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 빠진 죄 121202
바다에 빠진 죄 121202
이름 : 이근호(IP:119.18.78.175)
바다에 빠진 죄(미 7:18-20)
이근호
12-12-02 15:30
깊은 바다에 빠진 죄
2012년 12월 2일 본문 말씀: 미가 7:18-20
(미 7:18, 개역)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미 7:19, 개역)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미 7:20, 개역) 『주께서 옛적에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 대로 야곱에게 성실을 베푸시며 아브라함에게 인애를 더하시리이다』
우리 인간 세계에서도 인간에게서 나오는 생활 쓰레기나 부산물들은 사정없이 처리해버립니다. 가짜 명품 가방이나 시계 같은 것은 세관에서 지게차까지 동원해서 짓이겨버리고 칼로 가방을 째버립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소각장에 가져가서 불로 태워버립니다. 음식 쓰레기 같은 것이나 분뇨같은 것은 깊은 바다에 빠트리버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행동에 나서신다는 말은 우리 인간의 몸에서 지속적으로 이런 배설물이 쏟아져나온다는 말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내부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이 싫어하는 요소들이 계속 만들어져 나온다는 겁니다. 도대체 우리 몸과 마음과 정신이 어떠하기에 하나님에 단호하게 취급한 것들이 나온다는 말입니까?
이것을 규명하는데 있어 오늘 본문 20절이 결정적인 해답을 제공합니다. “주께서 옛적에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야곱에게 성실을 베푸시며 아브라함에게 인애를 더하시리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에서’라는 조상이 빠져있다는데 주목해야 합니다. 에서는 야곱과 쌍둥이며 같이 이삭 가정에서 태어난 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에게만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맹세의 효과가 쏠립니다. 그 내력을 우리는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환경에 반응하며 사는 존재입니다. 환경이 그렇게 쪼아붙이면 당해낼 위인은 없습니다.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게 됩니다. 그리스, 로마의 영웅들은 그들의 사투나 투쟁이나 몸부림을 통해서 운명을 자기 원대로 전환해보려고 시도하는 내용들입니다. 하지만 그 결말은 비극입니다. 왜냐하면 변화하는 모든 것은 즐거움과 행복이 지속하도록 방치하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영웅이란 세상 지혜의 핵을 이루는 그 지점에서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영웅은 변화 속에서 자기 고집을 챙기는 위인으로 부각됩니다. 인간들은 변화로 휘돌리면서 진정한 자기 자신을 상실합니다. 내가 누군지도 분명히 모르고 살아가게 되면 세상 변화에 시달리다가 존재 의미를 잃고 맙니다. 인간들은 이것을 무서워합니다.
진정 자기 자신이 어떠한 존재를 알아서 그것을 꼭 쥐고 자기가 자기답게 살아갈 때는 삶의 보람을 갖고자 합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들에게 납득이 되는 영웅상입니다. 사랑과 출세도 본인이 원하는 설계도대로 진행되는 것을 보일 때, 비로소 인간의 변화에 휩쓸리지 않는 지속성을 갖추었다고 확인되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맹세 앞에서 그런 단호함도 소용없습니다. 인간들은 모든 기대는 사정없이 짓밝혀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서는 계속해서 죄가 쏟아져나오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합니다. 이러한 투쟁 속에서 비로소 인간은 두 가지 섞일 수 없는 타잎으로 구분지어집니다.
‘야곱에게 내린 맹세’ 속에는 야곱을 특별이 배려하고 대우하는 하나님의 집념이 담겨 있습니다. 즉 에서는 아무리 애써도 야곱의 운명선 안으로 들어설 수 없습니다. 이점은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곱이 아무리 노력해서 에서가 받는 저주를 같이 받지는 못합니다. 야곱과에서, 에서와 야곱은 각자의 운명에서 자신들의 손을 놓아야 합니다.
