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207b 울산강의-출애굽기 25장 : 성전과 타락
20121207b 울산강의-출애굽기 25장 : 성전과 타락
이름 : 한윤범(IP:14.39.134.60)
20121207b 울산강의-출애굽기 25장 : 성전과 타락
(강의:이근호) 목사
성전에 있는 기구와 장치가 그냥 그 자리에 멈추어져 있다면 아무 효과 없겠죠. 말씀이라 하는 것은 그냥 문자로 있으면 효과 없습니다. “말씀이 살아 운동력이 있어.” 이렇게 돼야 되거든요. 말씀이 살아서 운동력이 있는데 우리 보고 말씀대로 살아라, 살아라. 한다고 되는 게 아니거든요. 공장에서 품질 관리할 때 “결점 제로! 오늘도 정신 차려! 오늘도 고장률 제로!” 이렇게 스스로 다짐을 하는, 자기 최면을 거는 그런 것은 종교적인 의식일수도 있고 억지를 부리는 거죠. 내가 믿어지도록 성경이 역사하라고 윽박지르면 성경이 믿어지는 게 아니잖아요. 그렇지요. 우리는 절대로 위장하지 말고 오버하지 않으면 돼요. 우리 식대로 하면 돼요.
우리 식이 뭐죠? 절대로 이 말씀을 나는 믿기 싫다. 아이들 밥 먹기 싫어할 때 숟가락 들고 쫓아다니면서 밥 먹이듯이 우리는 이 말씀은 먹기 싫다. 그 대신 돈 주면 끝까지 가서 돈이 더 좋잖아요. 그건 우리 본심이니까 그대로 하셔야 돼요.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리는 그 몫은 우리의 가능성의 몫이 아니고 불가능성만 다루시는 하나님의 몫으로 항상 남겨둬야 돼요.
그러면 하나님 쪽에서 어떤 식으로 하느냐? 이렇게 해요. 경계선을 긋습니다. 이게 두부입니다. 칼로 두부를 자릅니다. 아들이 세 명이라고 할 때 엄마가, “오늘 아침은 두부요리다. 두부 먹자.” 하고 칼로 두부를 둘로 잘랐어요. 아이들 셋이 그걸 보고 어떤 느낌이 들겠습니까? 한 놈은 자식 아닌가 보다. 대번 느낌이 들겠지요. 분명히 아이는 셋인데 세 토막 내지 않고 두 토막 냈으니까 오늘도 한 놈은 못 먹어. 경계선을 그을 때 이미 긋는 자체가 하나님께 이미 작업을 시작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경계선을 그을 때 반드시 경계선 한쪽은 핍박을 하게 되고 한쪽은 하나님께서 무한정, 무작정 사랑을 베풀게 돼있어요.
원래 선악과라 하는 것이 선악과 자체는 아담이 먹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선악과는 먹지 말라는 자체가 사랑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사랑을 모르고 자기 생각만 하니까 저걸 따먹고 신이 되고자 한 거예요. 그러면 선악과 사랑이 우리 인간 속에 들어가면 사랑이 되지 못하고 그걸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음이 되죠. 사랑이라는 것이 창세기 2장, 3장에는 안 나옵니다. 창세기 2장, 3장에 나오는 게 죽음 나오고 그 다음에 네가 뱀처럼 저주받아라가 나오는 거예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갖고 있던 인간이 들어오기 전에 선악과에 심어놓은 본래 취지는 인간에 들어왔을 때 그 경계선과 꼭 반대가 되는 거예요. 그 선악과를 그냥 놔두면 에덴동산이 되는 겁니다. 모든 게 축복이고. 에덴이란 뜻이 뭐냐? 온갖 희락, 즐거움이에요. 행복한 세계가 되는데 이 선악과를 내 것으로 삼는 순간 그냥 선악을 아는 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죽음이 왔지요. 또 뒤에 저주가 왔고 에덴동산에서 살 수 없고 거기서 추방당하지요. 그리고 땅은 저주를 받아서 나올 필요도 없는 가시와 엉겅퀴가 나오고, 남자 이마에는 땀이 나고 죽게 되고.
이것은 원래 그 자리에 그대로 놔두면 되는데 그게 주님의 사랑인데 그걸 인간이 뱀의 유혹 받아 내 것 만들 때 그것과 정반대되는 현상이 일어났잖아요. 바로 그 경계선을 성전에 담아버리는 겁니다.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인간 것이 되지 않게 하는 경계선을 그어왔다는 거죠. 인간이 경계선을 넘어서서 그것을 자기 소유로 가져와버리면 그 사랑의 선악과가 이쪽에 인간 쪽에서는 저주를 주고 죽게 하는 선악과가 되는 겁니다.
