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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사도행전43강, 마태복음 34강 121129강의사도행전

사도행전43강, 마태복음 34강 121129

이름 : 이근호(IP:119.18.78.175)

이한례(IP:203.♡.41.16)

12-12-02 08:37

대전121129a-행17장22(예상 밖의 신)43강-이 근호 목사

여기 사도행전 17장 22절부터 보면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면 너희의 위하는 것들은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상당히 사도바울이 건방진 이야기를 했어요.
사도바울 : 너희 신 안 보이지?
아덴 사람들 : 안 보입니다.
사도바울 : 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지?
아덴 사람들 : 모릅니다.
사도바울 : 내가 알려줄게.

야~! 이건 상당히 대범한 건지, 무모한 건지, 아니면 뒤 감당 안 되는 소리를 지금 내지르는 건지, 상당히 곤란한데 우리가 사도바울의 본문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부터 한번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 부활했죠? 맞죠. 부활이란 말은 뭐냐 하면 지금 안 죽고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살아있다. 살아있으면 그냥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활동을 하겠죠? 활동을 한다. 자, 예수님 부활했다. 부활한 걸 뭐로 바꾼다 했습니까? ‘살아계시다.’는 의미로 제가 방금 바꿨습니다. 그래서 활동한다 했는데, 예수님이 살아계신다면, 그러면 여기 우리 자신을 한번 봅시다. 우리는 부활 안 했죠? 그런데 우리는 부활 안 했는데도 불구하고 뭐라 하느냐 하면, 우리는 현재 살아있는 나, 살아있다고 보잖아요?

자, 둘 중에 어느 것이 제대로 살아있다고 봅니까? 질문 자체가 어려운데요. 우리 보기는 예수님이나 우리나 다 살아있는 걸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뭘 거쳤습니까? 부활을 거쳐서 살아있는 거죠. 부활체로 살아있는 거죠. 그런데 우리는 방금 부활이 없다 했잖아요. 부활이 없어도 살아있는 것이 맞느냐 하는 문제를 우리가 먼저 생각해 봐야 됩니다. 부활이 없어도 살아있는 게 맞느냐. 부활이 없이 살아 있으면 이건 어디로 가느냐 하면, 죽으러 가는, 사실은 죽기 직전이죠. 죽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죽음은 축구에서는 골키퍼가 있는 골대, 골키퍼는 천사, 천사들이 심판한다 하니까 기다리고 있고 우리의 공은 방향이 다른 방향으로 빠질 수가 없어요. 재벌이 되었든, 국회의원이 되었든, 아니면 문oo이 되었든 박oo가 되었든, 자기가 지금 살아 활동한다고 하지만 어떤 대선을 위해서 대통령 되기 위해서 어떤 활동을 하던 간에 그 박oo란 공의 방향이 바뀌지 않습니다. 그가 하는 일을 통해서 그는 죽습니다.

하는 일이 피아노를 치잖아요. 피아노를 잘 치는 일을 통해서 서서히 죽음에 접근해 가고 있습니다. 도킹한다 하죠. 두 개의 비행선이 만나는 것처럼, 죽음이란 거대한 행성에 작은 별이 접근해서 죽음에 충돌합니다. 이걸 제가 설명하기 위해서 지난주일 아침에 뭐라 했느냐 하면, 얼른 지나가면서 이런 이야기했어요. ‘나의 존재보다 죽음이 앞선다.‘ 하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SF영화 같은 공상과학영화에 보면 죽음이 거대한 별이라면, 여기 우리는 작은 행성이 되어서 여기서 서서히 접근하여 충돌하게 되는 겁니다. 설마 별이 다가와서 우리를 친다는 이런 생각은 안 들겠죠. 왜, 이 별이 너무 크니까.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죽음은 내 존재보다 더 큽니다.

그래서 저는 여기다가 어떤 단어를 쓰느냐 하면, ’함몰‘이란 단어를 쓰고 싶어요. 함몰!! 함몰이란 것은 삼킴을 당하는 것을 함몰이라 하죠. 거대한 것이 작은 나의 인생을 이렇게 아가리를 벌려서 그냥 삼켜버리면, 분명히 조금 전까지는 내가 여기 있었는데 삼켜버리면 나는 뭐가 되느냐 하면 나는 사라짐이 됐죠. 그러니 없는 거예요.

구약에 욥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저를 삼켜달라고 이야기를 해요. 참, 얼마나 아팠으면, 지금도 말기 암환자라든지 고통스럽게 있고 진통제 10개를 먹어도 고통이 안 낫는 그런 사람들은 소원이 그럴 거예요. ‘죽음아 나를 그냥 집어 삼켜라.’ 자살이란 것도 자기가 자기를 죽는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자살도 사는 것보다 죽음이란 생각이 더 좋아 보일 때 이미 그건 죽음이 삼킴을 당한 거예요.

사람은 항상 사업이 잘될 때도 있고 못 될 때도 있고, 집안이 화평할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고, 항상 생각하는 것은 차라리 이럴 것 같으면 내가 죽음까지 갈 필요도 없이 먼저 앞당겨서 죽음이 이렇게 나를 삼켰으면 좋겠다. 그러면 나는 뭡니까? ‘나’가 사라지게 되면 나의 현재 지금 당하는 모든 고민과 걱정과 염려 불안과 잠 오지 않는 불면증, 육체적인 아픔, 그리고 남들의 따가운 시선, 이런 것도 한꺼번에 그만 내 자신이 없어지니까, 그래서 평소에 우리는 어떤 거대한 별 앞에 있는 작은 행성이라는 이런 식으로 우리는 사실은 존재하고 있습니다.

목성에서 목성을 향하여 로켓을 올렸을 때 사진을 찍어왔는데 목성이란 지구보다 50배 큰지 엄청나게 커요. 그 목성 앞에 위성이 있는 게 사진 찍혔어요. 그 모습을 보게 되면 우리자체로서는 뭔가 중요한 것 같고 나한테는 내가 소중한 것처럼 평생을 그렇게 느끼고 살아가는데, 막상 죽음 앞에서는 모든 인간도 공평하고 차별이 없고 죽음은 아까 냉정하다고 누가 이야기했지만, 죽음은 우리가 냉정한 것 이상의 냉정해요. 사람이 주머니 있는 돈 강도한테 다 털리고 갖고 있는 명예, 위신, 체면 다 털리면 결국 우리가 치장하겠다는 이 치장 같은 걸 다 떨어져 내면 결국 인간에게 주머니에 가득 담겨 있는 건 뭐냐, 죽음만 담겨 있습니다. 인간은 죽음이 인간을 만들어 낸 거예요. 죽음의 긴 목젖이라 볼 수 있어요. 죽음의 일부라 볼 수 있어요. 죽음의 뾰루지라고 볼 수 있어요.

예수님은 그걸 이미 겪었습니다. 이게 오늘 제가 강의하는 초점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이잖아요. 이미 그걸 겪었어요. 겪고 난 뒤에 놀랍게도 죽음에 함몰되지 않았습니다. 그걸 가지고 찬송가 가사에 나오죠. ‘죽음을 이기시고~♬’ 죽음을 이겼어요. 예수님이 본디오 빌라도에게 진 거 맞죠. 예수님은 가야바 제사장에게 졌다. 맞아요. 예수님은 민중들에게 인기를 잃었다. 맞습니다. 예수님은 심지어 베드로한테 배신당했다. 맞습니다. 그러나 정작 주님께서 싸우고자 하는 적은 사람이 아니무니다. 사람이 아니에요. 사람이 아니고 바로 정작 아버지께서 앞장세우신 것은 죽음을 이긴 거예요.

