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한 곳 121219
은밀한 곳 121219
이름 : 이근호(IP:119.18.69.144)
은밀한 곳(겔 7:14-22)
이근호
12-12-19 21:19
은밀한 곳
2012년 12월 19일 본문 말씀: 에스겔 7:14-22
(겔 7:14, 개역) 『그들이 나팔을 불어 온갖 것을 예비하였을지라도 전쟁에 나갈 사람이 없나니 이는 내 진노가 그 모든 무리에게 미쳤음이라』
(겔 7:15, 개역) 『밖에는 칼이 있고 안에는 온역과 기근이 있어서 밭에 있는 자는 칼에 죽을 것이요 성읍에 있는 자는 기근과 온역에 망할 것이며』
(겔 7:16, 개역) 『도망하는 자는 산 위로 피하여 다 각기 자기 죄악 까닭에 골짜기 비둘기처럼 슬피 울 것이며』
(겔 7:17, 개역) 『모든 손은 피곤하고 모든 무릎은 물과 같이 약할 것이라』
(겔 7:18, 개역) 『그들이 굵은 베로 허리를 묶을 것이요 두려움이 그들을 덮을 것이요 모든 얼굴에는 수치가 있고 모든 머리는 대머리가 될 것이며』
(겔 7:19, 개역) 『그들이 그 은을 거리에 던지며 그 금을 오예물 같이 여기리니 이는 여호와 내가 진노를 베푸는 날에 그 은과 금이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하며 능히 그 심령을 족하게 하거나 그 창자를 채우지 못하고 오직 죄악에 빠치는 것이 됨이로다』
(겔 7:20, 개역) 『그들이 그 화려한 장식으로 인하여 교만을 품었고 또 그것으로 가증한 우상과 미운 물건을 지었은즉 내가 그것으로 그들에게 오예물이 되게 하여』
(겔 7:21, 개역) 『외인의 손에 붙여 노략하게 하며 세상 악인에게 붙여 그들로 약탈하여 더럽히게 하고』
(겔 7:22, 개역) 『내가 또 내 얼굴을 그들에게서 돌이키리니 그들이 내 은밀한 처소를 더럽히고 강포한 자도 거기 들어와서 더럽히리라』
유대 나라는 자신이 믿는 하나님에 의해서 배신당합니다. 평소에 하나님에 대해서 남달랐던 그들은, 다른 민족들보다 월등한 혜택을 여호와 하나님이 해주실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설치한 모든 기반과 설치를 다 부수고 마십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은밀한 곳을 드러나지 않은 채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공격하되 하나님 자신의 은밀한 곳까지 적들에게 노출시켜 파괴해버리는 일을 저질러버리십니다. 그 은밀한 곳이란 곧 지성소입니다. 유대 사람들은 그 은밀한 곳에는 너무나도 거룩하게 생각해서 감히 발을 들려놓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자들이 그 신성한 곳을 감히 능멸해버립니다. 이럴 때 그들이 느끼는 자괴감이란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자기 백성에게 그렇게 혹독한 처벌을 내리시는 걸까요? 그것은 진정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말씀을 지식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되어야 될 말씀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인간 내부에는 인간의 능력으로도 도저히 제거할 수 없는 찌꺼기 같은 것이 들어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존심’이라는 겁니다. 이 자존심에서 우러나는 의미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주저없이 발휘되면서 마중에 나가게 됩니다. 즉 이왕 살아있는 나를 더욱 살게 하기 위해서 줄곧 하나님을 섬기는 척했던 것입니다.
참으로 중요하고 끝까지 잃어버리고 싶지 않는 것은 따로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곧 ‘나’라는 자아입니다. 그 자아의 가치를 끌어안고서는 거기에다 하나님 말씀을 받아서 따로 자리를 마련하는 식으로 종교생활을 해오고 있는 겁니다. 마치 안방 자리는 손님에게 내어주지 않고 사랑방으로 손님을 모시는 식입니다.
