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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하나님이 정답 121128우리교회에스겔

하나님이 정답 121128

이름 : 이근호(IP:119.18.78.175)

하나님이 정답 (겔 6:11-14)

이근호

12-11-28 21:11

하나님이 정답

2012년 11월 28일 본문 말씀: 에스겔 6:11-14

(겔 6:11, 개역)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며 말할지어다 오호라 이스라엘 족속이 모든 가증한 악을 행하므로 필경 칼과 기근과 온역에 망하되』

(겔 6:12, 개역) 『먼데 있는 자는 온역에 죽고 가까운데 있는 자는 칼에 엎드러지고 남아 있어 에워싸인 자는 기근에 죽으리라 이같이 내 진노를 그들에게 이룬즉』

(겔 6:13, 개역) 『그 살륙 당한 시체가 그 우상 사이에, 제단 사방에, 각 높은 고개에, 모든 산꼭대기에,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 무성한 상수리나무 아래 곧 그 우상에게 분향하던 곳에 있으리니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겔 6:14, 개역) 『내가 내 손을 그들의 위에 펴서 그 거하는 온 땅 곧 광야에서부터 디블라까지 처량하고 황무하게 하리니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선지자가 하나님의 진노를 전한다는 것은 사실 사람들로부터 미움 받는다는 당연한 결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일부러 타인과 나쁜 관계를 맺으려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사람들로부터 원수가 되고 싶어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선지자의 모든 행동과 태도는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합니다. 다른 관계성이 구축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성입니다. 이것은 선지자 쪽에서 철회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선지자의 자리나 위치가 선지자를 그런 식으로 몰아넣게 됩니다. 요한복음 1 5:18-19에 보면,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나타내는 ‘예수님과의 관계성’ 때문에 제자들은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세상으로부터 미움 받는 생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그런 쪽으로 몰리게 됩니다. 그러면 선지자나 제자의 말 속에서 무엇이 세상으로부터 밉상받는 근거를 제공할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그리고 온 이스라엘 땅에 저주를 내린다고 하십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자들은 전염병으로 죽게 되고 예루살렘에 가까이 있는 자들은 칼에 죽게 되고, 예루살렘 성 안에 있는 사람은 굶어 죽게 된다는 겁니다. 마치 요리에서 튀겨먹고, 삶아먹고, 볶아먹는 식입니다. 이래나 저래나 죽기는 마찬가지랍니다.

이러한 진노와 저주를 받는 이유는 우상숭배 때문이랍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알려주시는 죄는, 벌이 무엇인가를 통해서 역으로 소급해서 밝혀봐야 합니다. 즉 과연 우상숭배인지 아닌지는 본인들이 결정할 바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처참한 징벌을 통해서 우상숭배라고 단정 지어야 하는 겁니다.

최후의 저주는 십자가에서 미리 다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아버지로부터의 저주가 인간이 받을 수 있는 궁극적인 저주입니다. 이 십자가 저주를 통해서 무엇이 우상숭배인가를 살펴봐야 합니다. 우상이란 바로 이런 저주성을 기피하기 위해 인간의 근원과 뿌리를 잘라버리는 식으로 신을 섬기는 겁니다.

즉 인간들은 예수님처럼 자진해서 아버지가 내리시는 쓴 잔을 마실 위인은 없습니다. 이 말은 곧 인간들은 자신의 정당성으로부터 출발해서 신을 경유해서 다시 자신의 존재 타당성으로 되돌아오는 식으로 생각을 가져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신의 근본과 뿌리와 원천을 알 수가 없게 됩니다.

단지 현재 자신이 여기 있고 그 있는 바는 있을 가치가 듬뿍 지닌채 마땅히 있어야 하고 살아야 하는 주장만 늘어놓을 뿐입니다. 즉 진노라든지 심판이라든지 징벌 같은 것은 마땅히 자신을 지나쳐 가야 한다는 겁니다. 자신은 사랑을 받아 마땅한 존재로서 현재 여기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곧 자기 자신이 자기에게 있어 최종적인 ‘정답’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에게는 나만이 최종 해답이요 정답이 됩니다. 이 최종성을 자기 말고 타인에게 돌리고 싶지 않은 겁니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으면 왜 하나님께서 진노와 저주를 자기에게 주어져야 하는지 그 내력을 알 길이 없습니다.

