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강-나1장1-3(하나님의 속성)121209-이 근호 목사
1강-나1장1-3(하나님의 속성)121209-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한례(IP:203.90.41.16)
1강-나1장1-3(하나님의 속성)12120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나훔 1장 1절에서 3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1299페이지입니다.
나훔 1:1-3
“니느웨에 대한 중한 경고 곧 엘고스 사람 나훔의 묵시의 글이라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리는 자에게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죄인을 결코 사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여호와의 길은 회리바람과 광풍에 있고 구름은 그 발의 티끌이로다”
“여호와는” 이렇게 해놓고 뒤에 칸을 비워 놓고 우리가 한번 적어봅시다. “여호와는 ( )” 여호와는 어떤 분이고, 여호와는 어떤 분이고. 성경을 우리가 안 봤다 치고 덮었다 치고, 여호와는 ( )에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가 기대하고 있는, 우리가 ‘하나님은 이랬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하는 그것을 집어넣는다고 한다면 거기에 자기 사정들이 다 담길 것입니다.
여호와는 자비로우시고 여호와는 내 소원대로 다 이뤄주시고, 그런 하나님을 원하죠. 그렇게 적어놓고 그 다음에 오늘 분문을 가지고 한번 대조를 해봅시다. 우리가 적었던 여호와는 하고 뒤에 붙어있는 글과 성경에 나와 있는 여호와는 하고 붙었던 것과 이게 일치되는지를 보자 이 말입니다.
2절에 보면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리는 자에게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죄인을 결코 사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이것을 들었을 때 뭔가 반대가 돼야 되는 게 아닌가, “여호와는 투기하지 아니하시고 여호와는 보복하지 아니하시고 복수도 모르시고 진노 안 하시고 자기를 거스려도 용서해주시고” 이것도 우리가 듣고 싶었던 여호와가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성경은 이렇게 나와 있느냐, 그것은 바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우선시해야 되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보다도 나를 위한 내 구원을 우선시하다 보니까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하나님이 구원해줘야 구원받는데 우리는 내가 설쳐서 구원받는 구원을 우리는 자꾸 염두에 두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각이라는 것은 여기서 나라 하는 것은 제가 출생연도가 1953년입니다. 생일은 말하게 않겠습니다. 해봐야 소용없는데. 1953년 같으면 1950년도에는 형은 있었는데 나는 없었어요. 그럼 내가 없을 때 형은 있었다면 형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이건 분명히 내가 안 만들었죠. 나는 그전에 태어났으니까. 내가 없었을 때니까. 내가 없었을 때 하나님은 어떻게 구원하는가를 생각해 봐야 돼요. 항상 내가 여기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자꾸 하나님을 거기다 갖다 붙이니까 모든 것이 뒤틀려지고 엉터리가 돼 버리는 겁니다.
내가 없을 때, 모든 인간이 없을 때, 그때 구원은 하나님 계시고 예수님 계시고 성령님 계셨습니다. 그 뿐이었어요. 구원은 그때 다 이미 이야기가 끝난 이야깁니다. 우리 없을 때 예수님만 계실 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에게 구원을 전달했고, 예수님은 그 구원을 전달받아서 이 땅에 그냥 실행에 옮긴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구원은 예수님을 구원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주되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런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 뒤에 태어난 모든 인간들은 예수님이 주가 되신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 둘씩 태어나야 했죠. 이 구원이라 하는 것은 천국도 채워야 되고 지옥도 채워야 되고 인원수를 채워야 되니까, 그 채우는 작업을 예수님이 하셨고 예수님께서 양쪽으로 지옥과 천국을 다 만들어 놨으니까 자기가 주님이시니까 ‘너는 지옥으로 가야 돼. 너는 천국으로 가.’ 이렇게 분류작업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뒤에 태어난 모든 인간들은 지옥 가기 위해서 태어나야 하고, 천국 가기 위해서 태어나야 하는 겁니다. 지옥 가는 거요? 자기가 애쓴다고 지옥 가는 게 아닙니다. 지옥 가려고 아무리 예수님 하지 말라는 건 다 하고 예수님 욕 다하고 돌아다녀도 천국 가야 하면 기어이 그것도 실패로 끝나버려요. 인간은 천국, 지옥도 자기 맘대로 못 가고 자기가 생각할 수 있는 곳은 예수님이 지정해 주는 거지, 자기가 골라잡아서 자기가 지정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한 이야기를 역사 속에 펼치게 되면 이런 겁니다. 우리의 시간과 공간은 뜯어내야 되고 도배를 새로 해야 됩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다른 하나님을 생각하느냐 하면, 우리가 걸쳐있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이 이게 매우 수상하기 짝이 없습니다. 시간과 공간 자체가 이것은 이미 기존 인간들이 생각한 시간 공간이기 때문에 이걸 다 뜯어내야 돼요.