인간 자체의 애씀마저도 변화 중의 일부로 흡수 통합되어 버리게 만듭니다. 인간의 몸부림을 놓치지 않고 일관된 멸망의 확고함이 더욱 돋보이게 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를 들면, 두 사람이 다툽니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는 것을 판정을 내리겠지요. 문제는 그 판정이 만약에 아무도 옳지 않다고 내려진다면 이것이야말로 변화 자체서 이탈된 하나님의 일관성 있는 의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만약에 한쪽이 옳고 한쪽이 그르다고 한다면 이 판단은 그 다음 과정의 결과에 따라서 뒤집어질 수가 있는 겁니다. 역사에 대한 평가는 과거까지 소급해서 재해석을 유도합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신의 해석과 대결구조로 갖추게 됩니다. 멸망을 거부할 수 있는 권한까지 확보하기 위해 인간은 재심판을 청구할 것이요 거기에 동원될 근거난 나름대로의 법일 것입니다.
이런 판정을 야곱이든 에서든 내릴 권한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신탁을 야곱이나에서, 양편에 서로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일방적 해석을 내리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오류들이 참으로 들통난 것은 야곱이 직접 하나님을 뵙고 부터입니다. 원천적으로 잘못되었다는 사실이 그 현장에서 드러납니다.
야곱은 재거되고 이스라엘로 재탄생합니다. 에서에게는 이러한 거듭남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에서는 그저 에서의 고집에서 줄기차게 밀고 나갈 뿐입니다. 야곱에게 일어난 이러한 경우는 ‘율법’ 혹은 ‘돌판’이라는 실물로 가지고 이스라엘 나라 전체를 상대로 해서 벌어지게 됩니다.
신명기 9장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하늘에서 돌판을 가지고 백성들의 진영에 당도합니다. 하지만 모세는 백성들의 영적 태도에 실망하고 그 돌판을 깨어버립니다. 즉 이 백성들은 절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격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다시 존재한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조건으로 도입되지는 않다는 말입니다.
돌판이 깨어졌다는 것은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돌판을 허락하십니다. ‘깨진 돌판을 대신하는 돌판’. 전의 돌판과 차이점이 뭘까요? 그것은 바로 ‘피’가 묻혀 ‘피 안의 돌판’으로 다가선다는 겁니다. 이 피로 인하여 모세는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생각하사 이 백성의 완악함과 악과 죄를 보지 마옵소서 주께서 우리를 인도하여 내신 그 땅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허락하신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일 만한 능력도 없고 그들을 미워하기도 하사 광야에서 죽이려고 인도하여 내셨다 할까 두려워하나이다 그들은 주의 큰 능력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 곧 주의 기업이로소이다 하였노라”고 합니다.(신 9:27-29)
즉 돌판에 피와 더불어 있다는 말은, 하나님의 깨진 돌판이 없이는 진정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없다는 말이요 이는 곧 자기 자신이 진정 누구인가를 모른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바리새인들이 현장에서 간통한 여인을 데리고 예수님에게 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말씀 해석에서 자신들이 그 말씀해석에 의해서 책망받지 않으리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 나름대로 율법해석의 마당을 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듣고 그 현장을 철수했습니다. “누구든지 죄가 없는 자가 저 여인을 치라” 사람들은 진정한 말씀과 거룩 앞에서는 굴복할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피하는 식으로 처리합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맹세의 혜택을 입자 못하는 에서적인 운명입니다.
오늘날 야곱에 해당되는 사람들에게는 천국가는 길을 그들의 죄를 끄집어내어 그것이 어디서 처리되는가에 시선을 유도하시면서 이끄십니다. 바로 십자가에 우리의 영웅담이 처리되고 죄라고 규정되면서 하나님의 맹세가 거저 ‘용서’라는 이름으로만 실행됨을 압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복음만을 전하게 하시고 그들의 태도는 하나님께서 정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이근호
12-12-04 08:56
19강-미7장18-20(바다에 빠진 죄)12120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미가서 7장 18절에서 20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1297페이지입니다.
