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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우상의 자리 130102우리교회에스겔

우상의 자리 130102

이름 : 이근호(IP:119.18.69.144)

우상의 자리(겔 8:1-4)

이근호

13-01-02 21:12

우상의 자리

2013년 1월 2일 본문 말씀: 에스겔 8: 1-4

(겔 8:1, 개정) 『여섯째 해 여섯째 달 초닷새에 나는 집에 앉았고 유다의 장로들은 내 앞에 앉아 있는데 주 여호와의 권능이 거기에서 내게 내리기로』

(겔 8:2, 개정) 『내가 보니 불 같은 형상이 있더라 그 허리 아래의 모양은 불 같고 허리 위에는 광채가 나서 단 쇠 같은데』

(겔 8:3, 개정) 『그가 손 같은 것을 펴서 내 머리털 한 모숨을 잡으며 주의 영이 나를 들어 천지 사이로 올리시고 하나님의 환상 가운데에 나를 이끌어 예루살렘으로 가서 안뜰로 들어가는 북향한 문에 이르시니 거기에는 질투의 우상 곧 질투를 일어나게 하는 우상의 자리가 있는 곳이라』

(겔 8:4, 개정)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거기에 있는데 내가 들에서 본 모습과 같더라』

하나님이란 그저 존재하는 분으로 계시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일을 하십니다. 참으로 성도라면 이 일하심에 대해서 고백해야 합니다.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이러이러한 일 하심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고 자꾸만 저만치 존재하는 것만 언급하는 겁니까? 이것은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 분명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작업을 개시하십니다. 그 작업은 바로 에스겔로 하여금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토록 하는데 있습니다. 이것을 보아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만나는 유일한 공간으로 성전 이외는 두시지 않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로지 성전에서만 인간을 만납니다. 왜냐하면 성전은 친히 자기 백성과 동행한 증거의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 세계를 행하여 자신을 나타내시면서 자신이 계실 공간은 사람들에게 맡기지 아니하시고 친히 만들어내십니다. 이 작업을 위해서 숱하게 많은 민족들을 제쳐두시고 친히 ‘없는 민족’을 ‘있는 민족’으로 드러내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냥 애굽의 보통 백성들로 사는 자들을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로 영글어내신 것입니다.

이 이스라엘 민족은 단순히 자기네들 힘으로 꾸역꾸역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민족이 아닙니다. 그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친히 동행하신다는 점이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민족은 출발 그 자체로 완성이 아니고 지속적으로 친히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작업을 멈추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작업이 오늘 본문에서 에스겔을 찾아오신 하나님의 원칙과 같은 겁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원칙과도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할 민족은 일체 인간의 능력이 배제된 민족이어야 합니다. 이점을 보여주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홍해바다라는 장벽을 만드신 겁니다.

즉 ‘아무도 갈 수 없는 나라’로서의 약속의 땅입니다. 예를 들어 보면, 우리 교회 둘레에다 홍해바다를 만들어놓고서는 “일요일 낮 11시에 예배하기 위해 모입시다”고 목사가 외쳤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예배하려온 사람은 교회를 둘러친 홍해바다로 인하여 아무도 예배당에 참석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다들 도로 돌아가겠지요.

그런데 정각 11시가 되는 예배당 안에서 찬송소리가 들려옵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분명히 사람들의 능력으로 들어오지 말라고 홍해바다로 교회당을 둘려쳤거만 이미 그 안에 들어가서 찬양하는 그들은 뭡니까? 그들의 찬송소리를 들어봅시다.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계 15:2-4)

즉 우리 자신들의 능력으로는 이 자리에 올 수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동행하셨기에 죽음의 바다를 이기고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고 찬양하고 있는 겁니다. 바로 그곳이 천국입니다. 단순한 교회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일체의 인간들의 자기 능력이나 공로가 인정받지 않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홍해바다를 가지고 애굽 사이에 불가능한 장벽을 만드신 것은 인간들로서 하여금 자신이 살 곳이라는 권리주장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인간들은 안 들어가도 되는 나라요 들어갈 필요가 없는 나라가 천국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공로만을 받겠다고 없는 민족을 새로이 만드는 식으로 이스라엘을 만드시고 홍해와 요단강을 건너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건물 실자재로 만드는 건축물 속에 함께 계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취지를 아는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찬양하고 감사할 수 있는 이런 신분이 얼마나 귀하고 대단한 자리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그 성전건물을 하나님에 의해서 불타버리고 맙니다.