도대체 내가 뭐가 잘못되었기에 영원히 저주를 받을 정도로 나쁜 존재인가에 대해서 본인이 납득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저주를 앞장 세워서 덤비니 그것은 너무나도 합당하고 바른 조치입니다”라고 동의하거나 수용할 수가 없는 겁니다. 인간은 여전히 살고 싶고 죽지 않고 싶은 겁니다.

제발 자기에게만큼은 하나님의 저주나 진노가 비켜가기를 요구합니다. 이 요구에 그 어떤 정당한 근거라는 것은 없습니다. 단지 내가 그 저주와 진노가 싫다는 것 뿐입니다. 이게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아무리 신을 들먹이더라도 그 출발점이 자기 자신에게 있다면 모든 것은 우상숭배의 회로를 만들게 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창세기 15:1에서,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시면서 “내가 곧 정답이다.” 겁니다.

“네가 정답이 아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개입입니다. 아브라함 인생에로의 개입입니다. 이러한 개입을 마주하는 인간들의 태도는 어떠합니까? 마치 평생 시골에서 농사만 짓던 시부모가 보따리 싸서 갑자기 서울 아들 집에 예고 없이 방문한 것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혹은 어깨에 무거운 ‘피로의 짐’을 짊어진 기분이 들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 자신이 어떤 분인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나타난 존재에 불과합니다. 아브라함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로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이 중요하고 그것이 전부입니다. 창세기 18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 마을 멸망시키려 간다고 미리 언질을 주십니다.

이럴 때, 아브라함의 숨겨진 본심이 튀어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어떻게 하든 그 심판을 증지하려고 덤빕니다. 그 이유는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일괄적인 심판에 대해서 아브라함 본인이 납득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의인이 악인 멸망에 합세될 수 있는가 하는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의인이 소돔과 고모라성에 필히 있으며, 따라서 의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괄적으로 심판을 감행하시는 하나님의 조치는 부당하다는 자기 생각을 기도로서 관철해보려고 시도합니다. 심판을 철회시킬 만한 의인의 숫자를 조절하면서 아브라함은 자기 생각이 좋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어했습니다.

하지만 의인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아브라함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아브라함이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들추어내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그 인생에 개입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성도는 ‘마지막’을 자기 포지션으로 삼고 살게 됩니다. 마지막을 알고 그것을 잊지 말고 삽시다. 그러면 모든 것은 은혜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인생은 정답이 아니요 정답은 오직 하나님 뿐임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근호

12-11-29 13:57

16강-에스겔6장 11-14(하나님이 정답)121128-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6장 11절에서 14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56페이지입니다.

에스겔 6:11-14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며 말할찌어다 오호라 이스라엘 족속이 모든 가증한 악을 행하므로 필경 칼과 기근과 온역에 망하되 먼데 있는 자는 온역에 죽고 가까운데 있는 자는 칼에 엎드러지고 남아 있어 에워싸인 자는 기근에 죽으리라 이같이 내 진노를 그들에게 이룬즉 그 살륙 당한 시체가 그 우상 사이에, 제단 사방에, 각 높은 고개에, 모든 산꼭대기에, 모든 푸른나무 아래에, 무성한 상수리나무 아래 곧 그 우상에게 분향하던 곳에 있으리니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내가 내 손을 그들의 위에 펴서 그 거하는 온 땅 곧 광야에서부터 디블라까지 처량하고 황무하게 하리니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선지자 에스겔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전한다는 것은 스스로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형편을 조성하는 것밖에 안됩니다. 선지자가 사람들에게 버림받았다고 너무 섭섭하게 여기지 말아야 할 것은 선지자 본인이 세상을 향하여 그렇게도 심한 욕설을 해놓았으니까 버림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요, 그것을 가지고 서러워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상대방에게 좋게 이야기하면 좋은 쪽으로 반응이 나오고 상대방을 나쁘게 봤으면 나쁜 욕으로 돌아오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선지자가 이런 식으로 세상을 보고 대인관계를 조성하게 보면 돌아오는 것은 뻔하지요.

