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2. 11. 23) 1강 녹취록
광주 강의(2012. 11. 23) 1강 녹취록
이름 : 서경수(IP:121.176.190.236)
광주 강의(2012. 11. 23) 36-1
에스겔 36장 8절을 보면 “그러나 너희 이스라엘 산들아 너희는 가지를 내고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과실을 맺으리니 그들의 올 때가 가까이 이르렀음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여기에 ‘그러나’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 앞 3절에 보면 “사람의 말거리와 백성의 비방거리가 되게 하였도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벌을 받아서 그렇게 된 겁니다. 하지만 그 다음에 ‘그러나’가 나옵니다. ‘너희들은 하나님께 죄를 지어 벌을 받았다. 그러나 너희들은 나중에 복을 받을 것이다.’ 이런 의미가 되겠지요.
이처럼 ‘그러나’를 기준으로 앞과 뒤가 완전히 전환되는데, 하나님께서 무엇을 제공했기에 갑자기 팔자가 바뀌느냔 말이지요. 수능시험 치는 학생들도 ‘그러나’에 해당되어서 갑자기 좋게 바뀌면 좋겠습니다.
그 바뀐 근거가 뭐냐 하면, 유대인들이 BC 586년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후에 그 땅에 누가 와서 사는가 하면 에돔 사람이 차지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처음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때는 이 땅을 누구한테 준 것입니까? 이스라엘에게 준 땅이잖아요.
이스라엘에게 준 땅인데, 바벨론에게 망한 후에 귀족들이랑 기능공들은 바벨론으로 끌려갔지만 그곳에 가서 약간은 대우를 받으면서 살았습니다. 특히 여호야김 왕은 그곳에서도 궁정생활을 했고 나라에게 모든 삶을 뒷밭침해 주었습니다. BC 561년까지 그들은 건제했습니다.
여호야김은 다윗 족보입니다. 다윗 혈통을 가진 왕이 바벨론에서 대우를 받는다는 것은 그 바벨론에 끌려갔던 유대인들에게 어떤 민족적인 희망을 일으키는가 하면, ‘하나님이 끝까지 다윗 혈통을 보살피고 계시는구나. 그러니 여호야김을 중심으로 다시 옛날 다윗 왕국을 회복할 수 있는 불씨를 남겨두셨다.’ 라는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이런 민족주의적 생각을 ‘시오니즘’ 또는 ‘유다이즘’이라고도 합니다. 유다지파 외에 다른 지파는 정식 이스라엘로 인정하지 않는 사상입니다. 이 사람들이 성경을 보는 안목은, 성경 전체가 하나님께서 시대를 만들어 나갈 때 결국은 유다 자손들만 뽑아내려고 의도적으로 역사를 조정해 왔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민족주의가 정당화 되겠지요. 여호야김을 하나님이 바벨론에서도 지켜 주셔서 다시 유다 나라 회복의 씨가 마련되었다면 왕만 존재해서는 나라가 안 됩니다. 왕도 있고, 국토가 있어야 하고, 백성들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아무나 그 나라에 들어가면 안 됩니다. 유다 지파인지 족보를 확실하게 따져야 합니다. 아무나 넣어주면 안 되겠지요.
사마리아 지역에 있던 사람들은 혼혈족에 되어서 아브라함의 혈통이라고 볼 수 없잖아요. 마태복음 8장에 나오지요. ‘우리는 아브라함의 족속이다. 따라서 천국은 우리의 것이다.’라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말했습니다. 이것이 BC 167년 유다 자손들이 마키비 전쟁을 일으켜서 100년간 이끌어 오다가 나중에 헤롯 가문으로 바뀌고 그 다음에 예수님이 나타나게 되는데, 그들이 제일 먼저 생각했던 것은, 그 가문이 다윗 가문인가, 그리고 제사장도 다윗 가문에서 난 제사장. 즉 사독 계열의 후손인가 이런 것들을 중요시했습니다.
민족주의를 제가 언급했는데 여기에 대해 선지자들이 동의했겠습니까, 안 했겠습니까? 동의하지 않습니다. 하나냐라는 사람이 여호야김이 살아있다는 이유로 독립운동을 일으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신채호같은 인물입니다. 신채호 알지요. 북경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했지요.
