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강-에스겔7장 1-6(끝났도다)121205-이 근호목사
17강-에스겔7장 1-6(끝났도다)121205-이 근호목사
이름 : 오용익(IP:183.105.212.7)
17강-에스겔7장 1-6(끝났도다)121205-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7장 1절에서 6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56페이지입니다.
에스겔 7:1-6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 인자야 주 여호와 내가 이스라엘 땅에 대하여 말하노라 끝났도다 이 땅 사방의 일이 끝났도다 이제는 네게 끝이 이르렀나니 내가 내 진노를 네게 발하여 네 행위를 국문하고 너의 모든 가증한 일을 보응하리라 내가 너를 아껴 보지 아니하며 긍휼히 여기지도 아니하고 네 행위대로 너를 벌하여 너의 가증한 일이 너희 중에 나타나게 하리니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재앙이로다, 비상한 재앙이로다 볼찌어다 임박하도다 끝이 났도다, 끝이 났도다, 끝이 너를 치러 일어났나니 볼찌어다 임박하도다.”
이 땅이라는 것이 그냥 우리가 주저앉아서 집 짓고 농사짓고 살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땅이 우리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하나님의 말씀 입장에서 이 땅을 보게 되면 그 땅이라는 것이 바로 심판이 감행되는 땅입니다. 심판이 감행되는 땅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4절에 중요한 말씀이 나와요. 땅이 있는데 이 땅은 우리가 밥 먹고 살라고 있는 땅이라고 우리 중심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말씀 중심으로 보게 되면 땅은 우리보고 살라고 주신 땅이 아니고 4절 끝에 보면 “네 행위대로 너를 벌하여 너의 가증한 일이 너희 중에 나타나게 하리니.”
평소에 이 땅위에서 인간들의 살아가는 모든 행위가 원래 땅의 취지와 부합되는지 아니되는지를 드러내는 바탕이 본래 땅의 존재이유라는 겁니다. 그러니 말씀에 대해서 관심 없고 말씀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상당히 그 말이 생뚱맞은 말이 되는 거지요. “어, 땅이 있네. 집짓고 밭 갈고 살자.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살자.’ 하나님께서는 “누구 맘대로?” 누구 맘대로 네가 그 땅에서 살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느냐는 말이지요. 이 땅은 네가 평소에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과연 제대로 살았느냐를 완전히 까발림 당하면서 낱낱이 들춰내는 하나의 덫이라 할까요, 하나의 연극무대라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땅이라는 겁니다.
그 땅을 우리 입장에서 우리 중심으로 생각하는 그 땅 개념자체를 심판이 임하지 않으면 누구도 알 수가 없어요. 시편에도 그런 말씀이 나옵니다만 “하나님이 있으면 날 심판해봐.” 하는 식으로 어리석은 자들은 하나님이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없다는 말은 우리는 누구로부터도 심판받지 않는다는 겁니다. 히브리서 9장에 보면 병원에 갈 때마다 자주 인용하는 대목이 나와요. 특히 불신자에게는.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일이고 그 뒤에는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대목입니다.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들으면 ‘하나님이 뭔데 나를 심판해.’ 라고 생각하는데 제 생각은 그것이 아니고 심판이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당신이 존재한다, 저는 이렇게 보는 겁니다. 심판의 안목가지고 봐야 돼요.
‘끝이다. 종말이다. 야, 종말을 이겨야지.’ 종말을 이겨야 되는 것이 아니고 종말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가 다루어지는 겁니다. 주인과 객이 바뀌면 안돼요. 말씀이 주인이고 말씀이 우선이고 우리는 그 말씀이 말씀답게 진실인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이땅에 태어나야 했다는 말이지요. 죽는 것은 우리입장에서 아쉽겠지만 죽고 사는 것은 항상 말씀과 엮여져야 죽어도 죽는 이유를 알고 살아도 사는 이유를 알고 태어나도 태어나는 이유를 아는 거예요. 그런데 말씀을 듣지 않고 말씀을 멀리해 버리면 남는 것은 결국 나 중심, 그것밖에 모릅니다.
자기중심이면 사람들은 자기 존재를 자꾸 상상하고 가정을 합니다. 내가 여기 있다, 라고 가정을 하지요. 지난 월요일 공부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내가 여기 있는데 여기 있는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지킵니까?’ 라고 할 때 이미 그 사람은 자기 존재를 자기 맘대로 가정을 해 놓았어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나는 누구입니까?’라고 보지 않고 내가 여기 있는데 여기 있는 나라는 인간이 어떻게 잘 되는 방법 중에 하나가 말씀 한번 지켜볼까, 이런 식으로 간다면 이것은 말씀에 반대로 가는 거예요.