미가 7:18-20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주께서 옛적에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 대로 야곱에게 성실을 베푸시며 아브라함에게 인애를 더하시리이다“
오늘 본문에 보면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발로 밟으시고 그리고 우리의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진다 하는데, 이것을 가끔 뉴스 시간에 보면 인천 공항 세관원들이 가짜 명품들을 모아놓고 지게차 가지고 밟고 명품 가방을 칼로 찢고 그리고 그런 것을 전부 다 쓰레기 태우는 데서 태웁니다. 시계도 로렉스부터 해서 명품 가방들이 한껏 있어요. 그런데 사정없이 밟아버립니다. 가짜라고!
그리고 오늘 본문에 보니까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진다 하거든요. 요것도 방송에 보면 나옵니다. 이건 음식 쓰레기라든지 분뇨 같은 것은 동해바다에 갖다 버립니다. 왜, 더럽다고! 인간사는 곳에 오지 말라고. 더럽다고 갖다 버리죠. 우리 인간 세계도 이처럼 우리한테 있어서는 안 된다 싶은 것은 다 쪽쪽 뽑아내서 밟고 버리고 태우고 그리고 갖다 버리고 이렇게 분주합니다.
그런데 우리 못지않게 하나님도 되게 분주해요. 죄는 모조리 다 뽑아서 바다에 빠뜨리고 밟고 하는 그 작업을 해주십니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가 20절에 보면 나옵니다. “주께서 옛적에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 대로 야곱에게 성실을 베푸시며 아브라함에게 인애를 더하시리이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쓰레기 치우듯이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뽑아내고 바다에 던지고 다시는 떠오르지 말라고 바다에 던지고 밟고, 밟고 하는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위함이 아니고, 자기가 스스로 자기에게 주신 숙제요,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만 존재하거든요.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시고 하나님을 위해서 움직이시는데, 그 움직임 속에 끌려들어가서 용서를 받은 사람들이 하나의 제품처럼, 하나의 생산품처럼 공장에서 출고가 됩니다.
그들이 누구냐, 그들이 야곱이요, 그들이 아브라함의 족속이다, 그렇게 돼 있습니다. 우리가 이 본문을 보면 ‘유대인들은 참 좋겠다. 조상이 아브라함이라 좋겠고, 조상이 야곱이라 좋겠다. 아이쿠, 그들은 족보 상 아브라함이고 족보 상 야곱이니까 얼마나 좋겠느냐.’ 이렇게 생각합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은 항상 시간 서열, 족보를 생각하는 거예요.
전주 이씨라 하는 것은 옛날 일제 사람들이 한국 과거 조선사를 해석하면서 조선을 이씨 조선이라 했어요. 그것도 전주 이씨만 왕질 하는 세상이다. 이렇게 본 겁니다. 그럴 때 전주 이씨가 아니고 한 끗 차이거든요. 경주 이씨, 그것도 산수공파, 경주 이씨, 한 끗 차인데 왕족이 아니네요. 저는 왕족이 아니무니이다. 우리는 경주 이씨기 때문에 왕족이 아니에요.
