (나 2:1-7)
이근호
13-01-06 15:28
파괴하는 자
2013년 1월 6일 본문 말씀: 나훔 2:1-7
(나훔 2:1, 개정) 『파괴하는 자가 너를 치러 올라왔나니 너는 산성을 지키며 길을 파수하며 네 허리를 견고히 묶고 네 힘을 크게 굳게 할지어다』
(나훔 2:2, 개정)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시되 이스라엘의 영광 같게 하시나니 이는 약탈자들이 약탈하였고 또 그들의 포도나무 가지를 없이 하였음이라』
(나훔 2:3, 개정) 『그의 용사들의 방패는 붉고 그의 무사들의 옷도 붉으며 그 항오를 벌이는 날에 병거의 쇠가 번쩍이고 노송나무 창이 요동하는도다』
(나훔 2:4, 개정) 『그 병거는 미친 듯이 거리를 달리며 대로에서 이리저리 빨리 달리니 그 모양이 횃불 같고 빠르기가 번개 같도다』
(나훔 2:5, 개정) 『그가 그의 존귀한 자들을 생각해 내니 그들이 엎드러질 듯이 달려서 급히 성에 이르러 막을 것을 준비하도다』
(나훔 2:6, 개정) 『강들의 수문이 열리고 왕궁이 소멸되며』
(나훔 2:7, 개정) 『정한 대로 왕후가 벌거벗은 몸으로 끌려가니 그 모든 시녀들이 가슴을 치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우는도다』
앗수르라는 나라의 명령에 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차기 나라인 메대와 바벨론 나라를 하나님께서 움직여서 멸망케 한다는 내용입니다. 한 동안 주변 모든 나라로부터 부러움을 받았던 그 나라가 하나님이 쓰시는 바벨론과 메대라의 용감한 군대에 의해서 작살이 난다는 그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2600여전의 지난 역사에 불과한데 오늘날 우리하고 무슨 연관이 있겠습니까? 이미 지나간 시절의 사건에 불과한게 아닐까요? 지금 우리는 한반도라는 지리적 영토 위에서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가지고 부지하고 있습니다. 앗수르는 망해도 이 대한민족은 망해서는 아니된다는 의식을 우리가 갖게 됩니다.
설마 북한이 위에서 쳐들어와서 우리의 목숨과 재산을 제발 뺏아가라고 기도하지는 않겠지요. 그렇다면 앗수르 나라가 망하는 것이 남의 이야기로만 처리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내 나라’라는 의식이 성립되려면 “무슨 무슨 나라는 내 나라가 아닙니다”가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북한은 내 나라 아니요 일본도 내 나라가 아니요 중국도 내 나라가 아니라 대한민국이 내 나라입니다”라는 판단에는 나라는 주체가 개입되고 있습니다. 이점은 앗수르도 마찬가지요 앗수르를 망하게 했던 바벨론도 마찬가지요 바벨론을 망하게 했던 바사 나라도 마찬가지요 그 나라를 망하게 했던 헬라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자 그렇다면 멸망당했던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어야 합니까?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은 나의 나라’라고 할 자격이 없습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판단할 주체자로서 인간은 개입될 자격이 없음을 제대로 말해주는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의 주체자는 인간이 아니라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했던 이유는, 여타의 나라처럼 자신의 나라도 자신을 지켜주는 나라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 2절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시되 이스라엘의 영광 같게 하시나니 이는 약탈자들이 약탈하였고 또 그들의 포도나무 가지를 없이 하였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는 다른 나라와 같이 자신들도 자신을 위한 나라에서 살고 싶었던 겁니다. 맨날 제사만 드린다고 주변나라처럼 선진국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그들을 분명하게 체험하고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멸망했다면 오늘날 이 ‘대한민국이 내 나라’라고 알고 있는 우리들도 당연히 멸망당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냐 저것이냐에 우리 자신이 주체가 되어 개입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영광’을 위해 이 주체를 예수님 자신이 주체로 바꾸시는 겁니다. 즉 우리의 수고와 노동으로 실적을 얻었다고 하는 그 역사의 주인공에서 하나님께서 구멍을 파는 겁니다.
