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207a 울산강의-출애굽기 25장 : 성전과 타락
20121207a 울산강의-출애굽기 25장 : 성전과 타락
이름 : 한윤범(IP:14.39.134.60)
20121207a 울산강의-출애굽기 25장 : 성전과 타락
(강의:이근호) 목사
출애굽기 25장 합시다. 거기에 보면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 만나고 왔습니다. 사람들이 묻겠지요. “하나님이 뭐라고 이야기하던데?” 물으면 간단하게 “이 땅에 성전 만들라고 나한테 시켰어?” “성전 왜 만들라고 하는데?” 이렇게 물으면, 모세가 이렇게 하겠죠. “자기 백성들과 같이 살고 싶어서 하나님이 자기 집 지으라고 성전 만들라고 했어?”라고 이야기하겠지요.
그러면 어떤 설계를 하게 어떻게 시설을 해야 하나님이 살만한 곳이 되겠느냐? 구들장은 어떻게 놓고, 벽지는 뭐로 하고, 커튼은 어떤 색깔로 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음식은 어떤 음식으로 하고? 화장실 비데는 설치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느냐 이 말이에요.
여러분이 치매 걸린 시어머니, 시아버지 모실 때 준비할 게 많잖아요. 편리하도록 준비하듯이 하나님을 모실 때는 하나님이 생활하시도록 준비된 게 있어야 할 텐데 어떤 것들이 준비돼야 우리와 함께 실증내지 않고 같이 살 수 있겠습니까? 거기에 대한 모든 아이디어는 사람들이 자기가 살기 편한 시설로 하나님을 모신다는 것은 합당치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이 살 수 있는 그런 환경 말고 하나님의 성질과 합치되는 만족스런 시설, 구조를 갖추어야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친히 그 설계도를 알려줘야 우리가 알 수 있겠죠. 그런데 그 설계도를 모세가 받아서 내려옵니다. 그 내용이 뭐냐 하면, 여기 3절에 보면, “너희가 그들에게서 받을 예물은 이러하니 금과 은과 놋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는 베실과 염소 털과 붉은 물들인 수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과 조각목과 등유와 관유에 드는 향품과 분향할 향을 만들 향품과 호마노며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이니라”
그 다음에 9절에 보면,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지니라” 그 뒤에 13절에 보면, “조각목으로 채를 만들고 금으로 싸고 그 채를 궤 양편 고리에 꿰어서 궤를 매게 하며” 16절에 보면, “내게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둘지며 정금으로 속죄소를 만들되”
이렇게 나와 있잖아요. 안 만들면 어떻게 될까요? 이걸 하나님이 만들라. 그러면 우리는, “미쳤어요. 내가 만들게. 나 안 만들래.” 우리가 안 만든다고 삐지면 하나님이 불쌍하게 우시고 우리한테 부탁할까요? 안 만들면 어떻게 될까요? 이런 질문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다. 안 믿으면? 하나님께서 “예수 믿어라.” “내가 안 믿겠다면 어떻게 나올 건데요?” 우리가 성경을 볼 때에 항상 우리가 먼저 깔아야 될 것은, “내가 싫다면 어떻게 나올 거야?” 그 질문은 우리한테 먼저 해야 돼요.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은 항상 불가능성이거든요. 불가능성을 내가 가능성으로 하면 이걸 타락이라 합니다. 성경에서 타락이란 분명히 불가능성인데 이것이 내 안에서 가능한 게 돼버리면 타락이 돼버려요. 아주 이상한 결론인지 모르겠지만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릴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전 지으라는 말은, 우리가 얼마나 타락했는지 본을 보여 봐라. 너희 실상을 보자. 이런 뜻이에요. “어이, 예수 믿어?” “예수 믿을게요.” 예수를 믿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그 예수님이 나의 소유로 전환됩니다.
CF에 그런 게 있잖아요. 두 아이가 이야기하다가 “너희 집 정수기에서 얼음 나오나?” “아니.” “우리 집 정수기는 얼음 나온다.” 하니까 그 소리 듣고 아이가 너무 속이 상해서 “엄마, 우리 집은?” 하지요. 그게 바로 정수기에서 얼음 나온다는 것에 대해서는 그전에는 아무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이쪽에서 얼음 나온다는 순간 그 다음부터 우리 속에서 “우리 집에도 얼음 나오는 정수기 갖고 싶어?”라고 생각이 드는 그것을 타락이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말씀을 주는 것은 우리를 타락케 하기 위함입니다. 더 노골적으로 이야기해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범죄케 하기 위함이에요. 죄를 짓게 하기 위함입니다. 죄를 짓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어요.