핍박받는다고 서러워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본인이 먼저 그런 식으로 공격을 해놓았으니 돌아오는 것은 핍박이 당연한 겁니다. 선지자가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선지자 이웃이나 친지들은 “그런 소리 좀 하지 말라. 좋게 좀 지내면 안 되겠느냐? 왜 자진해서 힘들게 살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이런 식으로 충고도 할 수도 있을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선지자가 그들에게 답변을 한다면 그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나에게 그것을 요구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시키는데 내가 빼고 자시고 변경시킬 일체의 권리가 나에게는 없다.”고 답변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것을 저는 ‘관계성’이라 합니다. 위쪽에서 지시를 그렇게 하는데 아래쪽에서 그것을 변경할 권리가 없는 거지요. 요한복음 15장 1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께 똑같은 관계성을 이야기합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이 말씀은 일부로 너희들이 세상에서 미움 안 받으려고 도피하고 도망쳐도 소용없다는 거지요. 네가 제자이기에. 제자라는 포지션, 위치를 갖고 있기에 그 자리가 너로 하여금 세상에서 미움받도록 해서 너의 의사와 관계없이 제자는 나와의 관계성을 유지하게 될 것이다, 라는 거지요. 요한복음 15장 19절에 보면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라고 되어 있거든요.

세상에 속하지 않은 천국에 속한 사람은 되고 싶어 하고, 그러면서도 사람에게 미움 받기는 싫어하고, 이렇게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는 없는 겁니다. 관계성의 반대말은 ‘나 중심’이거든요. 나 중심이 되게 되면 좋은 것 챙기면서도 남에게 밉상 안 받는 식으로 다 챙기고 싶지만 나보다 뭐가 우선 되느냐, 예수님과 성도의 관계는 성령 때문에, 주님과의 관계성 때문에 이 관계성을 우리 쪽에서 가위로 끊는다든지 혹은 바다 밑으로 도망간다든지 해도 이 관계성이 계속 따라와요. 그것을 어떻게 우리 자력으로 그 관계성을 벗어버릴 수 없는 겁니다.

제가 설교 초반에 왜 이런 선지자와 혹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성을 언급하느냐 하면 오늘 본문에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이것을 관계성으로 보셔야 됩니다. 관계성으로 보지 아니하고 ‘아, 우리가 벌 받는구나. 벌 안 받으려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이렇게 해석하면 그것은 잘못된 해석이에요. 하나님의 진노가 온다는 말은 궁극적으로 성경의 뜻은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 라는 것이 성경전체의 목적이 되고 목표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자신을 드러내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 만나서 어떤 이득을 봤느냐, 손해를 봤느냐 그것을 따지지 말고 ‘주여, 누구십니까?’ 그 물음에 대한 답변, 나는 이런 존재다, 그것으로 충분한 겁니다.

하나님 만났으면 그것은 얻을 것 다 얻은 거예요. 하나님 자신이 이런 분이라고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진노라는 실천, 행동에 나선 겁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벌을 받으면 우리는 아픈데?’ 아프고 자시고 그것은 하나님이 신경 쓸 문제도 아니라니까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심하게 나오면 우리가 어찌 살까?’ 이런 고민과 근심도 하나님의 관계성에서는 고려대상이 되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생겼어? 하나님이 누구지?’ 그것만 생각하시면 돼요. 다른 것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그것만 생각하면 된다니까요.

하나님께서 진노를 앞장세워서 자신을 드러낼 때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분이구나, 그것만 받아들인다면 그 사람의 마음속에 기쁨, 행복이라 하는 것은 세상에 어떤 무엇으로도 살 수 없는 기쁨과 행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아, 하나님은 진노하시는 분이구나. 기분 좋다! 하나님을 새삼 알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쁜가?’ 이렇게 되어야 하나님과 그 제자, 하나님과 그 자녀의 관계성이 돈독하게 확실하게 외부로 표현되는 겁니다. 11절에 보면 “너는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며 말할찌어다 오호라 이스라엘 족속이 모든 가증한 악을 행하므로 필경 칼과 기근과 온역에 망하되 먼데 있는 자는 온역에 죽고 가까운데 있는 자는 칼에 엎드러지고 남아 있어 에워싸인 자는 기근에 죽으리라.”