자기만의 은밀한 것은 어떤 식으로도 보존하고 훼손당하지 않으려는 그 악착같은 고집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지식으로만 수용하게끔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자진해서 자신이 거주하신다는 그 ‘은밀한 처소’마저 이방인들에게 유린당하도록 허락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그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인들이야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평소에 하나님보다 자기가 우선이 되어서 살아왔던 자들이었습니다. 문제는 그렇지 않은채 곱게 뒤로 숨겨놓고서는 하나님을 마중하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과 정성을 다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는 우리는 ‘하나님의 은밀한 곳’에서 무슨 일이 매일같이 반복되었는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어린양의 피가 성소에서 매일같이 발라진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대신하고 죄 많은 인간을 대신한 ‘흠없는 제물’이 매일같이 죽어나가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하나님됨’을 유일하게 표현해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른 하나님은 없다는 말입니다. 죽음을 통해서 말하지 않는 하나님이 아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마중 나가겠다 는 우리는 매일같이 살아보겠다는 것이 과제처럼 다루면서 지냅니다. 히브리서 2:14-15에 보면,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지식으로 이 말씀을 받고자 마중 나갈지는 모르지만 정작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대로 진행되도록 우리를 들어 쓰시게 됩니다. 즉 우리 자신들은 실제로는 ‘죽기를 무서워하면서 사는 식’으로 지낸다는 것을 드러내어주십니다. 즉 죽기가 무서워 살아보려고 하나님을 찾고 예수를 찾는 식으로 산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님께서 ‘죽음’에 대해서 두 가지 의미를 사용하십니다. 목숨이 끊어졌다는 것과 그리고 편히 잠자고 있다는 식으로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깨우려가자‘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일부러 지체하십니다. 그리고 드디어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서부터 몸을 움직이십니다.
이것은 바로 “내가 곧 부활이요 생명이다”는 사실이 단순히 획득해야 될 지식이 아니라 그 체험 안으로 초빙 받는 자라야 참된 신앙인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구원이란 실제로 죽었다고 실제로 살아나는 일입니다. 이 ‘실제로 죽음’이라는 것이 실제로 체험되어야 합니다.
옛날 노아 홍수 때, 많은 사람들이 평생 이룩해 놓은 모든 것들을 홍수로 인해 물바다 속에 잠기게 될 때, 그들의 자존심과 자긍심에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습니까?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 성에 하늘에게 유황불 떨어졌을 때에 그들이 평생 일구어놓은 모든 가치들이 다 화염에 휩싸이고 말았습니다.
즉 인생 헛 산게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들은 이러한 사건들을 단지 옛날 지나간 일이라고 여긴다면 신앙이란 그야말로 농담이요 취미생활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을 그런 식으로 섬긴다는 것은 실은 하나님을 가지고 놀겠다는 심보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을 즐겁게 하는 오락거리에 만드는 겁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서 대자연의 모든 게 질서있게 돌아가는 것 같지만 실은 그 내부에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이 기둥처럼 받히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잘 나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공로로서 진작 죽어야 될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평생 애써서 일구어놓은 모든 것들이 다 하루 아침에 무너져 내린다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합당하고 당연한 조치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유일하게 은밀한 것입니다. 곧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이 십자가 의미는 성령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우리가 알아차릴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나오는 피의 은혜가 오늘날 성도를 장악하는 것은 성도로 하여금 자기 증인이 아니라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유일하게 은밀한 것은 우리 자신의 자존심이 아니요 필히 살아남아야 한다는 우리의 본성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만 영생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내 것을 따로 가지게 되면 필히 거기서 자존심이 발생 한다는 이 무서운 현실에 몸서리 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2-12-20 22:09
19강-에스겔7장 14-22(은밀한 곳)121219-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7장 14절에서 22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58페이지입니다.
