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사슬의 용도 121226
쇠사슬의 용도 121226
이름 : 이근호(IP:119.18.69.144)
쇠사슬의 용도 (겔 7:23-27)
이근호
12-12-26 21:07
쇠사슬의 용도
2012년 12월 26일 본문 말씀: 에스겔 7:23-27
(겔 7:23, 개역) 『너는 쇠사슬을 만들라 이는 피 흘리는 죄가 그 땅에 가득하고 강포가 그 성읍에 찼음이라』
(겔 7:24, 개역) 『내가 극히 악한 이방인으로 이르러 그 집들을 점령하게 하고 악한 자의 교만을 그치게 하리니 그 성소가 더럽힘을 당하리라』
(겔 7:25, 개역) 『패망이 이르리니 그들이 평강을 구하여도 없을 것이라』
(겔 7:26, 개역) 『환난에 환난이 더하고 소문에 소문이 더할 때에 그들이 선지자에게 묵시를 구하나 헛될 것이며 제사장에게는 율법이 없어질 것이요 장로에게는 모략이 없어질 것이며』
(겔 7:27, 개역) 『왕은 애통하고 방백은 놀람을 옷 입듯하며 거민의 손은 떨리리라 내가 그 행위대로 그들에게 갚고 그 죄악대로 그들을 국문한즉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나님이 펼치시는 세상은 ‘주의 이름’으로 전개되는 전체입니다. 여기에 비해서 인간들의 생각하는 세상은, ‘인간들이 버티고 살아가는 세계로서의’ 전체입니다. 즉 ‘주의 이름’과 ‘인간 이름’의 차이를 나타냅니다. 사람에게 좋으면 다 좋다는 것이 인간들이 생각하는 세상의 성격입니다.
하지만 ‘주의 이름’으로 펼치시는 세상은 이런 ‘인간 세계’를 향하여 무서운 분노를 내리시는 세상입니다. 이 사실을 천상회의에 참석은 선지자 이외에는 누가 감히 알겠습니까? 따라서 선지자가 보는 세상관과 보통 사람들이 보는 세상관은 도저히 원활하게 화합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쇠사슬’을 만들라고 지시합니다. 무슨 용도일까요? 이 쇠사슬은 사람들에게 하등 소용없는 물건 같습니다. 세상 나라를 건설하는데 있어 전혀 긍정적으로 보탬이 될 것 같지 않는 물건입니다. 하나님의 참된 계시는 근본적으로 변혁하시고자 하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마치 복받을 만한 자격이라도 있는 것처럼 행세합니다. 복음 당연히 받아야 되고 저주는 당연히 받지 않아야 된다고 여깁니다. 따져서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니라 천성적으로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을 갖고 살아갑니다. 축복은 다가오고 저주는 비켜가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주변에서 자꾸만 ‘축복의 증거’를 수집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만들라고 지시한 쇠사슬은 축복의 증거가 아니라 저주와 심판의 증거물입니다. 그것은 남의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백성들을 꽁꽁 묶어서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게 하는 쇠사슬을 친히 사용하시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바로 성전의 존재 이유에 대해서 자기 백성들이 근본적으로 크게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성전의 존재를 마치 자기들을 지켜주는 축복의 건물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큰 오산입니다. 왜냐하면 정작 성전이 보호하려는 것은 자기 백성이 아니라 법궤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이란 이 법궤의 취지가 완성되므로서 성립하는 세계입니다. 하늘나라 보좌에는 이 법궤가 핵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그런데 이 법궤의 취지의 완성이 되는 경로에는 필히 이 세상에 대한 저주와 심판이라는 코스를 거치게 되어 있습니다. 즉 ‘저주함으로써’ 천국이 달성되는 겁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법궤를 모신다는 것은 다른 민족과는 달리 특별히 하나님의 저주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경험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무엘상 6: 19-21에 보면,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까닭에 그들을 치사 (오만) 칠십 명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셨으므로 백성이 슬피 울었더라
벧세메스 사람들이 이르되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를 우리에게서 누구에게로 올라가시게 할까 하고 전령들을 기럇여아림 주민에게 보내어 이르되 블레셋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도로 가져왔으니 너희는 내려와서 그것을 너희에게로 옮겨 가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감히 인간들이 하나님의 법궤를 감당하겠다는 그 태도부터가 문제였고 앞으로도 그런 일이 계속 일어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근본적으로 자신이 저주받아 마땅함을 도저히 수용할 위인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하 6:6-7에 보면, “그들이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흔들리는 법궤를 붙드는 것도 인간들에게 허락되지를 못할 정도로 인간은 더럽습니다. 감히 하나님과 함께 할 존재가 못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차원에서 교회를 보는 것과 천국의 차원에서 교회를 보는 것을 구분해야 됩니다. 교회차원에서 교회를 보면, 하나님이고, 예수고 말씀이고 뭐고 간에 전부 교회 유지와 번영을 위하여 집결시키고 해석하게 됩니다.
