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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21211b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31-역사의 여백자유게시판에스겔

20121211b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31-역사의 여백

이름 : 한윤범(IP:14.39.134.60)

20121211b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31-역사의 여백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합니다. 첫 번째 “나는 여호와다, 나는 나다.”라고 할 때 이 말 속에는 뭐가 없느냐? 나는 여호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 했지만 실제로 거기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는 안 들어있어요. 왜냐하면 나는 여호와라고 여호와께서 이야기해버리면 이걸 줄이면 나는 나니까 우리가 납득이 되고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나였을 경우에 붙는 것, 나는 의사다, 나는 판사다 등 그런 직업, 우리 인간 사회에서 통용되는 내용을 채울 수 있는 그런 것으로는 이 안에 포함이 안 되어있는 겁니다.

이것은 기존에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모든 것에 섞이지 않는 것, 이걸 주일 낮에는 불가능성이라 했는데 인간이 가능한 것을 피해버릴 때는 불가능성이 되겠죠. 불가능성이 역사 속에 들어가면 불완전한 가능성이 돼버립니다. 분명히 구원은 됐는데 그 구원을 내가 관리에 나서면 벌써 도망가고 없는 거예요. 예수님이 날 구원했는데 그 예수님을 내가 붙들려고 한다면 주님은 빠져나가버려요. 내가 써먹을 수 있는 예수는 없어요. 그것은 주님이 일방적으로 계속 피조물로 써먹기 때문에 내가 붙잡을 수 있는 그러한 주님은 안 계신다 말이죠.

가능성인데 이게 안정적이지 못해. 불안정한 거예요. 한 번 믿고 그 다음부터 안 믿어도 되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이것은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서 주도권 싸움이 벌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믿게 되면 믿음의 주체가 내가 돼버리면 예수님은 내가 믿는 여러 개 중에 일부가 돼버립니다. 주님의 나라, 하늘나라도 나의 일부가 되고. 통지표에 나오잖아요. 국어, 영어, 듣기, 수학, 과학 그 중에 마지막에 종교 있듯이, 화가들 팔레트에 여러 가지 색깔 있듯이 하나님이 내 일생 중에 하나의 일부가 돼버리면 하나의 오락이 되고 취미가 되는 겁니다. 이것을 멸망시키고 이것을 심판하기 위해서 이것을 멸망시킬만한 이유가 됨을 보여주기 위해서 여기에 속해서는 아니 되는 거죠.

예를 들면 시크릿이라는 5인조 걸그룹이 부상당했습니다. 그러면 시크릿을 좋아하는 팬들은 이 세상 모든 움직임이 내가 좋아하는 가수를 지켜주고 보호해주는 것이 합당하니이다. 그런데 빗길에 미끄러져서 하나는 갈비 나가고 아팠을 때 도대체 세상이 왜 나를 힘들게 하느냐 이렇게 되죠. 그런데 세상이 힘든 게 아니고 시크릿을 지켜줘야 되는 그 생각이 나를 힘들게 한 거예요. 내가 예수를 믿는다면 내가 믿는 예수는 나를 힘들게 만들어 버려요.

그게 이스라엘 멸망을 통해서 이스라엘 멸망 전체를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 속에 집어넣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역사를 해석할 때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역사를 끄집어서 해석해야지 자기가 어렵다, 고생한다, 고난 받는다, 메시아 뭐 하시노 우리 안 도와주고. 이미 고난 받고 어렵다는 것을 기정사실화하고 거기다 메시아를 집어넣으면 그 자체가 몽땅 엉터리가 돼버려요.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여기에 나오는 에스겔, 요엘 전부다 세상 멸망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멸망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절개 면을 만든다. 이사야 같은 경우에는 절개 면 속에 누가 희생당하고 있죠. 그의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역사 속에 어떤 분이 신음하고 있고 아프고 피 흘리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사람들 눈에 띠지 않아요. 왜냐하면 건강한 나에게 필요한 사람은 건강한 영웅이 필요하지 희생당하고 피 흘리는 사람은 쓸데없는 존재에 불과한 겁니다.

그래서 내가 나의 역사를 만드는데 우리 보기에 쓸데없고 쓸모없고 나약한 그분이 내 역사 만드는데 치여서 울고 있더란 말이죠. 나의 찬란한 역사, 우리 교회의 아름다운 영원한 역사, 대한민국의 마르고 닳도록 하는 그 역사를 위해서 함께 나가라 해서 쓰레기 취급받는 그분. 이 역사 속에 그들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은 계셨는데 인간들이 자기 역사에 너무 도취되다보니까 진짜 하나님께서 하나님답게 일하시는 기능들은 전부다 사람에게 미움 받는 식이 되는 겁니다. 그게 누구냐 하면, 선지자들의 팔자와 일생을 통해서 우리에게 비친 겁니다.

