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강-나1장4-8(선하심의 의미)121216-이 근호 목사
2강-나1장4-8(선하심의 의미)121216-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한례(IP:203.90.41.16)
2강-나1장4-8(선하심의 의미)12121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나훔 1장 4절에서 8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1299페이지입니다.
나훔 1:4-8
“그는 바다를 꾸짖어 그것을 말리우시며 모든 강을 말리우시나니 바산과 갈멜이 쇠하며 레바논의 꽃이 이우는도다 그로 인하여 산들이 진동하며 작은 산들이 녹고 그의 앞에서는 땅 곧 세계와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이 솟아오르는도다 누가 능히 그 분노하신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 진노를 감당하랴 그 진노를 불처럼 쏟으시니 그를 인하여 바위들이 깨어지는도다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의뢰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그가 범람한 물로 그곳을 진멸하시고 자기 대적들을 흑암으로 쫓아내시리라”
우리가 아는 하나님은 선하심입니다. 그 선하심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뭔가 경유하고 통과를 해야 되는데, 우리보다 먼저 통과한 민족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태어나면서 자동적으로 선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만 알고 계시는 그 길, 애굽에서 나와서 약속의 땅이라는 것, 하나님이 계신다는 그 땅으로 통하는 그 길을 막상 직접 통과해 보니까 본인들은 선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결코 선하지 않았습니다.
세상 사람보다 자기가 낫다고 여겼는데 자기가 스스로 결정해서 길을 찾아간다면 자기는 계속해서 선하고, 선하고, 또 선하고, 선한데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그 세계로 이끌려 가보니까 그 길은 나를 선하게 보여주는 길이 아니고 오히려 반전 이예요. 나를 죄인 중에 괴수로서 노출시키는 그 길을 주께서는 이끄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망했습니다. 우리가 이스라엘 돼도 역시 망합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이스라엘 사람 중에서 구원받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은 이 세상보다 선행 세계가 먼저 있고 그 선행 세계에서 파생된 세계가 이 지상에서는 바로 죄를 들추어내는 기능으로 작용하는 세계가 바로 이스라엘 세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선행 세계와 이 죄라고 들추어내는 이 세계 사이에는 하나님의 일관된 선하심이 계속해서 거기서 흐르고 있습니다. 비록 그 선하심이 이 땅에 파생된 세계에서는 선이 악으로 이해되고 악으로 해석돼서 사람들한테 미움 받고 핍박받지만 예수님은 처음부터 선하시고 끝까지 선하시고 중간에도 선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선하신 예수님을 어떻게 대우했습니까? 자기가 선한 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악한 존재로 몰아세울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이건 불편한 진실 이예요.
그래서 사람들을 이렇게 교회 다니는, 우리 교회 말고요, 다른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보게 되면 마치 ‘제가 목사입니다.‘ 하게 되면 뭐를 요구하느냐 하면 ’끝까지 제발 우리를 속여 달라.‘는 거예요. 제발 우리를 좀 이 세상은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내가 살아있는데, 세상 모든 것은 나 좋아라고 있는데, 그게 성령이 아닌 것도 알고 있고 그게 하나님 뜻도 아닌 것도 알고 있는데, 다만 그렇게 사는 것이 내 성질, 내 속성에 부합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제발 이걸 들추지 마시고 그걸 꾹꾹 감추고 제발 그게 옳습니다. 해서 우리가 듣고 싶은 속임수로 계속 우리를 속여 달라는 거죠. 속여 주면 돈 줄게.
여러분 세상에서는 언젠가 이야기 했지만 형도 돈이 있어야 형 값을 하는 겁니다. 돈 없는 형은 형 취급도 안 받고, 양심도 돈이 있을 때만 양심이지, 돈 없는데 양심은 제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그래도 이런 더러운 세상에 살아가는 것은 모두가 나와 똑같이 살아가기 때문에 외롭지 않아요. 전부 다 속는 재미로 살기 때문에 이거는 별난 인간이 없고 똑같아요. 그러니까 숨 좀 쉬고 사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훔을 보내주셨습니다. 이게 문젯거리예요. 선지지가 이게 문젯거리예요. 하나님의 원칙이 이 파생된 세계에서부터 계속 나와서 결국은 선행 세계까지 연결되는데, 그렇게 되면 이 땅에서 흠이 없는 사람이어야 흠 없는 세계에 합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시는 이유는 흠이 없는 세계는 이 흠이 있는 세계에서 어떻게 만들어 지는가를 아울러 우리에게 보여주거든요.
