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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 강의(2012. 11. 23) 2강 녹취록자유게시판마가복음

광주 강의(2012. 11. 23) 2강 녹취록

이름 : 서경수(IP:121.176.190.236)

광주 강의(2012. 11. 23) 36-2

첫째 시간의 주제가 무엇이었나 하면, 정치적 경제적으로 변화되는 것이 사람의 마음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는 거죠. 여기에 대해 결론으로 말씀드린 것이 36장 21절에 나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내 거룩한 이름을 내가 아꼈노라.”

주님은 자신의 거룩한 이름이 훼손되는 것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자신의 거룩한 이름이 이런 식으로 더렵혀졌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들을 동원해서 정치적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하게 해서 멸망에 이르게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사람들이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훼손해서 이렇게 되었구나!” 하고 그 상황을 수용합니까? 아니죠. “재수 없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지.” 그렇게 나오지요. 결코 그런 환경을 맞으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과 연계시키지 않습니다.

이렇게 보면 됩니다. 투명한 막, 투명한데 막이 쳐져 있습니다. 성령의 세계를 육의 세계가 아무리 뚫으려 해도 뚫리지 않습니다. 막 안(성령 세계)에서 거룩한 이름을 위해서 벌어지는 일을 이쪽 동네(육의 세계)에서는 전혀 간섭할 수가 없어요. 이쪽에서 저쪽으로 통하는 통로는 성령(저쪽)편에서 열어줘야 됩니다.

열어줄 때 풍선을 바늘로 찌르면 바람이 빠지듯이, “아, 우리가 주의 이름을 훼손해서 이방 나라에 당했구나.”라고 원인과 결과가 연결되지, 그렇지 않고는 성령의 막을 아무리 뚫으려 해도 뚫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실수 했구나. 다음에는 잘 하자. 고아와 과부를 학대했는데 이제는 고와와 과부를 도와야지.” 이게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아무리 그들이 반성하고 회개해도 성령의 세계를 뚫어낼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은 인간에게는 구원의 능력이 없음을 확인케 하시는 능력으로 작용하지요. 나에게는 구원의 능력이 없다는 것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정말 그렇구나.’하는 것을 다짐하는 가운데 비로소 우리는 주의 이름만 부르게 되어 있습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진짜 “어찌할꼬” 하면서 ‘절망’이라는 말을 하는 것조차 교만할 정도로 완전히 내가 망가질 때 비로소 주의 이름의 고귀함, 주의 이름의 작용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점이 어떻게 연결되지는 마가복음을 보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마가복음 1장 1절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 보면 ‘복음’이란 말이 있어요. 27절을 보면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여기에 ‘귀신’이 나옵니다. 40절에 보면, 병 고치는 이야기가 있고, 2장에 보면 ‘내가 온 것은 병을 고치기 위함이 아니고 죄 사함을 위해 왔다.’고 합니다. 3장에 보면 안식일 이 나와요. 그리고 28절에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는 십자가가 나옵니다.

마가복음 전체를 보게 되면, 복음 이야기를 던져놓고 그 다음에 사람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귀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병을 고쳐주면서 죄 사함을 말합니다. 이 연결고리를 보세요. ‘복음과 귀신’의 고리는 주님과 귀신의 문제이기에 우리가 알 필요가 없어요. 그러면 인간과 관련된 것이 뭐냐? 귀신부터 병 고침입니다. 귀신이 있는데 병이 들었다. 여기서 방향을 거꾸로 한다면, 병든 것은 귀신 때문이다. 그 다음에 보니까, 병 고침과 죄 사함이 관련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죄 지었다고 전부 병이 든 것도 아니고, 병이 들었다고 전부 귀신 든 것도 아닙니다. 복음이 인간 속에 들어올 때는, 복음과 인간이 맺어지는 고리는 인간의 육으로 납득이 되는 노선은 아니지요. 인간은 인간들끼리 이해되고 납득이 되고 통합니다. “너는 왜 병이 들었니?” “요즘 내가 바빠서 쉬지도 못하고 계속 무리하게 일을 했어.” “그래, 좀 쉬면 났겠지.” 이것은 인간들끼리 얼마든지 이해하고 소통이 됩니다.