그러면 죽음을 이긴 예수님이 살아있습니다. 살아있으면서 활동을 하십니다. 자,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뭐냐, 이미 죽음을 이기신 분은 어떤 활동을 할까? 죽음을 앞두고 있는 우리는 어떤 활동을 할까? 활동의 차이를 알고 있어야 됩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우리는 죽음을 앞두고 있기 때문에 살아보려고 교회 가고 살아보려고 예수 믿고 합니다. 그건 다 부질 없는 거예요. 이미 산 사람이 아니면 우리는 살려고 애써도 그건 구원되지도 못하고 천국 못 갑니다.

교회라 하는 것은 위험한 곳 이예요. 사람을 자꾸 살리려고 하니까 위험한 곳 이예요. 차라리 ‘당신은 죽습니다. 뭘 해도 죽습니다. 뭘 해도 목사 돼도 죽습니다.’ 이러면 참 좋은데, ‘나도 죽고 여러분도 죽습니다.’ 이러면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는데, 그게 아니고 자꾸 ‘이렇게 하면 살 수 있습니다.’ 하니까 그들은 살고자 하는 본능을 계속해서 더 억지에, 억지에 억지를 부리는 거예요. 갓 바위 무당한테 빌 듯이. 예수한테 빌어서 살려달라고 비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살려달라고 비는데 응답을 안 하시거든요. 자기 목숨을 주께서는 ‘자기를 죽이는 자는 살 것이요’ 죽이려고 하는데 사람들은 그 소리가 귀에 안 들리는 거예요. ‘어쨌든 간에 지금 죽으면 안 돼요. 살려주세요. 시집도 가야 되고 장가도 가야 되고, 살아나야 됩니다.’ 살려고 빌고 있는 거예요. 종교라 하는 것이 얼마나 왜곡된 거예요.

자,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살은 입장에서, 살고자 하는 우리와 어떤 차이가 나느냐? 고린도후서 5장 21절을 제가 예를 들겠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 내용은 이런 내용입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죄인으로 만들었다. 그 이야기예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죄인으로 만들어서 그를 믿는 자를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셨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돈 보따리를 줘서 자기를 믿는 자에게 돈을 나눠준 게 아니에요. 돈을 나눠준 게 아니고, 권력을 나눠준 게 아니고, 교회 부흥을 나눠준 게 아니고, 건강을 나눠준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죄인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걸 모델로 삼습니다. 누구든지 자기가 의인이라 하지 말고 방향을 반대로 트는 거예요. ‘죄인 되고 싶은 사람 나와, 그럼 의인으로 만들어 줄게.’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방법을 쓰신 거예요. 야~! 이거 누가 알까요? 성경에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나와 있어도 아무도 거기에 눈독 들이는 사람 없어요. 성령 받지 않고서는 아무도 눈독 못 들입니다. 한번 찾아봅시다.

이제사 말한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 뭐를 삼았다? 죄를 삼으신 거예요. 이 방법 외에 다른 하나님은 다 가짜입니다. 이 하나님이라는 자체가 가짜예요. 인간의 추상적 관념에 불과하고 이념에 불과한 거예요. 사람들이 조작해 낸 거예요. 진짜 하나님은 이 방법 외에 다른 방법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질 않습니다. 이 세상에 죄 없는 분이 한분, 예수님밖에 없어요. 하나밖에 없는 의인마저 뭐로 바꿨습니까? 죄인으로 바꿨다는 말은 ‘모든 인간은 일단 죄인으로 있어줘.’ 이 말입니다.

그 다음에 죄인으로 있는 것 중에서 천국 갈 사람은 아버지의 뜻과 예수님의 뜻에 의해서 차출되는 식입니다. 뽑히는 식으로, 그걸 선택이라 하는데 뽑아내는 식으로만 그게 천국에, 로또에 당첨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로또하려면 로또복권을 사야 되잖아요? 우리는 아예 살 필요도 없습니다. 안사도 돼요. 일단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삼는 겁니다. 그게 창녀 짓을 했든, 교도소를 100번 왔다 갔다 했든, 목사가 됐든, 백수가 됐든, 일체 그것과 천국 가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뽑기 나름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고유의 어떤 자격이나 능력이라든지 하나님에 대한 어떤 좋은 호감 이런 것은 일체 고려대상이 안 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악한 감정을 가졌나, 좋은 마음을 가졌나, 그런 것도 아예 묻지 않고 구제를 많이 했나, 그런 것도 하지 않습니다. 교회 얼마나 봉사했고 교회 몇 십 년 희생하고 그런 것도 고려대상이 안 돼요. 왜, 모든 인간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이걸 사도바울이 알은 겁니다. 사도바울이 이걸 알게 된 것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활동이 바로 거기에 초점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 제일 먼저 알게 된 것은 ‘내가 바로 죄인 중에 괴수다.’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그런 게 아닙니다. 인간의 양심은 믿을 게 못 돼요. 예수님을 만난 그때의 사도바울은 성령에 의해서,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주님에 의해서 내가 죄인 됨을 알았다. 그래서 예수님을 주라고 섬긴다는 말은 필히 전제가 뭐냐 하면, 자기가 당연히 죄, 죄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그냥 죄인으로 출생한 거예요.

그 죄인으로 삼으신 것은 예수님이 부활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부활했을 때는 그만한 근거가 있어야 돼요. 예수님이 죄인 됐는데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를 건질 때는 예수님께서 모든 뜻을, 하나님 말씀을 다 이뤘다는 그 근거를 봐서 예수님을 사흘 만에 부활했다 이 말이죠. 그 근거가 되는 것을 성령께서는 딱 뽑아내요. 딱 뽑아내서 예수도 아니지만 예수님이 하신 걸로 쳐줘서 그 사람을 하나님의 의인되게 합니다. 일은 예수님이 해놓고 거기 합세하게 만드는 거예요. 성령을 가지고 풍덩, 풍덩 집어넣게 만들어요. 예수님이 홀로 다 이루신 그 의로움에 다 집어넣는 거예요. 집어넣어버리면 거기서 우리는 뭐가 되느냐 하면 예수님의 하는 일에 동참하는 하나의 재료로 쓰임 받는 사람이 돼 버려요.

그러면 우리에 대한 것은 우리자신이 책임지는 게 아니고, 그러니 우리가 예수 믿는 것에 대해서, 그 믿음에 대해서 우리가 책임지면 안 돼요. 믿음 관리를 우리가 하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신앙생활 하는 주체는 우리가 아니에요. 신앙의 믿음이란 관리를 우리가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성령이 알아서 믿음 신앙을 관리해 주십니다.

어떻게 관리하는가, 미리 말씀드릴게요. 하나님께서 우리 신앙 관리를 어떻게 하느냐 하면, 우리 마음속에 온갖 가능성을 다 떠오르게 만들어요. 해놓고 그걸 전부 다 비껴가 버려요. 그걸 가지고 사자성어로 ‘오리무중(五里霧中)’ 이라 합니다. 길은 항상 우리가 길을 생각해도 그 길을 비껴가니까 안개 속의 길처럼 오리무중이라. 길이 없어요. 없는 길을 가게 합니다. 지난번에 했는가, 눈이 왔는데 길이 다 덮인 상태에서 길이 없잖아요. 그럼 내가 가는 그 발자국이 곧 내가 가는 길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자부심을 가져야 돼요. 여러분들이 잘 믿는 사람 안 따라가는 자부심을 가져야 돼요. 여러분을 주께서 좁은 길로 영생의 길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방식이니까 남들 부러워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제가 어제 십자가 마을에 글을 하나 올렸거든요. 서 경수 목사님의 주례사, 나는 항상 서 경수 목사님 보게 되면 항상 기대돼요. 그분이 무슨 돌발 상황을 기대하는 게 아니고, 주께서 서 목사님을 뭐로 돌발적으로 사용하시나 그게 항상 기대되거든요. 그런데 주례사 음성을 누가 객석에서 녹음해서 저한테 보내줘서 들어보니까 지금 이게 예배시간이 아니잖아요. 결혼식장이잖아요. 세상에 그 수억 쌍이 분명히 결혼했는데 요한복음 1장 4절을 가지고 주례사 하는 경우가 과연 있을 수 있을까? 생겨난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 나타나지 않았다. 이 대목. 요한복음 1장 3절-4절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이게 결혼하고 무슨 관계있습니까? 지금 신랑 신부가 어른들 앞에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 이야기 했다는 말은 지금 한 대 먹이는 것밖에 더 돼요?