지금 제가 교회도 안 나오고 예수도 안 믿고 자기만 알고 하나님이고 뭐고 다 귀찮아하고 하나님도 싫고 그런 것 안 믿고자하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전을 지으라고 하는데 성전을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이방나라 입장에서 생각하는 겁니다.
모세가 하늘나라에서 성전 짓는 설계도를 보고 왔다. 지으라고 할 때 옆에 있는 이방나라 백성이 와서 “지어?” “나, 안 지어.” “교회 나와?” “나, 안 가.” “예수 믿어?” “나, 안 할 거야.” 이렇게 돼버리면 그 사람은 자기가 타락할 기회도 놓치고 자기가 범죄 할 기회를 놓쳐버려요. 자기가 타락할 기회를 놓치고 범죄 할 기회를 놓치면 그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아니 구원 자체가 그 사람한테는 필요치 않아요.
구원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쳐놓은, 아까 누가 집에서 닭 키운다는데, 그 닭 불쌍해요. 원래 닭은 양계장에서 커야 돼요. 집에서 키우면 시달리잖아요. 양계장에서 키운 닭은 이방인, 집에서 사람과 같이 크는 닭은 이스라엘 백성, 누가 힘들겠습니까? 제가 물어볼게요. 사람은 사람끼리 사는 게 편합니까? 사람이 하나님과 사는 게 편할까요? 묻는 내가 나쁘다.
여러분, 같은 동기생, 같은 연배끼리 모여 사는 게 재미있습니까? 시어머니 모시고 사는 게 재미있습니까? 같은 나이끼리 속삭거리면 사는 게 재미있어요. 괜히 집에 어른 모셔 봐야 여름에 민소매도 못 입습니다. 어른들 하는 재미가 뭔데요? 젊은 사람들 티 잡는 게 하루 낙 아닙니까? “요새 젊은 사람들 말이야.” 하면서 티비에서 뉴스 하나 본 것으로 어른도 몰라보고, 어떻게 키웠는데 하면서 하루 종일 세월 다 보내잖아요. 그러니까 젊은 사람들은 거기에 대해서 대들지도 못하고 얼마나 힘들어요.
그러니 편한 게 뭐냐 하면 인간끼리 사는 게 제일 좋아요. 거기다 하나님께서 성전 지으라 하니까 이것은 일종의 날벼락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참 재수 더럽다고 보시면 되는 거예요.
다시 정리해드리겠습니다. 사람은 타락하지 아니하면, 죄 짓지 아니하면 구원이 되질 않습니다. 이유가 뭐냐 하면, 구원이 되는 것은, 현 자리에서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리를 무슨 자리로 바꾸느냐 하면, 창세기 2장, 3장 자리로 자리를 바꿔요. 우리 자리가 말씀에 의해서 정확하게 노출되는 자리로 만들어놓고 그 자리에서 말씀에 준해서 우리를 구원하는 겁니다.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금붕어 이야기해봅시다. 금붕어 잡을 때 손으로 잡으면 자칫하면 손의 압력에 의해서 죽거든요. 금붕어 잡을 때는 국자로 뜨잖아요. 사람을 구원할 때는 우리로 구원하면 우리가 터져버립니다. 국자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말씀이 와서 국자에 금붕어 담듯이 말씀에 의해서 담으면 우리는 졸지에 건전하고 훌륭하고 잘나고 똑똑하고 천하에 믿음 좋고 대단하고 착한 이런 인간이 창세기 2장, 3장의 국자에 담기면 우리는 애초부터 타락할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로서 국자에 담기게 되죠. 그러면 그게 구원의 시작이에요.
그런데 말씀도 안 본다, 교회도 안 나온다, 하나님도 믿기 싫다, 예수도 안 믿는다. 이렇게 돼버리면 자리를 떠야 될 말씀의 국자가 없는 사람이잖아요. 말씀의 국자가 없으니까 그 사람은 자기 잘난 맛에 그냥 살아가요. 항상 자기는 우수하고, 항상 훌륭하고, 항상 의롭고 착하고 대단하고 그런 거예요. 그러니 그 사람한테는 구원이 필요가 없지요. 지가 알아서 잘나서 천당 간다는데 나를 왜 구원해? 내가 잘하고 있는데. 구원할 이유가 없어요. 이만하면 훌륭한데.
전에 서울서 서 목사님 주례를 그렇게 했잖아요. 뭐 둘이 잘 먹고, 잘 살고 그런 것 다 필요 없고 예수님을 알아야 된다. 그게 중요하지 둘이 결혼식해서 잘 먹고 사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내가 신랑 같으면 손들고 질문 했을 거예요. 그러면 결혼은 왜 하는데? 하고 따질 수 있는 문제잖아요.
