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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12 대구강의 23] - [피 84] - 박탈강의[피]

[12 대구강의 23] - [피 84] - 박탈

이름 : 구득영(IP:203.223.97.152)

[12 대구강의 23] - [피 84] - 박탈

12,12,03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255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하는 이유도, 숨겨진 의(자선)를 사수해야 할 책임이 성도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 수위가 어느 정도인가 하면,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할 정도이다.

(마 6: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 말씀의 현실화 과정 !!

이것은 예수님의 산상설교로서 분명히 말씀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 말씀이 현실화가 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을 하셨다고 하면, 그게 곧 율법인데, 법이라고 해도 되고 말이다.

실제로 이렇게 우주가 돌아가고, 그 우주 안에 우리가 있는데, 또한 우리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우주가 있다고 해도 되고 말이다. 둘 다 같은 말인데, 아무튼 이렇게 말씀이 우리와 우주 사이에서 관여하게 될 때, 예수님께서는 설교만 하시고 "나는 내 할 일을 다 했다" 라고 하면서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시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여기에는 절차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내가 너거들에게 다 이야기를 했잖아. 그러니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다 너거들 책임이야" 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즉 "내가 너거들에게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으니, 그것을 지키지 못하면 너거들 책임이야. 할 수가 없어" 라고 하시면서 그만 하늘나라로 올라가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무도 구원을 받지 못하는데, 예수님 혼자만 구원을 받고 말이다. 그러니 말씀과 구원을 받는 것 사이에는 무엇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신 것을 다 빼버리고, "주께서 말씀을 주셨다. 우리는 그것을 지키면 구원을 받는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지키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구원이 되지 않는데, 전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사실 그것을 본인도 아는데, 자기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완벽하게 지켜야 하는데, 그렇게 완벽하게 지키지를 못했으니, 결코 구원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중간에 뭔가를 거쳐서 와야하는데, 우리가 이것은 하나 아는데, 즉 말씀이 우리에게 오게 되면, 우리의 신상에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 변화 이전에 주님께서 뭔가 일을 하셨다는 것이다. 그게 무슨 일인지 우리는 아는데, 즉 '십자가' 라는 일을 하셨다는 것이다.

◈ 지킬 수 없는 말씀임을 보여주는 일들이 깔려있어야 !!

그런데 그렇게 되어도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말씀을 하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그러면 그 중간에는 어떤 일이 없었는가? 그러니 그 말씀은 우리가 지킬 수 없는 말씀임을 보여주는, 그런 어떤 일들이 여기에 깔려있어야 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오늘날 한국교회를 생각해보면, 목사가 "여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보고 지키라고 준 것인데, 그러니 그 말씀을 지켜서 열매를 맺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라고 해버린다면, 물론 그런 말을 하는 목사 자신도 지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참으로 무책임한 행동인데, 원래 인간은 책임을 지지 못하지만 말이다. 그러니 남는 게 무엇인고 하니, "그냥 할 때까지 해보자" 라는 것이다.

◈ 숙제를 능력대로 해오세요 !!

예를 들어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수학문제를 5페이지까지 풀어 오세요. 내일 숙제검사를 합니다" 라고 했다면, 그런데 그것이 "숙제를 하는데 까지 하세요. 해보고 안 되면 그만하고" 라는 식이라고 하면, 학생들이 뭐라고 하겠는가? "야, 신난다. 아는데 까지만 하고, 안 되면 그만두지 뭐. 능력이 그것밖에 안 되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것뿐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주님은 쓸데없는 소리를 한 것밖에 되지 않는데, 즉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해라" 라고 했으면, 그러면 사람들은 그것을 듣고는 "우리가 한번 해보고, 안 되면 그만이지 뭐" 라고, 그렇게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이 어떻게 되겠는가?

◈ 예수님께서는 왜 산상설교를?

만약에 이 산상설교의 말씀이 없다고 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는데, 그래서 "십자가를 진 내 피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라고 하신다면,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이 산상설교는 왜 말씀하셨느냐는 것이다. 괜히 쓸데없는 말씀을 하셨는데, 산상설교의 경우에 말이다. 어차피 십자가로 구원을 받는데, 그런데 왜 산상설교를 말씀하셨느냐는 것이다.

◈ 십자가의 피가 곧 율법 ??

우리가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하는데, 예수님의 산상설교도 없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그 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게 되면, 그 피가 곧 율법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즉 "다른 것은 몰라도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믿는 그 한 가지는 내가 했다. 그 행함으로 나는 구원을 받는다" 라고 하면, 그게 산상설교가 없는 경우라면, 그게 산상설교를 대신하는 율법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I

그러면 이렇게 산상설교가 따로 있고 십자가도 따로 있다고 하면, 산상설교에서 십자가로 내려오는, 전환되는 그 과정 속에서, 우리 인간은 그 어떤 말씀을 주어도 지킬 수 없다고 하는 것이 분명하게 확인이 되어야하고, 그렇게 해서 십자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베드로 장모의 병을 고치신 것도 !!

알다시피 예수님께서 베드로 장모의 병을 고쳐주셨는데, 그것도 오늘 주제와 맞아떨어진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께서 산상설교를 하고 십자가를 지시면 되는데, 그런데 왜 장모의 병을 고쳐주셨느냐는 것이다. 그것도 들어갈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베드로 장모의 병을 낫게 해주시고 뭐라고 하셨는가? 그것을 병을 치료한 것이 아니라, 장차 예수님께서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라는 것을 이루려 하심이더라고, 이사야서 53장의 말씀을 딱 인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 8:14)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마 8:15)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마 8:16)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마 8: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 말씀이 들어오면 인간들의 반응이 !!