참 중요한 이야긴데 제가 알기로는 어떤 목사님은 전에 설교할 때 요한복음 7장을 설교했어요. 율법이냐, 아니면 성령이냐, 그건 약간의 관련성이 있어요. 율법이냐, 성령이냐, 처음에 사람은 율법으로 결혼하다가 나중에 율법을 버리고 성령으로 결혼한다. 그런데 그 주례사를 동대구 근처에 있는 어떤 예식장에서 했거든요. 할 때 그것도 굉장히 파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례사 요한복음 7장할 때 사람들은 못 알아들어요. ‘우리 신랑은 어느 대학 나와서 이렇게 훌륭한 인재가 되었고 오늘 신부는 이렇게 아름답게 신부로서 양육 받아서 이제 결혼하게 되면 시부모 잘 섬기고…, 보통 결혼식이 이런 멘트 아닙니까? 신부는 이런 것도 예쁘지만 재원이고, 신랑도 재원에다 인류대학 나왔고 거기다 지금 집도 하나 마련했고 어쩌고…이런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해서 야, 참 가문 자랑하는 곳이 그건데, 서 경수 목사님은 예수 모르면 모든 것이 다 헛 거란 이야기를 했어요. 정말 개 콘에서 욕먹을 일인 거예요. 정말 용감해! 용감해! 정말 용감한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한테만 완전히 필이 꽂혀야 가능해요. 다시 말해서 사람들을 해골더미로 보는 사람에게만 그게 가능한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주례 칭찬했으면 이 근호 목사 당신은 왜 그런 식으로 설교 못하는가, 나는 핑계가 있어요. ‘거룩한 것을 개한테 던지지 말라.’ 는 말씀이 있잖아요.

부활하신 주님께서 이 부활이란 걸 경과, 죽었다가 살아난 그것을 과거지사로 여기지 아니하고 그걸 현재화 시켜 버리면 우리가 생각하는 예수님하고, 예수님이 생각하는 우리하고, 완전히 판이하게 다릅니다. 우리는 내가 살아있다고 치고 살아있는 내가 예수님의 도움으로 심판을 통과해서 천국에 살 것을 생각하겠죠. 그러나 그런 우리속의 천국은 미래에 관한 이야기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살아계시면 이걸 우리는 미래로 보는데 미래가 아니고 현재로 봐 버립니다. 현재로 봐 버리면 여기에 뭐가 우주 정거장에 보면 이쪽에 우주정거장이 있고 또 이쪽에도 우주정거장이 생겼다 합시다. 우주정거장하고 우주선하고 도킹해서 만날 때 여기에 파이프로 연결하는 게 있어요. 그리고 군용기 보면 급유할 때 비행기가 두 대가 가면서 기름 있는 비행기에서 기름 없는 비행기에 급유선을 대서 하는 게 있어요. 이걸 꽂아요. 이게 은사예요. 믿음 소망, 사랑, 이걸 꽂아버리면 현재 우리 속성은 그대로 갖고 있어요. 거기에 뭐가 흘러들어오겠습니까? 예수님의 죽었던 이유와 부활했던 이유가 여기에 새로 들어오겠죠. 바로 요게 성령의 열매라는 겁니다. 이 열매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죄인이 더욱 더 죄인 됨을 매일 같이 확인되는 거예요.

그러면 자기가 ‘나는 죄인이다’라는 걸 확인하려면 뭐 ‘죄인이다. 죄인이다.’ 누가 말은 못합니까? ‘나 죄인이다.’ 할 수 있죠. 근거가 있어야 되고 느낌이 와야 되거든요. 이게 뭐냐 하면, 말씀이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여기서 뭐가 발생되느냐 하면, 말씀을 주게 되면 여기서 죄가 살아나게 돼 있습니다. 아! 로마서 7장 이야긴데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예요. 성경 말씀이 주어지게 되면 잠자고 있던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는 것처럼 잠자고 있던 '죄 지면 재밌겠다.‘ 하는 우리의 잠재돼 있던 악마적 악한 본성이 자극을 받아서 이게 살아나게 돼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가인이 제사드릴 때는 가인의 마음은 자기 딴에는 순수했죠. 그런데 아벨이 제사 드리고 제단에서 불이 일어나서 하나님이 응답했는데 자기는 똑같은 제사를 드렸는데 불이 안 오고 하나님의 응답이 없다 할 때, 그때 아벨의 제사는 가인에게 하나의 말씀 기능을 하게 돼요. 소외당함에서 오는 뭔가 버림받았다는 것, 배제됐다는 것, 거기에 대해서 복수하겠다는 거예요. 나의 존재 가치가 이렇게 묵사발 만들은 그것이 신이 되던 예수가 되던 나는 용서치 않겠다는 그러한 반발심, 이게 우리의 본심이 됩니다. 이게 그동안 실체로서 드러나지 않은 죄라는 겁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죄라는 것은 그냥 대패로 껍질만 깎는 것밖에 안 돼요. 터키에 가면 사람들이 잘 먹는 음식이 뭐냐, 케밥이란 음식이 있답니다. 고기를 이렇게 달아놓고 껍데기만 벗겨서 빵에다 발라 주는 건데 껍데기만 계속 벗겨가는 거예요. 나무껍질 벗겨 내듯이. 우리 죄라 하는 것은 사실 죄의 본질은 관계없고 죄에서 파생된 것을 깎아내는 것밖에 안 되는 거예요. ‘죄 졌습니다.’ 아니야, 진짜 죄는 그게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그게 바로 죕니다. ‘하나님 때문에 내가 망했다.’는 그것. ‘내 인생 조졌다.’는 것, ‘이 모든 책임은 하나님이 져야지 내가 책임질 문제가 아니라는 것, 하나님 당신 때문에 내 인생 힘들어지게 됐다는 것.’ 이 모든 탓을 하나님 탓으로 돌리는 그 심보,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그걸 알려주기 위해서 선악과 이야기가 있는 거예요.

선악과 이야기가 왜 있느냐 하면 인간 본성은 비어있다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이 속에 선악과 따먹은 그 심보로서 이미 이렇게 유황온천처럼 들끓고 있는데 그걸 우리는 아닌 것처럼 없는 것처럼 있지도 않은 것처럼 그걸 마치 자꾸 그걸 감추는 식으로 하는 거예요. 자꾸 억누르면서 그게 들통 나지 않기 위해서 조심스러워하는 그런 식으로 계속 나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말씀으로 꽂혀서 오지 아니하면 우리는 점잖은 사람이고, 훌륭하게 되려고 나름대로 노력하는 사람, 진지하게 하나님을 믿고 애쓰는 사람으로 자꾸 위장하죠.