누가복음 17장 21절에 보면 이런 말씀 있습니다. “하늘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지 못한다.” 아~ 참, 얼마나 어려운지. 하늘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수 없다. 바리새인들이 물었습니다. ‘예수님, 하늘나라가 어느 지점에 있습니까? 위도 몇 도에 있고 경도 몇 도에 있습니까?’ 위도 39도에 독도가 있는가는 모르겠어요. ‘구원이 어디에 있으며 언제 있습니까?’라고 묻는 버릇들이 우리한테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어떤 특정 지점에 있으면 우리가 찾아가면 되는데 찾아 갈 수가 없어요. 찾아가서 거기서 주님 기다리면 우리가 만나면 되거든요. 심지어 어느 단체에서 그렇게 이야기한 단체가 있어요. 감람산에 주님 재림하니까 그때 때 딱 맞춰서 감람산에 비행기 타고 가서 거기 집결하라는 거예요. 감람산 비좁게 돼 있어요. 감람산에 줄서야 되니까 좌석 표 예약하든지 해야 되죠. 특정 지점에 예수님 오시니까 그 지점에 안 가면 구원에서 탈락한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 이야기가 의외로 잘 먹혀요. 의외로 성경에 무식한, 유식해도 마찬가지지만, 의외로 잘 먹혀요. 왜 잘 먹히느냐 하면 우리가 평소에 하는 모든 결정은 특정 공간과 특정 시간만, 시계하고 네비게이터만 있으면 구원이 되는 식을 우리는 원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아침에 이 집사님이 이야기하시는데 차에 네비게이터가 있는데 눈이 와서 알아보는데 네비게이터가 세상에 ‘논둑으로 좌회전하시오.’ 이렇게 나오더란 말이죠. 눈이 막혀서 네비게이터가 논둑으로 빠지라는 거예요. 분명히 구원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가 아닌데 사람이 어디를 찾아갈 때는 반드시 좌표 상 찾아가게 돼 있어요. 그런 버릇을 여전히 가지면서 교회를 나왔기 때문에 듣고자 하는 것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주님 기다릴 때 기름 준비해서 몇 시에 어디 가서 하면 주님이 잘 보입니까? 시원하게 알기 쉽게 아쌀하게 이야기 해달라.‘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주님께서는 그 시간 공간을 뜯어냅니다. 왜, 도배를 해야 되니까. 도배를 할 때 뜯어내고 구들장 다 뜯어내고 도배를 합니다.
그 뜯어내는 구들장 중에 하나가 오늘 본문 1절에 나옵니다. 니느웨에 대한 경고, 그것도 중한 경고. 니느웨라 하는 것은 지명입니다. 무슨 지명이냐 하면, 앗수르라는 거대한 나라의 수도를 니느웨라 하는데, 사실 행정적인 수도는 아닌데 대표적인 도시로서 앗수르의 나라의 니느웨가 등장합니다. 앗수르 나라가 지금 쯤 어느 좌표 어느 지점 지리상 어느 지점을 차지했느냐 하면, 이란, 이라크, 터키, 시리아, 요르단, 이스라엘, 기껏 조금 남아 있는 것이 남쪽 이스라엘, 남쪽 조금 남아있고 북쪽은 다 차지한 거대제국입니다. 그건 제국이라 할 수 있죠. 엄청났습니다.