그런데 마태복음 8장에 보면 이렇게 혈통 자랑하는 사람들, 예수님께서는 그걸 인정하지 않습니다. 너희들이 천당 가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은 거기서 다 쫓겨나오고, 예수 믿는 사람만 아브라함 자손이 되고 야곱의 맹세의 생산물이 될 것이다. 이렇게 언급을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는 것은 시간적인 서열을 가지고 육적인 족보를 따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데, 예수님은 거기서 다른 식으로 성경 말씀을 이해를 하시는 거예요. 따라서 예수님이 보시는 안목 가지고 우리는 성경도 보고 세상을 봐야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떤 관점으로 성경 해석을 이렇게 보시는가? 오늘 본문 20절에 보면 “야곱에게 성실을 베푸시며 아브라함에게 인애를 더하시리이다“라고 돼 있죠? 뭔가 하나 빠져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뭐가 빠졌느냐 하면 야곱에게는 성실을 베푸시지만, 그 중간에 야곱의 형으로 쌍둥이로 나타난 그 형, 에서는 하나님의 성실을 베풀지 않습니다. 이걸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야곱이 사랑받기 위해서 에서는 필히 미움이라는 그것을 받아야 돼요. 에서가 미움 받아야 야곱이 사랑을 받게 돼 있습니다. 그것은 야곱이냐, 에서냐. 인물 중심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사랑이냐, 미움이냐, 주님의 속성 중심이지, 인물 중심이 아닙니다. 어디 걸려든다는 그것은 인간 됨됨이하고 아무 상관없습니다. 같은 입장에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성실을 베푸시되 에서는 하나님의 혜택이 돌아가지 않습니다. 같은 족보지만 빠지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머리 좋은 사람은 감 잡아야 돼요. 같이 교회 나오고 같이 예수 믿는다 하지만, 뭔가 하나님에 의해서 강제로 퇴출당하는 자들이 있음에 우리가 천국으로 가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시간적인 서열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족보하고는 상관이 없고 인간의 육적인 노력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겁니다. 다른 법칙이 적용되고 있어요. 그 다른 법칙을 우리가 감 잡아야 됩니다.
16세기, 1500년 경 서양에 교회에서 무슨 아이디어를 끄집어내서 성 베드로성당이라는 거대한 것을 지었느냐, 저는 재작년인가 거기 가봤어요. 베드로 성당이 계산동 성당하고 차이를 못 느꼈어요. 돈 주고 여기까지 올 이유가 없다. 하고 봤는데, 그 성 베드로 성당 짓는데 자금이 없어서 그 당시 교회 책임자들의 아이디어가 뭐냐, 면죄부를 발부해 줬습니다. 자, 면죄부라는 게 뭐냐 하면 예수 믿지 않고 사는 사람이 지옥에 가게 되는데, 지옥에서 조기 졸업을 시켜주는 제도가 면죄부 제도입니다. 지옥에 갔는데 후손들이 빽을 쓴 거예요. 우리 촌의 아제가 예수 안 믿는데, 내가 촌의 아제를 좋아하는데 바쁘게 농사짓다 보니 교회를 못 나갔다 말이죠. 그러니까 내가 면죄부 티켓을 끊으면 그것이 하늘나라 앞에 상달되면 그걸 누가 받느냐 하면 하늘나라에 먼저 간 그 대단한 분들이 있어요. 그 사람들을 성인이라 합니다. 하늘나라 귀족들, 백작, 자작, 남작, 그런 사람들이 있어요. 그 귀족들의 빽도 빽이지만 역시 최고의 빽은 그런 귀족의 빽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최고의 빽은 예수님의 모친이 거기 계셔요. 마리아도 그냥 마리아가 아니고 성모 마리아입니다. 아베 마리아입니다. 마리아, 아베 마리아. 그 마리아가 아들한테 빽을 쓰게 돼 있어요. 엄마가 아들한테 빽을 쓰면 아들이 엄마의 효심에 감동해 들어주지 않을 수밖에 없죠. 피에타입니다.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 다 나와요. 세상 돌아가는 게 뻔해요. 귀족들이 또 한 빽 해서 거기 가는 사람한테 면회를 갑니다. 면회를 해서 조용하게 불러내요. ‘혹시 네 후손들 가운데 같이 촌에 농사짓는 누구 농공 회 농사짓는 애 아는 자 있나? 그 조카가 네 사식 넣어줬더라.’ 