그런데 복음은 인간이 해낼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해낼 수 없는 것을 복음에 담아 소개하기 위해서 귀신도 동원되고, 병도 들어야 하고, 그리고 그 병은 죄 사함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병 낫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복음을 위하여 병 고침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 제가 병들었습니다. 낫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했다면, 하나님은 “내가 병 낫게 하면 뭘 할건데?” “낫게 하시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습니다.” “그러니까 병을 낫게 못하는 거야. 네가 병들게 한 것은, 나는 죄를 사하는 자임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십자가마을 게시판에 어떤 사람이 “회개해야 되고, 의의 행함을 해야 되고 ---” 이런 이상한 글을 올려놓았어요. 그래서 제가 “우리의 죄가 아니고 아담의 죄입니다.”라고 간단하게 댓글을 달았어요. 아담의 죄를 우리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원인을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해요. 원인을 모르면 사람은 미칩니다.

원인 같지 않아도 반드시 원인을 끄집어내야 일단 안심을 해요. 정서적으로 안정이 됩니다. 아무 이유 없이 뭔가를 당하면 잠을 잘 수가 없어요. 당하는 것은 당해도 이유를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여자가 남자에게 “헤어지자!”고 하면 남자가 미칩니다. 그냥 헤어지자고 하면 안 됩니다.

“왜 헤어지자고 했지?” 이에 대한 답변이 없어서 옛 애인을 살해한 사건이 최근에 있었어요. 이유를 모르면 환장한다니까요. “그냥 헤어지자.” 이건 용납이 안 됩니다. 헤어지고 말고가 문제가 아니라 왜 헤어져야 하는지 이유를 알아야 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는 데는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니 구원 받아도 환장할 지경이라. “쓸 데 없는 자를 왜 구원하셨습니까?” 욥이 고난 받지요? 하나님께 따집니다. 고난 주신 이유를 알려달라는 겁니다. 이유를 안 알려주면 차리라 죽여 달라고 해요. 주님은 끝까지 이유를 말씀하지 않습니다. 사막에 비가 내리는데 이유가 없습니다.

이유는 우리가 알 필요 없어요. 우리는 상품 생산의 중간 과정에 있는데 만약에 이유를 알면 나만의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게 됩니다. 그것이 ‘자기 의’라는 겁니다. “아, 이유가 이렇구나. 앞으로는 잘 해야지.” 이게 ‘자기 의’입니다.

KBS에서 하는 [개그 콘서트]를 보면 ‘브라우니’라는 개 인형이 등장합니다. 이 개가 아무 말을 안 합니다. 이게 은혜 받은 욥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멘트를 날려도 주님이 날려요. 욥을 개처럼 옆에 두고 주님이 말씀을 하십니다. [개그 콘서트]를 보면 개 인형을 세워놓고 “우리 브라우니가 얼마나 냄새를 잘 맡는지 몰라요. 냄새 맡아봐!”라고 해도 그냥 가만히 있어요. 그러면 옆에 있는 개그맨이 “코감기가 걸렸구나!” 라고 합니다.

우리는 나에 대한 설명은 내가 하고 싶어요. 이것이 ‘자기 이름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보다 내 이름이 우선이에요. 내 이름을 위해서 자살할 용의도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주기도문에 보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 우리가 있잖아요.

그런데 선악과 타먹고 난 뒤에 우리는 내 이름을 위해서 삽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 존재보다 주님의 죽음이 우선이라고 하십니다. 세상 모든 일을 예수님이 왜 죽으셨는지 그 죽음을 위해서 귀신도 필요하고 소경도 필요한 거예요. 이것을 모르는 제자들은 소경을 보면서 예수님께 물었지요. “저 사람이 소경이 된 것은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자기 죄 때문입니까?”라고.

제자들이 묻는 이유가 뭡니까? 자기들은 지금 볼 수 있다는 거지요. “나도 죄를 짓긴 지었지만 소경될 정도의 죄는 안 지었지요?”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이들의 물음에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요9:3).” 주의 이름을 위해 소경이 된 것이지요.

주님이 “브라우니 이리 와!” 하고 부르셔서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시니까, 눈 떤 브라우니가 되었어요. 복음을 전개하기 위해서 귀신이 등장하고, 병 고침이 등장합니다. 병 고치는 광경을 보고 몰려든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나는 병 고치러 온 것이 아니라 죄 사함을 위해 왔다.”