그렇다고 하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대상으로 삼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결국에는 모든 것이 예수님의 공로로만 구원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를 줬다 폈다, 그렇게 마음대로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산상설교를 주시고, 그리고 우리의 반응을 보시는데, 바로 그 반응이 구원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신다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목사들이 "여러분,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킵시다" 라고 한다면, 그 반응들을 한번 살펴보자는 것이다. 그러면 "그래, 이 말씀을 지켜야지. 그래야 영광이 되지. 하지만 바쁘다 보면 지키지 못하는데, 그래도 할 수 없지 뭐.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라고 식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그게 지난 주일에 설교한 것인데, 즉 변명하는 모습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항상 율법이 들어오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가? 변명을 하게 되는데, 그런 변명을 하기 이전에는 고소를 하고 말이다. 즉 자기가 자기를 고소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먼저 자기가 자기를 고소하고, 그리고는 자기가 자기를 변명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변명은 '변호한다' 라는 의미인데, 그러한 반응들이 우리 몸에서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경우에 !!

그렇게 말씀을 주면, 그 말씀에 대한 반응들이 일어나고 있는데, 지금 그런 반응 중의 한 가지를 이야기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소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라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왜 하려고 하는고 하니,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셨을 때, 그 말씀에 대해서 인간들이 어떤 반응을 갖게 되는지 예수님의 여정 가운데서 성경은 발췌해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게 어디까지인고 하니, 십자가의 의의를 드러낼 때까지인데, 그때까지 인간들은 말씀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하게 되는지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고 하는데,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성경에서 무엇이라고 하던가?" 라고 하시는데, 그러자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 제일 크고 귀한 계명입니다" 라고, 그쪽에서 이야기할 수도 있고, 또한 예수님께서 요약해서 말씀하신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성경말씀에서 제일 귀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이웃을 자기 몸 같이 사랑하라" 라는 것인데, 그것이 곧 율법사의 대답이라는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너도 가서 그렇게 해라" 라고 하시는데, 그러자 율법사의 반응이 무엇인고 하니, "그러면 내 이웃은 과연 누구입니까?" 라고 했다는 것이다.

(눅 10:25)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눅 10: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눅 10:27)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눅 10: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눅 10:29)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눅 10:3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눅 10: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눅 10: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눅 10:33)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눅 10: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눅 10:35)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눅 10:36)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눅 10:37)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 산상설교, 그리고 십자가 !!

지금 제가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 여러분들이 그 주제를 분명히 알아야 하는데 말이다. 예수님께서 산상설교를 하셨는데, 그런데 그것만하면 되지 십자가는 왜 지셨느냐는 것이다. 그것을 따지고 있다는 말이다. 만약에 산상설교도 없이 그냥 십자가를 주시게 되면, 그 십자가를 믿는 것도 하나의 율법이 되고 마는데, 행위가 말이다. 그러면 율법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되니, 그것은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율법을 주면 거기에 대한 인간들의 반응이 반드시 나타나게 되고, 그런 반응 속에서 우리 인간들은 아무리 말씀을 주어도 지키지 못한다는 것이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 각자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내부에 인간보다 더욱 더 센, 그런 악한 세력이 인간을 장악하고 있으니, 인간은 빼도 박도 못하는 입장이라는 말이다.

◈ 인간은, 악마가 오뉴월에 남긴 그림자와도 같아 !!

그러니 눈에 보이는 우리만 전부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죄와 죽음과 같은 것이, 그런 악한 것이 우리를 데리고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인간은 악마가 오뉴월에 남긴 그림자와도 같은데, 실체는 보이지 않지만 그림자와 같이 함께 따라다니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악이라는 것을 떨쳐버릴 수가 없는데, 그림자와도 같으니 말이다. 그래서 악한 것을 알면서도 은근히 끌리는 맛이 있다는 것이다. 나이가 많이 들면 그것이 조금은 옅어지는데, 그런데 젊은이들의 경우에는 얼마나 심한지 모른다는 말이다.

남자의 경우에는 고급 승용차이고, 또한 여자의 경우에는 명품 가방에 마구 끌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울을 보면서 자기가 어느 정도로 예쁜지, 그리고 살은 어느 정도로 더 빼야하는지, 항상 그런 것이라는 말이다. 젊으면 젊을수록 그런 것들이 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또 탐스럽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아예 딱 붙어있는데, 그것을 천착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렇게 집착을 한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 이런 것 저런 것을 다 해보았으니, 이제는 모두 시시해 보인다는 것이다. "소고기를 사먹겠지" 라고 하면, "소고기를 사먹으면 뭐하노?"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 것이 다 염세적인 것인데, 그래서 "모두 다 소용이 없는 기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삐야삐야 빠바바 !!

하지만 젊은 아이들의 경우에는, 물론 소고기도 맛이 있지만 고급 승용차부터 욕심을 내서 계약을 하는데, 돈도 없으면서 말이다. 그것이 안 되면 오토바이라도 타고 '삐야삐야 빠바바' 라고 하면서 돌아다닌다는 것이다. 여자아이들은 고등학교 졸업만 하면 수술을 한다고 난리이고 말이다. 엄마가 나서서 수술을 시켜준다는 것이다(ㅋㅋ).

그러니 이런 것은 조금 전에도 언급했지만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곧 악의 모습인데, 즉 "악은 이런 것이다"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물론 노인네들도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는데, 자기는 못 되어도 자식만 잘된다 싶으면 하나님이고 뭐고 없다는 것이다. 잘난 자식이 최고라는 말이다. 물론 못난 자식은 잘라버리고 말이다.

이처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본성이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식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즉 실체는 없는데 그림자만 모여있다는 말이다. 만약에 사람이 열 명이 모여있으면, 악마의 그림자가 열 개는 된다는 것이다.

나이가 많이 들어도 본성은 숨길 수가 없는데, 너무나 세속적이라는 것이다. 특히 치매에 가까운 사람들의 경우에는 영적인 대화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과거에 잘나가던 권사이고 장로라고 해도, 나이가 들면 입에서 유행가가 저절로 나온다는 것이다. 노는 것을 좋아하고 예쁜 것을 좋아하고, 그냥 아이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 말씀을 통해서 미처 몰랐던 죄들이 !!

아무튼 말씀을 주셨다고 하면 그 말씀이 무용지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라고 하셨다면,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평소에 미처 몰랐던 죄들이 그만 발각이 된다는 것이다. 미처 몰랐던 죄들이 말이다.

