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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자아창조론 121214강의미가

자아창조론 121214

이름 : 이근호(IP:119.18.69.144)

김창길(IP:210.♡.60.74)

13-01-01 22:18

서울 의존교회121214a (자아창조론)―이 근호 목사

데살로니가 전서 5장 23절부터입니다.

살전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살전 5:24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인간을 누가 창조했습니까? 하나님이 창조했다고 되어 있지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면 인간내부에 뭐가 들어 있냐? 창조의 흔적이 담겨 있겠죠.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했다면 인간내부에 하나님의 창조의 흔적이 담겨 있을 것이라 이 말이죠.

그런데 창세기 2장 3장에서 인간이 화답하지 않았다면 그 창조의 흔적은 그대로 유지 되는데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악마와 한 살림을 차렸잖아요. 이 지상에서 그것도 에덴동산이 아니고 쫓겨나서 쫓겨났으니까 인간은 본래의 자리를 잊어버린 겁니다. 인간의 본래의 자리를 잊어버리고 악마와 하나가 되었을 때 인간 속에 남아있는 창조의 흔적은 무엇인가?

그게 뭘까요? 다시 묻습니다. 인간은 누가 만들었다? 하나님이 만드셨다. 그러면 인간은 하나님이 만드셨다는 것을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에도 우리가 그런 이야기를 합니까? 안 합니까? 나는 하나님이 만드셨다는 이야기해요? 안 해요? 합니다. 왜냐 하면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이 제사를 누구한테 합니까? 하나님한테 하잖아요. 조상에게 예배드린 게 아닙니다. 가인이 자기 아버지한테 제사 드린 게 아니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셨다는 것이 유재 하는데 유재하면서도 이미 악마와 한 통속이 된 입장이기 때문에 악마가 가르쳐주는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했다는 그 의미가 무엇이냐 우리가 그것을 놓치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이미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추방됐습니다. 그러면 선악과 따먹을 때 에덴동산에서 너희가 정령 죽으리라 했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다는 이야기 거기 없었어요. 없었는데 추방되었습니다. 그냥 살면서 죽으면 안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에 선악과 따먹으면 정령 죽으리라 했으면 그 에덴동산 살면서 즐길 것을 즐기면서 거기서 돌아가시면 안 되겠습니까? 묘지를 에덴동산 한 쪽에 묘지를 구입해서 묘비를 세워서 공동묘지를 만들면 되지 않겠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범죄하고 난 뒤에는 나가라! 이 말이죠. 거기서 나가야 된다 이 말이죠. 나간다는 말은 인간이 자기가 죽으면 ‘그래 나는 죽어야 돼 내 할 일은 끝났어! 그래 죽는 거야, 잘못했으면 벌 받아야지’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닙니다. 이게 근본적으로 가장 중요한 건데 네가 죽는다는 너한테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내가 너를 죽인다는 문제가 중요한 문제라는 거예요.

살다가 늙어 죽는구나, 하나님이 저를 죄 지었다고 이렇게 늙어 죽게 하시는 군요.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그래 하나님이 죽이시니까 할 수 없지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께 넋두리를 하게 되면 네가 지금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거예요. 너는 네 생각만 하고 있는데 너는 너를 생각할 자격이 애초부터 없어요.

우리가 죽는 것도 연속적인 하나님의 일에 맞춰서 죽어야 돼요 그냥 죽으면 안돼요. 왜냐 하면 우리가 죽는 것도 연속적인 하나님의 일에 포함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그냥 선악과 따먹었다, 죽자, 이래서는 안 되고 죽음이 무엇이냐를 보여기 위해서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입장에서 자기 성질은 성질대로 제발 좀 발휘를 해 줘야 됩니다.

그러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그 계기가 뭐냐 요새로 말하면 연극무대가 되겠죠. 에덴동산에서 놀던 연극무대는 끝났고 뭐로 바뀌었다? 저주가 임하는 연극무대로 바뀌어서 거기는 인간들은 자기의 맡은 역할을 충실히 해 줘야 됩니다. 관객들은 천사들이 관객이 되겠죠. 인간은 여기서 연극을 자기 역할을 충실히 해 줘야 돼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어 놓고 죽으면 저거 인간 된 되겠어. 나 너 버렸어! 너 포기 했어! 하는 이런 하나님은 아닙니다. 끝까지 심지어 죽은 자들도 주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이것은 한번 죽인 거 주께서 놓치를 않습니다. 끈질겨요 교회 안다니고 절에 가고 예수도 안 믿는 거 그거 포기했어. 너대로 살아라. 이런 거 없습니다. 끝까지 갈구고 끝까지 너는 너의 몫의 역할을 다 하도록 하십니다. 영원히 저주 받는 역할을 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을 위해서 창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계속 누누이 강조하는 겁니다. 하나님, 저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는 질문 자체도 틀린 질문입니다. 질문을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어떤 질문을 해서는 안 되느냐 하면 하나님 저는 누가 만들었습니까? 라는 질문을 해서는 안돼요. 하나님 무슨 일하라고 만들었습니까? 이런 질문은 ok입니다. 하나님 저 교회 잘 다니고 있죠? 이런 질문을 하면 안돼요. 하나님, 저를 뭐 때문에 예수 안 믿게 하십니까? 이런 질문은 ok입니다. 하나님, 저는 왜 교회 놔두고 절에 가서 부처 믿게 하십니까? 이 질문 ok입니다. 그런데 절에 가는 사람치고 이런 질문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를 만든 것이 아니고 인간의 자리를 만든 거예요. 우리를 만드신 것이 아니고 우리 자리를 만드신 겁니다. 우리의 과학적인 인식은 우리의 그림자라고 하는 것은 뭐가 우선이고 그 다음에 그림자가 있는 거예요. 내가 먼저, 내 실체가 있고 난 뒤에 그림자가 있잖아요.

비타 500이 먼저 있고 그림자가 나오죠. 그림자가 있고 비타 500이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실 때 어떻게 했느냐 하면 인간의 자리를 위하여 인간을 만들어 놓은 거예요. 인간이 어떻게 불평을 하던 간에 상관없이 우리 인간의 자리가 우리를 갈군 다니까요 괴롭힌다. 끝까지 추적한다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리가 끝까지 그 인간을 갈구는 겁니다.

tv 드라마에 ‘보고 싶다’하는 드라마가 있어요. 드라마 여자 주인공 이름이 이수연, 수연이는 수연이로 돌아가기 싫어요. 왜? 성폭행 당한 수연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귀신이 붙었는지 한정우는 계속보고 싶다. 불 꺼진 가로등 밑 몇 미터, 주홍 글씨로 ‘보고 싶다’적어 놨다. 계속해서 옛날에 너와 내가 함께 이루었던 자리, 나만 단독적으로 성립될 수 없는 그 자리, 네가 있음에 내가 있고 내가 있음에 네가 있는 그 자리에 네가 그 자리를 마련해 놓고 계속 돌아올 꺼라 하잖아요.

수연(은혜)는 울면서 나는 그 자리에 돌아가기 싫다는 거예요. 나는 조이가 되고 싶다는 거예요. 저는 창세기 2장 3장을 보는 것 같아요. 내가 있고 그림자가 있다. 하나님이 말합니다. 그게 아니야! 내가 있다 하는 질문 자체가 그렇게 질문을 퍼부울 수 있는 그런 권한이 나한테는 처음부터 없는 거예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에게는 나는 여기 있고 나를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는 질문 할 자격을 하나님께서 만든 적이 없습니다. 너는 그런 질문조차 할 자격이 없습니다.