여기에서 무엇이 우선입니까? 죄가 우선이지요. 죄를 사하니까 병도 나았습니다. 병 고쳤다고 죄를 아는 것은 아닙니다. 죄가 뭐냐? “사람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한다(막3:28-29)”고 하셨지요. 그 전에 안식일 지키는 이야기가 있었지요. 안식일에 예수님이 한 편 손 마른 사람을 세워놓고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묻으신 후 고쳐 주셨지요.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죄는 율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 자체가 잘못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율법을 안 어길 수도 있다’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율법을 잘못 읽은 근원적인 죄입니다. 그렇다면 병 고침을 통한 죄 사함이 율법과 관련이 되니까, 성령은 인간이 죄를 짓는가, 아닌가가 문제가 아니고 성령을 훼방하면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다고 하니까, 영원히 용서되고, 영원히 용서 안 되는 결정권을 성령이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성령께서 예수님을 다루고 계시잖아요. 예수님은 성령에 이끌려 결국은 십자가로 가지요. 그리고 성령께서는 그 십자가만을 사도들을 통해서 증거하지요.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1절)”라고 하신 후에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2절)”라고 물어요.

십자가를 기준으로 성령 받은 것과 율법의 행위가 둘로 구분되는데, 어느 쪽이 십자가로 이끄는 쪽이냐? 율법의 행위로 십자가가 보이는가, 아니면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가 보이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가 보인다는 말은 율법의 행위는 가장 근원적인 죄, 저주 받고 또 받아야 하는 죄로 아직도 율법의 행위에 기대를 갖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병 고치는 것, 귀신도 순종한다는 이야기가 언제 나오는가 하면 풍랑이 일 때입니다. 결국은 대자연의 변화, 인간의 경제적, 정신적인 모든 변화는 우리 마음 자체가 새로운 세계와 연계된 마음이어야 합니다. 기존의 세계와 연계된 마음 말고 새로운 기준과 관련된 마음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이들의 특징은 천상회의에 참석을 했습니다. 아모스, 호세아 다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성신 받은 사람들이죠. 이 사람들은 출애굽과 다윗 언약이 결합되었다고 봅니다. 출애굽을 볼 때 이것을 창조주로 보고, 다윗 언약을 전쟁하는 하나님으로 봅니다.

이것을 달리 보면, 전쟁하는 하나님은 심판하는 하나님이고 창조주는 어진 목자 같은 심정이죠. 달래주고 한쪽에서는 때리고. 때리는 것과 자기 백성을 불쌍히 여기 이끄는 작업이 같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출애굽이 되기 위해서는 애굽에서 나와야 합니다. 애굽에서 나오기 위해서 이 애굽의 영역을 확장시킵니다. 그러면 옛날에 애굽을 하나님이 손댄 이유가 그 안에 언약 백성이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애굽은 특정한 나라가 아니고 언약 백성이 놓여 있으면 그 전체가 애굽이 되지요.

여기에서 자기 백성을 분리해서 끄집어내는 작업을 창조주 하나님이 하시는 거예요. 창조주 하나님이란 없는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데서 살게 하시는 이 두 가지가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 작업입니다. 이것을 ‘빠라’라고 합니다. ‘빠라’는 어떤 노동도 없이 생긴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철학에서는 ‘없는데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제조하는 것 말고 창조하는 것. 있는 것을 다른 것으로 변형시키는 것 말고 그냥 창조하는 것.

[복음과 기독교의 차이]라는 책에서 이 부분을 언급했는데, 이게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무엇이 생겼다는 말은 없는데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있다는 것은 “그 전에는 무엇이 있었는데?”를 반드시 묻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만들었다’고 하면,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는데?” 이렇게 나오지요. 그러면 “하나님을 누가 만들었냐는 질문은 하는 게 아니야.”라고 해도 의문이 깨끗하게 해소되지는 않아요.

무엇이 있다는 말은 이것을 있게 만든 원인이 먼저 있어요. 원인이 먼저 있고 그 결과물로 무엇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는데서 무엇이 생겼다면 현재 있음에서 결과만 남기고 원인을 잘라내야 되는데 이런 논리는 인간에게는 있을 수가 없어요. 원인도 없이 뭔가가 생겼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없는데서 새롭게 창조했습니다.” 라고 해도 사람들은 믿지를 못해요. 이처럼 “죽은데서 살았다.”는 것도 말이 안 돼요. 죽음이란 것은 없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중국의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어요. “우리가 죽으면 없어지기 때문에 죽음은 없는 것이다.”

