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의존교회121214a,b (자아창조론)―이 근호 목사
서울 의존교회121214a,b (자아창조론)―이 근호 목사
이름 : 김창길(IP:210.2.60.74)
서울 의존교회121214a (자아창조론)―이 근호 목사
데살로니가 전서 5장 23절부터입니다.
살전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살전 5:24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인간을 누가 창조했습니까? 하나님이 창조했다고 되어 있지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면 인간내부에 뭐가 들어 있냐? 창조의 흔적이 담겨 있겠죠.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했다면 인간내부에 하나님의 창조의 흔적이 담겨 있을 것이라 이 말이죠.
그런데 창세기 2장 3장에서 인간이 화답하지 않았다면 그 창조의 흔적은 그대로 유지 되는데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악마와 한 살림을 차렸잖아요. 이 지상에서 그것도 에덴동산이 아니고 쫓겨나서 쫓겨났으니까 인간은 본래의 자리를 잊어버린 겁니다. 인간의 본래의 자리를 잊어버리고 악마와 하나가 되었을 때 인간 속에 남아있는 창조의 흔적은 무엇인가?
그게 뭘까요? 다시 묻습니다. 인간은 누가 만들었다? 하나님이 만드셨다. 그러면 인간은 하나님이 만드셨다는 것을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에도 우리가 그런 이야기를 합니까? 안 합니까? 나는 하나님이 만드셨다는 이야기해요? 안 해요? 합니다. 왜냐 하면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이 제사를 누구한테 합니까? 하나님한테 하잖아요. 조상에게 예배드린 게 아닙니다. 가인이 자기 아버지한테 제사 드린 게 아니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셨다는 것이 유지하는데 유지하면서도 이미 악마와 한 통속이 된 입장이기 때문에 악마가 가르쳐주는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했다는 그 의미가 무엇이냐 우리가 그것을 놓치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이미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추방됐습니다. 그러면 선악과 따먹을 때 에덴동산에서 너희가 정령 죽으리라 했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다는 이야기 거기 없었어요. 없었는데 추방되었습니다. 그냥 살면서 죽으면 안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에 선악과 따먹으면 정령 죽으리라 했으면 그 에덴동산 살면서 즐길 것을 즐기면서 거기서 돌아가시면 안 되겠습니까? 묘지를 에덴동산 한 쪽에 묘지를 구입해서 묘비를 세워서 공동묘지를 만들면 되지 않겠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범죄하고 난 뒤에는 나가라! 이 말이죠. 거기서 나가야 된다 이 말이죠. 나간다는 말은 인간이 자기가 죽으면 ‘그래 나는 죽어야 돼 내 할 일은 끝났어! 그래 죽는 거야, 잘못했으면 벌 받아야지’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닙니다. 이게 근본적으로 가장 중요한 건데 네가 죽는다는 너한테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내가 너를 죽인다는 문제가 중요한 문제라는 거예요.
살다가 늙어 죽는구나, 하나님이 저를 죄 지었다고 이렇게 늙어 죽게 하시는 군요.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그래 하나님이 죽이시니까 할 수 없지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께 넋두리를 하게 되면 네가 지금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거예요. 너는 네 생각만 하고 있는데 너는 너를 생각할 자격이 애초부터 없어요.
우리가 죽는 것도 연속적인 하나님의 일에 맞춰서 죽어야 돼요 그냥 죽으면 안돼요. 왜냐 하면 우리가 죽는 것도 연속적인 하나님의 일에 포함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그냥 선악과 따먹었다, 죽자, 이래서는 안 되고 죽음이 무엇이냐를 보여기 위해서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입장에서 자기 성질은 성질대로 제발 좀 발휘를 해 줘야 됩니다.
