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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대전20121129b-마13장(씨 뿌림 비유)34강-이 근호목사자유게시판마태복음

대전20121129b-마13장(씨 뿌림 비유)34강-이 근호목사

이름 : 이한례(IP:203.90.41.16)

대전20121129b-마13장(씨 뿌림 비유)34강-이 근호목사

두 번째 시간 마태복음 13장 해보겠습니다. 성경에서 난해적인 부분을 찾으라면 요한복음도 해당되지만 이 마태복음 13장도 여기 해당됩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그 중에서 제일 어려운 게 씨 뿌리는 비유라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너희들은 밭이고, 나는 농부고, 내 말씀은 씨다. 얼마나 간편합니까? 참 간단하죠. 밭에 주님께서 농부가 와서 말씀이란 씨를 뿌리면 열매를 맺히면 그게 천국이구나. 얼마나 간편해요? 뭐가 어렵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밭을 하나가 아니고 4가지로 나눠버렸어요. 이렇게 4가지로 나눠버리니까 이게 아까 ‘너희는 밭이다.’라고 하나로 되게 되면 뭔가 다 통하는 것처럼 이해가 다 되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4가지로 하니까 이 4가지의 밭을 시간적인 초반단계를 의미하는 것인지, 점차, 점차 시간 따라서 성장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4가지가 서로 다 칸막이처럼 나눠졌다고 한다면 그러면 사람이 죽고 난 뒤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천국과 지옥, 둘 중에 하나잖아요. 둘 중에 한 군데 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4가지로 구분돼 버리면 분류 서랍이 2개가 아니고 4개로 나눠진다는 이야기인지. 너는 지옥 가도 좀 덜 고통스러운 데 간다든지, 이런 식으로 말이죠. 그런 뜻인지.

여기서 어렵다는 것은 뭐냐 하면 밭이 바로 우리라 할 때 밭은 그냥 흙이 있는 토지를 이야기하는 것이고, 무생물 아닙니까? 밭이 우리라 할 때는 우리는 생명체가 되잖아요. 무생물체에서 생명체로 넘어오면서 여기 생명체끼리 통하는 논리가 따로 있을 것이고, 생명이 없는 밭이라는 논리가 따로 있을 것이다 이 말이죠. 밭이 우리라 하게 되면 요건 굉장히 간단한 문제인데 ‘그 밭이 우리구나.’ 이렇게 되는데, 밭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우리로 보면 되는데, 여기 밭이 몇 가지라 했습니까? 4가지니까 이 4가지를 우리라고 하나로 종합해야 될 것인지, 아니면 4가지 종류의 사람으로 할 것인지, 이게 모호한 거예요. 4가지 종류의 사람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한 사람,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인간에게 일어나는 다양성인지, 아침에는 돌밭에 들어가고 오후에는 가시가 있는 가시밭이 됐는지, 저녁 7시에는 다시 옥토가 됐는지, 그 다음날 새벽에는 다시 마귀, 참새가 와서 쪼아 먹는 길가에 떨어진 밭이 됐는지, 도대체 4->4로 되는지 4->1이 되는지 그게 불분명하다 이 말이죠.

그리고 또 문제가 있어요. 씨가 말씀이라 했죠? 우리가 아는 상식에서는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내리면, 아까 처음에 한 걸 하면 예수님은 농부, 말씀은 씨, 우리는 밭, 이렇게 하면 간단할 것 같은데, 씨가 만약에 말씀이라고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시켜 버리면 씨가 허비될 수가 있는 씨를 농부가 뿌릴 수가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해 놓고 ‘아이 씨, 괜히 뿌렸어. 쓸데없는 데다 왜 그렇게 낭비를 했지, 아! 나는 바보 같아. 바보 같아. 그건 뿌릴 필요도 없는데 왜 그랬지? 아이고, 나도 이제 늙었나 봐. 앞으로는 제대로 뿌려야지. 씨앗 값이 얼만데 내가 헛되이 뿌렸어. 아, 참 일도 데데하게 했네.’ 이럴 수가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모든 것은 말씀을 이루지 않고서는 돌아오는 법이 없다 돼 있거든요. 성경에. 그러면 씨를 뿌렸으면 씨가 성취 없이 허비되는 경우가 없다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이라면, 그런 실수나 그런 허점을 보이지 않을 거라 말이죠. 그런데 여기 나오는 씨 뿌리는 비유에서 농부는 뭡니까? 씨를 허비 했잖아요. 씨를 뿌리니까 마귀가 와서 쪼아 먹었죠. 씨를 뿌리니까 잘 된다 싶어서 집에 갔는데 바위가 있어서 드릴로 뚫을 수도 없고 막혀서 뿌리가 안 내려가니까 물기를 못 빨아들여서 위에는 배고프다고 난리고 밑에는 뿌리가 물까지 스며들지도 못하고 있고, 세 번째 씨를 뿌리니까 밭을 잘못 골랐는지 이건 낙하산 타고 마치 가시덤불 내리는 것처럼 들판에 내릴 낙하산이 잘못되어 세상에 가시덤불에 낙하산이 걸려서 자기 몸도 못 가누는데 무슨 열매를 맺어요? 씨앗을 가시가 와서 찔러대는데.

