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강-에스겔7장 10-13(살아난 몽둥이)121212-이 근호목사
18강-에스겔7장 10-13(살아난 몽둥이)121212-이 근호목사
이름 : 오용익(IP:183.105.212.7)
18강-에스겔7장 10-13(살아난 몽둥이)121212-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7장 10절에서 13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58페이지입니다.
에스겔 7:10-13
“볼찌어다 그 날이로다 볼찌어다 임박하도다 정한 재앙이 이르렀으니 몽둥이가 꽃 피며 교만이 싹났도다 포학이 일어나서 죄악의 몽둥이가 되었은즉 그들도, 그 무리도, 그 재물도 하나도 남지 아니하고 그 중의 아름다운 것도 없어지리로다 때가 이르렀고 날이 가까왔으니 사는 자도 기뻐하지 말고 파는 자도 근심하지 말 것은 진노가 그 모든 무리에게 임함이로다 판 자가 살아 있다 할찌라도 다시 돌아가서 그 판 것을 얻지 못하리니 이는 묵시로 그 모든 무리를 가리켜 말하기를 하나도 돌아갈 자가 없겠고 악한 생활로 스스로 강하게 할 자도 없으리라 하였음이로다.”
사람들이 성경을 보기를 싫어하는 가장 큰 이유는 매사에 하나님이 개입한다고 성경은 이야기하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의 체험과 맞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아갈 때 눈에 사람들만 보이고 짹짹거리는 새, 가끔 나타나는 멧돼지 같은 것만 보이지요. 그래서 이 세상에 인간 외에는 말할 존재도 없고 인간 외에는 명령할 자도 없고 인간만 왕초고 나머지는 전부 다 인간이 자기 맘대로 다룰 수 있는 대상으로 세상이 구성돼 있다,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 하나님의 계시라는 이 성경을 펼치니까 오히려 인간이 명령을 받게 되어 있네요. 인간이 오히려 지시를 받게 되어 있고.
더 놀라운 사실은, 놀라울 것도 없습니다만 더 희한한 일은 우리가 좋든 싫든 간에 우리가 주님의 지시 따라 움직이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로봇이나 기계처럼. 그것이 뭔가 우리의 심사를 뒤틀리게 만들지요. 우리는 우리 맘대로 하고 있는데 성경은 말하기를 네가 하고 있는 그것은 내가 지시하고 허락해서 일어난 일이라고 그렇게 통보하니까 굉장히 우리에게는 이것이 어색하고 현실감이 뚝 떨어지는 이야기를 성경은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펼치기를 싫어해요. 성경을 펼치면 내가 주인공이 될 수 없어요. 내가 주인공이 될 수 없고 세상의 주인공은 하나님이 되어버리고 성경을 덮어버리면 내 인생 내가 만들어가고 내가 기대하고 고대하는 데로 될 것 같은 희망을 갖고, 삶의 용기나 재미 같은 것이 불끈불끈 솟아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나를 주인공에서 끄집어 당길 것 같으면 성경을 보고 나를 주인공으로 그냥 생각하고 살 것이면 성경을 덮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성경을 덮는 쪽이 태반이지요. 성경을 안 듣고 성경에 대해서 안보는 것이 굉장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면 “볼찌어다 그 날이로다 볼찌어다 임박하도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시간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알고 있고 우리가 만들어가는 가운데서 시간, 미래는 펼쳐진다고 우리가 알고 있는데 10절에 보면 “볼찌어다 그 날이로다 볼찌어다.” 마치 인간을 가지고 자기에게 다가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정한 날이 말뚝처럼 미리 앞서서 꽂혀 있고 우리는 그 미리 박혀 있는 말뚝 같은 마지막 때를 알지도 못한 채 그저 자기 코앞의 일에만 매진하다가 무엇에 턱 받혀서 보니 ‘그날 인가? 이 날이 심판 날이구나.’라고 비로소 정신이 화들짝 들면서 ‘이거 하나님께서 미리 시간을 이렇게 만들어놓은 것을 몰랐네.’ 하고 그 때가서 후회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사람의 시간 속에는 미래에 가서 후회한다는 이야기를 백날 해봐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이기에 현재 느끼는 체험 속에 미래가 가미될 수가 없습니다. 