죽을 때가 되면 죽느냐, 사느냐는 말 자체가 의미 없기 때문에 죽음은 없는 것이고, 살아 있을 때는 죽음이 아직 오지 않았기에 죽음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나저러나 죽음은 없는 것인데 왜 죽음을 겁내느냐는 것이지요.

죽게 되면 내가 없잖아요. 내가 없으면 죽음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죽음을 겁내느냔 말이지요. “죽음을 겁내는 것은 네가 산다는 것을 만끽하지 못했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한다. 만약 사는 재미에 푹 빠지면 그 순간만큼은 죽음도 생각나지 않을 것이다. 이 즐거움을 유지해라. 그러면 죽음의 공포도 사라질 것이다.”

애굽 사람과 히브리 사람의 차이가 있는데, 애굽 사람의 신은 현재 있게 된 것을 있게 하는 신입니다. 창조는 한 번 창조하면 그만입니다. 그 후에는 창조한 것이 굴러가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히브리인들은 뭐냐? 매일 창조해야 돼요. 한 번 창조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스스로 원인을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만약 내가 스스로 원인을 가지면 원인 가진 나는 내일이 되면 그 가진 원인인 나를 양보할 수가 없습니다.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어떻게 믿은 예수고, 어떻게 알게 된 성령인데 그것을 죄라고 부정합니까? 안 되는 거예요. 어제 잘 믿었으면 오늘 하루쯤은 쉬어도 괜찮아요.

좋은 패를 많이 가지고 있으면 죽어서 질이 좋은 인간으로 내세를 산다는 것이 인간의 생각입니다. 왜 교회에 나오고, 왜 구제를 합니까? 이것은 좋은 패를 많이 가지는 거예요. 홍단, 청단, 초단 이런 것을 많이 확보하면 조금 나쁜 짓을 해도 괜찮아요. 너무 착한 일을 많이 하면 약간 나쁜 짓을 해서 좋은 패를 소비시켜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좋은 패만 남아있다고 보는 겁니다.

히브리인들에게는 이것이 용납 안 됩니다. 그날 하루는 그날로 끝나는 겁니다. 밤이 있고 낮이 있는 것은 창조가 매일 되풀이 되는 거예요.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취지입니다. “그날 염려는 그날로 족하다.”는 말은 진짜입니다. 내일을 모르는데 어떻게 내일을 염려합니까? 내일 일을 모르기 때문에 어느 도시에 가서 장사해서 이익을 남기겠다는 그런 스케줄을 짜지 말란 말이지요. “주님의 뜻이면 이것도 저것도 하리라.”는 고백이 바로 애굽 같은 세상에서 언약 백성이 취할 유일한 고백입니다.

창조주는 이런 분인데, 창조주가 무엇을 만났는가 하면 속량주를 만났어요. 이 말은 히브리어로 ‘고엘’인데, 이것은 가정 법률과 관련되어 있어요. 어떤 가정이 억울한 일을 당해서 빚을 져서 남의 집 노예로 팔렸을 때 그 가정을 대신해서 자기 본래의 위치와 재산과 명예를 되찾아주는 가까운 친척을 ‘고엘’이라고 합니다.

“저 사람을 내가 잘 압니다. 남이 아닙니다. 저 사람의 일이 곧 나의 일입니다. 저 사람은 채무를 감당할 능력이 없기에 내가 그 채무를 감당하겠습니다.” 라고 나서는 것이 바로 ‘고엘’ 다른 말로 하면 ‘구속자’가 됩니다. 그래서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하나님의 특징이 뭔가 하면, 창조주와 구속주의 만남입니다.

이렇게 만날 때 주의 이름이 영광을 받습니다. 주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려면 우리는 항상 없는 자여야 하고, 항상 죽은 자여야 하고, 항상 우리는 내 의무를 알면서도 그것을 감당할 능력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하고, 절약하고, 있는 것 다 긁어모아 빚 갚는다고 해도 우리 힘으로는 안 됩니다. 이것을 우리가 매일같이 느끼도록 주께서 현실과 상황을 그런 쪽으로 짜 맞춰 주십니다. 이것을 애굽 나라라고 합니다.

36장 18-19절을 봅시다. “그들이 땅 위에 피를 쏟았으며 그 우상들로 더럽혔으므로 내가 분노를 그들의 위에 쏟아 그들을 그 행위대로 심판하여 각국에 흩으며 열방에 헤쳤더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자기 이름이 더러워졌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누구를 혼내줍니까? 이스라엘 자기 백성을 혼내줍니다. 여호와를 믿고 의지해야할 백성들이 우상을 섬겼어요. 그런데 우상 섬긴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뿐입니까?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섬겼잖아요. 바벨론 같은 나라는 벨, 레보, 마르둑, 이시타르 등등의 온갖 신을 다 섬겼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런 신을 같이 섬겼습니다.