그러면 빈 공백이 될 것입니다. 그 구멍 속에서 비로소 우리의 주체의식으로 갑갑하게 눌려있던 예수님의 주체되심이 위로 솟구쳐 올라오게 되는 겁니다. 한 예를 들면 이러합니다. 요한복음 2:19-22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성전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유대인들이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현재 있던 성전 건물로 동일한 형태의 건물을 3일 만에 다 짓겠다는 식으로 이해했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여전히 자신이 주체가 되어 모든 것을 판단하니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예수님께서 채워주시면 그 원하는 바가 예수님의 개입 이후에 그대로 동일한 내용으로 전개되리라고 기대하는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모든 것을 헐어버리겠다”는 겁니다. 여기에 3일 걸립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서의 3일의 의미는 이 세상 모든 가치를 일체 인정하지 않는 것을 시간적 표현으로 말씀하신 겁니다. 인간이 관여한 것. 인간들이 기대하는 모든 것은 모두 다 멸망대상일 뿐입니다.
바로 진정한 축복이란 자신이 기대한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 도리어 그런 자아에 하나님 말씀에 의해서 구멍이 뚫려서 그 속에서 진정한 말씀이 솟구쳐 올라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편 1편에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의인’과 ‘악인’이 병행해서 나옵니다. 인간을 이런 식으로 둘로 나눈다는 것은 인간을 충격으로 몰아넣고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다루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무조건 자기만큼은 악인이 되기 싫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악인이라는 소리는 안듣고 싶고 거기에 따르는 처벌을 안 받고 싶은 겁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바로 그런 식으로 멸망했습니다. 야곱의 영광, 즉 이스라엘의 영광이란 세상의 모든 국가들을 모아놓아서 거기서 얻을 수 있는 영광이 아닙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마태복음 16: 26에 나와있습니다. 이스라엘 세상 나라를 부러워한 것과 마찬가지로 세상 나라는 이스라엘을 무시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나라보다 잘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독생자의 영광인 것을 모르는 세상 교회와 교인들과 같은 안목입니다. 거짓말도 같이 하면 죄의식이 없어집니다. 세상 모든 나라들이 독생자의 영광을 가리는데 공범자들입니다. 인간의 영광을 우대해주기 위해서 그들은 주저없이 십자가의 영광을 모독하고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가진 것보다 하나님의 지시가 우선됨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3-01-07 17:34
5강-나2장1-7(파괴하는 자)13010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나훔 2장1절부터 7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1300페이지입니다.
나훔 2:1-7
“파괴하는 자가 너를 치러 올라왔나니 너는 산성을 지키며 길을 파수하며 네 허리를 견고히 묶고 네 힘을 크게 굳게 할지어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시되 이스라엘의 영광 같게 하시나니 이는 약탈자들이 약탈하였고 또 그들의 포도나무 가지를 없이 하였음이라 그의 용사들의 방패는 붉고 그의 무사들의 옷도 붉으며 그 항오를 벌이는 날에 병거의 쇠가 번쩍이고 노송나무 창이 요동하는도다 그 병거는 미친 듯이 거리를 달리며 대로에서 이리저리 빨리 달리니 그 모양이 횃불 같고 빠르기가 번개 같도다 그가 그의 존귀한 자들을 생각해 내니 그들이 엎드러질 듯이 달려서 급히 성에 이르러 막을 것을 준비하도다 강들의 수문이 열리고 왕궁이 소멸되며 정한 대로 왕후가 벌거벗은 몸으로 끌려가니 그 모든 시녀들이 가슴을 치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우는도다“
하나님의 말씀에 이 현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21세기 대한민국 현실과 어떻게 연결시킬 것인가, 연결이 될 것 같지 않지요? 이것은 앗수르라는 BC 600년경에 지금부터 2600년 전의 이야기에 한 나라 앗수르라는 제국이 무너지는 장면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입니다. 그것과 이 한반도 정세에 있는 우리와 어떻게 오늘날 우리한테 의미 있는 말씀으로 주어지느냐, 어떻게 연결되는가.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면 전부 다 바닥공사를 해야 돼요. 뜯어내야 됩니다. 이 대한민국이라는 이 나라, 이 나라의 바닥은 뭐냐, 독도입니까? 한반도입니까? 아닙니다. 대한민국이라는 이념, 이것은 바닥을 뜯는다고 해서 그 대한민국이 나오는 게 아니거든요. 대한민국이라 하는 것은 대한민국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의식 속에 이게 담겨 있다 이 말이죠. 그 의식의 바닥을 뜯어내는 겁니다. 당신들은 뭣 때문에 이 나라가 대한민국인 것을 자부심을 갖고 살아갑니까? 대한민국 사람인 것을 왜 기분 좋게 생각하는 그 의도가 뭡니까? 그걸 뜯어내는 겁니다.