인간의 자리가 먼저 있고 그 자리를 빛내기 위해서 인간이 거기에 맞춰서 간 겁니다. 그런데 에덴동산에서는 에덴동산 중앙에 인간이 있는 게 아닙니다. 에덴동산이 인간의 저택이 아니고 인간의 빌라가 아니에요. 에덴동산의 중심에는 인간 보고 잔소리하고 인간에게 잔소리하는 어떤 두 개의 나무가 있습니다. 그게 하나는 생명나무요 하나는 선악과죠. 성경을 수십억명이 봤습니다. 그 수십억명이 성경을 보면서, 창세기 2장을 보면서 아,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었구나!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지 나를 하나님이 만들었구나라고 말할 자격이 못되는구나 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아마 한정우 빼놓고는 없지요. 그 드라마 과거에 그 수연이를 잊지 못하는 사람이 한정우라면 오늘날 진짜 인간을 만든 취지를 기어이 잊지 못하신 분은 누구일까요? 예수님이십니다. 왜냐? 예수님이 아담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설교에서 아담 속에는 아담이 없다는 이야기를 했죠. 아담 속에 아담은 없어요. 그러면 아담 속에 아담이 없으면 아담은 어디 있느냐? 예수님 안에 진짜 아담이 거기 있어요.

그러면 인간이란 아담은 뭐냐? 그것은 껍데기입니다. 그 헛 껍데기를 누가 양상 했습니까? 마귀와 한 살림 차린 악마가 말합니다. 야, 너 나랑 손잡았잖아! 우린 이제 과거는 잊어버리고 조이로서 새로 시작하자! 하는 겁니다. 우리 쪽에서 출발해서 하나님을 새로 관계 맺고 하나님을 찾자!

하나님이 해를 만들어 놨죠. 그 정도는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범위 안에서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어봅시다. 이게 가인이 하나님께 제사한 룰입니다. 살아있는 내가 살아있는 하나님과 살아있는 관계를 맺겠다는 것이 뭐가 잘못됐습니까? 이게 가인입니다. 하나님은 아벨을 통해서 죽어있는 나를 하나님이 죽게 하신 그 이유로부터 출발하자 하는 것은 바로 아벨이었습니다.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가 출발점이 다릅니다. 가인은 이왕 까먹은 거 새로 출발 합시다. 가 가인의 제사라면 아벨은 나는 너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너의 자리, 인간의 자리부터 출발하겠다. 그 인간의 자리라고 하는 것은 결국 진짜 인간은 누구입니까? 진짜 아담, 하나님이 내 사랑하는 기뻐하는 아들이라고 외쳤던 중요한 것은 두 사람도 아니고 세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죠.

요단강에서 성령 받을 때 우리 보기에는 그냥 이벤트였지만 주님보시기에는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했던 인간의 원형을 마지막 때에 공개하시는 겁니다. 예수님 앞에 비교할 때 나는 가짜이고 주님은 진짜 인간이고 나로 하여금 가짜면서도 진짜라고 호소하게 만들고 위대하게 만들고 잘못 가르치게 만든 그 원인은 바로 그 원인이 삐뚤어지고 이탈하고 노선이 벗어나게 한 그 원인의 자리, 사건의 자리로 다시 돌아가야죠. 그 선악과 따먹은 사건은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오늘도 매일, 일상 가운데 반복되는 사건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아담이 따먹은 그 버릇과 그 성질과 그 속성을 유감없이 발휘하면서 이 연극무대에서 마음껏 연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저 살아있습니다. 복 주세요. 이런 식으로 연극을 하고 있어요. 하나님은 ‘죽은 놈이 무슨 복이야!’ 그러면 죽은 자이니까 죽여 버리죠? 아니 아니야 죽은 자가 네가 죽는 게 아니고 그것은 마귀 진짜 죽음은 네가 생각하는 그 이상의 예상 밖의 깊이를 갖고 있어요. 그 죽음은 심판이고 마귀의 속성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죄인인 인간을 통해서 끝까지 우리 배후에 있는 악마의 실체를 드러내는 데 우리를 미끼로 사용합니다. 창조부터가 정돈이 안 되어 있어요. 창조부터 도대체 내가 창조되어 놓고 나부터 창조를 끄집어내니까 마귀가 좋다고 ‘그래 잘했어 이제부터 너는 종교생활하면 되는 거야!’ 종교생활이 뭐에요? 살아있는 내가 어떻게 하면 천국에 입성하느냐 그거잖아요. 일요일에 바빠서 교회 못 가는데 나중에 늙어 죽을 때 예수 잘 믿어야지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거예요. 도대체 누구를 위해서 밥을 먹는지 무엇 때문에 바쁜 건지 나의 바쁨을 위해서 내가 존재하는 것인지 스스로 질문할 수 있는 여권이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악마가 이야기해 주는 창조론과 인간론을 우리가 도외시하면 안 됩니다. 악마가 자연스럽게 응용합니다. 우리가 악마는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보세요. 하나님 무서워 나 벌벌 떨고 싶어요. 하면 믿음 좋은 겁니까? 야고보서 2장에 뭐라 했던가요? 그런 것은 누구도 안 믿는다? 그런 것은 귀신도 안 믿어요. 귀신이 그것 믿는다고 귀신이 천당 갑니까? 아니잖아요. 뭔가 달라요. 그냥 하나님이 존재하시고 하나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누도 알고 있다? 악마도 알고 있어요.

마태복음 8장에 보면 무덤 속에 청년이 귀신들려 있을 때 예수님이 오실 때에‘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다른 귀신들이 보면 예수님께서 귀신 쫓아내니까 마귀가 나타나서 어 주의 종이여 어떻게 이렇게 납시었습니까? 나는 주의 종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입 다물라!’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니까 마귀가 나서서 먼저 선방 때리면서 ‘이 사람은 하나님의 도를 전하는 사람이다.’

왜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데 마귀가 앞서서 선전해도 그것을 마다하고 말을 하지 않느냐 하면 하나님의 복음, 하나님의 창조는 분류작업을 위한 용도에요. 사람들을 구원하는 용도가 아닙니다. 납득되는 그런 예수님은 안돼요. 가인은 가인대로 아벨은 아벨대로 분류를 해야 돼요. 가라지와 알곡이 섞여버리면 천국은 안 됩니다. 선택하려고 천국 만든 게 아니거든요.

국가가 질이 떨어진다는 것은 뭔가 하면 사람들이 예를 들어서 어설프기 때문에 질이 떨어집니다. 바벨론은 갈수록 금 은 동 철 놋……. 가면 갈수록 인간 대 인간의 힘의 결속력에 느슨해지고 언젠가는 항상 불란과 발란 가능성이 많아요. 결합력이 약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르겠어요. 문재인, 안철수가 언제 언제까지 결합력이 있을지……. 악마가 이야기한 창조론은 항상 출발을 선악과 따먹은 잊고 우리는 이제 새 출발하겠습니다. 나 여기 살아 있잖아요. 그것도 생생하게 살아있거든요.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면서 우리가 새 출발하고자 하오니 신이시여! 신의 나라에 갈 수 있도록 팍팍 밀어주소서. 도와주소서! 라는 창조론을 유지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은 내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그림자가 뒤에 나오는 게 되지요. 내가 먼저 있고 그림자 있기 때문에 그림자가 잘못됐을 때는 그 그림자 수정에 누가 나서면 되겠습니까? 내가 나서면 되겠지요. 내가 나서서 잘못된 것을 내 꼬리 같은 것을 수정하는 이것이 언약이 아닌 행함으로 악마가 그렇게 꼬깃꼬깃 숨겨놓은 악마가 하나님께 접근하는 방법이 되겠습니다.

악마에 의해서 내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는 모든 시도는 내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그 그림자를 내가 관리하고 깨끗하게 처리함으로서 천국의 입성을 노리는 그 방식, 그 방식이 바로 악마의 방식입니다.