하나님께서 결혼을 하게 하신 것은 혼자 살 때는 천하에 똑똑하고 천하에 잘났어요. 그런데 분명히 지는 잘났고, 하자 없고, 남에게 배려심 많은 줄 알았는데 만약에 똑같은 금붕어 두 마리 붙여놓으니까 그때부터 계속 저 인간과 살아야 되는지, 아니면 그만 살아야 되는지. 이 갈등은 수시로, 저 인간과 살아서 돈이 얼마나 깨졌는가? 이런 계산. 항상 수시로 뭔가 내가 실수한 건 아닌가? 지금이라도 발을 뺄 수 있는 방법은?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뭔가 본인이 원치 않은 덫에 갇혔다는 생각을 들 게 하는 동시에 내가 가능할 수 없는 어떤 불가능 속에 지배를 받고 불가능성에 의해서 휘둘리고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겁니다. 그게 결혼입니다. 나 혼자 살면 모든 걸 나 혼자 결정하지만 분명히 내 인생인데 내 마음대로 결정하는 것을 불가능성 되게 하는 새로운 환경이 주어져버려요.
결국은 성전 지으라는 이 말은 금을 바치고, 은을 바치고, 재물 바쳐봐야 하나의 건축물 세워집니다. 하지만 그게 성전이겠는가 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아무리 바치고 아무리 조각목을 만들고 언약궤를 만들어도 뭔가 빠진 구석이 있어요. 그 빠진 구석이 반드시 있어야 됩니다. 건물 만들고 토지 갈고 천막 세웠는데 그게 성전이겠습니까? 거기에 하나님의 세키나,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예배당 세우면 교회냐 이 말입니다. 사람들이 대한예수교 간판 걸면 그게 교회겠어요?
항상 뭐가 있어야 돼요? 우리가 할 도리 다했지만 당신과 나의 만남은 불가능성을 전제로 해서 서로 만나줘야 그게 교회가 되는 겁니다. “너, 금 바쳤나? 나, 은 바쳤어. 내가 더 낫다.” 이것은 성전도 아니고 교회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러면 “나는 금 바쳤는데 뭔가 모자란 게 있어.” “나는 은을 바쳤는데 그래도 뭔가 모자라. 맞아.” 하나님의 성전 됨,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나의 가능성, 할 수 있는 걸 다 집어넣어도 뭔가 여분의 것, 남아 있는 게 있어야 돼요.
가정이라는 것을, 부부라는 것은 분석해서 당신은 혼수를 천만 원어치 했고 나는 천오백만 원 했다. 그러면 천오백, 천 둘이 나누면 가정도 깨지는 겁니까? “천만 원짜리 여보.” 자기 아내를 이렇게 부릅니까? “왜 그래요? 천오백만 원짜리 남편.” 이럽니까? 뭔가 부부라 하는 것은, 내가 돈을 천만 원, 천오백만 원 바쳤지만 그것 말고 뭔가 서로가 장악할 수 없는 남아있는 여분의 남아 있는 것, 내가 당신보다 혼수를 더 많이 해왔지만 혼수 많이 해왔다는 그 이유가 전부를 장악할 수 없는 뭔가 남아있는 여분의 것, 그게 가정의 행복이라는 거잖아요.
결국 우리는 불가능성에 대해서 아무리 바쳐도 우리는 거기에 고개 숙이고 내가 거기에 미흡하다는 사실을 늘 깨닫게 하는 겁니다. “내가 아무리 아버지로서, 엄마로서 최선을 해도 항상 가정을 생각하게 되면 항상 모자라.” 아주 특수한 개념인 것처럼 이것을 가정뿐만 아니고 성전도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이번 강의에서 성전은 뭐냐?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성전은 그냥 삶이다. 성전은 반드시 불가능성에 감사하는, 내가 할 수 있는 내 노동에 내 노력에 감탄하는 것이 아니고. 이 부족하고 아무리 해도 무능하고 죄 많은 나에게 그걸 보지 아니하시고 여분의 것으로 주시는 그 감사가 삶으로 이어질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입니다. 왜? 그 사람은 항상 자기 잘한 것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못남을 내세우면서 주의 은혜로만 영광 돌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도의 삶이 참 쉽지요. 굉장히 쉽지요. 짜증이나 불평이나 불만이란 것은 있을 수가 없지요.
성전이란 주제를 성막이란 주제로 중국에서 강의한 게 있습니다. 거기에 이 내용들을 다 이야기했어요. 그 내용들 이야기하기 전에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말씀의 국자를 먼저 생각해주세요. 하나님께서 성전 만들라고 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더욱 더 죄로 드러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로 더욱 더 죄인 되게 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그게 구원 작업이에요. 죄인 되지 않으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모든 입을 막고 저주 아래 있게 하심이라.