옛날 일제시대에 독립운동가들이 두 파가 있었어요. 하나는 상해 중심으로 활동한 파가 있었고, 북경에서 활동한 사람들이 있었어요. 상해파는 좀 성공을 했지요. 테러에 성공했는데 북경파는 사전에 발각되어 성공도 못하고 신채호도 결국은 감옥에서 죽었지요.
이러한 민족주의 같은 것이 예레미야, 에스겔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70년 후에 돌아온다고 하면서 말했습니다. “너희들 포로로 잡혀가면 푹 쉬어라. 70년 후에 돌아오니까 너희 세대는 이제 끝났어. 그러니 그곳에서 편히 살아라.”고 한 거예요.
그런데 하나냐라는 사람은 “아니야, 우리는 여호야김이 있기에 몇 년만 참으면 돌아올 수 있어.”라고 한 거예요. 이런 자들을 향해 예레미야는 ‘거짓 선지자’라고 합니다. 참 선지자(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등)의 특징은 천상회의를 참관했다는 겁니다. 천상회의에 참석하고 온 예레미야는 “포로 잡혀가면 그곳에서 푹 쉬어라.”고 했습니다. 포도도 재배하고 곡식도 가꾸고. ‘너희들 시대는 끝났고, 너희 후손 시대에 돌아올 것이다.’는 겁니다.
실제로 후손 시대에 돌아왔습니다. 고레스 시대(BC 536년)에 세스바살이라는 사람을 앞장세워서 협상해서 왔고, 그 다음에 스룹바벨이라는 사람이 처음에 총독으로 옵니다. 나중에 총독이 어디까지 이어지는가 하면 느헤미야까지 이어지는데 그 기간이 약 100년 정도. 여하간 유대 총독이 있어서 나라가 아니라 바벨론 나라의 한 개 주(미국에는 50개 주가 있지요)가 됩니다.
주가 되어서 그곳에 게달랴라는 총독이 있어요. 그런데 여기서 민족주의자들이 설치게 됩니다. BC 586년에 유다의 귀족들은 다 데려가고 가난한 사람들만 남겨서 농사를 짓게 했는데, 그 때 안 가고 버텨 남은 군벌들이 있었는데, “우리는 다시 합쳐야 된다.”고 해서 등장한 사람이 이스마엘이에요.
이스마엘이라는 사람이 게달랴라는 총독을 살해했어요. 그래서 BC 586년에 끝났는데, BC 582년인가에 다시 와서 “이게 어디 우리 총독을 죽여” 하면서 쳐들어와서 5,000명을 포로로 잡아갑니다. 그 때 이스마엘은 겁나서 애굽으로 도망을 갑니다. 북쪽에서 쳐들어오니까 남쪽으로 도망간 거예요.
도망갈 때 바룩(예레미야 비서입니다)이라는 사람과 예레미야를 잡아가요. 잡아가면서 계속 물어요. ‘우리가 하는 일이 신앙적으로 너무나 옳기 때문에 언제쯤 우리나라가 회복 되겠는가?’ 다윗 혈통 여호야김 모시고, 다윗에 속한 제사장 모셔서 언제 다윗 언약대로 회복될지 물으니까 예레미야는 말합니다. ‘그러지 말고 그냥 바벨론에 포로 잡혀가면 된다.’고 해요.
예레미야는 이미 예언했어요. 에스겔에도 나옵니다. “큰 독수리(바벨론)와 또 다른 큰 독수리(애굽).” 천상회의에 참석한 사람만 영적인 안목에서 역사를 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정치적 안목으로 봅니다. 사실 정치라는 것은 추상적인데, 그 밑바탕은 경제입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잘 보세요. 박근혜, 문제인 이 사람들이 정치인이잖아요. 어제 전국 버스회사가 대모를 했지요. 버스회사가 정치하는 사람들입니까, 기업입니까? 경제활동 하는 사람이잖아요. 그냥 버스 운전해서 월급 받으면 되지 파업은 왜 합니까? 택시는 택시 운행하고, 버스는 버스 운행해서 월급 받으면 되지 정치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우리는 정치인들이 필요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운전사들이 왜 정치적 행동을 합니까? 스스로 자학하듯이 “나는 버스 안 몰래.” 이러면서 삐치는 거예요. 운행 안하면 본인만 손해지요. 그래서 하루 만에 철회를 했는데, 버스를 굴리고, 안 굴리고는 스스로 결정해서 행동하면 되는데 왜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시위를 하는 것입니까?