그래서 악마의 방식을 ‘자아’라고 합니다. 자아의 특징은 다른 게 아닙니다. ‘살려 주세요!’ 모든 행동, 눈꺼풀 깜박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변을 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행동에는 뭐가 포함이 되어 있느냐 하면 ‘살려 주세요!’ 더 절실하게 이야기하면 ‘제발, 살려 주세요!’영어로 하면 'please', ‘제발 살려주세요!’를 다른 말로 하면 뭐하기 싫다? 죽기 싫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완곡한 표현으로 하나님의 조치에 대해서 지금 훼방하고 방해 하는 모습입니다. 선악과 따먹으면 당연히 지당하게 죽는 것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방금 뭐라 했습니까? ‘제발, 살려주세요!’

예를 들어 여성이 머리하러갑니다. 손님 여기 앉으세요. 머리 어떻게 할까요? 머리 약한 파마해 주세요. 그리고 그 뒤에 ( ), 약한 파마 해 주세요. ( ) 뒤에 생략된 말을 집어넣으세요. 파마 잘해서 제발, 나를 살려주세요. 모든 행동에 그렇습니다.

하나님 우리 애 이번에 수능 쳤는데 좋은 대학가게 해 주세요. 생략한 것 집어넣어라 하면 그래서 제발 우리가정 살려 주세요. ‘보고 싶다’ 이야기를 했으니까 계속 하겠습니다. 수연이가 옛날 과거에 성폭행 당했던 시절로 돌아가기 싫어서 나는 새로운 조이로 부잣집 부인으로 살고 싶다 할 때 정우, 남자 주인공이 제발 수연이로 돌아오라 왜? 괄호 열고 내가 그때 나 되게 네가 도와 줘! 네가 그때 모습으로 돌아온다면 동시에 나는 어디로 갑니까? 옛날에 아름답게 사랑했었던 때로 돌아왔겠죠. 그 이야기는 산다는 것은 처음에 살려 달라는 그 삶으로 그 모습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러면 살려주세요. 라고 한다면 이것은 누구보고 외치는 겁니까? 뭐 하나님일수도 있겠죠. 이것을 철학에서는 뭐라 하느냐 하면 ‘타인’이라 합니다. 인간의 자아라고 하는 것은 돌멩이가 아니고 살아 숨 쉬고 있고 말을 하지요 사회를 형성하고 집합과 집단을 형성합니다. 그럴 경우에 뭐가 필요합니까? 내가 누군가에 보여줄 타인이 필요합니다. 타인이 필요한데 내가 누군가를 보여줄 타인이 사라져 버리면 누구도 같이 사라집니까? 나의 나됨을 증명해 줄 타인이 없으면 나도 같이 없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나는 살아도 산 게 아니고 죽게 되니까 나를 살려 주세요 라고 한다는 것은 내가 나를 안다고 나를 귀하게 여기고 내가 그때 참 좋았다고 여겼던 그때의 내 실체를 다시 구성하기 위해서 바로 내 앞에서 나의 모든 것을 받아줘 이렇게 되는 거죠.

예를 들어 돌아가신 아버지, 돌아가신 어머니, 일찍 죽은 아내, 일찍 죽은 남편, 자식, 특히 여자 분이 67인데 암으로 돌아가시고 남자가 이제 71, 요새는 청춘 아닙니까? 청춘인데 그 남자가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다고 2년 만에 죽었어요. 가만히 있다가 죽는 게 아니겠죠. 그 2년 동안 뭐하겠어요? 계속해서 이미 죽어버린 누구를 찾겠습니까? 그 끈, 그 때 나를 나 되게 만든 타인, 이미 그 여자는 존재 않지만 누구는 존재해요? 내가 존재하지요.

그러니까 만날 죽은 아내 무덤에 가서 소주 들고 가고 오징어 들고 가서 야속한 여보야 날 두고 먼저 갔느냐 하면서 계속 존재의 끈을 찾는 이유가 결국 자기 배를 가르면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다? 자기가 들어 있는 게 아니고 그동안 나를 나 되게 만든 모든 사랑하는 아들과 자녀 등이 그 안에 다 들어 있는 거예요. 이것을 끄집어서 계속 내놓고 죽은 자를 부르짖고 있는 겁니다.

실제로 있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안양에 어떤 권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장모하고 사위가 같이 살아요. 사위가 평소에는 괜찮은데 술만 먹고 들어오면 ‘어머니, 존재감이 없습니다. 존재감이’존재감이 없습니다. 하는데 권사님이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할지, 저게 무슨 말인지? 이해 못하지요. 왜? 권사님은 남편 되는 집사님이 있기 때문에 존재감이 있다 없다 자체를 생각할 이유가 없어요. 왜? 정상이니까 부부가 같이 사는 게 정상이기 때문에 존재감이 없거든요.

도대체 나의 아름다운 과거, 그 역사를 다시 회복시키고 보상해 줄 그것이 없어요. 없으니까 그냥 타인이니까 타인이 죽으니까 결국 누구보고 이야기하는 겁니까? 그때 나를 이렇게 맺어준 누구 있습니까? 하나님이 계시잖아요. 결국은 타인이지만 타인을 더 거쳐 가면 그 배후에는 누가 계시다? 하나님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나님이여, 내가 즐거운 그때의 나의 나됨을 위해서 제발 저를 저답게 살려주세요.

하나님께서 ‘선악과 따먹은 그 입을 가벼이 놀리느냐?’ 해도 그게 들리지도 않아요. 따먹은 것은 따 먹은 거고 지금 답답한 것은 답답하다 말이죠. 그것을 그대로 하나님께서는 연극무대 위에 세우십니다. 70평생, 80평생, 90평생 사시면서 오늘 배우셨으니까 써 먹으세요. ‘야야 내가 내 등이 왜 가려운지 좀 긁어줘’ 하면 뒤에 생략된 것 있지요. 내 등 좀 긁어줘. 제발 살려줘. 그런데 등 긁어주는 손자가 갑자기 사고로 갔던지 미국을 갔던지 없다 하면 ‘야야 내가 등이 가려울 때 마다 자꾸 손자 생각이 나네.’

여러분 이게 제가 꾸며낸 이야기입니까?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뭔가 나라는 것은 나답게 조정하면서 숫한 사람들이 재료로서 원료로서 다 들어갑니다. 비빔밥 그냥 만들어 지는 게 아니에요. 콩나물, 고추장, 참기름, 온갖 나물, 소고기 넣고 하잖아요. 그런데 소고기 없고 고추장 없는 전주비빔밥은 그 비빔밥이 아니잖아요.

사람들의 희망은 타인에 의해서 자신이 만족할까요? 만족 안할까요? 이 자아가 타인에 의해서 만족할까요? 만족 안 할 까요? ‘아이고 나는 자아로서 기분 좋습니다. 됐습니다.’남편이 출장을 갔다든지 교육받으러 갔다든지 없는데 이제 다시 남편 만나니 족합니다. 하는 것에서 멈출까요? 멈추지 않을까요? 멈추지 않지요. 어디를 가느냐? 미지의 X, X라는 것은 미지의 뭔가 나도 몰라요. 나도 모르는데 진짜 나다운 것은 연극 무대 뒤에 커튼 뒤에 숨겨져 있어요.

그것을 만약에 남편이 걸었다하면 남편을 대고 그것을 가는 겁니다. 어떻게? 선악과 따먹을 때 그 본성이 뭡니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하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악마를 만날 때 이것이 돈 많고 인기 많고 세상권력 차지하는 것, 뭔가 최고의 자리에 올라갈 때 당신은 나한테 그냥 월급만 주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여타의 남편처럼 귀부인으로 만들어낼 책임이 있기 때문에 손잡고 지금부터 더 많은 돈, 더 많은 인기, 더 많은 권력으로 나를 제발 데려다 다오! 그게 뭔데? 나도 몰라. 그게 뭔데? 미지의 X입니다.