미래에 그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면 그 이야기를 듣고 인간은 상상만 하지요. 그러나 인간이 백날 상상해 봤자 그 상상한 환경은 지금 내가 만들어낸 상상이지 미래의 그 느낌하고는 일치되지 않습니다.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성경에서 아무리 하나님께서 이야기를 해도 우리는 못 알아듣는다 그 말입니다. 알아듣지를 못할뿐더러 하나님이 이야기해도 우리는 우리식대로 오기대로 내 고집대로 그냥 밀어붙이는 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이 말씀을 지켜서 대비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한테 있다는 것이 아니고 없다는 것을 언급하는 겁니다. 너는 네 식대로 살고 나는 내 계획대로 밀어붙여서 우리 한 번 만나자, 이 마주침, 이 마주침에서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본질이 드러나는 겁니다. 마주침이지요. 지진이라 하는 것은 지각의 두 판이 마주쳐서 화산도 터지고 지진이 나듯이 하나님이 일으킨 사건은 그냥 사건이 아니고 뭔가 부딪히는 거예요. 우주에서 날아온 유성과 지구가 부딪히면 난리 나잖아요.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이질적인 것이 와서 부딪히면 우리는 다 깨지는 겁니다.
가족 간에 재미있게 바다 구경한다고 보트 타고 나갔는데 상선 같은 큰 배가 와서 박아버리면 그것이 부딪힘이잖아요. 그 부딪힘으로 오랜 만에 바다로 휴가 나왔던 가족들은 다 죽지요. 거대한 배가 있는 줄도 모르고 우리는 열심히 ‘나’라는 배를 열심히 노 저어 가는 겁니다. 제가 오늘 낮에 수원에 있는 농산연구소에서 근무하는 연구사, 내년에 퇴직하는 분을 만났어요. 자기 전공이 뭐냐, 옥상 위에 텃밭 가꾸기가 3년 전부터 유행했답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백악관 정원에 텃밭 가꾸기 시작한 때부터 그것이 유행이 되어서 자기 집 옥상에서 텃밭을 가꾸도록 하는 그것이 자기 전공이라는 거예요.
퇴직하게 되면 그것을 보급하고 가르치고 실습하는데 참여하는 일로 바쁘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생각한 것이 문득 데살로니가 후서입니다. 데살로니가 후서 3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0절에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라는 말씀이 나와요.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자기 밥벌이는 자기가 알아서 하라는 말이거든요. 12절에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는 말은 남에게 짐 지우지 말고 네 입에 집어넣을 양식은 네가 일해서 벌어서 입에 집어넣으라, 그 말입니다. 자, 예를 듭니다.
이 성경 말씀을 우리가 지킨다고 해 봅시다. ‘그래. 남의 입까지는 몰라도 내 입에 들어가는 것은 남이 일해서 할 것이 아니라 내가 고생해서 내 입에 넣자. 내 한 몸은 챙기자.’라고 했을 때 이 말씀대로 열심히 번다면 그 다음부터는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를 생각해 봅시다. 그렇게 될 경우에 남들이 벌어줘서 입에 양식을 넣어준 경우 같으면 돈 버는 일은 자기가 안했으니까 자기는 성경연구하고 하나님 섬기고 찬양하고, 이런 것만 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갑자기 데살로니가 3장의 말씀을 지킨다고 아침에 자전거 타고 우유배달하고 공공근로 나가다 보면 성경공부고 뭐고 못한다 이 말이지요.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말씀 지키려고 자기 양식 버는데 집중하다가 하나님 섬기고 말씀 연구하는 그것이 다 깨지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주님께서 말씀 주신 것은 현재 나의 인생, 나의 세계관, 이것은 나의 인생이고 이것은 내가 그동안 가꾸어놓은 나만의 아름다운 인생이라는 그것을 깨뜨리기 위해서 말씀을 주신 겁니다. 이게 뭐냐, 말씀과 우리와의 마주침이에요. 침몰이고 이것은 배가 뒤집어지는 겁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내용이 “볼찌어다 그 날이로다 볼찌어다 임박하도다” 해 놓고 몽둥이가 나와요. “몽둥이가 꽃 피며 교만이 싹났도다 포학이 일어나서 죄악의 몽둥이가 되었은즉.” 이런 말이 나오지요.