여기 요엘, 이사야, 다니엘 등 묵시문학이 나오는데 스가랴, 특히 에스겔 같은 아픔을 사람들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 역사를 유지하는데 필요하다는 식으로 잘못 해석해서 집어넣었습니다. 그걸 재생산이라.

그러면 선지서를 예수님의 십자가로 연관하기 이전에 그 자체로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면, “없는 것이 있는 것보다 많다.”라는 논리를 적용시키게 되는 겁니다. 내가 있다고 여기는 것보다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것들이 더 많은 거예요. 그로 인하여 내가 있다는 의미와 가치라는 것은 내가 있다고 여기는 그 안에서만 내가 이해하고 정당성을 부여했지 만약에 새로운 없는 것이 다시 있음이 돼버리면 나의 가치와 나의 철학 이런 것도 한꺼번에 무너뜨리는 부정당해야 될 그런 처지에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역사는 간단한 답변 나옵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계속 부정당해야 될 역사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들이 있다고 여기는 것 말고 그들이 없다고 여기는 것 속에서, 없는 어둠 속에서 새로운 것이 발생됨으로써 현재 내가 있다고, 정당하다고 여기는 모든 것이 죄로 부정해서 드러날 것입니다. 그게 바로 계시적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대립적인 요소를 계속 재생산해냅니다. 현재 있다고 이해되는 것에 대해서 없다고 여기는 것을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대립적인 요소를 생산하게 되면 없는 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 데서 살리시는 진짜 여호와 하나님의 옛날 약속했던 그 기능이 지금도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신앙인들은 느낄 수가 있어요. 따라서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리면 현재 있음과 살았음을 계속 어디다가 돌려야 합니까? 있어도 없는 걸로, 살아도 죽은 걸로 계속 돌리는 거죠.

여러분들 방앗간에 가 보면 고추 빻아서 다시 통에다 집어넣고 또 더 잘게 빻아서 나오죠. 어릴 때 그걸 보면서 한꺼번에 다하지 뭐하려고 또 하는가 했는데 기계가 발달하지 못한 모양이라. 그런데 또 다시 갈고 하잖아요. 그처럼 없는데서 있게 한 걸 다시없음을 집어넣고 죽은데서 살았다 하면 또 집어넣고. 이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역사라 하는 것은 한 번 과거로 지나가면 사라진 건데 역사가 아니고 묵시 되면 역사가 되풀이 되는 반복이 되는 겁니다. 그 반복이 되려면 계속해서 차이가, 계속 이 세상 전부와 현재 세상 속에 일부를 차지하는 세상에 남아있는 나와의 차이를 계속 보여주는 거죠.

그런데 이 뜻은, 세상이 이만큼인데 내가 알고 있는 건 이만큼이다. 그런데 내가 알고 있는 바깥의 이만큼이 나에게 새로운 의미를 준다는 뜻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돼버리면 나는 이만큼인데 세상은 넓은데 이것 자체가 현재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의 전부기 때문에 안 되는 거예요. 이것은 뒤에 숨어있는 것, 내가 알고 있는 세상 전체도 포함되지 않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연관시키지 않으면 말이 어려운 이유가, 현재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이 이건데 이것 외곽에 또 있을 것이라고 여기면 있을 것이라고 남아있는 미지의 것도 사실은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의 전부에 포함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돼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하면, 내가 존재한다는 것부터 하는데 존재로 하지 말고 이걸 뭐로 바뀌느냐 하면, 내가 여기 있다는 사건화 시키면, 어떤 사건이 터지면 사건이 새로운 여백을, 공백을 만들어 버려요. “나는 세상 다 알았어.” 했는데 어떤 사건이 터져버린 거예요. 자식이 죽었다든지, 갑자기 교회가 불이 나버렸다든지, 갑자기 오년 전에 있었던 뺑소니 사건이 밝혀진다든지. 이것은 나의 우아하고 조심스럽게 다지고, 다지고, 깨끗한 것만, 고상한 것만, 신앙적인 것만, 착한 것만, 선한 것만, 아름다운 것만 담은 그 역사에 뭔가 절단돼버린 거예요.