없으면 없다고 불평, 세워주면 성에 안차서 불평, 그러면 어쩌란 말입니까? 그래서 드라마에서는 이 미지의 X 이야기를 안 하고 기껏 해결하는 것이 모든 드라마는 뭐로 끝나지요? 결혼식으로 끝납니다. 두 분 결혼했잖아요. 끝났습니까? 더 욕심 없습니까? 도대체 이 미지의 X가 누구란 말입니까? 결국 미지의 X가 있으니까 자아는 첫 지점이라고 여겼던 자아가 첫 지점이 아니었고 누구한테 놀림 받은 중간 지점에 자아가 튀어나와요.

성경에 나온 예를 들겠습니다. 욥이 창세기를 몰라요. 욥이 천지창조도 모르고 욥이 창세전에 우리를 선택했다는 것도 몰라요. 다만 욥이 아는 것은 어느 시점에 자기가 태어났고 지금은 자식 10명에 부자 됐다는 이 사실만 알고 있을 뿐이지 중간과정이죠. 그런데 그 중간 과정에서 만족하기 때문에 미지의 X를 찾을 필요가 없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욥을 연극무대에 올려놓고 무엇을 야금야금 다 가져갑니까? 자식 10명 다 가져가지요. 그런데 욥이라고 하는 것은 자식을 기도 하면서 죄 안 짓도록 괜찮은 믿음으로 잘 키웠다는 것을 욥이 믿음 좋은 증거잖아요.

이 욥이 믿음 좋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는 자식 10명이 죽어 있어야 돼요? 죽어 있어야 돼요? 살아야 있어야 돼요. 믿음이 오고 가고 분위기 좋은 거예요. 살아있다 말이죠. 여러분, 축복이 왜 필요 하느냐 하면 축복 소유도 중요하지만 축복을 받게 되면 내가 축복을 받을만한 존재라는 것이 확인되니까 기분이 좋다니까요.

그런데 하나님하고 마귀하고 내기해서 어떻게 합니까? 욥에게 그 귀한 자식들 믿음도 좋아요. 믿음도 개판 같은 아들을 10명준 게 아니고 믿음 좋은 10명의 아들, 죄 안 짓는 10명의 아들을 한꺼번에 다 죽였지요. 이웃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저 사람은 저 만한 신앙에 저 만한 재물과 축복받는 것은 우리가 시기심이 안 날정도로 합당하다고 여기는데 그것을 가져갔습니다.

그 다음 차례 욥의 리액션, 반응을 적어 놨습니다. 주신자도 하나님이요 가져 가신분도 하나님이다. 마귀가 이야기합니다. 놀고 있네! 아직도 덜 가져갔으니까 그런 소리 하는 거예요. 나의 나됨을 덜 가져간 거예요. 욥이 욥 됨을 보여주기 위해서 자식과 재산이 있었는데 이것을 날아가게 만들었어요. 욥은 아직까지 다 안 나왔다는 것이 악마의 이야기입니다. 이게 오늘 본문의 내용과 결부되어 있어 어려워요.

자아가 세분화되면 셋으로 갈라집니다. 육과 혼과 영으로 갈라지게 되어 있어요. 결합된 것을 자아라고 합니다. 그런데 악마가 보기에 자아 따로 있고 육이 따로 있잖아요. 분명히 자식들 날아가고 재산이 날아갔는데 아직도 욥이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버티는 것은 아직도 자아가 무엇을 가지고 있다고 본 겁니까? 건전한 몸을 가지고 있다고 보죠. 그 몸에 악창이 돌았을 때 드디어 걸려들었어! 자기 몸에 악창이 걸려 기왓장으로 긁게 되니까 슬슬 이제 자기 생애를 원망합니다.

원망할 때 욥이 출생한 것이 자기는 자기의 시작으로 했으니까 자기의 출생을 자기의 시작으로 봤지요.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무엇까지 인도하느냐 하면 출생 전에 욥을 욥 되게 한 욥 말고 욥을 욥 되게 만드는 그 자리까지 이끄십니다. 욥도 감을 잡았어요. 하나님이 구속자가 계시니까 내가 죽고 난 뒤에 구속자 만나서 한번 따지기를 원합니다. 왜 죄가 없는 나에게 이런 고난을 주시는지? 고난이라는 것은 죄 있는 자에게만 주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선악적 사고방식이죠.

왜 나쁜 짓 한적 없는 나에게 고난을 주십니까? 하나님께서 하시는데 하나님은 일부로 마귀와 내기해서 일부로 자꾸 욥으로 하여금 네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네가 너 되게 만든 그 숨어 있는 그 자리를 알려 주는 계기로 욥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그 자리가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자리입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가 만들어 졌습니다. 골로새서 1장 16절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체험화기 위해서 하나님은 욥에게 그 만한 수고와 그 만한 세월과 그 만한 아픔을 주께서는 말씀하나 이루기 위해서 그렇게 인생을 망쳐 놔버렸어요. 그러면서도 하나님 입장에서는 전혀 지금 문제 되는 게 아무 것도 없는 겁니다. 욥이 울고불고 난리 나도 주님 앞에서 지금 일이 잘 풀리는 거예요.

지금 욥은 잘 풀리고 있는 거예요. 욥은 잘 풀리고 있는데 욥이 자기로부터 시작할 때는 잘 풀리는 것도 잘 풀리는 것으로 느끼지 못했지요. 그런데 욥에 언제 잘 풀리는 것을 느꼈습니까? 출발점을 나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욥이 욥 되게 하는 본래의 자리부터 시작할 때에 욥은 아무 소리 못하고 죄를 뒤집어쓰고 내가 입은 있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하고 입을 다물 때 이쁜딸 셋을 주시고 재산도 전에 보다 갑절로 주실 때에 욥이 그것을 축복으로 간주 하겠습니까? 안 하겠습니까? 축복으로 간주할 입장이 못 된다는 것을 알아요. 그냥 하나님의 안에 자기가 있는 것 자체로서 이미 복이란 복은 다 누리고 있는 거예요.

그 다음에 자식이 어떻게 되고 재산이 많은 것은 그것은 남 좋으라고 하는 일이지 자기 더 추가적인 복이라는 개념에서의 잉여 개념으로서 축복은 아닌 겁니다. 이것은 주님 일을 주님답게 활용하기 위해서 자기한테 잠시 주어진, 자기에게 벌어진 하나의 이벤트로서의 그런 축복이지 내 소유되라고 주신 축복은 아닌 겁니다.

그러니까 구약성경을 늘 진행하면서 항상 뭔가 충돌과 다툼과 서로 이질적이고 서로 섞일 수 없는 두 가지 노선이 계속 진행되고 있는 거예요. 끝까지 가는 거예요. 내가 주인공이 된 자리는 아니면 나 되게 만든 주님의 진짜 인간, 참 아들 되신 예수님이 우리의 그림자로서 먼저 계시고 숨어있는 분으로 계시고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숨어있는 분을 돋으러 지게 들어내기 위해서 잠시 이 땅에 살다가 잠시 연극무대에 활동하다가 없어지는 존재냐 그 갈등과 그 싸움이 구약 내내 이어지고 있습니다.