그러면 선지자라 하는 것은 이렇게 보면 돼요. ‘하나님의 보내신 자‘ 이렇게 되는 겁니다. 아, 이게 얼마나 일반사람에게 기분 더러운 이야긴지 몰라요. ’그럼 너는 보냈고, 나는 안 보냈고.‘ 이렇게 되거든요. 하나님이 보낸 이, 하나님의 일이 뭐냐, 요번에 유튜브에 녹화할 때 그 대목을 했어요.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 그 대목을 잠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보통 교인들이 처음 왔다. 목사한테 묻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 일을 할 수 있습니까?‘ 그걸 물을 때 예상되는 답변을 예상하고 있어요. ’교회 와서 등록하시고 나이 50쯤 됐으면 햇 권사 노릇하시고 어떻게 기도 순서 지키시고 어떻게 헌금하시고 요렇게 하시면 하나님 일이고 봉사하시고 청소하시고 이렇게 하시면 하나님 일입니다.‘ 라는 답변을 은근히 듣고 싶은 거예요.
그리고 목사가 실제로 ‘교회 처음 오셨습니까? 요거 하시고 요거 하시면 됩니다.’ 하면 ‘그렇지, 내가 알고 있는 거구나. 내가 지금 하나님 일을 하고 있는데.’ 막상 예수님에게 물어보자 말이죠.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거든요. 보내신 자의 답변은 우리가 은근히 기대하는 답변이 아니에요. 이렇게 합니다.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이 일이다.”라는 거예요. 이 소리 듣고 충격을 안 받는 자체가 이상해요. ‘무엇을 행해야 됩니까?’ 라는 답변이 이것, 저것 행하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거예요. 요한복음 6장에서. 그러니까 그 말씀하게 되면 사람들이 충격을 안 받아요. 왜냐 하면 ‘그래 이것, 저것 하는 것 중에 덧붙여서 하나 더하지.’ 뭐냐, ‘예수 믿는 행함을 하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여기에 반전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 4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아버지께서 내게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고 그 뒤쪽에 이야기 해놨어요. 자, 앞쪽에는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이 일이다.” 하니까 ‘까짓 거 믿지 뭐, 자식 믿듯이 뭐 믿지, 그래 할 수 있는 거니까 믿지 그래. 믿는 거 추가요. 믿었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일인 줄 알았더니만 그 다음에 그 뒤에 나온 말씀이 “아버지께서 내게 보내주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는 말을 뒤에 넣어버렸다 이 말이죠.
그럼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을 받는 게 아니라는 이야깁니다. 한국교회여! 내가 예수 믿는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내가 뭐 행해서 구원받는 것도 아니다 이 말이죠. 결과는 어떻게 됐습니까? 다 떠나버렸습니다. 다 가버렸어요. “그리고 두 번 다시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아니하니라.” 돼 있어요.
그럼 무슨 장벽을 넘어야 되느냐 하면 ‘내가 무엇을 행해야 됩니까?’에 같은 부류가 뭐냐, ‘그럼 내가 예수 믿지요, 뭐.’ 라는 출발지점이 내가 출발지점이 되는 거예요. ‘내가 무엇을 행합니까? 청소할까? 헌금할까요? 어떻게 할까요?’ 같은 출발지점, 내 쪽에서 내가 예수 믿는 것도 내 쪽에서 출발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뒤의 말씀은 뭐냐, 아버지로부터 출발해요. “아버지께서 나(예수)한테 오지 아니하면 아무도 올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아버지 떼버리면 남는 게 뭐냐 하면 아무도 올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럼 뭘 믿어야 됩니까? ‘아무리 내가 행하고 믿고 해도 나는 하나님 나라 천국에 갈 수 없다.’가 우리가 믿어져야 돼요. 그것이 하나님이 보내신 자의 입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 어머니 오늘 교회 오랜만에 오셨는데 어머니 오랜만에 오셔도 ‘내거 언제 빠졌나?’ 하시는데, 오시면서 ‘나는 아버지께서 보내지 아니하면 올 수 없다.’는 것을 아시겠는가? 그건 제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에 관한 문제기 때문에 예를 드렸던 겁니다.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아무래도 못 갑니다. 우리가 지옥 가도 지옥 갈 수가 없어요. 행함으로 지옥을 못 갑니다. 우리가 행함으로 천국을 못 가듯이 행함으로 지옥 못 갑니다. 그러니까 무슨 나쁜 짓 했다고 지옥 간다고 그렇게 겁내는 것은 마귀의 술책입니다. 속아 넘어가지 마세요. ‘여러분, 이거 안 하고 이거 안 바치면 지옥 갑니다.’ 그거 사기입니다. 그 말은 뭔 뜻이냐, ‘이거 안 하시고 이거 하시면 구원받습니다.‘ 그거도 사기이듯이 뒤도 다 사기예요. 앞, 뒤도 다 사기입니다. 우리는 어디도 안 갑니다. 갈 수가 없습니다.