그 다음에 네 번째는 뭡니까? 옥토에 떨어지니까 아이쿠, 씨가 제 솜씨를 발휘해서 맺잖아요. 그럼 처음부터 밭을 잘 고르든지, 아니면 씨를 뿌려놓고 밭을 갈아서 옥토로 만들어서 참새는 후려치고 돌은 골라내고 가시덤불은 제거해서 불태워버려서 옥토로 만들어서 그래서 씨를 뿌리면 씨가 씨 값을 하잖아요. 그러면 농부가 ‘에이, 괜히 뿌렸어. 이런 농부가 4분의 3을 허비했잖아요. 4분의 1로 30배, 60배, 100배 맺었다면 제대로 했으면 120배, 240배, 400배나 건지는데, 그럼 농부의 기쁨은 더하죠. 나중에 농협에서 수매할 때 얼마나 기분 좋겠어요? 목돈 쥐는데. 그렇잖아요.

도무지 예수님의 비유라 하는 것은 우리의 해석을 뭔가 의도적으로 피하시는 느낌이 듭니다. 다시 말해서 너희들은 내 말을 들을 잽도 못 된다는 거예요. 내 말을 해석할 수 없다는 것, 더 나아가서 너희 안에 내 해석을 가로막는 세력이 아직도 여전하다는 사실을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언급하시는 겁니다.

제가 전 시간에 이야기했죠. 우리의 근본적인 죄가 뭐라고요? 가인처럼 내 인생 조진 것은 다 누구 탓이다? 하나님,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면 예수님 당신 탓이다. 물어내, 책임 져. 당신이 뭔데 내 것을 가로막느냐? 요 심보는 창세기 2장, 3장에서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사실을 기록한 이유가 등장하죠. 선악과 따먹었다는 것은 인간 본성이 자기가 관리할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이미 그 선을 넘어섰어요. 선악과 따먹은 자가 그게 아담이고 우리는 어디 안에서만 새끼 친 겁니까? 선악을 따먹은 그 단지, 솥단지 안에서만 새끼 쳐서 나와서 한 번도 그 단지 밖으로 우리는 벗어난 적이 없다 이 말이죠. 아담의 속성을 고대로 빼다 박았는데 그 성질, 그 속성이 어디 가겠어요? 솔직하게 ‘내가 선악과 따먹어서 그 성질로 평생 살아갑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고백하면 되잖아요. 그 선악과 따먹은 그 성질이 하나님 보시기에 마귀의 속성이잖아요. 그 마귀의 속성으로 지금 누구 말 듣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 말씀, 예수님 비유를 듣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농부고 예수님이 씨앗을 우리는 깨끗한 마음이 아니고 그것도 중립적이 아니고 이미 벌써 병들었던 뭐든지 들어오면 다 왜곡하는 거죠.

이걸 한번 생각해야 돼요. 깨진 거울은 항상 붙이지 말라. 본드 가지고. 거울이 바싹 깨졌잖아요. 그거 붙인다고 제대로 얼굴이 나오겠습니까? 금이 죽죽 갔는데, 우리 모든 마음이. 깨진 거울은 포기하면 돼요. 깨진 거울로서 보기 때문에. 제거 언제 그런 예를 들었는데, 이 이야기하면 식상하다 해서 겁나지만 언뜻 생각나는 게 그 예인데 온 가족이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슬픔에 잠겨 있습니다. 그런데 MBC에서 ‘웃으면 복이 와요.’라는 코미디 프로를 했어요. 온 가족이 잠시 웃음보가 터졌어요. 그럴 때 슬픈 마음은 어디 있고, 웃는 마음은 어디 있습니까? 이 거울이 다 깨진 상태거든요.

예를 들어서 엄마가 직장에서 일하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가 왔어요. 애가 라면 끓이다가 냄비를 엎어서 손을 데어서 울고 있는데 이웃 아줌마가 와서 애 우는 소리 듣고 지금 병원에 데리고 가려고 한다. 할 때 엄마가 그 소리 듣고 정신 없어서 택시를 타고 갔는데, 택시 요금이 원래 7800원 나오는 거리인데 7900원 나왔다. 그럴 때 ‘아저씨, 왜 100원 더 나옵니까?’ 라고 내리면서 그 이야기하는 그 100원 따지는 그 거울은 어디 있어요? 애 아픈 거울은 이쪽에 있고 따지는 거울은 따로 있는 거예요. 이게 하나로 통합이 안 되는 겁니다.

왜 여자분들 멋 내다가 미끄러져서 코가 깨질 때 아픈 것은 고사하고 창피하잖아요. 아프다는 거울 따로 있고 나는 폼 유지하려는 거울이 따로 있죠. 이것이 심화되면 이걸 정신분열증이라 합니다. 그래서 프로이드나 라캉학파에서는 깨진 이것을 어디서 종합해서 의식 층으로 올리느냐 하면 무의식 층에서 이걸 종합해서 올라오는데 이걸 종합할 때 대표자가 있어요. 대표자라 할 때 그걸 상징계라 합니다.

상상 계는 어린아이 때 느낀 그대로예요. 바보 같은 거예요. 앞 뒤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이건 그대로 하는 거예요. ‘너 아버지 뭐 하시노?’ ‘우리 아버지 조폭입니다.’ 이런 거. 상상 계는 애들이 있는 그대로, 애들은 거짓말을 못하잖아요. 상징 계는 어른이 시키는 대로,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윤리 도덕이죠. 윤리 도덕이라 하는 것은 항상 사람은 혼자서 못 산다는 것을 염두에 두는 윤리 도덕 이예요.