바로 그 장소에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데리다가 북문쪽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이것이 오늘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오시는 경로가 됩니다. 즉 성전이 왜 무너지고 왜 하나님께서 그 성전을 떠나야만 하는 이유를 아느냐는 겁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그 성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고귀한 신분성을 잊고서 우상의 제단을 쌓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곧 성전 자체는 사람들이 자기 능력으로 지탱하고 신을 모시고 함께 살 수 있는 실제적 공간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담벼락에 우상의 그림을 그렸다는 것은 신마저 자기 소유를 삼겠다는 의사 표시입니다. 즉 하나님마저 인간들의 내놓은 종교성과 능력과 실력으로 붙잡아 둘 수 있는 신임을 그들은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는 상체는 단 쇠 같고 하체는 불꽃을 피우면서 성전에 다시 나타나신 것은 하나님과 함께 있지 못하는 자들에게 취해지는 바는 ‘진노의 불심판 뿐’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일방적으로 머리털 잡고 예루살렘에다 잠시 옮겨다 놓으신 이유는 불심판을 전제로 해서 일체 인간의 노력을 거부하심을 알리시기 위함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시고 동행하시는 그 취지 속에는 인간은 원래 우상을 섬기고자 하는 본심을 타고 났음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건물로 지어놓으신 성전을 경유해서 그것을 파괴하시는 이유는, 인간과의 동행에서 인간이 원래 우상을 섬기도록 되어 있는 존재임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바로 인간들과 더불어 함께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성전에 계셨다고 스스로 그 성전을 부숴버리신 겁니다.

갈라디아서 6:7-8에 보면,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참으로 에스겔처럼 참 하나님에 의해서 인도받는 자는 무엇이 육을 위하여 심는 것이고 무엇이 영을 위하여 심는 것임을 압니다. 인간의 몸 자체가 자꾸만 우상을 뿜어내는 속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천국 간다는 것을 성사될 수 없는 일입니다. 천국을 넘보는 것조차 죄가 됩니다.

이런 고백을 경로로 해서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동행할 자와 함께 하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썩어질 육을 위함 말고 다른 재주가 없는 우리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3-01-13 09:21

21강-에스겔8장 1-4(우상의 자리)130103-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8장 1절에서 4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58페이지입니다.

에스겔 8:1-4

“제 육년 유월 오일에 나는 집에 앉았고 유다 장로들은 내 앞에 앉았는데 주 여호와의 권능이 거기서 내게 임하기로 내가 보니 불같은 형상이 있어 그 허리 이하 모양은 불같고 허리 이상은 광채가 나서 단 쇠 같은데 그가 손 같은 것을 펴서 내 머리털 한 모숨을 잡으며 주의 신이 나를 들어 천지 사이로 올리시고 하나님의 이상 가운데 나를 이끌어 예루살렘으로 가서 안뜰로 들어가는 북향한 문에 이르시니 거기는 투기의 우상 곧 투기를 격발케 하는 우상의 자리가 있는 곳이라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거기 있는데 내가 들에서 보던 이상과 같더라.”

하나님이 있다는 것은 어떤 특징이 있어야 되고 그냥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하지 말고 이런 일을 하시는 분이라고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냥 “하나님은 저기 계시겠지.”라고 나와 버리면 만약 묻기를 “그 하나님은 무슨 일을 했는데?”라고 하면 “몰라. 관심도 없어.”라고 한다면 그것은 엉터리 하나님을 믿는 것이 되지요. 하나님이 그냥 계시다,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 것 같으면 성경은 굉장히 얇아요. 성경이 이렇게 두껍다는 것은 실제로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실제로 어떤 일을 하셨을 때 ‘이런 일을 하시기에 그 분이 살아계신 하나님이다.’ 이렇게 우리로 하여금 고백토록 촉구하십니다.

