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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동일성 121221강의에스겔

동일성 121221

이름 : 이근호(IP:119.18.69.144)

서경수(IP:121.♡.190.236)

13-01-08 17:59

광주 강의(2012. 12. 21) 37-1

에스겔 36장 22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이 구절에서 주목해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 )를 위함이 아니요” 라고 했는데, 여기 괄호에 무엇이 들어갑니까? ‘너희’ 결국 우리들이죠. 우리를 위한 하나님은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 사정을 봐주는 하나님은 없어요. 피조물을 위한 창조주는 인간들이 자기를 투사해서 지어낸 가짜 하나님입니다.

원숭이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원숭이 모습, 지렁이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지렁이 모습, 인간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인간의 모습. 그러니까 이것은 진짜 하나님이 아니지요. 종교라는 것이 결국은 자신이 스스로를 속이는 겁니다. 밤에 유리를 보면 유리를 통과해서 그 너머에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유리에 되비친 자신을 보게 되지요. 이처럼 인간이 생각하는 신은 이런 것입니다.

자신이 자기 그림자를 보고 놀라는 식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하는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소리를 교회에서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분명히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라고 했잖아요. 그럼 날 위하지 않는다는데, 그런 신과 관계를 맺을 하등의 이유가 없지요? 자기한테 이익이 없다는데 그 신을 왜 믿습니까? 결별해야지요.

신앙은 항상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나는 당신과는 안 놀아!” 바로 이 자리를 하나님이 마련해 주십니다. ‘날 위해주는 신이 아니라면 나는 그 신을 믿을 이유가 없다’는, 그래서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가서 그곳에서 나오지 않는 겁니다. 인간 본래의 속성에서 나오지 않고 그냥 그 자리에 움츠리고 있도록 하나님이 조치하십니다.

이럴 때 “나는 당신과는 안 놀아!”가 나오고, 여기에서 무엇이 등장하는가 하면, 집단 개념이 등장하는데 이것을 ‘너의 이름’이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그 뒤에 나오는 말이 뭡니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이게 어려워요. 왜 어려운가 하면, 사람에게 이름은 한 사람에게만 해당이 됩니다.

목요일 아침에 용인에 있는 어떤 분을 만났어요. 그분이 용인에서 우리교회까지 찾아오셔서 너무 고마워서 답례하듯이 찾아갔는데, 그분과 대화를 나누는 중에 “곧 둘째 아이가 태어나는데 이름을 좀 지어주세요”라는 부탁을 받고 제가 차를 타고 가는데 ‘명성아파트’가 보였어요. 그분 성이 최씨인데, ‘최명성’으로 지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이름에 다 이응이 들어가니까 부르기도 쉽고.

그래서 “최명성 어떻습니까? 일단 리스트에 올려놓으세요. 다음에 또 생각나는 것이 있으면 말씀 드릴게요.”라고 했어요. 각자에게는 따로 이름이 있지요. 두 명이 한 이름을 공유하는 법은 없어요. 모든 개별적인 사물의 이름은 단 하나만 지칭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을 누가 관리했는가 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관리했어요. 여기에서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무지 풀리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이름은 한 사람에게 해당되는데 하나님의 이름이 관리하게 되면 하나가 아니고 다수가 됩니다. 그럼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아이가 4명이면, 동서남북으로 이름을 짓든지 춘하추동으로 하든지 각자의 이름을 지어야 되는데, 4명이 ‘온달’이라는 이름을 같이 사용한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온달아!”하고 부를 때 4명이 동시에 대답할 것이 아니냔 말이지요.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신자 한 사람에게 주어진 이름이 아닙니다.

출애굽 할 때 남자만 몇 명이 나왔지요? 60만이죠. 여자와 아이를 합하면 100만이 훨씬 넘는 다수에 오직 하나의 이름만 거기에 붙여집니다. ‘이스라엘’인데, 이스라엘에 복수 표시로 s를 붙이는 것이 아니고 그냥 단수 취급을 하면서 “내 아들아!”라고 합니다. “내 아들들아!”가 아닙니다.

분명히 우리 쪽에서 보면 여러 사람인데, 하나님은 그것을 단수로 취급하십니다. 복수를 단수 취급 할 때는 한 경우 밖에 없어요. 본드로 다 붙이는 겁니다. 여러 개의 벽돌이 있으면 시멘트로 발라야 건물이 되듯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본드로 붙이면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이 대화할 때 너의 이름, 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A와 B가 관계성을 가지려면 주의 이름을 집어넣어서 상대를 만나는 겁니다. 이렇게 되어야 공동체가 됩니다.

북한에서 ‘동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동사무소에 찾아가서 “직원 동무!”하고 부르고, 영화배우를 만나면 “배우 동무!” 이렇게 부릅니다. 뒤에 ‘동무’라는 것을 붙임으로 A와 B가 서로 소통을 합니다. A와 B의 공통점을 뽑아보면 ‘동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이데올로기(사상)에서 나온 것이지요.

