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211a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31-역사의 여백
20121211a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31-역사의 여백
이름 : 한윤범(IP:14.39.134.60)
20121211a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31-역사의 여백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제22절 [구약의 묵시문학] 해봅시다. 여기에 침멀리의 교재에 의하면 포로기에 포로 잡혀도 포로 중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변함없이 존속한다는 사실에서 이스라엘은 살아있다고 돼있어요. 비록 우리 이스라엘이 멸망해도 하나님이 계신다면 이스라엘은 안 죽었다는 그런 믿음을 그들이 가졌다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난해한 게 원래 하나님은 뭐냐 하면, “나는 나다. 나는 스스로 있다.”는 하나님에서 여기서 어떻게 역사라는 것이 펼쳐질 수 있는지 상당히 난해한 문제입니다. “나는 하나님이다. 나는 스스로 있다.” 그것과 이스라엘 백성이 만들어져가고 있다는 것이 어떻게 하나의 메커니즘으로 프로세스로 이어질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걸 만약에 백성들이 모르게 되면, “우리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다.” 해놓고 지 신세는 포로 잡혀있는 신세니까 여기에 무슨 미래에 우리나라가 다시 다윗 때처럼 번성할 수 있다는 그런 희망을 정당성이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장차 하나님께서 이렇게 저렇게 하셔서 다시 포로 잡힌 데서 해방되어서 옛날 약속의 땅에서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러한 정당성이 “나는 나다.”에서 어떻게 도출될 수 있느냐는 문제거든요.
오늘날 말로 바꿔봅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다. 그것과 그래서 교회를 하나님이 지켜준다고 하면 어떻게 매치가 되고 연결이 되느냐 이 말이죠. 교회 없어도 하나님, 예수님 이러면 되잖아요. 예수님은 하나님이다. 구주시다 해놓고 교회는 따로 유지하고 챙겨야 되니까 어떻게 매치가 될 수 있느냐. 그것을 책에서 말고 우리가 알고 있는 복음적으로 해보면 이렇습니다.
나는 나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여기에 필히 멸망이 있어야 돼요. 어떤 멸망이냐 하면, 세상 멸망이 있어야 되겠죠. 세상을 멸망시키는 여호와다. 이렇게 돼야 됩니다. 세상이 멸망되려면 멸망하는 이유가 성립돼야 돼요. 그냥 장사나 부수는 것이 나는 나다와 연결 안 되니까. 그 이유는 세상이 그냥 고요하게 있으면 안 되고 세상이 여호와 하나님 말고 다른 신을 섬겨줘야 돼요. 해운대 바닥이 전부다 절로 바뀌어야 되고, 교회라고 해도 이단 돼야 되고. 세상이 그렇게 무르익어야 돼요. 성숙해야 됩니다. 천하 자식이나 아비나 남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하늘나라에 합당치 않다는 말을 하려면 천하 자식이 복음을 거부해줘야 돼요. 억지로 할 수는 없는 문제지만.
단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이 이 땅에서 일하시는 흔적이 뭐고, 증거가 뭐냐고 물으면, 이런 포로기, 묵시문학, 또는 후기선지자의 입장에 있으면 복음과 비 복음이 다투고 경쟁하고 싸우고 충돌하는 그 자체가 증거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 어디 있어? 하나님 보여주면 믿을게?”라는 말을 들을 때 “이러니까 하나님 계시잖아.” 하는 유일한 증거는 다툼이에요. 복음 믿는 사람이 세상한테 미움 받는 겁니다. 다른 증거, 병 나았다, 기도해서 효과 봤다 그런 것으로서는 안 돼요.
누가복음 21장 12절에 제 말이 나와 있습니다. 마지막 때 이런 증거가 있을 때에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에게 손을 대어 핍박하며 회당과옥에 넘겨주며 임금들과 관장들 앞에 끌어가려니와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
예수님의 일대기가 구약성경 전체가 거기에 담겨있어요. 예수님은 이스라엘로 출발하는 겁니다. 그게 크리스마스 때 인용하는 것 있죠. 마태복음 2장에 동방박사 왔던 그 시기에 내가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러내었다는 호세아 말씀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의 출생 안에다 이스라엘 과거에 있었던 모든 시작과 끝을 포함시키는 겁니다.
제가 그렇게 이야기하지만 침멀리는 그런 걸 잘 모르면서도 자기가 하는 말 중에 연관이 되는데 여기에 보면 이렇게 돼있습니다. 묵시문학은 질적으로 다른 존재가 침투함으로 말미암아 종국에 마지막 때에 질적으로 세 개의 시간이 개입된다. 그걸 에이온이라.