사람이 이걸 뜯어내게 되면 대한민국은 내 나라고, 일본은 남의 나라다. 이렇게 되거든요. 하여튼 어렵게 합시다. 모르면 할 수 없고. ‘이것이다, 저것이다.’ 가 우리가 ‘나는 누구다.’하는 것을 정립하는 방식이 되는 겁니다. 나는 중국 아니고 일본 아니고 필리핀 아니고 베트남 아니고 나는 한국이다. 꼭 뭐든지 ‘나는 뭐다’ 할 때는 제켜놓는 ‘저건 아니거든요. 저 집은 우리 집 아니거든요. 이 집이 우리 집이지. 이 나라 대한민국이 우리나라지.’ 할 때는 꼭 이렇게 밀어야 되고 밀쳐야 되는 대상들을 반드시 염두에 두는 겁니다. ‘저 사람은 우리 남편 아니고 저 사람은 우리 아내 아니다.’라는 걸 밀쳐낼 때 비로소 ‘이 사람은 내 집안 식구다.’라는 게 정립이 되는 겁니다.
그랬던 나라가 앗수르입니다. 이제 감이 슬슬 옵니까? 그랬던 나라가 앗수르고 그랬던 나라가 오늘날 대한민국이고, 그런데 그 나라가 망한다는 거예요. 우리는 자꾸 우리 집안 구원받으면 그만이고, 우리교회 구원받으면 그만이라고 하는데, 그건 이스라엘이 ‘우리 이스라엘 나라가 구원받으면 그만이다.’라고 해서 망한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이것, 저것이라고 구분하는 것, 그 구분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됩니다. 이것, 저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무조건 이것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것은 ‘무조건 이것이다.’ 이렇게 되려면 ‘모조건 이스라엘이다.’이렇게 돼야 될 텐데 우리는 이렇게 생각 안 하고 이스라엘이요? ‘이스라엘은 내 나라입니다.’ 이렇게 우리 주관이 거기다 개입을 해버려요.
한 가지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요한복음 2장에 보면 성전 예배당을 보거든요. 대구 서현 교회보다 더 큰 예배당예요. 엄청난 예배당인데 서현 교회 몇 년 동안 지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헤롯 성전은 60년 동안, 70년 동안 져도 못 졌죠. 46년 동안 짓고 있던 성전을 보면서 46년 동안 짓고 있으니까 그 예배당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독일이나 프랑스 그런데 보면 성당 안에 들어가 보면 그 만들어진 공간이라는 게 대단해요. 누구나 감탄하죠.
그럴 때 제자들이 ‘예수님, 저 보세요. 저 얼마나 대단합니까?’ 자랑스러워서 이야기한 거예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이렇게 거대한 성전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그것 성전 아니다.’라는 말이죠. 왜 성전이 아니냐? 저걸 성전이라고 할 수 있는 자격이 네가 입을 열어서 이야기 할 자격이 너한테 없다는 거예요. ‘저것은 성전이 아니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 “헐어버려라.” 바닥공사입니다. 바닥을 헐어버려라.