“남성 동무!” 혹은 “여성 동무!” 어디나 ‘동무’를 붙이는데, 이 ‘동무’는 A라는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고 B라는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닙니다. 네가 만든 것도 아니고 내가 만든 것도 아닌데, 즉 나에게서 나온 것으로 너를 상대할 수 없는 사회가 사회주의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이 상대할 때, 내가 호명해 주면 비로소 그는 나에게 와서 하나의 의미가 됩니다. 호명할 때 내가 필요해서 B를 부르는데, B가 왜 나에게 필요한가 하면, 이 사회에서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저 사람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내가 호명을 한 거예요.

그렇다면 이 사회에서 내가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나보다 사회라는 구조가 먼저 결정되어 있지요. 그러면 나는 X, Y좌표처럼 어떤 구조에서 밀고 당기는, 지하철에서 사람이 많으면 내 의지와 상관이 없이 출입구에서 밀려 안쪽으로 들어가게 되지요.

사회주의가 아닌 자본주의 사회인데도 불구하고 나는 내 원대로 B를 선택할 수 없습니다. C가 아니고 왜 B인가 하는 것은 나로 하여금 나 되게 만드는 더 큰 지배 세력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사회주의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자본주의에도 있는 겁니다.

사극을 보면 참 답답하지요. 쌍놈이니, 양반이니 따지는 것을 보면 정말 짜증이 납니다. 임금이라고 마음대로 명령을 내리고, 힘없는 백성은 억울하게 임금 명령에 종복하고.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본인이 싫으면 거부하면 되는데 왜 그것을 거부하지 못하지?” 참 이해가 안 됩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절로 돌아가서 이런 이야기를 해 보세요. “너는 뭘 믿고 그렇게 함부로 말하느냐?” 이렇게 나올 거예요. 시대라는 것은 이미 뭔가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 있어요.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산다.” 이렇게 속 편하게 이야기하는데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내 주변 사람들이 요구하는 대로 나는 거기에 맞춤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경쟁과 비교로 우리는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남이 나를 호명해 줄 때, 호명당해야 우리는 사회인으로 인정받게 되는데, 호명해 줄 때 ‘나는 그 사람에게 어떤 가치가 있어서 부름 받을까?’ 여기에 골몰하며 살아갑니다. 바로 이 본드, 우리가 원치도 않았는데 이미 우리에게 붙어있는 이것.

제가 공동체를 이야기하는데, 이 공동체는 국가 공동체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공동체는 혈육입니다. 자식이 아무리 말썽을 부려도 부모는 자식을 버릴 수 없습니다. 아주 특별한 사람도 가끔 있습니다. 엄마가 칼로 자식을 죽이는 경우도.

그러나 보편적인 가정은 자식들이 자기 이름으로 살 수 없고 아버지 이름으로 삽니다. 이 말은, 내가 앞으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윤리, 도덕성에 대한 기본 모델을 제공하는 쪽이 아버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살 때 ‘내 아들답다.’고 규정을 합니다. 그래서 자식은 어떤 행동을 할 때 ‘내 행동을 보고 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할까?’를 고려치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혈육 중심을 비혈육 중심으로 바꿉니다. 혈육 시대는 아브람 시대입니다. 아브람 시대에 이스마엘이란 자식을 낳게 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시대에는 이스마엘이 소용 없고 대신 이삭을 낳는데, 이 아들은 원래 있을 수 없는 자입니다. 혈육에는 없던 자인데 하나님의 약속이 개입되니까 아브라함이란 혈육은 이용만 당했을 뿐이고 없는 자식이 새로 생겼을 때 이 이삭이란 자식은 혈육 공동체와 분리된 자로 이 세상에 출몰했습니다.

여기서 질문을 해 봅시다. 이삭은 있을 수 없는 자이지만 결과적으로는 태어났잖아요? 그러면 이삭이 나은 자식은 몽땅 혈육과 관계없는 자일까요? 아니지요. 이삭이 태어날 때는 비혈육적으로 태어났지만 하나님은 다시 이삭을 혈육으로 돌려버립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내가 12월 20일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오늘은 12월 21일입니다. 그러면 어제 믿은 것이 오늘 효과가 있을까요? 효과 없습니다.

왜 그런가? 인간은 어제 잘 믿은 것을 오늘 인수 받아서 그렇습니다. 그러면 나로 하여금 하나님과 연결하는 본드(접착제)는 하나님이 주신 본드가 아니고 어제 내가 잘 믿었다는 자신의 훌륭한 신앙심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체해서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면 그 신앙심의 주인공은 누가 되겠습니까? 바로 나 자신이지요.

이렇게 되면 내가 나를 믿고 내가 구원 받는 식인데, 이것은 하나님이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내가 거울을 보며 투사한 것은 지금 은혜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고 어제 잘 믿은 내 모습을 상상해서 그것을 믿으니까 그게 바로 자기중심의 새로운 역사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거예요.