헬라에서는 시간이 세 가지 있어요. 에이온, 크로노스, 카이로스가 있어요. 에이온은 질적으로 다른 시간. 그러니까 이것은 어떤 시간을 말하는 게 아니고 시간대, 긴 시간, 역사라고. 보통 우리 상식으로 역사는 하나밖에 없잖아요. 역사가 둘될 리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헬라 사람은 역사 자체가 다른 질의 역사가 있다는 거예요. 역사대가 두 개라면 두 개가 서로 같은 질이 아니죠. 같은 질이라면 하나밖에 없으니까. 다른 질의 역사기 때문에 두 개의 시간대, 두 개의 에이온이 있다. 역사를 두고 이야기합니다.
크로노스란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밖에 없는 것. 과거가 누적이 되어서 현재가 되고 현재가 앞으로 밀면 미래가 되고. 그래서 현재 없는 미래 없고, 과거 없는 현재는 없지요. 크로노스는 결국 심리적인 시간이라 할 수 있는데 인간이 생각할 때 시간은 항상 심리적이거든. 시간 의식적 아닙니까. 시간이란 몇 킬로그램이라든지 몇 미터 하는 식으로 측정하지 못하고 시간에 대해서 공부 안 해도 “시간이 뭐지?” 하면 과거-현재-미래라고 나오잖아요. 그게 크로노스에요.
카이로스는 때를 이야기합니다. 어떤 지점을 이야기해요. 몇 시에 만나자. 어떤 지점을 카이로스라 합니다.
이 세 가지로 구분했을 때 사람은 크로노스, 카이로스는 이해돼요. 특히 불트만 같은 신학자는 카이로스를 굉장히 중요시 여깁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을 믿음이라 하는 것은 바로 역사, 크로노스 속에 카이로스, 결정적인 지점, 이걸 사건이라 하는 거예요.
사건 이야기하면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세상의 모든 변화는 사건을 통해서 사실이 만들어진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라이프니찌란 철학자도 그런 이야기한 적이 있어요. 사람이 어떤 특정을 기억한다는 것은 그냥 스쳐지나가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고 뭔가 특징 잡아서 나한테 사건화 될 때 그것만 기억해요. 두 사람이 같은 영화를 보고, 같은 풍경을 보고, 같이 해운대 놀러가도 그 사람이 자기의 과거와 연관돼있는 “이 동백섬, 옛날에 처음 사귀었던 여자와 헤어졌을 때 처음에 손잡았던 이 나무가 그 나무다.” 그것은 지 혼자 카이로스지 그 여자 만나본 적도 없는 옆의 친구는 아무 의미 없지요. “동백섬, 옛날 집 지어놓고 정상회담한데.” 이것은 자기 나름대로 하는 거예요.
그런데 헬라인들이 에이온을 언급하는 이유가 이해되는 겁니다. 옛날에 내가 그 여자와 어떤 시점에 동백섬에서 놀았다면 그때부터 그 여자와 관련된 새로운 계열의 사건들을 찾아내기 시작합니다. 그 여자는 부산의 어느 여상 출신이었고, 중학교는 어디 나왔고, 사는 데는 어디고. 이미 이루어진 잊어버렸던 사건들이 새로운 계열을 이루면서 새로운 에이온이 만들어지는 거죠.
이것은 모든 인간들이 그렇게 살아가요. 조상 숭배하는 것. 조상숭배를 왜 합니까? 조상이 있으매 조상들이 어떤 착한 일을 하고, 선한 일을 하고, 합당한 일을 해서 오늘날 우리 자손들이 생겨났다고 할 때 그 사람의 집안의 에이온이 되는 거죠. 우리 조상을 따로 있기 때문에.
결국 헬라인들이 이렇게 구분하는 것은 어디서 나온 거예요? 인간의 아이디어지요. 여기서 다시 한 번 따져보면 문제가 있어요. 뭐냐 하면, 일탈에 불과한 건데 그것이 어떻게 합당한 역사로서 인정받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일탈이란 노선에서 벗어나는 거잖아요.
고등학생은 술 먹고, 담배 피워서는 안 된다는 게 정 역사인데 “내가 고3 때 술 먹었다. 그런데 술 취해서 17:1로 싸웠다.” 그 사람은 그 중심으로 자기 존재를 정당화 시키는 새로운 역사를 임의로 만들어낼 때 그걸 과연 우리가 올바른 역사라고 인정할 수 있습니까? 남들은 인정 못하죠. 17:1부터 의심스러우니까. 사람은 입만 떼면 자기중심의 역사를 끄집어내는데 그 역사를 우리가 과연 동의할 수 있습니까? 못해주잖아요.