이런 모든 신들이 어디서 나왔는가? ‘엘’이라는 신에서 나왔습니다. 이스라엘 근동에 있는 신 중 최고의 신이 ‘엘’입니다. ‘엘’ 그 밑은 신이 뭔가? ‘엘’신을 감히 부를 수 없어서 ‘우와’ 또 ‘야!’ 이렇게 부르다가 ‘야웨’가 되었다고 합니다. 처음 신은 ‘엘’신의 집합체라서 ‘엘로힘’인데, 이것을 E문서라고 합니다.

여호와는 Y로 시작해서 Y문서, 엘로힘은 E로 시작하기에 E문서라고 합니다. BC 700년경에 내려오는 전승들이 편집되어서 E문서가 되었다고 합니다. 잘 모르면 입 다물고 있으면 되는데 사기를 쳐서 온갖 이론들을 만들어 냅니다. 그 때 E문서가 내려오고, Y문서도 내려오고, 그 다음에 P문서(제사장 문서)가 내려오고, 중간에 BC 900년경에 D문서가 내려옵니다.

어쨌든 이러한 우상을 섬긴 것이 이스라엘만이 아니고 바벨론 나라 전부가 그렇게 한 거예요. 바벨론 벨사살 왕을 마지막으로 바사 왕 고레스로 넘어옵니다. 그 고레스가 마르둑 신을 섬겼어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바벨론이 왜 망했는가? 마르둑 신을 잘 섬기지 않고 백성들을 토목공사에 너무 심하게 종사케 해서 마르둑 신이 노해서 망하게 했다.’고 해요.

이사야에 보면 그 고레스는 ‘여호와의 기름 부은 종’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고레스는 우상을 섬긴 사람이에요. 다 같이 우상을 섬겼는데 에스겔 36장 22절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이스라엘만 더럽혔다고 할 수 있냐는 것이지요. 우상 섬기는 것이 하나님 이름을 더럽힌 것이 아니지요? 왜냐? 다른 백성들도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우상을 섬겼다고 벌을 준다면 다른 백성들도 벌을 줘야 되는데 유독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주목을 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혔다고 책망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그것은 바로 출애굽에서 애굽이 있어요. 애굽이 있는데 애굽에서 나오게 되지요. 나올 때 사람이 있어서 사람이 나온 것은 아니에요. 그렇게 되면 있는데서 있는 것이 나오지요.

처음 애굽을 나올 때 히브리인들이 있었어요. 히브리인들이 나와서 히브리인의 나라가 되면 이것은 이스라엘이 아니에요. 그럼 여기에 뭐가 섞여야 됩니까? 히브리인을 이스라엘로 바꾸려면 뭔가 섞여 들어가야 돼요. 처음에 섞여 들어갈 때 뭐가 들어갔는가 하면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섞여 들어갔습니다.

어떤 분이 십자가마을에 질문을 했어요. ‘노아 언약의 핵심이 뭡니까?’ 라고. 노아 언약의 핵심은 사람 손으로 죽인 더러운 피와 정결한 제물의 피를 구분해서, 하늘은 누구에게나 자비롭지요. 선인과 악인 모두에게. 그 근거가 어디에서 나왔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정결한 제물의 희생의 피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인간의 손에서 나오는 것은 더럽다는 것을 대조시키면서 보여주는데 그럴 때 노아 언약을 주신 주의 이름이 부각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에스겔 쪽에서 봅시다. 모든 민족이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왜 유다 백성에게만 벌주고 멸망시키는 것입니까? 출애굽을 시키려면 피가 섞여야 하고, 피가 있어야 언약이 담긴 새로운 공동체가 등장합니다. 여기에 여호와의 종이 들어가고, 종이 개인에서 집단으로 이어지고, 다시 집단에서 개인으로 가는 거예요.

여호와의 종은 누구냐?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이죠. 이건 개인이잖아요. 그런데 이들에 의해서 새롭게 뭉쳐진 남은 자가 있어요. 남은 자는 집단이지요. 그 집단이 오는 메시아를 핍박하면 그 메시아가 여호와의 종이 되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찔림은 곧 ‘우리’의 죄 때문이죠.