그러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그 계기가 뭐냐 요새로 말하면 연극무대가 되겠죠. 에덴동산에서 놀던 연극무대는 끝났고 뭐로 바뀌었다? 저주가 임하는 연극무대로 바뀌어서 거기는 인간들은 자기의 맡은 역할을 충실히 해 줘야 됩니다. 관객들은 천사들이 관객이 되겠죠. 인간은 여기서 연극을 자기 역할을 충실히 해 줘야 돼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어 놓고 죽으면 저거 인간 된 되겠어. 나 너 버렸어! 너 포기 했어! 하는 이런 하나님은 아닙니다. 끝까지 심지어 죽은 자들도 주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이것은 한번 죽인 거 주께서 놓치를 않습니다. 끈질겨요 교회 안다니고 절에 가고 예수도 안 믿는 거 그거 포기했어. 너대로 살아라. 이런 거 없습니다. 끝까지 갈구고 끝까지 너는 너의 몫의 역할을 다 하도록 하십니다. 영원히 저주 받는 역할을 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을 위해서 창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계속 누누이 강조하는 겁니다. 하나님, 저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는 질문 자체도 틀린 질문입니다. 질문을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어떤 질문을 해서는 안 되느냐 하면 하나님 저는 누가 만들었습니까? 라는 질문을 해서는 안돼요. 하나님 무슨 일하라고 만들었습니까? 이런 질문은 ok입니다. 하나님 저 교회 잘 다니고 있죠? 이런 질문을 하면 안돼요. 하나님, 저를 뭐 때문에 예수 안 믿게 하십니까? 이런 질문은 ok입니다. 하나님, 저는 왜 교회 놔두고 절에 가서 부처 믿게 하십니까? 이 질문 ok입니다. 그런데 절에 가는 사람치고 이런 질문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를 만든 것이 아니고 인간의 자리를 만든 거예요. 우리를 만드신 것이 아니고 우리 자리를 만드신 겁니다. 우리의 과학적인 인식은 우리의 그림자라고 하는 것은 뭐가 우선이고 그 다음에 그림자가 있는 거예요. 내가 먼저, 내 실체가 있고 난 뒤에 그림자가 있잖아요.
비타 500이 먼저 있고 그림자가 나오죠. 그림자가 있고 비타 500이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실 때 어떻게 했느냐 하면 인간의 자리를 위하여 인간을 만들어 놓은 거예요. 인간이 어떻게 불평을 하던 간에 상관없이 우리 인간의 자리가 우리를 갈군 다니까요 괴롭힌다. 끝까지 추적한다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리가 끝까지 그 인간을 갈구는 겁니다.
tv 드라마에 ‘보고 싶다’하는 드라마가 있어요. 드라마 여자 주인공 이름이 이수연, 수연이는 수연이로 돌아가기 싫어요. 왜? 성폭행 당한 수연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귀신이 붙었는지 한정우는 계속보고 싶다. 불 꺼진 가로등 밑 몇 미터, 주홍 글씨로 ‘보고 싶다’적어 놨다. 계속해서 옛날에 너와 내가 함께 이루었던 자리, 나만 단독적으로 성립될 수 없는 그 자리, 네가 있음에 내가 있고 내가 있음에 네가 있는 그 자리에 네가 그 자리를 마련해 놓고 계속 돌아올 꺼라 하잖아요.
수연(은혜)는 울면서 나는 그 자리에 돌아가기 싫다는 거예요. 나는 조이가 되고 싶다는 거예요. 저는 창세기 2장 3장을 보는 것 같아요. 내가 있고 그림자가 있다. 하나님이 말합니다. 그게 아니야! 내가 있다 하는 질문 자체가 그렇게 질문을 퍼부울 수 있는 그런 권한이 나한테는 처음부터 없는 거예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에게는 나는 여기 있고 나를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는 질문 할 자격을 하나님께서 만든 적이 없습니다. 너는 그런 질문조차 할 자격이 없습니다.
인간의 자리가 먼저 있고 그 자리를 빛내기 위해서 인간이 거기에 맞춰서 간 겁니다. 그런데 에덴동산에서는 에덴동산 중앙에 인간이 있는 게 아닙니다. 에덴동산이 인간의 저택이 아니고 인간의 빌라가 아니에요. 에덴동산의 중심에는 인간 보고 잔소리하고 인간에게 잔소리하는 어떤 두 개의 나무가 있습니다. 그게 하나는 생명나무요 하나는 선악과죠. 성경을 수십억명이 봤습니다. 그 수십억명이 성경을 보면서, 창세기 2장을 보면서 아,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었구나!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지 나를 하나님이 만들었구나라고 말할 자격이 못되는구나 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아마 한정우 빼놓고는 없지요. 그 드라마 과거에 그 수연이를 잊지 못하는 사람이 한정우라면 오늘날 진짜 인간을 만든 취지를 기어이 잊지 못하신 분은 누구일까요? 예수님이십니다. 왜냐? 예수님이 아담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설교에서 아담 속에는 아담이 없다는 이야기를 했죠. 아담 속에 아담은 없어요. 그러면 아담 속에 아담이 없으면 아담은 어디 있느냐? 예수님 안에 진짜 아담이 거기 있어요.