에스겔 7:14-22
“그들이 나팔을 불어 온갖 것을 예비하였을찌라도 전쟁에 나갈 사람이 없나니 이는 내 진노가 그 모든 무리에게 미쳤음이라 밖에는 칼이 있고 안에는 온역과 기근이 있어서 밭에 있는 자는 칼에 죽을 것이요 성읍에 있는 자는 기근과 온역에 망할 것이며 도망하는 자는 산 위로 피하여 다 각기 자기 죄악 까닭에 골짜기 비둘기처럼 슬피 울 것이며 모든 손은 피곤하고 모든 무릎은 물과 같이 약할 것이라 그들이 굵은 베로 허리를 묶을 것이요 두려움이 그들을 덮을 것이요 모든 얼굴에는 수치가 있고 모든 머리는 대머리가 될 것이며 그들이 그 은을 거리에 던지며 그 금을 오예물 같이 여기리니 이는 여호와 내가 진노를 베푸는 날에 그 은과 금이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하며 능히 그 심령을 족하게 하거나 그 창자를 채우지 못하고 오직 죄악에 빠치는 것이 됨이로다 그들이 그 화려한 장식으로 인하여 교만을 품었고 또 그것으로 가증한 우상과 미운 물건을 지었은즉 내가 그것으로 그들에게 오예물이 되게 하여 외인의 손에 붙여 노략하게 하며 세상 악인에게 붙여 그들로 약탈하여 더럽히게 하고 내가 또 내 얼굴을 그들에게서 돌이키리니 그들이 내 은밀한 처소를 더럽히고 강포한 자도 거기 들어와서 더럽히리라.”
누가 이렇게 한다는 거지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동안 그들은 뭘 믿었는가? 자기 딴에 그들은 하나님을 믿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자기 딴에 믿었다고 생각했던 그 하나님에게 배신당하는 기분, 그 기분을 하나님께서 유다백성에게 체험케 하는 겁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나름대로의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애를 썼다는 그 바탕에 뭐가 있느냐하면,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 것이 아니고 이방사람들처럼, 세상 사람처럼 살기 위해서 하나님을 끌어당긴 겁니다.
마치 룻기에 보면 나오미 가족이 모압으로 피난 가는 것처럼 약속의 땅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간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이 주도권을 쥐지 않고 우선 내가 살아야 되겠다는 것이 우선이었던 겁니다. 내가 살아야 되겠기에 내가 살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으면 나에게 도움이 되겠다는 계산 하에 하나님을 믿어왔던 겁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에 열심내고 잘 섬기면 무슨 보상이 주어질 줄 알았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보상이 아니라 되레 하나님한테 된통으로 얻어터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하나님이 자기백성을 때린다는 것만 생각하지 마시고 오늘 본문 22절에 보면 “내가 또 내 얼굴을 그들에게서 돌이키리니 그들이 내 은밀한 처소를 더럽히고.”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여기 은밀한 처소란 평소에 여호와 하나님만 거주하시고 어떤 인간도 들어갈 수 없는 지성소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이지요. 하나님의 성전이 짓밟히고 하나님을 모르는 군대에 의해서 파괴되고 불태워지고 결국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욕 얻어먹는 일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때리는 거예요. 하나님이 이 땅에서 하나님이 계신 그 자리가 하나님을 평소에 욕했던 그 군대로 인하여 패배하게 만들고 짓밟히게 만들고 명예가 추락하게 만들고 위신이 떨어지게 만드는 작업도 하나님께 자기백성과 함께 일으킨다는 거지요.
그럴 때 하나님마저 하나님에 의해서 스스로 붕괴당하고 파괴당한다면 하나님을 기대면서 하나님의 빽으로써 뭔가 거들먹거리면서 ‘하나님이 우리 편이니 하나님이 우리를 살려줄 것’이라고 짐작했던 그 모든 예상은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것이 되어버렸어요. 하나님 본인도 무너지는 판에 그 무너지는 하나님 붙들어봐야 이 세상에서 같이 무너질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 그렇게 조치를 하신다는 거지요.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가? 그 이유를 본문에서 찾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은밀한 것은 하나님의 성전, 지성소라고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사람들이 ‘하나님이 지성소에 계신다, 예배당에 계신다.’고 아무리 해도 그것이 인간 본인의 은밀한 것을 본인이 파악하고 노출시키는 것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를 못했습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이 누군지에 대해서 모호하고 알지를 못합니다. 본인 자신이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그냥 무작정 하나님을 믿으면 나한테 잘해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설마 하나님이 나의 은밀한 것마저 발각되도록 일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간이 생각을 못한 겁니다.