그런데 동의 못한 역사를 끄집어내는 인간들이 모여서 공동체를 이룰 때 그 공동체가 정당한 공동체냐 말이죠. 아니죠. 그러면 인간들이 개인적으로 끄집어내는 역사는 그 공동체를 지지할 수 있는, 유지할 수 있는 정당성이 없다면 그렇다면 개인의 역사는 묵살하고 우리 공동체는, 우리 이스라엘은 진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내세울만한 역사는 뭐냐 이 말입니다. 정답은 없습니다.
여기서 구약 신학하는 사람들이 딜레마에 빠지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역사를 만들 때 이스라엘 역사가 나는 나라는 참된 계시와 연결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구약신학자들은 억지를 부려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셔서 이런 역사를 만들었으니까 이스라엘 역사가 오케이 될 때 그 이스라엘 역사에서 나왔던 예수님이 유대인이죠.
예수님이 유대인이라는 말은 유대 역사가 인정될 때만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가 인정된다는 말 아닙니까. 샌더스도 그렇게 주장하거든요. 그런데 구약 역사가 하나님의 계시입니까? 계시가 아니에요. 계시는 성경이 계시지 구약 역사는 계시가 아닙니다. 그런데 신학자들은 성경에서 구약 역사를 따로 조립해서 역사적으로 예수님과 연결시켜서 사람들에게 납득이 되도록 하는 거예요. 사람들에게 납득시켜서 그 사람들로 하여금 지적으로 수행만하면 신앙이라고 성령의 역사라고 간주하는 작업을 하는 거예요. 목사들이나 이 사람들이.
그러면 어떤 결과를 났느냐 하면, 옛날 유대인들이 일방적으로 우리는 포로 잡혀있지만 하나님은 생존하시니까 언젠가는 이스라엘은 회복할 거야. 라는 그들의 사고방식이나 일방적인 역사관이나 오늘날 우리가 여기에 교회를 세웠으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할 거라는 역사관과 다를 바가 뭐가 있습니까? 그게 예수님과 무슨 상관있습니까? 없지요.
그러면 해결책이 뭐예요? 기존의 역사도 하나님과 연결될 수 없다면 해결책이 뭐냐? 아까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항상 하나님이 역사한다는 증거는 복음과 비 복음이 계속해서 충돌을 일으키는 그러한 사건들이 있어야 돼요. 그게 일종의 카이로스라. 어떤 때가 되는데 이 때를 우리가 모아서 에이온이나 크로노스처럼 역사를 만들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만들 수가 없습니다. 오늘 강의에서 이 지점부터 여러분이 분명히 알아야 돼요.
옛날 내가 은혜 받았다고 해서 그 은혜 받은 내가 구원받은 사람 맞습니까? 아니라니까요. 그게 아니에요. 은혜 주신 분은 계시지만 그 은혜 받은 내가 계시가 된다, 안 된다? 나는 살아있는 계시가 될 수가 없어요. 어제 받은 은혜를 오늘까지 우려먹을 수 있는 자격이 우리한테는 없는 겁니다. 그러면 해답은 뭐냐? 날마다 하나님의 살아계신 사건에 의해서 우리가 사용되어지고 다루어져야 되지 지난번에 몇 년 전에 은혜 받았다고 해서 내 소유로 삼아서 구원받을 근거로 장악해서 그걸 제시해서 구원해달라고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님도 어려운 말을 해요. 네가 겨자씨만하는 믿음이 있으면 산들이 옮기라 하면 옮길 것이고. 믿음 있는 사람은 토목 관련 회사 다닙니까. 나무가 뽑혀서 바다에 빠뜨릴 것이다. 그런데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어서 그때 오년 전에 나무를 뽑아서 바다에 빠뜨렸다 해도 오년 후에 그걸 내 믿음이라 할 수 있느냐 이 말입니다. 내 믿음이라 할 수 없어요.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요? 침멀리는 지금 완전히 딜레마에 빠져있어요. 질이 다른 역사 속에 갇혀있다. 이것도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역사가 어떻게 질이 다른 역사가 있습니까. 서로 질이 다른 당나귀가 두 마리가 있다. 이것은 돼요. 사물이니까. 질이 다른 마이크가 두 개 있다. 이것도 돼요. 하나의 물건이니까.
그런데 질이 다른 사랑을 한다? 이럴 경우에는 질이 다른 사랑을 하는 게 아니고 내가 저 여자를 사랑하는 것과 이 여자를 사랑하는 것과 질이 다르다고 하는 판정은 누가 내리죠? 본인이 내리죠. 그렇다면 질이 다른 사랑이 실제로 있는 게 아니고 내가 내 마음에 심리적으로 저 여자 보는 것과 이 여자 보는 것이 다르다. 하고 내부의 이야기를 해줘야 돼요. 나는 저 사람 대할 때와 이 사람 대할 때가 달라. 이렇게 해야지 이 세상에 질이 다른 사랑이 따로 있다고 해버리면 그것은 자기가 그렇게 생각해놓고 자기 자신을 이 세상의 전부라고 대체해버리는 논리밖에 안 되거든요. 제 말이 어렵습니까? 내가 세상을 그렇게 본다고 해서 실제 세상과 동일할 수 없다는 겁니다.