그 큰 나라의 그 다음 나라가 그 큰 나라를 그대로 삼킨 나라가 바벨론, 바벨론을 그대로 삼킨 나라가 메대로 바사(페르샤)나라, 바사 나라가 그대로 삼킨 나라가 헬라-마게도니아, 헬라-마게도니아가 그대로 삼킨 나라가 로마, 성경은 로마에서 끝이납니다. 왜냐 하면 예수님께서 구원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구원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가 아니다.” 할 때까지는 인간들은 하나님 계시는 곳,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장소를 항상 시간적 공간적으로 ‘어딥니까? 몇 시입니까? 언제 오십니까?’ 그런 시간과 공간을 유지하기 때문에 지금 그걸 뜯어내는 작업 중에 하나로서 하나님께서 앗수르에 이렇게 경고를 보내시는 겁니다.
“여기 있다. 저기 있다.”가 성립이 안 되려고 하려면 여기에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해요. 어떤 조건이냐 하면, 앗수르라는 나라가 있다가도 없어졌으니까, 앗수르(BC 744-612) 나라가 옛날 나라에는 연도를 계산할 때 자기 나라가 항상 영원할 줄 알고 자기 나라 제국 할 때부터 1년, 2년 그렇게 계산을 해요. 그런데 니느웨 나라가 통째로 바벨론 나라로 날아 가 버린 게 이게 예수님 오시기 전 BC600년 경인데, BC612년에 바벨론에 멸망하고, 바벨론이 멸망한 것은 BC539년에 멸망하고 그 다음에 바벨론 멸망하고 난 뒤에 메대 바사가 BC331년에 멸망합니다. 그러한 연도에서 바뀌게 되면 우리가 ‘있다’ 는 것이 ‘없음’으로 바뀌어야 되죠. 앗수르(BC612)☞바벨론(BC539)☞ (메대, 바사(BC331)☞ 헬라-마케도니아(BC168)☞로마
그러면 생각을 이렇게 해봅시다. 있는데 없다고 생각하지 말고 이렇게 생각해야 돼요. 왜 처음부터 없어야 되는데 왜 있느냐, 이렇게 생각을 한번 해보자 말이죠. ‘내가 여기에 있다.’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내가 원래 없었잖아. 없는데 내가 왜 있지?’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없는 내가 왜 있느냐?‘ 그건 언제든지 죽일 수 있고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없앨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없애는 타이밍이 언제냐 하면, 그냥 없어지면 안 되고, 하나님의 속성을 듬뿍 안고 없어져야 돼요.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기했느냐 하면, 구원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가 아니라 했다 말이죠. 그러면 ’나는 여기 있습니다. 저기 있습니다.‘ 라는 인간은 다 가줘. 나는 여기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고, 하는 그것은 ’내 소관이 아닙니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어야 돼요.
그렇다면 구원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 가 아니면 구원은 어디 있느냐, 바로 ‘여기 있다.‘가 없어질 때 하나님의 속성을 듬뿍 담고 나타나고 사라진 그러한 모습으로 구원은 거기 있는 거예요.