그런데 그러한 모든 내가 구원받으려고 복 받으려고 시도하는 모든 시도에는 반드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시간개념이 동원되게 돼 있습니다. 뭔 뜻이냐 하면 내가 현재 이렇게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는 그것 때문에 주께서는 반드시 미래에 나에게 좋은 보상과 어떤 상급이 있을 것이라는 현재와 엮여져 있는 보상책까지 고려해서 이걸 한꺼번에 전부 다 고려하는 거예요. 과거에 잘못한 것은 현재 착함으로 보상될 것이고, 현재 착함은 미래에 상급으로 채워질 것이다. 요 3종 세트를 한꺼번에 우리한테 주어진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우리 예상을 항상 비껴가는 겁니다. 왜, 우리 예상은 내가 못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잘 되는 쪽으로만 생각이 가게 마련이거든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교회는 위험한 곳이다. 교회가 이걸(3종 세트) 장려하는 곳입니다. 교회 목사 하는 말이 납득이 되고 설득이 있는 것은 본인이 평소에 그렇게 생각하는 걸 그대로 이야기하거든요. ‘여러분처럼 그렇게 가정이 어려웠더라도 이렇게 교회 봉사하고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 공부하니까 나중에 가정의 형편이 피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집사님 같은 경우에 여기 복음 들으니까 나중에 어떤 남자 나타나서 ’빌딩 주겠다.‘ 해서 팔자 고칠 수가 있는데, 큰 부자가 실제로 돈 들고 나타나면 ’축복입니다.’ ‘아들 잘 키워줄게.’ 하면서. 이제 동창회도 나갈 수 있고.ㅎ

모든 인간은 그 지점이 미래로 희망과 비전과 꿈을 꾸는 지점입니다. 꿈을 꾸기 때문에 인간은 살아있는 거예요. 꿈이 없으면 인간은 살아도 죽어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살아있다는 것은 바로 부활을 거치지 않은 살아있는 것이기 때문에 주님 보시기에는 죄로 인하여 죽은 거라고 보는 겁니다. 아까 고린도후서 5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전부 다 죄 속에 가둬져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쪽으로 이 성경말씀을 가지고 몰아가십니다.

아까 고린도후서 들은 말씀이 우리 귀에 들려오지 않죠. 그게 들려오지 않고, 하라, 서로 사랑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이런 류에는 기도와 금식 외에는 나갈 수가 없느니라.‘ 그런 것만 자꾸 눈에 들어오는 거예요. 왜, 미래의 꿈을 내가 이왕 살아있는 이상은 미래에는 지금보다 더 여유롭게 살고 싶은 인간의 희망이 우리 내부에서 계속 올라오니까 우리가 만들어내는 게 아니에요. 자동적으로 내부에서 계속 올라오게 돼 있어요. 이 올라옴으로 인하여 우리의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그걸 이미 알고 계시는 겁니다. 나도 이미 그걸 거친 거예요. 다시 이야기해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죄 많은 세계에 보내셔서 그걸 적셔서 거기서 죽음을 이겨서 나왔고 죽음을 이긴 것 가지고, 성령께서는 죄 속에 있는 우리들에게 다시 들어와 버리면, 우리는 두 개의 상반된 세계를 양쪽을 볼 수 있는 눈이 있게 되는 겁니다. ’아! 나는 죄인의 괴수인데 이래서 죄인인데 이래서 이미 미래가 아니고 현재, 현재 주님이 우리와 더불어 살아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다음에 어떤 게 주어지는가,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사람이 이렇게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지금 누구와 함께 있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있죠. 예수님의 부활의 영과 함께 있죠. 부활의 영이 뭐라 했습니까? 성령이 함께 있다는 것은 부활한 영이 함께 있다는 겁니다. 로마서 8장 11절 다시 말씀 드리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지금도 살려내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성령이 없다는 말은 그리스도 사람이 아니라는 거죠. 그럴 때 사도바울은 사람을 볼 때, 아마 성령을 안 받았을 경우에는 개개인으로 볼 겁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사람을 볼 때 이렇게 봅니다. 지금 이렇게 보는 관점을 여러분도 그렇게 보시기 바랍니다. 이걸 전체로 본다. 이게 중요한 겁니다. 요 안에 자기 남편도 있고 아이도 있고 남의 남편도 있고 이것을 전체로 보세요. 모두 죄악 된 세상 속에 있는 사람들, 전체로 보면 됩니다. 그러면 나는? 나는 이쪽의 전체로 봐야 돼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 그리스도의 지체로서의 나, 이렇게 보셔야 돼요. 그래서 질문 답변할 때도 사적인 견해를 이야기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 같으면 뭐라고 했겠는가? 십자가 지신 예수님은 뭐라고 이야기 했겠는가? 이렇게 이해하면 돼요. 그런데 저쪽에서 보는 것은 이걸 전체로 안 보고 개인으로 본다는 것은 본인도 전체로 못 보고 있다는 뜻 이예요. 나는 자기 과거, 현재, 미래, 자기 인생만 보는 거예요. 자기 인생만 보면서 내가 나만 보듯이 아마 저 인간도 자기만 생각할 거야,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사도바울 저 사람은 저 일해서 하루 일당 얼마 받는지 모르겠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본인이 어떤 이야기를 하면 그것이 일당으로 계산해서 일을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이거 전체와 이거 전체를 보는 눈이 있어야 돼요. 이거 전체를 볼 때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뭐라 합니까? 22절에 보면 “너희들을 보니 종교성이 많도다. 너희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 너희들은 빌고 있구나.“ 사도바울이 이렇게 볼 수 있는 거예요.

자, 그러면 제가 이렇게 성경대로 이렇게 했습니다. 우리가 성경대로 해서 틀린 건 아니죠.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하나 더 압시다. 뭐냐 하면 사도바울이 이렇게 이야기 했을 때 그걸 듣는 이 사람들은 뭐라고 답변하는가, 이것도 우리가 놓치면 안 돼요. ‘이 바보 같은 놈들아 내 말 들어라.’ 이렇게 윽박지르면 교주가 돼 버려요. 그렇잖아요. 내 말은 옳고 당신 말은 틀렸다 이러면 안 되잖아요. 반드시 우리가 옳고 그들이 틀리더라도 저쪽에서 뭐라고 생각할 것인가를 감을 잡아야 돼요. 왜 그러냐 하면 우리 마음속에 여전히 저쪽에 있는 세계가 우리 속에 끊임없이 올라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주일 오후에 그런 이야기했죠.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느니라. 욕심이라 하는 것은 성경에서 무저갱이라 해요. 바닥이 없어요. 욕심을 만족한다, 이간 말도 안 돼요. 욕심이 어떻게 만족스럽습니까? 욕심이라는 것은 항상 용출되는 샘인데요. 샘을 어떻게 다 퍼 올립니까? 인간의 욕심을 어떻게 다 퍼 올려요? 돌아서면 다른 욕심, 물건 사고 나면 옆에 보면 신상품 나오면 욕심이 나는데. TV 케이블에 보면 쇼핑하는 거 보세요. 이거 사면 벌써 신상품 나왔어요. 괜히 샀어. 하고 또 바꾸고, 끊임없는 욕심, 바닥이 없다니까요. 바닥의 깊이를 측정할 수가 없다니까요. 그 정도로 깊어요. 손이 안 들어갈 정도로. 계속 올라오는 거예요. 누굴 만나느냐에 따라서, 어느 동네에 사느냐에 따라서 욕심도 같이 달라져요. 대전 바닥에 살면 이렇게 살다가도 강남에 가면 강남 스타일로 바뀌고. 환경 따라서 새로운 욕심이 발굴이 된다니까요. 고고학이 아니고 공장 같아요. 그렇게 생성되니까 이들이 생각하는 바를 하게 되면 우리의 진짜 옛 모습도 다시 한 번 생각나면서 예수님의 사랑을 느낄 수가 있죠.