즉 인간들이 감당하는 그런 단체를 만들고 그 단체를 통해서 천국을 뚫어보겠다는 심보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들이 조작해낸 ‘천국 훼방단체’입니다. 이들은 사람들이 축복받기를 원하는 그 심보를 충분히 고려하고 감안해서 눈에 보이는 교회 위주로 교회를 운영하게 됩니다.
보이스피싱이란 사기 수법이 있습니다. 있지도 않는 사건으로 사람들을 호려서 돈을 빼내가는 사기짓을 합니다. 그런데 이 보이스피싱보다 더 나쁜 자들이 바로 ‘천국’과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람의 영혼을 나락에 빠트리는 짓들을 교회들이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저주의 증거물을 갖기를 원하지 않고 축복의 증거물을 갖고 싶어하는 심리를 이용하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도들이 전했던 복음의 내용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쇠사슬처럼 ‘축복의 증거물’이 아니라 ‘저주의 증거물’로서의 십자가입니다. 결혼반지는 수백개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만 있어도 충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천국백성에게 주신 반지는 오직 십자가 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마땅히, 그리고 당연히 저주받아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경에 나오는 모든 말씀에 대해서 우리가 왜 저주받는 것이 합당한 존재이냐를 보여주는 증거용 말씀입니다. 저주받을 만하기에 우리에게 더 이상 일체의 유혹이라는 것은 다 쓸데없는 것들로 인한 유혹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선지자나 제사장이나 장로들을 붙들고 자신을 지켜줄 계시를 달라고 매달립니다. 곧 사기꾼들에게 간절히 축복에 관한 정보를 달라고 요구합니다. 이는 “더욱 더 우리를 상대로 사기를 쳐달라”고 요청하는 바가 됩니다. 참으로 천국을 소개하는 교회라면 오직 교회마저 부인하는 그런 내용을 전하게 됩니다.
훌륭한 교인이 전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자만이 천국갑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애초부터 우리가 복받을 자격없음을 차라리 기쁘게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2-12-27 22:18
20강-에스겔7장 23-27(쇠사슬의 용도)121226-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7장 23절에서 27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58페이지입니다.
에스겔 7:23-27
“너는 쇠사슬을 만들라 이는 피 흘리는 죄가 그 땅에 가득하고 강포가 그 성읍에 찼음이라 내가 극히 악한 이방인으로 이르러 그 집들을 점령하게 하고 악한 자의 교만을 그치게 하리니 그 성소가 더럽힘을 당하리라 패망이 이르리니 그들이 평강을 구하여도 없을 것이라 환난에 환난이 더하고 소문에 소문이 더할 때에 그들이 선지자에게 묵시를 구하나 헛될 것이며 제사장에게는 율법이 없어질 것이요 장로에게는 모략이 없어질 것이며 왕은 애통하고 방백은 놀람을 옷 입듯하며 거민의 손은 떨리리라 내가 그 행위대로 그들에게 갚고 그 죄악대로 그들을 국문한즉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성경은 세상을 볼 때 인간이 세상 보는 것과 다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이름에 의해서 전체를 새롭게 관할하고 있다는 이런 새로운 전체성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일종의 판이 달라요. 보통 우리 인간들끼리만 있는 판, 인간들끼리 짜인 그런 판 말고, 그러니까 인간들 서로가 보는 그런 판 말고 보이지 않는 분이 세상을 관할한다는 새로운 판을 성경은 내 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쪽에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 쪽에서 주의 이름으로 지배하는 그 판에서 인간이라는 위치가 무엇인가, 그 의미가 무엇인가, 이것은 그 의미가 완전히 다르게 되는 겁니다.