어느 쪽에 있는가를 여러분 자신에게, 우리 자신에게 물을 자격은 없습니다. 자격이 없을 뿐 더러 우리가 그것을 궁금해 할 자격도 우리에게 없어요. 궁금한 것 알아도 아무데도 쓸모가 없는 거예요. 주께서 쓰시는 그것이 항상 나의 잘못된 악마로부터 받은 나의 창조 관과 인생관 그것을 표면에 내세우면서 그것을 뒤에서 치고 있는 식으로 우리가 주의 종으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 그러니까 옳다 그르다, 그르다 옳다는 우리가 스스로 판정을 내린다는 그 자체가 참으로 우리가 주재 넘는 자기 분수도 모르는 짓들을 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옳은들 어떠하리. 그른들 어떠하리.…….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요? 야곱이 나쁜 짓했습니다. 그게 야곱한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야곱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결정 났는데 네가 태어나서 선이냐 악이냐 저지르기 이전에 이미 그것은 선과 악이 아닌 다른 차원, 그게 뭐냐? 사랑받기로 작정된 사랑이 뭐냐를 보여 주기 위해서 야곱에게 선도 행하고 악도 행했더니만 선, 악 그것은 사랑 앞에서 빛을 잃어버려요.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잠시 잠깐 드러난 세상적인 현상들이죠.

지금도 우리를 그렇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자아라는 것 자체가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발생된 것이기 때문에 자아에서 나오는 육과 혼과 영으로 하는 분류 방법은 구약에는 없습니다. 없는데 왜 여기는 있는가? 이것은 신약성경에 이미 이방나라, 사도 바울의 모든 편지는 누구한테 전한 거라고요? 이방나라에 있는 유대인에게 해당됩니다. 그러면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과 차이점이 뭐냐? 그때는 율법으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야고보서나 율법사가 이야기하는 것이고 팔레스타인의 블레셋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 말고 다른 데서는 전부 다 이방인 관점의 개념과 용어를 사용하는 겁니다. 특히 요한복음 같은 경우 로고스라는 용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분류를 했다는 것은 인간들이 바로 자기를 출발점으로 시작해서 인간론과 인생관을 정하고 있다는 이 말아닙니까? 그것과의 차이를 봅시다.

자아라는 것이 없어야 돼요. 왜냐? 내 자아는 따로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자아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잖아요. 이게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나는 죽었고 내가 죽은 상태라면 죽은 내가, 내가 될 수 없잖아요. 그러면 누구입니까? 죽은 것은 나고 그러면 내 몸이 살아있다는 것은 살아있는 것은 누구에요? 주님께서 내 몸을 계속 살리고 있다는 것을 믿는 게 믿음이라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죽었으니까 죽은 자들이 율법을 부른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거예요. 이미 죽은 사람에게 ‘어이 시체, 너 왜 짬뽕시켜 놓고 그냥 죽으면 어떻게 해! 우리 장사를 헛장사하나? 자지 말고 일어나 봐! 빨리 짬뽕값 4천원 빨리 내놔!’ 이게 됩니까? 안 됩니까? 우리가 죽을 때 이미 값을 치른 채로 죽은 거예요. 그런데 마귀가 와서 ‘어이 죽은 자, 나쁜 짓 했잖아 나쁜 짓한 값을 치러야지!’그러면 주님이 내가 죽였다 내가! 값은 내가 치렀어! 너한테 갚는 게 아니야 하나님 아버지한테 이미 값을 치렀어! 내가 피로 이 죽은 자의 값을 누가 치렀습니까? 우리 하나님아버지께 값을 대신 치렀습니다.

우리가 죄진 것을 갚을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이것을 뻔뻔이라 해도 괜찮아요. 우리가 안 뻔뻔스러워서 문제가 됩니다. 우리가 안 뻔뻔스럽다는 것은 아직도 내게 속한 내 자아를 주장하기 때문에 남들 보기에 내가 생각해도 부끄러워서 인생 못살겠다. 하고 자기가 자기를 걱정하니까요 그러니까 무슨 피가 모독 받습니까? 굉장히 겸손 해 보이지만 그 겸손이 결국은 누구를 모독한 마귀의 전략이었다? 예수의 피를 헛되게 만들고자 하는 어떤 율법적인 성과를 다시 한 번 우리에게 불을 피우듯이 불씨를 키워 데는 악마의 유혹에 잠시 우리가 말려들어서 그만 악마의 장단에 놀아난 거예요.

제가 처음에 강의 할 때 뭐라 했습니까? 악마가 이야기한 인간관을, 창조 관을 우리가 잊으면 안 된다 했지요. 우리가 그것을 알고 있어야 돼요. 나 여기 있다. 누가 만들었어요? 하나님이 만들었음을 믿습니다. 됐어! 이제 창조론은 깨끗하게 좋은 정답으로 결론 났어. 아닙니다. 이미 선악과 따먹고 악마와 한 통속 되었으면 하나님이여, 인생관이 뭡니까? 네가 그렇게 묻는 것이 악마의 자리야! 그렇게 묻겠다는 의도가 뭐냐 이 말입니다.

자아가 인생관을 확보해 놓으면 이 자아는 내가 나를 살리는 방식으로 자아를 꾸려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어떤 가정이 있는데 젊은 나이에 가출을 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애가 사실은 그 아버지가 우리나라 재벌이라 합시다. 그런데 나는 아버지 재벌 싫고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겠다고 그냥 고생하면서 나갔다고 합시다. 그런데 집세 낼 때 되면 주인이 이야기하는데 누가 아줌마가 와서 집세 냈어요. 그런데 한두 번도 아니고 계속 내는 거예요. 가만 보니까 아빠는 자기를 미워해도 원래 엄마는 자식을 또 사랑하잖아요. 엄마가 대신 내준 거예요.

인간이라는 것이 자기가 자립하겠다고 선악과 따먹은 행세한 겁니다. 내 힘으로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해도 값은 누가 냅니까? 예수님이 값을 다 치러준 거예요. 자기가 자기 가치를 논하게 되면 그때 마다 누구의 가치가 자꾸 죽습니까? 이게 무산돼요. 예수님의 고마움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려요. 고마운 것은 지가 고마워요.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내가 왜 그리 고마운지 야야 네가 열심히 신앙생활 잘하니까 네가 오늘도 복 받고 사는 거야. 자기가 자기 보고 위로하고 다독거립니다. 경려하고 합니다. 이게 마귀, 마귀가 이 짓하는 겁니다. 창세기 3장 15절의 약속도 없고 십자가도 더 이상 필요치 않고 그냥 자기만 있으면 만사 오케이 되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인간이 어쩌면 매일같이 십자가 보지 않는 모습이 갑자기 졸지에 십자가 생각하지 않는 갑자기 돌아서는 그것이 바로 내 인생을 내가 알아서 해결하고 내가 알아서 꾸려 나간다는 자기 삶을 구축하고 가끔가다 하나님의 믿음 되자 이런 식으로 합리화하고 변명합니다. 제가 어렵다고 하는 것은 다른 게 아니고 자아가 몸과 혼과 영으로 갈라지는 자아가 자기 정당함을 위해서 몸에다 다 안 되면 혼에다 밀어버리고 혼이 잘 안되면 영으로 밀어서 기어이 자아를 지키려는 이런 생각을 유지하려고 애를 습니다.

아, 그때 나쁜 짓 안하려했는데 배가 고파서 유리창을 깨고 내가 그때 배만 안 고팠으면 안 깼을 건데 너무 배고파서 유리를 깨고 빵을 훔쳤는데 아, 그때 왜 그리 배가 고팠는지 몰라, 이런 식으로 몸이 자제가 안 될 때는 누구한테 미룬다? 혼, 그냥 혼이 아닙니다. 반성할 줄 아는 혼, 윤리 도덕이죠. 어쩔 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어떡하지? 안 돼! 어쩔 수가 없었어요. 첫 눈 오는 날 만나자! 약속했는데 자기는 나왔는데 저쪽은 안 나왔어요. 화가 나서 전화를 했어요. 그때 여자 쪽에서 하는 말이 두 시간 반을 기다리지, 차가 막혔지만 설마 내 사랑하는 남자 같으면 두 시간 반은 기다릴 줄 알았는데 사실은 보니까 그 남자가 두 시간 삼십일 분을 기다렸어요. 추운데 벌벌 떨다가 그것을 못 기다려서 둘이 갈라섰어요.