그러면 제자들이 ‘어! 저걸 바닥을 헐어버리면 성전이 없잖아?’ ‘없는데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지을게.’ 제자들은 오해했습니다. 46년 동안 지은 성전을 없애버리면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다시 짓는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방법은 뭐냐, 천사들을 2만 5천 마리(천사를 마리라 하면 기분 나쁘겠지만)의 천사를 보내서 남들이 46년 동안 지은 건물을 사흘 만에 속성으로 지어버립니다. 그럴 때 제자들은 그렇게 이해되는 거예요. ‘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천사를 동원할 그런 자격자가 되고, 그럼 천사가 와서 후닥닥 지어버리면 사흘 만에 지어진다. 아, 그런 뜻이구나.’ 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뭐가 문제냐 하면 그 헐었던 성전하고 똑같은 성전 나오는 거거든요. 그건 잘못 이예요. 그게 바로 우리의 오해입니다. 처음부터 저 46년 동안 성전이 있습니다. 할 때 주께서 헐어버리라 할 때는 바닥까지 헐어버리는 건데 사람들이 생각하기는 바닥은 놔두고 성전이라고 있는 그 아이디어는 그대로 두고 성전 아이디어대로 그대로 멋있게 세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전을 헐어버리라는 말은 그렇게 질문하는 제자들아 너희들의 사고방식을 내가 뜯어내겠다. 그런 뜻으로 예수님이 이야기한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려면 공간적인 어떤 건물이 있어야 되고 건물치고는 잘 지었다. 이 생각을 포기를 하지 않는 겁니다. 방금 이야기한 거 이해됐다 치고 계속 진도 나갑니다. ‘나는 한반도에 살고 있는 내가 사는 이 대한민국을 하나님께서 지켜주옵소서.’ 예수님께서 ‘헐어버려라.’ 아! 헐어버리면 천사를 동원해서 남북통일까지 시키고 우리나라에서 석유 나오게 해서 제일 잘 사는 나라 되겠다. 이렇게 생각들을 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생각하는 나라는 그런 우리가 알고 있는 대한민국을 전에도 대한민국이었고 다시 주님이 도와줘서 생긴 나라도 그 대한민국, 그 대한민국이라고 그렇게 연속성을 유지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헐어버리고 다시 세운다는 것은 하늘나라를 말하지, 대한민국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둥이가 튀어나오죠. 불만이 많은 거예요. 왜냐 하면 이 세상이 이렇게 정답고 마음에 쏙 드는 세상을 왜 하나님께서 이걸 헐어버리라 하냐 말이죠. 왜 이곳을 떠나라고 하느냐, 그게 우리가 마음에 안 드는 거예요. 예수님이 하는 모든 것이 마음에 안 드는 이유가 자꾸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떼치, 떼치, 하는 것처럼 자꾸 손을 떼게 만드니까 우리는 친숙해 있었고 이 세상을 떠나면 죽는 줄 알고 있거든요. 이 세상 말고 우리가 어디 갑니까? 우리가 공들였던 세상도 이 세상이고 정들었던 세상도 이 세상인데요.
저는 가끔 내가 성장했던 대구시 서구 비산동 144번지를 가끔 가 봐요. 달성 공원 바로 옆에 대성초등학교 있던 거기, 지금은 도로가 뜯겨서 우리 집도 뜯겨서 보상금은 누가 가져갔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보상받고 이사했는데 옛날 비산동 집에 가보면 그 길었던 골목도 별 게 아니고 그 잘 살던 친구 유일하게 2층 양옥집에 살던 친구 정인이라 있었는데 지금 보면 지금도 이런 집이 있나 싶을 정도로 너무나 허름해요. 우리가 그곳을 가면 그곳을 만약에 누가 불도저로 밀어서 아파트 짓고 그러면 우리는 가슴이 아파요. 왜, 내가 추억이 있는 곳이고 내가 그동안 놀았던 그 장소고 내 고향인데, take me home country road, 나를 고향으로 데려가주오, green green grass of home, 인데 내가 죽으면 묻을 그 장소 고향인데, 그걸 내 허락도 안 받고 내가 성장했던 그곳을 완전히 밀어버리면, 그럼 나의 아름다운 추억은 어디서 찾아요? 빛바랜 앨범에서 찾습니까? 참, 그럴 때 허무를 느낀다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꾸 우리의 고향을 드러내려 하니까 그 점이 우리가 예수님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습니다. 네가 세상을 이것이다. 저것이다. 이것이 나쁘다. 옳다 하는 것은 네 주체가 개입됐기 때문에 그런데, 그 주체를 내가 빼겠다는 거예요. 우리가 나라는 주체를 집어넣어서 세상을 보는 그 주체를 빼고, 그 빈자리에다 예수님이라는 주체를 집어넣어서 그래서 너는 새로운 관계로서 너를 구상 하겠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내가 주인공으로서 역사의 주인공으로 살던, 역사의 주체로 살던 그것을 내가 살았던 그 자리에다 예수님을 살게 바꿔치기 하겠다는 거예요. 그 바꿔치기를 어떻게 하느냐? 구멍을 뚫을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있던 자리에다 두두두두 드릴로 뚫는 거예요. 구멍을 뚫으면 구멍이 뻥~ 하고 구멍이 나겠죠. 대한민국에 구멍을 뚫어버리고 앗수르에 구멍을 뚫어버립니다. 그러면 구멍을 뚫어버리면 그 구멍 난 자리에서 뭐가 솟구쳐 올라오느냐 하는 이야기예요. 거기서 그동안 너무 우리 위주로 살기 때문에 막혀 있었던 말씀이 거기서 솟구쳐 올라옵니다.