북한은 통통한 여자를 예쁘다고 하잖아요. 김정은이 통통한 아내가 예쁘고 북한의 아나운서가 통통하다는 이 말 아닙니까. 그런데 그 통통한 아나운서가 한국에 오면 아나운서 시험에 떨어지거든요. 그러면 북한 사람들의 인식관이 세상 자체는 아니죠. 진리 자체는 아니잖아요. 그쪽에서만 통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스라엘 나라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렸지만 하나님이 살아계시니까 나중에 회복한다는 것은 진리가 아니고 이스라엘 남은 자들끼리의 일방적인 주장에 불과하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것은 계시가 아니고 민족주의죠. 단재 신채호 같은 사람들. 정감록 쓴 사람들 그리고 대순진리회 같은 사람들. 그 사람들은 인류역사를 한민족 중심으로 보잖아요. 어떤 사람은 단 지파까지 언급한 사람도 있는데.
사람들에게 자기 집단, 공동체나 교회에 사람 집어넣기 위해서 어떤 자긍심을 심어주는 빌미로써 성경말씀을 우리 집단은 진짜 집단이고 참 교회라고 하려면 하나님의 계시를 뭐로 변경시키는 겁니까? 하나님의 계시에서 우리 역사를 정당화시키는 것만 빼내서 정당화시켜놓고, “이제는 성경 필요 없고 우리 교회에 와서 등록하시면 이것은 진짜 하나님의 계시에 등록하는 것과 동일합니다.”라고 주장하는 식으로만 사람은 하나님과 역사를 이어보려고 시도를 하게 된다 이 말이죠.
그래서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아직 구약이니까 예수님을 안 만났습니다. 예수님 만나기 전에는 자기 아비가 마귀인지 몰랐어요.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이 유대인에게 너희 아비는 마귀라 했어요. 하지만 구약성경에는 그게 안 나오잖아요. BC163년경 마카비 혁명 때는 그 이야기 안 나온다고요. 그때는 천하에 자기들이 안중근 의사 다 되고, 독립운동하고, 민족투사 다 되어서 헬라화된 나라, 셀류쿠스 정권과 싸워서 이겼어요. 그걸 하누카 절기라 하는 독립전쟁에 승리했어요. 소수가 다수를 이겼습니다. 다윗의 후손이 이겼으니 구약성경의 예언의 성취처럼 느껴지지 않겠습니까. 다윗의 자손이 와서 이방나라, 헬라를 이기고 드디어 성전을 차지한 거예요.
그렇다면 구약에 우리 보기에 복음적으로 잘못된 비 복음적인 것이 있다는 말은, 결국 하나님께서 이걸 계시로 주신다는 의미는, 이스라엘 역사가 그 자체로 계시는 아니지만 계시에 동원된다는 말은 오늘날 우리들이 이런 짓을 되풀이할 가능성이, 가능성이 아닙니다. 매일같이 이런 짓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게 계시적인 기능을 한 거예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계시가, 우리 아는 이야기해봅시다. 갈라디아서 3장 1절에서 사도 바울이 너희들 앞에 십자가가 외에는 그러니까 계시가 십자가로 완성했잖아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나는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고 했잖아요. 보세요. 십자가라는 것은 내가 여기 팔팔 살아있는 한 십자가를 마주할 수 있는 메커니즘은 성립되지 않는다 이 말이에요. 십자가 있다. 믿으면 되지? 아니에요. 십자가는 반드시 나는 그 안에서 반드시 죽어야 되는 존재인데 죽어야 될 우리 안에 나 중심의 역사관, 나 중심의 에이온, 나 중심의 카이로스, 내 중심의 크로노스를 우리가 생산하고 있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나는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고 할 때 한 번만 죽으면 됩니까? 날마다 죽이죠. 성령이 와서 날마다 죽음에 넘김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날마다 살아나게 함이라. 고린도후서 4장에 그렇게 돼있죠.