요리를 할 때 삶아먹고 데쳐먹고 튀겨먹고, 요리의 삼종세트에요. 먼데 있는 사람은 전염병에 죽고 가까이 있는 사람은 칼에 죽고 남아 있는 사람은 기근에 죽고, 이래 죽고 저래 죽고 하여튼 죽는 것은 마찬가지거든요. 그런데 그 범위가 어디까지인가, “내가 내 손을 그들의 위에 펴서 그 거하는 온 땅 곧 광야에서부터 디블라까지 처량하고 황무하게 하리니.” 이 예루살렘이 대구라면 디블라가 어디쯤 되느냐하면, 함경북도, 백두산 그 아래정도쯤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전역에 대해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언급을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진노를 하시는 이유가 뭐냐, 그 이유가 13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진노에 의해서 살육당한 그 시체가 놓이는 장소가 어디냐, 13절에 나옵니다. “그 살륙 당한 시체가 그 우상 사이에, 제단 사방에, 각 높은 고개에, 모든 산꼭대기에, 모든 푸른나무 아래에, 무성한 상수리나무 아래 곧 그 우상에게 분향하던 곳.” 이라고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진노의 말씀이 우리에게 들리지 않는다고 쳐 봅시다. 하나님이 진노한다는 에스겔 말이 우리에게 들리지 않는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 말씀이 들리지 않고 들린 적도 없는 입장에서 이스라엘 나라의 산꼭대기나 모든 도시에나 가 보게 되면 온 천지가 완전히 우상으로 가득 차 있다 그 말이지요. 온 서울 미아리고개처럼 대문마다 작대기에 깃발 꽂혀 있는 점집이 즐비하고 사람들이 그저 우상섬기는 일에 열중했을 때 우리에게 하나님이 진노한다는 이 말이 안 들려 왔다고 칩시다.

그럴 때 우리가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아무렇지도 않지요. 왜, 그게 세상이니까, 그게 세상사는 것이니까요. 결혼을 앞두고 있다, 궁합이 맞는가 보자, 이것이 전부 다 자연스러운 겁니다. 새벽제단 쌓는답시고 교회 와서 하는 기도 내용을 들어보면 무당에게 복채 가져와서 하는 내용과 같은 내용으로 하더라, 우리는 그것을 보고 ‘살면서 한 맺혔는데 그럴 수도 있지. 한 맺힌 그것을 어디에 가서 호소하겠는가? 한을 풀어야 될 것이 아닌가?’ 억울하고 답답하고 막걸 리가 생각나는 그 컬컬한 심령, 금요철야하면서 그것을 호소하는 그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말릴 수도 없고 필요도 없고, 미래가 불확실해서 외치고 싶은 그것을 누가 말립니까?

그게 세상이고 그게 사람 사는 모습이고 그게 시장 통이고 사람들 가정마다 다 생각하는 것이 그것 아닙니까? 꼭 무당집을 안 찾아가도 보름날이면 산에 가서 빌고 추석이라고 빌고 조상한테 빌고, 크리스마스 때 빌고 연 초에 교회 가서 또 빌고, 그렇게 할 때 그들에게 뭐가 있느냐하면 이 세상 전체에 하나님의 진노가 가득 쏟아진다는 그 말씀을 생각하지 않고 그냥 사람들 사는 식으로 자연스럽게 살겠다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그게 왜 우상인가하면, 우상은 하나님 자체가 누구신지가 궁금하지 않기 때문에. 우상의 특징은 인간의 근본을 잘라버립니다. 인간은 누가 만들었으며 왜 만들었으며, 이런 것을 다 잘라버려요.

우상의 특징은 우리 원천이 무엇이며 우리의 뿌리가 어디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의 이 모든 것을 다 잘라버립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밥 먹고 사는 것, 눈에 보이는 이것이 사는 것의 전부에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지 하나님하고의 관계성은 제일 싫어하고 그것을 감추기에 급급합니다. 그렇다면 왜 에스겔은 하나님의 진노를 언급하느냐? 제가 해석 법칙을 하나 알려드릴게요. 인간의 죄를 직접 알 수는 없어요. 왜냐, 인간은 선악과 따먹은 그 자체가 죄기에 이미 판단력을 상실하고 왜곡되어버린 인간이 선과 악을 판단하는 그 자체가 인정받지 못하는 엉터리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는가,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십니다. 벌을 통해서 죄를 소급해서 찾아가는 식입니다.