나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 이런 것은 불교신자들이 다 하는 이야기고 야고보서 2장에는 그런 식으로 믿는 것은 귀신도 안다고 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 2:19) 귀신도 아는데 그 아는 것으로 귀신이 천국 가지는 않았잖아요. 분명히 천국 가는 사람이 믿는 하나님은 지옥 가는 사람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하고 달라야 됩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한다고 해서 천국 넣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런 일을 하셨다, 그리고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이 나에게도 이렇게 일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성경에 나와 있는 진짜 하나님의 일하심과 일치될 수 있어야 됩니다.

성경 본문에 보면 에스겔이 등장하지요. 에스겔과 하나님이 만납니다. 공부를 잘했는지, 아침은 먹었는지,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하나님이 에스겔을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에스겔아, 요새 춥지? 옷 따뜻하게 입고 다니나? 내복은 입었니?” 그런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에스겔을 찾아온 것이 아니거든요. “요새 취직 안 되어서 힘들지? 결혼은 언제 할지?” 이런 것을 물으려고 에스겔을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쓸데 있게 만드는 게 한국교회에요. 교회가 말하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하셨는지에 대해서는 하나도 없고 전부 잡담과 농담으로 가득 찬 모임이 교회가 되고 말았어요.

“장가는 언제 가는데? 취직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하셨습니까, 라고 묻는 물음이 발생되어야 그것이 교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망년회나 시무식 뒤풀이 할 때 하는 잡담하고 다를 것이 뭐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그냥 하늘에 달처럼 떠 있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지금 일을 하시거든요. 그 일하심이 나에게 이런 식으로 연결 되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찾아왔다, 우리는 궁금해야 됩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에스겔을 가지고 어떻게 사용하는지? “목사님, 어떻게 사용했습니까?” 물어야 돼요. 왜 물어야 되느냐,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사용하시는 그 방법과 똑같이 오늘날 구원받은 백성을 사용하실 때 그 하나님이 바로 그 하나님이 되기에 그렇습니다.

에스겔에게 나타난 하나님하고 우리 하나님하고 다르면 안 되잖아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나타나서 이렇게 일을 했다면 똑같이 우리에게 행하신다 그 말이지요. “그게 없던데?” 그게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찾아오지 않은 사람이지요. 하나님이 찾아오지 않았다면 그동안 자기 혼자 교회에 놀러 다닌 겁니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셈이 되는 거예요. 다시 이야기해서,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찾아오셨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오늘날 살아계신 정도 혹은 존재하는 정도가 아니고 실제로 일을 하신다면 그 일하심이 어떤 원리와 원칙에 의해서 오늘날도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찾아내시고 일을 맡기시는가, 어떤 사명을 감당케 하시는가, 그것이 같은 원리로서 우리에게 적용되는 겁니다. 왜, 같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에스겔 가지고 무슨 일을 하는가? 하나님은 에스겔을 성전에 데리고 갑니다. 3절 중간에 보면 “나를 이끌어 예루살렘으로 가서 안뜰로 들어가는 북향한 문에 이르시니.” 하나님께서는 성전으로 에스겔을 데려가게 하십니다. 유원지나 아쿠아리움이나 공원에 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어떻게 다루시느냐 하면, 성전에 데려가십니다. 성전에 데려가서 성전이 존재하는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에스겔을 통해서 외부에 알리는 기능을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만난 적도 없고 하나님이 찾아온 적도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대로 끊어진 사람입니다. 다시 정리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찾아왔다, 일을 시켰다, 무슨 일, 성전으로 데려가는 일을 시켰다.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성전에 데려갔을까요? 그것은 성전은 하나님이 이 땅에 방문하셨고 상주했던 지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 아는 이야기 할게요. 이 땅에 모든 민족들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 모든 민족들과 상관치 아니하시고 오직 없는 민족을 따로 만들어요.