그래서 우리가 누가복음 10장에서 생각해보아야 하는 것은, 그 율법사가 일단 예수님에게 칭찬을 받았는데,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이웃을 자기 몸 같이 사랑하라" 라고 대답해서 말이다. 그래서 율법사가 기가 살았는데, 자기가 지킨다고 말이다.

그래서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고 예수님에게 물었는데,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두 가지로 답변하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율법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자신이 있는데, 그러면 그 다음으로 자기 이웃이 누구냐는 것이다. 이웃을 알면 자기도 이웃을 사랑하겠다는 말이다.

◈ 율법의 구조를 보면 !!

여기서 율법의 구조를 보게 되면, 첫 번째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인데, 그런데 지금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율법에 같이 포함되어있는데, 즉 "이것은 지키고 저것을 지키지 않고, 또한 요것은 지키지 않고 조것은 지키고" 라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같은 책에 있으니 말이다.

마치 드라마에서 같은 탤런트가 4회, 5회, 6회에 나오면, 4회에서는 싫고, 5회에서는 좋고, 6회에서는 싫고, 그렇게는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같은 드라마이니 말이다. 그래서 온 율법을 지키다가 하나라도 어기게 되면 나머지 모든 것들도 다 어기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율법에 대해서 하나로 보는 관점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지킬만한 것을 골라잡아서 핀셋으로 뽑아내는 것을 율법은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율법은 곧 거울 !!

그래서 야고보서에서는 율법을 거울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이렇게 전신거울이 있는데, 그런데 몸 전체를 보지 않고 이렇게 한 부분만 골라서 본다고 하면, 아마 거울에 눈이 있다면 그러한 광경을 보고 웃지 싶다는 것이다. 그러니 같은 거울을 보면서, 이쪽을 비추는 것과 저쪽을 비추는 것이 각각 다르다는 것은 성립이 안 된다는 것이다.

(약 1:23) 누구든지 도를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그렇게 율법은 전체가 하나인데, 그것을 따로 구분할 수 없다는 말이다. 즉 같은 뜻으로서 포함되어있는데, 그러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하지 않아도 된다든지, 혹은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면 그것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그렇게 구분할 수는 없고 서로가 연결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 나는 누구입니까?

그런데 율법사가 뭐라고 하는가?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율법사와 하나님 사이인데, 그러니 율법사는 "내가 누구입니까?" 라고 물어야만 하는데, 즉 "율법 안에서 나는 어떤 존재입니까?" 라고 질문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왜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런 십계명을 주셨습니까?" 라고, 그렇게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성질이 급해서 "이것을 지킬게요" 라는 것부터 시작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로 너에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라고 하시는데, 그런데 율법사는 "아닙니다. 제가 그 얼마나 솜씨가 있고, 말씀을 잘 지키는데요" 라고 한다는 말이다.

* 율법사 : 제가 이것을 지킬게요.
* 예수님 : 바로 너에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 율법사 : 아닙니다. 제가 그 얼마나 솜씨가 있고, 말씀을 잘 지키는데요.
* 예수님 : 아니야, 너 자신에게 이야기한 것이다.
* 율법사 : 예수님, 그런 아니지요.
* 예수님 : 맞아. 너에게 이야기한 것이다.

우리 자신에게 율법을 주셨다는 것은, 우리가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인데, 지금 제가 말하는 뜻을 모르겠습니까? 처음에는 십계명이 없었는데,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계명만 있었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선악과도 있고, 십계명도 있고, 사도바울의 권면도 있었는데, 그 중에서 골라잡으라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해서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그리고 !!

처음에 계명은 하나밖에 없었는데,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라는 계명만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때부터 이미 사달(사고?)이 났는데, 그 계명이 있고 난 다음에 그 뒤에 그 어떤 계명이 오더라도, 초장부터 인간자체를 버려놓았으니, 그 뒤에 줄줄이 나오는 계명들은, 처음부터 이미 인간은 다 버려놓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분명히 하는 의미에서 추가된 말씀들이라는 것이다.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이 세상 것에 환장을 해서 미쳐서 마구 날뛰고 있는데, 거기에 율법을 주어서 '탐내지 말라' 라고 하니까, 그것은 지킬 수 있는 선을 이미 넘어섰다는 것이다. 자동자가 탐이 나고, 또한 명품 아파트가 탐이 나고 말이다. 그런 것을 탐내지 않는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선악과를 따먹고 인간을 이미 다 버려놓았는데, "마지막 때를 주의하고 경건하라" 라고 하면, 그 '마지막' 이라는 자체를 없애버린다는 것이다.

◈ 수학을 없애버렸으면 좋겠어요 !!

예를 들어서, 어떤 아이에게 소원이 하나 있는데, 그 아이는 수학을 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아이의 소원이 무엇인지를 다음 두 가지 중에서 여러분이 맞춰보라는 것이다. 첫 번째는 "앞으로 자기가 수학을 잘했으면 좋겠다" 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수학을 없애버렸으면 좋겠다" 라는 것인데, 그 아이가 무엇을 선택했겠는가?

두 번째인데, 그러니 하나님을 없애버리면 누가 신이 되는가? 선악과를 따먹었기에 누구에게 간섭을 받지 않으려고 하는데, 그게 바로 최고의 신이라는 것이다. 이미 모든 인간이 그런 성질을 가지고 있는데, 잔소리를 하면 죽여버린다는 말이다. 이번에 창원의 저수지에 정박아를 빠뜨려서 죽인 사건이 있었는데, 그렇게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죽여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꾸만 하나님이 잔소리를 하면 그 하나님마저도 죽여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나를 제거하려고 하지 말고, 너 자신이 곧 제거 대상이다" 라고 하시는데, 즉 선악과를 따먹지 말아야 하는 것이 인간인데, 인간도 아니면서, 악마의 그림자이면서 자꾸만 인간행세를 하려고 하니, "니가 제거의 대상이다" 라고 나오신다는 말이다.