벌을 주고 그 벌을 거꾸로 소급해서 어떤 죄를 지었기에 이런 벌이 합당한가를 주께서는 제시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내린 벌을 통해서 죄를 역으로 추적해가면 죄가 나오게 되어 있어요.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 자기는 죄를 몰라요. 그런데 벌이 떨어지니까 비로소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하고 진짜 하나님하고 그 뜻이 같은 것이 아니고 다르구나, 하는 것을 아는 겁니다. 가인이 어떤 행동을 할 때 자기 딴에는 옳다고 행동을 했을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막상 벌이 주어진 것을 보니 옳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옳은 것이 아님을 하나님에게 벌을 받고 난 뒤에 알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에게 벌을 먼저 받아야 돼요. 그러면 그 벌을 어떻게 받는가? 하나님의 모든 최고의 저주와 심판과 진노는 십자가에서 이미 다 우리에게 보여줬습니다. 십자가에서 나타난 그 결과를 소급해 보면 우리의 죄가 드러나요. 그런데 십자가와 오늘날 우리 사이는 여전히 끊어져 있습니다. 그 끊어져 있는 것을 성령께서는 일하사 우리에게 그것을 전달할 때 말씀을 가지고 전달해 주는 겁니다. 말씀을 가지고 전달하게 되면 말씀에 대해서 우리는 마중을 나가서 그 말씀에 대한 자기견해, 자기에 대한 느낌 같은 것을 툭 털어놓게 되어 있지요.

‘하나님, 나에게 이런 말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이런 식으로 지키면 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한다면 그때 성령께서 기다렸다는 듯이 십자가를 코앞에 들이댑니다. “바로 너의 그 잘못된 해석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의 저주를 받았다.” 말씀을 주심으로서, 말씀이 일종의 미끼가 되는 거지요. 말씀을 주심으로서 인간의 내장되어 있던 오류, 잘못된 하나님의 뜻, 잘못된 하나님의 관념,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이 우상이지요, 우상을 섬기면서도 참 하나님을 섬긴다는 그 오류를 말씀 가지고 들이대는 거예요.

‘내가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충분하게 지켜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습니다.’라는 논리를 우리 인간이 전개하지요. 그런데 십자가에서 언급하는 것은 뭐냐, “네가 하나님의 진노를 말씀을 네가 지키고 행함으로서 벗어날 길이 애초부터 없었다.” 하는 거예요. 유대인들은 오해하기를 우리 조상들은 말씀을 어겼기에 우리가 다시는 그렇게 살지 말자, 그렇게 나와요. 그러한 능력이 인간에게는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아담 이후에 우리는 저렇게 하면 안 되니까 고치자, 그런다고 해서 말씀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어요.

왜냐하면 그때 그 당시에 주어진 벌은 그 때 그 당시의 행동이 있었다면 그 다음 세대에 나오는 행동은 그 다음 세대의 죄의 저촉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카메라가 따라갑니다. 박 태환 수영할 때 카메라가 따라가면서 찍듯이. 지난번에 있는 죄를 안 지었다고 해서 우리가 착하다고 하면 안돼요. 그 시대에 합당한 죄가 따라옵니다. 그 따라오는 그 카메라가 어디에 장착되어 있는가, 바로 우리 자신으로 인하여 미움 받고 핍박받고 희생당하는 어떤 인물 앞에서 우리가 의라고 여기는 것이 모조리 주님 앞에서 어긋난 우상적 심성에서 나온 태도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다 밝혀내시는 겁니다.

오늘 본문 그대로에요. 너희들이 우상을 섬겼던 그 현장, 그 현장이 나중에 하나님의 저주의 진노로 말미암아 죽었던 시체들의 흔적의 자리가 될 것이라고 보는 거예요. 그들은 우상을 섬겼거든요.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하는 그 일로 인하여 자기가 망한다는 법칙입니다. 만약에 목회를 한다면 그 목회가 자기가 왜 망해야 되는가의 이유가 비로소 나오는 자리고 회사를 하면 회사를 꾸려가면서 나는 왜 내가 망해야 되는 자인지를 보여주는 현장이 돼요. 우상을 섬기고 그 우상섬긴데 대한 진노를 받기에 합당한 자리가 바로 그 자리에요.