결국은 뭡니까? 몸은 두 시간 반을 기다렸는데 혼은 따라가지 못했어요. 결국은 이 정신 상태는 뭡니까? 세상이라 하는 것은 누구 마음대로 되어야 된다? 나의 자아의 몸과 혼과 영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세상은 같이 돌아가 줘야 합당하다는 것을 자아가 우기는 겁니다.

김창길(IP:210.♡.60.74)

13-01-01 22:18

서울 의존교회121214b (자아창조론)―이 근호 목사

자아라는 것은 원래 없어야 되는데 그 자아라는 것이 자아로서 시작돼야 될 정당성을 보여기 위해서 인간을 몸과 혼과 영으로 이방인들은 분류를 했어요. 이 분류 방법이 구약에는 없습니다. 하나님 언약에는 없어요.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의 구조를 분해 하는 게 아닙니다. 인간은 육과 혼과 영으로 되어 있습니다. 라고 인간구조 자체를 분해 하는 게 아니에요. 왜냐 하면 인간자체를 분해를 하려면 이게 정지 화면이 돼야 돼요.

인간은 움직이다가도 스톱 해 놓고 자, 분석하자 스톱해서 너 현재 몸이 가진 피부는 육이고 반성하는 마음은 혼이고 그런데 반성하다 안 되니까 오, 신이시여! 용서하소서! 그것은 하나님과 관계니까 영이고 이렇게 정지 화면을 스톱 해 놓고 세 가지로 분해를 해야 되거든요. 그런데 구약 언약의 입장에서 인간은 정지화면이 될 수가 없어요. 왜냐 하면 인간은 정지화면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인간을 가만 두지를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연극무대에서 인간이 설 때는 심지어 세 걸음 걷고 뒤돌아본다. 그때 상대 배우가 이런 이야기할 때 너는 이렇게 한다. 연극할 때 연습을 그렇게 하잖아요. 네가 무대 중앙에서 세 걸음 걷다가 스톱하고 잠시 호흡을 멈추고 왼쪽에서 나타나는 여자 출연자를 보고 이야기한다. ‘너 왜 이제 왔어?’ ‘ok, 그렇게 가는 거야' 딱 짜였잖아요. 그 무대라는 말은 그 무대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들이 이미 결정이 된 상태에요.

이스라엘은 세 걸음 가다가 블레셋에 왔을 때 그 때 사무엘 중심으로 금식한다. ok 금식할 때 멋도 모르고 블레셋 공격해! 공격하게 한다 하늘에서 우박 떨어지면서 멸망한다. ok 그 신 좋았어요. 컷 다음 신으로 갑시다. 골리앗이 등장한다. 혼자 등장한다. 다윗 등장해야지 소년 다윗이 형 말 안 듣고 왔다가 구경한다. 사울 왕이 다윗에 갑옷 입힌다. 대사에 거부하기 옳지 거부한다. 거부하고 소년 다윗이 물맷돌 든다. 던진다. 자 여기서 무대 조연출, 빨리 돌멩이를 이동시켜! 알겠습니다. 돌멩이가 드디어 골리앗 이마에 잠시 벌린다. 맞는다. 슬로우 비디오로 넘어지기 넘어졌다 다윗이 칼을 빼고 드디어 목을 벤다. 칼을 빼고 저 이스라엘 환호성 친다. 와! 우리가 승리했다. 아줌마들 사울은 천천히요 다윗은 만만이다. 옳지, 자 컷 예 잘됐습니다. 7만원씩 줘서 집에 보내고…….

이게 바로 구약의 인간관입니다. 발걸음을 어떻게 하십니까? 세시고 머리카락을 세시고 사람이 걱정한다고 키가 더 자라는 것도 아니고 안 되는 것은 할 수 없고 참새도 하나님이 친히 기르시고 우리가 무심히 보는 들의 들풀도 하나님께서 키우시고…….

창조는 ‘키우시고’입니다. 하나님이 벌리는 연극무대입니다. 그런데 구원은 키우시고 가 아닙니다. ‘죽여주시고’입니다. 죽여주시고 어디에 합류한다? 십자가에 합류하지 않는 이상은 천국은 어림도 없습니다. 십자가로 들어가지 않으면 천국은 없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들어갈 때는 곱게 들어가는 법이 없어요. 죽여주시고 죽여주기 위해서 감독되시는 예수님께서 여기에 뭐를 들여보내느냐 하면 ‘율법’을 보내 줘서 모든 사람의 입을 막고 아버지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게 하십니다.

얼마 전에 익산에서 서경수 목사님이 주례를 했습니다. 결혼식 주례 본문이 뭐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함이라’ 이게 주례의 본문이었습니다. 그 전에 주례가 있었는데 그 주례 본문이 뭐냐 하면 ‘세상의 모든 것들은 말씀이 없으면 될 것이 없나니’보통 같으면 감당이 안 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니’이것은 하나님의 구원 작업에 과정으로서 필히 죽여주시는데 목 졸라 죽이는 게 아닙니다. 율법을 줘서 죽여주시고 우리가 죗값이 사망인 것을 알아서 사는 것이 정상이 아니고 선악과 따먹은 이상은 그냥 죽는 정도가 아니고 저주 받는 것이 지극히 합당함을 깨닫고 그 값을 예수님이 대신 치렀다는 것을 우리는 감격하고 더 이상 입이 백개라도 할 말이 없게 만드시고 그래서 천국에 들어가게 하시는 겁니다.

만약에 이렇게 죽여주시고 십자가로 가지 않고 그냥 우회로 돌아서 십자가 가서 천국 간다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 하면 ‘여보게 자네 감당할 시간이네’ ‘아 맞다 내 시간이구나! 내 두 시간 동안 찬양하고 올 테니까 쉬고 있어요.’하고 주님 어린 양의 보좌에 가서 찬양합니다. 면류관 반납하면서 이것은 제가 쓰는 게 합당한 게 아니고 주께서 쓰시는 게 합당합니다. 찬양해 놓고 ‘아 참 시간 안가네 자 20분 남았다 자 찬양합니다.’ 어이구 주여! 터치 교대 하고 자기만의 휴식의 공간에 가서 의자에 앉아서 다리 꼬고 앉아 티브이 보다가 빨리 가라 주님께서 기다린다. 빨리 가서 찬양해라 너는 3반이야? 4반이야? 나 4반, 내가 갈게 한 숨 자고 난 뒤에 주님께 찬양합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안 됩니까? 천국 가서 자기만의 소박한 공간이 허용됩니까? 안 됩니까? 안되지요.

오늘날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월화수금토 쉬다가 주일날이다. 교회가자! 찬양하자! 라는 식, 이게 진정 천국이란 말입니까? 이게 누구를 위한 천국입니까? 자기를 위한 천국이죠. 율법으로 죽여주시고 십자가로 가게 되면 항상 여기 천국에 왔다는 것이 횡재를 했다는 느낌, 그게 강도가 줄어들지 않고 계속해서 영원토록 그게 유지가 되는 겁니다.

자아에서 몸과 혼과 영으로 나눠서 이것을 정지화면이라 했지요. 자아라고 하는 것은 원래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 일하심이 이스라엘이 놀 수가 없지요. 논다는 것도 노는 게 아니에요. 가만히 있어도 그게 주께서 일하심입니다. 가만히 있어라 홍해가 갈라진다. 이것도 거기에 합류한 것조차도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번 유튜브 동영상 찍은 본문이 뭐냐 하면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리이까? 목사보고 그 질문을 할 때 목사가 뭐라고 이야기하기를 그 질문한 사람들이 기대하겠습니까? 우선 헌금하시고 교회 빠지지 마시고 교회 열심히 참여 하시고 또 선교도 해서 많이 후원해주시면 마귀를 이기는 것이 우리의 일입니다. 라는 답변을 듣고 싶어 하고 왜? 납득이 되니까 또 우리는 그것을 기대하면서 질문하겠지요. 그런데 예수님한테 그런 이야기할 때 예수님이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일을 하리이까? 할 때 예수님의 답변은 무엇이었습니까?