따라서 성전의 모든 기구는 경계선 긋기를 해요. 차별화인데. 예를 들어서 성막, 제가 주일학교 아이들 위해서 오리고 풀로 붙여서 성막모형을 만들었어요. 하나씩 떼어내면서 이 안에는 이것 들었고, 이것 안에 이것 들었고. 뜰에는 제단이 있고, 염소 세워놓고. 제사장 있고. 성전 뜰에서부터 나오면서 이미 이쪽에는 경계선이 되는 겁니다. 이쪽에 있는 인간들은 이쪽으로 들어올 수가 없는 겁니다. 경계선 쳐버려요.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는 일에 우리가 일체 개입하지 못하고 우리는 두 손, 두 발 다 놓고 지켜보기만 할 뿐인 것을 분명히 아셔야 돼요. 여기 경계선 긋기에서 나오는 결과에 의해서 그들은 혜택을 받느냐, 아니면 혜택을 못 받느냐는 어디까지나 안에서 일어나는 일로 인하여 결과가 주어지는 겁니다. 모든 칼자루가 하나님 손에 이미 넘어가버렸어요. 구원의 권한과 능력 그런 것이 우리 쪽에서는 손쓸 수가 없어요.
경계선 긋기를 할 때마다 거룩이 생깁니다. 거룩과 더러움이 생기죠. 그래서 말을 어렵게 할 필요 없어요. 경계선을 그어놓고 일방적으로 이쪽은 거룩하고, 이쪽은 거룩하지 않도록 만들어버립니다. 이 경계선 긋기에 인간이 나서면 인간은 어떻게 긋느냐 하면, 누구든지 나에게 “당신은 참 훌륭하오.” 하면 경계선 그어서 자기편으로 삼고, 나를 욕하면 그 사람은 내 경계선 그어놓고 저주받는 쪽으로 분류를 해버려요.
만약에 우리에게 천국 갈 사람을 모집하라 하면, 우리는 어떤 사람을 모집하겠습니까? 대선투표가 따로 없지요. 전라도 쪽은 전부다 투표해서 박근혜 찍었으면 지옥 보내고, 문재인 찍은 것은 천국 보내고. 또는 경상도 같으면 문재인 찍은 것은 전부다 지옥 보내고 할 거예요.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이 목사, 당신은 일방적으로 단언한다고 하는데 제가 심한 말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주의 말씀 이야기하다가 그런데 집사님은 이번에 누굴 찍을 건데요? 이렇게 나오면 그때부터 문제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항상 친구 사이나 아는 사이에서는 절대로 두 가지는 이야기하지 말라고 해요. 정치이야기와 종교이야기. 최종적인 가치가 인생관이 거기서 드러나고 판가름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심지어 부모자식 간에도 표 잘못 찍어서 원수지간 되는 경우가 있어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경계선을 그을 때 우리가 수용할 만한 경계선이 아닌 겁니다. 성전도 마찬가지고 모든 것이. 그러면 경계선의 기준이 뭐냐? 기준은 장차 우리 대신 어떤 분이 와요. 누가 오느냐? 예수님이 오십니다.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긋는 경계선을 미리 앞당겨서 성전에서 경계선을 만들어버려요. 예수님께서 하실 일을 담는 쪽은 거룩한 쪽이고, 예수님이 하는 것을 이해 못하는 쪽은 핍박해야 될 더러운 쪽에 속한 겁니다.
이야기가 왜 이렇게 복잡하게 됐는지 이유가 있어요. 인간 속에 뭐가 있습니까? 선과 악을 알잖아요. 인간 속에 선과 악의 경계선이 그어져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인간 자체가 악이고 하나님만이 선이 되는 겁니다. 이미 선과 악을 나눠놨는데 악 속에서 지가 또 선과 악을 나눈 거예요. 조직폭력배들이 저희들끼리 싸우면서 “의리를 지켜라. 이 악마 같은 놈아.” 누가 누구에게 악마라고 합니까. 다 똑같은 조폭들이면서 또 그 안에서도 러시아 인형처럼 안에 끄집어내면 또 있고, 끄집어내면 또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만큼 범위가 넓혀갈수록 범위를 쪼개면 선과 악이 나눠져 있어요. 경계선이 있어요. 경계선은 한쪽은 사랑하고 한쪽은 미워하고 핍박하고.
국가대표가 일본과 축구할 때 일본은 악이 되고 우리 국가대표는 선이 되잖아요. 그런데 국가대표끼리 훈련하면서 “너, 왜 내 라커룸을 함부로 열어 보노?” 저희들끼리 내부적으로 싸우는 거예요. 싸우는 인간끼리 또 싸우고. 자꾸 파고 들어가면 내부적 문제들이 또 생겨요. 서로 좋아서 죽고 못 살아서 결혼해놓고 나중에는 “너는 라면도 못 끓이노? 라면에 어떻게 설탕을 넣고 소금을 집어넣나? 젓갈을 집어넣으며 이게 라면이야?” 라면 못 끓인다고 시비 걸어서 거기서 또 갈라지고.