여러분, 혼자 사는 게 편하겠습니까? 더불어 사는 게 편하겠습니까? 더불어 사는 게 편해요. 혼자 사는 게 편하다 하지만 혼자 살아 보세요. 외로워서 못 살거든요. 더불어 사는 게 편해요. 더불어 살 때는 남들을 고려하고 배려해야 됩니다. 그게 바로 윤리 도덕인데 윤리라 하는 것은 사회윤리, 도덕이라 하는 것은 개인적은 덕성, 윤리와 도덕은 그 차이점이 있는데 큰 차이는 아니고. 그걸 상징계라 하는데 상징계가 무의식에서 대장질해서 깨어진 거울을 기표의 차이라 하는데 기표와 기표의 차이를 주위에서 지금 여기에 필요한 대표적인 상징을 가지고 밀어 올립니다. 그러면 그 순간에 그게 자아 정체성이 돼요. 웃으면서 ‘나 이런 인간입니다.’ 애써 슬픔을 억누르면서 ‘오셨습니까?’ 이렇게 다소곳이, 이게 안 될 때 정신 분열증 이예요. 이게 안 될 때 정신병 이예요.

정신병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악한 게 아니고 다른 사람은 더불어 살기 때문에 이럴 때는 기침해서는 안 되고 이럴 때는 방귀 꿔서는 안 되고 이런 게 있는데 정신병은 그게 없잖아요. 그냥 나오는 대로 한다고요. 정박아도 마찬가지고 그래요. 이런 데서 시키는 그것만 하고 하나를 알면 한 개를 잊어버리니까, 한 개 알면 10개 알면 천재고. 이런 깨진 거울과 거울 사이, 기표와 기표 사이를 이어주는 것은 들었던 것 중에서 지금 필요한 것은 일단 요거 하고 돌아서서는 대성통곡하고 눈물을 훔치는데 인간은 이미 깨진 거울 이예요.

그런데 깨진 거울 상징 계중에서 어른들의 잔소리, 윤리 도덕, 어른 중에는 부모도 있을 것이고 교회에는 목사가 있을 것이고, 그래서 목사를 잘 섬겨라. 하는 것은 우리의 상징 계를 채워줄 사람이다. 이게 너무 깨져 버리면 본인 힘으로 깨어진 두 개가 봉합이 안 돼요. 봉합될 수도 없지만 뭔가 다른 걸 가지고 세워야 그 순간만큼은 잊을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은 사실은 이미 죽음에 함몰되고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이렇게 하셨죠.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고 속에서 나온 게 더럽다 했잖아요. 예수님은 이걸 이미 알고 이 땅에 오신 거예요. ‘예수 믿습니다.’ 까불어도 벌써 알아요.

간음한 여인을 고소할 때 ‘너희들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할 때는 우리보고 하는 이야깁니다. ‘저 사람은 간음했는데 나는 간음 안 하고 있다.’라고 하는 것은 자기의 상징 계를 앞장세우는 것밖에 안 돼요. 이미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는 우리의 악마의 마음은 다 깨어져 버렸어요. 악마가 하나로 봉합이 안 되게 다 깨어 버렸어요.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모든 것이 다 봉합이 되면서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뭘 해도 밥을 먹어도 뭘 해도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주의 은혜 아니면 나는 이 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는 것을 성령을 통해서 성령께서 우리를 죄인으로 규정하고 나서기 때문에 성령 앞에서 신앙생활 잘해보려고 하는 그것도 회개해야 돼요.

자, 계속 이어 봅시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이미 깨진 거울 같은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말을 듣게 돼요. 듣게 되면 아까 로마서 7장에서 주의 율법이 오게 되면 뭘 자극한다? 우리 속에 잠재돼 있던 죄 성을 자극을 한다 했죠. 자극하면서 나름대로의 말씀 앞에서 자기를 정당화 하는 거예요. ‘나는 주의 말씀 알아들었다. 나는 예수님 앞에서 구원받은 사람 맞다. 나는 자기 정립, 자기 조작, 자기 구성을 말씀을 가지고 하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는 네가 네 스스로 네 마음을 정리하고 네가 원하는 대로 주의 백성이라고 조립하라고 주의 말씀 준 게 아니에요. 오히려 깨진 그것이 확실하게 깨졌다는 것을 도리어 자백을 받아내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그게 사는 게 돼요. 주님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잖아요. 병원에 의사에게 올 때 잘난 체 하려고
병원 간 게 아니잖아요. 아픈 것을 숨기지 말고 이야기를 해줘야 한 군데라도 더 치료를 받을 수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이 비유의 말씀은 의사가 환자인 우리보고 지금 앞에 예수님이 가운 입고 우리는 반듯이 앉아 있고 ‘자, 한번 봅시다.’ 하고 청진기 대면서 내뱉는 그 말씀 이예요. 지금 아프다고 내뱉는데 우리는 그거 가지고 ‘저 건강한데 또 뭐 어떡한다고요?’ 이렇게 반대로 마중하듯이 그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한 겁니다.

예수님께서 보리떡 5개 물고기 2마리 가지고 오병이어로 먹이셨잖아요. 그 떡을 준 이유가 뭐냐, 너는 떡만 먹고 싶어 하는 인간이라는 걸 고발하기 위해서 준 떡 이예요. 떡 주고 나니까 ‘야! 이런 수도 있구나.’ 해서 따라왔잖아요.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시느냐 하면 ‘네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 그런데 주님의 원래 뜻이 뭐냐,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고 사는 그 너희들이 바로 누굴 죽인다? 나를 죽을 때 비로소 거기서 나오는, 생산되는 내 찢겨진 살과 피를 그걸 먹고 그걸 마셔야 돼요. 그래야 네가 영생을 얻는다는 거예요. 떡을 먹인 것은 그건 소용없는 짓이 아니죠? 씨 뿌린 비유 할 때 씨를 마귀 밭에 뿌리고 척박한 밭에 뿌린 것이 이게 허비한 게 아니잖아요. 떡을 줘놓고 떡 좋다고 따라올 때 그 다음에 피 이야기할 수 있고 찢겨진 살 이야기하고 예수님 죽음 이야기할 수 있는 거예요. ‘너희들의 본색이 원래 그렇다. 떡 밖에 모르는, 떡보!! 배부른 게 전부인 줄 알고 그게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여기는 그게 너 진짜 모습이다 말이죠.