사식 넣어주고 빽 쓰면, 기간이 네가 예수 안 믿고 술고래 돼서 마누라 패고 해서 6년 받는데 요거 6개월로, 나머지는 집행유예로 그렇게 풀리게 해준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런 복음이 얼마나 쉬운 복음입니까? 무지무지하게 쉬운 거예요. 이거 뭐 세상이고 하늘나라고 돈 쓰고 안 되는 일이 없는 거예요. 돈으로 다 되는 거예요. 왜 천주교 신부들이 그런 걸 썼느냐 하면 하나님 나라의 복음 전파에 보탬이 된다면 이거는 마귀를 대적해서 마귀를 이기는 행동을 취한 것으로 보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내가 지갑의 돈을 열어서 교회 헌금을 하게 되면, 이것은 결국 복음을 전파하는데 쓰여 질 것이고, 복음을 전파하는데 쓰여 질 것 같으면 마귀가 여기서 기죽어서 ‘음메 기죽어.’ 하고 도망 갈 것이고, 그러면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하나님의 원수 마귀를 퇴치하는데 약간의 기여를 했으니까 그 기여 분만큼은 어느 정도는 보상을 해 주는 것이 하나님의 계산법에 맞다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고생하는 그것의 보상이 뭐냐 하면 바로 예수 안 믿고 돌아가신 분을 지옥에서 빨리 빼내주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바로 지옥 가는 것이 아니고 연옥에 간다는 거예요. 연옥,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그걸 천주교에서는 연옥이라 하지 않고 다른 말로 낙원이라 합니다. 낙원과 천국을 달리해서 낙원은 천국을 가기 전에 임시로 집결되는, 모인 곳을 연옥이라 하거든요. 연옥에 가서 거기 대기하고 있다가 후손들이 잘 살아서 빽 들어오는 사람은 조기, 또 후손들이 잊어버리고 빽도 안 쓰면 그는 그냥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이고. 사람은 친척 가운데서 돈 좀 있는 사람이 있으면 사람이 축복받은 줄 아시기 바랍니다.ㅎ 모태신앙이 달리 모태신앙이겠습니까? 다 빽 써서 된 일인데.
이러한 아이디어가 이것은 어려운 말로 옛날에 기독교 오기 전에 유럽에 로마 그리스 신화가 있었습니다. 신화에서 인간은 운명과 투쟁하는 존재로서 인간을 봤어요. 인간은 운명과 투쟁을 해요. 운명은 인간보다 항상 세고 강하지만. 영웅이 달리 영웅이겠습니까? 남들이 할 수 있는 그런 것 하면 그건 영웅이 아니죠. 힘들고 어렵더라도 그 역경을 강한 집념과 용기와 끈질김과 인내와 지혜를 총동원해서 이기면 운명조차도 이길 수 있다. 라는 스토리가 바로 영웅담, 신화입니다.
시시하게 인간들하고 싸우는 걸 가지고 영웅이라 하지 않아요. 적어도 영웅 값을 하려면 누구하고 싸워야 되느냐, 운명이라는 것, 그리고 신과 싸워서 이길 때 비로소 인간은 최고의 인간으로 등극하는 겁니다. 거기에 성경 내용과 믹스가 되니까 이건 개판이 돼 버린 거예요. 결국은 교회에서 외치는 이야기는 하나밖에 없어요. ‘여러분들의 운명에 낙담하지 말고 여러분들이 믿고 기도하면 뭐든지 이길 수 있습니다. 희망을 가지시고 희망이 여러분들을 살립니다. 좀 더 긍정적으로 적극적으로 살아가시면 여러분 다 됩니다. 좌절하지 마시고 낙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과 전혀 다른 그런 세계관, 우리가 그 세계 속에 놓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께서 밟고 주께서 뽑아내시는 모든 죄는 도대체 무슨 죄냐 이 말이죠. 창세기 25장 23절에 보면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민족은 저 민족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이건 하나의 신탁이죠. 신탁은 변할 수 없습니다. 이건 확정적입니다. “이 민족은 저 민족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긴다” 지금 끝난 이야깁니다. 그런데 이걸 보는 두 쌍둥이가, 에서와 야곱, 이 이야기를 듣고, 이 신탁에서 유리한 쪽으로 자기는 일방적으로 해석을 해버렸어요. 긴 이야기는 어려우니까 아주 잘라버리고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야곱도 이 신탁에 대해서 자기가 주인공 역할을 했고 에서도 자기 좋은 쪽으로 해석을 했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 둘 중에 어느 쪽이 하나님한테 얻어맞느냐 하면 바로 얻어맞는 쪽이 그것이 잘못됐다고 이렇게 얻어맞는 쪽이 바로 야곱 쪽이었습니다. 야곱이 바로 오늘 본문에 의하면 야곱의 죄를 하나님께 용서받은 쪽 이예요.
