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강의 (16강, 17강) 죽음의 접지, 위를 보라 130103
유튜브강의 (16강, 17강) 죽음의 접지, 위를 보라 130103
이름 : 이근호(IP:119.18.69.144)
16강
17강
이한례(IP:203.♡.45.137)
13-01-04 13:37
16강-YouTube강의(죽음의 접지)130103-이 근호 목사
오늘은 제 16강 ‘죽음의 접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어떤 변화가 일어나느냐 하면 늘 매일같이 죽음과 접선하면서 살아가게 돼 있습니다. 접지란 말은 이어져 있다. 벗어나지 못한다. 접촉돼 있다. 죽음의 능력과 죽음의 힘에 휩쓸리면서 그렇게 살아간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에게 주어지는 모든 일들은 우리로 하여금 죽음의 위력을 새삼스럽게 매일같이 그걸 느끼게 만들고자 하는데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 보면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날마다 죽노라” 이렇게 돼 있습니다. 이렇게 사도바울은 세상의 모든 일이 자기가 죽어 마땅한 그런 일들이 자기에게 밀려온다고 생각한 그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고린도전서 15장 26절에 보면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그렇게 돼 있습니다.
보통 우리 일상에서 사망이란, 원수라 한다면 정치적으로 북한을 이야기할 것이고, 또는 개인적으로서는 자기의 돈 떼먹고 도망간 사기꾼일 수도 있고, 또 주변에 보면 자기를 힘들게 하는 모든 특정 대상자를 원수라고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라” 해서 특정 대상자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고 보편적인 상황을 원수라는 표현을 했습니다. 이것은 어린애든 어른이든 그리고 직업과 상관없이 모든 인간은 사망이라는 원수에 휩싸여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 의미가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보편적인 모든 인간에게 차별 없이 마치 장독대에 눈이 오게 되면 온 장독대에 눈이 소복이 쌓이듯이 사망이란 이 위세, 이 능력을 최후의 원수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는, 인간이 이 땅에서 나름대로의 어떤 직업에서 종사하고, 어떻게 자기의 존재의 의미를 찾던 간에 그것은 곧 죽음으로 이끌어가는 죽음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경로를 언급한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판사가 판사 일을 하는 것은 그건 그 판사 일과 더불어 멸망되기 위해서 판사 일을 하는 겁니다. 의사가 의사 노릇 하는 것도 의사 짓과 더불어서 멸망되기 위해서 의사 일을 하는 겁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서 노는 백수는 백수를 하면서 멸망하게 돼 있고, 교회에서 목회하는 목사는 그 목회하면서 자기가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 그 일을 하나님께서 하게 하신 겁니다.
어떤 분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느 장로교 출신의 목사님이신데 자기가 처음에 목회하면서 성경에 나와 있는 대로 그 진리대로 목회하리라 마음먹고 교회를 시작해서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선지자처럼 바른 이야기하고, 사도바울처럼, 사도들처럼 바른 복음만 전하고, 그리고 세상의 불의에 대해서 타협 없이 양보 없이 바른 소리 외치고, 교회 문제점이라든지 성도의 문제점이라든지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성경에 있는 대로 이야기했습니다. 그랬더니만 교회에 교인들이 하나 둘 다 떠나고 나중에 교인들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장로교 출신의 목사님은 어떻게 목회 방침을 바꿨느냐 하면, 순 복음에서 하는, 순 복음 교회에서 하는 식으로 목회 방침을 바꿨다는 거예요. 왜냐 하면 교인들에게 위로받기 위해서 오는 사람들에게 잔소리하고 바른 소리 하는 것은 자기 딴아 옳다고 하지만 막상 듣는 손님 입장에서는, 교인들 입장에서는 부담이 되어서 두 번 다시 그 교회에 발길이 오지 않고 다른 교회에 가버린 거예요. 부담 없이 예수 믿기 위해서, 천국 가기 위해서.