이런 말을 누구한테 하느냐, 바로 그 당시 유대나라 사람들보고 하는 거예요. 유대나라 사람들이 자기 딴에는 자기세계가 있어요. 아주 아름다운 세계, 하나님 섬기는 세계가 있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주변의 나라들로부터 조롱거리가 되도록 그렇게 조치를 하시는 겁니다. 이런 하나님이에요. 자기 백성을 모든 사람들에게 조롱받을만한 민족이 되도록, 조롱하도록 그렇게 조치를 하시는 하나님이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백성 가운데 한 사람 들어 있다면 “어이, 너희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야?” 이렇게 물어보면 “우리 하나님?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 안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조롱을 듣고 무시를 당하고 멸시를 당하도록 조치를 하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믿고 있어요.”라는 답변이 나와야 돼요.
참 이상한 하나님이지요? 사람들보고 자기가 믿고 싶은 하나님을 선택하라면 자기 자존심을 높여주는 하나님을 반드시 선택하게 되어 있습니다. 남한테 꿀리지 않고 든든한 하나님, 누구 앞에 나서도 모자람이 없는 하나님, 소위 잘사는 집안 애들, 유력한 집안 애들, 뭔가 가정이 유복한 애들의 특징이 있어요. 자신감이 있습니다. 한 8억짜리 페라리 타고 다니고 놀로 갈 때도 스키장에서 스키타고 놀고 보트 타고 놀러가는 애들은 어느 장소에를 가든지 간에 그 애들은 얼굴이 자신감으로 꽃 피었어요. 오늘 본문 그대로입니다. “몽둥이가 꽃 피며 교만이 싹났도다 포학이 일어나서 죄악의 몽둥이가 되었은즉.” 오늘 설교 제목이 “살아난 몽둥이”라고 해서 제목이 아주 이상한데, 몽둥이가 살아났다는 거예요.
그 자신감은 살아오면서 가정환경이 그렇고 친구들도 다 고급차 타는 친구들, 집 백 평짜리는 기본이고, 이런 애들의 옷차림이나 모든 행동, 심지어 경찰서 가서도 큰 소리를 치고, “우리 아버지가 누군지 아십니까?” 할 정도로 어디를 가도 꿀리지 않는 거예요. 자신감이 넘치지요. 그게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고대하고 기대하고 있는, 우리가 소망하고 있는 것을 앞서서 보여주고 있는 인물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자들을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만들어서 유포를 시킨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자들을 택하사 소위 하나님 좀 믿고 자신감 좀 얻으려 하는 우리를 음매 기죽어, 그야말로 완전히 거지꼴로 만들어서 하나님, 예수님 외에는 달리 내세울 것이 없게 그렇게 조지는 것이 우리 하나님입니다. 예수님 말고 다른 것 아무것도 내세우지 못하게 만들어버려요.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참 오늘 설교 희망적이지요?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유명한 말씀이 나오지요. 26절에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미련한 것을 택하사 지혜롭게 하는 것이 아니고 미련한 자는 계속 미련해요. 미련하면서도 소위 지혜 쪽에 서고 싶은 사람을 부끄럽게 만드는 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조치를 하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전에 먼저 우리의 배는 파산되어야 되고 침몰돼야 되는 겁니다. 우리의 배가 수상해요. 우리의 배가 우리를 치려는 교만 이상의 교만을 우리는 은근히 기대하고 있습니다. 나도 교만 좀 해 봤으면 좋겠다, 남 앞에서 자랑할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 라는 노림수를 가지고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가능성이 많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시고 인도하시고 이끄시는 방식은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는 방법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누가복음 16장에서 부자를 누가 폐하십니까? 부자를 누가 부끄럽게 만듭니까? 그것은 바로 그렇게 멸시하고 조롱했던 거지가 그 부자를 부끄럽게 만들잖아요. 전에 부자가 거지하고 같이 마주보면서 살았어요. 그러나 부자가 지옥에 갔을 때 그렇게도 쉽게 봤고 눈만 뜨면 보았던 그 거지가, 자기가 갔던 그 지옥에는 그 거지가 안 보인다니까요 그 거지가. 거지가 안 보이니까 부자가 하는 말이 “거지가 어디 있지?” 하고 보니 천국 가 있거든요. 거지 보고 나에게 물 갖다 달라 하는 거예요. 물만 없을 뿐만 아니고 거지도 없는 거예요. 거지가 있으매 자기는 부자로 살았던 겁니다.