진짜 자기 은밀한 것은 뒤로 빼돌리고……, 이런 경우를 두고 생색낸다 하지요, 마치 손님 맞이할 때 안방 빼놓고 사랑방을 폼 나고 해 놓고 거기서 손님맞이 하면서 안방에서는 딴 짓 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맞이하는 그 선을 자기가 결정해서 ‘하나님이 여기까지 들어오셔서 저를 보태주시면 저도 하나님한테 섭섭지 않게 해 드리겠습니다.’라고 하면서 ‘그러나 하나님이여, 제발 내가 숨기고 싶은 이것만은 손대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나오더라는 말이지요. 제가 의존교회 강의할 때 그런 예를 들었는데 TV커피 광고에 이런 것이 있어요. “우리 커피는 원두를 갈아서 만들었습니다.”라는 것을 광고하기 위해서 재판을 열어요.
“원두를 갈아서 하게 되면 너무 비싸서 그럴 수가 없으니 이것이 원두라고 하는 것은 가짜다.” 할 때 피고석에 있는 원두커피 회사에서 하는 말이 “직접 실험해 보여드리겠습니다.” 하고 커피 잔에 커피를 다 따르고 보고서 검사가 놀란 거예요. 실제로 원두가루가 거기 있어요. TV를 안보니까 그런 상품광고가 있는 것도 잘 모르지요. 커피 다 마시고 보니 원두가루가 있더라는 말이지요. 우리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 하나님이 다른 것은 다 가져가도 좋은데 이 자존심만큼은, 이것만큼은, 정말 이것 손대면 자살합니다, 하는 그 마지막 그것을 주께서는 들춰내기 위해서 박피 작업을 합니다.
피부를 뜯어내는 거지요. 우리는 하나님 잘 섬겼다, 하나님 말씀대로 했다, 어,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 섬기기 위해서 모셨던 그 성전마저, 그리고 감히 우리도 못 들어가는 지성소에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군대가 완전히 짓밟아 버리고 부숴버리고 하나님을 모독해도 단단히 모독하는 그 일을 우리가 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우리가 섬기고 찬양했다고 자부하는 그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만든 그 마지막 은밀한 장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 장소마저 하나님께서 부숴버릴 때 그 외침은 결국 무슨 외침입니까?
“나는 네가 하나님 섬기는 것을 원한 것이 아니고 네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기를 원한다.”는 거예요. 섬기고 말고 하는 것은 나중 문제고 너 자신이 문제예요. “대체 너 자신이 뭐야?” 네가 뭐냐는 거예요. 그것을 뜯어내는 박피 작업, 그것을 뜯어냄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생각하는 찬란한 역사라는 것은 런닝 머신 위에서 달리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실컷 뛰었는데 맨 그 자리라. 땀을 뻘뻘 흘리면서 달렸는데 운동은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맨 그 자리에요. 하나님을 섬긴다, 하면서 뭔가 하기는 하는데 정작 하나님이 노리는 것은 뭐냐, 네가 누군지 네가 알고 있느냐를 노리고 있는데 우리는 그런 것은 감추고 ‘내가 원하는 나의 형편이 지금 보다 나아지기를 원합니다.’ 하는 식으로 어리광을 부리고 뇌물 주고 비비고 사랑하는 척이나 하고 그랬던 겁니다.
그게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에요. 그게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면 하나님의 방식은 뭐냐, 하나님의 방식은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실제로 체험되게 하시는 겁니다. 엄청나게 중요한 이야기를 한 동시에 이것은 무서운 이야기를 한 거예요. 성경말씀이 그대로 체험되게 하는 거예요. 예를 들면 “예수님은 죽었다고 부활했다. 네가 믿느냐?” “믿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체험은 뭐냐, 나에게는 아무 일도 없고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을 그냥 지식으로 추가하게 되면 구원받는다,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나를 안 건드린 채 그냥 놓아주고 그냥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난 그것만 내가 지식으로 동의하면 구원 받는줄로 알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성령을 통해서 나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고 내가 죽고 내가 다시 사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병들었다.”라고 하고 또 예수님께서 같은 단어를 가지고 의미를 나누어서 사용했어요. 이것이 어렵더라도 설명해야 돼요.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게 되면 우리가 그 말씀을 마중을 나갑니다. 마중 나가면서 그냥 나가는 것이 아니고 그 말씀이 무슨 의미인가 하고 자기 안에 숨어 있던, 자기에게 유리한 쪽의 의미를 가지고 마중을 나가더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그 의미를 가지고 마중을 나가는 것과 예수님께서 말씀을 주실 때 우리에게 체험되어야 할 의미가 서로 상충이 되고 맞지를 않아요.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죽었다고 이야기 했고 잔다고 하면서 두 가지로 의미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들은 도마라는 제자가 “야, 우리도 죽으러 가자.”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잔다고 한 것은 우리가 아는 데로 수면제 먹고 푹 한 숨자는 것을 두고 잔다고 하더라. 그 정도는 우리도 할 수 있다. 우리도 죽으러 가자.” 이렇게 이야기한 거예요.