내가 역사의 주인공인데 자진해서 이 주인공의 자리를 포기할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자기가 자신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만약 내가 지옥을 가도 “야, 힘들지?” 하면서 자기가 자기를 위로합니다. 지옥에 있는 나를 내가 위로해 주는 거예요. 나 외에는 날 위해줄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유도 근거도 필요 없어요. 당연하니까.

이것은 예수 믿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주님을 알고 삼위일체를 믿고 목사가 되어 복음을 외치고 해도 인간은 늘 자기 자신에게도 돌아갑니다. 그런데 고맙게도 ‘역시 나는 최고야!’라는 그 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그 작업을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 하십니다.

제가 강의 서두에 ‘하나님의 이름’을 무엇으로 설명했습니까? 본드(접착제)와 같다고 했지요. 인간들의 세계에 있는 본드는 내가 그것을 쥐고 붙이고자 하는 것을 붙이면 되잖아요. 기도를 해서 하나님과 붙고, 열심히 종교적인 몸짓을 해서 하나님과 붙은 식으로. 즉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면 우리는 그 은혜를 받고 난 후 그 은혜를 나의 것으로 귀속시키는 작업을 살아있는 내 육체의 욕망이 그렇게 해버립니다.

주님의 은혜가 함유되어 있는 나의 질이 은혜를 받지 못한 너의 질보다 훨씬 우수하다고 그 우수한 나를 믿게 됩니다. 그렇게 해야 내가 역사의 주체가 되니까요. 이 역사는 시간성을 갖고 또 다른 사람과 비교하게 됩니다. 이것을 좋다, 나쁘다고 따질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마저 나를 위한 나의 소유로 만드는 그 작업을 내가 저주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그냥 인정해야 합니다. 불교에서 ‘자기를 부인해라.’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그 자기를 부인해라.’ 그 다음은 ‘자기를 부인하는 그 자기를 부인한 자기를 또 부인해라.’ 무한 회귀. 끊임없이 가는 거예요.

무한 회귀의 밑바탕에 뭐가 있는가 하면 시간판이 깔려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간판은 언제 느끼는가? 희망이 있으면 시간을 느낍니다. ‘지금 내게 이런 희망이 있는데 언제쯤 이 희망이 성취될까?’ 할 때 비로소 갑자기 시간판이 깔립니다. 깔리면 그 출발점에는, 이 역사의 주인공은 내가 희망을 던졌으니까 내가 주인공이 되어서 그 다음부터는 저 높은 곳까지 달성하는데 어떤 방법을 사용하면 단시간에 저비용, 고효율로 이룰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되고, 그것을 위해 행동에 나서게 되면 그 역사의 모든 시간 위에 또 하나의 소스가 발립니다. 그 소스는 행함의 소스입니다.

그 행함이 하나하나 모여서 최종 목표를 달성했을 때, 내가 처음부터 계획했던 그 모든 이음새에는 나의 애씀 외에는 아무것도 끼어들 수가 없습니다. 그 전부는 내 이름의 영광입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이끌어 가십니다. 그렇게 하다보니까 결국 사회라는 모순을 만들어요. 인간은 분명히 집단 속의 인간인데, 집단 속에 있으면서도 머리를 내밀어요. 머리를 내밀 때 이 머리는 누구의 머리일까요? 나의 고개(머리)를 내밀어서 내가 속한 집단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집단에 이용당하면서 자존심은 있어서 내가 저 집단을 어떻게 이용할까 생각하는 이 힘의 대결상태, 이게 바로 모순입니다.

공동체에 속해 있으면서 행동하는 것은 자신이 마치 신이 된 것처럼 공동체를 내려다봐요. 그러다가 누가 불쑥 나타나면 고개를 쏙 넣어 자신을 숨기다가 또 살짝 고개를 내밉니다. 실제로 그래요. 중고등학생이 동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제가 꾸중을 하면, 혼자 있을 때는 조용히 담배를 끕니다. 그러나 2명 이상이면 반항을 합니다. 그때는 2명이 합세하기 전에 먼저 한 놈의 뺨을 때리면 상대에게 위압되어 담배를 끕니다.

미성년자는 담배를 구입할 수 없고 피우면 안 된다는 것을 본인이 알고 있어요. 그러나 인간은 금지한 것을 어기는 재미가 있기에 그런 일을 합니다. 만약 바람피우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지 않았다면 별로 재미가 없어서 바람을 안 피웁니다. 같은 행동을 해도 주변에서 주시하는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달라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언약으로 구원하기 위해서 똑같은 인간들을 모이게 한 거예요.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들을. 이 인간들 중에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그것은 핑계에 불과하고 사실은 하나님을 잘 믿는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나의 자랑거리를 남기려고 하는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그런 식으로 몰아갑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훌륭한 전략입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게 되면 그 예수는 진짜 예수가 아닙니다. 왜냐? 믿는 주체가 누구입니까? 내가 믿었잖아요. 나로부터 출발하면 그 예수는 진짜 예수가 아니고 “내가 예수 믿으면 죽어서 천국 갈 것이다.”라는 소망이 있는데, 여기에는 오직 내가 나를 위해 뭔가를 하려는 욕망이 개입되어 있지요. 이런 믿음은 없어요.