자, 그러면 이들이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7절 다 같이 읽어봅시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사도바울이 고린도에 편지하면서 하여튼 여기서 고린도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믿음으로 행하는데 너희들은 뭐로 행한다? 보는 것으로 행하고 있죠. 그래서 우리가 너희와 다른 차이점은 우리는 보는 것으로 하지 않는 차이점이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저쪽에서 뭐라 합니까? ‘아니 보이지도 않으니까 신은 안 보인다고 했잖아. 아휴, 답답한 사도바울아, 우리말이 맞잖아. 신이 안 보여서 안 보인다고 했는데 그게 뭐가 나쁘냐.‘ 말이죠. 하니까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우리는 안 보이지만 믿음으로 행한다.‘ 이렇게 된 거예요. 그러면 그쪽에서 하는 말이 ’ 그 믿음에 뭐기에 보는 것을 대체할 만하게 확실한가?‘ 이렇게 나오겠죠.

지금은 무슨 시대냐 하면 과학시대 아닙니까? 과학시대에 있어서의 기본은 뭐냐 하면 관찰입니다. 15세기인가 베이컨이라는 사람, 그 이후에는 갈릴레이 갈릴레오란 사람,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교회에서 일방적으로 성경이 현실이라고 알려주는 그 시대를 반박을 하면서 유명한 거 있죠. 지구가 돌지 태양이 돌지 않는다.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이것부터 해서 인간이 모든 것은 관찰에 의해서, 또 관찰 했을 때, 다음에 또 관찰했을 때 둘 다 똑같은 결론이 나왔을 때 이건 진리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이 보는 것부터 시작돼요. 세포가 있다. 어떻게 합니까? 갈릴레오가 현미경 만들고 후크란 사람이 만들었지만 최초로 식물세포를 발견했거든요. 그러니까 계속 뭐든지 보고 그 다음에 옳고 그르냐 하는 것도 결과물이 나온 걸 보고, 지금 본 것과 예상된 것과 하나의 수식이 성립되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이걸 아셔야 돼요. 그런데 오늘날 종교는 뭐다? 오늘날 종교는 오락이고 취미고, 오늘날 제대로 된 종교는 과학입니다. 과학의 기본은 보는 것으로 해요. 그래서 과학에 문제점에 대해서 지적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그런데 내가 그것을 지적할게요.

과학이란 종교가 왜 말이 안 되는지, 예를 들겠습니다. 여기 수염차를 제가 들고 있습니다. 들고 있으니까 무겁죠? 처음에는 안 무겁지만 10시간 들고 있으면 무거울 거예요. 그러면 이 무거운 걸 놔버리면 갑자기 무거움이 사라졌잖아요. 그렇다면 이 물을 들 때 무게를 느낀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따지면 여기 무게가 있고 무게는 중력과 관련되면 이걸 무게를 과학적 용어로 질량이라 해요. 질량이라는 것은 지구가 당기는 것이고 더 정확히 말하면 지구가 여기 딸려올 수도 있고 과학적으로 어떻게 설명하든 관계없어요.

그러니 무겁다는 이 말은 결국은 내 몸에 무겁죠. 이 물병 생각은 안 하는 거예요. 과학이란 종교는 뭐냐 하면 나한테 유용하냐가 중요한 겁니다. 19세기 1800년 중반에 미국에서 뭘 발명했느냐, 접시 닦는 기계를 발명했습니다. 팔렸겠습니까? 안 팔렸겠습니까? 안 팔렸어요. 그때는 접시 닦는 노예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기계를 살 필요가 없어요. 접시를 기계가 이렇게 닦으면 잘 닦인다. 말은 맞는데 필요치 않다는 거예요. 왜, 나한테 필요가 없어요. 비싸게 키니까. 그런데 방금 유용성에다 경제성, 이게 뭐냐 이걸 시장에 내놓으면 상품이라 하고, 그걸 뭐라고 붙이느냐, 중요한 말 크게 쓸게요. ‘가치’라 합니다.

지금 클래식, 바이올린을 하잖아요. 만약에 5천만 국민들이 클래식을 다 싫어하고 강남스타일을 좋아한다. 그러면 클래식이 가치가 없는 게 아니에요. 바이올린 가지고 뭘 연주해야 돼요? 강남스타일 연주하면 밤무대 출연하면 가치 있습니다. 피아노에서 입상한 박 종훈이란 피아니스트는 지금 뭐하고 있느냐 하면 대중음악 쪽으로 치고 있어요. 시장이 너무 좁으니까. 너무너무 뛰어나지 않으면 안 되니까. 팝페라 : ,오페라를 팝처럼 부르거나 팝과 오페라를 넘나드는 음악 스타일 또는 대중화한 오페라, 퓨전 음악 : 제3세계의 토속음악과 서구의 팝음악이 융합된 새로운 장르음악으로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토속음률에 서구의 펑크, 록이 한데 어우러진 장르, 그게 바로 유용성과 경제성이라는 거예요.

가치란 다른 말로 하면 진리예요. 사람은 진리로 산다는 이 말은 나한테 가치 있을 때만 나한테 진리가 돼요. 이 말은 성경대로 원형하면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여기 나는 누가 들어갑니까? 예수님을 쏙 빼버리고 누가 들어갑니까? 자기 자신이 들어가는 거예요. 이거 집어넣고 사람들이 교회 나와요. 예수님 사랑하러 오는 게 아닙니다. 나는 내가 사랑할 만합니다. 그걸 확인 차 교회 찾아가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 대놓고 ‘나는 예수님보다 내가 더 사랑스럽습니다.’ 하는 걸 항의하러 교회 가는 거예요. 결국은. 예수님이 얼마나 좋으냐. 그 따위 소리 귀에 안 들어오고 내가 예수 믿어주면 나는 얼마나 나한테 가치 있는가를, 얼마나 나한테 이익을 줄 수 있습니까? 하나님, 신이시여, 나한테 얼마나 가치를 줄 수 있습니까? 이걸 가지고 사도바울은 뭐라 하느냐, 그게 바로 네가 만들어 낸 보이지 않는 신이라는 겁니다.

그림을 다시 한 번 그려볼게요. 이게 중요한 그림이기 때문에. 개개인은 아까 방금 설명했듯이 개개인은 자기가 유용성이 있습니다. 내가 제일 중요해요. 내가 중요하기 때문에 그들은 뭘 섬긴다? 내가 보니까 신은 안 보이지만, 따지고 보니까 세상천지는 만든 분이 있다 말이죠. 그러면 내가 안 만든 해가 돌고 내가 안 만든 별이 도니까 만약에 별, 해 안 섬기다가는 별 해를 만드신 분에게 자칫하면 내 미래가 당하는 수가 있거든요. ‘해 만들어 놨더니만 네가 경배했나?’ ‘안 했습니다.’ ‘너 망해라.’

분명히 내가 여기까지는 아는데 해, 달, 거기까지는 모르니까 모르는 것은 빌고 아부하고 들어가면 되는 거예요. ‘형님’ 하고. 내가 아는 여기까지는 내가 알아서 하고, 모르는 것은 하나님께 미루면 된다 말이죠. 보통 기도할 때 자기가 할 수 있는 건 기도하지 않잖아요. 밥 먹을 때 숟가락 못 들어서 ‘숟가락 들게 하소서’ 이런 기도는 안 하잖아요. ‘맛있는 것 주게 하옵소서.’ 는 하잖아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손에 깁스를 두 개 했다. 그럴 때 기도가 뭡니까? ‘주여 내가 빨리 깁스 풀고 숟가락 들게 하옵소서.’ 이런 기도 한다 말이죠. 사람의 모든 기도라 하는 것은 자기가 할 것만 딱 챙기고 그 영역 경계선 쳐서 그 나머지는 하나님께 일임해서 하나님이 요거만 채워주시면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플러스해서 내가 인간답게 살 수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기도하는 거거든요.