◈ 만약에 이웃을 알면, 그 다음에는?

그런데 율법사는 그것도 모르고서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고 하는데, 자기가 이웃을 알아서 무엇을 하겠다는 말인가? 자기가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이웃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는데, 즉 이웃에 대한 예를 들어주신다는 말이다. 그게 소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라는 것이다.

그것을 이야기하기 전에 다시 한번 더 정리하면, 예수님은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해라" 라고 산상설교를 말씀하셨는데, 그것이 이웃사랑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이게 조금 어려운 것이지만,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해라. 오른 뺨을 때리거든 왼 뺨도 내놓아라" 라는 것들이 전부 이웃사랑과 관련이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율법사는 이웃을 알면 이웃사랑을 할 수 있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면 "오른 뺨을 때리거든 왼 뺨도 내놓아라" 라는 것은 어디로 갔는가? 즉 이웃만 사랑하고 "오른 뺨을 때리거든 왼 뺨도 내놓아라" 라는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이웃사랑이 아닌데, 그게 다 연결이 되어있으니, 그러면 결국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말씀 중에서 자기가 자기가 지킬만한 것만 핀셋으로 골라서 잡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산상설교를 주시고, "내 말을 잘 지켜라. 나는 이제 간다" 라고 하시면서 천국으로 가버리면 아무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산상설교를 주시고 인간의 반응을 살피시고, 그 다음에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서 우리를 구원하신다고 하는, 그렇게 해서 산상설교도 완성하시고 모든 것을 다 완성하시는 하나님의 십자가인데, 그 십자가가 없다면 교회도 아니라는 것이다.

◈ 오신 하나님은 피만 남기고 사라지셨다 !!

여기 '피' 라는 책의 제일 앞부분에 그것이 나와있는데, 즉 "피가 빠진 기독교는 껍질이다. 피가 없는 기독교는 오락이다. 오신 하나님은 피만 남기고 사라지셨다. 그 피의 흔적만 따라가야 천국에 이른다" 라고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산상설교를 말씀하셨다고 해서 그것만 지키고 있으면 안 되는데, 물론 지킬 수도 없지만 말이다. 피가 남겨져있는데, 그 피 속에는 "우리는 죽어도 이 산상설교를 지키지 못한다" 라는 것이 들어있음을 확인하면서, 그 피의 자취를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쉽게 설명을 해도 사람들을 다시 자기가 산상설교를 지킨다고 나서니, 그것을 지키면 특별 보너스라도 받는지 모르겠는데, 도대체 왜 그런 난리를 피우는지 말이다.

◈ 이웃은 니 옆집에 사는 사람이다 ??

지금까지는 쉬운 부분이고, 이제부터는 조금 어려운데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웃이 누구냐는 질문에 대해서 "이웃은 니 옆집에 사는 사람이다" 라고 하시면 참으로 쉬운데,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답변을 하실 때 보면, 그 질문자의 의도를 피하는 식으로 하신다는 것이다. 즉 질문자가 원하는 답변을 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니가 원하는 답변 자체가 전혀 율법에 섞일 수 없는 것이고, 그런 반응일 뿐이다" 라는 것인데,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셔야 한다는 말이다. "말씀을 주었는데, 어떤 반응이 나타났다. 그 반응에 합치된 예수님의 말씀을 기대한다" 라고 하면, 반드시 그 기대한 것이 실패로 끝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모든 인간이 전혀 예상치 못한 길이기에 말이다.

베드로로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예수님께서 자기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가르치니, 베드로가 뭐라고 했는가? "주여, 그럴 방법을 쓸 이유가 없는데 왜 그러십니까? 살아있는 우리끼리 잘 해봅시다. 주님이 그런 식으로 해버리면 우리는 정말 곤란해집니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마 16: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마 16: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 주님은 항상 우리의 기대와는 어긋나게 !!

그것을 오늘날도 역시나 마찬가지인데, 우리는 "하나님, 우리가 구원을 받으려고 하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라고 하면서 묻는데, 그런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는 자기가 기대한 답변을 첨가해서 묻는다는 것이다. 즉 "요런 식으로 하면 천국이 보입니까?" 라는 것인데, 하지만 주님은 항상 우리의 그런 기대를 비켜가서 다른 방법을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난처하고 당황하게 되는데, 물론 성도라고 하면 "아하,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피해서 가셨구나. 내 아이디어가 하나님의 아이디어와 일치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성령께서 그렇게 하셨구나" 라고 깨닫게 되고 말이다.

◈ 이제 본격적으로, '이웃이 누구인가?'

이제 본격적으로 들어가겠는데, "이웃이 누구인가?" 라고 할 때, 과연 이웃이 자기 주변에 있는 가까운 사람을 가리키느냐고 할 때, 예수님께서 동원시킨 것은, 누구를 꼭 집어서 "너 중심에서 반경 몇 미터를 이웃이라고 한다" 라고 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웃은 누구 중심에서 나오는가? 강도를 만난 사람을 중심으로 해서 나온다는 것이다. 지금 율법사는 강도를 만났는가? 전혀 멀쩡한데, 어디 아픈 곳도 없다는 것이다. 황 전도사님은 지금 입원을 해있는데, 이 율법사는 입원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오히려 황 전도사님의 이웃이 누구냐는 말이다.

물론 강도를 만나더라도 조금 다쳤다고 하면 자기 스스로 병원에 가면 되는데, 그러한 사람은 아직 이웃이 누구인지 표시를 낼 수 있는 재료로서 적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즉 "에이, 재수도 없어. 하필 이런 곳에서 강도를 다 만나다니, 119에 빨리 가야겠다" 라고 하면, 아직 이웃을 드러낼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강도를 만나도 너무 심하게 만나서 그만 자기 몸이 박살이 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이웃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답변을 하시면서, 그 이웃을 설명하기 위해서, 우선 이웃이 파생되고 생산이 되는 중심인물부터 새로 설정한다는 것이다.