교회에 가보면 믿는다는 것으로 서로 경쟁을 합니다. 집사 둘이서 서로 누가 오래 기도하는지 시합을 합니다. 저쪽 집사가 아직 기도가 끝나지 않으면 자신도 끝내지 않습니다. 상대가 끝날 때까지 계속 자리를 지킵니다. 왜요? 자신이 더 많이 기도하는 자이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헌금을 해도 자신이 최고 많이 해야 기분이 좋고. 이것은 누구 이름이 더 쌘 힘을 발휘하고 있느냐 경쟁하는 것이지요.

종교라는 것은 내가 시도한 착함이 얼마나 신으로부터 복을 받는 근거가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반대로 해볼게요. 어떤 사람이 사업을 하다가 부도가 났습니다. 분명히 내가 잘못한 것은 부도날 정도는 아닙니다. 술 한 잔 먹고 노상 방뇨한 것으로 사업이 부도가 난 것은 너무 심한 것 아닙니까?

그래서 마누라를 추궁합니다. “당신, 내가 사업할 때 나쁜 짓한 것은 없나?” 자식 학교에 가서 선생님을 폭행한 사건이 있었다. 그러면 이것을 추가합니다. 양적 개념이니까. 그 다음 아들에게 묻습니다. “너 담배 피웠지?” 담배 피운 죄.

어찌했든 내 사업이 부도난 것을 내 잘못 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고 분량적으로 맞추어야 납득이 되니까 이런 짓을 합니다. 나를 납득시키기 위해 나의 죄 지은 양을 다 모으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해놓고, 내가 나쁜 짓을 한 것은 76인데 하나님의 벌은 80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너무 심하게 나를 대하셨다는 이 사고방식. 이것이 신앙과 관계없이 인간 속에 내장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나라를 망하게 합니다. 그러면 이 집단이 흩어집니다. 에스겔 36장 24절에 나옵니다.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라고 했지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망시켜서 각 나라로 흩어지게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크기가 경상남북도 정도입니다. 위에는 시리아. 이쪽은 터키. 여기는 마케도니아, 아가야. 옆에는 이태리. 이쪽은 이란, 이라크. 밑에는 이집트. 이 예루살렘에 있던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멸망당했을 때 주로 어디로 이민 갔겠습니까? 애굽에 제일 많이 갔습니다. 성경에서는 바벨론으로 포로 잡혀 갔잖아요. 실제로 간 숫자는 애굽으로 간 사람이 제일 많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에는 애굽이 제일 잘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하나님께 벌 받기 전에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껍데기고 매 맞을 때 본심이 드러나지요. “우리는 에스겔 말처럼 벌 받아야 마땅해. 바벨론에 포로 잡혀가서 70년 고생해야 돼.” 이럴 줄 알았지요? 중요한 것은 ‘누가 나를 치느냐?’가 아니라 ‘나는 앞으로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밥 먹고 살까?’ 이런 마음이 우선이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이전에 하나님을 섬긴다고 섬겼다면 그 섬김은 본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그 유대 나라를 정치적으로 묶어놓은 사상에 불과한 거예요. 그들이 가진 종교가 그런 것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목사고 어머니가 사모다. 그래서 아이는 교회에 나간다. 그러면 이 아이가 주님을 알고 교회 다니겠습니까? 이 아이가 아는 것은 우리 아버지가 목사니까 나도 믿는 척하는 것이 내 신상에 좋다는 생각을 할 뿐입니다. 그런데 만약 아버지가 목사를 그만두고 중이 되고, 엄마는 가출을 했다면 그 아이가 계속 교회 다니겠습니까?