두 가지 의미를 사용했는데 예수님의 그 두 가지 의미라고 하는 것은 이 두 가지 의미 중에서 인간들이 기껏 생각하는 의미가 그 중에 하나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바로 그 의미를 하나님께서는 교정해서 진짜 예수님이 말씀 줄때의 그 원래 품었던 의미를 그대로 주시려고 하는 거예요. 마르다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는 지금 실제로 죽었어요.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빠가 죽은 것은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그 말씀의 체험에 합류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펄펄 살았어요. 살아 있는 인간은 죽음을 될 수 있는 한 멀리하려고 하고 기피하려고 합니다.
“저를 안 죽이고 저를 구원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모든 교회 교인들이 다 그래요. 2천년 기독교 역사의 모든 교인들이 다 그래요.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난 부활은 제가 잘 아는데 그것이 내가 안 죽었으면 좋겠다는 나의 간절한 소망을 부흥해 주면서 그 말씀이 우리에게 오기를” 원하고 있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그렇게 오인하고 오해하는 그 따위 식의 그 바탕을 박피작업을 통해서 뜯어내는 거예요. 이스라엘도 유다도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그저 안 죽이시고 어떻게 하늘나라 갈 수 있는 방법, 거기에 비해서 나사로는……, 나사로가 참 복 받은 사람인데요, 나사로는 자기가 아프니까 동생 보고 이야기를 했겠지요. “내가 아프다. 빨리 예수님 불러서 낫게 해 다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미 전갈이 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지금 나사로가 아프다, 해 놓고는 며칠 뒤에 나사로가 죽었다고 이야기해요. 아프다는 그 때를 이미 아시고 그 다음에 죽었다고 통보를 해버려요. 가지도 않으면서도 다 아세요. 죽고 난 뒤에 “이제 가자.” 죽었는데 왜 갑니까, 죽었는데.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살아 있는 내가 유익되라고 준 말씀이라고 사람들은 따로 나름대로의 의미를 이미 형성하고 있는 거예요. 오늘 아침에도 십자가마을에 글을 썼습니다만 교회 왜 나옵니까, 목회를 왜 하는 거예요?
교인들이 원하는 것은 뭐냐? 살아 있는 것을 좀 풍성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 목회를 왜 합니까? 그들의 고객의 소원에 부응해주면 교회가 사랑이 넘치는 교회로 모이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정말 예수님이 목회할 때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말씀을 체험시키는 겁니다. 히브리서 2장 14절, 15절에 보면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라는 말씀을 체험하려면 죽기를 무서워해서 일생에 종노릇 하는 그 자가 바로 우리 자신임을 말씀 앞에서 박피 작업을 통해서 들통 나는 축복이 있기를 원하십니다.
저는 부흥사처럼 “축복이 있으라!” 이런 식으로 하는 게 잘 되지를 않는데……. 죽는 게 무서워요. 6시 땡, 쳤어요. YTN에서는 문재인후보가 이긴다, 방송3사에서는 박근혜후보가 이긴다고 했어요. 그러면 말씀 앞에 서 있는 사람은 “그래서 뭐 어쩌라고! 누가 이겼던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요?” 각자 후보와 관련된 교회에서 얼마가 기도했겠습니까? 그래서 어쩌라고! 말씀에 입각한 사람은 다 소용 없는 이야기라니까요. 누가 되든 그렇게 되면 죽는 것이 안 무섭습니까? 우리는 소용없는 것들, 어떤 게임을 즐긴다는 것은 뭔가 진짜 자기의 은밀한 것을 감추기 위한, 그때그때 넘어가기 위한 방도로서 외부에서 게임 같은 것을 하는 거예요. 도박하듯이.