그 나라가 이스라엘인데 그 나라는 원래 없던 민족입니다. 원래 애굽뿐이었는데 그 안에서 따로 나라를 하나 만들었어요. 이스라엘이란 나라입니다. 그 만든 나라를 이스라엘이라고 칭하면서 친히 이스라엘이 해야 될 일을 그냥 지시하는 것만이 아니고 친히 동행했습니다. 동행해서 인간들이 이스라엘 아닌 사람들은 감히 따라오지 못하는 곳으로만 데려갔습니다. 두 개의 장벽이 있었는데 하나는 홍해라는 장벽이 있었지요. 뒤따라오던 애굽 군사들 다 죽었습니다. 사람의 능력으로 홍해를 건너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아무도 건너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건너갈 수 없는 것이 분명한 그 홍해바다를 이미 건너간 그들은 뭡니까? 도대체 어떻게 해서 그들은 건너가게 되었습니까? 홍해바다는 아무도 건너갈 수 없다는 단정이 지어졌으면 아무도 건너가지 못해야 되지요. 그런데 그 홍해바다 건너편에 이미 가버린 사람은 뭐냐는 말이지요. 아무도 갈 수 없는데 거기에 어떤 무리가 도착했다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새롭게 조성하고 만들어내고 있는, 생산해내고 있는 민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가실 때 “얘들아! 너희가 내 뜻대로 좀 잘 살아줘.”하고 부탁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친히 자기백성이라는 것을 백성한테 맡긴 것이 아니고 하나님 쪽에서 백성 되도록 친히 만들어나가는 작업을 하신 거예요. 그 작업을 하시면서 무엇을 염두에 두었느냐, 인간의 힘, 인간의 노력으로는 하나님의 약속된 백성이 아니면 어림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외부에 보여주면서 그 작업을 해나가시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교회 오는데 교회 주변에 홍해 바다를 만드는 거예요.

그리고 교회 목사가 이야기합니다. “일요일 11시까지 교회 나오세요. 예배드립시다.” 그런데 왔다가 사람들이 다 가버려요. 왜, 홍해바다가 가로막혀 있어서 교회 올 수가 없는 거예요. 인간의 힘으로 올 수 없다는 말이지요. 결국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힘으로 갈 수 없는 곳으로 오라고 지시한 거예요.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지시를 해야지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지시해놓으면 하나님을 누가 섬기고 누가 믿을 수가 있습니까? 다 가 버리지요. 그런데 이상하게 분명히 홍해바다 같은 것이 교회를 둘러쌌는데 11시 땡 치니까 거기서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있더라는 말이지요.

신기하지 않습니까? 정말 신기하지요. “나는 내 능력으로 못 들어가는데 너는 어떻게 들어갔느냐?” 그럴 때 예배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럴 때 그 예배에서 하는 모든 주제와 테마와 모든 내용은 뭐냐, “주께서 홀로 하셨습니다.”라는 찬양이 그 예배에서 이루어지겠지요. 제가 지금 천국에 대해서 미리 당겨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천국이라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 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거예요. 사람으로는 들어갈 수 없는 곳이 하늘나라입니다. 거기는 하나님과 천사만 사는 곳이에요. 사람은 살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생명나무 과실은 인간이 따먹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겁니다.

못 따먹는 정도가 아니고 따먹어서는 안 되는 겁니다. 따먹어야 되는데 못 따먹는 것이 아니고 따먹을 자격이 아예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 생명나무인데 그 근처에서 누군가 따먹고 있더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못 따먹는 사람이 물을 수 있어요. “저 사람들은 어떻게 따먹었습니까?” 할 때 “그 사람들이 하는 찬양소리를, 고백을 들어봐라.” 들어보니 “이 모든 된 것은 오직 어린양의 죽으심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었습니다.”라고 찬양하더라는 말이지요.