우리가 목회를 한다 할 때 목회를 하는 자가 교회만 신경 쓰면 된다고 생각한단 말이죠. 십자가는 지붕에 하나 붙이면 돼요. 그런데 목회하는 자가 날마다 십자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결국 무엇을 부정한단 말입니까? 목회하는 나를 내가 부정하는 게 아니고. 내가 부정하게 되면 불교가 돼버리고, 성령이 와서 나로 하여금 부정하게 하려면 성령께서 십자가 구원의 능력을 파급을 시켜놔야 되죠. 우리는 그 파급된 능력의 장에 놓이게 되면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의 나의 역사, 나의 정당함, 나의 옳음을 증명하는 식으로 계속해서 살아가면 십자가 태풍에 휘말리게 되면 우리는 하는 일을 통해서 그것이 주님 십자가 앞에 늘 부정될 일만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밝히 볼 때 이것이 바로 누가복음이 이야기할 주님의 살아계심의 증거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이걸 고친다든지, 나는 십자가 바라보겠다는 결심을 하는 것은 아무 의미 없는 짓이에요. 나는 이제 바르게 해야지. 바르게 하는 것은 자기 유지 역사가 되고 일탈이 된다니까. 일방적인 역사관을 만드는데 하나의 재료로 가미가 돼버려요.
우리가 목회하면서 교인들 만나면서 늘 느끼는 것은 어느 교인을 믿다가 그 교인한테 된 통으로 당하는 경우, 교인이 있어야 당하기도 하지만 아예 없는 사람은 곤란하지만 그런 것을 많이 느끼게 되는 겁니다. 그것도 복음의 능력 안에 휘말려야 그걸 느끼지 복음 밖에 있는 인간은 지가 교인들 속여요. 지가 이용해먹고 지가 다 빼먹었다 싶으면 차버리고.
그러나 정말 성령 안에서 복음 안에 있는 사람은 사람에게 실망당할 만반의 준비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게 아니고 우리가 그렇게 되고 싶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주께서 오직 예수님만 믿게 하시는, 예수님만 크게 보이고 십자가만 크게 보이는 그쪽으로만 가게 만들어요. 그게 영생으로 통하는 길이고 좁은 길이에요.
우리가 세상에서 흔히 경험하는 게 뭐냐 하면, 다리에 서면 다리 저 끝에는 굉장히 좁아요. 어릴 때는 걱정을 하는 거라. 다리가 나중에 좁아서 못 가겠다고 하지만 원근법에 의해서 실제로 가보면 똑같은 폭으로 가지요. 좁은 길이란 결국 우리로 하여금 “도저히 못 갈 것 같아. 저 길 통과 못해. 너무 힘들어. 어려워.”라고 외치는데 이 외침이 우리가 그 시점에 가도 외칠 거예요. 앞으로. 지금이 수월한지 힘들지는 모르겠는데 그것은 십년 지나도 똑같은 소리를 또 하는 거예요. 다만 십자가의 능력으로 지금 내가 다루어지고 있다는 것, 예수님에 의해서 다뤄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증거라는 것은 뭐냐? 십자가만 크게 생각하는 자체가 증거지, 십자가 믿어서 어떤 혜택과 성과와 실적을 누적된 창고가 있어서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이라 하는 이런 것은 일체 우리한테는 주께서 용납을 안 해주세요. 그러니까 교인이 열 명 있다.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세요. 아내와 산다. 이혼했다고 생각하세요. 이것은 고린도전서 7장에 나오는 말입니다. 아내 있느냐? 없는 걸로 여겨라. 재물이 있느냐? 다 쓰지 못한 걸로 여겨라. 왜? 마지막이 속히 오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고 유대인 중의 유대인입니다. 유대인들이 어떤 사고방식에 있는지 그가 다소에서 예루살렘에 십오 년간 유학생활하면서 다 배운 거란 말이죠. 유대인들의 자존심과 우리는 이래서 하나로 결집하고 단결해야 돼. 일종의 시오니즘이죠. 우리만의 역사관이 있을 때 이 역사관을 근거로 해서 외국에 흩어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언젠가는 빨리 본부로 돌아와서 하나님이 다윗에게 주신 계시를 실제로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는 거예요. 그들에게는 중요한 문제에요.
중동의 전쟁이란 영토, 땅 문제가 아니에요. 하나님이 계시느냐, 안 계시느냐 그걸 확정할 수 있는 증거물로 남느냐 하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인지, 가짜 하나님인지 결판내는 전쟁이에요. 그래서 유대인들이 그렇게 나오니까 상대방이 어떻게 이용했느냐 하면, 가만히 보니까 안식일에는 안식일 지킨다고 전쟁을 안 하거든. 안식일만 골라서 공격해요. 로마군대 디도도 마찬가지고. 그러니까 그 다음부터 변경했죠. 그 정도로 그들은 율법이 그만큼 중요하고 이스라엘 역사가 중요한 거예요. 성경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자기 역사가 더 중요하고 그런 자기 역사를 유지하고 있는 본인들이 중요한 거예요.