1920년대, 30년대, 미국경제공황상태가 아주 심각했을 때 아줌마들의 낙이란 하나밖에 없었어요. 영화 보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영화 본다는 것은 일종의 마약 같은 겁니다. 그 당시에는 그랬어요. 너무나 현실이 악화되어서 영화 속에 잠겨서 잠시 잊어보는 거예요. 요즘 현대인들이 살아가는 것이 꼭 그런 식입니다. 10대든, 20대든, 30대든, 40대든, 50대든 관계없어요. 이제 대선 끝나면 무슨 재미로 살려는지 아주 걱정돼요. 사실은 죽기를 무서워하는 진짜 암 덩어리가 들어 있는데 그 암 덩어리가 발각이 되어야 하는데 이것을 움키고 있으면 교회 오는 것도 오락이요, 예수 믿는 것도 취미생활에 불과한 겁니다.
어떤 아가씨가 결혼한다고 하면 “혹시 남편 될 사람이 교회 다니나?” “왜요?” “나도 교회 다니거든.” 교회 다닌다고 결혼해 버리면……,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그 아가씨가 진짜 좋아한느 사람이 이슬람교를 믿는다고 해 봅시다. “아가씨 무슨 종교?” “저는 교회 다녀요.” “나는 이슬람교인데.” 그러면 종교 까짓 거 바꿔버리지요. 개종하고 결혼하면 돼요. 기독교? 예수? 어쩌라고요. 그게 뭐가 중요해요? 하나님이 뭐가 중요합니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죽기를 무서워하고 어쨌든지 살아보겠다는 이것이 가장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지 종교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성령을 주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체험 화시키는 거예요. 지식으로만 끌어당겨서 진짜 자기의 본심은 계속 깊숙한 창고에 감추는 그것을 기어이 땅굴 파듯이 파 들어갑니다. 그러니 뭐든지 내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요. 주께서 노리는 것은 박피작업이고 우리가 하는 것은 내복 입고 외투입고 또 껴입고 거기에 모자도 쓰고 마스크 쓰고, 그래서 교회 오는 사람들은 다 탈레반 전사 같아요. 히잡 뒤집어 쓴 여자가 눈만 내놓고 있는 것처럼 정신 무장을 했어요. 확 벗겨버리고 싶어요, 정말.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니까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유다백성들로 하여금 “너희들이 하나님의 은밀한 것을 소유한다고 해서 너희가 그것으로 너희의 은밀한 것도 용납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 말이지요. 진짜 은밀한 것을 안다면 그 은밀한 장소가 너희들의 죄 때문에 어떻게 파괴되느냐, 그 체험에 함께 동참할 수 있어야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비로소 너희들은 심판이 뭐고 죽음이 무엇이고 저주가 무엇인지 아니까요. 창세기 7장, 8장, 9장에 노아홍수가 나옵니다. 그것을 볼 때 만약에 내가 그 현지인이라면 내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살았던 나의 모든 실적, 행함의 업적들이 난데없이 하늘에서 홍수가 내려서 다 엎어진다면 이게 얼마나 경악스러운 일이냐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홍수 사건이 있을 때 그 현장에 있던 사람들, 노아도 그렇게 하여튼 모든 사람들이 기절초풍할 정도로 무서웠는데 그 무섭다는 것이 우리 생각에는 ‘에이, 아무리 무서워도 옛날옛날 그 때 그 이야기지.’ 이렇게 되면 그것은 성경이 왜 있습니까? 성경 볼 자격도 없고 볼 필요도 없어요. 노아 홍수 때 일어난 그 말씀을 주께서 오늘날 우리에게 실제 현실로 체험시켜 버리면 그 체험을 통해서 우리가 아는 것은 그 경악스러운 무질서, 어떤 인간의 행함도 의미 없이 되어버리는 그 속에서 왜 지금은 비가 많이 오지 않고 봄여름가을겨울이 있느냐, 그 모든 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 때문에 이렇게 질서가 유지되거든요.