그러면 인간이란 아담은 뭐냐? 그것은 껍데기입니다. 그 헛 껍데기를 누가 양상 했습니까? 마귀와 한 살림 차린 악마가 말합니다. 야, 너 나랑 손잡았잖아! 우린 이제 과거는 잊어버리고 조이로서 새로 시작하자! 하는 겁니다. 우리 쪽에서 출발해서 하나님을 새로 관계 맺고 하나님을 찾자!
하나님이 해를 만들어 놨죠. 그 정도는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범위 안에서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어봅시다. 이게 가인이 하나님께 제사한 룰입니다. 살아있는 내가 살아있는 하나님과 살아있는 관계를 맺겠다는 것이 뭐가 잘못됐습니까? 이게 가인입니다. 하나님은 아벨을 통해서 죽어있는 나를 하나님이 죽게 하신 그 이유로부터 출발하자 하는 것은 바로 아벨이었습니다.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가 출발점이 다릅니다. 가인은 이왕 까먹은 거 새로 출발 합시다. 가 가인의 제사라면 아벨은 나는 너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너의 자리, 인간의 자리부터 출발하겠다. 그 인간의 자리라고 하는 것은 결국 진짜 인간은 누구입니까? 진짜 아담, 하나님이 내 사랑하는 기뻐하는 아들이라고 외쳤던 중요한 것은 두 사람도 아니고 세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죠.
요단강에서 성령 받을 때 우리 보기에는 그냥 이벤트였지만 주님보시기에는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했던 인간의 원형을 마지막 때에 공개하시는 겁니다. 예수님 앞에 비교할 때 나는 가짜이고 주님은 진짜 인간이고 나로 하여금 가짜면서도 진짜라고 호소하게 만들고 위대하게 만들고 잘못 가르치게 만든 그 원인은 바로 그 원인이 삐뚤어지고 이탈하고 노선이 벗어나게 한 그 원인의 자리, 사건의 자리로 다시 돌아가야죠. 그 선악과 따먹은 사건은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오늘도 매일, 일상 가운데 반복되는 사건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아담이 따먹은 그 버릇과 그 성질과 그 속성을 유감없이 발휘하면서 이 연극무대에서 마음껏 연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저 살아있습니다. 복 주세요. 이런 식으로 연극을 하고 있어요. 하나님은 ‘죽은 놈이 무슨 복이야!’ 그러면 죽은 자이니까 죽여 버리죠? 아니 아니야 죽은 자가 네가 죽는 게 아니고 그것은 마귀 진짜 죽음은 네가 생각하는 그 이상의 예상 밖의 깊이를 갖고 있어요. 그 죽음은 심판이고 마귀의 속성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죄인인 인간을 통해서 끝까지 우리 배후에 있는 악마의 실체를 드러내는 데 우리를 미끼로 사용합니다. 창조부터가 정돈이 안 되어 있어요. 창조부터 도대체 내가 창조되어 놓고 나부터 창조를 끄집어내니까 마귀가 좋다고 ‘그래 잘했어 이제부터 너는 종교생활하면 되는 거야!’ 종교생활이 뭐에요? 살아있는 내가 어떻게 하면 천국에 입성하느냐 그거잖아요. 일요일에 바빠서 교회 못 가는데 나중에 늙어 죽을 때 예수 잘 믿어야지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거예요. 도대체 누구를 위해서 밥을 먹는지 무엇 때문에 바쁜 건지 나의 바쁨을 위해서 내가 존재하는 것인지 스스로 질문할 수 있는 여권이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악마가 이야기해 주는 창조론과 인간론을 우리가 도외시하면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