하나님의 계시가 십자가로 올 때 이 계시는 무엇과 충돌하는가? 우리 자아와 충돌하는 십자가는 날마다 되풀이 돼야 되고 반복돼야 돼요. 나는 괜찮은데 저 사람은? 이런 식으로 십자가를 사용할 수 없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아비는 마귀라 하고 결국은 메시아는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들에 의해서 살해당했습니다.
그럼 묻겠습니다. 메시아는 어디 있지요?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에게 메시아가 살해당했다면, 지금도 우리는 구름 타고 오실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메시아는 어디 있습니까? 메시아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수 없다고 할 때 나오는 용어를 사건, 성령이 일으키는 사건. 일을 그런 식으로 몰아가는 거죠. 세상만사를 말씀대로 몰아가는 거예요. 결국 너희들, 복음을 아는 자는 복음을 모르는 자들에게 미움을 받아야 돼. 네가 좋든 싫든 네가 선택할 사항이 아니야. 이것은 운명 같은 거고, 팔자 같은 거고. 그렇게 하도록 하는 거예요. 핍박 받은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말씀이거든요.
그런데 선택받은 사람이니까 그게 곧 나다. 이렇게 돼버리면 선택받은 사람과 나 사이에 균열과 괴리를 계속해서 유발시킵니다. 기어이 하나님보다도 우리 자아를 더 사랑하는 그런 속성이 있기 때문에 이런 하나님을 앎으로써 내가 사랑하는 내가 영원히 멸망하지 않도록 조정에 나설 수 있고 관리에 나설 수 있는 그런 가능성이 아주 농후합니다. 하나님이 좋은 게 아니고 구원받는 내가 좋은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멋진 말씀을 이용해서라고 기어이 나는 내가 살린다는 그런 구원의 욕구를 우리가 지워버릴 수 없는 거잖아요.
바로 이런 것들이 구약의 다니엘이나 하나님의 말씀 속에, 묵시문학(마음에 안 들지만) 속에, 하나님의 계시 속에서 그들의 움직임, 몸부림을 엿볼 수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선지자가 와서 이야기할 때 오해라는 방편으로 자기 역사 다듬는데 그 계시들을 그들은 사용했고 그리고 그렇게 되기를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그것을 저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 여행의 스케줄. 하나님이 여행하시는 스케줄을 눈치 채서 본인이 스케줄대로 하게 되면 하나님과 적절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하나님이 다음에 하실 것을 예측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이디어를 정립하는데 그들은 많은 수고를 쏟았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종말 스케줄을 지금도 모든 교회들이 챙기고 있습니다. 왜? 납득을 해야 되니까. “아주머니, 우리 스케줄 모르면 당신은 마지막 때 저주받습니다.” “그럼 어떻게?” “이런 스케줄대로 따라 오시면 됩니다.”
유대인들은 감람산에 마카엘 천사가 올 때가 되면 끝이에요. 감람산은 스가랴 마지막에 나와요. 성경말씀은 안 빠뜨리는 거예요. 모든 성경말씀을 다 수집해서 이 스케줄 짜맞추는데 모든 신학과 모든 지식을 거기다 다 집어넣는 거예요. 납득이 되도록. 어떡하지? 그게 오핸데. 그게 잘못된 건데. 목회 성공 다른 것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해서 스케줄 짜주면 돼요. 처음에 이만희가 그거 했잖아요.
사람이 뭘 원하는가? 내 지식이 날 살릴 수 있다면 뭐든지 바치겠다는 그런 계속해서 자기 사랑에서 자기가 벗어날 수가 없는 겁니다. “회개하라면 회개까지 해드리겠습니다. 반성하라면 반성하겠습니다. 뭐든지 내가 나를 살릴 수 있다면 내가 무슨 짓이든 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복음은 그게 아니고 이미 누가 구원받을지, 누가 잘릴지는 우리가 계획한 게 아니고 창세전부터 이미 확정된 사실이고 그 확정된 사실이 우리에게 전달됐다는 것, 우리가 믿는 건 그거죠.
그러면 확정된 것이 어떻게 나의 예상을 빗나가느냐? 나의 예측과 예상을 빗나가면서까지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만 보게 하는 거예요. 십자가를 믿고 얻은 성과를 보게 하는 게 아니고 십자가, 예수의 피만 보게 하는 거예요. 피로 값 주고 산 교회라 하니까 그 피, 나의 희생, 노력 말고 예수님의 희생과 주님의 그것만 쳐다보게 어떻게 하나님께서 회원들을 조지고 있고 관리하고 있느냐? 성경을 통해서 그걸 발견케 하는 거예요.