보통 우리가 생각하기를, 이스라엘에는 성전이 있다, 성전이 있다면 그것이 다른 나라와의 차이점이 뭐나고 물을 때 이스라엘사람들은 쉽게 이야기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려고 성전이 있다.” 우리 인간 입장에서는 그것이 상당히 이해가 될 거예요. 신을 섬기면 그 섬기는 신에 의해서 복이 오는구나, 이렇게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게 되면 은혜를 주시고 축복을 주시는 증거로서의 성경이 아니라 저주를 퍼붓는다, 심판한다는 증거로서 성전이 있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이 갖고 있는 모든 인간의 바탕을 완전히 뒤집는 발상입니다.
예를 들면, 교회가 있는 이유는 복을 주기 위함이다, 이것이 우리 일상의 상식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교회가 있는 것은 이 세상을 저주하기 위한 증표로서 교회가 있다, 그것을 누가 믿겠습니까? 오늘 본문 23절에 보면 “너는 쇠사슬을 만들라.” 에스겔 보고 쇠사슬을 만들라고 할 때 이 쇠사슬이라 하는 것은 축복 주는 쇠사슬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너희를 저주한다는 저주의 증표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펼치는 그 순간부터 ‘아, 세상은 이런 식으로 저주받는다.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저주했다.’ 하는 저주의 증거물을 보도록 요청합니다.
내가 복 받는 증거를 찾으라고 성경을 보라는 것이 아니고 나는 왜 복 받을 수 없고 저주 받아야 되고 심판 받아야 되는지 그 증거물을 하나님께서 실제로 남겼고 그 남긴 그 증거물이 오늘날 주의 이름으로 새로운 판을 가지고 이 세상을 다스리고 있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 하나님이라든지 교회라는 것은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것과 완전히 다르지요. 쇠사슬을 만들라, 쇠사슬 가지고 소꿉놀이 하려고 만들라고 한 것이 아니잖아요. 쇠사슬은 묶겠다, 포로 잡혀가게 하겠다, 하나님이 너희를 이렇게 저주했다, 의 증거가 에스겔 선지자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서 그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했다면 그 십자가는 뭐냐,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에스겔 보고 만들라고 한 그 쇠사슬과 같은 차원의 저주의 증거가 는 겁니다.
성경에 이러한 근거는 오늘 본문만 있는 것이 아니에요. 사무엘상 6장 19절에도 나옵니다. 거기 보면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고로 그들을 치사 (오만)칠십인을 죽이신지라.”라고 나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성전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법궤가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모신 곳이 성전인데 그 벳세메스 사람들이 법궤를 들여다 보니까 보는 즉시 저주받았어요. 법궤가 있다는 것, 다른 말로 하면 성전이 있다는 것은 봐서는 안 될 물건이 너희와 함께 있어서 너희는 그 성전을 가지고 축복 주는 무엇인양 여겼는데 사실은 축복이 아니고 그 성전으로 인해서 성전을 성전답게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가장 가까운 장소에서 하나님의 저주를 제일 먼저 목격하고 제일 먼저 경험하는 백성이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보다 특별한 혜택을 입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가장 가까운데서 맛볼 수 있는 증거물을 그들이 갖고 있다는 것. 사무엘 하 6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거기 보면 법궤를 옮기는 중에 법궤가 움직이니까 웃사라는 사람이 그것을 만졌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진노하사 웃사를 죽여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무서운 곳, 저주받은 곳, 그것을 중심으로 삼아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나라를 만드신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날 이방나라에서는 신을 잘 모시면 복이 팍팍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성의 있게 정성 다해 모시면 그렇게 되는데 막상 성경에 나오는 진짜 하나님의 법궤,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은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면 된 통으로 저주받는 증거로서 법궤와 성전이 활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전도하겠다, 꾀이겠다, 하는 의도를 다 파괴하는 거지요. 그런 것은 성립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로 적용시키면 어떻게 되는가? 교회 입장에서 교회를 보느냐, 아니면 천국 입장에서 교회를 보느냐, 그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차원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교회 입장에서 교회를 바라보면 모든 되어가는 일은 교회가 유지되고 보존되기 위해서 하나님도 있고 예수도 있고 성경도 있고 성탄절기도 있고, 이 모든 것은 교회 잘되기 위함이라고 보는 거예요. 그러면 그 교회라 하는 것은 결국 교회 자체를 보호하고 지키기 위함이죠.