국회에서 택시를 대중교통으로 인정하는 법안을 만든다고 하니까 정치인들이 보라고 시위를 하는 거예요. 사람이 노동을 해서 이익을 남긴다. 이것은 경제지요. 그런데 여기에서 한 자를 더 넣습니다. ‘더 이익을 보겠다.’ 이것은 경제를 벗어난 거죠. 이렇게 되면 이것은 정치가 됩니다.
이 ‘더’는 어디서 나와야 되는가 하면, 노동을 했는데 ‘덜’이익을 봤다. 이 ‘덜’이 바뀌면 ‘더’가 되는 거예요. 정치꾼은 모사꾼인데, 그러면 정치꾼을 없애면 되지 않겠는가? 정치를 없애려면 한 가지 조건 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노동에서 소득을 얻을 때 ‘더’를 포기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 세상 인간 중에 내 노동의 대가가 어느 정도인지를 정확히 판정하고, 그것에 만족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항상 ‘더’를 원하지요. ‘더 큰 이익’을 바라요.
복지는 사람들이 얻은 소득으로 세금을 내서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는 겁니다. 그런데 복지로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었는데 세금을 잘 내지 않아 복지금을 내린다고 하면 가난한 사람들이 화를 냅니다. 공짜로 받았는데 그 금액이 줄어들면 분노합니다. 공짜를 받을 때부터 그것을 공짜로 여기지 않고 공짜를 받아 챙기는 것이 노동이 되었어요. 이상하지요?
그래서 성경에서 보는 경제는 우리를 빌어먹어도 되는 상태로 만들어버립니다. 우리는 완전히 굶어 죽어도 마땅한 자라고 합니다.
제가 강의 시작하면서 “그러나”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속에 뭐가 있기에 이렇게 갑자기 하나님이 좋은 방향으로 이야기하는가? 그것은 구원 받아야 될 인간이 자기 노동의 대가를 받을 자격이 없음이 완전히 확인될 때, 그 때 주의 이름이 높아지는 겁니다. 내 힘으로 내가 얻겠다는데 하나님이 왜 개입하는가? 이렇게 되면 주의 이름이 욕을 얻어먹어요.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축복을 줄 때는 우리 이름으로 했던 모든 것이 아무 쓸 데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확인시키고 난 그 바탕 위에 하나님의 이름이 비로소 일을 개시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유다 지파 사람들이 거하는 땅에 에돔 사람들이 와서 차지하고 있으니까 하나냐라든지 이스마엘같은 독립투사들은 강력하게 정치적인 호소를 하는 거예요. “우리가 단결해서 옛날 다윗의 영광을 회복합시다. 성경 말씀 그대로 다윗의 혈통으로 계신 그 왕을 모셔서 나라를 회복하기 위해 에돔을 우리 땅에서 몰아냅시다.”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요.
여기에 대해서 예레미야는 뭐라고 합니까? “네가 바로 거짓 선지자다.”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그들은 천상회의를 다녀오지 않았기에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따라 정치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날 교회가 교회가 아닌 이유는 사람들의 뜻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교회가 아닌 겁니다.
천상회의를 다녀온 선지자의 공통점이 있어요. ‘저는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이 땅에 살 가치도 없고 이유도 없습니다. 회개할 가치도 없습니다. 내 이름을 위한 모든 행위를 다 접어야 되고 오직 주의 이름만을 위해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 됩니다.’
에스겔의 출발이 그래요. 그랄 강가에서 계시를 받아요. 포로 잡혀 온지 5년 만에. 포로 잡혀 온 것이 BC 587년이고, 계시 받은 것은 BC 583년입니다. 계시를 받았는데 수레인데 수레의 모양을 보니까 바퀴가 있는데 그 속에 또 바퀴가 있어요. 그리고 바퀴를 지탱하고 있는 모양새는 사람도 아니고 짐승도 아닌, 반인반수의 괴물들이 있고, 그 괴물들이 외부의 모양새를 형성하고, 바퀴를 움직이는데 바퀴 안의 바퀴를 보니까 거기에서 인자(사람)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 사람의 모습은 고난 받는 모습이에요. 인자의 모습인데 죽음을 품고 이 땅에 나타나신 분. 그분이 하나님 안에 들어 있고(바퀴 속에 바퀴가 있고), 그 안에 계신 분이 활동력으로 등장하면서 나중에 인자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게 되지요. 바퀴 속의 바퀴라는 것은 천지창조의 창조자 모습입니다.