바로 그 찬양을 출애굽기 15장에서 미리암이라는 모세 누나의 선창으로 홍해강가에서 부르게 됩니다. 그게 시편 찬양의 원조가 되는 거지요. 찬양은 여호수아 5장에도 나오고 다 나오지만 이스라엘이 집단적으로 찬양한 것, 국가라는 집단이 찬양한 것은 그것이 처음이지요. 그렇게 하고 난 뒤에 끝이었습니다. 이번에는 두 번째 장벽이 요단강이었습니다. 요단강에 올 때까지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가는 것은 사람들에게 맡겨서 알아서 오라고 하지 않고 친히 동행하셔서 지금 강물이 넘쳐서 건널 수 없는 요단강을 건너가도록 해주고 정복될 수 없는 막강한 이중 성벽으로 이루어졌다는 그 여리고성이 어떻게 무너졌고 열 족속이 나아가는 것, 그 모든 것에 대해서 여호수아 장군은 고백합니다.

여호수아장군이 약속의 땅을 향해서 이스라엘 열 족속 앞에서 나아갈 때 칼을 빼든 천사장이 나타나서 여호수아의 무릎을 꿇게 합니다. 여호수아는 알았습니다. ‘이 전쟁은 나를 위한 전쟁도 아니고 내가 할 전쟁도 아니고 이것은 영적전쟁이고 인간들이 도저히 상상도 못할 활동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정말 신기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인간이 감히 천국을 간다는 것은 신기 제곱의 제곱 기적 곱하기 기적, 또 곱하기 기적, 이렇게 되는 거예요. 아무리 기적이고 놀랍고 충격이라는 말을 덧붙여도 모자랄 정도입니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만든 나라가 뭐냐,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왜,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게 하는 그 한가운데 하나님이 상주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우리가 다른 민족과 달리 하나님을 모시게 된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덕이고 축복이라는 고백을 내놓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을 섬기자, 가 아니라 하나님을 섬길 자격은 아무도 없었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찬양한다는 그 신분 자체가 놀랍고 놀라운 기적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을 믿어서 뭔가 복을 빼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섬겼다는 그 자체도 아무나 주어지는 자리가 아니라는 거지요.

우리고 섬기고 싶어서 우리 쪽에서 장만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고 기적과 기적의 발자국을 거쳐서 그것도 동행하셔서 이루어진 그 최종상태가 하나님을 천사처럼 곁에서 섬긴다는 그 일을 하는 겁니다. 이런 대단한 신분, 거룩한 신분이 어디 있겠어요? 이런 신분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이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는 그 추억과 기억의 과거가 있었던 지점이 뭐냐, 성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찾아왔다, 왜, 일을 시키기 위해서, 무슨 일, 성전으로 데려가는 일을 위해서. 성전에는 왜, 성전에 데려가면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능력으로만 친히 곱게 만들겠다는 과거의 하나님의 업적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겁니다.

“너희들이 여기서 하나님을 섬겼고 나는 그 자리에 있었고 너희들에게 섬김을 받았고 찬양을 받았고 너희들은 찬양하는 즐거움에 감격했던 그 때 그 일들이 있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뭘 이야기하느냐하면,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은 성전 이외의 장소에서는 안 만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내가 있고 싶은 자리에 하나님을 불러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만 하셨던 그 일이 나오는 지점, 하나님은 자기백성과 유일하게 만나는 미팅지점이 바로 그 지점이에요.

그래서 그 지점에 간다는 것은 내 쪽에서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했습니다, 하는 식으로는 다가갈 수가 없어요. 그러면 어떤 식으로 하느냐, 우리를 날마다 죽이시면서 그 지점으로 질질 끌고 가시지요. 왜 죽여야 되는가? 우리를 안 죽이면 자꾸만 우리가 행한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들이대는 습성이 있어서 그런 겁니다. 그리고 그 습성이 그동안 있었던 성전을 망치게 만들었습니다.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만들었다는 그 증거의 하나가 본문에 있습니다. 2절에 보면 “내가 보니 불같은 형상이 있어 그 허리 이하 모양은 불같고 허리 이상은 광채가 나서 단 쇠 같은데.”