교회가 늘 최우선이니까 그 다음에 하나님도 교회를 위해서, 예수님도 교회를 위해서, 성경도 교회를 위해서,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게 되면 하나님도 예수님도 천국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천국 입장에서 볼 때 교회란 뭐냐, 천국을 훼방하고 가로막기 위해서 인간들이 교회라는 것을 만들어놓고 그것을 운영해 가고 있음이 들통 나는 거예요. 천국에는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진 사람만 들어갑니다. 요새는 이런 말하기도 겁이 납니다. 자기 자신을 부인할 때 뭐도 거기 포함되느냐 하면 우리교회라는 그것도 부인을 해야 돼요.
교회 잘 되기 위해서 어떤 설교를 하고 교회를 위해서 뭘 하겠다는 그 자체가 천국 가는 사람들을 모집하는 것이 아니고 천국 못갈 사람만 떼거지로 모으는 기능으로나 작용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TV에서 보이스피싱에 관한 내용을 봤는데 세상에, 그 촌에 있는 할머니들에게 중국에서 전화 걸어서 돈 빼내는 것을 보여줘요. 할머니들의 그 돈이 얼마나 아까운 돈입니까? 노후를 위해서 마련해 놓은 그 돈을 몽땅 사기를 치고 있어요. 정말 그것 보면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러나 세상 보이스피싱은 인간의 돈만 훔치잖아요. 교회라는 이 보이스피싱은 사람의 영원한 운명과 영혼을 사기치고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교회가 잘 되어야 하나님이 기뻐합니다.” 하는 그런 보이스피싱에 사람들이 너도 나도 자진해서 사기를 당하고 거기에 자진해서 빠집니다. 아까 장로님이 이야기했지만 서울의 어느 교회는 연합성가대가 5천명이 있다, 그걸 누가 원하는 거예요? 그것은 하나님이 원한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원한 거예요. 사람들이 원하는 그 속임수에 사람들이 자진해서 속아 넘어가기를 각오하고 속아 넘어가고 있는 겁니다. 저주의 증거를 받아야 될 텐데 그들은 교회 오면서 하나님이 우리 교회를 이만큼 키워줬다는 그 축복의 증거를 끌어 모아서 많이 확보해서 그것으로 하나님이 기뻐하는 교회로서의 증거를 가지려고 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실은 성경은 전혀 그것과 반대가 되는 겁니다. 성전을 통해서 뭐가 나왔는가, 우리가 에스겔을 통해서 볼 건데요, 하나님의 성전을 통해서 그들에게 나온 것은 쇠사슬이다, 그 다음에 뭐가 나오는가, “선지자에게 묵시를 구하나 헛될 것이며 제사장에게는 율법이 없어질 것이요 장로에게는 모략이 없어질 것”이다. 뭐가 자꾸 없어지고 사라지고, 그런 쪽에서 자꾸 하나님께서는 일을 벌이고 있는 겁니다. 더 나아가서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없고 또 가질 이유도 필요도 없는 거예요.
