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사람 만들기
61 자기 사람 만들기인간이란 늘 사랑에 갈급해 하며 살아갑니다. 적절한 사랑을 받지 못하면 여러 가지 부작용이 나타남을 스스로 인식하며 사랑 고픔증에 시달려 삽니다. 여기서도 인정받고 저기서도 인정 받고 좋은 아빠 멋진 남편 성공한 남자로 부상되기 위해 이마에 땀을 흘려야 땅은 그에게 사랑을 줍니다.그래서 땅은 늘 사람들을 가지고 놉니다. 사랑을 줄테니 땅을 떠나지 말라고 합니다. 인간은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는 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채로 영원히 땅에서 벗어나질 못합니다. 이것은 역으로 하늘을 정복하고자 하는 욕망을 불러 일으킵니다. 이 정복욕은 아담 이후부터 늘 끊임없이 욕구쳐 내려왔습니다. 이 복수는 그 정체를 감춘채 이 땅의 순리로 사람들을 다스려 왔습니다. 그러므로 그 정체는 땅에서 난 자에게서는 나타날 수 없고, 오직 하늘에서 난 자만이 그 복수감의 정체를 밝혀 보여 줍니다. 그렇기에 어디까지나 이것은 육의 싸움이 아니라 땅에 속한 전쟁이 아니라 하늘의 전쟁이요 영의 싸움인 것입니다. 철저한 보호자 싸움이지 애들 싸움이 아닙니다.출애굽하여 이스라엘로(하나님의 군대) 삼기 위해서 광야에서 여호와는 그들의 뻣뻣한 목을 낮추십니다. 꼭 낮추어야 하는 이유는 약속의 나라가 낮추어진 자 만이 가기 때문입니다. 높아지고자 한다면 말릴수는 없지만, 약속의 나라에서 스스로 약속을 거부 하게 됩니다.그 약속의 땅에는 하늘에서 난 자가 아닌 땅에서 난 자들이 활개치고 다닙니다. 그들의 악을 제거 하실려고 이스라엘을 불러 모으십니다. 애굽을 강퍅케 하여 부르짖도록 만들었고(기도란 하나님의 아이디어입니다) 땅의 나라의 실체를 보여주며 그들의 악의 실체에 환멸케 만듭니다. 그런 악을 진멸코자 하나님의 군대를 삼으실려고 광야에서 애굽에서 묻은 먼지를 털게 하십니다. 얼마나 심각한 먼지들이 깊숙이 묻었기에 이스라엘을 원치 않는 곳으로만 데리고 다니시면서 때를 빡빡 밀으시는지 아빠랑 손잡고 목욕탕에 가는 어린아들은 세상에 믿을 자 없다며 투덜대며 벗겨지는 때가 시원하게 느껴지기는커녕 그저 아프기만 합니다. 시커먼 때를 씻겨주는 그 물은 아빠 말처럼 시원한 것이 아니라 뜨겁기만 합니다. 그 물은 영생수가 아니라 나를 죽일려는 물 같아 보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말씀 하신 이후에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시고 호수를 건너갈 때에 큰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 눅 8:22-25/ 마 8:23-27/ 막 4: 35-41)(눅 8:22-25) 어느 날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시고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들은 떠났는데 / 가는 도중에 예수님은 잠이 드셨다. 그때 갑자기 큰 폭풍이 휘몰아쳐서 배가 침몰하게 되었다. /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주님, 주님,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고 부르짖었다. 예수님이 일어나 바람과 성난 파도를 꾸짖자 폭풍이 그치고 물결이 잔잔해졌다. / 그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 믿음은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두려워하고 놀라며 `도대체 이분이 누구신데 바람과 물을 보고 명령해도 복종하는가?' 하고 수군거렸다. (현대인의 성경)바닷가의 어부로써 잔뼈가 굵은 제자들은 살아 생전 보도 못한 풍랑을 만났기에 이것은 필히 죽었구나 생각 할 수 밖에 없는 풍랑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우리가 계산하고 감지하여 예측 할 수 있는 시험은 없습니다. 감당할 수 있는 시험이 아니라 감당이 불감당입니다.자 이제 땅에 속한 자들은 다 죽게 되었습니다. 성난 파도가 삼킬 듯이 그들 앞에 놓여졌고, 그 앞에서 어떤 것도 통하질 않는 죽음 그 자체가 몰려와 삼키려 합니다. 이것이 땅의 세계의 실체입니다.그런데 이런 성난 죽음의 파도 속에서도 태연하게 다른 세계를 누리고 있는 자가 있습니다. 땅의 나라가 그에게서는 영향력이 전혀 없어 보입니다. 딴 나라 사람 같이, 죽음의 나라가 아닌 딴 동네에서 온 자는 태연하게 코를 골면서 큰 대자로 뻗어서 달콤짭짜리한 단잠을 자고 있습니다.자 여기서 제자들은 선택에 놓여 있습니다. 