말씀에 반대로 가면 이것은 마귀 짓이지요.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따먹고 난 뒤에 천국가는 방법은? 이것은 선악과 입장에서 보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요. ‘선악과 따먹었는데 실수 했네. 이미 따먹은 것은 할 수 없고 이제는 슬슬 생명나무과일로 한 번 가 봐야지.’ 이것은 우리 생각이거든요. 이미 선악과 따먹은 이상 생명나무 가는 길은 끊어져 있습니다. 끊어졌다고 말씀이 이야기를 분명히 해도 우리는 기어이 그 생명나무를 따먹으려고 하는 그 탐욕은 뭐냐는 말이지요. 생명나무에서 끊어졌으면 ‘아, 나는 생명나무에서 끊어진 채로 있구나. 영생은 우리하고 해당사항이 없구나.’ 하고 알면 그것이 말씀 입장에서 옳은 것인데 ‘아이고, 그래도 이왕 이렇게 된 것 영생은 얻어먹어야지.’ 이렇게 나온다는 것은 뭔가 말씀과는 정반대로 반격을 가하고 말씀에 불만을 갖고 있는 세력의 조종을 받았기에 그런 성질을 드러내는 겁니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끝났도다, 끝났도다, 끝났도다,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우리 좋으라고 하신 말씀이 아니지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종말이 온 겁니다. 종말이 왔다면 그 동안 우리가 땅에서 살아온 것이 공짜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고 해서 그 은혜가 공짜가 아니에요. 그 은혜라는 것은 우리쪽에서 뭔가 값을 치르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값을 치르고 난 뒤에 우리에게 주어진 공짜 은혜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진짜 아는 사람은 공짜다, 이것만 좋아하지 말고 공짜로 주어질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공짜가 주어졌지, 하고 그 값을 치른 현장을 찾아가야 되는 거예요.
악인들은 이 땅에서 살 가치도 없는데 하나님께서 공짜로 살게 하시는 것은, 햇빛과 공기를 주시고 공짜로 은혜를 주신 것은 값을 이미 치렀다는 거지요. 값을 치렀으면 종말은 왜 있는가, 값을 치렀으면 끝까지 살려주지 왜 끝이라는 말을 몇 번씩 왜 하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은혜를 주신 것은 우리를 살리려고 은혜를 주신 것이 아니고 그 은혜가 은혜답게 주어지기 위해서 값을 치르신 그 분이 누군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 잠시 살다가 가는 겁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을 자격이 못돼요.
그런데 한껏 공짜로 은혜를 선물로 받습니다. 선물로 받으면 우리는 죄밖에 질줄 모르는데 왜 이렇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나, 라고 물어가면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주시게 된 그 원천, 그 근거를 우리가 찾아가 봐야 되지요. 찾아가게 되면 죄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은혜가 오도록 중간에 뭔가는 희생하신 분이 계시다는 말이지요. 이 말은 뭐냐, 종말의 목적이라 하는 것은 그 희생의 공로를 최종적으로 완전하게 영원토록 높이기 위해서 종말이 주어진 거예요.
성경에서 끝이라 하는 것은 그냥 모든 것을 없앤다는 의미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끝이라는 것은 다 이루었다는 의미에서 끝이에요. 다 이루었다고 하면 우리 입장에서는 계돈도 안탔는데 뭐가 다 이룬 것인가, 또는 우리 딸이 시집도 안 갔는데 어떻게 다 이루었나, 맨 날 이런 것만 생각하거든요. 주님 입장에서 다 이루었다는 것은 내 사적인 욕망을 다 이루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마지막 때 땅위에 살면서 그 은혜가 된 값을 치른 고마운 사랑, 애틋한 기대감, 그런 것은 없고 그냥 은혜라는 것을 자기 욕망을 위해서 이용하는데 급급한 거예요.
그러다 보니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 하면 하나님을 대할 때 은혜로 오신 하나님, 이라고 해놓고는 값을 치른 분을 경과하고 그것을 앞장세워서 하나님과 교제가 되어야 하는데, 쉽게 말해서 중보자를 통해서 하나님을 봐야 되는데 얻어먹고 받아먹기 급급해서 예수님 없이 그냥 하나님 감사합니다. 사업 잘 되서 감사합니다, 차사고 날 뻔 했는데 안 나서 감사합니다, 병나서 죽을 뻔 했는데 좋은 의사 만나서 안 죽게 돼서 감사합니다.‘ 해서 중보자가 빠진 채 신에게 감사하고 신을 좋아한다는 말이지요.