창조이전에 창조자의 모습에서 창조가 전개되거든요. 그게 뭐냐? 죽음이 거기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사람의 존재보다 죽음의 존재가 우선이지요. 사람보다 십자가가 우선입니다. 사람보다 죽음이 먼저 있고, 그 죽음을 보여주기 위해 사람이 있는 겁니다. 아담이 흙이 되어야 할 이유는 바퀴 속에 숨어있는 죽으시는 하나님을 소개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선악과에 걸려들어야 되고, 아담이 죽음으로 아담 죽음과 또 다른 마지막 아담의 죽음을 증거하기 위해 아담은 죽게 되는 겁니다.
그런 실재적인 하나님을 봤어요. 그랄 강가에서 환상을 봤는데 그 바퀴 안에 처음에는 없었는데 나중에 뭔가 도달된 게 있어요. 하나님의 신이 바퀴와 달라붙었어요. 원래 하나님의 신은 어디에 계셔야 하는가 하면 성전 동편에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그랄 강가에 날아와서 여기 들어붙어버려요. 그리고 그 들어붙은 곳이 뭐냐? 하나님의 보좌입니다.
그것이 수레바퀴인데 바퀴는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원하는 대로 마음껏, 어떤 방해물이나 저항 없이 자유롭게 움직이는 거예요. 이 환상을 에스겔이 본 거예요. 하나님의 신과 여호와의 이름이 만나는 이 광경을 인자라고 호칭되는 에스겔에게 미리 보여준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성전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의 성전은 어디 있느냐는 것은 성립이 안 되고, 어디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에스겔이 말씀을 듣는 그 자리가 곧 하나님의 성전이 됩니다. 제가 지난 수요일 설교했지요. 구원은 말씀으로 됩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교회가 구원을 준다는 주장이 말씀으로 구원되는 것을 훼손하고 훼방하는 겁니다.
‘나 교회 다녔다’로 ‘나 구원 받았다’를 대신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안 듣습니다. 교회 없으면 안 되지만 말씀은 없어도 살 수 있다고 여깁니다. 이런 인식 때문에 거짓 선지자들이 판을 칠 수가 있는 겁니다. 거짓 선지자의 주 메뉴가 뭔가 하면, 매일 이동하는 말씀의 위력은 모르고 늘 교회만 붙들고 있어요.
좀 더 상세히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솔로몬 이후에 남,북이 갈라집니다. 솔로몬의 잘못 때문에 다윗 언약이 깨어지면서 갈라지는데, 그때부터 제사장은 제사지내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을 가르치는 역할을 했습니다. 에스겔이 제사장 출신입니다. 천상회의에 참석했던 선지자의 말이 성전이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진짜 백성과의 소통이 가능하면 됩니다.
에스겔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했는데, 이것은 에스겔의 요청에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역사였습니다. 그러면 에스겔을 통해서 예전에 없었던 새로운 말씀의 사역이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환상을 본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듣게 되면 실제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일은 지금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활발하게 활동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예루살렘에 있던 성전의 기능은 이제 그 역할을 다 한 겁니다. 그리고 땅, 민족 모두 역할이 다 끝난 거예요.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그 귀족들을 바벨론으로 옮겨 가도록 했습니다. 그 때 예레미야가 뭐라고 했습니까? ‘70년 동안 포로가 되어야 한다.’라는 말씀이 실제로 이루어지면, 그 말씀 안에 담겨 있으면 계속 진척되고 있는 하나님의 언약된 백성입니다. 그런데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문제입니다.