시편 1편을 읽어보겠습니다.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여기 말씀을 보게 되면 4절도 마찬가지입니다. “4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이 대목을 이렇게 보게 되면 우리가 마음이 심란해지고 불편해져요. 그게 뭐냐 하면 이 세상은 다 같은 인간인데 여기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의인 따로 있고 죄인 따로 있는 거예요. 그것이 우리를 구멍을 두두두 뚫어서 그 속에서 시편 1편이 거기서 솟구쳐 올라오게 하는 겁니다. 마치 석유 터져서 기름 나오듯이. 비로소 의인과 죄인이 같이 섞여서 같이 팡~ 하고 터져 나오면 오! 저게 의인이었구나. 오! 저게 죄인이었구나. 복 있는 사람은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는 저게 의인인데, 저렇게 축복받은 사람은 주야로 말씀에 의해서 조성된 저 사람이 복 받은 사람인데 그동안 우리는 그걸 그동안 우리는 맨홀 뚜껑 위에 눌러앉아서 꾹 누르고 있었던 거예요. 왜, 내가 세상을 보는 판단자요, 주체자기 때문에, 내가 복 받는 자야 되고, 그리고 나와 연결돼 있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같이 복 받는 자고, 내가 미워하는 사람은 무조건 저주 받아야 되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걸 두두두두 뚫는 거예요.
이제 앗수르 이야기하겠습니다. 이정도 해놓고 오늘 본문 들어가 봅시다. 오늘 본문은 앗수르가 망하는데 그 망하는 대체 나라가 바벨론과 메대란 나라가 와서 그 군사들이 붉은 옷을 입고 앗수르를 쳐들어오는데 앗수르는 몽땅 다 망하고 8절에 보면 니느웨는 예로부터 물이 모인 곳이라 해서 인구가 12만 명 됐어요. 니느웨라 하는 곳은 그 당시 경제적인 수도였거든요. 제일 잘 사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요새 뉴욕 같은 곳이 니느웨인데 그 나라가 망합니다. 물이 모인 곳이라 해서 옛날 잘 사는 사람들은 다 모인 거예요.
여러분들이 아시는 상식 이야기하겠습니다. 국가라 하는 것은 반드시 경제적 바탕 위에서 국가가 형성되게 돼 있습니다. 경제적 바탕이라 하는 것은 지금부터 6천 년 전이나 옛날에는 어떻게 됐느냐 하면 옛날에는 무역을 했어요. 무역을 할 때 예를 들면 나무 가지고 전쟁 나가면 웃기잖아요. 활 쏘고, 부시맨도 아니고, 콜라 가지고 입에 물고 분다고 전쟁이 안 되거든요. 나무로 전쟁하다가 활 쏘다가 청동기라 해서 단단한 금속이 나오면 이건 전쟁을 해봐야 게임이 안 됩니다. 나무 칼, 돌 칼, 이거하고 청동기하고 하면 이건 누가 이기겠어요? 말도 안 되죠. 청동기가 이기잖아요.
청동기가 되려면 구리하고 주석이 나와야 되는데, 이건 알기 쉽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구리하고 주석은 있는 광산이 따로 있어요. 그러면 구리와 주석을 묶어서 청동을 만들어야 우리나라가 앗수르라든지 우리나라가 있어야 살 사는데, 그걸 하려면 상인들이 가서 거기서 물물교환, 바꿔서 주석이나 구리를 사줘야 되는데 그 상인들 가는 곳에 산적들이 있기 때문에 국가가 군대를 동원해서 상인들을 보호하고 그 상인들이 그런 걸 가져오면 그것 가지고 모아서 청동기로 해서 군사를 키워서 그래야 나라가 부강하게 되는 거예요.