이야기가 이렇습니다. 사람들은 운명조차도 이기고 싶어 하는 그런 본성을 갖고 있다. 어떤 경우라도 실패자 안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그 힘으로 사람은 버티고 있습니다. 그런 것이 나뿐만 아니고 다 갖고 있어요. 거기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십니다. 그러면 그 말씀은 지금 우리의 바탕은 남한테 지기 싫어하고 승자가 되고 싶고, 거기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니까 ‘딱 나네. 딱 나라. 다 나 잘되라고 주신 말씀이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해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야곱이 살아온 걸 보면, 그렇게 생각했던 그 야곱을 하나님이 야곱을 죽여 버리고 뭐로 바꾸느냐,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어 줍니다. 야곱으로서 살았던 그 모든 행색은 이제는 다 하나님의 맹세를 위한 밑거름이었다는 겁니다. ‘네가 그런 식으로 고집부리고 그런 식으로 잘난 체하는 그것도 다 쓸모없는 건 아니에요. 그런 장난, 그런 오류, 그런 실수, 그런 것들이 있어줘야 바로 전혀 색다른 예상 못한 다른 방식으로 주께서 우리를 이끄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이렇습니다. 천국의 길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뭐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해도 예수님 보입니까? 안 보이잖아요. 그러니 천국 가는 길은 우리 손에 없습니다. 항상 캄캄합니다. 막막합니다. 그걸 사자 성어로 ‘오리무중’이라. 안개에는 길이 없어요. 길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길이 끊어졌어요. 우리는 매일같이 항상 길이 끊어집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길이 없는 곳에, 길이 없다고 좌절하는 곳에, 주님께서는 ‘너는 원래 그런 천국 가는 길이 있을 필요도 없는 인간이라’라고 해서 바다에 우리 죄를 빠뜨리고 우리를 밟기 이전에 먼저 우리자신에서 죄가 나온다는 것을 먼저 보여줍니다. 그러면 그 죄를 가지고 풍~덩 하고 빠뜨리는 그곳에 비로소 예전에 미처 몰랐던 천국 가는 길이 비로소 거기에 보이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의 죄가 미끼가 되는 겁니다. 우리 죄를 끄집어내고 그 죄가 어디서 처리되는가를 우리가 시선을 가지고 그걸 따라가게 만들어요. 그래서 ‘아~!’ 우리가 잘난 체 하고 내가 영웅인 체 하고 남한테 지지 않고자 하는 이 모든 죄가 이 야곱의 죄가 어느 대목에서 이게 죄라는 것으로 들통 나서 주님이 친히 손으로 ‘자, 봤지? 죄야, 바다에 빠뜨린다.’ 하고 풍~덩 빠뜨릴 때, 바로 고 자리가 천국 가는 길이 열리는 자리입니다. 십자가입니다.