그러니까 결혼식 했다고 끝나는 게 아니고 본격적으로 세분화해서 들어가는 겁니다. “다른 건 다 좋은데 이래서 네가 문제고 이래서 네가 싫은 거야.”라는 말을 곧이듣지 마세요. 그것 충족하면 다른 것 또 끄집어내요. 인간은 자기와 똑같지 아니하면 다 미워요. 왜? 인간은 최종적으로 누굴 사랑하게 돼있어요? 자기만 사랑하기 때문에. 어떤 인간이 자기와 똑같으면 그것도 싫어요. 어떤 사람이 나와 똑같은 옷을 입으면 괜히 싫어. 그 다음부터는 그 옷 안 입습니다.
인간이란 것은 주께서 계속 쪼개는데 주의 말씀이 성전 만들라. 그것으로 모자라. 이것 해라. 그것으로 안 돼. 계속 쪼개고 쪼개서 남는 건 뭐냐? 너는 너만 사랑하고 너밖에 몰라. 그 마지막 알갱이만 끄집어낼 때까지 계속 쪼개고 쪼개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아담과 비교하는 거예요. 예수님이라는 마지막 아담과 진짜 아담에 속하는 모든 인간과 대척관계, 경계선 그어서 모든 인간은 죄인이고 오직 예수님만이 의인이고. 이렇게 쪼개는 겁니다. 그 쪼개는 안목이 선과 악에서는 나올 수가 없어요. 왜냐? 선과 악을 따먹은 인간이 오직 따먹었다는 자신은 무조건 선하다고 간주하기 때문에 이런 차원에서는 윗선에 있는 선은 알 수가 없어요.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내가 선과 악을 안다는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일인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한테 뭐라고 했습니까? “선한 선생이여,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겠습니까?” 할 때 예수님이 부자 청년한테 “네가 선을 알기는 뭘 알아? 네가 왜 선을 이야기하느냐? 네가 선을 이야기하는 자체가 문제가 되는 거야. 과연 선을 이야기해볼까? 모든 걸 팔고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그 다음에 나를 따르라.” 이게 안 된다니까. 모든 걸 다 팔 수는 있어요. 구제할 수는 있는데 누굴 못 따라가요? 평생 자기가 자기 말만 듣고 살아왔는데 예수님 말을 왜 따라갑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거든요.
그래서 성전의 구조는 모든 걸 쪼개 보면 거기에 안수한 우리의 죄를, 우리가 죄도 몰라. 무조건 하나님 시키는 대로 할 뿐이야. 양에다 죄를 안수하니까 죄가 묻어 있는 양을 죽여서 양의 피를 제일 안에 커튼 쳐진 방에 피를 갖고 간단 말이죠. 결국은 양이 들어올 때는 양 앞에 죄가 있고 죄가 하나님의 조치에 의해서 뭐로 변합니까? 죄를 추적해보면, 죄가 있었다. 죄는 양에게 전환되고 양은 죽었다. 양은 피를 흘렸다. 피 안에 죄가 묻어 있다. 피를 따라서 죄가 이동하는 겁니다. 마지막에 하나님은 여기에 계셔요. 하나님이 인간의 죄와 만나는 겁니다. 결국 인간 자체가 죄가 되는 거예요. 경계선을 긋는 자체가 너는 무조건 죄고, 너를 죄라고 인정하는 나는 무조건 의로운 것이고. 이런 경계선 긋기. 그 경계선을 그음으로써 하나님의 거룩 됨이 우리의 죄인 됨에 대비해서 비로소 우리에게 밝혀지는 겁니다. 이 땅에서. 그냥 인간끼리 놔두면 인간들이 생각하는 선과 악, 악과 선, 온 천지가 이 바닥이 돼요.