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참 쉽지요. 진짜 쉽지요. 그런데 유튜브에서 그 뒤에 말씀이 뭐냐 하면 누구든지 아버지께로 내게 오게 하지 아니하면 아무도 올수 없다는 말을 집어넣었어요. 야, 그 말을 안해야 되는데 그 말을 안해야 팬들이 확보되는데 그 말을 집어넣으니까 내가 예수 믿는 행함을 하는 것이 소용이 없는 거예요. 내가 예수 믿는 일이 하겠습니다. 하고 결심한 것이 아무 짝에도 소용이 없는 거예요. 왜? 뒤에 있는 말이 앞에 결심을 무효화시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뒤에 말이 뭐라 했습니까? ‘아버지께서 나에게 오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수 없다.’그 소리 듣고 하나하나 다 빠져 나갔어요. 장사 헛장사하는 겁니다. 물건 없습니까? 물건 좋습니다. 값보다 물건 더 좋습니다. 이렇게 하면 물건 하나 팔 건데 가봐도 못 입을걸요. 그 이야기를 왜 해요. 장사하려고 하는지 말려고 하는지 그 이야기를 왜 해요? 가봐도 그게 안 맞을 건데 그 이야기를 왜 하느냐 이 말이죠.

모든 인간은 자아가 있기 때문에 자아는 뭐냐 하면 행동의 주인공이고 주체 아닙니까? 지금 믿는 것도 누가 믿고? 봉사하는 것도 누가 하고? 내가 봉사했어.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일을 했으니까 나를 버리시면 아니 됩니다. 이 말을 하고 싶어서 어떻게 합니까? 물었는데 주님께서 출발점이 네가 아니고 아버지께서 내게 오지 아니하면 결국은 구원받는 것은 누가 결정한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이미 결단 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지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누가 택한 백성이고 누가 가라지고 알곡이냐를 이미 확정된 상황에서 어떤 자가 정말 인간의 능력초월해서 오직 주님의 능력으로 기어이 천국 가는 길을 마귀가 있는 세상에 내가 확실히 보여줄 거야! 라는 것이 구약의 인간론입니다.

언약에 들어가게 되면 언약은 우리의 행함을 정당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정지화면이 아니고 움직이는 화면이에요. 야곱이 선과 악을 행하기 전에 이미 사랑받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가만히 있는 게 아닙니다. 역사가 없다고 아무에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에요. 역사가 없이 묵시가 되었다고 해서 아무 일도 일어나는 게 아니고 계속 일은 벌어지는데 이것을 내가 주체가 돼서 했습니다. 하고 가져올만한 그런 성경의 사건은 없다 말입니다.

우리 미아씨 머리카락 참 숱도 많고 좋으네요. 이렇게 이야기할 때 내가 머리카락 좋다는 것을 나에게 돌아올 수 있는 어떤 근거도 나에게 주어지지 아니합니다. 아주 어려운 말을 해 버렸어요. 내 머리카락이 숱이 많은 게 아니고 숱이 많다는 것조차도 사랑인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나에게 숱이 살아나는 그런 것으로 다루어진다는 겁니다. 어려워요. 진짜 너무 어려워요.

인간의 육과 혼과 영은 정지 화면에서 내가 누구인지 분석하기 위해서 나를 정지화면으로 두부 토막 내듯이 토막 낸 거예요. 세 토막 낸 것은 자아의 변명들을 늘어놓기 위해서 세 개로 나눈 거예요. 몸은 원이로되 마음이 안 따라 온다. 몸이 못한 것을 누구한테 핑계대고? 혼한테 핑계대고 혼은 그냥 혼이 아니고 반성하는 혼입니다. 반성하면 됐잖아요. 하나님 반성하면 됐잖아요.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합니까? 나는 부족합니다. 하고 자기를 치지요. 이렇게 몸은 안 따라 주지만 마음은 그래도 반성한 기미는 보였으니까 예쁘게 봐주세요.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그런데 그러한 혼의 반성이 육에 먹히겠습니까? 안 먹히겠습니까? 안 먹히죠. 그렇게 반성한다고 해서 육이 안 따라 주지요.

미스코리아 마지막 두 명 남았습니다. 자, 묻습니다. 누가 됐으면 좋겠습니까? 언니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이쪽에는 누가 됐으면 좋겠어요? 나 말고 동생이 되면 좋겠지요. 놀고 있네요. 세계 바둑대회를 하는데 중국의 대표 구리 9단과 한국대표 이세돌 9단이 마지막 결선에 붙었습니다. 누가 이겼으면 좋겠습니까? 그때 바둑기사가 아마 멋진 좋은 대결을 펼쳤으면 좋겠습니다. 어제 끝났습니다. 누가 이겼느냐? 이세돌이 이겼어요. 그때 구리 9단이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내가 두 번이나 졌으니 확실히 이세돌은 나보다 실력이 낫습니다.’야 대단한 사람이죠. 내가 뭐라 이야기해도 졌으니까 분명히 나는 저 사람보다 실력이 없어서 졌습니다.

아무리 내 몸을 다하여 내 정성을 다해 뜻을 다해 주의 율법을 지키라고 아무리 해도 나는 율법한테 졌습니다. 졌다고 반성하면 봐줍니까? 어이고 그래요 반성하는구나! 천국 여기 있다. 이럽니까? 천국은 반성하면 들어가는 곳이에요? 아닙니다. 천국은 아무도 못 들어가요. 반성하나 안 하나 못 들어가요. 하나 안 하나 마찬가지에요. 천국은 예수님께서 정하신, 아버지께서 정하신 자가 내게 와서 예수님이 뭐 때문에 죽었는가를 그 관계 속에 그 새로운 노선 속에 들어가지 아니하면 구원못받습니다.

이 자아는 우리가 생각하지 말고 진짜 자아는 예수님의 인간 속에 우리가 합류될 때만 구원받습니다. 예수 안에서 예수님이 나의 모든 것의 대신이에요. 예수의 몸과 혼과 영이 모든 것을 나를 대신하는 몸과 혼과 영입니다. 예수 안에서 구원받아요. 이것을 어린 양이 우리를 위해서 대신한다는 것이 출애굽입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이것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뭐냐 하면 어린 양의 피 때문에 구원받는 다고 하면 굉장히 쉬운데 어린 양을 믿을 때 내 몸으로 믿었는지 혼으로 믿었을까? 내 영으로 믿었을까? 또 자신의 결심을 정당화하는 식으로 자기를 계속 끄집어내니까 그것은 어린 양의 죽음의 그냥 어린 양 죽음으로 끝났지 나를 집어넣어서 함께 죽이는 그런 십자가의 의미가 거기서는 살아나지가 않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만 단독으로 죽는 것이 아니고 사도 바울과 같이 죽었고 성도와 같이 주는 죽음이에요. 성령께는 같이 죽었다는 사실을 소급해서 우리에게 적용시켜 버리면 우리는 매일같이 죽이는 작업을 그것도 그냥 죽이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로 인하여 십자가만 드러내기 위해서 날마다 죽이는 작업을 우리는 정지화면이 아니고 움직이는 화면으로서 늘 까불면서 죽이는 거예요.