국가라 하는 것은 그냥 집에서 사는 가족끼리 사는 걸 국가라 하지 않습니다. 국가라 하는 것은 항상 자급자족해서는 국가가 안 나오고, 뭔가 농사를 졌는데 어떻게 좋은 씨를 뿌리다 보니까 갑자기 먹고 마시는 것보다 남았을 때 ‘남아있는 걸 어떻게 하지? 옳지 농사짓기 힘든데 내가 노예를 사서 내가 농사짓는 대신 지가 씨 뿌리고 김매면 나는 그것 가지고 월급 주고 나는 편하게 놀면 그 이익을 내가 더 얻을 수 있다.’ 이럴 경우만 서서히 국가가 돼 가는 겁니다. 그걸 ‘분업화’라고 이야길 하는데, 국가가 이렇게 커지면 옛날에는 농사짓던 사람, 장사 하는 사람, 심지어 세무 공무원 하는 사람, 법 만드는 사람, 장사 할 때 법이 있어야 되니까, 그 다음에 심지어 술집 하는 사람, 창녀까지 생깁니다. 그리고 장사할 때 지켜주는 경비업체도 있게 되고 군대도 있게 되고, 그게 모여서 국가가 되는 거예요.
국가라 하는 것은 따로 없어요. 서로 편리를 위해서 서로 나 못하는 것을 네가 채워주고 너 못하는 것을 내가 채워주면 국가가 되는 겁니다. 지금 베트남 필리핀 이 사람들 한국에 온 사람들, 나이 40넘어 늙수그레한 남자들 하고 결혼해서 나이 20살 차이나면서 왜 우리나라 옵니까? 자기 나라 살지 왜 오는 거예요? 자기 나라 살기 힘드니까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오는 거예요. 그 대한민국이라는데 와봐야 나라라는 게 없어요. 그냥 장가 못 간 사람들 그냥 애 낳아주면 돼요. 그게 자기가 맡은 분업이죠. 그 대신 촌에서 베트남보다 더 잘 살게 수세식으로 해서 살게 만들죠.
그러니 세상이라 하는 것은 국가고 뭐고 따지고 보면 뭐냐 하면 전부 다 자기 한 몸 보호받기 위해서 여럿이 모여서 생긴 게 이 국가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 국가에 하나님의 뜻이 뭐가 필요하며 거기 무슨 예수님이 왜 필요합니까?
옛날 이스라엘 나라가 지난번에도 했지만 다시 하면 이웃 나라가 너무 잘 사니까 자기는 맨 날 여호와 제사만 드리는 거예요. 이게 짜증나는 겁니다. 우리도 옆 나라같이 잘만 하면 잘 살 수 있는데 우리는 무슨 팔자가 여호와 앞에 양 잡고 소 잡고 제사만 지내냐 말이죠. 치워라, 그런 식은 치우고 우리도 옆의 나라처럼 잘 살아보자. 종교는 버리지는 않지만 대충 형식적으로 안식일에만 드리고 그냥 잘 먹고 잘 살아보자. 라는 그런 모토로 이스라엘이 나가다가 이스라엘은 망한 겁니다.