그것을 뒤늦게 간파한 그 목사님은 우선 정책상 사람들을 모아야 하겠다는 정책으로 축복을 이야기하고 만사형통을 이야기하는 순 복음 식의 목회로 방침을 바꾼 겁니다. 그 목사님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점은, 본인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그분은 잊고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께서 목회를 하라 하는 것은 망하라고 목회를 한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은 그 목회를 통해서 자기가 이만한 가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은연중에 그것을 안 들키고 그것을 유지하려는 그런 의도가 아주 강했던 것입니다. 남들은 의사하고 판사 할 동안 나는 목사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리라. 그런 생각을 가진 거예요. 흔히 신학교에서 배운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이라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하는 직업을 통해서 영광을 돌리는데 그 직업 자체도 하나님의 은사요, 달란트요, 소명이기 때문에 그 소명을 귀히 여기고 거기에 충성하는 그것도 하나님께 그 현장에서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이런 식으로 신학교에서 신학생들이 배워왔던 겁니다. 그건 아주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 종사하지 않던 간에 이 땅에 사는 것은, 이 세상 삶과 더불어 죽으라고 한 겁니다. 멸망하라고 한 거예요. 사도가 전한 이 복음에 의하면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라” 하는 이 구절이 단지 지식으로 성경에 나와 있으니까 그걸 외우라 하는 것이 아니고, 이 말씀이 말씀대로 실제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를 거기다 집어넣는 겁니다. 살아가면서 자기 딴아 영광 돌리는 아주 경건해 보이는 직업이라고 여기면서 막상 종사해 보면, 그것이 자기를 망치게 만들고 자기를 죽게 만들고 멸망케 하는 그 현장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걸 느끼게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과연 우리의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바로 사망이라는 사실을 온 몸으로 느끼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내가 날마다 죽노라”고 이야기한 겁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에게 있어서의 복음의 막은 어떻게 되는가,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우리가 하나의 종자라고 본 거예요. 성도는 하나의 종자인데 이 종자는 어떤 종자냐, 이 세상 삶과 더불어 자기 하는 일과 더불어 늘 이렇게 죽음으로 가는 종자, 이 세상 삶과 더불어 죽을 때 비로소 저 세상 삶과 더불어서 부활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 말씀이 현실화 되는 그 작업에 뛰어들게 된, 초대받게 된 사람이 바로 성도인 겁니다.
그러니까 이건 하나의 종자고 씨앗인데 사람이 무엇 때문에 죽어야 되고, 그리고 그 죽었던 것이 그 종자를 십자가의 효과에 의해서 어떻게 부활에 이르고 영생에 이르는가를 그 경로와 절차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그 말씀이 현실화 되는 작업에 우리를 거기다 집어넣은 겁니다. 그래서 거기에서는 ‘내가 이렇게 훌륭하다. 이렇게 경건되다. 이렇게 영광 돌린다.’는 그런 것들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에 우리의 행위나 행동보다 생각보다 우선된다는 것, 그리고 진짜배기 현실은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그것만이 현실이라는 사실을 우리로 믿게 만들죠.
사람이 생각하는 현실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행동하는 그것을 엮어서 그걸 현실로 자꾸 우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거는 하나의 상상이고 망상입니다. 세상을 볼 때 사건을 볼 때 자기 위주로 보는 것, 그건 자기만 그런 게 아니고 모든 사람이 다 그래요. 세상에 어떤 일이 터져도 각자 보는 의미가 다 다릅니다. 따라서 사람마다 현실관이 다 달라요. 바로 그 현실관은 말씀에 의하면 네가 죽어 마땅한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의 재료로서 우리에게 들이닥친 말씀의 현실인 겁니다. 우리가 거기서 밥 먹고 살라고, 그리고 그 가운데서 우리가 이만큼 가치 있고 하나님 보시기에 의미 있는 존재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 보고 그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니고, 너는 어떻게 살든지 간에 이래 살든지 저래 살든 관계없이 너는 멸망 받아 마땅함을 보여주기 위한 이 현실.
그래서 우리는 늘 죽음에 접지돼 있고 접촉돼 있고 접선돼 있는 겁니다. 뭐 하든 모든 것이 우리로 하여금 죽어 마땅하고 지금 당장 멸망당해도 너는 큰소리 칠 수 없는 입장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 사망이란 이 원수는 우리 힘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그 현장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십자가의 효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오늘 죽어도 그 현장에서 낙원에 간다는 것, 다시 영생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이러한 영생의 나라의 실재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날마다 죽어야 되는 이것이 말씀이 요구하는 성도의 삶입니다.