허리 이상이 불덩어리로 되어 있는 어떤 단단한 쇠 같았다고 합니다. 허리 이하의 모양은 불같고 허리 이상은 광채가 나는 단 쇠 같다고. 이것을 우리가 보려면 포항제철에 가서 한쪽에는 불이 있고 한쪽은 단단한 쇠가 있는 그 모습을 보고 “하나님, 오랜 만입니다.” 하는 사람이 있겠어요? 허리 이상은 불같고 그 이상은 단단한 쇠 같고, 왜 하나님께서 이런 모습으로 등장했느냐 하는 거지요. 하나님은 뭔가 불과 관련된 일을 하시는 분이다, 그러면 불은 왜 있는가? 이사야 6장에 보면 나옵니다. 불은 이사야의 입을 지졌던 그 불입니다. 성전에는 불이 있고 제물을 다 태우거든요. 앞으로 이런 하나님이 이스라엘만 취급하던 것을 이제는 전 세계를 다 취급한다면 전 세계가 불의 도가니에 해당되는 겁니다.

불에서 벗어날 수 없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불태움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불꽃을 다 누구나 얻어맞아야 되고 누구나 다 거기에 잠겨야 된다는 것을 앞당겨서 보여주는 겁니다. 예를 들면 요단강을 건너올 때에 하나님께서 애굽군대를 물에 빠뜨린 이유는 애굽군대나 이스라엘이나 사실은 물로서 다 멸망해야 되는데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에게 필요했기에 이스라엘만 물에서 건져낸 거예요. 그러니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에게 필요한 사람만이 구원받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그 사람이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쪽에서 필요한 사람만 구원되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이 필요해서 구원된다면 우리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해서 하나님을 찾아가는 식, 천로역정 식으로 하나님을 기어이 찾아가서 구원받겠다는 것인데 이것은 종교적인 욕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은 다 밀치시고 오직 하나님이 필요했기에 인간이 할 수 있는 능력을 못하게 만들고 그냥 머리털 가지고 잡아당겨서 바짝 들어 올려서 어느 곳에 데려갑니다.

이것이 에스겔에 나타나는데 3절에 “그가 손 같은 것을 펴서 내 머리털 한 모숨을 잡으며 주의 신이 나를 들어 천지 사이로 올리시고 하나님의 이상 가운데 나를 이끌어 예루살렘으로 가서 안뜰로 들어가는 북향한 문에 이르시니.” 성전에 문이 세 개 있습니다. 동쪽에 있고 북쪽에 있고 남쪽에 있거든요. 서쪽에는 문이 없고 지성소만 있고 동쪽, 북쪽, 남쪽에 문이 있고 서쪽에는 담으로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북쪽 문에는 민간인들이 가는 거예요. 1절에 보면 “나는 집에 앉았고 유다 장로들은 내 앞에 앉았”다고 했으니까 “장로들아, 똑바로 들어라. 장로가 뭔지 제대로 알아야 돼.”라는 취지로서 지금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는 거예요.

제사장들이 들락거리는 북문이고 동쪽문은 오직 왕만 들어갑니다. 옛날에는 안 그랬지만 새로운 성전 설계도에는 왕이 들어간다고 되어 있어요. 옛날에는 제사장이 동쪽 문으로 들어왔겠지요. 거기에 하나님이 들어서 들어가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관심이 뭐냐 하면, “내가 이렇게 추접하고 더러운 너희와 거룩한 하나님이 함께 있어줬잖아. 어떻게 내가 함께 있어준 그 놀라운 신분, 관계, 그 자리의 고귀함을 다 잊어버리고 이제는 그 성전마저 폐허가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뒤에 다 나옵니다. 완전히 폐허가 되어서 숲을 헤치니 우연히 문이 하나 나오는 대목이 나옵니다. 하여튼 완전히 불바다가 되어서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바짝 들어서 올린다는 이 대목과 사도행전 8장에 비슷한 대목이 나와요. 38절에 “이에 명하여 병거를 머물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주고.” 그 다음에 39절에 보면 “ 둘이 물에서 올라갈 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내시는 흔연히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바짝 들어서 빌립을 어디론가 보내버렸어요.