왜냐, 우리가 가지게 되면,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으로 하나님의 저주를 막아내기 위한 수단으로 동원하게 되는 겁니다. 사람들은 물어요. “목사님, 그러면 어떻게 신앙생활 할까요?” 거기에 대해서 제가 늘 하는 이야기입니다. 다섯 글자입니다. “그냥 사세요.” 그냥 사시라고 한 거예요. 26절, 27절에 있는 대로 “그들이 선지자에게 묵시를 구하나 헛될 것이며 제사장에게는 율법이 없어질 것이요 장로에게는 모략이 없어질 것이며 왕은 애통하”게 될 텐데 이 점을 좀 깊이 있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설명하기 전에 이 말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쉬운 것을 먼저 이야기하겠습니다.
한석봉이라는 사람, 석봉이란 호(號)고 이름은 한호(韓濩)지요. 한석봉하고 자기 어머니하고 불 꺼놓고 시합을 했어요. 불 꺼 놓고 한 석봉은 글씨를 쓰고 한석봉의 엄마는 썰어서 누가 잘했느냐 하는 시합을 했습니다. 저는 어릴 때 그 글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신학교 다니면서 다시 그것을 보니까 이것이 말도 안 되는 게임을 했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그런 생각이 안 들던가요? 같이 글씨 시합을 하든지 같이 떡을 썰든지 해야 되는데 이것은 서로 다른 종류의 게임을 벌인 거예요. 한석봉이가 떡 써는 기술 배운 것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왜 그런 식으로 게임을 합니까? 말이 안되지요.
전국의 달인이 많은데 어떤 사람은 남대문 시장의 달인인데 1층부터 5층까지 짐을 옮겨주는 달인이 있어요. 짐 하나에 2천원 받고 올려줍니다. 얼마 전에 5백 원 올렸다고 하지요. 그 다음에 팔씨름 잘하는 달인이 있어요. 그 둘을 게임에 붙여봅시다. 이게 공정한 게임이 됩니까? 한 사람은 팔씨름 달인이고 한 사람은 짐 나르는 달인인데 둘이 시합 붙여놓고 “자, 이제부터 누가 요리를 잘하는지 시합해 보세요.” 이게 시합이 되겠습니까? 말이 안 되지요. 제가 설교 처음에 했듯이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주의 이름 중심으로서 전체를 새롭게 만드신다, 새로운 전체가 우리에게 덮치면 기존에 인간들이 보는 인간들만의 전체하고는 전혀 다른 차원에 속한다는 말이지요.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야기할 때 오늘 본문에 보면 선지자에게 묵시를 구하고 제사장에게 율법을 구하지만 이들이 원하는 묵시나 율법이라는 것은 천국차원, 하나님차원이 아니고 인간들이 이 지상에서 자기를 보존하고 축복받기를 기대하는 바에 필요한 묵시와 율법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니 이것은 하나님하고는 아무상관이 없는 이야기인 겁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 딸 이야기입니다. 어릴 때는 산타클로스가 있다고 믿었죠.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제 아내가 하양에서 선물을 사오다가 걸렸어요. 크리스마스 전날 밤에 줘야 되는 거지요.
우리 딸은 엄마가 뭘 가져오면 다 조사해 보는 특징이 있어요. 보니까 아무래도 크리스마스 선물 같아 보이지요. “이거 뭔데?” 하니까 제 아내가 “하양에서 산타클로스를 미리 만났다.”고 이야기해 줬어요. 어린아이에게 산타클로스의 존재는 울지만 않으면 선물을 주는 존재인 거예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를 대행해서 엄마가 선물을 준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왜냐, 산타클로스가 그 애에게는 실제로 존재하기에 그래요. 그렇다면 어린아이에게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24일 밤에 되면 선물을 주는데 산타클로스도 아닌 엄마가 왜 선물을 가지고 있느냐는 거예요.