쉬나고게라는 것이 뭔가? 바벨론에 포로 잡혀 간 유다 백성들이 70년 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왜 안 돌아오는가 하면, 돌아오는 것 자체가 새로운 모험입니다. 지금 서울에 잘 살고 있는데 광주에 왜 갑니까? 살던 곳을 떠나면 새로운 곳에서 또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데 쉽게 갈 수 있겠습니까? 못갑니다. 그래서 안 돌아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는가? 애굽으로 많은 사람이 갔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간 것이 아니고요. 예루살렘은 살기 적합한 곳이 아닙니다. 비도 잘 안 내리고 겨울에는 춥고 경작지도 많지 않아요. 지중에 이쪽 동네가 원래 농사가 잘 돼요. 해안지방이라 무역도 활발하고 잘 사는데, 예루살렘이 있는 내륙 지방은 별 볼일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애굽으로 갔습니다.
바사의 고레스 왕이 유대인들을 돌아가라고 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기 좋은 애굽으로 갔고, 사명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들이 성전 짓는데 몰두했지만 성전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을 섬긴다는 것은 완전하게 망해야 비로소 하나님이 보인다는 것을 부각시킨 겁니다.
사람이 망하지 않으면, 인간이 자기 죽음을 긍정하지 않으면, 내가 죽어야 마땅하다는 것을 수용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아무 의미도 없고 소용도 없는 겁니다. 하나님이 의미 없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도 필요치 않는 겁니다. 지금 살만하니까 말씀을 안 듣는 거예요. 떡으로 잘 사는데 말씀이 왜 필요합니까?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오”라고 하니까 “떡으로 살 때까지 한 번 살아보자.”고 하는데 어떻게 말씀에 귀 기울이겠습니까? 성경공부를 하기는 하는데, 그 이유는 혹시 떡을 더 많이 받을까 싶어서 하는 겁니다. 떡은 살라고 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 먹어도 사는 것이 아니구나.” 즉 죽음을 경험하라고 떡을 준 거예요.
에스겔은 말씀으로 사는 것을 보여줍니다. 390일 동안 오른쪽으로 눕고, 40일 동안 왼쪽으로 누워 잠을 잤는데, 390일은 이스라엘의 죄 값을 치르는 거예요. 죄 값이 없는 구원은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인생을 사는 것은 그냥 죄 값으로 사는 거예요. 산다는 자체가 죄 값이에요.
살아가면서 내가 하는 일이 나를 망하게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혹독하게 체험해야 돼요. 백수라면 백수가 나를 망하게 하고, 교사라면 교사의 일이 나를 망하게 하고, 목사는 목사의 일이 나를 망하게 합니다. 그러니 이렇게 해도 망하고 저렇게 해도 망합니다. 죄 값을 치르는 그 자체가 구원의 첫발을 내딛은 거예요. 구원 쪽으로 가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에스겔이 보는 것은 뭔가 하면 갈림길입니다. 인자의 죽음이 보이는 곳으로 갈래, 아니면 내가 사는 쪽으로 갈래? 이것이 한 순간만이 아니고 매일같이 갈림길이 있어요. 그러면 우리는 매일같이 내가 사는 쪽을 선택합니다. 인자의 죽음 쪽으로 사는 것은 말씀으로 가는 것인데, 우리는 떡이 있는 쪽으로 갑니다.
오늘 낮에 십자가마을에 [성경 해석]이라는 글을 올렸는데, 이런 내용입니다. 떡을 먹고 배불러서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고 옵니다. 그러면 따라오는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현실관이 있을 것 아닙니까. “야, 저 예수님은 우리 현실관에 부합된다. 저분만 있으면 우리가 기대했던 현실은 보장된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 말씀이 “너희들이 나를 따르는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 너희들과 같은 현실관 때문에 죽임 당할 내 피와 살이 진정 너희를 살린다.”라고 할 때 사람들은 다 떠나고 다시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지요.
요즘 대통령 선거하면서 야권 후보 단일화가 계속 거론되는데, 제자들과 예수님은 단일화가 안 돼요. 그렇다면 모든 성경이 이 결별성이 포함되어 있어요. 인간은 주님과 결별하고 독자적인 길을 가는데 그런 인간을 주님은 끝까지 찾아가는 그 위력. 그래서 주님의 이름을 믿게 되는 경우가 어떤 경우인가 하면 ‘나는 주님과 결별하고 싶은 마음이 내 속에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발견할 때 비로소 우리는 주의 사랑을 알고 은혜를 알게 됩니다.