신바람 나게 살아라 말이죠. 신바람 나게 살고 브레이크도 없이 시속 250킬로로 새 차 뽑아서 달리라 이 말입니다. 패라리인가 뽑아서 한번 달려 봐요. 죽~ 달리다가 음주로 달려보세요. 달려서 결국은 절벽에 와서 박살날 때 그때 박살나면서 비로소 뭐냐 하면 ‘우리의 모든 죄는 이미 해결 났다.’는 공고가 붙어있는 그 자리에 도착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방식은 우리가 잘난 인간에서는 길이 보이지 않아요. 그런데 뭐든지 우리 뜻대로 되질 않습니다. 어떤 가수가 이런 가사를 했어요. 나는 매일같이 이별한다는 말이 있어요. 어떤 가수냐 하면 김광석의 노래 서른 즈음에, 라는 노래예요.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뿜은 담배 연기처럼
작기 만한 내 기억 속에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 속엔
더 아무 것도 찾을 수 없네
계절은 다시 돌아 오지만
떠나간 내 사랑은 어디에
내가 떠나 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 온 것도 아닌데
조금씩 잊혀져 간다
머물러 있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매일 같이 이별한다. 매일같이 나는 어제 나하고 매일같이 헤어지는 거예요. 왜냐 하면 어제치의 가짜 명품들, 사실 우리는 가짜 아닙니까? 가짜가 명품인체 잘나지도 않았는데 잘난 체 하면서 ‘누가, 누가 잘났나.’하고 부딪히고 수소 싸움하듯이 맨날 어디 가서 부딪히면서 잘 났나 시합만 하고 게임만 하고 투쟁만 하고 경쟁만 하는 것, 운명은 오라, 내가 너를 이기리라, 맨날 큰 소리만 치고 ‘세상아, 나하고 한판 붙자.’ 맨날 큰 소리만 치고 내가 얼마나 강하고 얼마나 대단하고 얼마나 똑똑하고 얼마나 잘 난 존재인지 세상과 더불어 보이리라. 맨날 큰 소리 치는 재미로 평생을 살았는데 그런 큰 소리 치는 그 죄를 하나도 하나님께서 버리지 아니하시고 고걸 다 모아서 매일같이 나오는 걸 모아서 그걸 십자가에 집어넣어버려요. 할 때 거기에 빨려 들어가서 거기서 비로소 우리의 죄를 깊은 바다에 던져서 아예 침몰돼서 아예 나타나지 않게 하시는 그 놀라운 십자가 효과를 보는 그 순간 내가 바로 하나님의 야곱으로 다뤄진다는 것, 내가 에서로 다뤄지는 것이 아니고 야곱으로 간주되어서 다루어지고 아브라함으로 간주되어서 다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좋은 소리만 하는 것 같아서 그냥 헛소리, 위로하는 소리로 들리는 것 같아서 제가 끝으로 성경 말씀 보겠습니다. 신명기 9장에 보면 간단하게 이런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서 돌 판을 만들어 줍니다. 돌 판을 가지고 내려오면서 모세는 ‘이 돌 판 가지고 백성들하고 이제는 하나님과 한 통속이 되어서 구원에 이르자.’ 라고 생각을 했죠. 그런데 그 돌 판은 깨어지기 위한 돌 판 이예요. 하나님의 생각을 모세는 미처 몰랐던 거죠. 이 돌 판은 이 돌 판이 소용없는 이 돌 판은 아무 무용지물 되는 그러한 돌 판을 가지고 내려옵니다. 아직까지는 몰랐죠.
모세가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고 다른 하나님을 섬기고 할 때까지는 몰랐어요. 자기가 목격하기 전까지는 이 돌 판이 유용하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그 돌 판을 보니까 도저히 인간들을 구원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돌 판에 있는 내용과 비교해 보니까 그게 발각된 거예요.
바리새인들이 간통한 여인을 잡아 죽이려고 돌 들고 왔을 때, 그때까지는 그들이 씩씩했고 당당했고 그들은 죄를 이긴 영웅들 이예요. ‘우리는 죄를 이겼는데 저 여인은 죄를 이기지 못했으니까 우리 손에 죽어도 마땅해.’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돌 판 같은 예수님 앞에 설 때 예수님이 이야기합니다. ‘너희 중에 죄가 없는 자가 돌로 쳐라.’ 할 때 그들은 차마 그 돌로 자기를 칠 수 없어서 돌을 놓아 버리고, 돌 판이 보이지 않는 주의 거룩한 말씀이 없는 자리로 피해버립니다. 그게 뭐냐, 예수님 앞을 피해버려요. 그러니 교회 안 나오고 주님을 안 믿는 사람들은 자꾸 피하는 전략 이예요. 계속해서 피해야 여전히 자기가 잘난 존재기 때문에. 자기가 영웅이고 우수한 존재고, 역경과 극복을 이긴 존재고 자기는 철수도 아니고 안철수가 되고 하여튼 대단한 존재고, 대선까지 따내고 뭔가 대통령 감 되고, 하여튼 예수 그리스도 없으면 자기는 천하의 대통령이고, 대통령이 안 되면 대통령을 비판할 정도로 대통령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고, 그런 즐거움도 현재 국민들이 누리는 거예요.