이게 바로 예수든 여호와든 삼위일체든 관계없이 그건 바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 이예요. 그건 왜, 개인에서 출발하는 모든 가치는 결국 개인으로 회수하게 마련이거든요. 인간에게서 출발하는 모든 것은 자기 좋아라고 돌아온 거예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어떻게 봅니까? 이걸 한꺼번에 다 봤죠. 한꺼번에 다 보면서 ‘너희들은 보이지 않는 신을 섬기니까 그게 문제다. 이 문제야.’ 보이지 않는 신을 섬기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신을 섬기니까 누구만 살아있고? 자기는 생생하게 살아있는데 신은 흐릿하게 살아있겠죠.

그런데 사도바울은 반대가 되죠. 예수님은 이미 부활했으니까 자기는 죽은 자고, 죽은 자를 매일같이 살려내시는 분은 부활하신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부활하고 난 뒤에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를 만났죠. 그럴 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야기했잖아요. 예수님이 죽~ 이야기할 때 그들은 못 느꼈어요. 왜, 자기만 생각하다가. 나중에 말씀이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난다는 그 약속을 딱 눈을 뜨고부터는 그분이 주님인 줄 알잖아요. 그래서 고린도후서 아까 본 구절 우리는 뭐로 행하고?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은 하지 않는다. 그러면 믿음은 뭐를 전부 다 잘라버린다? 보는 것으로 진리하고 여기고 가치라고 여기는 것을 전부 다 가위 가지고 잘라버리는 게 믿음 이예요.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이 말은 인간들은 실적과 성과를 전부 다 보는 것에서부터 양적인 측정에서 주어지는 거예요. 실적과 성과라 하는 것은 측정이 가능한 겁니다. 그래프가 된다고요. 기업에서 그래프 하듯이 수출 실적 올리듯이 그래프가 될 수 있는 것, 또는 학생 수, 이런 모든 게 그래프가 가능하고 측정과 실적이 가능한 것은 전부 다 실적과 성과입니다. 이런 것은 보는 것에서 시작하죠.

그런데 사도바울의 입장에서는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누가 살아있습니까? 예수님이 살아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살아있으니까 죽어가는 내 안목으로서는 생각할 필요 없이 주의 안목으로 볼 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신을 모른 게 되죠. 아까 고린도후서 5장 같은 경우에 너희들은 보이는 것으로 하지만, 너희들은 보이지 않는 신을 믿지만 우리는 보는 것을 믿는다. 이러지는 않는다 이 말이죠. 말이 어렵죠. 우리는 믿음으로 행하지,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는다. 또는 안 보는 것으로 행한다. 본다. 안 본다. 자체가 그건 믿음에서는 해당사항이 아니라니까요. 왜냐, 봐도 죽어가는 내가 보고, 안 봐도 죽어가는 내가 보니까 내 안에 내만 있다면 그것이 문제가 되겠는데, 내 안에 그리스도가 있다면 지금 그리스도가 나를 이런 식으로 만들어내고 있잖아요. 주님이 나를 만드는 것과 내가 주님을 관리하는 것과 이건 완전히 천지 차이 아닙니까?

믿음이라 하는 것은 아까 뭐라 했습니까? 급유기처럼 비행기가 기름을 주듯이 완전히 파이프로 믿음의 은사로 꽂혀버리면 날마다 주님께서 우리 속에 넘어와서 죽은 우리를 날마다 주님 힘으로 산다는 것을 믿게 하는 그 믿음을 계속 줌으로서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계속 되게 하는 거예요. 죄인을 의인되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고요히 살면 돼요.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그냥 사시면 우리의 예상한 모든 것이 바로 우리의 예상을 밀치고, 밀쳐버리면 뒤에 나타난 게 뭡니까? 주님의 세계, 주님이 주신 세계가 등장하면서 내가 앞을 헤쳐 나가는 게 아니고 주께서 헤쳐서 내 쪽으로 날마다 이 바보 같은 등신 같은 나를 붙들고 동거생활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매일같이 느끼는 겁니다. 그러면 어제 수요일에 한 것처럼 내가 정답이 아니고 누가 정답이다? 나의 인생사는 목적이 내 잘남을 보여주는, 내가 정답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옳았습니다.’를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정답입니다.’ 그 하나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가 이 땅에 대전바닥에서 지금껏 살고 있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이한례(IP:203.♡.41.16)

12-12-05 22:43

대전20121129b-마13장(씨 뿌림 비유)34강-이 근호목사

두 번째 시간 마태복음 13장 해보겠습니다. 성경에서 난해적인 부분을 찾으라면 요한복음도 해당되지만 이 마태복음 13장도 여기 해당됩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그 중에서 제일 어려운 게 씨 뿌리는 비유라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너희들은 밭이고, 나는 농부고, 내 말씀은 씨다. 얼마나 간편합니까? 참 간단하죠. 밭에 주님께서 농부가 와서 말씀이란 씨를 뿌리면 열매를 맺히면 그게 천국이구나. 얼마나 간편해요? 뭐가 어렵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밭을 하나가 아니고 4가지로 나눠버렸어요. 이렇게 4가지로 나눠버리니까 이게 아까 ‘너희는 밭이다.’라고 하나로 되게 되면 뭔가 다 통하는 것처럼 이해가 다 되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4가지로 하니까 이 4가지의 밭을 시간적인 초반단계를 의미하는 것인지, 점차, 점차 시간 따라서 성장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4가지가 서로 다 칸막이처럼 나눠졌다고 한다면 그러면 사람이 죽고 난 뒤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천국과 지옥, 둘 중에 하나잖아요. 둘 중에 한 군데 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4가지로 구분돼 버리면 분류 서랍이 2개가 아니고 4개로 나눠진다는 이야기인지. 너는 지옥 가도 좀 덜 고통스러운 데 간다든지, 이런 식으로 말이죠. 그런 뜻인지.

여기서 어렵다는 것은 뭐냐 하면 밭이 바로 우리라 할 때 밭은 그냥 흙이 있는 토지를 이야기하는 것이고, 무생물 아닙니까? 밭이 우리라 할 때는 우리는 생명체가 되잖아요. 무생물체에서 생명체로 넘어오면서 여기 생명체끼리 통하는 논리가 따로 있을 것이고, 생명이 없는 밭이라는 논리가 따로 있을 것이다 이 말이죠. 밭이 우리라 하게 되면 요건 굉장히 간단한 문제인데 ‘그 밭이 우리구나.’ 이렇게 되는데, 밭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우리로 보면 되는데, 여기 밭이 몇 가지라 했습니까? 4가지니까 이 4가지를 우리라고 하나로 종합해야 될 것인지, 아니면 4가지 종류의 사람으로 할 것인지, 이게 모호한 거예요. 4가지 종류의 사람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한 사람,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인간에게 일어나는 다양성인지, 아침에는 돌밭에 들어가고 오후에는 가시가 있는 가시밭이 됐는지, 저녁 7시에는 다시 옥토가 됐는지, 그 다음날 새벽에는 다시 마귀, 참새가 와서 쪼아 먹는 길가에 떨어진 밭이 됐는지, 도대체 4->4로 되는지 4->1이 되는지 그게 불분명하다 이 말이죠.