해운대 오면서 거창한 유리로 만든 기둥 같은 걸 보면서 뭘 생각했느냐 하면, 솔로몬 성전 앞에 있는 두 기둥 생각나요. 솔로몬 성전이 30*30규빗입니다. 그 당시로서는 굉장히 높은 건물이에요. 엄청나죠. 옛날 고딕양식의 모형이 솔로몬 성전이에요. 프랑스에 아비엥 수도원 보면 30*30규빗으로 돼있어요. 나중에 더 높이려고 높이는 치수를 성경에서 찾아서 에스겔 성전, 요한계시록에 144규빗을 찾아냈어요. 144라는 숫자는 온 우주를 표현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성당은 바로 144규빗까지 올려야 된다는 거예요. 사람들에게 납득이 되도록 하는 거예요.
진짜 십자가의 원수는 그렇게 한 내가 원수인데 진짜 원수가 자기인지 모르고 어떤 역사를 만들어내는 거예요. 사람이 이해가 되는 그 역사 속에 집어넣어서 같은 하나의 구원받은 공동체로 영글어내는 그 작업이 결국 예수님을, 메시아를 죽게 만든 작업이었다는 것이 구약 선지서의 취지입니다.
긴긴 이야기를 했지만 결국 구약 선지자의 진정한 취지는 바로 거기에 있어요. 인간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또는 자기 나라가 포로 잡혀서 멸망하고 난 뒤에 그들이 기껏 내부에서 쏟아내는 게 뭔가? 이제는 성전 없어도 역사 있으면 버텨낼 수 있다는 그런 역사의식을 잡아내고, 역사의식이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역사 없는 공동체는 없어요.
단재 신채호라는 사람이 독립운동하면서 정신적으로 바로 한민족의 역사를 바로 세우는 역사 만들기 했어요. 우리민족은 일본에게 압제당할 민족이 아니다. 일본이 우리민족한테 오히려 압제당해도 싼데 잘못됐으니까 이걸 역사의 힘으로 중심을 바로 잡아서 바로 잡힌 중심에 우리의 재산과 청년들의 끊는 목숨을 바쳐서 이 역사는 유구한 역사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대한민국 애국가 가사에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하나님이 좋은 게 아니고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 역사의 노선에 소속돼있는 민족이 우리 대한민국이라는 자긍심이 더 귀한 겁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역사가 하나님께서 인간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방치하느냐, 안 그러면 개입하는가? 동강내요. 단절시켜요. 끊어버립니다. 초콜릿을 끊으면 절개 면이 나오죠. 다니엘과 스가랴란 묵시문학, 천사들이 설치는 걸 묵시라 하거든요. 천사는 역사 만들기에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될 …… 역사는 인간이 만들어내죠. “천사 이리 와. 우리 역사 만드는데 너도 한 표 던져라.” 이렇게 안 되죠. 천사는 대선투표를 안 합니다. 천사가 왜 대선투표를 안 하느냐 하면 자기 나라가 따로 있어요. 하나님 나라 아닙니까. 하나님 나라는 투표로 되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재외공관 투표할 이유가 없습니다.
천사가 개입해서 동강을 내버리면 그 절개 면에 비로소 인간이 어떤 짓을 했는지 나오겠지요. 흘러가는 요단강을 끊듯이 흘러가는 역사를 끊어서 그 절개 면을 눈에 보이게 하는 그 지시를 천사로 인자 같은 분으로부터 부여받게 됩니다. 그 절개 면에서 끊어지면 역사도 같이 동강나고 끊어지는 거죠. 그렇다면 그걸 이렇게 표현할 수 있어요. 종말은 에이온이라든지, 크로노스라든지 인간의 역사적인 관점에서는 종말은 끝에 오지만 묵시적 입장에서의 종말은 하나님의 사건 된 사건 안에 이미 주어진 거예요.
그런데 ‘이미’라는 말을 쓰기가 난처한 게 이미라는 말을 써버리면 ‘아직’이라는 걸 쓸 수가 없게 돼있어요. 이미 종말이 와버렸으면 이것은 이미와 아직 사이에는 같이 사이좋게 섞일 수 있는 단어가 아니고 서로 대립하고 싸우고 투쟁하는 관계가 되는 겁니다. 이걸 긴장이라고 신학자들은 하는데 대결하는 겁니다.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너희들이 관원들에게 쫓기고 잡혀가고 옥에 갇히게 되면 벌써 복음이 활동하고 있는 증거다.
그 충돌이 뭐냐? 종말은 나중에 온다는 쪽이고. 천사 쪽에서는 이미 천사가 활동하게 된다는 것은 인간의 역사를 부정한다는 뜻이거든요. 천사는 하늘나라에 속했기 때문에 인간 세계에 대해서 심판하는 의미에서, 스가랴 같은 경우에 천사가 심판하는 겁니다. 인간 역사를 심판하는 의미에서 이것은 그 역사에서 만든 공동체도 심판한다는 걸 의미하는 겁니다. 그 공동체를 심판한다는 것은, 내가 나에게 뭘 조작해서 스스로 구원받겠다는 모든 시도를 다 부정하는 걸 말하죠.