어떤 배우가 이런 소리 했어요. ‘먼저 지옥 가 있어. 내가 뒤따라갈게. 지옥에서 만나면 너 죽일 거야.’ 보고 싶다는 드라마에 나오는 대사입니다. 일하는 아줌마가 이야기한 거예요. 주인공 남자보고. 거기서 ‘지옥 갈게.’ 라는 말이 있거든요. 사람 죽였다고 지옥 못 갑니다. 왜 우리가 기쁨으로 안 받죠? 우리는 어디든 못 갑니다. 있으세요. 있으시면 주께서 흠 없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게 뭐냐, 율법이고 제사법이라는 거예요. 율법은 이거 행해서 딴 데 가는 게 아니고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하늘나라 영생이 오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뷔페가 싫어요. 왔다 갔다 해서. 그래서 순두부라도 있으면 차려주는 게 좋아요. 슬슬 나이가 되니까 돌아다니는 게 싫어요. 뭐 이거에는 이거 담고 푸다 보니까 이거 욕심나고 나중에 배는 부른데 맛은 하나도 없고…, 그렇다고 뷔페 안 가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잘 새겨들으셔야 됩니다. 뷔페 싫다는 것은 아니고 뷔페 절대 꼴 보기 싫다는 것은 아니고…ㅎ
율법을 주신 것은 어린양과 더불어 오게 됩니다. 거기에 주신 율법 안에 뭐가 담겨 있느냐,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떤 분이 계셔요. 이게 바로 기독교고 이게 복음이라는 겁니다. 수십 년 교회 다녀도 이거 똑 아셔야 돼요. 우리가 지옥 가는 게 아닙니다. 처음부터 우리는 그냥 이 땅에 사는 거예요. 쪼개져야 지옥이지만, 지옥이라고 도피할 수는 없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율법이 찾아왔습니다. 우리가 오라고 안 했습니다. 모세를 통해서 그냥 주신 겁니다. 그 율법을 통해서 오는데 그것이 옛날 구약성경이고 신약성경은 뭐로 오느냐 하면 그걸 십자가가 왔다. 복음이 왔다. 다 있는데 요한일서 식으로 이야기한다면 사랑이 왔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사랑을 이야기할 때는 법으로 따지지 않겠다는 것이 전제돼 있습니다.
그러면 요한일서에 4장 10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장소를 가지고 이야기해요. ‘사랑이 어디 있는데?’ “사랑이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저는 이 말씀 듣고 막 가슴이 너무 기뻤어요. 오늘 집사님 기도하시는 거 듣는 것만큼 기뻤어요. 이게 감동이 일어났어요. 뭐냐 하면 왜 그동안 이걸 빠뜨렸느냐 말이죠. ‘사랑이 어디 있습니까?’ 물으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 발각되는 그 지점이 가만히 앉아 있어도 구원받는 지점입니다.
어린애에게 비타민이 풍부하고 무기물이 풍부한 김치를 밥숟가락에 딱 얹어서 줍니다. 김치 싫어하는 애들은 도망가요. 건강 찾겠다고 주는데 엄마가 ‘사랑은 여기 있으니’ 하면서 따라가는 거예요. 그런데 애는 그걸 먹고 싶어도 자기가 싫어하는 거예요. 평소에 그런 식으로 인생을 안살아 왔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싫어한다는 것이 발각당한 채로 살기 싫어요. 우리는! 사실은 안 좋아하면서 누가 안 좋다 하면 기분 나빠요. 사실은 하나님을 사랑 안 하고 나만 사랑하면서도 누가 ‘너 사랑 안하지?’ 하면 그게 듣기 싫어요. 그런데 누가 그런 식으로 이야기해주는 그것이 천사라고 여겨보세요. ‘너 나 사랑 안하지? 사랑 안 할 거야.’
갑자기 로또복권이 1등이 돼 보세요. 갑자기 싱글벙글해서 기마이 쓰고 ‘안녕, 굿모닝’ 한다 할 때 ‘너 무슨 좋은 일 있나?’ 속임수로 살아가는 것은 ‘야, 나 로또 당첨돼서 횡재 생겼다.’ 이것 때문에 속임수로 살아가는 것이고, 진짜 흠 없는 역사 속에서 파행된 세계에서 흠 없이 살다가 선행세계에 흠 없는 존재로 들어가려면 내가 하나님 사랑하지 않은 사실이 하나님 앞에 발각되어서 그게 좋아서 싱글벙글 이예요. 그러나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자꾸 교회목사가 닦달내고 교인들이 눈치 주니까 사랑하는 척하고 산다는 이것이 얼마나 수고하고 무거운 짐으로 살아왔습니까? 사랑 안하는 것을 발각시키는 그것이 오히려 그게 더 즐거운데.