그게 누구인고 하니, 아무런 대책이 없는 사람, 자기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희망을 가지거나 기대를 할 수 없는, 즉 "내일이 되면 내 인생을 이렇게 꾸려가야지" 라는 여지가 전혀 박탈이 된 사람인데, 모든 것이 다 말이다. 그렇게 되면 인생은 그만 종을 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은 율법사를 보고 "그것은 니가 할 질문이 아니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런 질문은 모든 것이 다 박탈이 된 사람, 율법을 지키고 말고 할, 율법에 대해서 물을 입장에도 놓여있지 않는, 자기 몸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는데 무슨 율법이냐는 말이다.

그냥 일방적으로 얻어맞고 또 얻어맞은 사람인데, 맞아도 너무 많이 말이다. 그래서 도저히 자기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것을 철학적 용어로는 '무(無)' 라고 할 수가 있는데, 자기 것은 전혀 없다는 말이다. 누가 자기 몸을 가져가면 그 사람의 것이 될 정도로, 그러니 자기 것은 이제 완전히 끝이 났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게임오버' 라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강도와 강도를 만난 사람의 관계를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점을, 그것을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강도를 만났다는 것은 누가 때렸는가? 강도가 그렇게 했는데, 그러니 강도는 나쁜 놈이고 강도를 만난 사람은 억울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 이 나쁜 강도야, 어서 와서 빌어라 !!

그러면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어느 쪽에 서야 하겠는가? 강도를 만난 사람의 명예를 회복하는 차원에서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셔서, 그렇게 사람을 해치고 강도 짓을 한 사람들을 한꺼번에 다 잡아서, 율법에 의하면 그 빼앗은 돈에서 단 한 푼도 축내지 않고 원금에서 20프로를 더 가산해서, 정신적인 위로금으로 말이다.

그렇게 강도가 천사들에게 의해서 붙들려와서는, 강도를 만난 사람 앞에 꿇어앉아서 "선생님,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라고 하면서, 치료비를 다 대주고 빼앗은 돈도 둘려주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생각하기에 하나님다운 모습이 아니겠느냐고 여긴다는 것이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누가 자기 집안에 사기를 쳤다고 하면,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는데 왜 이런 어려운 일이 일어납니까?" 라고 여길 때, 우리가 짐작하고 있는 우리의 예상된 하나님의 자비의 코스는 어떠하겠는가?

사기를 친 그 인간이 가던 길에서 천사를 만나든지 해서 핸들을 돌려서 자기 집으로 와서는, "제가 선생님께서 성령을 받아서 믿음이 그렇게 좋은 것을 미처 몰라봐서, 하나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미처 알지를 못해서, 그래서 제가 겁도 없이 선생님의 돈이 하나님의 돈일 줄도 모르고 가지고 갔습니다. 그래서 여기 선생님의 돈이 있고, 미안해서 제가 20프로를 더 얹어서, 그 곱으로 제가 드리고, 선생님이 믿는 기독교로 개종을 하겠습니다" 라는 시나리오를 생각하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딩동댕!)

여러분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은근히 라도 말이다. 분위기를 보니 전혀 아니라는 표정인데, 그러면 저 혼자 그런 생각을 한 것 같은데(ㅋㅋ), 바로 그러한 하나님을 율법사는 자기 몸을 다해서 목숨을 다해서 마음을 다해서 지키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율법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자기는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그리고 자기는 존중을 받아도 당연한 존재인 것을 염두에 둔 채로 율법을 언급했고 하나님을 언급했고, 그리고 이웃을 언급했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잘난 자기가 율법까지 지켜서 지금보다 더 향상된 잘난 존재로서 드러나면, 그것이 곧 하나님과 자기의 좋은 거래관계라고 여긴다는 말이다.

◈ 인간들이 생각하는 정의로운 하나님은 없어 !!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율법은 무엇인가? 아예 율법사의 말은 듣지도 않고, 처음부터 강도를 만난 사람부터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강도부터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말이다. 강도는 예수님의 이야기에서 빠져버리는데, 그러니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던 정의로운 하나님은 없다는 것이다.

지금 그 말을 하기 위해서 이렇게 힘들게 왔는데, 이것을 정말이지 이것을 마음에 담아서 하고 싶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의 모든 철학이나 종교나, 윤리와 도덕이 모두 다 뭐라고 하는가? "하나님은 선한 사람은 지키시고, 악한 사람은 벌을 내리신다" 라고 하는데, 그런 정의감 속에서 나름대로의 윤리와 도덕을 펼친다는 것이다.

어떤 책이나 학자가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타고난 품성 가운데는 무엇이 있는고 하니, 일단 자기를 착한 사람이라고 간주하고, 자기를 지켜주는 하나님이라야 정의로운 하나님이라고 하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을 믿고 기도를 하면서 나름대로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기도를 하지 않는 나쁜 놈들은 벌을 받고, 기도를 많이 하는 자기는 복을 받는다고 하는, 그런 생각을 교인들이 교회에 나오면서 모두 다 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 생각을 마음 가득 가득히 끌어않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에는 그런 하나님은 빠지고 없는데, 즉 그런 상식적인 하나님은 없다는 말이다.

◈ 강도를 만나고, 또 살려달라고 빌고 !!

우리가 가장 되지 싫은 게 무엇인고 하니, 얻어맞을 때는 다 얻어맞고 보상은 전혀 없을 때인데, 즉 자기 것은 모두 남의 것이 되고, 자기가 왜 태어났는지 모를 정도로, 마치 구약의 욥과 같이 말이다. 그냥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는데, 강도가 와서 사과도 전혀 하지 않고 말이다. 강도를 만나서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자기 몸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가 '살려주세요' 라고 하는 처참한 지경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도대체 자기가 무슨 저주를 받았기에, 강도를 당하고 살려달라고 하는, 그런 비참하고 빌어먹는 인생을 살아가느냐는 것이다. 자기도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보란 듯이 남에게 베풀어가면서, 그렇게 자기 잘남의 티를 내면서 살아가고 싶은데 말이다. 강도가 자기와 무슨 억한 감정이 있는지, 아무런 감정도 없는데 그런 일을 당하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던 하나님 상(象)을 완전히 다 뜯어내어야 하는데, 하드디스크를 포맷을 하듯이 말이다.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하나님인데, 분명히 구약에서 그렇게 이야기했지만 사람들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면, 그러면 이웃이 누구인지 묻지도 말라는 것이다. 전혀 물을 자격도 안 되고 그럴 잽도 안 된다는 말이다.