그리고 또 문제가 있어요. 씨가 말씀이라 했죠? 우리가 아는 상식에서는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내리면, 아까 처음에 한 걸 하면 예수님은 농부, 말씀은 씨, 우리는 밭, 이렇게 하면 간단할 것 같은데, 씨가 만약에 말씀이라고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시켜 버리면 씨가 허비될 수가 있는 씨를 농부가 뿌릴 수가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해 놓고 ‘아이 씨, 괜히 뿌렸어. 쓸데없는 데다 왜 그렇게 낭비를 했지, 아! 나는 바보 같아. 바보 같아. 그건 뿌릴 필요도 없는데 왜 그랬지? 아이고, 나도 이제 늙었나 봐. 앞으로는 제대로 뿌려야지. 씨앗 값이 얼만데 내가 헛되이 뿌렸어. 아, 참 일도 데데하게 했네.’ 이럴 수가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모든 것은 말씀을 이루지 않고서는 돌아오는 법이 없다 돼 있거든요. 성경에. 그러면 씨를 뿌렸으면 씨가 성취 없이 허비되는 경우가 없다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이라면, 그런 실수나 그런 허점을 보이지 않을 거라 말이죠. 그런데 여기 나오는 씨 뿌리는 비유에서 농부는 뭡니까? 씨를 허비 했잖아요. 씨를 뿌리니까 마귀가 와서 쪼아 먹었죠. 씨를 뿌리니까 잘 된다 싶어서 집에 갔는데 바위가 있어서 드릴로 뚫을 수도 없고 막혀서 뿌리가 안 내려가니까 물기를 못 빨아들여서 위에는 배고프다고 난리고 밑에는 뿌리가 물까지 스며들지도 못하고 있고, 세 번째 씨를 뿌리니까 밭을 잘못 골랐는지 이건 낙하산 타고 마치 가시덤불 내리는 것처럼 들판에 내릴 낙하산이 잘못되어 세상에 가시덤불에 낙하산이 걸려서 자기 몸도 못 가누는데 무슨 열매를 맺어요? 씨앗을 가시가 와서 찔러대는데.

그 다음에 네 번째는 뭡니까? 옥토에 떨어지니까 아이쿠, 씨가 제 솜씨를 발휘해서 맺잖아요. 그럼 처음부터 밭을 잘 고르든지, 아니면 씨를 뿌려놓고 밭을 갈아서 옥토로 만들어서 참새는 후려치고 돌은 골라내고 가시덤불은 제거해서 불태워버려서 옥토로 만들어서 그래서 씨를 뿌리면 씨가 씨 값을 하잖아요. 그러면 농부가 ‘에이, 괜히 뿌렸어. 이런 농부가 4분의 3을 허비했잖아요. 4분의 1로 30배, 60배, 100배 맺었다면 제대로 했으면 120배, 240배, 400배나 건지는데, 그럼 농부의 기쁨은 더하죠. 나중에 농협에서 수매할 때 얼마나 기분 좋겠어요? 목돈 쥐는데. 그렇잖아요.

도무지 예수님의 비유라 하는 것은 우리의 해석을 뭔가 의도적으로 피하시는 느낌이 듭니다. 다시 말해서 너희들은 내 말을 들을 잽도 못 된다는 거예요. 내 말을 해석할 수 없다는 것, 더 나아가서 너희 안에 내 해석을 가로막는 세력이 아직도 여전하다는 사실을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언급하시는 겁니다.

제가 전 시간에 이야기했죠. 우리의 근본적인 죄가 뭐라고요? 가인처럼 내 인생 조진 것은 다 누구 탓이다? 하나님,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면 예수님 당신 탓이다. 물어내, 책임 져. 당신이 뭔데 내 것을 가로막느냐? 요 심보는 창세기 2장, 3장에서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사실을 기록한 이유가 등장하죠. 선악과 따먹었다는 것은 인간 본성이 자기가 관리할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이미 그 선을 넘어섰어요. 선악과 따먹은 자가 그게 아담이고 우리는 어디 안에서만 새끼 친 겁니까? 선악을 따먹은 그 단지, 솥단지 안에서만 새끼 쳐서 나와서 한 번도 그 단지 밖으로 우리는 벗어난 적이 없다 이 말이죠. 아담의 속성을 고대로 빼다 박았는데 그 성질, 그 속성이 어디 가겠어요? 솔직하게 ‘내가 선악과 따먹어서 그 성질로 평생 살아갑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고백하면 되잖아요. 그 선악과 따먹은 그 성질이 하나님 보시기에 마귀의 속성이잖아요. 그 마귀의 속성으로 지금 누구 말 듣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 말씀, 예수님 비유를 듣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농부고 예수님이 씨앗을 우리는 깨끗한 마음이 아니고 그것도 중립적이 아니고 이미 벌써 병들었던 뭐든지 들어오면 다 왜곡하는 거죠.

이걸 한번 생각해야 돼요. 깨진 거울은 항상 붙이지 말라. 본드 가지고. 거울이 바싹 깨졌잖아요. 그거 붙인다고 제대로 얼굴이 나오겠습니까? 금이 죽죽 갔는데, 우리 모든 마음이. 깨진 거울은 포기하면 돼요. 깨진 거울로서 보기 때문에. 제거 언제 그런 예를 들었는데, 이 이야기하면 식상하다 해서 겁나지만 언뜻 생각나는 게 그 예인데 온 가족이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슬픔에 잠겨 있습니다. 그런데 MBC에서 ‘웃으면 복이 와요.’라는 코미디 프로를 했어요. 온 가족이 잠시 웃음보가 터졌어요. 그럴 때 슬픈 마음은 어디 있고, 웃는 마음은 어디 있습니까? 이 거울이 다 깨진 상태거든요.

예를 들어서 엄마가 직장에서 일하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가 왔어요. 애가 라면 끓이다가 냄비를 엎어서 손을 데어서 울고 있는데 이웃 아줌마가 와서 애 우는 소리 듣고 지금 병원에 데리고 가려고 한다. 할 때 엄마가 그 소리 듣고 정신 없어서 택시를 타고 갔는데, 택시 요금이 원래 7800원 나오는 거리인데 7900원 나왔다. 그럴 때 ‘아저씨, 왜 100원 더 나옵니까?’ 라고 내리면서 그 이야기하는 그 100원 따지는 그 거울은 어디 있어요? 애 아픈 거울은 이쪽에 있고 따지는 거울은 따로 있는 거예요. 이게 하나로 통합이 안 되는 겁니다.

왜 여자분들 멋 내다가 미끄러져서 코가 깨질 때 아픈 것은 고사하고 창피하잖아요. 아프다는 거울 따로 있고 나는 폼 유지하려는 거울이 따로 있죠. 이것이 심화되면 이걸 정신분열증이라 합니다. 그래서 프로이드나 라캉학파에서는 깨진 이것을 어디서 종합해서 의식 층으로 올리느냐 하면 무의식 층에서 이걸 종합해서 올라오는데 이걸 종합할 때 대표자가 있어요. 대표자라 할 때 그걸 상징계라 합니다.

상상 계는 어린아이 때 느낀 그대로예요. 바보 같은 거예요. 앞 뒤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이건 그대로 하는 거예요. ‘너 아버지 뭐 하시노?’ ‘우리 아버지 조폭입니다.’ 이런 거. 상상 계는 애들이 있는 그대로, 애들은 거짓말을 못하잖아요. 상징 계는 어른이 시키는 대로,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윤리 도덕이죠. 윤리 도덕이라 하는 것은 항상 사람은 혼자서 못 산다는 것을 염두에 두는 윤리 도덕 이예요.

여러분, 혼자 사는 게 편하겠습니까? 더불어 사는 게 편하겠습니까? 더불어 사는 게 편해요. 혼자 사는 게 편하다 하지만 혼자 살아 보세요. 외로워서 못 살거든요. 더불어 사는 게 편해요. 더불어 살 때는 남들을 고려하고 배려해야 됩니다. 그게 바로 윤리 도덕인데 윤리라 하는 것은 사회윤리, 도덕이라 하는 것은 개인적은 덕성, 윤리와 도덕은 그 차이점이 있는데 큰 차이는 아니고. 그걸 상징계라 하는데 상징계가 무의식에서 대장질해서 깨어진 거울을 기표의 차이라 하는데 기표와 기표의 차이를 주위에서 지금 여기에 필요한 대표적인 상징을 가지고 밀어 올립니다. 그러면 그 순간에 그게 자아 정체성이 돼요. 웃으면서 ‘나 이런 인간입니다.’ 애써 슬픔을 억누르면서 ‘오셨습니까?’ 이렇게 다소곳이, 이게 안 될 때 정신 분열증 이예요. 이게 안 될 때 정신병 이예요.