백수라면 백수로서 그 자리가 진노 받아 마땅한 자리가 되는 겁니다. 어떤 경우에도 여기서 예외란 있을 수 없습니다. 왜 그런가, 창세기를 보겠습니다. 창세기 15장 1절에 이런 말씀 있습니다. 간단하지만 의미가 깊습니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이 말씀을 들은 인간들이 “참 부담스럽다, 정말. 혼자 그냥 살고 싶은데 혼자 살지도 못하게 만드네. 시골에서 그냥 농사나 짓지 뭐하려고 서울까지 올라와서 아파트 문 딩동, 하고 열어서 ‘얘야, 잘 있었나? 나는 네 시어미고 이 분은 네 시아버지다.’ 하는지. ‘그냥 한 사흘 계시다가 도로 내려가세요.’”이렇게 하고 싶은 생각이 들겠지요.

이 본문 보면 ‘아브람아, 아브람아! 내가 네 방패고 상급이니라.’ 할 때 인간으로서 필요 이상의 짐을 지는 셈처럼 느껴지십니까? 아브람의 존재라는 것이 하나님 자신이 정답인 것을 알려주는 수단으로 이 땅에 아브람이 존재한다는 겁니다. 그 관계성에 이제는 아브람이 들어가야 된다는 것을 강요받는 거예요. 너를 위해서 네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네가 너한테 정답이 아니라는 겁니다. 정답을 끄집어낼 때 나에게 무슨 의미, 나에게 무슨 이익, 나에게 어떤 손해, 내 인생은, 맨 날 정답을 낼 때 자기부터 출발해 버리면 정답이 자기에게로 회수되어 돌아와 버립니다.

자기로부터 출발해서 자기에게로 돌아와 버리면 뭐가 감추어지느냐 하면, 자기의 원천, 근본, 뿌리, 이 모든 것을 모르게 돼요. 그저 내가 여기 있음에 그것으로 흡족하자, 그런 식으로 사는 식이 되는 겁니다. ‘나는 왜 살까?’ ‘나 때문에.’ 딩동, 그것으로 끝나는 거예요. 그게 정답이에요. 나는 무조건 내가 정답이에요. 나는 내가 정답이라고 여기는 인간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정답이 아니고 내가 정답이라니까. 평생을 너는 네가 정답이라고 우기면서 시간만 보내면서 살아왔다.”는 거예요. 사람이 자기가 정답이 된다면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모든 신은 다 우상이 되는 겁니다.

우상이라는 것은 신을 섬겨도 결국은 내가 믿는 신으로 되돌아와요. 내가 당신 믿어 줬잖아, 그런 식이 된다고요. 나를 위한 신이 돼요. 나를 사랑하고 나를 예뻐하고 나에게 필요한 신, 내가 원하는 신.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 세상에 어떤 인간이 ‘하나님이여, 나를 저주해주세요.’ 이렇게 기도하는 법은 없어요. 저주 못 받아서 환장해서 저주받게 해달라고 철야하는 인간은 없습니다. 이 말은 어떤 인간도 자기로부터 출발하는 우상성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말이지요. 인간은 안돼요. 자기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어요. 로켓 쏘듯 쏴 바야 도로 내려올 수밖에 없어요.

땅에서 쏘았으니 도로 당연히 땅으로 내려오는 거예요. 인간은 당연히 안 되는데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해서 그 경유 안에 우리가 포함되게 되면 그동안 우리는 나 위주의 신을 섬겼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우상을 섬겼다는 것이 밝혀집니다. 우리의 평생은 나는 우상숭배자입니다, 라는 고백을 늘어놓으면서 살아가는 그것, 그것이 성사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정답이라는 것을 알게 된 그 순간부터 내가 우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인생이라는 것은 뭐냐, 인생이란 장난입니다. 모든 인생은 다 장난이에요. 인생이 장난인 이유는 인생이 승부로 결정나기 때문입니다. 누가 이기고 누가 지고 누가 성공하고 누가 실패하고.