이한례(IP:210.♡.248.70)
13-01-04 17:21
17강-YouTube강의(위를 보라)130103-이 근호 목사
제 17강의 제목은 ‘위를 보고 살자’ 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현대인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가치라 하는 것은, 남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우리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내가 얼마나 가졌느냐, 은행 잔고가 얼마나 돼 있고 이 잔고 가지고 몇 년을 버틸 수 있느냐, 연금은 한 달에 얼마나 나오느냐, 얼마나 내가 이 땅에 안 죽고 버티는데 있어서 얼마나 많은 힘을 비축돼 있는가, 거기서 남들도 그걸 우리의 가치라 보고 우리 자신도 내가 살아온 보람이라 할까, 가치라 할까, 희망이라 할까, 사는 힘이 된다고 여기면서 그런 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이렇게 펼쳐서 사도를 통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접수하게 되면, 현재 우리가 여기서 얼마나 가졌느냐는 것 가지고 우리의 가치를 결정짓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도리어 결정짓지 못한 정도가 아니고 도리어 우리의 신앙을 방해하는, 그것도 결정적으로 방해하는 방해물로서 우리가 거기에 정신이 팔려있다고 하는 겁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말씀 하실 때 우리가 얼마나 사람은 재물을 신처럼 섬기면서 거기에 전적으로 의존하면서 살아가고 있는가를 우리사정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 할 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좋아하는 자체가 우리 인생의 목적으로 종결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경과로서 그냥 수단으로써 사용되는데 어떻게 사용되느냐 하면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좋아하게 되면 진작 내가 정말로 원하는 돈과 여유 있는 삶을 혹시 더 풍족하게 제공하지 않겠느냐, 라는 그러한 심보를 가지고 은근히 그걸 감추면서 교회 나와서 하나님의 영광과 찬양하고 있지 않은지 다시 한 번 우리를 돌아봐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의 의미는 뭐냐, 골로새서 3장 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이렇게 말씀 돼 있습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렇게 돼 있어요. 땅엣 것도 생각하고 위엣 것도 생각하면 참 좋겠는데, 예수님께서는 2절에서 “위엣 것을 생각하고”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했습니다.
흔히 교회에서 목사님들이 설교할 때 “위엣 것을 바라보자” 흔히들 많이 이야기해요. 그런데 두 번째 사항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고 설교단에서 외칠 때에 과연 그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면서 교회 나올 사람이 과연 교인들 중에 몇 명이나 있겠습니까? “위엣 것을 생각하자” 이거는 듣고 싶어 해요. 하지만 위엣 것을 생각하면 보너스로 땅엣 것도 주지 않겠느냐, 그런 심보가 작동하는 입장에서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은 아예 생각하지 말라 했을 때에 부담이 돼서 그 교회 계속 다닐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이 뭐냐, 현재 누가 얼마나 많이 소유하고 얼마나 갖고 있느냐가 아니라 너의 삶의 방향이 위쪽이냐? 아니면 위쪽의 방향이 아니고 아래쪽을 수평적으로 아래쪽만 쳐다보고 있는 수평적으로 저쪽의 저 미래의 산 너머에 뭔가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어떤 유토피아나 희망, 꿈, 그런 것을 내다보면서 그쪽 방향을 보면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묻고 있는 겁니다. 위엣 것을 바라보느냐, 아니면 땅엣 것을 바라보느냐를 우리에게 묻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성도가 땅엣 것을 생각하지 않는 입장에서 위엣 것만 생각해 버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그것은 이 세상에서 위에 나라에 갈 수 없는, 천국에 갈 수 없는 사람과 대화가 안 됩니다. 가까운 부부뿐만 아니고 가족들, 자식 부모 간에 대화가 되지를 않습니다. 사람이 누구와 대화한다는 것은 누구하고 소통하는 목적도 있지만 소통 이전에 자기 속에 담아있는 것을 외부로 발산하는 그런 강도가 더 셉니다. ‘나 이렇게 살아간다.’ 하고 누굴 상대로 외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두 사람이 대화를 해도 서로 의사소통 했다고 스스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각자 자기 이야기했을 뿐인데 서로 편리한 대로 타협안에서 각자 자기 얻을 것만 챙기고 다시 뒤돌아서게 돼 있죠.