결국 인간이란 아무리 어르고 달래고 반복적인 교육을 해도 이 교육이 인간의 심정까지 효과가 미치지 않습니다. 인간의 내부는 바뀌지 않습니다. 이것이 미술의 스크래치 기법인데, 바탕에 여러 가지 색을 칠해놓고 그 위에 검은 색을 칠해 놓고 칼로 긁으면 다양한 색이 나오듯이, 우리 안에 있는 것은 주께서 벗겨 주셔야 되는데, 주님이 하시는 일(주님 이름의 기능)은 우리가 감추고 싶은 그것은 드러내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는가? 구원은 인간의 착함이나 악함 때문에 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구원의 방법은 독특해요. 우리가 생각하는 구원은, 구원 받을 우리가 어떻게 구원 받을 일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여깁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죠. 왜? 이웃이 이사를 와서 인사로 떡을 돌렸다. 뭔가 이렇게 베풀면 받는 사람도 반겨주고 이것이 사람과 사람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성질을 돋우어서 그야말로 우리가 맹탕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이번 선거에 그 일을 하신 분이 있어요. 성은 김, 이름은 지하. 이분이 뭐라고 했는가 하면 “안철수는 깡통이다.”라고 했어요. 여기에서 문재인에게 갈 표가 2% 정도 날아갔습니다. 야당 지지자들이 들으면 얼마나 화나는 이야기입니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이것입니다. “너는 너밖에 몰라.” 솔직한 이야기인데 들으면 거북하고 기분 나쁩니다. “너는 백날 교회 다니고 기도해도 너밖에 몰라.” 분명히 옳은 말씀인데 이 소리가 왜 기분 나쁘냔 말이지요. 이것은 우리를 기분 나쁘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방법이 “나는 이렇게 착합니다.” 또는 “나는 이런 실수를 했습니다.” 이런 것을 원초적으로 묻지를 않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살인자가 되어도 지옥 갈 수 없다.” 이유가 뭔가? 사람은 가고 말고가 없어요. 그냥 제자리 뛰기입니다. 마치 런닝 머신 위에서 달리기하는 식입니다. 제 혼자 착하고, 제 혼자 새벽기도하고 난리를 치는데, 그런 일을 하거나 그냥 집에 있으나 자신은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은 원래 그 자리에 있어요.

그래서 주님 말씀이 “그러니 설치지 말고 그냥 네 자리에 있어. 괜히 설치면 네가 뭔가 된 줄 아닌데, 아무것도 아니야.” “하나님은 저를 그렇게 무시하십니까?” 우리를 새삼스럽게 무시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는 방식이 우리가 예상 못하는 방식으로 하는 겁니다. 피로 붓질을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오해를 하는데, ‘피로 붓질을 하게 되면 우리는 마네킹처럼 피가 묻은 채로 천국에 간다. 굉장히 쉽네. 역시 독특한 방법이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빠졌어요. 그냥 마네킹 위에 붓질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강의 초반에 말씀드렸지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혔다고 멸망했습니다. 그래서 본색이 드러났습니다.

뜯어내는 그 면에 피를 발라요. 털 많은 부분에 파스 붙였다가 떼 낸 적이 있습니까? 털 때문에 굉장히 아프지요. 우리는 나의 명예와 위신이라는 것으로 나를 장식합니다. 피자 만들 때 밀가루 위에 각종 재료를 얹고 토핑을 하는데, 이것이 나의 역사입니다. 이것을 뜯어내는 거예요. 주의 이름이 그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안 보입니다. 보고 믿는 것은 불신에 속합니다. 보고 믿는 것은 자기 눈이 정상이란 뜻이기에 주님은 우리 눈을 정상으로 보지 않기에 우리가 보는 것은 불신으로 전환시킵니다. “내가 기도해서 이런 응답을 받았다. 역시 하나님은 살아 계셔.” 이건 신앙이 아닙니다. 기도해도 아무 응답이 없어야 해요. 그 때 나의 기도가 전혀 효과 없음을 깨닫는 거예요. 그와 동시에 나의 소망은 파스 뜯겨져 나가는 것처럼 떨어져 나가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의 소망과 꿈이 다 뜯겨 나갈 때, 방금 뜯긴 그 면적에다 피를 바릅니다. 이것은 죄인과 피의 만남으로 구원이 성립되는 겁니다. [죄인 +피 = 구원]

어떤 사건이 다시 나를 위한 사건으로 되돌아오기 전에, 사람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면 모조리 분노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 내 허락을 받지 않고 일어난 사태기 때문에. 사람은 자기가 개입해야 입에 미소를 띱니다. 그런데 내가 예상치 않은 어떤 일어 벌어지면 화가 나기 마련입니다.

오늘 분명히 7시 30분에 강의를 시작해야 되는데, 함박눈에 내려 차가 막히는 바람에 8시 30분에 시작을 해서 1시간 강의로 끝을 내야 될 상황입니다. 눈이 내린 것은 세상만사가 내 뜻대로 안 되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목사가 버스를 탔다고 그 버스가 길이 안 막히는 게 아닙니다.

나는 내 이름의 명예와 자존심을 위해 이 몸을 바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은 ‘사람의 이름을 위하여 주의 일이 훼손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의 이름은 뭐냐? 너, 나를 부정하고 주님의 능력으로만 서로 이어져 가는 거예요. 그래서 구원 받은 것이 내 믿음으로 구원 받았다고 하면 안 되고, 주의 이름으로 구원 받았다고 해야 합니다. “주님이 하신 일로 구원 받았습니다.” 라는 고백을 너와 내가 같이 만나 나눌 때 이 땅에서 그들은 이미 천국의 삶을 시작한 겁니다.