내가 지난주일 낮에도 그런 이야기했지만 창세기 4장에 라멕이란 사람이 뭐라 했습니까? 가인에 상처 입히면 칠 배지만, 나를 상처 입히면 칠십칠 배죠. 벌을 내리죠. 네가 뭔데 남한테 벌을 내립니까? 내가 남한테 벌 줄만한 그런 자격이 됩니까? 야고보서는 이런 이야기합니다. “네가 벌을 줘? 그렇다면 너부터 벌 받아 볼래?” 이렇게 나와요. 누구든지 율법으로 남을 심판하고 남을 평가하고 남을 정죄하는 인간은 그 인간부터 율법에 의해서 정죄를 받게 돼있다고요.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자기의 선과 악의 경계선을 긋기 위해서 현장에서 간통하다 잡힌 여인은 악한 여자고, 나는 간통은 안 했으니까 선한 바리새인이고. 그래서 선한 인간이 악을 행한 인간에게 돌을 칠 수 있다는 자격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었다고 해석한 거예요. 이게 무슨 차이냐 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네가 선악과 따먹은 것 분명히 맞다.” 그걸 표내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말씀을 줬는데 사람들은 자기가 마치 남을 벌 줄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처럼 이쪽 차원의 말씀을 자기 쪽 낮은 차원으로 끌어당겨서 성경 말씀을 자기 선이라고 율법을 집어넣어버린 거예요. 내가 선과 악 중에서 선인데 여기다 율법을 가미시켜버린 겁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합니까? 예수님 말씀이 재미있어요. 너희들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돌을 치라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쪽을 봐. 하나님 보기에 죄 없는 자가 있거든 돌로 치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같으면, “나는 죄 지은 게 없습니다.” 이렇게 나올 만 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땅에 글을 썼지요. 그 글은 인간들이 평소에 알던 글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이 평소에 자기 잘난 척하면서 쓴 글이 아니었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뭘 하면 항상 잘난 척하는데 주님이 쓰신 글을 보면서 전부다 돌멩이를 놔버렸다.
여기서 무서운 진리가 있습니다. 나 같으면 돌멩이 놓고 가지 말고, “주여, 내가 죄인입니다.” 이럴 만도 한데 돌멩이 놓고 저희들 집으로 가더란 말이죠. 이게 경계선 긋기에요. 모든 인간은 하나님한테 지적받으면 주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피해서 도망치게 돼있어요. 누구도 도망치고 싶겠어요? 간음한 여인도 거기에 있는 거예요. 얼마나 부끄러워서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그걸 지적한 겁니다. “너를 고소한 자가 있느냐?”라고 일부러 물어요. 그러니까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없나이다.”
그러니까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했는데 죄 없는 자가 있기, 없기? 죄 없는 자가 없잖아요. 그러면 그 현장에 그렇게 물으시는 예수님만 있지요. 그 여인은 가지를 못하죠. 예수님이 그 여자에게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네 죄를 정죄하지 아니한다.” 죄 사하잖아요. 그러면 이 여자한테는 죄가 있다, 없다 자체가 날아가 버렸어요. 왜냐하면 여자가 간통했다, 안 했다는 자체가 …… 왜냐하면 여자가 간통을 안 하게 되면 그 여자는 구원을 못 받아요.
간통을 하게하고 그것도 몰래하면 안 돼요. 현장에서 잡혀야 돼요. 잡혀야 이 간통한 죄가 하나님 보시는 그 죄에 해당된다, 안 된다? 하나님의 경계선 긋기에 해당이 안 돼요. 그러면 무엇이 죄냐 하면, 주님 말씀에 도망친 인간들 있잖아요. 용서받지 못하고 간 사람들 전부다 죄가 되고 주님이 용서한 자체가 하나님의 선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더 쉽게 이렇습니다. 간통한 적도, 바람 핀 적도 없는데 내가 네 죄를 용서하겠다. 그 말을 저 간통한 적도 없는데. 이러면 안 되죠. 왜? 아직도 자기의 선과 악을 유지하고 있으니까. 미련을 갖고 있으니까. “네 모든 죄를 사하노라.” 하면, “감사합니다.” 이러면 그 사람은 낮은 수준, 인간들 수준의 선과 악을 완전히 하나님에 의해서 째는 거예요. 아래쪽에서 노는 게 아니고 위쪽에서. 주의 말씀 자체가 선입니다. 주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나는 용서받는 사람으로 거기에 개입되었고 거기에 끌려들어간 거예요.
더 극단적으로 말해서 오해하지 말고 들으세요. 간통하기 싫은데 주의 말씀에 이끌려서 간통했고, 간통했으면 들키기 싫은데 주의 말씀으로 그만 들키고 말았고, 그리고 바리새인들한테 끌려가기 싫은데 바리새인들이 나를 질질 개 끌듯이 끌고 왔고, 주님 만나기 싫은데 어쩌나보니 주님 앞에 와있었고,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할 때 도망갈 때 같이 도망가고 싶었는데 도망 갈 수도 없고, 너희들 중에 너 보고 죄 있다고 하는 자 있느냐 할 때 답변하기도 싫은데 답변해야 될 것 같아서 했고. 결국 이 모든 사실이 예수님이란 사건으로 인하여 사실화되면서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말씀 자체가 선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성전 만들기 또는 성막 만들기 자체가 선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선이 선 되기 위해서 양 잡아야 되고 죄 지어야 되고 십계명 어겨야 되고 거기에 동원된 모든 사람들이 선이 선 되게 하기 위해서 동원됐다는 자체가 그 관계가 선한 백성, 하나님의 친 백성, 언약의 백성이 되는 거예요. 이걸 믿어야 구원받습니다. 도무지 말씀의 구조 안에서는 내 것이라는 자체가 용납이 될 수가 없어. 내가 간통했습니다가 용납이 안 된다니까.