마태복음 11장 끝의 말씀 보면 이거는 불신자도 잘 아는 대목이 나와요. 뭐냐 하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게 배워라 그러면 내가 너를 편히 쉬게 하리라”
이걸 저는 안양의 공부에서 풍선의 헬륨가스 있는 걸 이야기했어요. 풍선이 아무리 자기 힘으로 ‘하늘로 올라가라. 올라가라.’ 아무리 주문을 외워도 안 올라갑니다. 그런데 저 새가 나는 창공을 나도 날고 싶은데 방법이 없다 해도 못 날아요. 그런데 내 속에 그동안 나를 차지하고 있던 가스 있잖아요. 방귀 같은 이상한 가스. 그 가스 날아가고 헬륨가스가 만약에 가득 들어왔다면 우리는 납니다. 가벼운 마음이 되죠.
주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해서 네 속에 있는 그동안 너를 속여 왔던 가스를 빼내고, 그 다음에 하시는 말씀이 “내게 배워라” 내가 가볍게 살아가는 방법을 헬륨가스처럼 우리 속에 주입을 시키게 되면 우리는 이 세상을 가볍게 살게 됩니다. 가볍게 사는 방법은 뭐냐, 자기를 심하게 무시하면 돼요. 자기 자신을 심하게 무시하게 되면 자기부터 심하게 무시하는데 남을 중요하게 여길 이유가 없거든요. 사람들이 세상 살기 힘든 것이 상대방을 굉장히 심각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사는 게 너무 힘들은 거예요. 그래서 중들은 머리 깎고 혼자 살려고 하잖아요.
사람이 사는 게 힘든 것은 남의 시선 때문에 그래요. ‘저 사람을 잘 해줘야지.’ 남들에게 잘해주는 것은 남을 생각해서 잘해주는 게 아니고 남을 잘해주면서 자기가 평소에 자기를 잘 만들어야지, 하는 그것의 연장으로 남에게 잘해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심하게 자신을 무시해 버립시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인데 자기가 자기 자신을 대단히 무시해버리면 자기 눈앞에 누가 등장해도 그게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일이 된다 이 말이죠. 그걸 네 자로 ‘네가 뭔데?’
가게 손님이 왔다. 마음 자세가 ‘네가 뭔데?’ 이게 상인의 얼굴에 확 퍼져 버리면 벌써 손님은 기가 팍 죽어 들어가요. ‘맞는 옷 주이소.’ ‘이거 입어버려.’ ‘예~’ 웬 카리스마! 그건 철저하게 자기 자신이 살아야 되겠다는 거예요. 아휴, 살면 뭐하노, 살아서 기분 좋다고 소고기 사먹겠지. 그러면 뭐하노, 자기 자신이 사는 것에 대해서 자포자기해서 가스를 빼내요. ‘나는 이정도 돼야 사는 거야.’라는 그 가스를 죽 다 빼버리는 거예요. 예수님 무시당했잖아요. 예수님 무시당한 그 헬륨가스가 들어와 버리면 ‘그래, 나는 무시 안 당한 것만 해도 나는 복이다.’ 라고 이렇게 생각하시고 살게 되면 자기 자신부터 별로 생각 안 들면 세상 사람도 생각 안 들고 대선이니 누구 찍고 누구 찍지 말라고 압력이 많이 들어와요. 지금 딸애한테 전화가 와요. 박OO 찍지 마라, 문OO 찍지 마라. 그럼 누구 찍으라고? 그래도 투표는 하라. 누구? 허경영이도 없는데 누구 찍으라는 말인가.ㅎ
우리 자신을 철저히 무시해야 될 이유가 하나님께서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철저히 무시하는 근거를 우리에게 줬습니다. 이미 해답이 왔어요. 요한일서에 나오잖아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우리는 이미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못 속이거든요. 우리를 아시는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의 자세에 대해서 요한일서에 편지를 줬어요. 모든 편지는 돌고 돌아도 수신자가 반드시 받게 돼 있습니다. 결국 나한테 도착하는 이 편지 보면 ‘너는 나 사랑 안 해.’ 왔으면 우리는 항복하면 돼요. 천부여 손들고 옵니다. 그냥 손들고. ‘아이쿠, 아닌 척 했는데, 야, 자수하니 이렇게 광명 찾는 걸.’ 자수하면 광명 찾는 거예요.