일이 잘 풀려서 앞으로 뭘 하겠다고 계획을 잡아놨는데 갑자기 사건이 터지면 어떡하지? 앞으로 어떻게 살 거야? 괜찮은 말 나왔네요. 나는 앞으로,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어떻게 살 거야?” 평소에 내가 어떤 세계를 보는 것이 나 살기 위해서 그동안 세상을 구성해 온 겁니다. 이것은 남 살리기 위함이 아니고 나 살기 위해서. 그런데 그게 끊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나 앞으로 어떻게 살 거야?” 이런 생각이 든단 말이죠. 유대인이나 똑같은 문제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예를 들겠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간통하다 잡힌 여자 있지요. 간통하다 잡힌 여자가 간통해도 괜찮은데 왜 들통이 났는가가 문제거든요. 들통 나도 쉬쉬하다 끝날 문제인데 이걸 예수님에게까지 끌고 왔다는 거예요. 이걸 주일 낮에 설명했거든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그 여자 입장에서는 “나 앞으로 어떻게 살 거야”라고 생각하잖아요. 그 살 거야의 해답의 이 교회에 일임이 된 겁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 여자는 지금까지 자기 세계 안에 진리는 없었고 자기 안에는 자유라는 게 없었어요. 그런데 그 여자가 생각하는 자유는 마음껏 간통해도 안 들키는 그 범위를 자기가 생각하는 자유에요. 왜? 그것은 자기 정당성이니까. 자기가 죄인이 아닌 상태고. 자기는 간통은 했지만 살인까지는 안 했으니까. 뭔가 나름대로 변명하고 핑계될 게 있었는데 예수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한 명도 남지 않고 예수님께서 땅에 글 쓰니까 다 떠났지요.

결국 예수님 앞에 남아있을 위인이 아무도 없는 거예요.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사람들이 예수님의 세계에 대해서 자기 세계를 생각하다보니까 예수님의 세계와 연합될 수 없는 식으로 그동안 세계관을 구성해 온 거예요. 여자도 마찬가지에요. 간음하면 나쁘고 간통하면 나쁘다는 것은 그것은 기존에 인간들이 생각했던 나쁜 세계였습니다. 바리새인이 자기에게 나쁘다고 할 때 자기도 나쁘다고 동의했어요. 하지만 그것은 자기들 인간들끼리 구성한 윤리 도덕이고 선과 악이 됐단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 입장은 예수 앞에 존재할 수 없는 것들은 모조리 다 간통했던, 안 했던 간에 살인했던, 안 했던 관계없이 그것은 악이 되는 겁니다. 죄가 되는 겁니다. 자유가 없고. 여기서 예수님이 자유가 없다는 말은, 악마한테 묶여 산다는 뜻이에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는 것은 죄에서부터 너를 자유케 한다는 말이거든요. 그런데 그 여자는 간통함으로써 간통죄로부터 자유 얻은 거예요. 간통 안 한 여자가 아니라 간통죄로부터 자유 얻은 거예요. 간통죄에서 자유를 얻으려면 본인이 간통하나, 안 하나 내가 죄인인 것을 알게 하는 새로운 기준 앞에 본인이 섰어야 되는데 그 기준조차 어느 인간도 설 수 있는 자격자 없습니다. 왜? 다 돌 놓고 가버렸으니까.

태양을 맨 눈으로 보겠습니까? 예수님이 지적하는데 그 앞에서 당당하게 눈 떠서 쳐다볼 인간이 누가 있겠어요. 접근할 수 없고 베드로가 그렇게 삼년 동안 따라다녀도 결국 헤어질 수밖에 없는 예수님을 이 여자는 간통이란 그걸 해서 에이전트, 하늘의 중보자 앞에 섰을 때 “내가 너를 용서하노라.” 이 용서 말고 우리에게 더 귀한 복음이 있겠어요? 없습니다. “네가 무죄하구나.” 이게 아니고 용서란 말을 했어요. 네가 뭐든지 하라는 게 아니라 “네가 죄인이었었었었었었어.” 여섯 개도 모자라. 죄인인 것을 그동안 모른 거예요.

여자가 간통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고 이미 그전부터 죄인이었다는 것을 티낸다고 간통한 거예요. 그러니 우리가 살아가는 움직이는 모든 것이 죄를 티내는 거예요. 티내는 것을 고맙게 여겨야 됩니다. 티를 내야 그걸 매개로 해서 주님 십자가 앞에 설 수 있도록 주께서 그렇게 조치해주신 결과가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겁니다.

숟가락에 밥 뜨는 행위, 그 행위가 얼마나 큰 죄인지. 왜냐하면 사고 나서 깁스하고 있으면 누가 밥 떠줘야 되잖아요. 그런데 깁스 안 한 상태에서 밥을 뜨면서 우리는 당연하다고 여기잖아요. 그런데 이것조차도 은혜인 것을 잊어버린다고. 생각을 못하는 거예요. 밥 떠먹고 빨리 자기 역사를 이뤄야 되니까. 그러니 우리는 발걸음을 세는 것도 머리카락 세는 것도 주의 은혜로 된다는 것을 나의 역사에 집착하다보니까 그걸 전부다 쓸데없는 걸로 처리해버린 겁니다. 쓰레기로. 선지자들은 바로 우리가 갖다버린 그것을 막아선 거예요.

주일 낮에 그런 예를 들었습니다만 눈이 많이 와서 차가 옆으로 새는 거예요. 실제로 제가 경험했으니까. 진짜 죽을 뻔했어요. 경상북도 꼭대기 춘양에 갔을 때 경찰관이 없고 막아놨어요. 그런데 현지인들이 가축 키운다고 치워 논 거예요. 올라갈 때는 잘 갔는데 내려오는데 1단 기어 넣고 그냥 맡겼지요. 삐질삐질 가는 거예요. 그래서 알았어요. 이게 통과될 길이 아니구나. 차가 오면 그냥 박지요. 마침 차가 안 와서.