이 말 오해하면 엄청난 파장이 됩니다. 간통 해놓고 하나님 시켜서 했데. 무책임한 발언이 되고 이런 무책임을 즐기게 되면 앞으로 재미로 계속 주께서 허락했는데 알아서 하지 뭐. 이렇게 되면 가룟 유다가 하늘나라 가고 이런 수도 생긴단 말이죠. 인간 역사 속의 논리로 따지게 되면. 그러나 그걸 문제 삼는 생각 자체가 여전히 주님의 불가능성을 나의 가능성으로 뭔가 붙잡아보겠다는 거예요. 국자가 말씀이 되어서 금붕어를 담아야 되는데 금붕어가 국자 왔다고 지가 알아서 국자에 몸을 눕히면서 “이제 나를 올려주세요.” 이것과 똑같은 거란 말이죠.
신데렐라를 봅시다. 신데렐라가 왕자와 춤추는 건 좋아요. 열두 시 되면 마법이 풀리기 때문에 열두 시 되기 전에 빨리 튀어야 됩니다. 튀다보니까 너무 급해서 신발 한 짝을 잃어버렸지요. 제가 누가복음 15장에 양 한 마리 잃어버렸다 했지요. 동전 잃어버렸다 했지요. 아버지는 탕자를 잃어버렸지요. 뭔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할 때는 반드시 현재 내가 생각하는 그 생각에서 미처 채울 수 없는 아무리 해도 마저 채울 수 없는 내 능력으로는 도저히 다 마저 채울 수 없는 그 대목으로 우리를 찾아 들어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법이 걸린 사람들이죠. 성령이란 마법.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안 받으시고 때려죽여도 못한다는 그것이 우리를 거는 잡아당기는 고리 역할을 해요. 나중에 우리의 불가능성이 범위가 점점 더 넓어질 거예요. 이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할 정도입니다.
또 하나 성경에 나오는 예를 들겠어요. 마태복음에도 나오고 누가복음에도 나오는 건데요 예수님께서 전도를 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제자 되겠다고 왔어요. 저도 제자 되겠습니다. 같이 가자고 하니까 “아차 어제 우리 아버지 돌아가셨기 때문에 아버지 장례 치르고 제자 되겠습니다.”라고 할 때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는지 여러분 다 아시죠. 죽은 자로 하여금 장례 치르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할 때 그 순간 우리는 뭘 잊어버리느냐 하면, 우리가 살았다고 여기는 그것을 주께서는 가위로 잘라버려요.
잘라버리면 이 사람이 제자를 하면서 뭘 항상 느끼겠어요? 내가 제자 된 건 좋은데 아버지 장례식에 자식으로써 마지막 효도를 다하지 못한 불초소생이라고 느껴지겠지요. 그 불초소생이란 이 지점이 주께서 그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지점이 된다 이 말입니다. 항상 우리로 하여금 뭘 해도 어설프게 만들고 도저히 우리로 하여금 우리 능력, 우리 자질로서 구원이 안 되는 존재라는 것을 들추어내는 그런 과정을 주님께서는 말씀으로 그걸 덮치게 되는 거예요.
성전이 동쪽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동쪽은 무엇과 연결돼있느냐 하면, 에스겔에 보면, 동쪽은 이동하는 전차, 이것은 묵시 세계에 사면에 바퀴가 있고 여기에 사자, 곰, 인간, 독수리 얼굴하고 있는 사면에 천사에 둘러싸여 있는 어떤 인자. 이렇게 하늘나라에 움직이는 그것과 성전 동쪽과 연결돼있는데 성신이 나와서 이쪽으로 가요. 이쪽으로 가게 되면 바퀴는 세상 어디든 다 가요. 어디로 가느냐 하면, 바로 바벨론에 포로 잡혀 있는 자기 백성에게 이동합니다. 여기다가 에스겔에게 성신을 주게 됩니다.
성전 동쪽에서 나온 신이 이렇게 들어가서 이 성전 뭉개고 새로운 성전 지을 때 에스겔에 있던 신이 새 성전 동쪽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면 성신의 이동 경로가 지상에서 하늘로, 하늘에서 인자되는 에스겔로, 에스겔에서 다시 새 성전을 짓게 되잖아요. 에스겔의 이름이 인자지요. 이 구조가 뭐냐? 이 자체를 주께서 성취를 해버립니다. 성취하면 이 성신에서 신이 빠져나오는데 성신의 신은 지성소에 임재하게 되겠죠. 임재 한 성전을 빠져나오면서 이것은 불타버립니다.