소돔과 고모라에 하늘에서 유황불이 떨어졌습니다. 옛날이야기입니까? 옛날이야기라고 한다면 우리는 성경 볼 이유도 없어요. 지나간 이야기는 다 째버리면 그 만이니까요. 그런데 그 옛날이야기가 성경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그대로 우리에게 체험케 하는 거예요. 하늘에서 머리에 갑자기 유황불이 떨어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타워라는 영화촬영에 참여했던 영화배우가 이런 소리를 했어요. “너무 무서워.”라고 했어요. 불이라는 것이 그렇게 무섭다는 거예요. 그런데 하늘에서 유황불이 떨어져서 온 천지가 다 불바다가 되었으니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이 무질서, 이 경악스러운 무질서, 우리가 이 세상의 온대지방에 있다 할지라도 지금 하늘에서 불이 쏟아진다고 가정했을 때 우리가 그 가운데서 살아남고 육신이 보존되는 것은 우리의 행함이나 착함도 아니고 지금도 예수님 십자가 지신 그 은혜가 마지막 불 심판 때까지 우리를 지켜주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이 무질서에서 질서 있는 세상으로 현재 살고 있으니까, 원래 바탕은 무질서인데 예수님께서 기둥처럼 받쳐서 꽃피고 새 소리나는 질서로 되었잖아요. 그러면 그것을 받쳐주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에 고마운 줄 알아야 되는데 인간의 의미는 뭐냐 하면 ‘내가 이만큼 사는 것도 다 내가 똑똑하고 착하고 절제하고 훌륭하고 온유해서 그렇다.’고 자기 공로로 돌려버릴 때 이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고 마귀의 방법입니다.
우리 자신이 스스로 날마다 자기 잘난 체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라는 것, 공로라는 것을 매일같이 외면해 버리고 그 자리에 내가 잘나서 이 만큼 살았다고 될 때 주님께서는 택한 백성에게는 그 의미를 그냥 방치하지 않습니다. 박피 작업에 나섭니다. 피부를 뜯어내는 작업입니다. 왜, 말씀을 체험케 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렇습니다.“그들이 그 은을 거리에 던지며 그 금을 오예물 같이 여기리니 이는 여호와 내가 진노를 베푸는 날에 그 은과 금이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하며.” 그 날에,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그 날에 은과 금이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하고 금은, 오예물이라 하는 것은 배설물, 더러운 배설물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금과 은이 오물 덩어리처럼 취급받는 그날이 온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평소에 인간이 어떻게 살았습니까? 오물 같은 그 금과 은을 가지고 자기 몸을 치장했고, 그래서 20절에 보면 화려한 장식으로 자기 몸을 치장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우상을 만드는 재료로 넣은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뭐냐 하면, 나는 금과 은이 많다는 그 즐거움으로 평소의 행복으로 여기고 살아온 그것이 은밀하게 담고 있던 나의 본질이고 속성인 겁니다. 우리는 자꾸 인생 실수했다 하는데 인간이 실수라는 것이 없어요. 그냥 본성이에요. 실수 같으면 다음에 잘하면 되는데 우리는 잘할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밀한 곳에는 하나님의 죽은 어린양의 피가 있습니다. 은밀한 곳에 어린양의 피가 들어간다는 말은 우리가 그 짝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피 흘려서 하나님의 심판을 대기해야 될 그 입장인 겁니다. 그러니까 구원이란 다른 것이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우리의 죽음, 하나님의 심판을 경험하는 겁니다. 미리 당겨서 경험하는 거예요. 그럴 때 유황불이 너무나 당연한 조치며 홍수가 쏟아져도 우리는 할 말이 없고 마땅합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럴 때 비로소 개종이나 취미 혹은 오락이 아니라 교회라는 것이 오히려 인간의 신앙을 방해하는 곳, 주님의 은혜를 방해하는 곳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감잡아야 돼요.
교회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피를 아는 그 은혜로 구원받는 겁니다. 그 은혜를 알려면 그냥 지식이 아니라 체험 화되어야 돼요. 나사로처럼.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 마르다도 거기서 슬퍼했습니다. 마리아 마르다가 거기 오신 예수님께 통곡하면서 대들 때 예수님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부활이라고 했잖아.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산다고 분명히 이야기했잖아. 그런데 너희들은 왜 그냥 지식으로 알아들어서 ‘마지막 때에는 죽어도 삽니다.’ 왜 자꾸 마지막 때, 마지막 때, 그런 소리를 하느냐.”는 말이지요. 마지막 때, 그런 소리 한다는 것은 지금은 아니고 지금은 내가 원하는 것을 채워주고 마지막 때 가서 어떻게 살려주는 방식으로 ……, 이런 식으로 흥정하듯이 나오는 겁니다.