그걸 느끼면서 이 길로 가면 안 된다고 맨 몸으로 막아선 분이 바로 선지자고 예수님이고. 막아서다가 피 터지고. 그 피가 뭐냐? 네가 이쪽으로 가서는 안 된다고 막아선 그 사건인 거예요. 우리는 존재 때문에 존재에서 역사를 만드는데 내 존재를 살릴 수 있는 공동체를 원했던 겁니다. 어느 공동체에 살면 나는 더 잘 살 수 있을까. 어느 나라에 이민 가면 지금보다 살림이 나아질 수 있을까. 항상 유력하고 영웅적이고 잘 먹고 잘 사는 어떤 주변의 인물들을 설치해놓고 그 속에서 자기존재를 살리려는 이 존재중심에서 그건 넓은 길이야, 그거는 멸망의 길이라고 막는 사건이 터져야 돼요.

십자가에 죽으심은 14년 전인가 몇 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그 사건이 사도 바울에게는 매일같이 일어나는 지금 사건이에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고 십자가에 같이 죽으신 예수님이 내 안에서 살아서 나를 관리하고 있다는 겁니다. 십자가 복음을 위해서 날 사용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같은 마음이 아니고 고린도전후서, 로마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해석 하나도 안 됩니다. 데살로니가전후서, 사도 바울 편지 해석이 안 돼요. 베드로도 마찬가지고 다 마찬가지지만. 해석 될 수가 없어요. 복음으로 해석하지 않으면 신약성경 전체가 해석할 수가 없어요. 이미 결론은 나와 있습니다. 제가 내린 결론이 아니고 새 언약이라고 살과 피라고 결론이 나와 있는데 왜 다른 결론이 튀어나오느냐 말이죠.

이야기를 계속해봅시다. 아까 인간 존재로 생각한다면 인간 존재에서 사건화 시키면 미처 몰랐던 공백이 나옵니다. 그러면 이 사건에서 새로운 존재로 전환됩니다. 나라는 인간, 나라는 존재는 없는데서 있게 하고, 어제 말고 오늘도 있게 하고, 지금도 죽여도 되는데 그러니까 “내가 어떻게 삽니까?” 하지 말고 왜 안 죽이냐고 질문을 그렇게 해야 돼요. “주여, 왜 저를 죽이지 않습니까? 자꾸 살리는 이유가 뭐예요? 죽는 게 정상인데 왜 자꾸 산다는 비정상적인 상태를 만들어냅니까?”라고 해야 되죠.

그럴 때 내가 이미 죽었다는 사건으로 세상을 보게 되면 이 세상은 사실은 같이 죽은 세상이 되고 죽은 세상이니까 하나님이 여기에 심판하는 것은 너무나 합당하죠. 왜냐? 죽은 세상이 살겠다고 하니까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니까 그것은 통째로 우상 섬기는 공동체, 우상 섬기는 세상으로 바로 볼 수 있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 예수, 명칭은 관계없이 우상이구나.

그렇게 사건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 우리는 이래서 나는 세상도 알고 나도 알고 다 알았다고 생각하겠죠. 다 알았네가 약간만 시간 지나면 지식의 창고, 아카디아라 해서 정보의 창고에 저장이 됩니다. 나는 이런 걸 알고 있다고 한다면 그 다음날 또 새로운 사건이 터질 때 “주께서 지금 일하고 계시는구나. 그러니까 날마다 나를 조지지.” 또 예수님의 십자가를 다시 한 번 생각토록 하는 계시로 삼도록 유발시킵니다.

그걸 다른 사람이 봤을 때 온유고, 화평이고, 자비고, 양선이고, 형제우애고 이런 겁니다. 만약에 이게 없으면 탐욕이고, 당 지음이고, 시기요 질투가 되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의 열매가 아니고 성령의 열매에요. 성령의 열매는 우리한테는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항상 가능한 것만 하니까. 인간이 생각한 성령의 열매가 진짜 성령의 열매를 오늘도 모독하고 있어요.

사건이 아니고 존재로 시작하니까 “하나님이여, 나라는 존재가 이런 열매를 맺었으니까 하나님이 지켜주셔야 됩니다. 그런데 왜 이런 사건 벌어집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조치 잘못한 겁니다.” 하고 따지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그게 바로 시기와 질투와 탐욕 이런 거예요.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다는 증거가 또 나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대로만 해요.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은 우리로 지키라고 준 게 아니고 하나님 스스로가 그 말씀을 지키는데 지키는 적용대상으로 우리가 거기에 뽑혔다는 거예요. 선택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 선택한 게 아니고 말씀을 적용시키기 위해서 선택된 거예요. 긍정적으로 적용시키기 위해서. 부정적으로 하는 것은 이방인이지만.