그러니까 성전이라 하는 것은 인자 되시는 예수님과 그리고 성전을 누가 만들었어요? 인간들이 만들죠. 인간과 인자가 얼마나 경계선 긋기에 의해서 이쪽은 죄인이고 이쪽만 의인인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 그러한 꼼수를 쓰신 거예요.
사람들이 성전 지을 때 성신이 임했잖아요. 하나님의 영광이 임했잖아요. 그러니 사람들 생각에는 하나님께서 이 성전을 떠나지 않을 거라고 여긴 겁니다. 그 자세한 이야기는 이번 수련회에서 해요. 성전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 했는데 하나님께서 성전을 떠나버려요. 떠나면서 하는 말이 뭐냐 하면, 너희들이 성전 있는 건 맞는데 너희들이 성전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다고 하는 거예요. 이런 이야기가 사람들은 납득하기 어려워요. 교회 다니는데 말씀 어겼다 할 때 더 이상 우리가 어떻게 하라고? 할 게 없잖아요.
성신이 떠나면서 성전이 불타버립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죄가 이 안에서 피로 와서 피로 받던 성전이 모든 시스템이 성신을 통해서 묵시로 가서 묵시에서 이렇게 와버리고. 이 묵시 안에 인자가 있어요. 인자 안에 인자 있고, 인자 같은 분이 에스겔을 통해서 왔고 그걸 통해서 인자 되시는 분이 에스겔 같은 기능으로 이 땅에 오시는데 오실 때 이 안에 있는 기능은 성신에 의해서 이렇게 예수님과 연관되어서 다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면 이 안에 성전에 있는 기능은 뭐냐 하면, 새 성전과 비교하면 되겠죠. 에스겔에 나오는 새 성전의 모든 기능과 이쪽 기능과 어떤 차이가 있느냐?
옛 성전에서는 백성이 등장하고 제사장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새 성전에서는 제사장도 아니고, 백성도 아니고 왕이 등장해요. 왕 이름을 다윗이라 하고 또는 여호와 하나님의 다윗 왕으로 오셔요. 하나님이 왕이 되셔서 이렇게 들어오십니다. 일반 사람들은 동쪽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남쪽, 북쪽으로만 문이 열려서 들어오게 돼있어요. 새 성전의 구조에 보면. 이쪽 문은 닫아놓고 사람들이 출입을 못하게 돼있습니다.
전에는 백성들이 죄를 갖고 오고 제사장이 처리했는데 왕이 들어오게 되면 여기 백성들은 처리하는 것이 아니고 영접하게 돼있어요. 그냥 왕을 모시게 돼있어요. 그러면 이 성전과 차이점이 뭐냐 하면, 이쪽 성전은 물이 없어요. 이쪽 성전은 제단에서 물이 흘러나와서 그 물이 온 사방을 천국으로 전부다 생명을 살리십니다. 그렇다면 이 왕은 더 이상 피 흘리고 이런 것을 이미 처리하신 왕으로 이 땅에 오신 거예요.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다시 하면, 백성들의 죄로 갔던 이 처리를 백성들을 보내고 왕이 되신 예수님이 이 죄를 지시고 이 과정을 거쳐서 성전 따라 왔다고 보는 거예요. 철저하게 하나님은 인간에게 말씀을 주고 인간이 말씀에 대해서 갖고 있는 그 모든 것을 다시 한 번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나름대로 흩고 지나가면서 이용하는 거예요.
그러면 성도는 뭐냐? 성도는 예수님만 맞으면 되느냐? 아니에요. 예수님이 거쳤던 모든 것을 날마다 반복해서 자기 인생으로 가져오는 겁니다. 그냥 임금을 영접하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뭐가 되느냐? 아까 이야기한 간통하는 여인이 되면 돼요. 간통해야 되느냐? 간통할 필요 없어요. 가만있어도 간통한 여인이에요. 죄 진다고 그렇게 수고하지 마세요. 죄 지려고 조폭 만나고 그러지 마세요. 가만있어도 간통한 여인이고, 간통한 여인으로 들어갔다는 자체가 이미 용서되는 그 다음 역할, 용서받는 역할을 위해서 우리는 그 역할을 해야 되는 거예요. 그냥 말씀의 국자에 하나의 금붕어로 그 안에 담길 뿐이에요.