◈ 1번, 제사장 !!

아무튼 그렇게 강도를 만난 사람이 있었는데, 첫 번째로 누가 그 옆을 지나갔는가? '제사장' 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 제사장의 경우에, 길을 가는데 그만 아픈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지금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과 뭔가 관계가 된 사람인데, 그리고 하나님께 예배를 들여야 한다는 것은 본인의 구원만 관계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종교적인 서비스를, 즉 같이 경배하고자 하는 그 당시의 유대인들의 의식과 같은 것을 반영해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볼 것은, 이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그 옆을 제사장이나 레위인이나 사마리아인이나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다고 하면, 그래서 그만 죽고 말았다고 하면 이 강도를 만난 사람이 어떤 자기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가? 없는가?

그럴 권리는 없는데, 그렇다고 하면 이 강도를 만난 사람이 제사장을 보고 "어이 제사장 양반, 당신은 하나님을 경배한다고 하면서 실천적인 이웃사랑을 하지 않는가?" 라고 요구할 권리가 있는가? 역시 없다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가 알아야만 하는데, 즉 "어이 목사, 당신은 요즘 예배를 드리기에 바빠서 나의 아픔을 모르지? 그러니 당신은 하나님에게 저주를 받을 거야" 라고 악담을 할 수 있는 권리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나가는 사람의 발자국 소리를 들은 것만으로 고마운 줄로 알아야 하는데, 아무도 찾아오지 않으면 어떻게 할건데, 그 고개가 남태령인지 곰배령인지 몰라도 말이다. 강도를 만난 것 자체가 정말 재수가 없는 일인데, 거기에 또 무슨 요행을 바라느냐는 것이다. 왕창 재수가 없어서 소리소문도 없이 사라져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지나가는 사람이 하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은근히 기대를 했겠지만, 그런데 그냥 가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픈 사람을 또 다시 밟는 것과 같은 것인데, 즉 기대를 했는데 그 기대가 무너질 때, 차라리 지나가지 않은 편이 더 좋았다는 것이다.

◈ 2번, 레위인 !!

그런데 그 다음에 또 지나가는데, 이번에는 예배를 드리는데 보조역할을 하는 '레위인' 이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예배를 드리는 주최측인 제사장이 지나갔고, 두 번째로 시다인 레위인인 지나갔다는 말이다. 그렇게 둘 다 지나갔는데, 즉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그냥 지나갔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인고 하니, 그 두 사람이 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만 무엇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인가?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라" 라는 말씀은 구현하지 못한 채로 예배를 드리기에 바빴다고 하면, 그 예배는 하나님께 도달이 되겠는가? 없는데, 즉 가인의 제사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면 도달되지 않는 예배를 왜 드리는가? 그 동네도 역시 한 통속인데, 율법사도 그렇고 말이다.

◈ 강의를 처음부터 다시 !!

강의를 처음부터 다시 해보면, 예수님께서 산상설교를 하시니 바리새인들은 "제법 괜찮은 말을 하네. 권세가 있는 말을 하네" 라고 보았는데, 하지만 하나님은 예수님만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비추이는데, 즉 하나님을 대신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는데, 어제도 그런 설교를 했는데, 즉 의인을 죄인으로 바꾸어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오로지 예수님의 입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소리를 듣게 되는데, 그런데 사람들이 그 예수님을 피해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면 그 하나님이 과연 진짜 하나님이 맞겠느냐는 것이다. 그런 하나님은 결코 진짜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면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믿으면 되지 않느냐고 할지 몰라도, 그것도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다고 하면, 자기가 강도를 만난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래야 강도를 만난 자로서 그 이웃이 생기니 말이다.

그래서 그렇게 강도를 만나려고 하면, 친구에게 자기를 때려달라고 부탁을 하든지 해서 자기가 얻어 터져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상해보험을 잘 넣어서 1억 정도는 보상금으로 타고 말이다. 참고로, 상해보험은 보상이 하나밖에 되지 않으니, 하나만 넣으면 된다는 것이다. 물론 보험사기로 큰집에 들어갈 수도 있지만 말이다.

아무튼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친구에게 얻어맞고 해도, 그것은 재수가 없어서 강도를 만난 것이 아니고, 자기가 의도적으로 계산해서, 하나님이 거기에 들어오기를 은근히 기대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면 자기가 하나님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주어진 모든 율법들은 "니가 왜 선악과를 먹었지?" 라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주신 것인데, 즉 인간자체가 문제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보고, 자기가 괜찮은 인간임을 확인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 3번, 선한 사마리아인 !!

이제 강도를 만난 자에게 세 번째로 등장한 사람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인데, 이런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들이 아주 싫어하는데, 왜 그런고 하니까, 이들은 하나님의 법인 율법에 의하면, 예배를 드릴 자격이 애초부터 박탈된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사마리아 사람과 강도를 만난 사람은 어떤 점에서는 동급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강도를 만난 사람은 몸도 빼앗기고 돈도 다 빼앗기고, 그렇게 모든 것이 다 박탈된 사람인데,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저 놈들은 이방인들과 피가 섞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에서 이미 배제된 자이다" 라는 것이다. 즉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경우에, 물론 자기들끼리의 이야기이지만, 자기들과 하나님이 통하는 관계에서도 사마리아인을 떨어져나갔다는 것이다.

◈ 주님께서 지키는 말씀 속에 합류가 되도록 !!