그런데 그 거지가, 나를 부자 되게 하고 나의 자긍심을 키워준 그 거지가, 세상에 나와 비교 대상이 되는 그 거지가 자기 곁에 없습니다. 그럼 나는 뭐였습니까? 그럼 나는 진정 부자였던 것입니까? 거지가 있음에 나는 부자였는데 거지가 없는데 어떻게 자기가 부자가 됩니까? 그 부자는 살아 있을 때 파선한 것이 아니고 죽어서 완전히 파선되었어요. 그래서 진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몰라요. 하나님을 모르기에 자기 백성에게만 하나님을 알려주려고 먼저 자기백성을 만방에 조롱거리로 만들어서 이것은 내 인생이다, 이것은 내 것이다, 하는 것이 완전히 부서지고 깨지게 만드는 조치를 주께서는 실시하시는 겁니다. 그렇게 일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깨졌다 칩시다. 깨졌다는 것이 어떤 상태로 되었을 때 ‘아하, 깨졌구나.’ 확인할 수 있고 장담할 수 있는가? 그게 12절에 나옵니다. “때가 이르렀고 날이 가까왔으니 사는 자도 기뻐하지 말고 파는 자도 근심하지 말 것은 진노가 그 모든 무리에게 임함이로다.” 사는 자도 기뻐하지 말고 파는 자도 근심하지 말라, 여기에 기쁨이라는 말이 나오지요. 오늘 마주친다는 말을 여러 번 하는데 그 기쁨이라는 말과 마주치는 것은 근심이라는 말이지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의 것을 미리 마주침으로써 배가 침몰하듯이 나의 것이 와장창 부서지게 만듭니다.
부서지게 만드는데 어떻게 만드느냐 하면, 여기에 기쁨과 근심을 대비시키도록 조치를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에 갔습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니까 거기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고 그 옥토는 많은 열매가 맺히는 옥토였습니다. 자, 가을에 풍성한 수확을 했습니다. 이것이 어찌 기쁘지 아니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기쁨이죠. 그 다음에 하나님께 절로 찬양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홍해와 요단강을 건너왔을 때 그들은 애굽 군대가 뒤 따라왔을 때 우연인지 필연인지 도무지 감 잡을 수 없었지만 우리가 건너올 때는 물이 그대로 있다가 애굽 군사가 따라올 때는 물이 다시 하나로 흘러서 나중에 해변 가에 보니 애굽의 군사들의 시체와 그들의 군장들이 즐비하게 널려 있더라는 말이지요.
이것은 전쟁의 승리입니다. 아말렉하고서도 승리했고 블레셋 하고도 승리했고. 그러니까 약속의 땅을 둘러싸고 그들이 얻을 수 있는 기쁨이란 뭐냐, 그 땅 자체에서 이른 비 늦은 비로 인하여 큰 수확을 얻는, 뭔가 많이 획득해서 소유하는 그 기쁨, 그리고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의 그 기쁨은 이루 말로 다 못합니다. 전에 홍명보 올림픽 대표 팀이 동메달 땄잖아요. 일본도 이겼지요. 그때 온 국민이 다 기뻐했습니다. 약간의 문제는 있었어요. 선수 중에 하나가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퍼포먼스를 한 것이 문제가 되었어요. 어쨌든 인생을 살면서 늘 승리한다는 이것은 우리에게 그동안 모든 근심걱정을 일거에 다 털어버리는 큰 기쁨을 줍니다.