여기에서 ‘우리’에 해당되면 감사한줄 아시기 바랍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출애굽에 걸려든 사람입니다. “내가 찔린 것은 너희의 허물 때문이다”라고 하셨는데, 십자가 앞에서 자기의 죄를 발견하는 것은 사람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원인과 이유를 우리 쪽에서 찾으면 안 됩니다. 성령의 역사로 십자가를 알게 하시니까 비로소 “예수님의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다.” 라고 고백하게 되는 겁니다. 이것은 개인의 죄가 아니라 아담의 죄입니다.

아담의 죄에 눈Em게 되면 우리가 스스로 나를 자책할 수 있는 이유도 권리도 없습니다. 계속해서 아담의 죄가 토해지고 나와야 됩니다. 그 때 우리는 히브리인에서 이스라엘로 바뀝니다. 세상 죄를 지신 어린양이 동행하니까 우리는 늘 죄인이잖아요.

그러면 여기 에스겔에게 애굽을 어떻게 만드는가? 애굽이 있어야 하니까. 언약백성이 있는 곳 전부를 애굽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들을 만방에 흩어버립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언약에 저촉 받는 사람이 흩어진 모든 곳이 전부 애굽으로 변하지요. 애굽으로 변했다는 말은 출애굽 작업이 지금도 계속 진행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이 기능을 발휘하게 되면 심판을 하면서 그 안에서 인자와 연결되어 있는 에스겔 같은 그런 자기 백성을 찾아내는 작업이 쉬지 않고 계속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동안 그들이 우상을 섬겼는데, 그 우상을 섬긴 마음으로 여호와도 섬겼으니까 눈에 보이는 성전 중심, 또는 민족주의, 우리 영토가 있어야 하고, 왕이 있고 백성이 있으면 진짜 천국 가는 백성이 된다고 여겼습니다. 요즘 말로 바꾸면, 예배당 건물이 있어야 하고, 목사가 있고 교인들이 있으면 된다는 생각과 같지요. 그것이 바로 마르둑, 벨, 르보, 다무스, 그리고 각종 태양신을 섬긴 것이지요.

대구 팔공산에 갓바위가 있는데, 만약 그것이 철거되고 없다면 그곳에 올라가겠습니까? 안 올라가겠지요. 이처럼 예배당이 없으면 사람들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누가 예배당을 지으면 그곳에 가서 기도합니다. 타고난 우상 숭배자가 우리들입니다.

죽은데서 살리고, 없는데서 있게 하는 주님의 말씀의 능력은 생각지 못하고, 내가 종교적인 장소를 찾고, 그곳에서 기도하는 것으로 신앙 생활한다고 여기는 그 자체가 출애굽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모든 인간이 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주님이 십자가를 보여주신다는 말은, 내가 갈 수 없는 저 세계에 주께서 다가와서 나의 옛날 습성을 뜯어내고 십자가의 피를 보여주셔서 이유와 원인을 나에게서 찾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내가 존재한다는 늘 새로운 이유가 우리에게 발생되도록 주께서 인도해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36장 26절에 ‘새 영’과 ‘새 마음’이라고 표현한 거예요. 새로운 마음이 되면 세상 모든 것이 주님의 일하심의 결과임을 알게 됩니다.

27절에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규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보세요. 우리가 지키는 것을 일체 인정하지 않잖아요. 주께서 주의 법을 우리 속에 두는 겁니다. 이 대목을 히브리서에는 십자가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새 언약’이고 ‘성령의 세례’이며, 로마서 8장에는 ‘주의 영’이라고 합니다. 십자가가 오게 되면 우리의 주도권은 우리가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마음은 보기 싫어도 십자가가 보이는 식으로 주께서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그렇다면 그 때마다 이 세상이 애굽이라는 것을 정신 차리면서 깨닫게 합니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한 이 모든 것이 애굽이고, 하나님은 나를 애굽에서 건져 내시는 구나. 내가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는데 주께서 그곳은 애굽이라고 알려주면서 그곳으로부터 우리를 분리시키는 작업, 사랑 받기로 작정된 자를 불리시킴을 알아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주께서 이미 오셔서 일을 시작하셨기에 우리가 따로 할 일이 없는데 자꾸만 나를 위한 일을 쉬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모든 것이 우리가 죄인인 것을 드러내는 일로 쓰임 받는다는 것을 저희들이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2. 12. 20. 10:09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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