다니엘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분명히 70년 만에 다시 돌아온다. 이건 다니엘이 계속 주장했던 거예요. 70년 되면 돌아온다. 그런데 70년을 어디에 배치했느냐 하면 크로노스, 에이온 세대에, 그리고 자기가 알고 있는 70년 시간 단위에 온 거예요. 586년에서 70년이면 기원전 516년 되고. 605년에 70년이면 535년 쯤 되고. 날짜 계산이 모호하다니까요. 605년이란 초창기에다 적용시키면 에스라, 느헤미야가 오는 게 맞고, 두 번째로 하게 되면 에스라 두 번째 성전 짓는 그 시기가 되고. 어느 장단에 맞춰야 될지. 이것도 맞지 않게 돼있어요.

다니엘은 70년 만에 돌아온다고 할 때 70년이라고 알고 있던 그 개념이 70년이 적용이 안 되는 새로운 70년 의미를 알게 돼요. 70년 만에 돌아온다는 것이 우리가 짜놓은 시간의 단위에서 70년이 아니고 그 당시에 멸망되기 직전에 멸망될 수밖에 없는 그쪽에 유용한 70년 만에 돌아온다고 한 거예요. 70년 만에 돌아온다는 말은

말로 하면 어렵기 때문에 그림으로 해보겠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있습니다. 70년 만에 돌아온다고 예레미야를 통해서 이야기했거든요. 이 사람들이 70년이라고 이해했던 이스라엘 속에 진짜 70년 만에 돌아올 사람이 따로 있는데 그들은 자기들 전체가 70년 만에 돌아온다고 다들 생각한 거예요. 다니엘도 그렇게 생각하고 에스겔도 그렇게 생각하고 바벨론에 포로 잡혀갔습니다.

70년 만에 돌아온다는 그 시점, BC605년이라 합시다. 에스겔 잡힐 때인데 그때 생각했던 이것이 지나가버리면 없는 거죠. 역사는 지나가면 없는 겁니다. 그런데 묵시는 없을 때가 없어요. 그래서 다시 여기서 70년 와서 돌아보니까 그때 70년이 70이레가 된 거예요. 바뀐 게 아니고 이야기할 대상을 바꿔치기한 거예요. 이미 70년 포로 잡혔다 돌아온다는 것이 오해였다고 아는 사람에게만 70년이란 의미를 주는 거예요.

아까 하나님께서는 대립되는 조건을 재생산한다 했지요. 70년 만에 돌아온다고 손꼽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그것마저 대립되는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지요. 그러면 70년 만에 돌아온다는 것은, 내가 연도측정에 의한 일방적인 주장이었다는 것을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겁니다.

신년 초에 교회마다 성경말씀 집어넣고 돈 받고 하나 뽑아내고. 올해는 만수무강하고, 아이들 잘 뛰어놀고, 사업 잘 되고 할 때 그 중에서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이 있다면 신년 초에 기대했던 그 모든 것이 이월, 삼월 되면서 벌써 과거에 내가 기대했던 희망은 내 욕심이라는 바탕에서 욕심의 열매로서 희망을 은근히 고대했구나. 그런데 이런 인간을 주의 성령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바뀌어질까.

십자가의 능력이 아니면 아직도 세상적인 희망에 꿈에 그게 삶의 동기부여로서 살아갈 건데 성령이 개입하니까 그것이 바로 또 내가 미처 몰랐던 죄가 된다는 걸 깨닫게 되죠. 그러면 남는 것은 항상 내가 주님 앞에 살고 있다는 거예요. 그냥 멍청하게 계신 주님이 아니고, 항상 우리가 주님 앞에서는 멍청한 인간으로 날마다 재생산 되는 거예요. 얼마나 멍청한지 예수님밖에 몰라. 어떤 사람이 나보고 이근호 목사는 피밖에 모른다고. 저한테는 엄청난 칭찬이죠. 그 사람 주장은 피도 알아야 되겠지만 교회도 알아야 된다는 그런 이야기 아닙니까. 피 따로, 교회 따로. 그러면 구원받는 것은 피만 알면 구원 못 받고 피도 알고 교회 알아야 구원된다는 거잖아요. 그 논리에 의하면.