그런데 예수님은 율법사에게 뭐라고 하는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라는 그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그것을 살펴보자는 것이다. 그러면 결론부터 내려보면, 말씀은 우리가 지키는가? 그게 아니면 하나님께서 환경을 조성해서 우리를 보고 지키게 하시는 것인가? 주님께서 지키는 말씀 속에 우리가 합류가 되도록 조치를 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나중에 열매로 맺어지면 결국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결코 자기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구원은 자기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만들어놓은 구원에 끌려들고 말려 들어갔다는 것이다.

마치 돌아가는 레미콘 차량의 자갈과 모래처럼, 그 빙글빙글 돌아가는 통속에 들어있는 자갈과 모래는 그야말로 빼도 박도 못하는데, 그 안에서 이리저리 마구 부딪치면서 말이다. 그렇게 시멘트와 물이 같이 잘 섞여서 단단한 콘크리트가 된다는 것이다.

◈ 내 것은 하나도 없어 !!

그와 같이 예수님이 하시는 구원에 우리가 말려 들어간 것인데, 그러니 그 중의 어느 것을 하나 골라잡아서 "이것은 내 것이다. 내가 지켰다" 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그 어느 것도 하나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네버, 즉 전혀 없다는 것이다. 즉 "이 안경은 내 것이고, 책도 내 것이다" 라고,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물론 자기 것도 아니고 옆에 있는 사람의 것도 아닌데, 그러니 가져갈 생각일랑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 사람의 것도 아니니 말이다. "이 안경은 내 것이 아니다" 라고 하니까, 상대방이 "그러면 나에게 달라" 라고 하는데, 그것도 역시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통장도 자기 것이 아닌데, 물론 도둑놈의 것도 아니고, 그러니 도둑놈이 훔쳐서 가면 신고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돈을 주신 것이고, 건강을 주신 것이고, 집도 주셨다는 말이다. 집에 있는 강아지도 물론 그렇고 말이다. 그렇게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구원작업에 우리가 놓여있음을,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무엇인고 하니, "내가 말씀을 지킨다" 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렇게 자기가 지키게 되면 그 보상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오늘날 한국교회나 그 당시 유대교나 똑같은데, 요즘 한국교회가 하는 짓들을 한번 보라는 말이다.

이웃사랑을 한답시고 연말이 되면 어떻게 하는가? 고아원을 방문하고, 바자회를 열고, 그야말로 난리를 친다는 것이다. 이번에 이 동네에서도 역시 하지 싶은데, 아무튼 일년에 두 번씩은 하는 것 같은데 말이다. 가만히 조용히 살면 그게 곧 이웃사랑인데, 그런데 유별나게 이웃사랑을 한다고 하면서, 아예 이벤트를 연다는 것이다.

◈ 적선하세요, 딸랑 딸랑 !!

그래서 12월초만 되면 라면을 끓여먹으면 딱 되는 냄비를 하나 걸어놓고, 나팔을 불면서, 그것도 벌건 계급장까지 달고 말이다. 무슨 아이들도 아니고 말이다. 마치 중들이 '적선하세요' 라는 것과 똑같은 짓을 하는데, '구세군' 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그렇게 해서 실적이 좋으면 승진을 하고 말이다.

그것은 바로 19세기말에 영국이 자본주의 초창기에 자본가들의 착취가 너무 심하니, 사회복지대책의 일환으로 생긴 것인데, 교회가 그런 일을 대신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일종의 최초의 사회복지단체라고 할 수 있는데, 기독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냥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면 그게 곧 이웃사랑인데, 왜냐하면 자기는 거기서 모든 것을 다 박탈을 당한 입장이니 말이다. 자기 것이 아무 것도 없고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라고 하는, 그러니 자기 명의로 집이 열 채가 있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셨는데, 왜 주셨는고 하니,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라는 성취차원에서 주셨는데, 우리는 거기에 말려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면 흠도 없고 티도 없는데, 왜냐하면 말씀을 잘 지켰기 때문에 말이다. 사실은 말씀을 잘 지킨 것이 아니라, 말씀을 잘 지킨 것에 우리가 말려들어서 흠도 없고 티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이 임한 사람을 두고서 뭐라고 하는가? 거룩한 자들, 즉 '성도' 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그 주체가 성령이니 말이다.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드디어 선한 사마리아인이 왔는데, 사실은 도와주지 않아도 되는데, 그냥 가도 강도를 만난 사람은 욕을 할 하등의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이미 모든 것을 다 빼앗긴 자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런데 그 사마리아인이 도와줌으로서, 비로소 '이웃' 이라는 것이 성립된다는 것이다.

◈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여기서 예수님은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라고 하시는데, 여기서 강도를 만난 것이 먼저 나오는데, 그러니 강도를 만나지 않으면 이웃이라는 개념이 발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날마다 성도를 강도를 만난 자의 그 자리에 집어넣으시는데, 그래야 비로소 이웃이 보인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 이웃이 과연 강도를 검거한 지구대 경찰이었는가? 예수님의 말씀에서 지금 계속해서 강도 이야기가 빠지고 없는데, 그런데 실제로 그 사람을 다치게 한 것은 누구였는가? 정의로운 대한민국에서는 누구를 벌해야 하는가? 제사장이 한 것도 아니고, 레위인이 한 것도 아니고, 선한 사마리아인이 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강도가 그렇게 했는데, 그러니 그 원인자를 찾아내어서 처벌하는 것이 맞는데, 그게 정의로운 것 같은데, 그런데 예수님의 이웃사랑에는 그런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자기 복수를 주님이 대신해서 해주신다고 해서 정의로운 것이 아닌데, 우리 자신이 곧 하나님의 원수인데, 누가 누구에게 복수를 한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은가?

◈ 악의 발전과정이 곧 역사 !!

어제 오전시간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창세기 4장을 하면서 "인간의 본성이 무엇인가?" 라고 했을 때, 라멕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거기에 "가인을 위해서는 벌이 7배이고, 라멕을 위해서는 벌이 77배다" 라고 되어있는데, 은근히 우리에게는 라멕과 같은 요소가 있다는 말이다.