하나님의 뜻은 뭔 뜻이냐 하면 너 같은 그런 나라 같으면 이 땅에서 밥이나 먹고 사는 건 되는데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에서는 이길 수 없는 나라가 되는 거예요. 이걸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2절에서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시되” 이렇게 한 줄로 돼 있습니다. 야곱의 영광이라는 것은 어떤 영광이냐 하면 이 세상 모든 나라를 다 합쳐도 거기에 도달할 수 없는 그 나라가 갖고 있는 영광, 천국이 갖고 있는 영광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16장 26절에 이런 말씀 나오죠.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이 이스라엘아! 나는 너를 하나의 사람으로 보는 게 아니고 이스라엘 속에 속한 백성으로 보고 예수님께서는 멘트를 날리는 거예요. 아무개야, 근호야, 아무개야, ‘어떡하면 밥 먹고 살지?’ 하면 주님께서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하라.’ 이것은 네가 따로 네 영광을 챙기지 말고 이미 준비된 영광, 그게 야곱의 영광입니다.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마련돼 있고 준비돼 있는 그 나라 그 의, 준비돼 있는 그 영광이라 하는 것은 이 세상의 어떤 나라와 비교해서 족히 비교가 안 된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너로 하여금 이 세상에 보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앗수르를 부러워했고 그들은 앗수르한테 잡혀갔고 그런데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하나님에 의해서 준비된 나라 바벨론에 의해서 그걸 처벌해서 다 뭉개버리는 대목이 이대목입니다. 그렇게 뭉갰던 그 바벨론 나라는 그럼 오래 갑니까? 천만의 말씀, 그 나라도 그 다음 나라 바사나라한테 망합니다. 그럼 바사 나라는 끝입니까? 아닙니다. 그 다음은 헬라 나라한테 또 망합니다. 끝입니까? 아닙니다. 그 다음에 로마 나라한테 또 망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역사 속에서 이렇게 주변 나라가 망하고, 망하고, 망하고, 망하고 하는 것을 전부 다 점점 더 보면서 ‘누구야? 누구십니까? 누가 그렇게 했습니까?’ ‘내가 그렇게 했다. 너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그렇게 했다.’ 이렇게 나온다 이 말이죠. 하나님께서 소위 우리가 부러워하는 나라를 다 집어넣어요. 말씀 속에 계시 속에 다 집어넣고 말씀에서 전부 다 심판을 내립니다. 심판을 내리면서 하는 말이 ‘그렇게 하심은 바로 이스라엘에게 영광 주기 위해서 너희가 전에 믿었다고 여기는 그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셨다.’고 이렇게 나옵니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 나라는 이렇게 보고를 해야죠. 그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때 멸망하는 그 기준이 뭡니까? 이렇게 돼야죠. 그럼 그 기준을 내가 알려드리겠습니다. 그 기준은 이스라엘이 갖고 있던 가치를 그들이 모독해서 그렇습니다. 간단한 거예요. 이스라엘은 상대적으로 작은 나라입니다. 무시해도 될 만한 나라고, 잘 살지도 못한 나라입니다. 그래서 앗수르, 바벨론, 헬라, 이런 나라가 무시해서 이스라엘을 계속 괴롭혔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괴롭힌 게 누굴 괴롭힌 게 되느냐 하면 이스라엘과 함께 있는 하나님을 괴롭힌 걸로 그렇게 하나님은 해석을 해버리는 거예요.
오늘 아침에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했죠.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실 때, 이것도 너무 많이 해서 식상하니까 그만하고, 쉽게 합시다. 65살 먹은 노인네가 아무 재산도 없고 그냥 단칸방에 살면서 진짜 서민 아파트에 살면서 시인인데 시를 져도 아무 수입도 없고 오적이란 시를 졌는데 판금 돼고, 그 김지하란 분이 너무 못 살아서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고 재판받으면서 지팡이 짚고 하다가 죽어버렸다고 합시다. 할 때 이 세상의 어느 고을에서, 어느 골짜기에서 어느 동네에서 어느 지방에서 ‘아이고, 아까워라, 저분이 돌아가시다니, 저분이 돌아가시면 안 되는데.’라고 이야기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아이고, 돈이 있나, 한 때는 잘나갔지만 이건 몸이 아프고 노인네고, 아무짝도 소용없는. ‘그래 잘 죽었다.’ 아무짝도 소용없는. 그야말로 떠밀어도 괜찮고 무시해도 괜찮고, ‘그래 니가 유대인의 왕 해라. 니 혼자 많이 해라.’ 조롱하듯이 ‘유대인의 왕’ 하고 ‘예수’라고 갖다 붙여놓고, 지금 그런 분을 우리가 믿고 있습니다. 이게 말이 되는 이야깁니까? 예? 믿으려면 이건희를 믿던지, 이건희가 버거우면 홍라희를 믿던지, 이건희 부인, 아니면 박 근혜에 붙던지, 새 누리당에 거기 붙던지, 아침에도 이야기했잖아요. 사람이 좀 도움이 되든지 힘이 되는데 붙어야지, 예수를 왜 믿어요?