그러면 두 개를 안다는 것은, 항상 두 개의 주제는 한쪽을 사랑하게 되면 한쪽은 반드시 미워하게 돼있다고요. 사람의 모든 행동은 미움이냐, 사랑이냐 감정에서 나와요. 컵을 먹을 때 그냥 먹는 게 아니에요. “나에게 아프다고 욕했지. 컵 먹고 건강할 거야. 이놈의 자식들.” 사람이 미워하는 감정으로 물을 마셔도 그냥 마시는 게 아니라니까요. “맛있잖아. 나한테 못 되게 하는 인간들한테 자랑해야지.” 괜히 미워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니까요. 사람은 행동할 때 그냥 행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마 정박아도 그럴 거예요. 항상 어떤 것은 미워하고 어떤 것은 좋아하고 그런 감정을 실어서 행동하게 돼있어요. 그걸 주님이 모를 리가 있어요? 나도 아는데. 계속해서 나한테 이익 되는 것은 무조건 좋아하고 나한테 손해나는 것은 무조건 그걸 복수하는 싶은 충동으로 인간은 살아간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신년 초에 말씀 뽑기 할 때 갖고 있던 희망이 결국은 주님을 미워할 수밖에 없는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사랑의 대상이 완전히 바뀌어버려요. 뭐냐? 용서했으면 더 이상 주님 앞에 이것 달라, 저것 달라고 입을 벌릴 자격이 없습니다. 용서받았으면 그걸로 끝나는 거예요. 뭐 주시옵소서. 교회 부흥되게 하소서. 다 소용없는 거예요.

그게 몇 초 안 갑니다. 어떤 사람은 몇 분까지 가지만. 그 생각하다 차 박아보세요. 갑자기 생각이 확 달라집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지? 하나님께서 그렇게 조성해서 기어이 우리를 석탄난로로 사용해서 주님의 하늘나라 따뜻하게 만들어요. 예수님의 피로만 하늘나라 따뜻하거든요. 범죄한 우리를 계속해서 연료로 사용해서 할 때마다 주님의 공로만 높아지도록 우리를 철저하게 이용하십니다.

그래서 제가 모든 중심은 우리 구원중심이 아니고 십자가 피 흘림중심이라고. 하나님의 존재중심이 아니고 하나님의 피 흘림 사건중심으로 세상은 짜여있습니다. 그걸로 끝나는 거예요.

이제 어렵습니다. 70년이 70이레로 바뀌면서 여기서 새로운 사실이 가미됩니다. 70년이라 할 때 쫓겨난 것은 우리 공동체, 돌아오는 것도 우리 공동체가 그대로 돌아오는 것. 물론 후손들이죠. 70년까지 못 사니까. 어쨌든 간에 우리는 죽어도 이스라엘 공동체는 살아남아서 포로 잡힌 이스라엘이 돌아온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70이레는 공동체가 돌아오는 것이 아니고 메시아가 돌아와요. 인자가 돌아와요. 인자가 돌아오기 위해서 뭔가 두 개의 절단, 끊어짐이 있어요. 시간 자체가 동강이 나야 돼요. 7이레, 62이레, 그 다음에 마지막 1이레. 시간을 동강을 내면 이렇게 됩니다. 이걸 세 동강으로 내면 한 선으로 표현이 안 되고요. 이쪽 7이레 동강이 이렇게 끊어져서 점선이 되고 그 다음에 다시 등장하는 것이 실선 되면서 나머지는 점선 되고, 또 떨어지면서 1이레 되고 점선 됩니다.

동강난 7이레를 그 당시 사람들은 동강이로 보지 않아요. 성전을 지었잖아요. 이왕 있는 성전을 다시 없는 성전으로 간주하고 싶지 않아요. 사람의 심보가 그렇습니다. 사람은 과거 없는 현재 없잖아요. 뿌리 없는 엄마 없는 자식 없듯이. 그래서 안 믿는 사람들이 조상도 안 섬기면서 무슨 하나님 섬기느냐고. 뿌리를 알아서 네 자신의 존재를 알 수 있다는 거예요. 성전을 지었으면 기어이 성전을 밀어붙이게 돼있어요. 그러면 성전을 지었는데 성전이 깨어질 때 누굴 욕하고, 누굴 핍박하겠습니까? “우리가 잘 지은 성전을 깬 놈이 누구야.” 하고 나오죠.

이게 뭐냐 하면, 에피파네스 4세에요. 성전에서 화작질하고 성전을 깨고 성전에서 분탕질하는 에피파네스 4세, 그야말로 셀류쿠스 왕조의 왕이 있어요. 모든 것을 새로운 문명, 헬라로 바꿨단 말이죠. 고상한 노래에다 힙합을 집어넣은 것과 똑같은 거예요. 새로운 문명을 집어넣으면 아이들이 누구한테 갑니까? 새로운 문명을 접하죠. 클래식과 고상한 음악을 듣던 사람이 강남스타일은 이게 무슨 이런 스타일이 다 있느냐고 하겠죠. 지금 조회수가 9억이 넘었잖아요. 그러니까 그걸 핍박하는 거예요. 어제 오후도 그런 소리 했습니다만 팔십 넘은 할머니가 지하철에서 너희들 박정희 때문에 사는 줄 알아. 이번에 박근혜 안 찍으면 다 죽어.