예수님은 분명이 이 땅에 오셨다가 없어졌거든요. 그런데 다른 사람은 왜 있는지, 왜 없는지 모르는데, 예수님은 계시다가 없어짐으로써 십자가를 남겼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나님은 진노하시는 하나님이면서도 그 다음에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이시다.’ 라는 양쪽의 속성을 다 보여주는 유일한 분입니다. 죽을 때는 죄로 죽었다가 살릴 때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리신 그 증거가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게 처음이었습니다. 분명히 죽었는데 사흘 만에 다시 등장했어요. 이것은 ‘예수님 여기 있네. 예수님 저기 있네.’ 이게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 하나는 하나님이 공의로운 하나님이고, 하나님이 자비로운 하나님이다. 그것을 듬뿍 담고 있다면 그 지점이, 그러한 현상이 같이 일어나는 그런 순간이 바로 우리가 구원받는 순간 이예요. 내가 구원되는 것을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이 품고 있던 그 속성, 그 성질이 무엇입니까? 그걸 접촉하는 순간이 구원받는 순간이다 이 말입니다.
아브라함 같은 경우에 봅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무슨 속성을 받았느냐 하면 아브라함은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자를 살렸다. 로마서 4장에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자식이 없었는데 나중에 이삭이란 자식이 생겼어요. 아브라함은 이것을 ‘내 자식이 생겼다. 나에게 자식이 있다.‘ 이렇게 이해한 것이 아니고, ’아! 하나님은 이런 일을 행하시는 분이구나.‘라고 믿을 때 아브라함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라는 구원이 바로 자기 자신이 바로 구원이 현재 일어나고 있는 속성이 듬뿍 담긴 그 인생을 살고 있는 거예요.
자식이 없는데 있었다. 그 다음에 그 자식을 바치라고 했다. 왜 멀쩡한 자식을 바치라고 했을까? 모르겠는데, 일단 바쳐보자. 바쳐보니까 옆에 수양이 있어서 대신 잡아라. 처음부터 ‘네 아들 바칠 때 숲 속을 잘 살펴봐라. 혹시 수양이 한 마리 있을 거다.’ 이렇게 생각했다면 아브라함은 아무 염려 없이 그냥 바쳤을 거예요. 그러나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 수양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그 다음 조치에 의해서 수양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미처 몰랐습니다. 그러니까 이삭이 없다가 있고 죽었다가 살려내는 것은 그건 이삭을 바치는 걸 통해서 하나님의 속성이 자기에게 전달된 거예요. 그걸 동시에 아브라함은 그 속성과 이렇게 어뎁터로 연결된 겁니다.
그렇다면 내가 왜 있는가? 이것은 하나님의 속성과 하나님 성질을 보여주기 위해서 내가 여기 있는 게 돼요. ‘더 살아야지. 죽으면 안 돼.’ 이게 아니라 ‘이상하다. 내가 왜 이렇게 되지? 내가 밥이나 축내려고 있는 건 아니고 그렇다고 오래 산다고 천년만년 사는 그것도 아니고, 그런데 왜 내가 있지? 아! 내가 있다는 자체가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은 이런 분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있는 거구나.’ 그걸 깨닫게 된 겁니다. 그런 점에서 보시고.
오늘 본문 한번 봅시다.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이게 어디 나타났는가, 니느웨라는 특정 나라, 앗수르 나라에 이걸 내세웠습니다. 앗수르 나라가 망했다는 걸 좋아하시면 안 되고, 앗수르 나라를 망하게 하실 때 앗수르 나라가 어떤 죄를 지어서 망했느냐, 그걸 보시면 안 되고, 앗수르 나라가 망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거스리는 자에게 보복하시고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이런 속성을 하나님께서 화도 잘 내고 복수도 잘하고 노하기도 잘하시는 그런 분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앗수르가 있었다가 망한 겁니다.
그러면 이 성경을 보면서 우리는 횡재한 거예요. ‘아! 하나님은 있다는 것도 언제든지 없앨 수 있는 분이구나.’ 그거 아시면 우리는 어뎁터로 연결된 거예요. 앗수르 나라와 현재 오늘날 우리 자신과 연결되면서 하나님은 복수도 하시고 진노도 하시고 그리고 분노하시고 하나님은 벌주시고 노하시는 하나님이시구나.‘하는 것이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살아있는 이유가 ‘하나님은 노하시고 분노하시고 진노하시고 벌주시고, 하나님은 바람같이 때려주시고 그렇게 하시는 분입니다.‘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라는 것이 이 땅에 있는 겁니다.