예수님이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이 십자가를 짐으로써 너희는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영생을 얻게 될 것이다. 너희는 죽어도 부활 될 것이다. 했습니다. 그 말을 곧이듣는다면 그 사람은 바닥 청소를 새롭게 한 겁니다. 구멍을 뚫어도 너무 많이 뚫려서 그 속에서 자기가 주체가 아니고 바로 예수님이 주체가 되어서 솟구쳐 올라오는 사람 이예요. 자기가 강아지를 키우는 것이 아니고 아예 강아지가 자기 속에 있어서 강아지가 주인인지 지가 주인인지 분간도 안 되는 그런 상태, 예수님이 자기 주인이 돼서 살아가는 겁니다.
그 예수를 믿었던 사람이 누구냐, 열두 제자들이었어요. 그 사람들이 지금 신약 성경을 썼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제자들을 무시했듯이 오늘날 이 예수님의 제자들의 말을 그대로 이야기하면 사람들 다~ 무시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어떻게 하느냐, 제자들의 말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이거 지키면 돈 됩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원하는 돈 되고 복 받습니다.’라고 나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사람(교인)들로 하여금 여전히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체라고 그렇게 다지고, 다지고 다지게 만드는 일을 오늘날 교회가 하는 거예요.
그러면 교회가 오늘날 마귀와 공범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 도둑질도 혼자 하면 겁나지만 여럿이 도둑질 하면 두렵지 않아요. 거짓말도 혼자 하면 벌벌 떨지만 교회가 전체적으로 한국 교회 전체가 거짓말 하게 되면 이거는 전혀 거짓말 아닌 것처럼 느껴집니다. 모든 교회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축복이란 말로 가로막고 있습니다. 다 가로막고 있어요. 쓸모 있는 예수를 믿으라고 다 그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다 여러분께 돈 대주고 복 대주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가만히 있지 않고 여러분의 사업을 잘 되게 해주십니다. 그런 이야기를 다해줘 버려요.
그러니까 이건 성전 짓기 전에 46년 진 그 성전이나 짓고 난 뒤에 사흘 만에 지은 성전이나 똑같은 성전 돼 버려요. 예수님은 헐어버리라 했는데 제자들은 ‘어떻게 46년 지은 성전을 어떻게 사흘 만에 똑같이 짓지?’ 전 후가 똑같이 돼 버린다고요. 하나님은 그걸 원하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의 영광은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에 있는 부활의 영광과 족히 비교가 안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그렇게 우리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신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소원이 하나 있는데 그건 빨리 죽는 게 소원 이예요. 빨리 죽어서 훌쩍 떠나는 거예요. 왜, 인생이라는 게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는 지금 아무 의미 인생을 살아갑니다. 마음을 그렇게 잡아줘야 남들이 우리를 무시해도 별로 우리가 불만스럽지 않죠. 그런데 내가 너무 주체가 돼 버리면 남들이 날 놀리면 우리가 거기 기죽어서 ‘에이씨, 나도 예수 안 믿으련다.’ 이렇게 불평, 불만하게 되면 이건 예수님 자체에 대한 모독이 돼 버립니다. 앗수르를 부러워하고 바벨론을 부러워하고 헬라를 부러워하고, 요번 수련회 하겠습니다마는 그 당시 말라기 이후에 이스라엘이 헬라나라가 부러워서 고개 숙이고 로마가 부러워서 전부 다 거기 다 고개 숙이고 있어요. 그거나 지금 이 시대가 교회가 교인들이 ‘하나님’ 하지만 사실은 세상의 잘 사는 사람이 부러워서 그거 달라고 교회 와서 기도하고 빌고 철야하는 이러한 공범자들, 십자가를 가리는 공범자들 속에 교회가 같이 합세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하나님께서 구멍을 파주시는 그것이 오히려 우리 자신한테는 축복인 겁니다. 그럴 때 야곱의 영광은 우리 속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이것, 저것 따질 수 없는 주체 자로서 행세할 수 없는 존재고, 십자가 지신 예수님 보시기에 세상은 어두운 세상이고, 멸망 돼야 될 세상, 그런 안목이 우리 속에서 솟구쳐 올라오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