그건 왜 그러냐 하면, 그림으로 이야기한다면 이렇게 돼요. 우리가 여기 있는데 항상 우리 자신은 스스로 가능성으로 희망을 삼고 삽니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의 지시가 와요. 이 지시를 두 가지로 나눠서 하겠습니다. 하나는 이걸 ‘사건’이라 합니다. 또 하나는 ‘사실’이라 하는데 사건이 역사 속에서는 하나의 사실이 되는 겁니다. 어렵게 한다 했거든요.
하나님의 지시가 오게 되면 하나의 사건이 되게 되면, 여기 있는 인간은 어느 사건에 들어가느냐 하면, 지시한 이 사건만 해보면 인간이 역사가 돼버려요.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아닙니다. 역사는 계시가 아니에요. 인간은 이 사건을 통해서 창세기 1장, 2장, 3장,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에 있거든요. 이 사건을 빌미로 해서 이 사건 속에 들어가게 되면 창세기 1장, 2장, 3장, 4장에 우리가 저촉을 받게 돼요. 저촉을 받게 되면, 여기는 창조 세계거든요. 창조 그 다음에 구원의 세계. 창조 세계는 없는데서 있게 하는 세계, 구원의 세계는 죽은 자를 산 자로 만드는 사건이거든요.
그러면 우리가 여기 분명히 있는데 사건 속에 들어가면 분명히 있는 나를 없는 존재로 보는 겁니다. 나를 없는 존재로 만들려면, 나를 없애면 말씀만 있으면 돼요. 말씀을 통해서 말씀이 없던 나는 죽고, 말씀 있는 나로 새롭게 창조되는 겁니다. 그게 요한복음 1장 3절에 나오죠. 목사님 주례사할 때 나왔습니다. 내일 또 무슨 주례사 할지 모르지만. 아무것도 말씀 없이는 된 게 없다. 모든 것이 말씀 때문에 되게 돼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것은 내가 현재 있다는 것보다 말씀이 우선이에요. 이걸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내가 여기 있는 것보다 내가 죽어야 된다는 사실이 또는 나를 죽이는 사건이 우선적인 의미를 두는 거예요.
“내가 여기 살아있으니까 저를 구원해주세요.” 이렇게 하면 이것은 말씀 속에서 말하는 구원이 아닙니다. 이것은 철학에서 말하는 것이고, 과학에서 윤리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나님, 저 있잖아요. 구원해주세요.” 이것은 일반종교에요. 하지만 “말씀이 있음에 없는 나를 있게 하시고 죽은 나를 살려주세요.” 하면 이것은 바로 말씀대로 약속대로 예수님답게 그렇게 되는 거예요.
내가 여기 있어버리면, 항상 타락이란 게 뭐냐 하면, 불가능한 것이 내 속에 가능한 것으로 넘어오면 타락이라 했잖아요. 선악과 의미를 인간은 몰라요. 인간이 선악과 과실을 탐내서 따먹었으니까 선과 악을 알게 됐지요. 원래 선악과 불가능성으로 남겨둬야 구원이 되는데 인간은 선악에 대해서 알게 되니까 알게 된 것으로 활용해서 그걸 근거로 해서 구원에 나서고자 한단 말이죠. 신을 만들어내고 우상을 만들어내고. 그게 바로 타락이란 말이죠.
“예수님이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는 개입니다. 개 같은 여자인데 불쌍히 여기소서.” 할 때는 불가능성을 믿는데 “저가 이만큼 헌금했잖아요. 이만큼 봉사했잖아요.” 이렇게 돼버리면 그것은 가능성을 근거로 해서 구원을 내놓으라 하니까 구원과 가능성이 매치가 안 돼요. 연결이 안 된다니까.
이러한 기본적인 인식의 변화는 뭐냐 하면, 죄 지어야 구원받는다는 것, 타락해야 구원받는다는 이 사실을 분명히 해야 돼요. 왜 교회도 안 나오고 예수도 안 믿는 사람이 불행하냐 하면, 그 사람들은 본인이 타락했다는 사실에 깜깜 무소식이라. 손석희도 그런 이야기 안 해주고, 안철수도 그런 이야기 안 해요. 안철수와 문재인 두 분이, “여러분, 타락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안 해줘요.