사람이 도박에 빠지는 것은 그 마지막 승자가 되기 위한 희망이 있기 때문에 도박에서 손을 못 떼잖아요. 도박하는 사람만 도박이 아니고 어쩌면 우리 모든 인생이 도박 같아요. 그래서 이런 노래가 있지 않습니까? “인생은 한 방이다.” 인생은 한 방이에요, 한 방. 한 방만 터져 버리면 인생 역전, 다 바뀐다는 거예요. 지금도 대선 주자들이 한 방을 노리고 있습니다. 9회 말 마지막에 홈런 한방 치려고 하고 있어요. 그저 한 방만 터져라. 로또 복권을 왜 삽니까? 승자가 되는 그 기쁨을 얻기 위해서. 그래서 그동안 유대인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수확과 승리라는 두 종류의 기쁨을 마음껏 누렸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뻤을 때, 인간에게 그 기쁨과 승리가 주어졌을 때 그것으로 자기 자신의 배를 다시 건조해요. 이게 내 인생이다, 나는 늘 축복받고 늘 기뻐해야 마땅하고 나는 늘 승리해야 마땅한 존재가 바로 나라는 인간이다, 라고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시고 그것을 주변에 있는 바벨론이라는 몽둥이, 죄악의 미친 몽둥이를 가지고 그동안 하나님이 줬던 그 승리의 기쁨과 수확의 기쁨을 모조리 다 부숴 버립니다. 왜 그런가 하면, 사람들이 하나님의 축복과 행복을 얻게 되면 ‘이것은 내가 마땅히 가질 만해서 가졌다.’는 생각, 그 하나님의 축복을 가지고 소박하게 뭘 만드느냐, 이것은 내 인생이고 이것은 축복 받을 만하고 어떤 일이 있어도 축복 받아야 되는데 바로 이것이 내 인생이다, 라고 자기 인생을 아담하게 만들어내요.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고 누굴 믿는 사람이냐, 복 받았다 하는 자기 자신을 믿는 사람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자기만큼 가지지 못한 저주받은 사람을 비교해서 나는 복 받았다, 라고 우기는 사람, 바로 나사로라는 거지 앞에서 자신이 복 받았다고 우기는 부자하고 똑같은 인간 되어버려요. 거지는 부자 앞에서 항상 세상에서 기뻐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어요. 나사로라는 뜻이 오직 주님만 바라본다는 뜻인데 오직 거지가 기대하는 것은 뭐냐, 자기 인생을 재 규합하는 것이 자기 인생이 아니고 주의 나라 가는 것이 소망이에요. 그 하나님나라. 세리와 창기 이런 사람들이 오직 주의 나라만 사모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자기백성을 건지는 방법이 뭐냐고 저한테 물으신다면 이렇게 답변합니다. 오직 예수님만 눈에 보이게 만드는 방법으로 구원합니다. 오직 예수님만, 예수님 주신 것 말고, 예수님 주신 건강 말고, 예수님 주신 내 가족 내 새끼 말고, 예수님만 보이게 하는 거예요. 부산강의하면서 이야기를 죽 하는데 어떤 목사님이 전도를 했대요. 그런데 남편은 듣는데 여자는 아예 듣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복음에 영 관심이 없고 짜증만 내고 복음 전하는 목사가 오니까 싫은 티를 막 내길래 “도대체 아주머니가 신앙은 뭡니까?” 하고 물어보니까 “제가 셋째 애 낳을 때 기도해서 안 아프고 순풍순풍 잘 낳았”다고 한 거예요.