분위기 파악 못하고 이 죽음의 상황을 외면시 하는 예수님을 자신이 놓여있는 세계로 끌어들여야 하는 가? 아니면 에라 모르겠다 죽으면 죽겠지 예수님과 함께 잠이나 자자 라며 주님의 달콤 짭짜리한 그 단잠에 같이 동참하느냐입니다.그러나 이런 글을 적는 저도 웃낍니다 누가 그런 상황에 주님처럼 태연하게 잠을 잘 수 있는 여유가 있겠습니까? 그런 여유로운 생각을 가질 틈을 줄 정도로 죽음의 파도가 만만하게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심각하게 다른 생각을 못 가지도록 죽음이 몰려 옵니다. 그러니 길은 딱 하나입니다. 무조건 잡는 겁니다. 손에 잡히는대로 막 잡을 수 밖에 없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살아남는 다는 생각 뿐입니다. 그 지푸라기가 옆에 있어서 잡아 봅니다.예수님 예수님 뭐합니꺼 이거 안 보입니까? 파도가 우릴 죽일려고 하는데 예수님은 잠을 잘 여유가 있습니까? 뭡니까 이게? 예수님 나빠요! 풍랑 나빠요! 제자들 나빠요 ! 블랑카 나빠요!마구마구 깨워서 이 죽음에 처한 상황 속으로 끌어들여서 이 죽음을 해결해달라는 겁니다. 어떤 신이든지 부처든 예수든 하나님이든 알라신이든 무조건 잡히는대로 잡아들여서 이 시험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다구칩니다.마치 앞에서는 홍해가 떡하니 가로막고 있고, 뒤에서는 애굽군사들이 칼을 휘둘으며 뒤따라 오고 있고, 진퇴양난 속에서 기가막히게 인간의 그 음흉한 깊은 내면의 소리가 울려퍼집니다. 깊이 꼬깃 꼬깃 감추어둔 우리의 속내가 드디어 들추어집니다. 하나님 도대체 뭐합니까? 겨우 이렬려구 끄집어 내시는 겁니까? 그래 죽여라 죽여. 죽일려면 말라꼬 데리고 나옵니까? 이것 하나 해결 못하면서 뭡니까 이게? 하나님 나빠요 ! 모세 나빠요!(시 106:7) 『우리 열조가 애굽에서 주의 기사를 깨닫지 못하며 주의 많은 인자를 기억지 아니하고 바다 곧 홍해에서 거역하였나이다』(시 106:8) 『그러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저희를 구원하셨으니 그 큰 권능을 알게 하려 하심이로다』(시 106:9) 『이에 홍해를 꾸짖으시니 곧 마르매 저희를 인도하여 바다 지나기를 광야를 지남 같게 하사』제자들이 깨워서 다구치는 바람에 예수님이 일어나서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그만 성난 파도가 잔잔해져 버렸습니다.참 이상하게도 방금전만해도 분명히 죽을판이었습니다. 지옥이 따로 없었습니다. 온신경 모든 것이 그 성난 파도에 마음을 다 빼앗겨 버렸는데 누가 채널을 리모콘으로 돌려 버렸습니다.자 이제 제자들은 눈길을 이제야 돌립니다. 성난 파도와 바람을 잔잔케 하는 저 예수님이 누구이기에 순종하는가 하고 말입니다.기적의 효과를 본 것입니까? 기적 전문가 기적 기술자를 만난 겁니까?지금 제자들은 자기들과 함께 다니는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새로 보아야할 입장입니다. 이 상황을 외면하고 자기입장에서 보는 세계를 포기해야 할 판입니다. 예수님의 말대로 내 믿음은 죽음 앞에서 무용지물임을 밝혀 보고 예수님이 말하는 믿음을 새로 받아야 할 판국입니다.우리는 원망했고 악으로 갚았고, 그가 보낸 자들을 기억치도 않았고, 바다 앞에서 거역하기를 밥먹듯이 하는데, 그는 일관되게 자기 이름을 위하여 구원하고 있다는 겁니다.(시 106:6) 『우리가 열조와 함께 범죄하여 사특을 행하며 악을 지었나이다』(시 106:7) 『우리 열조가 애굽에서 주의 기사를 깨닫지 못하며 주의 많은 인자를 기억지 아니하고 바다 곧 홍해에서 거역하였나이다우리는 우리 이름을 위하여 오로지 살아남고자 구원의 욕망을 펼치면서 이것 저것 다 손아귀에 생존을 위해 다 잡아 버렸고 기술적으로 완벽하게 포장하려고 합니다.그래서 사랑도 기술이 되었고, 믿음도 기술이고, 언어도 기술화 되었습니다. 이제 말씀을 증거하는 자도 기술적으로만 이용하면 끝납니다. 오로지 기술자만 있으면 그만입니다. 구원을 베풀 기술자로써 메시야는 우리의 구미에 딱맞는 먹거리입니다.메시야는 필요 없습니다. 메시야가 펼칠 기술만 있으면 그만입니다. 그래서 마귀가 예수님에게 이런 메시야가 되어다오 라고 외친 것입니다. 그 마귀의 외침은 곧 유대인의 소원이요 우리의 외침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이상하게도 거짓 백성들에게서 만들어졌습니다. 단독적으로 나온 것이 아니기에 그 배후세력은 곧 거짓 백성들이 후원자였고 그들의 권세는 악한 영에 있었던 겁니다. 이제 말씀을 외치는 자는 필요 없습니다 기술자만 있으면 됩니다. 