중보자가 빠진 채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원망한다든지 해버리면 결국 그 사람은 뭘 놓치느냐 하면 진정한 이 마지막 때에 주의 은혜로 산다는 그 종말의 취지를 결국 놓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마지막 때에는 뭘 보느냐 하면, “너희들이 이 마지막 때에 저주를 받고 징벌을 받아야 되는 이유가 중보자가 없는 신을 찾았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우상이거든요. “값을 치른 적이 없는 신을 너희가 임의로 정했는데 내가 값이 없는 경우에는 얼마나 혹독한 저주를 받는가를 진짜 그 값을 값되도록, 그 값이 빛이 나도록 하기 위해서 무서운 저주가 주어진다.”는 겁니다.
지옥은 천국과 대비되는 거예요. 천국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는지를 말해주기 위해서 지옥이 있는 겁니다. 중보자의 공로와 은혜와 중보자의 사랑과 자비가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한껏 보여주기 위해서 지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은혜와 자비가 없는 자들에 대한 혹독함, 그러니 세상 끝 날이 필히 있어야 됩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의 종말이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 먼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모든 것이 끝이라고 이야기해주는 겁니다.
끝이라고 이야기할 때 남은 문제는, 선지자가 세상의 종말을 이야기할 때 사람들의 평가, 반응은 어떻게 되느냐는 겁니다. 사람들이 끝이라고 하는 것을 듣게 되면 사람들이 그 끝을 넘어서려고 시도를 하게 됩니다. 끝이면 그 끝을 뛰어넘어서 그 끝 뒤에도 살아남겠다는 시도와 생각을 갖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불가능성을 품고 언급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인간들은 하나님이 말씀을 주게 되면 자기가 지킬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해서 자꾸 그것을 준수하려고 해요. 그런데 성경말씀은 인간이 불가능합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는 말이 가능한 이야기가 아니고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다는 뜻이에요.
기독교 2천년 역사가운데서 이런 이야기를 저는 잘 못 들어봤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그 사랑의 하나님의 예수님을 보내줬기에 예수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이렇게들 이야기하는데 예수 믿을 수 있는 능력이 우리한테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일종의 약을 올리는 셈이 되지요. 우리가 믿을 수 없는 분을 보내놓고 믿으라 하니 이것은 ‘결국은 내가 사랑을 해도 너희들이 사랑을 받지 않았잖아.’라고 닦달 낼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한 것 밖에 안 되는 거예요. 로마서 3장에서 분명히 이야기하지요. 말씀을 준 것은 우리의 입을 막고 우리를 저주하기 위함이라고 분명히 언급했는데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몰라요.
로마서 3장에서는 모든 인간은 거짓되고 하나님은 참되시다, 라고 나오잖아요.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이 아무리 좋은 말씀을 줘도 그것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의 죄 속에서는 나올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해석도 안 되고 제대로 취지도 모르면서 믿어봤자 그것이 믿는 것이겠습니까? 안 믿는 것이고 자기 맘대로 믿는 것이지요. 인간은 자꾸 가능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듬뿍 잡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가능성이 아니고 불가능성으로 나오는 거예요. 불가능성으로 구원을 이야기하고 종말을 이야기하고 마지막을 이야기할 때 인간은 여기서 그것을 가능한쪽으로 해석해서 자기의 선택된 행동을 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했던 하나님의 기대치입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종말은 인간의 선택에 의해서 나타나는 거예요. 제가 어려운 말 말고 쉬운 말로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처녀가 열 명이 나와요. 그 중에서 신랑을 맞이하지 못한 처녀들이 나옵니다. 그들이 왜 맞이하지 못했느냐 하면 기름을 준비하지 않아서 맞이하지 못했거든요. 그런데 이 이야기가 아주 황당한 이야기에요. 생각해 보세요. 어떤 아가씨하고 총각이 사귀었다. 결혼식 때가 되었다. 그런데 총각이 아가씨한테 부탁을 해놓은 것이 있어요. 결혼식 할 때 부케를 만들어서 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가씨가 바쁘다 보니 깜빡 잊고서 그만 부케를 잊었습니다. 그러면 주례가 “당신의 신부가 맞아요?” “아닙니다.” “왜?” “부케가 없잖아요.”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사람보고 결혼하지 부케보고 결혼합니까? 아니잖아요. 사람보고 결혼하지 기름보고 결혼합니까? 기름이나 살다가 모자라면 주유소에서 또 사면되잖아요. 영 호응을 안 하는 눈치들이신데. 신랑 보고 결혼하지 기름 붙들고 결혼하는 여자 봤습니까? 잠 잘 때 기름 붙들고 잠 잡니까? 기름 붙들고 자면 애 생깁니까? 말도 안 되는 거잖아요. 결혼식에서 남편, 신랑이 중요한 겁니까, 기름이 중요한 겁니까? 신랑이 더 중요한 거잖아요.