질문하겠습니다. 여기 소망이 있는데, ‘나는 신앙생활 잘하고 싶다. 나는 예수 잘 믿고 싶다.’ 이것이 소망이 될까요? 소망이 되겠지요. 이것이 뜯겨 나갈까요, 귀한 것이니까 간직되어 있을까요? 뜯겨 나갑니다. 이유는 뭔가? 소망은 반드시 시간판 위에 있습니다. 이 시간판이 문제입니다.

‘지금은 내가 주님을 작게 믿지만 내년에는 잘 믿겠습니다.’ 할 때 무엇이 문제인가 하면, 내가 깔아놓은 시간판이 문제입니다. 그 시간판 위에 어떤 소망을 놓아도 그 시간판 자체를 뜯어내면 같이 뜯겨 나갑니다. “주여, 올해는 제가 나태했지만 내년에는 부지런히 잘 하겠습니다.”라고 하면, 주님은 “네가 내년에 산다는 보장이 있나?” 이렇게 묻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여기서 나의 시간, 나의 역사를 사는데 나의 이름은 다수가 아니고 하나입니다. 비록 나의 이름이 외부에서 왔든 어찌했든 간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일단 나가 되면 여기서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쪽과 그렇지 않은 쪽의 분리가 일어납니다. 여기서 죄가 발생돼요. 분리가 일어나면서 내가 속한 이쪽은 동일성(혹은 동질성)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내가 어디에 속하는가에 따라서 내가 속한 쪽은 내가 사랑하게 되어 있고, 내가 속하지 않은 쪽은 미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한 가족이라도 문재인 찍은 쪽과 박근혜 찍은 쪽이 싸움이 일어납니다. “너는 왜 나처럼 문재인 안 찍었어. 바보같이.” 무시하게 되어 있습니다.

또 있어요. 인기 없는 자와 인기 있는 자. 그리고 촌스러운 사람과 특별시에 사는 사람. 키 작은 사람과 키 큰 사람. 뚱뚱한 사람과 홀쭉한 사람. 자기가 어디에 속하느냐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인간은 죄 짓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계속 ‘내 역사의 주인공은 오직 나만이어야 한다.’ 남이 나에게 인정받으려면 내 역사에 기여를 해야 합니다.

사람은 존재하는 자체가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남을 미워하기 위해서 있어요. 나와 닮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이것을 성경에서는 신이라고 합니다. 신은 딴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닮은 신을 골라잡아서 내 대행으로 그 신을 섬김으로 신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실은 내가 나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힘과 용기를 주는 거예요. ‘하면 된다’고 하면서. 그 짓을 집에서 하나 교회 와서 하나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와서 한다고 하나님이 더 좋아하는 것도 아닙니다. 교인도 마찬가지고 교회 안 다니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을 다 같아요. 자신이 존재하는 그 재미로 삽니다.

동질성, 내가 여기 있으매 나를 닮지 않은 것은 자연적으로 핍박하게 되어 있습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날 닮은 자식은 좋아요. 날 안 닮은 녀석은 싫어요. 엄마는 엄마 닮은 자식을 좋아하고, 아빠는 아빠 닮은 자식을 좋아합니다.

나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내 밑에 두는 방식으로 인간은 생각하게 되고 그걸 실천이란 이름으로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은 각자의 본드들이 있지만 타인은 다 나를 위해 존재해 주기를 바라지요. 심지어 그 역사 속에 예수도 있고 하나님도 있어서 “신이시여, 나를 위해 존재하소서!” 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나는 너희를 위한 하나님이 아니다.”고 하시면서 “너희들이 이방인처럼 오해 했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이 뭔지 의미도 모르고 아브라함은 생각지 않고 아브람만 생각했어요. 하나님이 작업을 하신다는 것은 우리의 소망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실상을 폭로하시는 겁니다.

노출되고(파스를 뜯어내고) 나면 우리가 나의 명예와 자존심을 지킬 수가 없어요. 신자는 이것을 명심해야 됩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하고 천사처럼 착한 일을 해도 결국 그것이 내 영광과 내 이름을 위한 것으로 은연중에 돌아오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좋아하는 이유가, 너도 그렇고 나도 그러니까 결국 남는 것은 인간뿐입니다.

내가 나밖에 모르는 것을 긍정해 주면 - 너도 너밖에 몰라? 나도 나밖에 몰라 - 이것을 나쁘다고 못해요. 왜? 싫은 것이 있어야 나쁘다고 하지. 똑 같은 놈이 똑 같은 놈을 지적한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러니까 상대를 평가하고 지적하지 말고 서로를 인정하면서 각자 자기 이름으로 본드 삼아서 하나가 되면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입니다.

이 동질성을 깨는 것이 시민 윤리라고 헤겔이 말했습니다. 헤겔은 동질성과 반동질성 때문에 정(正).반(反).합(合)을 고민한 사람입니다. 나밖에 모르는 것 때문에 시민이 안 돼요. 질서 의식이 없는 거예요. 침도 아무데나 뱉고, 담배도 막 피우고, 휴지도 막 버리고.