아까 했죠. 과학이라는 것은 유용성과 경제성, 이것이 모여서 시장에서는 상품, 나중에는 인간 자체가 상품이 돼요. 연애 인들 보세요. 사람 자체가 상품 아닙니까? 그래서 몸 관리하고, 권 상우처럼 초콜릿 복근이 뭔지 모르지만. 상품의 교환성으로 가치 있다 하고 이걸 진리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이 과학적 인식의 사고방식입니다. 유용성과 경제성을 위해서 공부해야 되고 수능 쳐야 되고 1등급 맞아야 되고 1등급 해서 좋은 학교 가니까 학교에 플랜카드 걸어서 이런 애가 다녔다 해서 질 좋은 애는 또 들어올 거고 그러면 명문고가 되고 서로 들어오려고 난리 칠 거고, 그게 없는 학교는 애들이 미달돼서 출석은 60명인데 나중에는 20명 남고 다 가버리고, 옛날에는 그랬어요. 과학적 인식, 이게 어제 오늘도 마찬가지고 예수님 당시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 예수님은 세상을 광야로 봅니다. 광야에선 마귀가 지배하는 곳 이예요. 예수님께서 숨어있는 지배자 마귀를 먼저 만났습니다. 마귀 하는 말이 ‘돌이 떡 되게 하라. 우리 먹고 하자. 다 먹자고 하는 짓인데 먹고 하자.’ 이 말입니다. 돌이 떡 되게 해서 먹고 메시아를 하던 뭘 하든 먹어야 될 게 아니냐. 사람이 먹는 게 우선이니까. 생명은 먹는 게 아니라고 한 거예요. 애굽에서 먹던 그 떡은 떡이 아니고 광야에서 주신 만나가 떡이라는 거예요. 만나는 말씀이지 그 자체가 생명이 주는 양식이지, 떡 자체는 의미가 없는 거예요.

이제 슬슬 씨 뿌리는 비유가 풀리기 시작하죠? 참새가 와서 먹는 그 씨앗이 결국 이게 허비하고 무용한 것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세상사람 보기에는 그게 무용하고 쓸데없는 짓을 한 게 된 거예요. 제가 아까 고린도후서 5장 21절하면서 예수님을 하나님께서는 죄 없는 자를 뭐로 만든다 했습니까? 죄인 만들어 버렸죠. 하나님은 죄인을 앞장 세워서 소위 의인이라는 인간, 의인 되고 싶어 하는 인간이, 그래서 의인되어서 하늘의 복을 받을만하다고 은근히 기대하는 그 인간을 죄인 되게 하고, 죄인이라고 여기는 그분이 오히려 뭐가 되고? 의인되고, 뭔가 역전 분위기를 마련하는 곳이 이 세상입니다.

세상을 보는 관점에 있어서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보는 관점, 그래서 제가 십자가마을 이예요. 십자가마을은 오직 십자가마을 이예요. 십자가만 이야기해야 되는 이유는 관점 자체가 완전히 반대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욕심 많은 우리가 보는 것과 우리가 욕심이 많다는 것은 타고난 거기 때문에 말리지 마세요.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결국은 죽잖아요. 왜 죽느냐, 죄 때문에. 죄는 어디서 생기느냐, 욕심 때문에. 욕심이 잉태해서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자라나서 사망을 이룬다. 뭔가 이것도 씨 뿌리는 비유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는 인간이란 죄인이 어떻게 의인될 수 있느냐? 그 문제를 다루는 거예요. 지옥 갈 인간이 어떻게 천국 갈 수 있느냐, 그 문제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거예요.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근원적인 제일 중요한 문제예요.

만약에 예수님이 이 말씀을 안 했다고 칩시다. 안 했다고 치면 인간에게는 뭐가 됩니까? 이 말씀을 안 했으니까 인간은 본인이 농부가 되고 본인의 말과 노동이 씨가 되고 인간에게 밭이라 하는 것은 자기를 먹여 살리는 세상이라 하겠죠. 그러니까 씨 뿌리는 비유는 이미 인간들이 이 땅에서 각자 나름대로 살 수 있도록 씨를 뿌리고 농사를 하고 있고 성과를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말씀 이예요. 그런데 그 모든 노력들은 누굴 위함입니까? 자기를 위한 노력이죠. 스스로 자기 자신을 위한 구원을 하고 살기 위한 그런 노력들을 죽 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비유라 하는 것은 사람들이 이미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비유하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 지금 그렇게 살아가고 있잖아? 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마태복음 13장 33절 봅시다.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지금 여자들이 아침, 저녁마다 밀가루로 빵 찔 때 하고 있잖아요. 누룩 넣으면 부풀잖아요. 지금 사람들이 하고 있는 거예요.