누가? 하나님께서.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제켜서 일체 인정하지 않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백성 되게 하는 겁니다. 우리가 천국 간다는 것은 내가 나한테 해 줄 수 있고 하나님께 해줄 수 있는 것을 다 털게 만들어요. 왜, 성전은 성전다워야 되니까. 마치 에스겔을 바짝 들어서 “이게 옛날 성전이다. 한 번 봐라.” 보여주는 그 능력처럼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들어 올려서 하나님이 있는 자리를 우리에게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그 자리는, 제가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그 자리는 일체 우리의 행함이 거기에 가미되지 않는 자리, 일체 나의 장기, 나의 경건, 나의 수고, 내 노력이 일체 죄라고 규정을 받고 그런 것은 다 더러운 것이라고 규정을 내리는 그 자리. 이렇게 해서 그 성전에 가고 그 뒤에 나오는 5절부터 보면 우상이 가득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자기백성인 이스라엘과 함께 있다가 하나님이 자기가 만드신 성전을 떠나고 그 민족을 떠난 이유는 뭐냐, 우상을 거기에다 만들어놓았기에 그런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나님께서 성전을 만들어놓으신 취지는 성전을 만들어 놓음으로서 인간이 자기 안에 우상 적인 다른 신을 섬기고 있다는 것이 다 티 나게 만드시는 작업입니다. 어렵게 이야기해서 죄송합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성전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건물로 만들어진 그 성전을 의미하는 겁니다. 지금 에스겔에서 그러한데 그 성전에 하나님이 계셨어요. 만약에 지금도 하나님께서 그 건물에 계신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려 하면 돈이 좀 들어요. 인천공항에 가서 비행기 타고 예루살렘의 황금 돔에 가야 해요.

예루살렘에 가면 헤롯 왕궁도 있고 갈보리 언덕도 있고 기혼 샘도 있고 다 있는데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는 그 건물성전에 계신 적이 있었어요. 눈으로 볼 수 있는 성전, 물질화된 성전이 있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성전을 만들라고 해놓고 하나님께서 거기에 계시지 않고 스스로 그것을 파괴하신 것은 하나님이 계신 성전이 이 시대에는 가시적인 건물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는 겁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건물성전에 계시지 않으면 되지 왜 건물에 계시다가 거기서 빠져나오는가?

그것은 우리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그것을 모르기에 그것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우리 속에 우상을 섬기는 식으로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성전에 계시다가 그 성전을 떠나버리는 겁니다. 떠나버리고 다시 에스겔을 통해서 그 성전을 구경하게 함으로써 그 성전이 우상 덩어리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거예요.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길 때 눈에 보이는 건물가지고 실제적이라고 보는 거거든요. 눈에 보이는 그것이 실제적인데 지금은 하나님께서 비실제적인 모습으로 계십니다.

그런데 비실제적이라는 것은 그냥 다가가면 안 되고 반드시 실제적인 성전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만들어서 그 관심 속에서 우리 속에 잠겨 있던 우상들을 다 폭로시키고 우리는 육이 기껏 한 것이 결국 이 성전을 내 소유로 삼겠다는 의지와 욕망의 화신으로서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밖에 없는 저질이라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겁니다. 그러고 난 뒤에 성령이 다시 찾아와서 우리로 하여금 진짜 성전 되게 하시는 거예요. 고린도전서 3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6절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성전을 아는 사람이란 뭘 아느냐,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 우리와 함께 있지 않다는 것을 아는 사람을 두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 우리와 함께 있지 않는가,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말고 우상을 섬길 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우상을 안 섬기면 될 것이 아닌가, 하는데 육으로 되어 있는 인간은 우상을 만들고 섬기게 되어 있어요. 갈라디아서 6장 7절에서 8절에 보면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성령을 받은 사람은 무엇을 아느냐, 육체를 위해서 심는 것이 뭐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성령을 받은 사람이고 육체로부터 심는 것이 뭔지를 모르는 사람은 아직도 육체에 속하고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에요. 그 당시 장로들이 성전 북문에 우상을 두고 섬긴 것은 전부 다 자기가 하나님을 소유하고 싶은 소유욕입니다. 인간은 육으로 왔기에 이 육을 포기를 못해요. 육을 자꾸 소유하려고 해요. 죽든 살든 결국 중요한 것은 내 육체다, 이것만 챙기고 싶은 이 충동과 본능에서 인간은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을 섬기는데 육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위해서 신을 섬기다 보니 그 신이 뭐가 되느냐, 우상이 되는 거예요.