“나는 그런 하나님, 자비로운 하나님, 축복의 하나님, 기적의 하나님을 믿는데 왜 목사님은 십자가 이야기를 합니까? 실제로 이렇게 기쁨을 받은 것이 있는데 왜 당신은 십자가 이야기를 하는 겁니까?” 그 말이지요. 이것을 오늘 말씀에 응용시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땅에,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에 수확을 줬고 그 다음에 전쟁에 승리케 하는 그 축복이 있다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증거인데 뭘 더 원하냐, 그 말이지요. 그 여자 분이 부산 수영로교회 다닌다고 해요. 수영로 교회에서 수영이나 많이 하라고 하세요. 하나님께서 구원하는 방식은요, 그 기쁨이라는 것이 주님의 근심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주님과 같은 근심에 참여시키는 방식 아니면 구원의 길로 접어든 사람이 아닙니다.
제가 아까 기도할 때 했잖아요. 어떤 행복도 공짜가 없다고요. 어떤 은혜도 공짜가 없어요. 은혜는 공짜로 주지만 공짜로 주기 위해서 은혜를 만드는 분의 아픔과 희생과 고통에 참여한 자 되지 않으면 그냥 지옥으로 가는 사람이에요. 그냥 넓은 길로 가는 사람이고 영생이 안 보이는 길이에요. 다시 한 번 제가 분명히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는 방식은 뭐냐, 예수님만 보이도록 이끄심을 받을 때 구원받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만 보이도록 이끌림을 받을 때만 구원받는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은 애 셋 낳을 때까지 자기애만 전부에요. 예수님보다 자기애가 더 중요해요. 모든 인간이 그래요. 자기 백성도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 기쁨을 슬픔으로 바꿔주는 겁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물건 사는 자가 기뻐하지 말고 파는 자도 근심하지 말라, 고 하죠. 모든 것은 묵시로 돌아간다. 13절에 “판 자가 살아 있다 할찌라도 다시 돌아가서 그 판 것을 얻지 못하리니 이는 묵시로 그 모든 무리를 가리켜 말하기를 하나도 돌아갈 자가 없겠고 악한 생활로 스스로 강하게 할 자도 없으리라 하였음이로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이라는 아주 큰 나라를 동원해서 죄악의 몽둥이로서 모든 아름다운 것, 재물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때려 부숩니다.
그런데 그것들은 전에 하나님께서 축복 주신 것으로 그렇게 알고들 있었던 겁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의 이러한 구원의 방식은 자기백성을 이렇게 다루었는데 에스겔 이후에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했는가? 마태복음 21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와요. 무화과나무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의 과일을 따려고 보니까 아직 수확 때가 아니라 나무에 열매가 없었어요. 과수원이 있는데 아직 철이 아니라 사과가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과 잡수려고 하다가 “어, 이 나무에 사과가 없네.” 제자들이 “아직 제 철이 아닙니다.” “제철이고 뭐가 내가 먹고 싶은데 열매가 없으니까 나는 이 나무를 저주한다.”
이게 너무 어처구니없는 주님의 횡포같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이런 모든 말씀은 평소에 내 것을 따로 챙기고 내 것을 더욱 더 크게 확장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을 어떤 식으로 잘 섬기고 어떤 말씀을 잘 지킬까, 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 그 무화과나무 이야기는 전혀 이해가 안 됩니다. 무화가 나무가 과실이 주렁주렁 있는데 주님께서 “과실을 한 번 따먹어 볼까?” 하는데 무화과나무가 화를 퍽 내면서 “왜 돈도 안 내고 따 먹어요?” 이렇게 나온다면 “에이, 저주 받아라.” 이렇게 한다면 앞뒤가 맞잖아요.