이것을 로마서 1장에서는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고 했어요. 그러니 우리가 어디까지 가야되는가 하면, 우리가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그 마음이 나의 가장 근본적인 마음이라는 것이 발각당하는 자리까지입니다. 그러면 구원 받고 발각 안 되면 지옥 갑니다.
하나님께서 늘 갈림길을 주시는 것은 불신자를 만들어 내기 위함입니다. 불신자는 본인이 불신자 되려고 가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불신자 되도록 일하시고, 신자는 신자 되도록 하십니다. 노래 가사 중 이런 것이 있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우리는 사랑 받고 있어요.” 이 가사를 바꿔야 돼요. “당신은 저주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우리는 저주 받고 있어요.” 이렇게.
불신자가 저주 받는 이유는, 본인의 선택이 죽는 쪽이 아니고 매일같이 사는 쪽으로, 그러니까 말씀을 포기하고 떡이 있는 쪽으로 방향을 틀도록 주께서 그렇게 인도하십니다. 이 저주 받을 민족주의가 왜 생겼는지 압니까? 예레미야나 에스겔이 없으면 그것이 저주 받을 일이라는 것이 들통 안 납니다. 주님은 그 많은 사람 가운데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을 천상회의에 참석케 하신 후에 보내니까 비로소 그들 눈에 거짓 선지자가 민족주의라는 것을 알 수 있었지요.
36장 26절을 봅시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여기에 ‘영’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에스겔이 성신을 받았기 때문인데, 뭐가 어려운가 하면, 영의 문제와 외부에서 일어나는 정치적 문제가 어떻게 연관되는가 하는 점입니다.
“내가 성령 받았습니다.” 라고 하면 갑자기 광주에 아파트가 무너집니까? 바깥에 있는 물질적인 변화가 내가 성령 받은 것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이 문제가 난해하지 않습니까? 민족주의자들 입장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이여, 정치적으로 외세를 물리쳐 주시면 우리는 다윗의 자손 여호야김을 왕으로 모시고 장차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겠습니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오소서. 다시는 주의 말씀을 어기는 죄를 짓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나옵니다.
생각이 있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 주님을 에스겔을 통해 해답을 주시는데, “네가 새로운 영을 받아라.” 이렇게 나와요. 새로운 영을 받는 것과 정치적, 경제적 독립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지금 버스 업체에서 택시 회사에 보조금 주지 말라고 데모하는데 에스겔이 와서 “성령을 받으세요.” 라고 했는데, 그러면 버스 업체의 문제가 해결됩니까?
현실적으로 뭔가를 줘야지요.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날 때, “야, 배불리 먹었다. 예수님만 계시면 우리의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된다.”고 할 때, 예수님 말씀이 “내 살과 내 피를 먹으라.”고 하셨는데, 이게 현실성이 있는 말씀입니까? “아, 살과 피를 먹으면 떡도 먹을 수 있겠구나.” 이런 발상밖에 안 나와요.
그러니까 육적인 사람에게 영적인 말씀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요. 예수님 말씀 자체가 이 시대에 전혀 소용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씀에 관심이 없고 실제적으로 돈 버는 쪽으로 갑니다. 이게 바로 “당신은 저주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주께서 이런 쪽으로 몰아세웁니다.
에스겔이 본 환상이 수레인데, 바퀴가 달린 수레 안에 인자가 탔습니다. 죽어야 될 인자가 수레를 타고 왔을 때 이것이 실제로 에스겔을 통해서 나타날 때 에스겔은 뭐라고 부르는가? 인자라고 불렀지요. 인자에서 나온 에스겔의 행동을 보세요. 정상이 아닙니다. 우편으로 390일을 눕고 이게 뭡니까? 에스겔이 보여주는 것은 뭔가? ‘이 백성이 죄를 지었고, 이 죄로 말미암아 멸망을 받고, 너희들이 멸망함으로 내 이름이 세상에서 영광 받으리라.’ 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관심사는 뭡니까? 우리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 자기 이름의 존재감, 그 이름이 영광 받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면 어떤 경우에 이것이 보입니까? 내가 망해야 됩니다. 어떻게 망하는가? 천상회의에 참석한 분의 안목에 의하면 우리는 죄인이고, 죄로 인하여 망한다. 죄와 멸망의 관계가 성사될 때만 이런 일을 행하신 주의 이름을 찬송할 수가 있는 겁니다.