그 다음에 출애굽기 33장 19절을 보겠습니다. 거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히 여기느니라” 이렇게 돼 있어요. 여기는 은혜라는 말이 나오고 긍휼이란 말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 가지고 또 오늘날 우리가 있다는 것과 한번 연결해 보는 거예요. 연결해 보면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이 말입니다.
제 말이 어려운 것은 왜 이 말이 자꾸 어렵게 들리느냐 하면,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하나님, 내가 하나님의 어떤 속성을 알면 내가 구원받습니까?’라는 생각을 갖기 때문에 제 말이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내가 뭘 알면 구원받습니까?’ 해버리면 그런 하나님은 없어요. 아주 충격적인 말이지만 나를 구원하는 하나님은 없습니다. 그냥 구원을 벌이시는 하나님은 계시지만, 나를 구원하는 하나님이 없어요.
하나님의 일에 우리가 그냥 말려든 거예요. ‘나는 뭘 하면 구원을 얻겠습니까?’라고 내가 여기 있고, 또 뭐 하나 챙기고, 그런 심보로 살게 되면 인생사는 게 힘들어요. ‘하나님의 은혜대로 내가 여기 있구나. 하나님의 분노를 보여주기 위해서, 화내시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내가 여기 있구나.’ 항상 원인을 하나님 쪽에 두고 우리는 그냥 결과물로 두게 되면, 세상에 걱정할 거 하나도 없어요.
요즘 시장 같은데 보면 대구 할머니들 걱정이 늘어졌습니다. 어떤 할머니는 지하철에서 고함을 지르면서 ‘요즘 젊은것들이 어른 섬길 줄도 모르고 길도 안 가르쳐주고.’ 고함지르면서 끝에 하는 말이 ‘그러니까 너희들이 박OO를 찍어야 돼, 우리가 다 누구 덕분에 사는데. 박OO 덕분에 살았는데.’ 지금 지하철에 80넘은 할머니가 그렇게 이야기해요. 제가 그 소리를 듣고 우리가 평소에 저렇게 사니까 힘들은 거예요. 왜냐 하면 만약에 박OO 안 되면 어떻게 합니까? 걱정이 늘어진다 말이죠. 세상이 나한테 짜 맞춰야 됩니까? 나는 영원한테 세상은 없어집니까? 그런 건 없어요. 세상도 영원하지 않고 없어지고 나도 없어지고 둘 다 없어져요. 남는 것은 뭐가 남는 겁니까? 분노하시는 하나님과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만 있으면 돼요. 더 줄여서 이야기할게요. 하나님만 계시면 되는 거예요.
사랑이 뭐냐, 유행가에도 사랑은 나오지만 저는 사랑을 이렇게 봐요. 사랑은 얼굴만 쳐 다 보는 게 사랑이라고 봐요. 아무 소리도 안 하고 그냥 얼굴 쳐다보면 사랑이고, 얼굴 안 쳐다보면 미운 것이고, 부부간에는 얼굴만 쳐다보면 돼요. 뭐 ‘나 너 사랑해.’ 해도 그 말이 수상해. 사랑이 없다는 증거 같아. 그냥 얼굴만 이렇게 쳐다보기만 해도 그걸로 만족한 것. 요새 권사님 그렇게 살아가십니까?ㅎ 그냥 아무 소리 안 하고 얼굴만 쳐다봐도 더 이상 부러울 게 없는 것. 요새 나이 들면 얼굴 피하기 바빠요. 전부 다 얼굴 안 보고 TV만 보고 있지. 상대방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자기 얼굴을 볼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나에 대해서는 볼 필요도 없고 내 얼굴은 볼 필요 없고 내가 사랑하는 이가 있음에 나는 그걸로 나는 거기에 딸려간다. 그 사랑에 딸려가고 그 은혜에 딸려가고 그 긍휼하심에 딸려 가면 되는 거죠. 하나님의 사랑의 긴 꼬리고 긍휼의 긴 꼬리로서 내가 뒤에 딸려 가면 개코 원숭이처럼 딸려가면서 붙들려 있으면 된다 이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의 꼬리고 분노하심의 꼬리로 살면 되는 거예요.