성경 보면서 그런 생각이 안 들던가요? 이게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이야기라는 것이. 제가 분명히 이야기했어요. 모든 성경은 인간의 불가능성을 담고 있다는 말이지요. ‘신랑이 기름 준비하랬어. 그러니 기름 준비하면 되겠네.’ 이것은 성경해석 잘못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신랑이라면 “너는 기름보고 결혼했어, 나보고 결혼했어?” 하고 따질 겁니다. 예수님께서 다섯 처녀, 또 다른 다섯 처녀를 나누어서 기름 준비 못한 쪽은 혼인잔치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마지막 때라는 것은 시간 정해놓고 오시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하늘나라 이야기고 이 지상의 마지막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마지막이라는 소리를 들을 때 어떤 반응을 나타내느냐의 인간선택 여하에 따라서 그때마다 종말이 새로운 양상을 띄고 나타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인간하고 시소게임을 하고 있는 겁니다. 왜, 인간 속에 들어 있는, 인간배후를 장악하고 있는 세력과 영적전쟁을 벌이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은 자기배후에 악마가 없다고 여기고 “말씀만 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말씀만 하신다면 우리의 가능성을 총동원해서 주의 말씀을 붙잡아서 그것을 나에게 필요하고 적용되는 실질적인 진리로서 채택하겠습니다.”라고 채택을 하고 선택을 해요. 어떤 결정을 내리고 판단을 내린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 판단과 결정을 피해가는 방식으로 주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왜, 우리가 판단을 내리고 결정을 해버리면 그것은 항상 이미 우리의 가능성 안에 포함이 된 내용이기에 그렇습니다. 다시 말씀드릴게요. 하나님께서 종말을 시행 한다는 것은 사람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고 우리가 진작 저주받아야 될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분이 우리 죄를 대신 갚아줬기 때문에 은혜를 그냥 무상으로 주신 거예요. 선인과 악인과 관계없이 그냥 무상으로 주신 겁니다. 그런데 종말이라는 것은 뭐냐, 마지막 때에 모든 은혜가 우리 노동의, 우리 행함의 대가가 아니고 어떤 분의 희생의 대가로 거저주신 은혜라는 것을 온 우주에 밝히 보여주는 그 시점이 바로 종말인 겁니다.
종말이 언제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종말에 우리가 지옥 갈 것인가 천국 갈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종말은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누구십니까? 우리 죄를 대신 하신분이, 누구십니까? 우리가 공짜로 의를 얻도록 대신 희생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관심사가 그분의 공로와 그분의 은혜의 행함에 관심이 모이고 쏠려야 된다는 말이거든요. 그것이 종말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종말 이야기를 해도 인간은 관심사가 주님한테 있는 것이 아니고 ‘나는 그 종말에서 살아남는 자가 되어야지.’ 하는,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안목을 가지고 종말을 생각하는 거예요.
종말의 날짜계산, 종말의 스케줄, 이게 지금 모든 이단들, 한국교회 다 마찬가지지만, 이게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는 거거든요. 하여튼 궁금한 것이 뭐냐, ‘내가 무슨 일을 하면 종말에 살아남겠습니까?’ 하고 나오는 거예요. 그런 인간은 예수님에 가 있는 종말의 그 말씀의 취지를 자기 살아남기 위한 용도로서 말씀을 자꾸 가지고 오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들은 자기가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다 동원하는데 그 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끄집어내봐라.” 하고 끄집어내는 그 가능성을 다 피해 가버리면 구원받고자 시도하다가 ‘왜 하나님은 내 뜻대로 안 해주나.’ 하고 삐질 것이 아닙니까?