또 44절 봅시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45절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옛날이나 지금이나 돈은 장사해야 되는 겁니다. 농사지으면 장사가 안 돼요. 옛날에 잘 사는 모든 나라들은, 구약에 성경에 보면 나라들이 나오잖아요. 나라들이 그 당시 역사 속에서 경제적인 것은 어떤 활동을 했는가, 무역을 했는가, 무역 노선을 조사해 보면, 전부 다 장사를 그렇게 했어요. 장사 하는 데서 제일 귀한 것은 귀한 상품을 많은 이득을 받고 한꺼번에 팔게 되면 로또 복권과 마찬가지입니다. 평소에 신임을 쌓아놓고 그 다음에 귀한 물건을 여러 구매자가 있고 물건은 자기한테만 있고 이럴 때는 값은 천정부지로 뛰어오르는 거예요. 공급은 적고 수요가 많으면 이건 값은 오르게 돼 있잖아요. 요새 배추 값처럼 올라가잖아요. 그러니 장사를 한다는 것은 시기를 잘 알아서, 이걸 상업자본주의라 하는데 타이밍 맞춰서 물건을 낼 때와 안 낼 때를 가지고 이윤을 남기는 거예요. 상업 자본주의는 옛날부터 있었어요.

그래서 기업하는 사람도 사업하는 사람도 항상 물건만 만들지 말고 판매까지 계산해서 소비자가 뭘 원하는 상품인가 계산해서 그 상품을 만들어내면 많은 이윤을 남기는 거예요. 장사하는 사람이 귀한 진주를 하나 사서 ‘야, 이 보석은 나한테만 있다.’ 할 때 얼마나 좋아하겠느냐, 이게 평소에 인간들이 하는 행위다 말이죠. 그럴 때 하늘나라가 이와 같다, 하니까 사람들이 뭐라 합니까? ‘아! 그런 말씀은 그~렇게 이해되기 쉬운 말씀을. 그건 비유도 아니야, 그냥 나한테 싹 와 닿는다는 거예요. 아니거든요, 그거.

그래서 어려운 거예요. 그게. 지금 예수님께서 하늘나라 못 보내서 환장한 분이 아니에요. 지금 계속해서 감추는 겁니다. 안다고 생각하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존의 너희들의 성경 말씀의 해석 자체가 결국은 나로 하여금 십자가 못 박혀 죽게 만드는 해석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자, 이렇게 볼 때 여러분들이 예수님 십자가를 염두에 두고 다시 소급해서 해석해야 됩니다. 구약성경 할 때 했거든요. 십자가 가지고 다시 해석하라고. 이건 베드로전서 1장 11절에 나오는 말씀이죠. 예수님이 죽었다가 고난과 영광을 가지고 구약을 다시 봐야 된다. 구약 자체를 백날 들여다 봐야 그건 네 모습밖에 안 돼, ‘나 잘났습니다.’ 하는 자기 잘남으로 회수될 뿐 이예요. ‘역시 나는 잘났어. 역시 나는 성경 잘 알아. 훌륭해.’ 이것만 보여요. 그런데 성령, 십자가 영, 그리스도 영, 십자가 말씀으로 구약을 보게 되면 ‘야, 참 우리는 마땅히 진노 받아도 합당한 죄인이다.’ 왜냐 하면 구약은 ‘거룩’이거든요. 이 앞에서 우리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하나님을 우리가 직접 눈으로 보게 되면 이렇습니다.

욥이 직접 하나님 봤을 때는 제가 어느 강의에서 했잖아요. 완전히 브라우니(개)처럼 아무소리 못하고 있잖아요. ‘물어. 물어.’ 해도 아무소리 못하고. 왜, 우리는 하나의 개처럼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할 정도의 지경에 빠진 거예요. 왜, 너무나 마귀 때문에, 너무나 거룩하기 때문에. ‘왜 저를 이렇게 아프게 합니까? 내 인생 조져놓습니까?’ 그렇게 말들이 많던 욥이 막상 하나님이 딱 등장하니까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유구무언(有口無言)

그래서 사도바울은 뭐라 했습니까? ‘주여, 누구십니까?’ 그저 경악, 그 앞에서 나는 파멸, 당연한 파멸! 그런데 지금 제자들 앞에서 예수님께서 비유로 이야기하니까 제자들이 좋다고 경악도 아니요, 파멸도 아니요, 신났지, 신났지, 역시 우리가 알아듣는 이야기만 쏙쏙 하시는구나. 어떤 장사가 귀한 보석을…하늘나라는 이렇다. 하니까 야~! 이러면 쉽네. 그랬던 제자들이 누굴 배반했죠? 예수님을 배반하고 예수님을 모른다 했잖아요. 그들이 도대체 이 하늘나라는 누굴 위한 하늘나라란 말입니까?? 그렇게 안다고 했던 하늘나라, 다 도루묵 돼. 네가 상상한, 네가 꾸며낸 하늘나라, 내가 혼자서 좋아 즐겼던 자기만의 허구적 세계, 그게 유토피아, 그게 바로 예수님 말씀 백날 집어넣어도 소용없어요. 정작 하늘나라는 아무나 갈 수 없는 오해한 겁니다.

열매는 밭이 좋아서 맺은 게 아니에요. 옥토에 떨어지매 열매를 맺는다 할 때, ‘씨가 아무리 좋아도 밭이 나쁘니까 열매 못 맺는구나.‘ 이렇게 돼 버리면 예수님 말씀 백날 해도 내가 예수님 믿어주면 예수님도 기분 좋고, 내가 삐지면 예수님도 흐흐흑, 엎드려서 울면서 ’도무지 너한테는 먹히지가 않는구나. 언제 네가 인간될꼬.‘ 이래서 주님께서 ’이 답답아, 답답아. 빨리 회개해서 같이 동업해서 천국을 이루자.‘ 이렇게 나옵니까?