그래서 대통령선거와 우리의 구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왜? 그 사람들은 역사를 이야기하거든요. 우리는 역사가 아니고 사건과 말씀이 만들어내는 사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그 사람들은 앞으로 찬란한 대한민국 역사를 제가 책임지겠다고 나온다 말이에요. 그러나 이런 역사는 항상 가능성으로 나타나서 점점 더 불가능성과 거리가 더 멀어지게 만들었어요.
예를 들어볼게요. 누가복음 15장에 제일 먼저 잃어버린 양 비유 나오고, 동전 잃어버렸지요. 그 다음에 아버지가 둘째 아들을 잃어버렸지요. 세 비유의 공통점이 전부다 잃어버렸잖아요. 그런데 현대인들은 자기 자신을 안 잃어버리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씁니까? 그런데 말씀은 우리에게 뭐라고 합니까? 너는 있는 것이 아니고 너는 없는 존재로 있다고 하는데 우리는, “내가 여기 있는데 없다고 하는지 도대체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내가 여기 있잖아. 어쨌거나 있는데 왜 없다고 이야기하느냐?”
하나님은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은 없는데서 있고, 죽은데서 살렸다. 원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온 게 아니고 처음에 아브람을 찾아왔죠. 아브람 속에는 아브라함이 없어요. 그런데 아브람을 죽게 하는 그 자리가 사건의 자리가 되어서 아브람이 죽을 때 그 자리에서 아브라함이라는 말씀에 준한 새로운 피조물이 창조되는 겁니다. 왜? 말씀은 창조의 능력이 있고 구원의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러면 아브라함이 죽는 자리가 언제냐 하면, 아브람이 자기 육체 낳은 자식이 이스마엘이죠. 그 이스마엘이 저주받잖아요. 그 저주받은 이스마엘의 부모가 누굽니까? 아브람이고 사래잖아요. 그 둘 다 뭔가 문제 있어서 태어난 저주 자식이니까 아브람이 저주받아야 되고, 사래가 저주받아야 돼요. 아브람과 사래의 조상은 누굽니까? 아담이죠. 아담이 저주받아야 된다니까요.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라는 것은, “너, 저주받아야 돼.”라는 그런 호명과 그런 지시와 그런 명령과 그런 사건과 사실로부터 구원은 시작이 되는 겁니다.
그럼 오늘날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지요. 십자가가 뭐냐 하면, 십자가에 서른세 살 먹은 아저씨가 죽었잖아요. 그 아저씨가 죽음으로써 누가 죽어야 될 자리입니까? 모든 인간이 다 죽어야 될 자리에요. 고린도후서 5장 14절, 예수님이 죽음으로써 모든 인간은 다 죽은 것이다.
교인들이 교회 와서 목사한테 듣고자하는 것이, 내가 뭐가 가능하고 뭘 행하면 내가 원하는 복을 따낼 수 있는지 그런 관점에서 성경 보시고 설교 들으시면 그건 교회 오신 게 아니고 지옥 오신 겁니다. 지옥은 잘난 척하는 사람 다 온 거예요. 부자도 보세요.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서. 거지도 보세요. 건강 잃었지요. 재산 없지요.
거지 앞에 있는 불의한 청지기 보세요. 구조조종 당해서 잘리게 됐어요. 직장을 잃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세요. 액자에 써넣을 좋은 말씀 하나 알려드릴게요.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내가 지어낸 이야기라고 오해하시면 곤란합니다. 누가복음 16장 9절 말씀입니다. 성구사에 가 보세요. 이 말씀으로 표구한 게 있는가? 그게 이 땅에서 살아가는 지혜라.
그러면 묻겠습니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삼으면 그 인간은 이 세상에서 어떤 인간 됩니까? 좋은 사람 돼요, 나쁜 사람 돼요? 나쁜 사람 돼요. 그게 하나님의 작전이에요. 바로 그런 겁니다. 나쁜 사람 안 되기 위해서 애쓰는 것은 점점 더 천국과 멀어져요. 그런데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게 되면 자기는 나쁜 인간이라고 기정사실화시키잖아요. 세상에 그런 축복이 어디 있어요. 아, 실수해서 나쁜 놈 됐네. 이게 아니고 내가 이제야 내 값을 하네. 이게 얼마나 사람을 인생 사는데 편하게 하는지 몰라요. 물론 편하게 한다고 여러 명 눈물 흘리게 만들겠지만.