그것은 나의 구원을 위해서, 내가 살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용한 것 밖에 안돼요. 하나님의 뜻은 따로 있습니다. 네가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 말씀이 너보다 더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것을 체험하는 것이 중요한 거예요. 진짜로 살아 있는 분은 예수님만이 제대로 살아 있고 우리는 살아 있는 것 같지도 않아요. 우리는 그냥 살다가 안개처럼 없어질 존재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살아 있음을 증거 하기 위해서 잠시 이 땅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거예요. 오늘 같이 투표나 몇 번 하고 가는 거예요. 우리를 주관하시는 분은 예수님의 그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왜 불바다가 되어야 하는데 아직도 불바다가 되지 않는가? 그것을 유일하게 꿰뚫어 알고 있는 사람, 왜 홍수로 전멸해야 되는데 아직 홍수가 일어나지 않는가, 왜 전에는 일어났는데 지금은 안 일어났는가, 그 이유를 유일하게 알고 있는 예수님의 증인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성도로서 사는 이유입니다.
우리의 은밀한 것을 주님의 은밀한 곳에서 노출시킵시다. 마지막 때 은밀한 곳, 성전은 깨졌지만 지금도 은밀한 곳이 있습니다. 십자가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얼마나 은밀한지 사람의 지혜나 능력으로도 파악이 안 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파악이 안 되는 것이 십자가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9절에.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성령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의 은밀한 것을 누구도 알지 못하게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사우디아라비아, 요르단, 이스라엘 이렇게 세 구역으로 갈라져 있어요. 그 밖에 아르메니아라고 해서 러시아정교회 구역이 또 있답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 러시아 정교회, 아랍인들, 이렇게 사는데 거기에 골고다 언덕이 있어요. 그 언덕에 예수님이 가신 15개의 지점이 있습니다. 그 열두 번째 지점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자리에요. 그 자리에 성모교회라고 해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엄마가 세운 교회가 거기 있어요. 제가 무슨 이야기하려고 하느냐하면, 그 좁은 골목에서 온갖 종류의 십자가를 다 팔아요. 누가 만들어서 파는가? 아랍인들이 만들어서 팝니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오니까 장사하는 겁니다.
그냥 장사 용도로 만드는 십자가들이에요. 쉽게 말해서 살기 위해서 십자가 믿는 겁니다. 주님 앞에 심판받아야 마땅합니다, 이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십자가 믿는 것이 아니고, 진짜 내 모습은 주 앞에 저주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매일같이 느껴서 매일같이 이 기둥을 받치고 있고 내 목숨을 지탱하는 것은 내 노력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이 실제로 체험화 되어서 내 속에서 지금 작동하고 있다는 것, 펌프질처럼 움직이고 있다는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무슨 종교, 기독교든지 신학박사 학위든지 목사라는 자격증이든지 전부 다 밥 먹고 살기 위해서 동원되는 거예요. 예수고 성령이고 삼위일체고 목사 질을 해서 밥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그것을 사람들은 목회라고 했고.
목회가 복음을 가리고 있어요. 교회 다녀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를 알아야 돼요. 그것을 다른 말로 성령이 임하여, 진작 지옥가야 될 인간이 아직도 버티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능력이 매일같이 우리로 하여금 나의 본색을 까발리면서 박피작업으로 피부를 벗겨내면서, 대선 승리나 돈 좀 벌어서 행복한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만 너무 고맙고 감사하게 살아가도록 때론 병들게 하고 때론 재산도 날리게 하고 때론 수입이 예상치 않게 늘어나게도 하고, 그 어떤 변화가 오더라도 우리는 예수님의 공로로만 산다는 것, 이미 이것이 시작된 천국의 모습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마지막 때면 우리가 비둘기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공포에 질려서 울어야 마땅한데 그곳으로 몰아넣는 이유는 우리의 감추었던 진짜 우상 적인 요소를, 이단적인 요소를 까발리기 위한 하나님의 작전인줄 압니다. 어떤 자리에 있더라도 주님의 은혜 없이는 살지 못하는 것을 깨닫고 십자가의 공로로 인하여 우리가 이미 살은 사람으로서 예수님을 증거 하는 모든 용도로서 쓰인다는 것을 감격하면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