그러니 씨 뿌리는 비유가 엉망이 됐다니까요. 이제 어렵다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그래서 어떤 목사들은 씨가 잘 받도록 옥토를 개간한다고 바빠. 돌멩이 다 끄집어내고 가시 철거하고 안에 있는 마귀 다 쫓아내고 ‘자, 준비된 옥토입니다. 자 말씀 오시옵소서. 열매 맺게 하시옵소서.’ 그동안 내가 가정에 전도 못하고 십일조로 열매 못 맺은 것은 이 밭이 더러워서 그런데 밭이 그동안 새벽기도 가서 노력해서 밭을 페이퍼로 밀어놔서 이제는 부흥회하고 난 뒤에 이제는 맘껏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을 준비가 돼 있다는 거예요. 기가 차고 코가 차고, 그런 식으로 사람들은 교회에 동감을 했습니다. 왜, 자기들이 해석해도 그 정도밖에 안 되니까.

씨 뿌리는 비유를 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반했다는 사실, 잊지 마세요. 너무나 쉬워 보여요. 또 쉬운 거 이야기해줄까요? 24절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종들이 ‘뽑을까요?’ 할 때 집 주인이 뭐라고 합니까? ‘내비둬. 내비둬. 가라지 뽑다가 알곡까지 뽑힌다.’ 그러니까 교회 이단 들어오면 가만 놔 둬라. 나중에 알곡까지 뽑히니까 이러다가 신천지에 먹히니까, 그냥 뽑자. 이렇게 나오죠.

자, 여기서 참 어려운데 해석을 해야 되지 않습니까? 합시다. 한자를 쓸게요. 끝! 영화 마지막 장면 보면 외국 영화는 end, 이렇게 돼 있고 비디오 같은 경우는 감사합니다. 나오죠. 끝에서부터 풀어나가야 돼요. 예수님은 말씀을 하실 때 끝 지점에서 소급해서 바라보고 있거든요. 우리는 끝이 아직 오지 않은 이쪽 지점에서 이렇게 바라봅니다. 그러니까 해석이 다를 수밖에 없는 거예요. 주님은 끝 지점에서 이렇게 보게 되면 예수님에게 나온 모든 말씀은 말씀대로 돼야 되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알곡도 있어야 되지만 가라지가 필히 있어야 돼요.

그런데 인간 쪽에서 예수님 말씀을 들어버리면 자기는 무조건 가라지가 아닐 것이라는 전제 하에 이렇게 시작을 해 버려요. 그런데 제가 아까 했죠. 인간은 뭘 따먹었다? 인간은 선악과 따먹은 그 속성이 자리 잡고 있죠. 인간은 시작과 끝을 보지 않고 중간에 잘라서 그 안에 자기가 태어난 그거부터 시작해서 자기가 계산하다 보니까 시작도 모르고 끝도 모르는 채 일방적으로 자기는 잘났다 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제가 첫 시간에 이게 뭐냐, 보이지 않는 신에게 종교성이 많죠. 범사에 모든 종교성이 많죠. 미신이 많은 겁니다. 뭐든지 현재 나에게 유용성 있을까,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도움이 될까, 그러면 나는 시장에 나가도 하나의 상품의 가치가 있다. 나 같은 사람은 많고 서로 시집오려고 하고 서로 장가가려고 하고, 이렇게 되는 거죠.

그러나 시작과 끝을 생각하게 되면 우리는 시작은 마귀 속성으로 시작해서, 끝은 뭡니까? 끝은 십자가죠. 이걸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게 되는 거죠. 용오름이란 거 여러분 아시죠? 바다의 용오름! 갑자기 기압 차이가 현격하게 달라지면 여기서 돌글동글해서 하늘의 구름까지 연결되는 걸 용오름이라 하지 않습니까? 이게 창세기고, 이게 세상 끝이라면 세상 사람들은 창세기부터 시간이 이렇게 고요하게 때맞춰서 흘러간다고 봅니다. 그런데 여기 십자가가 용오름이라면 세상 끝은 이렇게 가버려요. 용오름에 흡수됩니다. 그리고 나머지 역사는 용오름에서 내려온 거예요. 용오름의 그림자입니다. 십자가의 그림자로서 마지막 세상이 끝나는 거예요.

인간의 시간관이라 하는 것은 과거가 있다는 말은 과거와 동일한 미래가 있다는 걸로 미래를 생각해요. 미래는 과거의 반복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겁니다. 현재를 중심으로 해서 과거에 이렇게 했잖아요. 과거에 지나온 자기의 시간 개념을 그대로 앞에다가 점선으로 미래에 놔 버려요. 과거에 써먹었던 사다리를 딱 돌려서 미래 끝까지 나갈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어제가 하루 24시간이었잖아요. 그러면 내일 30일도 24시간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어제 분명히 해가 동쪽에서 떴잖아요. 내일도 뜬다고 본 거예요. 그게 과학이라니까요. 그 과학은 누가 판단하고 누가 정리한 진리관입니까? 바로 내가 정리한 진리관이예요. 예를 들어서 아까 한 것을 다시 하면 이 물을 들으면 무겁잖아요? 무거우니까 내가 들지 않으면 이건 안 무겁죠. 그러면 물어 봅시다. 마태복음 8장에서 예수님과 제자가 탄 배를 파도가 엎으려고 합니다. 10년 전, 100년 전에도 파도가 일어서 배가 무너졌고 50년 전에도 배가 무너졌습니다. 그럼 지금 이 순간 파도 곁으로 배가 옵니다. 이 파도에 당연히 배는 침몰될 수밖에 없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뭐라 합니까? 그냥 ‘잠잠 하라’도 아니고 기다린 것도 아니에요. 꾸짖었죠. 바람과 바다보고 꾸짖으니까 이런 순한 양같이 ‘알았습니다.’ 하고 고요하게 됐죠. 이런 경우는 과거에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없었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부터 과거를 다시 소급해야 돼요. 그때는 물 분자가 중력에 의해서 움직인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홍해에 명령해서 파도가 친 거예요. 세상의 모든 일은 주님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참새가 떨어지는 것도, 우리가 발걸음을 세는 것도 주님의 뜻에서 벗어나지 않아요. 이게 용오름 안에서 세상을 다시 보는 겁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도바울이 이야기한 것은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는 것도 모든 것도 심지어 창세전부터, 천지가 창조되기 이전부터 이미 바울이란 인간이 이런 짓을 해야 되고 이렇게 해서 예수를 만나야 되고 그래서 구원받아야 된다는 것이 이미 창세전부터 이미 예정돼 있는 겁니다. 내가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는 이것이 이미 정해진 거예요.