헤겔이 이런 말은 한 것은 헛소리가 아닙니다. 하나의 예언처럼 되었는데, 폭력은 어디에서 나온 겁니까? 오직 나만의 동질성을 유지하겠다는 생각 때문에 나옵니다. 여기에 대해 윤리와 도덕이 해결책을 내 놓아야 합니다. 동질성을 비동질성으로 바꿀 수 있는 비책을 내 놓아야 합니다.

유대인 철학자 네비나스는 “일그러진 모습으로 찾아온 타인이 진정 너의 모습이다.”라고 했어요. 이 주장을 듣고 천주교에서 탄성을 질렀습니다. “일그러진 모습을 가진 분이 진짜 너고, 그것을 학대하는 너는 가자 너다.” 이런 주장을 네비나스가 하니까 천주교에서 그 일그러진 모습을 누구로 대체했는가? 십자가 지신 예수님으로 대체했습니다. 신학도 철학으로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다고 여긴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주장이 성경적으로 옳습니까? 무엇이 문제입니까? 문제 삼는 내가 문제인가요? 이 세상은 모두가 돈과 명예와 출세를 꿈꾸는데 교회가 존재할 이유가 그들에게 바른 길을 제시하는 것인데 동질성이 아닌 비동질성을 말하면서 ‘일그러진 타인의 얼굴’을 주장하니 얼마나 멋있습니까?

‘네가 때려서 일그러진 타인의 모습’은 마치 우리가 알고 있던 진짜 십자가 복음의 진수를 철학적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뭐가 문제입니까? ‘일그러진 타인, 노숙자를 돕는 것은 곧 신을 돕는 것이다.’라는 주장이 굉장히 이상적인 기독교의 해법을 제시하는 것처럼 여겨지는데 문제는, 이쪽이 찾아올 때도 여전히 나는 나라는 것을 포기할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저분은 진짜 내 모습이다.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이렇게 할 수 있는 근거가 없습니다. 왜 그런가? 자기 부인이 안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오시면 우리가 마중 나가겠다고 하는데 그런 사람은 없어요. 예수님이 오셔도 절대 영접하지 않는 죄인이 우리들입니다. “나 때문에 고생을 하셔서 미안합니다.” 이런 정도의 예의는 갖출 수 있지만 이런 것도 죄라고 규정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그래서 진짜 성령이 오시면 “그런 짓 하지 마라. 내가 다 해줄게.” 차 고장 났다고 엔진 만지다가 손 데이고 그러지 말고 그냥 두세요. 성령이 오셔서 다 처리하십니다. 아까 파스 붙였다 떼는 이야기를 했는데, 파스를 떼는 것을 성령이 하십니다. 그러면 또 우리는 파스 뗐다고 자랑해요.

그러니까 우리는 신이든 알 수 없는 타인이든 내 뜻대로 안 된다고 상대를 향해 적개심을 품으면서 아침에 눈을 뜹니다. 이것을 지난 주일에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인공위성이 갈 때 정지 위성은 정지 위성이 아니지요. 지구의 자전 속도와 동일하게 돌지요. 우리는 은연중에 세상이 나를 위해서 같이 협력해서 움직여주기를 학수고대 하면서 아침에 눈을 뜹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실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자기 본성입니다. “아차, 실수했다.”고 하는데, 돌아서면 또 그런 짓 합니다. 실수가 아니라 본성이 터져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흩은 것은 ‘너희들이 하나님 찾기 전에 네 욕망대로 마음껏 해라.’ 그 다음에 ‘내가 너에게 찾아가서 어떻게 해서 그 때 네가 천국 오거든 그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이 하신 일이다.’ 이것을 알라는 겁니다.

제가 어느 강의에서 그런 말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라고 해도 안 가요. 왜냐? 지겹다는 겁니다. 천국은 하나님만 경배하고 섬기는 곳이라고 하니까, 순번제로 해서 당번은 찬양하고 경배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좀 편히 쉬다가 자기 순서가 돌아오면 그 때 경배하고 찬양하고 그렇게 합니까? 이런 곳이 천국이라면 안 가는 것이 낫지요.

섬기고 싶은 마음도 없는데 섬긴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이게 지옥입니다. 그러니까 주를 섬길 마음이 없거든 천국 갈 생각 말란 말이지요.

25절을 봅시다.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우리의 착함이란 것은 이데올로기입니다. 주변 환경이 그렇게 만들어 내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건물에 들어갈 때 문에 [당기시오]라는 것이 있고, 어떤 것은 [미시오]라고 된 것도 있어요. 저는 별 생각 없이 문을 밀고 들어가는데 저쪽에서도 밀고 그런 경우도 있어요.

유리문에 손잡이가 있고, [당기시오]라고 쓰여 있어요. 이것만 있으면 이 건물이 어떤 건물인지 알 수 있습니까? 없지요. 하지만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은 [당기시오]라는 글씨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자동문이라 그냥 열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자동문]이라고 되어 있는데 또 [버튼을 누르세요]라고 되어 있는 것도 있어요. 그러면 자동문이 아니지.