사람은 성전을 지었으면 그걸 포기를 안 합니다. 성전이 깨지면 수리까지 해요. 교회를 부정당하면 곧 나의 역사를 부정하고 나의 역사를 부정하는 것은 나의 존재를 부정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건화 시켜서 우리 존재를 반드시 존재 가치도 없는 걸로 해야 돼요. 왜? 예수님이 우리한테 그런 대우를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없어져야 된다고 생긴 사건이 새 언약 사건, 십자가 사건 아닙니까. 그 사건을 우리한테 적용시키면 내 존재로 살기 위해서 주님을 하나의 존재 없음으로 만든 장본인이 바로 접니다. 기존 악마에 속한 존재 위주로 살던 세계관이 나로 하여금 그렇게 일을 시켰습니다. 예수 모른다고 베드로가 세 번 이야기했죠. 소녀가, “아저씨도 같은 편인데.” “나, 몰라.” 천하 자식보다 아가씨가 더 좋은 모양이라.

지금은 계속 성전 짓는 거예요. 지금도 유대인들 성전 준수합니다. 거기에 핍박 받을 때 성전 고수하는 사람은 이걸 원수라 하겠지요. 성전을 부정하는 원수라는 대우를 받은 그런 절차가 사건화 되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성전은 뭡니까? 이 사람들이 성전을 지은 이유가, 70년 만에 돌아왔다는 하나님의 역사, 놀라운 구원의 역사의 기념물이 성전이잖아요. 마치 법궤, [레이더스]에 나오는 성궤, 또는 모세의 지팡이, 그리고 기드온이 입었던 에봇, 그런 것들이 앞에 있는 사건에 의해서 기념하기 위해 생긴 거죠. 다윗 같은 경우에는 그 땅을 다윗의 자손에게 주었다는 기념물이 성전이잖아요. 그런데 그걸 부정한다는 것은 인간적인 의미에서는 뭘 부정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인데 이건 있을 수 없거든요. 하나님에 대해서 스스로 부정한다? 이것은 하나님 지옥 가렵니다. 이런 인간 없잖아요.

그러니까 그걸 남겨서 계속 후손들에게 기념하도록 해서 하나님께서 과거에 이런 놀라운 일을 하셨다는 것을 접붙이도록 유지를 해야 하는 것이 선교 신앙인들의 모범이고 태도라고 주장한단 말이죠. 인간들은.

그런데 빌립 집사가 광야에서 에티오피아 내시를 만났지요. 그 내시가 십일조 얼마 했습니까? 에티오피아 내시가 안식일 지켰습니까? 사도 바울은 율법을 모르는 사람에게 성령이 오니까 그 사람도 하나님의 이스라엘 참 백성이 돼버리죠. 사도회의에서 그 이야기를 했잖아요. 예수님 동생 야고보도 그 말 듣고 인정했지요. 율법 없이도 구원받는다. 말이 쉽지 어려워요. 율법 없이 구원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요.

율법 없이 구원된다는 말은 아무것도 안 해도 구원된다는 말이에요. 뭐든지 지키면 법이 되니까. 아무것도 안 해도 외부에서 이질적인 성령이 오니까 졸지에 구원이 되고, 구원이 되는 정도가 아니고 더 놀라운 사실은 졸지에 의인이 된다니까요. 그러니까 그 당시 유대인들은 도저히 납득이 안 되고 용납을 못하는 거예요. 사람이 의로운 행동을 할 만한 근거로가 있고 그걸 근거로 해서 그 말씀을 지킬 때 의롭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 뭐라 합니까? 인간이 의롭게 되는 것은 인간을 의롭게 함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 행동을 하면 하나님 본인이 의롭다는 걸 드러내기 위해서 의롭지 않은 인간을 의롭게 해서 하나님이 의롭다는 이것이 하나님 뜻이라고 본 겁니다. 그래서 모든 율법은 하나님이 지킬 몫이지 우리가 지킬 몫이 아니라고 본 거예요. 이거는 반전입니다. 9회말 홈런 치겠다고 지금 문재인이 벼르고 있는데 이것은 모든 종교, 모든 신앙을 다 부셔버리는 반전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구원받을까부터 출발하는 그 안목이 이제는 하나님이 스스로 의롭게 되기 위해서 간음한 여인, 세리, 창녀, 강도, 거기다가 불신자까지 안식일도 모르고 십일조도 할 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는 그렇게 하셔서 내가 의로운 행동을 했기 때문에 무조건 의롭다. 토기가 토기장이에게 그럴 만한 권한이 있니, 없니 따지느냐? 내가 하겠다는데 내가 의롭다고 하는데 니가 왜 따지느냐?

우리가 신앙인이라면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을 구원받은 본인이 본인한테 따지면 안 돼요. 그러면 말씀을 믿는 게 아니고 구원받았다는 자기 자신을 믿는 게 되기 때문에 그건 주의해야 돼요. 주의할 문제도 아니지만 하여튼 굉장히 주의해야 할 문제에요. 왜 자꾸 하나님 조치는 생각하지 않고 거기에 반응하는 나의 행동의 리액션만 신봉하느냐 말이죠. 우리 자신을 부정하지 못하고.