이 어린아이의 세상을 보는 그 지평은 산타클로스가 당연 있고 22일도 아니고 23일도 아닌 24일 바로 그날 선물 주게 되어있다 그 말이지요. 그런데 왜 그게 엄마 손에 있느냐는 말이지요. 그럴 때 엄마는 그 애의 세계에 맞추어 나가는 겁니다. 이게 뭐냐, 그 당시 사람들이 선지자나 제사장들이나 지도자들에게 요구하는 바가 그겁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세상 관에 당신이 맞춰줄 책임이 있고 의무가 있다는 거예요. 그럴 때만 이스라엘이 단합되고 사랑이 넘치는, 요새 말로 교회가 되는 겁니다. 사도들, 예수님 제자들은 절대로 그런 식으로 안 했습니다. 전도할 때 구걸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은 오직 한 가지만 이야기했어요. 그 당시 사람들은 자기에게 유리한 예수, 자기한테 잘해주는 예수를 원했지만, 그러니까 우리를 축복해주는 예수를 원했지만 사도들이 전한 것은 너희는 축복 받을 자격도 없고 저주 받아야 마땅하다는 저주받을 증거들만 사도들의 입에서 나온 겁니다. 그것이 전도, 도를 전한 거예요. 십자가 도를 전한 겁니다. 교회가 뭐냐, 십자가 도를 전하는 그 현장, 그 시점, 그 공간만이 교회가 되는 거예요. 십자가 도를 전하지 않으면 그것은 천국과 관련된 교회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저주의 증거라는 것이 사도의 입에서만 나왔고 사람들은 애초부터 저주는 치우고 나에게 은혜를 주고 축복해주는 증거를 달라고 미리 요구하는 입장에서 사도는 그들의 요구를 비켜가는 겁니다.
그럴 때 사도는 어디에 속했는가? 새로운 판, 주의 이름으로 활동하고 주의 이름으로 펼쳐지는 새로운 판에 엮인 사람들이고 그것을 모르는 일반인들은 그냥 세속에 묶여져 있는 사람들이고. 이것은 천상회의를 참석한 선지자와 천상회의를 모르는 거짓선지자의 차이점과 똑같은 거예요. 결혼을 약속하는 반지를 가지고 “나는 결혼반지 100개 받았다.” 하면 그것은 뭐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꼭 뭔가 구걸하는 느낌이 안 듭니까? 우리가 아는 상식에 결혼반지는 두 개도 필요 없고 세 개도 필요 없어요. 단 하나만 있으면 되는 겁니다.
천국과 지상이 어떻게 연결되는가? 수백 가지의 기적, 병 낳고 사업이 잘되고 뭐가 어떻고, 하는 이런 수백 가지의 기적들이 아무짝에도 소용없습니다. 이스라엘 속에 하나님이 성전을 줬습니다. 아까 이야기했지만 법궤를 줬어요. 법궤를 줘서 법궤를 들여다 본 사람, 법궤를 만진 사람, 모조리 저주받습니다. 누가보다 가장 가까운데서 하나님이 주는 진짜배기 저주를 모셔야 되는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이에요. 하나님께서 천국에 데려오는 결혼 약속의 반지는 오직 하나밖에 없어요. 그것은 십자가였습니다, 십자가!
십자가 결혼반지를 내 손가락에 끼게 되면 이것은, 그 결혼반지가 내 손가락에 들어오게 되면 나는 저주받은 자로서 확정이 되는 겁니다. 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마치 이것은 손가락에 법궤 전체를 손가락에 거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이렇게 십자가를 손가락에 걸게 되면 그 다음에 수천가지의 기적의 유혹을 벗어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 유혹뿐만이 아닙니다. 그 십자가라는 것을 우리 가슴에 끼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우리가 법을 지켜서 따로 자기 잘남을 내세우는 유혹도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게 뭐냐, 법으로부터의 자유, 해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법으로부터도 단죄를 받지 않고 정죄를 받지 않고 죄인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는 것을 주기 위해서 한꺼번에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어떤 짓을 하기 이전부터 우리를 죄인으로 정죄해 버리는 겁니다. 죄인을 정죄함으로 말미암아 이제부터 이 반지가 우리를 새롭게 만들어내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새롭게 창조하는 거예요. 인도북부에 이런 속담이 있답니다. 호랑이의 줄무늬는 바깥에 있어도 인간의 줄무늬는 속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세상이라 하는 것은 바깥을 보고 잘되었는지 못되었는지를 따지지만 인간을 볼 때는 외면을 보는 것이 아니라 속을 봐야 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속해있는 그 성전을 통해서 쇠사슬을 만들고 그들을 망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동안 너희를 지켜준다는 성전을 잘못 모시고 있다는 것을 깨우치게 하는 겁니다. 옛날에 법궤 있어서 전쟁에 승리했잖아요. 