그러면 천사들은 이걸 하면서 절개지를 보여주는데 에이전트, 다른 말로 집행자 또는 전담하는 사람 또는 중재자 같은 역할이죠. 류현진이 LA다저스에서 6년간 390억 받기로 했잖아요. 영어 못하는 류현진이 지가 알아서 했습니까? 에이전트가 했잖아요. 그 에이전트 역할에 천사를 소개한 거예요. 그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에이전트가 어떤 모습이냐 하면, 뭔가 당해버렸습니다. 피를 흘렸습니다. 류현진을 한 에이전트는 멀쩡하던데 우리 구원하는 에이전트, 집행자는 이사야에 보면 사람의 얼굴이 아닙니다. 완전히 매 맞은 얼굴이고 일그러진 얼굴이고 우리는 그 사람을 미친 사람으로 보는, 돌았어. 하나님께서 돌아버린 사람을 이 땅에 보낸 거예요. 그래서 돌아버린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같이 미친 인간이에요. 교회라는 것은 결국은 미치고 환장한 인간들만 모인 거예요.
세상이 멀쩡한데 해운대에 고급건물이 앞으로 들어설 건데 왜 이 세상이 멸망당해야 됩니까? 이거는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세상 사람들은 멸망당할 근거를 그들의 말하는 스케줄에 의하면 세상에 악이 횡행하고, 사람이 세상을 좋아하고, 복음이 식어지고 하지만 그러한 원인과 논리를 끄집어내는 것은 기존의 자기 역사란 스케줄을 인정하겠다, 붙잡겠다는 것밖에 안 되거든요.
그러나 우리 주님이 와서 멸망하는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십자가에 사람한테 버림받고 죽었다는 하나님 아버지와 스스로 제시한 약속, 이 피와 찢겨진 살이 새로운 언약이다. 내가 죽고 사흘 만에 살아난다. 주님이 스스로 말씀을 달성하는 의미에서 종말이 온 거예요. 인간이 나빠서가 아니라 유난히 못 되서가 아니라 주님께서는 주님의 약속대로 실행에 옮겼을 뿐이에요. 따라서 그 말씀의 실행을 믿지 않은 그것이 바로 불신이며 악한 거예요.
우리가 악한 것을 모아서 그 악한 것을 근거로 해서 반성하고 회개해서 종말을 기다리는 방법은 여전히 우리가 만든 우리가 작성한 역사란 스케줄에 입각한 엉터리 같은 계시 해석이란 말입니다. 그게 아니고 진짜 성령 오게 되면 주님께서 오시고자 하면 오시는 거예요. 그건 우리가 이유를 달 이유가 없어요.
왜 오십니까? 세상은 다른 신을 섬기기 때문에 멸망하려고 오신다. “아, 그렇구나.” 이러면 되지 “글쎄, 내가 다른 신을 섬긴 적이 없는데.” 그것을 자기 역사란 바탕, 에이온에서 찾지 마세요. 우리가 찾아봐야 찾아내는 것도 의가 돼버려요. “주님이여, 다른 사람은 못 찾았는데 우리가 찾아냈잖아요.” 이렇게 까불다 죽는 거예요. 성령 받은 사도들은 그냥 말씀대로 될 뿐이에요.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그것뿐이라니까요. 평소에 밭 갈고, 평소에 잠자고. 종말 준비한다고 잠도 안 자고 눈 뜬다고 집게 들고 그러는 게 아니고 종말 오는데 지금 지키면 뭐하노? 하는 게 아니고 역시 잘 때 자고 먹고 똑같이 하면서 주께서는 말씀대로 오게 돼있어. 그게 자연스럽게 납득이 되는 게 아니고 믿어지는 거예요.
그러니 논리가 필요 없고. 믿음에 무슨 논리가 필요 있습니까. 신학적인 바탕도 필요 없어요. 그게 믿어지는데 어떻게 하라고. 어떤 이유 때문에 이렇게 되는데? 그런 것 없어요. 그냥 믿어지는 거예요. 믿어지고 난 뒤에 다시 세상을 보게 되면 모든 것이 말씀대로 잘 풀리고 있는 겁니다. 제가 오랜만에 오는데 ‘잘 풀리는 집’ 사지도 못하고 화장지 들고 와야 되는데. 세상만사가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미리 아신 자를 부르고. 하등에 주의 일에 차질이 없이 자알 풀리고 있는 거예요.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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