예수님께서는 7이레에서 62이레 되면서 이것이 바로 성전이 파괴당하는 거예요. 성전이 파괴당하면 70년 만에 돌아온다는 흔적도 어떻게 돼요? 아니네. 돌아와서 옛날 다윗처럼 제사 지낼 줄 알았더니만 성전이 깨어지면 70년이란 헛소리네. 돌아와서 고작 짓고 보니까 옛날 솔로몬 성전에 비해서 너무 초라해. 셋방살이하다가 15평짜리 아파트 살면 그렇게 좋고 천국인 것을 150평짜리 살다가 사업 망해서 15평에 살면 차라리 자살해버립니다. 이것은 사는 게 사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성전 지었더니 이게 너무 초라해요. 그러나 처음부터 주님께서는 솔로몬 성전, 다윗 성전을 이야기할 때는 지상 성전을 말한 게 아니고 하늘나라 성전을 말한 겁니다. 그런데 그 당시 사람들은 납득할 수 있는 시간적 순서가 되지 않아서 그래요. 아직까지 하나님이 만드신 대립적인 조건에 재생산하는 그만큼 생산 된 조건 속에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오늘 중요한 것 알았지요. 항상 대립된 조건을 매일같이 재생산해서 우리로 하여금 죄를 더욱더 즐겁게 죄인 되게 하십니다. 죄도 아닌데 죄인 되게 다 만들어요. 그래놓고 그런 조치가 의고 그 의에 말려들기 때문에 너도 의인되는 거예요. 주의 하신 일에 말려들어서 의인된 거예요. 의를 따로 소지해서 의인되는 게 아니고 주께서 하신 조치 안에서 의인되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 다음에 1이레는 뭡니까? 성전 깨버렸지요. 마지막 1이레가 반으로 나눠집니다. 시간이 끊어진다는 말이 안 되는 소리에요. 시간이 고무줄입니까, 다리입니까. 시간이 어떻게 끊어집니까. 도대체 철학을 공부하고 많이 생각해도 시간이 끊어진다는 성립이 안 돼요. 시간이 의식인데 의식이 끊어진다? 교통사고 났습니까? 안 그러면 술을 너무 많이 먹어서 필름이 끊어졌는가.

시간이 끊어진다는 말은 시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고 이레,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하실 사건을 시간으로 표현을 해본 거예요. 46년 동안 지은 성전을 삼일 만에 다 부수고 삼일 만에 새로 지으면 거기서 영원한 제사가 이루어질 것이다. 70이레란 시간으로 표현해 본 겁니다. 그러면 주께서 십자가 죽으신 것은 세상의 모든 것과는 완전한 절단이고 끊어짐이에요. 그걸 인간의 재봉이라든지 실과 바늘과 꿰맬 수가 없어요. 다리를 놓아서 건너올 수가 없어요.

그래서 대전강의에서 이쪽에서 이쪽으로 못 건너가고 저쪽에서 밀려오면 된다고 했어요. 그래서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내가 이 세상이 속하지 아니함 같이 너희도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 반투명막에 있어서 이쪽에서 못 건너오잖아요. 그런데 성령이 밀어버리면 우리는 어~ 하다보니까 이 세상에 등장한 겁니다.

성령이라 하는 것은 등장하지 안 해야 될 존재가 예수님 증거하고 이 땅에서 태어나야 할 존재에요. 그게 바로 선지자입니다. 모태로부터 이미 택정함을 입어서 태어나서 남들이 보지 못한 천상회의까지 참석하고 내려와서 욕 얻어먹고. 네가 하는 모든 말은 나한테 욕하는 것으로 들린다. 옳은 소리죠. 욕하는 거죠. 부정하니까.

욕하는 게 아니고 장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70년 만에 돌아온다. 70년? 그러면 기다리면 되겠네. 기다려도 이게 끊어진 시간이란 사실을 그들은 몰랐던 겁니다. 그래서 구약의 어떤 사람도 신약의 어린아이보다 더 크지 못한다는 말이 거기서 나온 거예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주께서 의로운 작업에 동원됐다는 이유 때문에 심지어 돌멩이라도 메시아라고 환호할 것이라는 아주 놀라운 말씀, 돌멩이가 뭐 안다고 돌멩이라도 소리칠 것이다. 그 말씀처럼 하나의 돌멩이에 불과한 우리를 오늘도 소리치게 하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 모든 것이 다 우리를 위함이 아니고 예수님 주되심과 예수님이 하신 일로 인하여 천국이 이루진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를 끌어당겼으니까 날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가 얼마나 위력이 대단한지를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가운데서 파악하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20121211b 부산강의.hwp (54.0K), Down: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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