까불면서 세상만사가 내 뜻대로 안되게 하시는 방법으로 우리를 예수님만 보이고 십자가만 보여서 당신 때문에 살았다는 고백을 하게 만듭니다. 이게 주의 증인입니다. 뭐 교인이 얼마이고 헌금이 얼마나 왔냐? 죽은 존재가 왜 저것을 걱정합니까? 나 교회에 나가야지 갑자기 이런 식이 되어 버렸다. 이것은 누가 그렇게 한 겁니까? 대본에 그렇게 쓰여 있다 말입니다. 대본을 다른 말로하면 말씀이죠. 말씀에 그렇게 쓰여 있어요. 여러분은 오늘 역할을 맡은 겁니다. 오늘 주무시면 여러분 이제 없습니다. 내일아침 다시 태어나요. 내일은 내일걱정하고 오늘은 오늘 역할을 하는 겁니다. 왜? 날마다 죽입니다. 그리고 날마다 죽여줘야 우리가 사는 것이 날마다 사는 것이 우리 덕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안양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어떤 부자는 잠을 못자요. 그런데 어떤 가난한 사람은 잠을 잘 잡니다. 이 부자가 말하기를 한 시간만이라도 나를 자게 하는 사람은 내가 20만원 주겠다. 그러면 그 가난한 사람은 아무 것도 안 하고 9시간 잤으니까 180만원을 그냥 버는 거예요. 성경에 뭐라 합니까?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데 9시간이라 하는 말은 없어요. 30분을 자도 잠을 주시는 거예요. 살게 하신만큼만 살고 더 살고 싶어도 못 살게 만들고 죽고 싶어도 못 죽게 만들어요.

사도 바울이 죽고 싶어 환장해도 결국은 자기 할 것 다하고 마지막에 주께서 데려가십니다. 그게 요한복음17장에 나옵니다. 너희는 나처럼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어. 하지만 데려가지 않는 이유는 진리접화 차원에서 쉽게 말해서 나를 증거하는 연기자로서 사용하기 위해서 써먹기 위해서 베드로는 이만큼 살아야 되고 요한 이만큼 살아야 하고 사도 바울은 이리로 아니고 저리로 가야하고 저와 여러분도 이 만큼 살다가 이 만큼 죽어줘야 되고 이게 서지 않고 계속해서 움직이는 거예요.

만약에 우리가 움직여버리면 십자가도 움직이죠. 십자가가 죽은 십자가가 되어버립니다. 그러면 만날 우리는 자신을 자아로서 묶어버리면 그 예수님은 아무 일도 못하고 그냥 아무 일도 안하는 모시는 그런 예수님으로 만나게 돼요. 그것이 바로 정지위성 논리이죠. 지구가 있는데 지구에서 위성을 올렸는데 위성이 그 자리에 고정되어 있는데 사실은 고정 되어 있는 게 아닙니다. 지구와 도는 속도와 동일한 속도로 돌고 있어서 우리는 정지하는 것으로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노는 것도 일입니다.

자아에서 육과 혼과 영으로 나뉠 때 양적 개념으로 몸과 혼과 영으로 비교되겠지요. 측량하는 양적 개념, 분량의 개념으로 어느 것은 많고 어느 것은 적다는 개념이 에너지개념입니다. 에너지를 많이 주어지게 되면 많이 기뻐하고 에너지가 적게 오면 슬퍼하고 우리의 몸은 몸인데 우리의 몸이 느끼는 감정은 혼이 작용하고 우리 혼이 반성하는 것은 반성할 만한 기준을 영에서 제공하는 이게 바로 유대인이나 율법 바리새인들이나 이방인들이에요.

이방인들의 특징은 율법이 없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에요. 하나님을 모른다는 말은 마귀가 악마가 그렇게 가르쳐준 대로 자기 자신을 규정하고 정립하는 그런 사람들이에요. 그런 사람들이 무슨 개념이 있겠습니까? 모든 것을 양적 개념입니다. 쉽게 논리로 풀어간다면 내가 기분 좋다 하면 기분 그냥 좋은 게 아니에요. 기분 어떻게 좋아? 좀 좋아! 어떤 때는 많이 좋아! 기분 나빠, 조금 나빠, 조금 더 나빠, 나빠도 너무 나빠! 기분 나쁘면 바꿔줘! 기분이 너무 나빠! 보세요. 사람의 감정이이란 것이 뭔가 스펙트럼처럼 연이어 끊어지지 않지요 이어지고 있지요. 이어지는 모든 에너지가 뭡니까? 연결되면서 양적 개념으로 되겠지요. 게이지 측정이 가능하다는 거예요. 몸무게가 73에서 74, 74에서 75로 연속적으로 연결되잖아요.

오늘은 내가 기분이 약간 좋아! 이것을 달리하면 나는 기쁜 짓을 오늘 많이 했어. 아니 많이 하지는 않아도 중간쯤 했어, 조금했어, 이게 그냥 하다니까요 누가? 양적 개념에서 그런데 에서가 저주받잖아요. 에서가 조금 약합니까? 아니면 많이 악했어요? 악해도 너무 악한 겁니까? 어떻게 되는 겁니까? 언약궤에서 웃사가 붙들었을 때 웃사가 붙들었다고 웃사가 죽지요. 자, 묻습니다. 웃사라는 사람이 언약궤가 흔들리니까 붙들 때 1번 약간 붙들었다. 2번 심하게 붙들었다. 3번 심해도 너무 심하게 붙들었다. 몇 번이 웃사를 죽게 만들었던 원인이 됩니까? 이게 성립이 안 되잖아요.

그런데 왜 교회는 목사가 사기를 칩니까? 봉사를 조금하지 마시고 어떻게 하라? 많이 하세요. 왜 사기를 치십니까? 모세가 돌 판을 깨뜨릴 때 1번 살살 던졌다. 2번 심하게 던졌다. 3번 와장창 던졌다. 이렇게 던지나 저렇게 던지나 언약궤 깨지는 것은 또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그 모든 말씀을 뭐로 만들려고 합니까? 나의 양적 에너지 개념으로 측량 가능한 개념으로 그것을 해석을 해 버린다니까요.

해석을 해서 육으로 안 되는 것을 혼으로 메꾸고 혼으로 안 되는 것을 영으로 메꿔서 어쨌든 간에 자아는 남은 죽어도 나는 천당 가는 게 합당합니다. 자기 천당 가는 게 합당하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자기 의를 찌꺼기라도 남아 있는 것을 원해요. 찌꺼기라는 말이 나와서 tv에 cf가 생각이 났는데 재판하는 건데 어떤 검사가 고발을 했어요. 커피에 원두가 없다고 고발한 거예요. 원두커피에서 있다고 한 거예요. 그래서 재판에서 시험을 해 봤어요. 어떤 대목이 있었느냐 하면 우리는 원두커피에 이렇게 원두가루가 남아 있잖아요. 그 검사가 ‘어헉-’ 놀라는 이 대목…….

사람이 겸손의 게이지, 측량의 에너지양을 많이 찾는 것은 결국은 그 마지막 남은 그 자존심 있잖아요. 제발 모든 것은 넘어가도 내가 잘 살아보고 믿어보려고 애쓰는 그 자존심만은 원두커피 가루처럼 오호호 그 만큼 좀 봐줘 이 말입니다. 성전에서 두 사람이 기도를 했어요. 바리새인이 먼저 나서서 기도 했습니다. 제가 십일조 하고 금식하고 구제했습니다. 판정은 누가 할까요? 재판장은 누가 합니까? 예수님이 하지요. 한 쪽은 그렇게 기도 하고 한 쪽은 감히 고개를 못 들고 ‘주여 제가 죄인입니다.’ 이렇게 했습니다. 끝났습니다. 판정 들어갑니다. 누가 의인이고 누가 죄인입니까? 여러분은 아시죠. 자기 죄를 회개한 사람이 세리가 의인되고 천국가고 다른 쪽은 지옥가게 되어 있지요.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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