집사님도 마찬가지고 우리의 모든 것도 정해진 겁니다. 그 정해진 안목을 용오름 안, 십자가 안에서 그걸 우리가 매일같이 체험하면서 느끼라는 겁니다. 왜, 우리 뜻대로 안 되니까. 우리 뜻은 시간이 이렇게 끝날 줄 알았죠. 그래서 지금도 마찬가지로 많은 교회가 종말 프로그램 짠다고 바빠요. 몇 년도 되면 세상 끝나는데 그 전까지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고, 미국 같은 경우에 몇 년도에 멸망될 걸 예상해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방공호 파서 핵폭탄 일어났을 때 피할 그런 자리하고 음식 준비한다고 난리 났어요.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부활을 거치지 않으면 그건 살아도 산 게 아니고 죽은 겁니다. 반드시 부활의 영을 받아야, 성령 받아야 그건 산겁니다. 나는 죽었고 내가 산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야 그게 산 자가 돼요.

그런 관점에서 끝을 가지고, 이 끝은 세상 끝을 말하는 게 아니고 십자가가 끝이 끝이죠. 끝은 뭐냐 하나님을 만난 게 끝 이예요. 우리가 하나님 만나면 끝입니다. 더 볼 거 없어요. 하나님 봤으면 다 본 겁니다. 요한계시록에 어린양의 보좌 봤으면 다 본 거예요. 사도요한이 어린양의 보좌 봤잖아요. 사도요한이 밧모 섬에서. 그거 보고 난 뒤에 ‘아이고, 내가 더 살아야 될 건데.’ 이랬습니까? 더 살아야 될 이유가 없죠. 끝을 봐버렸는데요, 뭐. 끝을. 마지막의 심판도 다 봐버리고.

그래서 우리는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하고 아까 뭐라 했습니까? 믿음으로 행한다 했죠. 노아가 끝을 봤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끝을 봤고, 아벨이 제사 지낼 때 끝을 봤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잡을 때 이미 끝을 봤고, 그리고 야곱이 어긋맞게 할 때 이미 끝을 봤고, 모세가 바로의 공주의 재벌 3세 됨을 포기할 때 그는 이미 끝을 알았어요. 이사야가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지만 이사야가 순교당할 때 이미 자기는 이미 끝을 알고 있었어요.

골로새서 3장에 보면 이미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기 때문에 땅에 있는 생명은 생명이라 하지 말라고 한 거예요. 땅의 것은 하지 말고 하늘에 것을 바라보자. 이미 우리는 안개다. 사도들은 이미 끝을 이야기합니다. 끝의 관점에서 봐버리면 가라지는 반드시 있어야 하고, 돌밭도 반드시 있어야 하고, 그 다음에 마귀가 쪼아 먹는 그런 밭도 있어야 하고, 반드시 그런 밭이 있어야 돼요.

자, 씨 뿌리는 비유를 해봅시다. 씨 뿌리는 비유가 칸막이가 4개라 했죠. 4개라 했다 했을 때에 ‘나는 그럼 어느 쪽에 속합니까?’ 라고 물을 자격 자체가 안 돼요. 말씀은 우리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자신이 예수님 자신을 보고 이야기한 거예요. 즉 예수님 내가 여기 존재하고 행함으로서 필히 이 4가지의 경우가 늘 되풀이 돼서 이 땅에 전개될 때, 이 세상은 이 예수의 말씀대로 되는 것을 네가 믿어라. 그게 바로 열매입니다. 그게 바로 30배, 60배, 100배의 열매예요.

예수님이 우리보고 씨를 뿌린다 하지 말고, 우리를 없애버리고 예수님 쪽에서 예수님의 씨가 남기는 이 파노라마를 같이 보게 하시는 거예요. 언제? 성령을 받게 될 때. 지금 제자들은 그걸 못 봐요. 제자들은 여기 있어서 주님이 우리 구원하려고 주신 말씀을 우리가 지키면 우리는 구원되는 줄 알았죠. 이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신했죠. 그러니까 성령이 오게 되면 이 제자들이 이쪽 편에 서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쪽에 서 있으면, 사도바울처럼 자기 안에 자기는 죽고 자기 안에 누가 산다? 예수님이 있어버리면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서, 세상이란 없어요. 없고 말씀이 세상을 만들어 가는 거예요.