어떤 분이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독일에도 냉이가 있나?” 냉이 캐려고 독일 간 것은 아니거든요. 그런데 관심사가 냉이에 있으면 독일가든 이집트 가든 호미 들고 냉이 캐려고 한다는 말이지요. 인간의 육은 교회 오나 절에 가나 갓바위 가나 성당가나 항상 자기 육을 위해서 심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6장에서 하는 말이 ‘자기 육을 위해서 심는 자는 썩어진 것을 거둔다.’ 그 썩어진 것이 뭐냐 성전이 불타버린 거예요.

성전이 불탔다 할 때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우리 이야기에요. 그것도 에스겔이 장로 앞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에스겔은 백퍼센트 하나님에 의해서, 성신에 의해서 바짝 들어 올렸다가 성전에 들어가게 돼요. 그런데 성전에 가보니 그 당시 장로부터 성전을 유지하려고, 그것을 소유하고 지탱해보려고 온갖 자기의 속내를 다 드러냈는데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함께 있을 사이가 못되게 만드는 인간들의 자기 육을 위해서 심는 그 모양새라는 말이지요.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 “어떻게?” “일하신다.” “무슨 일?” “하나님은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하신다.”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이 뭐냐, 하나님께서는 본인이 거기에 거주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일체 스미지 않고 사람이 일체 못하는 일로 작업하시면서 동행하시면서 만든 그것이 성전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그 성전은 일체 우리는 한 것이 없고 오직 백퍼센트 전부 다 하나님의 공로로만 하셨습니다, 라는 것이 고백되는 그 자리, 그 자리가 오늘날 육에 속한 사람, 눈에 보이는 것만 찾는 사람에게는 다 허망하게 보이고 비실제적으로 보이고 그것은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상태입니다.

“교회를 위해서 봉사하세요.” 이런 것은 잘 알아듣는데 “천국을 위해서 일하세요.” 이게 무슨 말인지는 못 알아듣는 거예요. 교회를 위해서 일하는 이것은 눈에 보이는 우상 적인 것이거든요. 천국이라는 것은 자기의 행함이 포함되지 않고 자기 행함의 가치가 인정받지 못하는 곳이기에 육에 있는 사람들은 그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는 거예요. 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6장 8절에 보니까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할 때에 이것을 대통령 당선된 사람한테 해보면 이것이 무슨 이야기냐, 할 것이란 말이지요.

“역사란 것은 우리가 뭘 해야 이루어지지 가만있는데 뭐가 이루어지나?” 이렇게 이야기하겠지요. 하나님께서 우리보고 가만있으면 된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가만있어도 육이 나온다는 것을 네가 믿느냐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우리는 가만있거나 혹은 부지런히 설치나 이래도 육이고 저래도 육이고 우리는 그냥 우리 안에 담겨 있는 나, 내 육을 위한 하나님을 찾고 우상 찾는 그것만 쏟아내고 있습니다, 라는 고백을 하는 사람만이 주님 앞에서 자기자랑을 안하고, 일부러 안하는 것이 아니고 할 수가 없지요.

“나는 십자가 앞에서 완전한 죄인이며 나는 내 공로로는 성전에 갈 수 없습니다.”라는 고백을 할 때 그것이 바로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서 거룩한 성전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은혜라고 사도바울은 고백했는데 우리도 매일같이 실감나게 그 고백을 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하여 주옵소서.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나 요단을 건너나 인간의 힘은 없었는데 우리는 눈에 보이는 내 힘으로 얻을 수 있는 어떤 우상 같은 것을 섬긴다고 우기지 않는지, 하나님이 함께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좋아라 섬기고 있지는 않은지. 하나님 아버지, 사람보다 거저주신 십자가가 더 감사한 저희의 생애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2강-에스겔8장 10-13(장로 70명)130109-이 근호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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