(창 4:23)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창 4:24)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그런데 이 성경말씀에 라멕 이야기가 왜 등장하는고 하니, 악이 어떻게 진화하고 발전하는지,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류의 역사는 악의 진화과정을 보여준다고 할 수가 있는데, 즉 악의 발전과정이 곧 역사라는 말이다. 우리가 역사를 좋게 볼 수가 없는데, 악이 어떻게 변형하고 발전하는지 보여주는데, 결국 마지막 역사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까지 간다는 것이다.

◈ 악이 무르익어야 !!

이것은 저의 이야기가 아니고 예수님께서 포도원 비유에서 말씀을 하셨는데, 어떤 주인이 자기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맞기고 멀리 떠났는데, 그래서 자기 종들을 농부에게 보내니 그들을 때리고 죽이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인이 자기 아들을 보내니, 주인의 아들이라고 봐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인의 아들이 상속자이기에 그 주인의 재산이 탐이 나서 죽였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이다. 모두 다 박살을 내고 만다는 것이다.

(마 21:33) 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마 21:34) 실과 때가 가까우매 그 실과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마 21:35)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마 21:36)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저희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마 21:37)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가로되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마 21:38)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
(마 21:39)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어쫓아 죽였느니라
(마 21:40)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마 21:41) 저희가 말하되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실과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열매를 따려고 하면 그 열매가 숙성되어야 하듯이, 심판도 죄의 근원이 들추어져야 실행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때까지 심판은 대기하고 있는데, 우리는 성질이 급해서 "주님은 왜 빨리 오시지 않는가?" 라고 하는데, 주님은 타이밍이 맞아야 오신다는 것이다. 악이 악으로 숙성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주님도 한 성질을 하시는데, 무조건 참고 기다리시는 분이 아니라는 말이다.

◈ 종말은, 주님의 말씀이 사라지는 바로 그때 !!

그러니 정확한 때가 되면 주님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재림을 하시는데, 그 시기가 성경말씀에 나온다는 것이다. 읽다가 보면 모르고 그냥 지나갈 수도 있는데 말이다. 그것을 지금 알려드리겠는데, 그것이 누가복음 21장에 보면 있다는 것이다.

21장 34절과 35절에 보면,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라고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인해서 마음이 둔하여지는 그때인데, 즉 이 세상의 모든 소식에 있어서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의 다 없어지고 사라지게 될 때, 그때가 곧 말씀대로 이 세상을 심판할 그 날이 무르익은 때라는 것이다.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해져서, 십자가 복음이 사라지게 되는 말이다.

(눅 21:29) 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눅 21:30) 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나니
(눅 21:31)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줄을 알라
(눅 21:3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리라
(눅 21:33)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눅 21: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눅 21:35)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어제 낮 시간에 "율법이 있는 자는 율법으로 망하고, 없는 자는 없는 대로 망한다" 라고 했는데, 즉 이래도 망하고 저래도 망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망하는 날을 기다릴 수밖에는 없는데, 하지만 성도는 성령에 의해서 강도를 만난 자인데, 그러니 우리는 이미 망했다는 것이다. 망했는데, 그런데 이렇게 난로를 피우고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것이 없고 모든 것을 박탈을 당해야 하는데, 그런데 지금 이렇게 가지고 있으니 웬 은혜이냐는 말이다.

◈ 강도가 아닌, 그 이웃 !!

그렇게 강도를 만난 자의 입장에서 이웃이 누구인지, 그 이웃이 보인다고 하면, 처음으로 다시금 돌아가서, 결국 예수님께서 왜 강도에게서 언급하지 않는고 하니, 즉 강도와 강도를 만난 자가 서로 엮이지 않는고 하니, "이웃이 누구인가?" 라는 그 말씀이 성취되면 그것으로 주님은 족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강도를 만난 자로 사용이 되었던, 아니면 멀쩡하게 사용이 되었던 간에, 아무튼 성도는 주님의 뜻에 따라서 각각의 쓰임새가 있다는 것이다. 서로가 얼굴이 다르고 지문이 다르듯이 말이다. 어떻게 사용이 되던, 거기에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라는 말씀을 이루는 용도로서, 적재적소에 그 상황과 시기에 따라서, 나라에 따라서, 민족에 따라서 각각 다 쓰여진다는 것이다.

◈ 진정한 이웃은 '예수님' !!

물론 공통점은 있는데, "나의 진정한 이웃은 예수님밖에 없다" 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곧 강도를 만난 자이기에 말이다. 강도를 만난 자는 그 어떤 것도 자기 힘으로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 전혀 없는데, 그것을 염두에 두고 제가 처음에 뭐라고 했는가?

강도를 만난 자가 그 강도에게 조금 맞아서 자기 힘으로 일어나서 병원에 갈 수 있는, 그래서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와도 예배를 드리러 가라고 하면서 다 보내고, 그리고 사마리아인이 와도 그 사람의 길을 계속해서 가라고 하는, 그런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웃이라는 분이 등장해서 100프로 다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노새에 태워서 여관에 데리고 가고, 그리고 나중에 비용이 더 덜면 그것까지 다 해결해주겠다는 것까지도 누가 해준다는 말인가? 이웃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다 해주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개혁주의 신학은 어떠한가? 일단 예수님의 피를 믿고 구원을 받았으면, 그 다음에는 자기가 자기 힘으로 일어서서, 그리고 자기에게 필요한 치료비는 자기 힘으로 벌어서 감당해야 한다는 식인데, 그게 곧 성화론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까지는 믿지만, 그 다음부터는 자기의 행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처음에 한번만 도와주면 그 다음에는 자기가 알아서 행함으로 해야 영광이 된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얻어먹으면 너무 염치가 없는 게 아니냐는 말이다.

◈ 성도는, 염치가 없어도 너무 없어 !!

하지만 우리는 염치가 없어도 너무 없어야 하는데, 충분히 없어야 하는데, 갈수록 그 정도가 더욱 더 심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잘난 것 따로 있고 못난 것 따로 있었는데, 그런데 이제는 전부가 다 못한 것밖에 없어야 한다는 말이다. 못난 것 말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면, "소고기를 사먹으면 뭐하겠노? 자식이 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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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