예수님 명령을 우리가 건방지게 왜 안 지킵니까?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런 건 잘 지키고,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왜 같은 ‘~라’인데 왜 안 지킵니까? 숙제를 어느 건 하고 다른 건 안 하는 골라서 하는 자격이 우리에겐 없거든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을 지으면서 비로소 말씀 없던 그들의 생활 속에 드디어 말씀에 의해서 모든 걸 지적받는 생활로 접어들게 됩니다. 나중에 성전을 지어놓게 되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합니다. 성전 지었다고 이게 성전인 줄 아느냐? 잘 지었어? 내가 불태워버린다. 그러면 애써지었던 성전을 “하나님, 성전 멋들어지게 시키는 대로 지었습니다.” 그걸 불태워버린다면, 그렇게 애써지었던 너의 모든 기대와 희망과 포부가 같이 불태워질 수밖에 없다는 그런 존재가 너라는 것이 분명히 밝혀지겠지요.
그래서 성전의 모든 구조의 의미는 뭐냐? 흔히들 이야기합니다. 성전은 예수님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성전의 구조는 예수님에 의해서 네 죄가 낱낱이 드러나게 만드는 그 신과 인간의 중재 작업을 성전이 하게 됩니다. 성전에 나오는 모든 기구는 한 마디로 말해서 ‘거룩’입니다.
이 거룩이 인간이 달성할 수 있는 실천할 수 있는 거룩이 아니고 불가능한 거룩으로 오셔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거룩인 척하는 모든 것을 낱낱이 다 뒤집게 만들어요. 인간 쪽에서 나오는 거룩과 마중을 나갑니다. 마중을 나가면 여기서 뭐가 발생이 되느냐 하면, 여기서 피가 발생됩니다. 인간이 거룩한 하나님과 함께 하기 위해서 나갔는데 나중에 생기는 피였더라.
이것은 새순교회 교인들에게 이런 게 있다는 게 아니고 억지스러운 예를 제가 들어보겠습니다. 미국에 있는 형이 있어서 엄마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둘째 아들한테 부탁을 했어요. 내가 미국에 이민 와서 어머니를 못 모시니까 네가 어머니를 모셔라. 제수씨 조건이 있습니다. 월 백오십 만원씩 드릴 테니까 불쌍한 어머니를 네가 모셔라. 집도 네 앞으로 등기하고. 해서 모셨단 말이죠. 그래서 백오십 만원 주고 집까지 줬으니까 이제는 잘 하겠지 하고 오랜만에 와보니까 어머니가 어깨고 얼굴에 피멍이 든 거예요. “이게 백오십 만원이나 줬는데 모신 거야.” 하고 형이 따지겠지요.
거룩을 시어머니라고 한 거예요. 인간에게 거룩히 살라고 할 때 “거룩히 살겠습니다.” “거룩히 살면 가나안 땅에서 생산물이 나고 젖과 꿀이 넘치게 할 것이다.” “예. 알겠습니다.” 그게 집 다 주고 월 백오십 만원씩 준 거예요. 했는데 막상 하나님 와서 거룩한가 보자 하니까 완전히 피 바다가 돼있는 거예요.
이사야 1장 이야기입니다. “내가 너에게 절기 지키라 했어, 안 했어?” “했습니다.” “내가 안식일 지키라 했어, 안 했어?” “했습니다.” “내가 성전에서 제사 드리라 했지?”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네 손에 피가 묻어 있느냐? 어떻게 네 손에 피가 묻어있는 채로 감히 성전에서 안식일, 절기 지키면서 기도 응답받겠다고 기도하느냐?” 거룩이 삶으로 이어지지 않았단 말이죠. 이사야 1장 15절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 함이니라”
또 마태복음에도 있고 누가복음에도 이런 말씀 있어요. 하나님께서 포도원을 만들어놓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농부라 해서 포도농사 잘 지으라고 했습니다. 소출 받을 때가 되어서 종을 보냈다. 그런데 종이 집에 돌아왔는데 소출은커녕 완전히 얻어맞아서 인간이 형편무인지경이 된 거라. 그래서 주인이 종을 다시 또 보냈어요. 그런데 농부들이 패버린 거예요. 그래서 마지막으로 주인이 아들을 보냈어요. 그러니까 농부들이 하는 말이, “후계자가 왔어. 이 놈만 죽이면 이 포도원은 우리 것이다.”라는 예를 예수님을 직접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말씀 안에 인류사가 다 들어있어요. 북한의 로켓에 실어서 미사일 보내고, 그것만 인류사가 아닙니다. 인류사는 이미 결론이 났어요. 역사가 진행 돼봐야 알지? 모든 역사는 하나님이 종을 보냈는데 어떻게 대우했고, 마지막 아들 보냈는데 어떻게 대우했느냐? 그건 역사는 손 털었습니다. 게임 오버, 끝난 거예요. 아들을 죽였어요. 그러니까 그 임금이 어떻게 대처하겠는가? 그 농부들을 징벌하고 저주해버릴 것이라고 돼있습니다.