나훔이란 이 말씀은 하나님의 선하심인데 선하심이 딴 게 선하심이 아니고 하나님의 진노하는 게 선하심이라는 거예요. 이게 무슨 반전 이예요? 이런 이야기가 다 있어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노하신 이것이 진정한 선하심이라는 거예요. 왜,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온몸으로 받아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추수감사절, 12월 중순 셋째 주에 있다는 그런 설이 있어요. 하도 안 해서 우리는 기억도 없지만. 거기에 보면 추수감사절 날 성경 본문에 이런 게 있어요. 시편 136편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감사하다가 연발 나오거든요. 그래서 사람은 그 앞에 것만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해를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가 나오는데 그 뒤 부분에 이런 걸 빠뜨리는 분이 있어요. 뭐냐 하면 “바로와 그 군대를 홍해에 엎드러뜨리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다음에 “유명한 왕들을 죽인 이에게 감사하라“ 23절 ”우리를 비천하게 만드신 이에게 감사하라“ 추수감사절 하다가 우는, ”우리를 비천하게 만드신 이에게 감사하라“ 이건 불편한 진실입니다.
성경말씀은 어차피 수신자가 우리예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수신자라고 수용한다는 것은 ‘우리는 이 법에, 우리는 선행세계의 법에 우리는 순종하겠습니다.’라는 뜻 이예요. 그러니까 그 편지가 나에게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 편지 중에 하나가 하나님이 “너를 비천하게 만들고”라는 것은 너를 압박해서 네가 너를 관리하고 네가 너를 사수하려는 이 쓰잘데기 없고 아무짝도 소용없는 것, 결국은 다 죽는, 결국은 하나님에 의해서 평가받는 세상을 네가 평소에 네 자신을 평가하는 그 하잘 것 없는 부질없는 그런 짓은 제발 좀 그만 둬라 이 말이죠. 손을 떼라 이 말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교회 올 때 여전히 ‘제발 우리를 끝까지 속여 달라.’고 요청을 하니까 그럴 수는 없는 거예요.
오늘 아침에 인터넷 보니까 어떤 사람이 다리미를 전화기로 오해해서 전화 받는다는 게 다리미를 받아서 얼굴에 화상입어서 붕대 칭칭 감고 나왔어요. 이게 지금 여러분, 이게(성경말씀) 다리미입니다. 전화기가 아니에요. 우리는 귀에 댄 이상 전부 다 얼굴 홀라당 다 타버립니다. 그럴 때 잘났다고 하는 게 성경보고 난 뒤에 못난 존재가 돼버리는 거예요.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자는 얻을 것이요,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다. 왜 사람들은 자기 생명을 잃어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자꾸 속여 달라고 요청하는지, 정말 가슴이 찢어집니다. 제발 속이고 위로의 말 해달라고. 위로의 말 없습니다. 위로 할 말 있으면 당신의 몸무게는 점점 무거워져요. 다이어트만, 똥 살이나 빼는 다이어트 하지 말고 자아의 무게를 줄이는 다이어트를 해야 돼요. 성경 보면서 좀 자아 다이어트를 해서 이 안에 헬륨가스로 누구 앞에서나 스트레스 안 받고 어떤 일이 있어도 스트레스 안 받고 가볍게, 존재의 가벼움처럼, 가볍게 인생을 살아가야 돼요. 내 속에는 아무것도 없고 나는 그냥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존재로서 발각당할 뿐이다. 나는 하나님 사랑 한 적 없고 나만 사랑한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편지에 보면 이게 발각당해서 내가 받을 저주대신 이렇게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데 이게 오늘 본문에 하나님의 선하심이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딴 게 선하심이 아니고 이게 선하심이예요.
우리가 속고 있다는 그것을 완전히 노출시켜 주시는 그 하나님의 세밀하심, 절대로 네게 중력과 무게를 네가 느낄 필요가 없다. 네 생각하지 말고 사람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선한 속성만 생각한다면, 그것이 바로 선행세계에 소속돼 있는 흠 없는 사람으로서 흠 없는 세계 합류되는 하나님의 작전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진실은 어디까지나 우리에게 불편한 모습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을 이미 십자가를 통해서 다 보여줬지만, 왠지 우리는 십자가에서 외면해 버리고 나 잘되는 쪽으로 하나님이 도와주기를 원하는 이 무거운 자아, 이제는 이 짓을 그만 두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을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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