모세가 오해한 것이 돌 판을 깨뜨려서 ‘저런 인간은 지옥 가야 됩니다.’ 할 때 주님께서 다시 돌 판을 만들라 합니다. 그리고 그 돌 판은 기존 돌 판의 차이점이 피를 발라버려요. 마치 식빵에다 소스 바르듯이 그 돌 판에다 피를 뿌려서 피를 발라버립니다. 피를 바르고 그 다음에 신명기 9장에서 모세가 다음같이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그들의 강퍅과 악의 죄를 보지 마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성실하심으로 그 피라는 실체가 드러날 때까지 성실하심, 그 피 흘린 분이 누구냐, 라는 그 분의 정체를, 본래 하나님 모습이 드러날 때까지 그들을 이끌어서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시켜 주시옵소서. 이 피의 주인공으로 그들을 데려가시어 이 같은 인간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옵소서. 이것이 바로 모든 말씀의 완성입니다.
오늘 본문이 구약이잖아요. 구약 성도는 아직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 이끌려가고 있는 입장이라면, 오늘날 우리 같은 신약 성도들은 이미 용서받은 근거가 확보된 채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이끌려 가면서 그 십자가의 효과라 할 수 있는데, 십자가가 작용하는 효과에 의해서 우리는 구원받습니다.
제가 목요일 날 대전에서 강의하면서 교인들에게 질문했어요. 예수님이 살아있다는데 살아있으면 어떤 식으로 살아있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했다는데 예수님이 부활해서 무슨 일을 하시는데 부활하십니까? 이런 쪽으로 물었어요. 예수님은 부활했다. 부활해 놓고 가만히 있습니까? 부활해서 살아있으면 살아있는 티를 내고 작용과 활동을 하는데 그 활동이 뭐냐 이 말입니다. 부활했다는 활동이 뭐냐, ‘난 부활했다.’ 해서 온 동네 다니면서 사람들이 깜짝 놀라게 하는 활동을 했습니까?
예수님의 부활하심은 ‘나는 예수 믿습니다.’라는 것에 속아 넘어가지 않습니다. 예수님 더하기( +) 뭐냐, 쓴 잔, 쓴 잔을 먹으신 예수님, 다른 말로 하면 죽으신 예수님, 앞에 하나 붙이면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기 위해서 쓴 잔을 몸소 마셨던 예수님! 그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왜 너희들이 내가 쓴 잔을 마실 수밖에 없게 했느냐를 그 이유를 들추는 식으로 친히 자기 백성들의 운명과 인생을 이끌고 가시는 활동을 하십니다. 주께서는 우리의 죄를 익히 아시고, 어쨌든 간에 이 가짜 명품들을 바다에 빠뜨려서 주의 성실하심으로 구원되게 하기 위해서 지금도 주님께서는 세상만사가 우리 뜻대로 안 되게 하시는 그런 축복을 주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미가를 끝내면서 마지막에 하나님 맹세로 끝났습니다. 우리가 영웅이 아니고 영웅인 척하는 우리 죄를 그 죄를 끄집어서 바다에 빠뜨리면서 하나님의 진실로 주님의 맹세가 우리의 하는 짓보다 더 위대하고 더 크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이 속속들이 우리를 이끄신다는 것을 구석구석으로 우리가 접하고 체험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