성경의 모든 말씀이 다 내 이야기라니까요. 나는 개 같은 여인에게 주지 않는다. 제가 개입니다. 그런 이야기. 나는 물로서 포도주 됐다. 제가 포도주거든요. 이런 것. 삭개오는 집에서 구원이 이르렀다. 제가 바로 삭개오입니다. 세리와 창기가 너보다 먼저 간다. 제가 창기고 제가 강도입니다. 말씀 안에서 전부다 이런 혜택을 입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구약에서 우리 선배들은 이 역할, 이 성전이 왜 깨어져야 하는지 역사를 통해서 충분히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면 오늘날 우리는 무슨 역할이냐? 성전이 보여주는 역할은 오늘날 교회를 통해서 다 보여주는 겁니다. 교회에 있는 피아노, 내가 바쳤고, 내가 헌금했고, 전부다 자기 가능성으로 이야기하는데 일부러 그렇게 하셔요. 그렇게 해놓고 예수님의 피를 묻히는 거예요. 곳곳마다 피를 묻혀요. 그러니까 옛날 성전에 종사는 제사장의 오른쪽 발가락, 왼쪽 발가락에 피가 묻어 있어요.
여기 25장에서 만들라하는 것은 피의 경로를 보여주기 위한 그러한 설비요, 장치로 보면 돼요. 죄를 담은 피가 어떻게 입구에서부터 지성소까지, 동쪽에서부터 하나님 계신 곳까지, 예수님부터 출발해서 어떻게 하나님 계신 곳까지 나가는가? 이 모든 절차를 이 장치들을 하다보니까 우리가 거기에 들어있는 장치들입니다.
예를 들면 진설병 떡이 열두 개 놓습니다. 열두 개가 이스라엘이에요. 여섯 개, 여섯 개 놓는데 그게 이스라엘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리고 앞에 그걸 비추는 조명시설, 등대가 뭐냐? 그게 이스라엘입니다. 일곱 가지 전부다. 이스라엘이라고 볼 수도 있고 또는 이스라엘 비추는 등대니까 합쳐서 빛을 받아야 마땅한 이스라엘. 점점 부각되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지키는. 그리고 에봇에 달린 보석 열두 개, 전부다 이스라엘입니다. 오늘 그 점을 언급하면서 마치고자 합니다.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이 아닌, 이스라엘이 어떤 나라인가를 물으시면 이스라엘 아닌 나라를 통해서 이스라엘과 대결하면서 이스라엘이 나타난다고 이렇게 설명할 수밖에 없어요. 내가 누구냐고 하는 건 누구와 붙어봐야 돼요. 사람은 그냥 내가 누구냐고 하면 지 마음대로 자기 좋은 쪽으로 다 이야기해요. 하나님은 그런 방법을 쓰는 게 아니고 경계선을 긋기 때문에 너와 다른 속성을 가진 자들과 부딪치게 만듭니다.
내가 복음을 안다. 그런 소리는 누구나 할 수 있어요. 그럼 누구를 만나면 됩니까? 복음을 모르는 사람과 만나서 스스로 저 사람과의 차이를 알게 만들죠. 진짜 성령 받고 진짜 복음 아는 사람 같으면 복음 모르는 사람과 만나서 다툼이 일어나게 하고 대결하게 만듭니다. 그럴 때 저쪽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내세우는 건 뭐고, 내가 마지막으로 내세우는 게 뭔가? 하나님께서 그게 뚜렷이 구분되게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처음에 이스라엘 나올 때는 애굽 사람이 아니니까 이스라엘, 혈통적으로 아브라함 자손이니까 이스라엘, 이런 식으로 알았던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상황 보여주면서 성전 짓게 하고 십계명 주면서 “그게 이스라엘이 아니고 언약을 받은 자가 이스라엘이야.”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그렇지요. 우리에게 율법이 있고, 돌판이 있고, 성막이 있으니까 이스라엘입니다.” 알았어요. 나중에 이게 중요합니다. “글쎄 그게 아니고 말씀대로 지키고 성막을 제대로 동원해야 제사장을 섬겨야 이스라엘이야.” 하니까 “그렇지요. 우리가 말씀대로 하고 성막에서 제사를 지켜야 이스라엘이지요.” 나중에는 “그게 아니고 할례를 받아야 돼.” 하니까 “우리는 할례 받았으니까.” 그게 아니고 나중에 신약에 로마서에 오면, 마음속으로 할례를 받아야 진짜 이스라엘이고 그렇지 않으면 이스라엘 백성 아니죠. 계속 나누고 쪼개는 겁니다.
간통해야 용서받으니까 구원받은 사람이다. 이렇게 하니까 간통한 나는 구원받았고 간통 안 한 너희들은 구원 안 받았다. 글쎄 그게 아니고. 결국은 마지막은 뭡니까? 우리는 아무리 둘로 쪼개고, 1/4, 1/8로 쪼개고, 백날 쪼개봐야 우리 속에는 가상적인 나, 나만 챙기는 것만 나오는 거예요. 그걸 쪼개시는 그분 안에서 비로소 그분이 이스라엘을 새롭게 만들어내고 그동안 나한테 붙어줬던 모든 비복음적인 것은 일부러 네 속에 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하신 거예요.