바로 그 ‘하나님이 싫어. 예수님도 싫어. 하나님은 왜 내 뜻대로 안 해주는데?’ 하고 삐질 때 그게 바로 오직 예수님의 공로만 딱 드러나는 시점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종말은 모든 인간에게 다 종말이에요. 어떤 인간도 그 종말을 뛰어넘을 자격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은 창세기 4장 24절에서 어떤 인간도 생명나무를 당당하게 따먹을 자격자가 없다는 말이에요. 생명나무 가는 길을 막아놓고 차단시킨 주님의 취지가 마음껏 드러나 줘야 그것이 말씀의 바른 해석입니다. 모든 인간은 선악과 따먹었다. 생명나무 끝났다. 못 따먹는다. 이런 취지가 바짝 올라와 줘야 돼요.
그렇다면 마태복음 25장에 기름 준비한 그 아가씨 다섯 명은 어떻게 구원받았는가? “기름 준비해서 구원받았잖아.” 하는데 기름준비해서 받은 것이 아니고 주님 보시기에 기름을 다섯 명이 준비할 때까지 기다린 거예요. 사람의 행동의 여부를 보고 종말이 찾아오는 겁니다. 양과 염소를 나눌 때 누구든지 자기를 양이라고 생각하고 자기는 천국 간다고 여기고 자기가 지옥 간다고 여길 사람은 아무도 없거든요. 하지만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것은 인간의 선택과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의 선택이 일방적으로 주어집니다.
인간의 선택 자체는 인간의 가능성에서 나왔고 예수님의 선택은 인간의 가능성을 뿌리치고 나왔거든요. 인간의 가능성과 섞이지 않은 독단적인 아버지와 아들의 선택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사항이라는 말이지요. 그 두 개를 섞으면 안 됩니다. 섞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기름 준비한 그 다섯 처녀는 어떻게 기름을 준비했는가? 신랑의 은혜로, 하나님의 은혜로 기름 준비 된 거예요. 그것을 본인들도 알아요. 그 이야기를 제가 어느 책에서, 『복음이냐 교회냐』라는 책에서 했지요. 여섯 번째 아가씨가 아직 들어가지 않았을 시점, 그리고 다섯 번째 아가씨가 기름준비 할 때까지 계속 기다린 겁니다.
그 뒤에 나오는 비유, 흔히 말하는 달란트 비유라고 하지요. 열 달란트, 다섯 달란트, 한 달란트, 문제는 주인이 언제 들이닥치느냐 하는 겁니다. 5년 뒤에, 10년 뒤에, 언제 들이닥친다 하는 것은 그 종들이 평소에 하는 행동에 따라서 그 시점이 결정되는 겁니다. “내가 출장 다녀 올 테니 너희들이 일 잘해라.” 하고 가자마자 키 놓고 갔다고 금방 다시 돌아오면 그 달란트의 차이가 드러나지를 않아요. 그런데 출장을 너무 오래 가서 그 세 사람이 다 충실한 종이 되어버리면 그 경우에도 돌아올 수가 없어요.
왜? 한 달란트, 다섯 달란트, 열 달란트가 구분이 안 되니까. 적절하게 택한 자와 택하지 않은 자가 구분되는 시점을 노려서 주께서는 오시는 거예요. 종말의 날, 그 날은 하늘나라에서는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하지만 지상에서의 날짜 계산은 인간의 가능성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그 가능성에 맞추어서 불가능성이 마중하는 식으로 말씀이 만나기 때문에 인간들은 종말 날짜 계산하고 자기가 이정도 하면 되겠다는 식으로서는 주님의 종말을 극복할 수 없고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인간의 지혜와 아이디어, 모든 성경해석을 동원해도 그 능력으로 종말에 살아남을 사람 아무도 없어요. 불가능합니다.
그렇더라도 분명히 천국 가는 사람이 많이 있다면 그 사람들은 어떻게 갔나요? 그것을 아주 간단하게 말씀드릴게요. 종말 쪽에서 종말을 뛰어넘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 창세기 3장에서 분명히 선악과 따먹은 자에게는 생명나무가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있어요. 종말 쪽, 이쪽으로 밀어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이죠. 예수님으로부터 출발해서 예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은 종말 쪽에서 천국으로 뛰어넘어가는 사람이 아니고 이미 종말의 영을 받은 사람이 오히려 자꾸 이쪽으로 밀어내는 거예요.