‘어떻게 해야, 뭘 믿어야 구원받습니까?’ 맨날 구원받는대. ‘뭘 어떻게 해야 행복합니까?’ 네가 왜 행복해야 되는데? 하나님이 먼저고 우리는 그냥 뒤에 따라오는 하나님의 긴 그림자인 거예요.
그런데 이 니느웨라는 이런 이방나라의 특징이 뭐냐, 내가 여기 있음에 절대로 내 제국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애굽에 이런 신화가 있어요. 애굽에 오시리스라는 신이 열심히 이 땅에서 활동을 하는 신이라 자기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세트라는 자기 동생이 있는데 그 동생이 형의 왕의 자리를 탐을 내서 황금으로 딱 상자를 만들었어요. 만들고 난 뒤에 ‘이 상자에 딱 맞으면 이 상자를 공짜로 주렵니다.’ 하니까 황금이 탐이 나니까 ‘상자 나 줘.’ 하니까 ‘그럼 상자에 맞나 들어가 봐야 맞는지 알지. 맞나 들어가 보세요.‘ 형이 들어가니까 동생이 뚜껑을 딱 닫아서 못질을 해서 죽였어요. 그래서 그 부인되는 이시스가 죽은 남편과 동침해서 호루스라는 아들을 낳아요. 호루스가 삼촌 되는 세트에게 복수하는 그 내용이 애굽의 건국신화입니다.
이것은 뭐를 의미하느냐 하면 국가라 하는 것은 법에 딱 맞아야 돼요. 왜, 내가 만든 법이기 때문에. 사람이 사는 게 힘든 것은 자기가 자기를 위해서 법을 만들어 놓고 그 위에 자기가 거기 눕혀 놓고 자기가 자기한테 못질을 하는 게 아니고 마귀가 못질을 하죠. 마귀에게 스스로 못질을 당하는 식으로 사니까 이 인생이라는 게 얼마나 힘이 듭니까? ‘나는 있어야 돼.’ 왜? ‘내가 여기 있거든.’ 자꾸 내가 없을 경우가 있다는 걸 생각 못하고 내가 있어야 되니까 있어야 된다고 우기니까 이거는 나오는 게 자기 속성밖에 안 나와요. 자기가 분노하면 자기 분노, 자기가 사랑하면 자기 은혜, 전부 다 세상을 자기에 맞춰서 사니까, 국가가 원래 그래야 되지만, 그게 문제예요. ‘박OO 찍어야 돼.’ 이런 식으로 나온다는 것은 그것은 그야말로 박OO 세상으로 만드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정치 앞두고 이런 설교가 안 좋은 건 알지만.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그저 자기 있음을 그것이 진리가 돼서 살아간다는 그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은 뭡니까? 하나님의 속성이 우리 있음보다 더 우선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은혜 받기 위해서 있고, 앗수르는 멸망하기 위해서 있고, 우리는 두 가지를 알게 되면 그 속성이 우리 안에 작용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과 연결돼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얼굴을 쳐다보는 그런 사랑의 백성인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우리만 생각했습니다. 다시 세상을 보고 하나님을 생각해서 하나님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우리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살려두시는 이유는 주의 속성을 증거 하라는 이유인 줄 알고 맘껏 살아있으면서 있을 동안에 하나님 사랑을 말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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