가라지 있고 알곡이 있다. 세상은 세상 속에 가라지 있고 알곡이 있는 게 아니고, 알곡과 가라지 있는 세상을 예수님 말씀을 먼저 내뱉음으로 말미암아 필히 그런 식으로 세상이 놓여있다는 것을 우리는 그걸 믿음으로, 보는 것으로 하지 않고 따지는 것으로 하지 않고 측정하는 것으로 하지 않고, 그걸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거예요. 세상은 예수님 말씀대로 한 치도 어김없이 그대로 진행되고 있다는 걸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 진행의 끝은 뭐냐,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구원받는 것은 주의 말씀에 의해서 구원받는 것이지, 내가 말씀을 지켜서 구원받는 게 아니죠.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예요?

어떤 보석 장사가 귀한 것 챙겼다 할 때, 보석 장사도 예수님이고, 보석도 예수님이고, 좋아서 기뻐하는 것도 예수님의 기쁨이고, 우리는 세 개 중에서 전부 다 빠져야 돼요. 아시겠습니까? 다 빠져야 돼요. 가라지에서도 빠져버리고 알곡에서도 빠져버리고 옥토에서도 빠져버리고, 씨 뿌리는 데서도 다 빠져버리고 다 빠져야 돼요. 왜, 우리는 어차피 예수님 말씀과 관계없기 때문에. 왜냐 하면 우리가 그걸 판단하거나 예수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입장에서 관계없기 때문에. 우리는 결과물이지, 우리가 주님하고 ‘같이 이루어 나갑시다.’ 이럴 쨉이 못되고 그럴 자격이 못 돼요. ‘나가 있어.’ 내(예수님)가 친히 만드는 겁니다.

그 다음에 우리는 뭐냐, 나중에 십자가 안에서 ‘아! 저 경우가 참새가 와서 쪼아 먹는 경우고, 저 경우가 안에 돌이 있는 경우고, 저 경우가 가시덤불이 있는 경우고, 저 경우가 옥토구나.’ 할 때 ‘하나님, 저는 옥토 맞죠?’라고 나설 입장이 못 되죠. 나를 옥토 만드는 것이 아니고, 옥토 되게 한 결과가 나기 때문에, 항상 주체가 내가 될 수 없습니다. 내가 나의 주가 될 수 없죠. 자꾸 네가 주가 되는 그걸 부정하라 이 말입니다. 빼라 이 말입니다. 왜 너는 조상이 아담이기 때문에 네가 거기서 거들먹거리며 나도 좀 압니다. 행세할 쨉이 못 되기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죽고 날마다 살려내는 입장이기 때문에, ‘나도 이것 좀 압니다.’ 할 수 없는 거예요.

다만 고요하게 그냥 말씀에 대한 결과로서 우리는 열매를 맺은 거예요. 내 열매가 아니고 내 열매로 내가 구원받은 게 아니고, 주의 열매로 인하여 우리는 그냥 열매로서 살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남 앞에 나설 때는 내가 주의 열매라고 이야기해야 돼요. 주의 열매로 이렇게 된 겁니다. 내가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이 아니고 주께서 나를 이렇게 ‘그리스도만 주인입니다.‘라는 소리를 하도록 이렇게 만들어 냈는데 이건 내 솜씨도 아니고 내 속성도 아니고 나에게는 그런 능력이나 그런 위인이 못 돼요. 왜, 나는 나만 사랑하는 인간이지,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뭐다?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거는 모든 사람이 해당되는 거예요. 우리는 매일같이 내 인생 조지는 것은 주님 당신 때문입니다. 매일 주님을 저주할 수밖에 없는 속성을 갖고 있다고요. 그걸 뭐로 바꾸느냐 하면 그런 인간조차도 열매를 맺게 한 것은 주님이 나와 함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주께서 만들어줬습니다.’라는 것을 고백하는 거예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고백을 쏟아내는 겁니다. 제자들이 나중에 소급해서 보니까 제자들도 이런 소리를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제자들이 보면서 ‘야, 내가 나쁜 놈인데 내가 이렇게 사도로 구원받게 해 준 은혜가 다 주님 은혜입니다.’ 그거 그들은 로마의 칼, 로마의 사형제도, 그런 것은 무서워 할 자격도 안 돼요. 왜냐 하면 하나님이 정답이지, 사람이 정답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그리고 주변에 그런 소리 하는 사람은 해골로 보여요. 하나의 연기자들, 주께서 일부러 그런 자들은 역할 하라고 만들은 어떤 꼭두각시 인형들로 보이지, 칼 쥐고 ‘나는 너를 죽이려 한다. 무섭지 않느냐.’ 아, 그런 대사를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고 대사 하지 뭐. ‘아휴, 무서워라. 살려주세요.’ 이런 대사 하면 돼요.

순교자라는 유명한 소설책 있잖아요. 그걸 보면 일본 괴뢰군 장교가 ‘네가 그리스도인인가 보자. 이 그리스도 얼굴을 밟고 지나가면 네가 기독교 신자고 피하면 기독교 신자가 아니다. 내가 그걸 분별 하겠다.’ 이렇게 하니까 목사들이 살려고 전부 다 피해갔습니다. 그러니까 약이 올라서 다 죽여 버렸습니다. ‘네가 가짜다. 씨.’ 그게 순교자 주제예요.

소위 예수를 나불거리는 그게 예수를 배반하는 자고 진짜 예수님 앞에 안 믿는다 하는 인간이 진짜 믿는 자고, 그게 유명한 김 흥국씨가 한국인 미국 소설가로 히트 친 소설 이예요. 내용이 반전이 있어요. 역전! 그 역전이 오늘날 우리 인생 가운데 매일같이 지금도 계속됩니다. 성령을 통해서 예상 못한 반전이 기다리고 있어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를 생각해 볼 때 우리가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작품이고 열매인데, 다른 열매 생각하지 말고 고요하게 주님 품안에서 감사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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