여기서 오늘 강의한 것 다시 정리해봅시다. 금붕어를 국자로 뜬다고 했지요. 금붕어는 우리고 국자는 말씀입니다. 국자란 이름의 말씀 안에서 포도원 농부 이야기가 다 들어있어요. 그러면 국자라는 것은, 우리가 새삼스럽게 착하라고 준 국자가 아니고 네가 어떻게 해도 네 손으로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는 그런 성질과 성격이 이미 우리 속에 내장돼있다는 것을 까발려주는 국자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걸 애써 부인해요. “내가 성심성의껏 하나님을 섬겼는데 아무리 그래도 예수님을 싫어하고 미워할 리는 없습니다. 제가 천하에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이렇게들 주장하거든요.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우리뿐만 아니고 선배들 한둘이 아닙니다. 굉장히 많아요.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한 뭉치 주면, 고맙다고 받지요. 그런데 다음 날 와서 돈을 빼앗아 보세요.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감정이 드는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까 그냥 가져가세요. 이런 생각을 가질 위인이 누가 있겠어요. 아무도 없습니다. 주는 것만 복인 줄 알지 주고 가져가는 것도 축복이라고 누가 생각하겠습니까.
우리 마음이 정말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거든요. 한쪽을 미워하면 한쪽을 사랑하게 돼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냥 행동이 오는 게 아니고 미워서 행동하는지, 사랑해서 사랑하는지 그만한 하나의 윤리적인 의미가 담겨서 행동을 하게 돼있어요. “여보, 형광등 깜짝거리는데 고쳐라.” 똑같은 톤으로 하면 그냥 객관적인 말로 들리지요. 그런데 듣는 사람은 그렇지 않아요. “사랑하는 여보, 형광등 갈아줄래?” 이런 톤도 있을 수 있고, “아이고. 미워 죽겠네. 저 인간. 형광등 갈아.” 이렇게 들릴 수도 있고.
항상 어떤 말씨, 톤 속에서 말하는 내용만 듣는 게 아닙니다. 저 말을 하는 저 인간이 나를 미워서 저런 소리하는지, 고와서 저런 소리하는지 항상 그 밑에 톤이 보쌈 싸이듯이 싸이게 돼있어요. 엠페도클레스란 그리스 철학자가 그걸 밝혀냈습니다. 세상에 모든 움직임은 미움과 사랑, 사랑과 미움의 밀고 당기기다.
그걸 가만히 생각해보면 굉장히 예리한 말이에요. “주여” 할 때 하나님께서 “가만있어 봐. 방금 뭐라고 했어?” “주여” 했습니다. “자, ‘주여’란 말이 나를 사랑해서 ‘주여’라고 했는지, 나를 미워해서 했는지 천사여, ‘주여’란 말을 받아서 측정해봐.” 백이면 백 다 “주님 싫습니다. 밉습니다.” 하는 쪽의 ‘주여’입니다. 정말 주님을 사랑하게 되면 입에서 ‘주여’란 말이 안 나옵니다. 유구무언입니다. 너무 고맙고 부끄러울 때는 할 말이 없고 그냥 빙그레 웃을 뿐이지요. “주-여-” 하고 나왔다는 것은 뭔가 힘주고 나왔다는 말은, 하나님 미워 주겠다는 뜻이거든요.
지금 되도 않은 이야기를 지어냈다는 투의 표정들인데 이것 지어낸 것 아닙니다. 맞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성경을 펼칠 때 이렇게 펼치는 것과 이렇게 펼치는 것이 행동 자체가 하나는 밉다는 것이고, 하나는 사랑스럽다는 것으로 다 달라요. 숨쉬는 것도 마찬가지인데.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 이미 가능성을 믿게 되면 그 자체는 우리의 가능성을 가능성으로 인정하지 않는 어떤 세력, 예수님조차도 미운 쪽에 분류가 돼요.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하는 것은 나밖에 없습니다. 천하에 뭐라 해도 우리는 나를 사랑하는 나를 믿지, 우리는 예수를 안 믿게 돼있고, 하나님을 안 믿게 돼있어요.
예수 믿고 하나님 믿는 것은 우리가 알아서 믿을 수 있는 게 아니고 말씀의 사건이 우리에게 쑤시니까 그때부터 우리는 나 안 믿고 예수 믿게 된 거예요. 침을 놓은 거예요. 뭔가 이질적인 것이 들어온 거예요. 가능성만 있는 나에게 내 가능성은 예수를 싫어하고 예수님을 미워하는 거예요. 거기다가 예수님의 사랑이란 불가능성이란 침이 들어와 버리면 이것은 난데없는 축복이 되는 겁니다. 분명히 예수님을 미워해야 되는데 아무 대가없이 그냥 구원하시는 주님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너무너무 주님이 감사하고 주님이 사랑스럽고 주님이 좋아지는 거예요. 몇 초 가지도 않지만. 이건 내 마음 아닌데. 전혀 내 마음과 어울리지 않는데.