쉽게 말해서 나쁜 짓을 하고 저주를 한다면 이게 맞는데 하나님의 방법은 나쁜 짓을 해서 저주하는 것이 아니고 저주 받기 위해서 그 무화과나무가 심겨져 있다는 것을 너희들이 아느냐, 그 말입니다. 이것 알면 성경 말씀 다 안 거지요. 모든 성경을, 모든 진리를 다 안 셈이 되지요.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거예요. 노래 가사도 그런 것이 있지요. 어떤 사람은 저주받기 위해서 태어난 겁니다. 문장은 굉장히 간단한 문장이지만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났고 저쪽은 저주받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그 문장대로 하려면 ‘이것은 내 것입니다.’라는 이 기본적인 일상적인 체험이 파선하고 박살이 나야 비로소 그 고백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주여 나의 나 된 것은 내가 아니고 주께서 뜻이 있어서 만들었지 이것은 내 것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라는 모든 일상의 체험가운데서 그것을 느껴야 돼요. 집안에서 일어나는 이 모든 일들이. 이것은 내가 죄 지어서 벌 받는구나, 이것이 아니고 이런 일이 일어나더라도 이것은 나에게 당연한 것이라고 받을 정도로 우리는 우리 전부가 주님에 의해서 다루어져야 돼요. 내가 주님을 다루는 것이 아니고 다루어지는 것은 이미 자기 배, 자기 배랄 것도 없고 배가 이미 깨졌어요, 그러니 남하고 비교하지 말라 그 말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는 남하고 비교할 이유가 없어요. 세상만사가 우리 뜻대로 안됩니다. 여기서 마지막 어려운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세상만사가 우리 뜻대로 안 되는 이유는 우리가 가만있는 존재가 아니고 나름대로 심판을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심판을 심판하십니다. 요한복음 16장 8절에 나오지요.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심판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한다는 말은 심판 그 자체에 대해서 심판해버린다는 거지요. “네 심판은 너 좋으라고 하는, 네 자존심을 위한 심판이다. 너는 너 밖에 몰라. 아무리 나이 많아도 너밖에 몰라. 그것을 내가 심판해 줄 때 고마운 줄 알아라.” 그 말입니다.
내가 평소에 나는 착한일 했으니까 복 받을 거야, 나는 나쁜 짓을 했으니 벌 받을 거야, 라는 내가 내린 이 심판규정을 주께서 찾아와서 심판해 줄 때 우리는 “고맙습니다!” 해야 돼요. 내가 나쁜 짓을 해서 벌 받는 것이 아니고 착한 일을 해서 복 받고 천당 가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서, 천국 가기 위해서, 예수님만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의 기준만 바라보라고 우리를 이런 사태 속에 몰아세우는 겁니다. 그러니 이렇게 생각하세요. 세상만사가 우리 뜻대로 안됩니다. 그런데 그 우리 뜻대로 안 되는 그것이 이제는 우리 뜻이라고 다시 가져옵시다.
세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왜냐, 우리가 세상이 변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세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변합니다. 왜, 우리가 세상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세상은 변해요. 그러니까 항상 주님께서는 우리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을 뻔히 아시기 때문에 십자가 우리 대신 지시고 그 대신 진 값을 우리에게 그냥 대입을 시켜버려요. 그러니까 너 대신 나에요. 매사에 “그렇게 생각하니까 너 대신 나, 복과 저주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니까 너 대신 나, 내가 죽음으로써 그 죽음을 너희 속에 담아내기 위해서 너란 인생은 하나의 거지 나사로 꼴로 이 땅에 살게 되어 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축복하시면서 세상 만방이 조롱하게 만들도록 유도하십니다. 왜, 세상은 교만하기에. 그러데 우리는 그 교만한 세상이 그렇게 부러운 거예요. 우리는 세상을 닮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오히려 그들에게 조롱받음으로써 오직 예수님만 바라볼 수 있도록 지금도 이끄시고 계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일하심을 우리가 매일같이 느껴야 되는데 우리는 내 소망이 있다 보니 주께서 아무도움도 안주는 것처럼, 안 계신 것처럼, 하나님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느끼면서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매일같이 우리의 것을 부수는데 안 부서지려고 하는 우리의 저항, 이제는 십자가 바라보면서 이미 부서진 것을 축복으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18강-에스겔7장 10-13(살아난 몽둥이)121212-이 근호목사.hwp (64.0K), Down: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