정신병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악한 게 아니고 다른 사람은 더불어 살기 때문에 이럴 때는 기침해서는 안 되고 이럴 때는 방귀 꿔서는 안 되고 이런 게 있는데 정신병은 그게 없잖아요. 그냥 나오는 대로 한다고요. 정박아도 마찬가지고 그래요. 이런 데서 시키는 그것만 하고 하나를 알면 한 개를 잊어버리니까, 한 개 알면 10개 알면 천재고. 이런 깨진 거울과 거울 사이, 기표와 기표 사이를 이어주는 것은 들었던 것 중에서 지금 필요한 것은 일단 요거 하고 돌아서서는 대성통곡하고 눈물을 훔치는데 인간은 이미 깨진 거울 이예요.

그런데 깨진 거울 상징 계중에서 어른들의 잔소리, 윤리 도덕, 어른 중에는 부모도 있을 것이고 교회에는 목사가 있을 것이고, 그래서 목사를 잘 섬겨라. 하는 것은 우리의 상징 계를 채워줄 사람이다. 이게 너무 깨져 버리면 본인 힘으로 깨어진 두 개가 봉합이 안 돼요. 봉합될 수도 없지만 뭔가 다른 걸 가지고 세워야 그 순간만큼은 잊을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은 사실은 이미 죽음에 함몰되고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이렇게 하셨죠.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고 속에서 나온 게 더럽다 했잖아요. 예수님은 이걸 이미 알고 이 땅에 오신 거예요. ‘예수 믿습니다.’ 까불어도 벌써 알아요.

간음한 여인을 고소할 때 ‘너희들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할 때는 우리보고 하는 이야깁니다. ‘저 사람은 간음했는데 나는 간음 안 하고 있다.’라고 하는 것은 자기의 상징 계를 앞장세우는 것밖에 안 돼요. 이미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는 우리의 악마의 마음은 다 깨어져 버렸어요. 악마가 하나로 봉합이 안 되게 다 깨어 버렸어요.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모든 것이 다 봉합이 되면서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뭘 해도 밥을 먹어도 뭘 해도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주의 은혜 아니면 나는 이 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는 것을 성령을 통해서 성령께서 우리를 죄인으로 규정하고 나서기 때문에 성령 앞에서 신앙생활 잘해보려고 하는 그것도 회개해야 돼요.

자, 계속 이어 봅시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이미 깨진 거울 같은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말을 듣게 돼요. 듣게 되면 아까 로마서 7장에서 주의 율법이 오게 되면 뭘 자극한다? 우리 속에 잠재돼 있던 죄 성을 자극을 한다 했죠. 자극하면서 나름대로의 말씀 앞에서 자기를 정당화 하는 거예요. ‘나는 주의 말씀 알아들었다. 나는 예수님 앞에서 구원받은 사람 맞다. 나는 자기 정립, 자기 조작, 자기 구성을 말씀을 가지고 하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는 네가 네 스스로 네 마음을 정리하고 네가 원하는 대로 주의 백성이라고 조립하라고 주의 말씀 준 게 아니에요. 오히려 깨진 그것이 확실하게 깨졌다는 것을 도리어 자백을 받아내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그게 사는 게 돼요. 주님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잖아요. 병원에 의사에게 올 때 잘난 체 하려고
병원 간 게 아니잖아요. 아픈 것을 숨기지 말고 이야기를 해줘야 한 군데라도 더 치료를 받을 수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이 비유의 말씀은 의사가 환자인 우리보고 지금 앞에 예수님이 가운 입고 우리는 반듯이 앉아 있고 ‘자, 한번 봅시다.’ 하고 청진기 대면서 내뱉는 그 말씀 이예요. 지금 아프다고 내뱉는데 우리는 그거 가지고 ‘저 건강한데 또 뭐 어떡한다고요?’ 이렇게 반대로 마중하듯이 그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한 겁니다.

예수님께서 보리떡 5개 물고기 2마리 가지고 오병이어로 먹이셨잖아요. 그 떡을 준 이유가 뭐냐, 너는 떡만 먹고 싶어 하는 인간이라는 걸 고발하기 위해서 준 떡 이예요. 떡 주고 나니까 ‘야! 이런 수도 있구나.’ 해서 따라왔잖아요.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시느냐 하면 ‘네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 그런데 주님의 원래 뜻이 뭐냐,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고 사는 그 너희들이 바로 누굴 죽인다? 나를 죽을 때 비로소 거기서 나오는, 생산되는 내 찢겨진 살과 피를 그걸 먹고 그걸 마셔야 돼요. 그래야 네가 영생을 얻는다는 거예요. 떡을 먹인 것은 그건 소용없는 짓이 아니죠? 씨 뿌린 비유 할 때 씨를 마귀 밭에 뿌리고 척박한 밭에 뿌린 것이 이게 허비한 게 아니잖아요. 떡을 줘놓고 떡 좋다고 따라올 때 그 다음에 피 이야기할 수 있고 찢겨진 살 이야기하고 예수님 죽음 이야기할 수 있는 거예요. ‘너희들의 본색이 원래 그렇다. 떡 밖에 모르는, 떡보!! 배부른 게 전부인 줄 알고 그게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여기는 그게 너 진짜 모습이다 말이죠.

아까 했죠. 과학이라는 것은 유용성과 경제성, 이것이 모여서 시장에서는 상품, 나중에는 인간 자체가 상품이 돼요. 연애 인들 보세요. 사람 자체가 상품 아닙니까? 그래서 몸 관리하고, 권 상우처럼 초콜릿 복근이 뭔지 모르지만. 상품의 교환성으로 가치 있다 하고 이걸 진리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이 과학적 인식의 사고방식입니다. 유용성과 경제성을 위해서 공부해야 되고 수능 쳐야 되고 1등급 맞아야 되고 1등급 해서 좋은 학교 가니까 학교에 플랜카드 걸어서 이런 애가 다녔다 해서 질 좋은 애는 또 들어올 거고 그러면 명문고가 되고 서로 들어오려고 난리 칠 거고, 그게 없는 학교는 애들이 미달돼서 출석은 60명인데 나중에는 20명 남고 다 가버리고, 옛날에는 그랬어요. 과학적 인식, 이게 어제 오늘도 마찬가지고 예수님 당시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 예수님은 세상을 광야로 봅니다. 광야에선 마귀가 지배하는 곳 이예요. 예수님께서 숨어있는 지배자 마귀를 먼저 만났습니다. 마귀 하는 말이 ‘돌이 떡 되게 하라. 우리 먹고 하자. 다 먹자고 하는 짓인데 먹고 하자.’ 이 말입니다. 돌이 떡 되게 해서 먹고 메시아를 하던 뭘 하든 먹어야 될 게 아니냐. 사람이 먹는 게 우선이니까. 생명은 먹는 게 아니라고 한 거예요. 애굽에서 먹던 그 떡은 떡이 아니고 광야에서 주신 만나가 떡이라는 거예요. 만나는 말씀이지 그 자체가 생명이 주는 양식이지, 떡 자체는 의미가 없는 거예요.

이제 슬슬 씨 뿌리는 비유가 풀리기 시작하죠? 참새가 와서 먹는 그 씨앗이 결국 이게 허비하고 무용한 것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세상사람 보기에는 그게 무용하고 쓸데없는 짓을 한 게 된 거예요. 제가 아까 고린도후서 5장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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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364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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