그걸 기억하면서 “우리는 법궤 있고 성전 있으니까 이제 맘 놓고 살아도 되고 외부에서 적들이 오더라도 성전을 지켜줄 것이다.”라고 자기를 지키는 지킴이 정도로 하나님의 성전을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성전의 실체가 드러나니까 우리를 지켜준다는 그 성전이 우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오히려 더 아주 매섭고 잔인하고 악한 나라에 잡혀가게 만들어서 원래부터 우리는 지킬만한 입장이 못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식으로 성전이 우리 안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24절에 “내가 극히 악한 이방인으로 이르러 그 집들을 점령하게 하고 악한 자의 교만을 그치게 하리니 그 성소가 더럽힘을 당하리라.” 너희들은 성소를 두고 거룩하다, 중요하다, 성스로운 곳이다, 라고 여겼던 그 모든 것을 내가 나서서 그 성스러움을 모독하게 만들 것이다, 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깡그리 우리에게는 거룩한 것도 없고 성스러운 것도 없게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처음에 교회 올 때 어린아이들보고 이 강대상에 올라오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교회는 청소문제 때문에 못 올라오게 하는 정도지만 여기는 하나님이 계시는 성스러운 곳이다, 라고 해서 인간들은 스스로 거룩한 공간과 거룩하지 않은 공간을 구분 짓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거룩한 것을 내가 거룩하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거룩한 것을 잘 보존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증표가 될 것이다, 라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우리 선배격인 이스라엘이 했던 오류고 잘못인 겁니다. 그게 착각이었어요. 거룩한 하나님이 함께 있으면 그 거룩한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거짓된 사고방식이었습니다. 그들이 거룩하다는 그 거룩을 하나님 쪽에서 다 부숴버리고 말았어요. 그러니 하나님이 오히려 자기 이스라엘 백성을 공격한 겁니다.
그게 실제로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증명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을 못했어요. 사람들이 선지자에게 묵시를 구하고 제사장에게 율법을 구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그렇게 했느냐하면 이런 의미입니다. 여러분, 가룟유다가 예수님 십자가 지는데 얼마나 기여했습니까? 가룟유다가 예수님 십자가 지는데 얼마나 많은 협조가 되었을까요? 인간들은 하나님의 율법이나 묵시를 알게 되면 내가 하나님의 일에 협조할 수 있는 것이 남보다 더 많아진다고 생각했고 남보다 협조를 많이 하게 되면 그만큼 나에게 복으로 주어진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런 사고방식이 뭐냐, 법적으로 착하면 착한 만큼 하나님에게 호감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일상 모든 종교인들, 교회 나오는 사람들 사고방식이 전부 다 그런 사고방식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나서서 십자가 졌다는 그 말은 그런 것이 아무것도 소용없다는 거예요. 아무것도 소용이 없고 너 자신을 부인하라,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거예요. 너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는 죽어 마땅하다는 것을 안다면, 다시 말해서 나는 저주받아야 마땅합니다, 라는 증표를 약혼반지 혹은 결혼반지처럼 끼고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한 거예요.
그것으로 우리는 모든 법에서부터 해방되는 겁니다. 어떤 세리가 성전에 와서 기도하는데 “하나님이여, 성전에 와서 제가 기도하는데 제가 죄인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해요. 그럴 때 예수님께서 옆에 있다가 “네가 바로 천국 간다. 네가 바로 의인이다.” 했습니다. 그러니 제가 한국교회를 보이스피싱하는 집단, 사기집단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거룩한 분을 모셨으니 최선을 다해서 협조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 몫만큼 우리에게 축복을 주신다, 그렇게 되어버리면 법을 잘 지킨 사람은 보다 많은 축복을 받을 것이고 교회법 지키지 않은 사람은 그만큼 저주받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는 계급도 차등도 생길 겁니다.