신학을 잘하는 기술자(정통신학), 신앙을 잘하는 종교인들(복음주의 개혁교회), 종교 기술 교본인 교리(정통교단의 건전한 교리)만 있으면 어떤 간섭도 필요 없는 겁니다.(사 30:10) 『그들이 선견자에게 이르기를 선견하지 말라 선지자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정직한 것을 보이지 말라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거짓 백성들은 뭐든지 자기 편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제 2의 제 3의 강퍅함으로 자신들의 바벨탑을 건설하고 있습니다. 무너질 믿음이라면 애초부터 짖지를 않겠지요 철저하게 그 바벨탑 속에 믿음을 두고 활동합니다.(렘 14:14)그래서 풍랑이 필요한 겁니다. 떡 하니 가로막는 홍해가 반드시 있는 겁니다. 아무나 못오도록 하는 가로막는 요단강이 있는 겁니다. 요단강을 건넜더라도 하나님의 군대장관이 검을 들고 신발을 벗으라고 칼날을 세우고 달려듭니다.예수님은 이 풍랑을 잠잠케 하시고 제자들에게 믿음이 적은자라고 책망 하십니다. 너희 믿음은 어디있냐고 꾸짖으십니다. 제자들이 기적을 못 베풀어서 믿음이 적은 겁니까? 그럼 많은 큰 믿음을 소유하면 해결 되는 겁니까? 또 기적이라는 기술을 습득하라는 겁니까?예수님이 말씀 하시는 것은 내 쪽에서 잔뜩 가지고 있는 믿음을 손 놓으라고 하십니다. 그 쪽 세계를 포기 하라고 하시는 겁니다. 땅에 속한 믿음, 사랑, 언어 이 모든 것이 기술화 해야만 인정받는 세상(교회)에서,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어도 예수님과 함께 달콤하게 잠을 자는 그 자유를 믿으라는 겁니다.(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믿음도 남 눈치 속에서 펼쳐야만 인정받아 살수 있고, 신앙도 남과 비교해서 치열한 경쟁 속에서 구원을 따내는 비결이 기술 습득처럼 난무하고 있고, 사랑도 자기를 사랑해줄자를 골라서 찾아 해매는 사랑의 기술이 되었고, 그런 사랑의 전문가로 나서서 영혼을 간음하는 거짓 선지자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야망을 심어 넣어 거짓 백성의 요구대로 부드러운 표현으로 낚시질을 하는 달변의 기술 연마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서로가 자기 사람 만들려고 이용할려고 합니다. 오늘날 목사들은 자기 사람만들기에 혈안되어 있고, 교인들은 그런 목사의 노림수에 넘어가질 않습니다. 서로가 이용의 가치로만 바라보고 있는 겁니다.이런 우리의 실체를 이토록 시원하게 밝혀 주시는 주님이 얼마나 고마운지 우리의 믿음은 늘 헛것을 잡고 있음을 이 풍랑 속에서 보여주는 겁니다마귀는 항상 맛배기만 보여줍니다. 뭐든지 찔끔 찔끔 천국의 맛, 믿음의 맛, 기적의 맛, 십자가의 맛, 그러나 정식으로 누리질 못하도록 늘 애달아 하게끔 맛한번 제대로 못보고 종교 중독자로 만들어 버립니다. 조그마한 우환이 닥쳐도 쪼로록 성전으로 달려와서 그동안 못다한 충성 봉사 사랑을 하도록 늘 고양이가 쥐 다루듯 합니다.그러나 예수님은 제발 제대로 자유를 넉넉히 누리라고 외칩니다. 그래서 우리 손에 잔뜩 쥐고 있는 것을 풍랑으로 쓸어버립니다. (요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3)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요 8: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풍랑 속에서, 홍해 속에서, 바다 속에서, 죽음 속에서 나오는 자만이 아들이 자유케 한 자입니다.예수님, 우리는 풍랑의 종이 된 적이 없다고 늘 우기려 듭니다. 그 우기는 기술에 너도 나도 전문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주시는 자유를 외면하고 자기 나름대로 자기를 위하여 자유를 만들어내고 자유롭게 보일려고 연기를 합니다. 불뱀에게 다 물려 죽게 만들어 놓고 구원을 갈망하는 자들에게 십자가를 제시하는 그 지혜는 그야말로 예수님만의 아이디어요 쳐다보고파도 못보는 걸림돌이요 거치는 반석입니다. 날마다 닥쳐오는 죽음이라는 풍랑 속에 갇혀 있는 죄인들을 불쌍히 여겨주시고, 바다도 홍해도 풍랑도 죽음도 꾸짖으시는 주님이 몰고온 그 자유(영생)의 세계를 예수님과 함께 누리도록 믿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믿음으로는 자유 할 수 없으니, 예수님만이 우리를 자유케 하실수 있사오니 예수님이 주시는 믿음으로 참으로 자유케 하소서. 늘 우리를 낮추시는 그 십자가의 사랑 앞에서 예수님의 이름만 쳐다보도록 하여 주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