제가 어떤 설교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베드로에게 주님이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를 많이 잡았는데, 그 때 베드로가 “내가 바보같이 왜 오른편에는 그물을 던지지 않았지. 멍청하군.” 이렇게 말했습니까? 아니지요.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라고 했어요.
베드로는 고기를 많이 잡았는지 아닌지 그런 경제적 문제를 떠났습니다. 그런 것은 손을 놓았지요. 이게 에스겔 36장 26절 말씀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새 마음이 온 겁니다. 새 마음이란 어떤 성과 쪽으로 하나님의 일을 엮지 말라는 겁니다. 수능 점수와 하나님을 엮지 말란 말이죠. 수능 시험을 앞둔 학생에게 이게 진짜 복음입니다.
새 마음은, “너희 교회 몇 명 나오니?” 또는 “헌금 얼마나 나왔는데?” “교회 출석한 후에 사업이 얼마나 번창했는데?” 이런 성과가 아닙니다. 육적인 인간이 측정 가능한 그런 쪽이 아니고 도무지 측정이 안 되는 겁니다. 왜냐? 십자가가 보이기 때문에. 예수님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보이는데 거기로 가는 길이 없습니다. 길만 있으면 찾아가지요. 길이 없는데 필요할 때 주님이 만들어 냅니다.
주님 십자가가 보일 때 동반해서 저주의 길도 보여주십니다. 돈을 쫓아가면 저주고, 돈 쫓아가는 것이 나쁘다는 것을 알면 십자가가 보입니다. 제 말은 육적인 행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가짐을 말하는 겁니다. 다시 말하자면, “나는 돈 안 좋아하고 주님만 섬길 거야.”라는 행동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돈만 좋아해!” 라는 것을 발각당하면 그것이 바로 십자가가 보이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내가 목사가 되어 복음 전하는 이것이 나를 망하게 하는 길이라는 것이 보이면 그것이 구원 받은 목사입니다. 이런 목자 찾아보기 힘듭니다. 거의 없어요. 자기가 하는 일이 자기를 망하게 한다는 생각을 왜 못할까요? 그것은 새로운 영을 받지 않아서 그래요. 천상회의를 안 가도 괜찮습니다. 천상회의를 다녀온 에스겔이 새 영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
에스겔의 말은 예언입니다. 인자이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 받으면서 ‘내가 세례 받은 것은 세례를 줄 자이기에 세례 받았다’고 하지요. 인자 되시는 분이 우리에게 세례를 줄 때는, 성령을 받게 되면 새로운 영이 오게 됩니다. 그러면 길이 아닌 곳인데 길이 나와요. 그리고 기존의 인간들이 알고 있었던 길은 지옥으로 통하는 길임이 밝혀집니다.
에스겔의 경우에는 자기가 어디로 갈지, 무엇을 할지 예측을 못했어요. 성신이 에스겔을 강권적으로 이끌기 때문이지요. 제게 얼마 전에 [해골 더미]라는 글을 섰는데, 에스겔과 하나님의 대화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됩니까? 바짝 마른 해골 골짜기로 데리고 가서 에스겔에게 말씀을 하시지요.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묻습니다. “저 해골들이 살겠느냐?” 이게 질문이 됩니까? 물을 것을 물어야지.
성도가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때는 꼭 이런 식입니다. 답변할 수 없는 질문을 하십니다. 이 말이 뭔가 하면, 내가 그동안 생각했던 모든 것은 육적인 인간들도 같이 생각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구원은 주님의 은혜로만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안 되는 낯선 길, 주님의 말씀이 임할 때 새롭게 등장하는 길, 이것은 우리가 예측 불가능한 길입니다. 반전이 있지요. 반전이 한 두 번이 아니라 매일 반전이 일어나서 내가 예상치도 못한 쪽으로 인도하십니다.
이것은 불신자도 못하지만 나도 그 생각을 못했고, ‘내 힘으로는 안 됩니다.’ 라고 할 때, 이 짧은 순간은 우리 이름을 포기하고 더 이상 나의 가능성에 의지하지 않습니다.
10분 쉽시다.
(2012. 11. 30. 09:28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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