그런데 그것들의 기본정신이 뭐냐, 나는 어떤 경우에라도 축복받아야 마땅해, 라는 자기부인이 안된 상태를 그대로 노출한 것뿐이에요. 그런 사람들이 목사를 붙들고 장로를 붙들고 제사장을 붙들고 뭐라고 하느냐, “계시를 주옵소서. 묵시를 주옵소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옵소서.” 그거 해서 뭐할 건데요? 그것 해서 하나님과 더불어 있다는 티를 내고 교회 다닌 것으로 전보다 더 많은 이득을 얻겠다는 심보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예요. 거기에 짝 맞춰서 사기꾼들이 이렇게 하시면 복 받습니다, 저렇게 하시면 복 받습니다, 이런 사기를 치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성령 받은 선지자들은 뭐냐, 네가 그 사람들에게 쇠사슬을 만들어라, 오늘 설교 제목이 “쇠사슬의 용도”에요. 쇠사슬의 용도는 뭐냐 하면, 네가 그럴 입장이 못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물이 쇠사슬의 용도입니다. “내가 너희를 앞으로 잡아 죽일 거다.” 이런 뜻이라는 말이지요. 제가 웃으면서 이야기하지만 제가 웃으면서 할 말이 아닙니다. “선지자야!” “예” “쇠사슬을 만들어라.” 그게 바로 성전이 원래 있어야 될 이유를 쇠사슬로 함축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너희들은 성전 붙들고 있다가 심판받고 잡혀가고 저주받는 것이 너희들 자신이라는 거예요.
정말 하나님의 뜻을 몰라도 너무 모르고 정말 몰라요. 아예 반대로 알아요. 제발 부탁합니다. 매일같이 저주받아야 될 그 증거물로 인하여 늘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야, 이 십자가를 봐라. 이 십자가를 보니 나는 마땅히 저주받아야 되는데 이 십자가 피로 공짜로 구원받잖아.” 그렇게 되는 겁니다. 오늘 어떤 분이 십자가마을에 질문을 해 놓았어요. “예술이 뭐냐, 예술 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어떻게 영광 돌리는가?”라는 주제지요. 제 답변이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예수님 십자가 옆에 달렸다가 ‘너는 오늘밤 나와 함께 낙원에 간다.’고 들었던 구원받은 그 강도, 그 강도가 강도질 할 때 아주 예술적으로 강도질 했습니까? 가스 배관을 타도 아주 예술적으로 타서 ‘너 진짜 멋지게 강도질을 하네.’ 이래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고 했지요.
우리가 교회 입장에서 교회가 아름답게 꾸며지면 기분 좋습니다. 교회 연주를 잘하게 되면 기분 좋아요. 악기 다루는 사람이 와서 하면 감동되고 기분 좋지요. 그러면 구원받습니까? 뭔가 기여하고 하나님 일에 보탬 되면 복 받는 겁니까? 근본문제, 출발부터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이방종교인이라는 것을 감안해줘야 해요. 우리는 신을 생각하고 예수 생각하고 교회 생각해도 복 못 받아서 환장한, 복을 더 따내기 위한, 그런 요량으로만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것을 기정사실화해야 합니다.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강도를 구원한 것은 강도를 그냥 불쌍히 여긴 거예요.
어떤 짓을 했기에 불쌍히 여긴 것이 아니고 그냥 불쌍히 여긴 거예요. 그리고 천국은 그렇게 불쌍히 여겨진 사람만 모인다면 천국 입장에서 교회를 보게 되면 교회에서 외칠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우리들은 불쌍히 여길 자격도 못되는데 그것을 아는 사람, 진짜 오직 십자가만 있다면, 천개 만개의 반지가 필요 없어요, 오직 하나 십자가만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도 없고 더 이상 얻을 것도 없고 더 이상 추구할 것도 없고 오직 십자가만으로 더 뭘 달라고 할 것도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 그런 사람만 천국 갑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부터 세상이 만들어낸 자아가 되어서 자꾸만 천국 가리고 진리를 가리는 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시간 성령이 오셔서 쇠사슬을 만들라는 그 지시의 취지와 의미를 깨달아서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깨닫고 다른 것 욕심내지 않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