그런데 위엣 것을 이야기해 버리면 어떤 사람만 대화가 되느냐 하면, 같이 위엣 것을 쳐다보는 그쪽 방향으로 삶의 방향을 정해놓은 사람에게만 이해가 되고, 일반 보통 사람한테는 대화가 안 됩니다. 대화가 안 된다면 본의 아니게 어떤 상태가 되느냐, 원수지간이 돼 버립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발생되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누누이 언급하셨던 십자가의 길, 좁은 길, 고난의 길입니다. 이건 세상 사람들과 대화가 안 된다 정도가 아니라 교회 안에서부터 심지어 위를 쳐다보는 교인이 목사님하고 이야기를 해도 이해가 안 돼요. ‘성도님, 다 옳은 이야기고 바른 이야긴데 교회가 되려면 크게 부흥되려면 그것만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성도님. 세상 것도 복 받는다 이렇게 이야기해줘야 그래야 교회가 부흥이 되고 유지가 되고 그래야 전기세라도 내고 가스비도 내듯이 그냥 위엣 것만 이야기하면 교회 문 닫아야 됩니다. 그런 것도 좀 신앙생활 처음 하니까 모르는데 오래 해보면 목사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실 겁니다.’라고 목사 쪽에서 다시 땅의 쪽에, 이 교회라는 땅의 일에 대해서 방향을 틀고 살아간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 일은 땅의 일입니다. 하늘의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순교하시고 십자가 지신 그 현장이 전혀 하나님을 모르는 집단한테 얻어맞아 죽은 게 아니고, 바로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열심히 섬긴다는 그 작자들에게 주님께서는 이단소리 들어가면서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그 십자가를 너도 져야 이 천국에 올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십자가를 나무로 뚝딱, 뚝딱 만들어서 그 무거운 십자가 지고 다니면 그게 천국에 가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간단합니다. 성경 말씀대로 위엣 것만 생각하게 되면 땅엣 것만 생각하는 사람이 가만두지 않습니다. 공격하게 돼 있고 미워하게 돼 있고 그들에게 밉상 받게 돼 있고 그들이 누르고 있고 그들이 갖고 있는 모든데서 왕따 시키고 그들이 좋다는 거, 그들이 복이라는 데서 우리를 소외시킬 겁니다. 세상의 가장 좋은 것, 세상에서 누구나 탐내는 것, 거기서부터 성도를 배제시킬 겁니다.
그러면 영생의 길 가겠다고 본의 아니게 순교할 필요도 없고 본의 아니게 스스로 자책하듯이 고난스럽게 스스로 자기를 때릴 필요도 없습니다. 세상이 자연스럽게 그 성도로 하여금 그쪽 좁은 길로 가도록 그렇게 이끌게 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전략입니다. 바로 이 전략에서 나온 원리가 뭐냐, 구원 불가능성입니다. 이 구원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구원 받겠다 해서 아무나 손들고 강대상 앞에 나온다고 구원시켜주는 게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시작도 하나님이요, 마지막도 하나님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아버지께서 오게 하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작용하시는데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 작용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서 다른 사람과 분리시키는 그 능력과 동일한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이죠. 그 십자가 지게 하신 그 동일한 능력으로 특정인간에게 주어지면, 그 인간은 본인이 거기서 발을 뺄 수가 없어요. 예수님을 구원시킨 그 능력에서 아무리 몸부림치고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아무리 세상의 천박한 일에 종사해도 결국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위엣 것만 쳐다보게 하게 만드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변의 땅엣 것만 쳐다보는 사람과 이별과 이별이 반복적으로 일어나게 만들 것입니다. 그럴 때 성도는 그 능력 주신 것에 대해서 축복이라고 여기고 오히려 감사해야 됩니다. 이렇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주여, 제 능력 같으면 벌써 세상만 쳐다봤습니다. 환란, 곤고가 있을 때 우리는 다시 주님만 원망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주의 능력이 임했기에 환란과 곤고와 핍박과 기근과 어려움과 가난과 어떤 수모를 당해도 오히려 그렇게 만들어 가면서도 기어이 천국에 넣어주시는 하나님께 뭐라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라는 고백을 쏟아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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