그것이 요한복음 17장에 나옵니다. 14절에 보 면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라고 되어 있어요. 분명이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상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누구와 같이? 예수님과 같이. 예수님은 이 땅에 살아도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분이에요.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종말을 감행하는 그쪽세계에서 이쪽 세계로 밀려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문제는 예수님만 그런 것이 아니고 여기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러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무슨 능력이 있어서? 무슨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고 말씀이 그렇게 했다니까요?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 속에 있으니 그들은 내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 같이 그들, 제자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고 기도하고 있어요. 그러니 성도라는 신분은 구원받을 것이다, 가 아니고 이미 구원받은 자인데 이미 구원받은 자로서 우리 안에 성령과 더불어 있습니다. 성령은 마지막 때 오시는 영입니다. 그 종말의 영이 이미 우리 속을 장악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나는 날마다 죽노라, 했고 이미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고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라, 이 종말이후의 삶을 우리가 살고 있는 겁니다.
우리 같으면 ‘빨리 죽여서 천당 보내지’ 하지만 아직 할 일이 있기 때문에 천국 안 보내고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저들로 하여금 종말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제자들을 기도할 당시에는 데려가지 않고 남겨두신 거예요. 또 한 구절, 마태복음 24장 40절 보겠습니다.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앞에 보면 아무도 종말을 깨닫지 못합니다. 아무도 깨닫지 못해요. 아무도 깨닫지 못하는데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라고 합니다. 둘 다 밭에 있어요. ‘오늘 세시쯤에 종말이 온다 하는데 …….’ “형님, 같이 밭 갈러 갑시다.” “아니야, 세시 반에 주님 오시기로 되어 있어. 난 예배당에 가야 해.” 이렇게 되면 한 사람은 밭에서 지옥가고 다른 한 사람은 예배당에서 구원받았다, 그렇게 되는데 이 본문에 보면 둘 다 밭에 있어요. 그리고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그냥 남겨둔 겁니다.
또 41절에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이것을 마지막 때에, 마지막 순간에 일어날 일이라고 보시는데 예수님 재림할 그 순간일수도 있어요. 하지만 평소에 이 두 여자가 서로 아는 사이로서 평범하게 일상생활을 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 자신은 미처 알지 못하지만, 그냥 밥이나 먹고 살지만 주님 보시기에 ‘내 때가 오게 되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는 버려둔다.’ 하는 것을 이미 다 갖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같은 옷을 입고 같은 밥을 먹고 같은 잠을 자도 주님 보시기에 구원받기로 작정된 사람 따로 있고 버려두기로 작정된 사람 따로 있는 거예요. 어쨌든 둘 다 종말에 대해서는 불가능성을 갖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지옥가고 싶어서 환장한 사람이 아니에요. 지옥 가는 것도 자기 맘대로 못가요. 역시 불가능성이고 마찬가지로 천국 가는 것도 자기가 원해서 가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선택해서 가는 겁니다. 어쨌든 우리가 살아가는 이 모든 것은 말씀에 입각해서 보면 우리는 말씀을 지킬 수가 없는 불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불가능성이라 하는 것은 말씀에 의하면 우리는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주께서 주신 마땅한 조치에요. 우리가 힘들고 어렵고 주의 오실날짜도 잘 계산도 안 되고, 이것은 당연한 겁니다. 어디를 넘봐요, 감히! 선악과 따먹은 주제에 어딜 욕심을 내서 생명나무를 넘봅니까? 이것은 사기 치는 겁니다. 교회 목사들이 사기 치는 거예요. “우리 힘으로는 이 땅에서 구원도 못 받을 뿐 아니라 살아가는 것도 우리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라고 목사가 외치면 교인들이 “그러면 오늘도 우리가 살았고 오늘도 우리가 밥을 먹었는데 누구 덕입니까?” 하면 “십자가 지신 예수님 공로 덕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말씀이 십자가를 일으켰다면 같은 말씀이 안에 들어 있는 사람은 그 말씀이 호응을 하게 되고 동의를 하게 되는 겁니다. 그 사람의 능력이 아니고 말씀이 우리 속에 쏙 들어오면 그 말씀에 의해서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오늘 죽어도 구원받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칭찬받은 종들이나 또 다섯 처녀나 그것은 남보다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주의 말씀이 이미 작업을 벌려놓았어요. “너의 내부는 네가 관리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네 내부를 관리해서 항상 어디가든지 말씀을 잊지 않게” 하시는 겁니다.
‘주여, 마지막 때가 되어도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조치입니다.’ 이것이 성령 받은 기적의 티를 팍팍 내는 겁니다. 끝으로 한 말씀 드릴게요. 자기가 부인되지 않는 상태에서는 어떤 사람도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 지켜서 재주부려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아예 말씀이 먼저고 우리는 말씀에 의해서 다루어지는, 마지막 때가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다루어지는 사람으로 우리 맘속에 늘 말씀이 작용하고 역사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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