어찌했든 문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눈앞에 있는 것만 보이는데, 현재 내가 어느 소속에 어떤 환경으로 가는 것인지 그 문에 표시되어 있습니까? 아니지요. 이게 인간의 문제점입니다. 지금 나는 어느 자리에 있으며, 주님은 예수 믿고 구원 받으라고 하는데 천국은 어느 자리인지 몰라요. 그래서 내가 행할 수 있는 것만 귀에 들어오고 행하려고 애쓰는 것뿐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시키는 대로 했다는 거예요. 이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피의 능력으로 구원 받는다고 했어요. 문에 손잡이가 있다고 해서 손잡이에 이르라는 말이 아니고, 예수님의 피는 우리가 들어갈 하늘나라 전부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우리는 이게 호텔인지 노래방인지도 모르고 문만 쳐다보고 들어가지만 --

우리가 들어가는 모든 문에 피가 묻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주님은 무엇을 요구하십니까? 피만 요구하지요. 피를 믿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피만 요구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것만 요구해요. 우리가 예수 믿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피만 요구합니다.

인간은 자기 공로가 드러나지 않는 곳에 절대 가지 않습니다. 27절을 봅시다.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라고 되어 있지요.

예수님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끝났습니까? 여기서 뭐가 나왔어요? 성령이 나왔지요. 성령을 오징어 다리라고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십자가에서 긴 오징어 다리가 막 나오는 겁니다. 나와서 우리에게 덮치고 우리를 끌고 갑니다. 피가 우리를 당긴다는 것을 알도록 성령께서 조치하십니다.

당길 때 그냥 당기는 것이 아니고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준다(26절)”고 했어요. 하나님의 이름은 새로운 존재의 출현입니다. 물속에서 돌고래가 튀어나오듯이. 이것은 더러운데 씻어주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피가 묻어있으니까 우리가 아무리 착해도 정결하지 않다는 것을 날마다 새롭게 깨닫는 그 마음. 피가 작동하는 새로운 존재의 출현입니다.

십자가 지시고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으로 하여금 ‘우리가 어떻게 할까요?’가 아니라 이미 주님이 일을 벌였는데, 27절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둔다는 것은 너희가 이루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자기 명예, 자기 이름을 위해서 성령이 오셔서 우리에게 도달되면, 나는 내 이름과 자존심만 챙기는 인간이라는 것을 새롭게 깨닫는 거예요.

착하든, 예수 잘 믿든 어떻게 되든 간에 그 모든 것이 결국 내 명예와 자존심,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육적인 욕망과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주님의 십자가 영이 임하니까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내 자존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피가 묻은 문으로 이끄십니다. 유월절 날 죽음의 사자가 찾아왔지만 문설주에 피가 바른 곳에는 그냥 넘어갔지요. 결국 죄인인 내가 주님께 이끌려 가보니까 피가 있어요. 이 피는 내가 준비한 것이 아니고 이미 마련된 천국의 성격을 보여주기 위해서 거기에서 온 능력으로 우리는 그냥 끌려가게 된 것이지요. 매일 나는 나밖에 모른다는 것을 자인하면서 그냥 가는 거예요. 새롭게 추가적인 선을 하든 말든 관계없이 피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을 깨닫는 겁니다.

자, 천국에 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심심해서 천국에 못 가겠답니다. 할 게 없으니까. 그런데 천국은 누구 생각을 못하게 만드는가 하면,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사람이 자기 생각을 하지 않을 때 예상 못한 기쁨이 생깁니다. 물론 하나님 자녀의 경우에만.

사람이 자기 생각을 할 때가 언제인가 하면 자신이 뭔지 모르게 불안할 때입니다. 왜 사람들이 백화점에서 소비를 하는 줄 아세요? 불안이 소비를 만듭니다. 계속 광고를 하는 것은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계속 새로운 것으로 채우세요.’ 라고 광고를 합니다. 없는 것에 대해 불안해하고, 그 불안을 조장하는 것이 광고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그것을 원할 수도 있습니다. 희망 없이는 못 사니까.

이 세상 자체가 뭔가 자꾸 불안하게 만드는데 왜 그런가 하면, 나는 이미 완성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미완성으로 여기면서 완성으로 나아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 말씀에, 피는 모든 것의 완료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가봐야 아는 것이 아니고 피 앞에서 내 생각하지 않는 그 상태가, 천국가도 맨 그 상태입니다. 내 생각하지 않고 주님 생각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천국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을 보니 주님의 뜻과 우리 뜻이 어떻게 그리 다른지, 우리는 장난감용으로 하나님을 주무르면서 능력이나 빼먹는 재미로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런 인간을 피로써 용서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 피를 잊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3. 1. 8. 09:47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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