다시 정리하면,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아닌 나라와 싸움을 하게 만들고, 경쟁을 하게 만들어서 그들은 칼을 의지하고 힘을 의지하고 애굽을 의지하지만 이쪽은 주의 이름만을 의지하게 하는 그런 식으로 한 겁니다. 그런데 그 이전에 그들은 성전을 만들고 에봇을 입었으니까 에봇을 의지했고.
에봇을 의지한 사람이 있지요. 기드온이 전쟁에서 승리하니까 그들이 에봇을 만들어서 기드온을 높였잖아요. 그게 바로 잘리는 거예요. 에봇 만들고 심지어 법궤 만들고. 법궤는 나중에 불타버립니다. [레이더스]란 영화에서 인디아나 존스가 봤는데 그건 전부 거짓말이에요. 법궤는 시편에 보면 다 불타버렸습니다. 심지어 놋뱀도 요시아 왕 때 없애버리지요. 만들어놓고 없애버리고, 만들어놓고 없애버리고.
그걸 통해서 우리는 자꾸 내가 할 수 있는 속에 숨어들어가는 버릇이 있다는 겁니다. 내가 한 것에, 내가 드린 것에, 내가 바친 것에. 그 피아노 내가 했습니다. 자기가 한 것에 자꾸 숨어 들어가는데 숨어 들어가면 따라 와서 도끼로 짜개버리죠. “이게 어디 숨었어.” 짜개버리면 정작 내가 살아가는 것은 이렇게 끝까지 나를 찾아오시고, 나를 죄인 되게 하시고, 성경의 모든 말씀이 내가 죄인 됨을 드러내면서 그래서 구원하는 하나님의 조치인 것을 선악과 따먹은 자체가 죄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그 작업을 주께서 손수하십니다.
끝으로 한 말씀하고 마치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율법을 지켰다고 돼있죠. 사도 바울이 예수님 만나기 전에 분명히 율법을 지킨 것 맞습니다. 그걸 나중에 빌립보서에서는 율법을 지킨 것을 배설물, 똥오줌이죠. 똥오줌을 가릴 이유가 없습니다. 배설물이니까. 그동안 사도 바울이 사도되기 전에 말씀 지키기 위해서 온갖 논리와 철학과 신학과 그리고 거기에 맞춰서 행동하고 조심하고 자기 관리하고 절제하던 모든 것은 무엇을 생산하기 위함이었다? 똥오줌, 배설물 생산하기 위함이란 말이에요.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누가 그렇게 똥오줌이라고 만들어놨습니까? 예수님의 복음을 아는 걸로 인하여 똥오줌 됐잖아요. 그러면 어떤 작용이 먼저 있었어요? 나로 하여금 배설물을 생산하는 공장에 불과하다는 것을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깨닫게 했으니까 모든 말씀은 십자가 중심으로 그동안 나로 하여금 이런 짓들을 하도록 살아있는 나를 그렇게 살아있는 나로 행동하게 유도해 온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이런 식으로 유도해 가고 있는 겁니다. 배설물만 자랑하고 똥오줌 주물럭거리면서 그걸 좋다고 남한테 냄새나는 줄도 모르고 그걸 자랑삼아 얼굴에 똥칠하면서 돌아다니는 그것, 어느 한 순간에 십자가의 의미를 아는 그 순간에 저 짓을 그동안 하도록 주께서는 나를 그렇게 유도했다는 사실.
그렇다면 성도가 성도를 만날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잃어버린 것, 내가 미처 채우지 못한 그런 것, 나는 이 정도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내가 아무리 해도 달성할 수 없는 그것, 그런 것들을 고리 삼아서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의 등대로서, 하나의 떡으로서, 하나의 향단으로서, 하나의 제단으로서, 손 씻는 물두멍으로서 우리를 적재적소에 배치해서 그걸 어린양의 죄가, 다른 말로 어린양의 피가 그걸 경유하는데 우리가 거기에 하나의 쓰임으로서 같이 가는 거예요.
모든 기구에 피가 묻어있어요. 제사장 자기 몸부터 피 바르고 커튼 열고 등대에 뿌리고, 향에다 피 뿌리고, 전부다 피 뿌리고 뿌려진 피를 밟고 가는 거예요. 아까 받았던 제일 마지막에 “이 모든 것이 떠나간 그 뒷자리에는 십자가의 피자국만 선명하다.” 모든 성전을 다 부수고 남아있는 것은 예수님의 피자국만 선명하니 우리를 인도하는 겁니다. 죄 짓지 마세요. 죄 짓지 마시고 그냥 죄인으로 삽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만들라 하는 것이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만들라 할 때 그것이 곧 우리 자신인 것을 어린양 되시는 몸속으로 우리를 경유한다는 사실을 주님이 통과하고 함께 거주하시는 그런 몸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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