그래서 교회 올 때는 자기의 가능성 내세우지 말고 불가능성을 가지고 오시란 말이지요. 나 같은 불가능성을 가지고 온 사람도 있기 때문에. 그 불가능성을 중간 자리로 해서 서로가 서로에게 대화를 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을 성경에서는 자기를 부인한다고 이야기하고 자기를 부인하게 되면, 예수님이 미워 죽겠다는 것도 그 순간만은 부인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주여, 이걸 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내가 이걸 해서 감사한 게 아니고 복 주나 안 주나 이런 일을 하게 하신 것, 교회 오게 하신 것 자체가 이것은 나의 가능성, 나의 의견이 아니었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말을 교회 와서 같이 나누게 되는 겁니다. 그럴 때 그게 성전 되는 거예요. “우리는 미쳤어. 안 해도 될 일을 왜 하고 있어. 나도 바보지만 당신도 참 바봅니다.”
우리를 바보 되게 하신 것은 주님의 불가능성은 사실은 복음의 사건. 우리는 괜찮은 존재인데 괜찮은 존재를 묵사발 만들어서 천하에 죄인으로 만들어 주신 그 사랑, 그 축복의 사건에 의해서 우리는 구원 사건에 말려든 겁니다. 구원이란 소용돌이에 드디어 말려든 거예요. 그런 우리가 바로 멜기세덱이고, 우리가 바로 예레미야고 이사야고, 에스겔이고. 아브라함이고 그런 겁니다. 세례요한 되고. 구약의 선지자 너무 부러워하지 마세요. 신약의 작은 어린아이라도 구약의 어떤 선지자보다 더 크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구약은 뭔가 가능성으로 꼼지락거리는데 신약은 십자가를 믿고 난 뒤에서 나의 모든 것이 내가 죽은 자라는 걸 아는 자체가 이미 불가능성으로 시작을 하고 있는 거예요. 거기서 하나님께서 내가 될 수 없는 나를 주께서 내가 예상 못한 나로 만들어 가는가? 우리는 그냥 구경하면 되는 거예요. 내가 예상도 못한 어떤 새로운 고백, 내가 생각지도 못한 어떤 감사, 감사할 것도 아닌데 감사하고, 좋아할 것도 아닌데 좋아하고, 싫어할 건데 싫어하지 않고. 예상 밖의 놀라운 변화들이 그 다음부터 일어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나의 계산과 전혀 다른 계산들이 다른 뜻에 의해서 내가 움직이고 살아가고 이끌림 받고. 내가 생각했던 그 길이 아닌데.
제가 어디 강의하면서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하나님이 이끄시는 것은, 항상 우리는 자아를 가상한다는 말을 했거든요. 항상 우리는 자기 존재를 가상 존재로 만들어요. 원래 내가 아닌데 자꾸 우리는 내가 아닌 다른 나를 가상적으로 만들어가고 있어요. 이건 내가 만들었기 때문에 내가 스스로 깰 수가 없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이걸 깨줘요. 진짜 내 모습을. 하나님 보시기에 내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 그런 행운, 수백억 로또 복권 당첨도 이런 행운과 비교가 안 됩니다. 진짜 내 모습은 말씀 속에 이미 나와 있는데 우리는 그걸 모르고 있어요. 모르고 있는 것을 주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진짜 내 모습을 알게 하는 겁니다.
어떤 식으로 알게 하느냐? 어떤 식으로 달성하는가? 그건 우리 몫이 아니니까 제발 주님의 불가능성을 나의 종교적인 수완이나 기술로 나의 가능성으로 소유하지 마세요. 그 자체가 타락이니까. 그런 타락한 짓을 우리가 마치 의로운 것처럼, 하나님 영광인 것처럼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오해 하나 안 하나 우리는 만날 그 짓밖에 안 하지만. “주여, 내가 헌금했습니다. 기도했습니다.” 자꾸 이런 식으로 불가능성으로 남겨둬야 되는데 자꾸 가능성으로 바꿔서 더 이상 불가능성을 안 남기는 그런 버릇으로 살아가는 이게 우리의 가상적인 존재입니다. 이런 가상적인 존재를 하나님의 성전을 통해서 기구를 통해서 장치와 설비를 통해서 어떻게 이끌어나가는가? 그것은 10분 쉬고 다음 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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