그런데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는 모든 인간이 우상숭배자기 때문에 인간과 인간끼리 누가 이기고 지고 하는 것 자체가 장난치는 것밖에 안돼요. 하나님이 상급이고 하나님이 방패라는 것은 지금 아브람을 가지고 전쟁에 나서는데 결국 돌아오는 것은 ‘아, 하나님이 이런 분이구나.’ 하는 거예요. 그 과정을 통해서 아브람은 죽습니다. 아브람은 죽고 아브라함으로 새로 살게 되는 겁니다. 아브람은 죽고 아브라함으로 새로 살게 되는 것은 아브라함의 공로가 아니고 아브라함대신 죽어야 하는 이삭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삭은 아브라함이 낳은 자식이 아니고 하나님이 낳은 자식, 약속에 의해서 태어난 자식입니다. 아브라함의 인생에 뭔가 투입이 되고 개입이 되는 거지요. 나는 내가 정답이라고 여기는 그 노선에 네가 정답이 아니고 하나님이 정답이야, 하나님을 알면 전부를 안거야, 라는 그 정답이 투입되는 겁니다. 그 대목중의 한 대목을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창세기 18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할 그 때가 나옵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이여, 어떻게 의인을 죄인과 더불어 죽이려고 하십니까? 의인 50명이 있는데도 다 심판해버리면 그 의인 50명도 같이 심판받잖아요.”라고 아브라함이 기도했지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 전체를 죽인다고 본 거예요. 전체를 죽이는 그것이 합당치 않다고 아브라함은 본 겁니다. 그러니 기도하기 전에 이미 기도의 응답을 알았어요. 뭐냐, 전체 다 죽어야 된다는 겁니다. 지금 아브라함이 거기에 대해서 거절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 전체를 다 죽인다는 이것은 하나님이 정답이에요. 정답이 하나님이 되면 하나님다운 행동, 합당한 하나님의 행위입니다. 이것은 마땅한 거예요. 죄 있는 곳을 다 죽이는 이것은 하나님의 하나님다움을 가장 적실하게 드러내는 방법 중에 하나가 되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 하나님이 자기를 나타내는데 있어서 우리가 이의를 걸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나와야 맞아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출발점이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다 죽인다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동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기쁘지도 않고 행복하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아요. 이것이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그 뜻에 대해서 본인이 즐겁지도 않고 행복하지도 않고 동의하지도 않는다는 것은 따로 우상 적인 심보를 가지고 다른 뜻을 갖고 있다는 뜻이 되는 거예요. 그 뜻은 자기로부터 출발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우상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치는 동시에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뜻으로 개입하기 이전에 먼저 아브라함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를 점검 차 이런 태도를 천사를 통해서 알려 줬습니다. 아브라함은 오해했습니다. ‘나는 구원 받을 만하고 저쪽 인간은 저주받을 만하다. 그래도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50정도는 될 것인데 내가 납득이 안 돼, 납득이. 50명의 의인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다 죄인취급 해 버리면 죄인이 죽는 것이야 아깝지 않지만 50명의 의인은 왜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의 대상이 되는지?’ 그 문제가 풀리지를 않는 거예요.

그 문제에 대해서 정답을 자기 쪽에서 낼 수가 없다는 말이거든요. 이런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를 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내세운 정답하고 내가 평소에 내세운 정답하고 왜 안 맞습니까, 하는 식으로 그 조정에 나선 거예요. “50명이 있으면 내가 벌 안 내릴게.” 이 말은 뭐냐, 50명이 없다는 이야기에요. “50명의 의인이 있으면 내가 벌 안 내릴게.” 하면 “예, 제가 50명 찾아보겠습니다.” 그런 뜻이 아니고 50명이 없다는 거예요. 45명도 없고 40명도 없고 30명도 없고 마지막 최후의 마지노선인 10명, 그 10명도 없었습니다.

열 명이 없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심판하는 그 취지를 제대로 파악을 못하고 있다는 이것을 겨냥해서 끝까지 계속해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기 전에 그 심판의 송곳을 가지고 아브라함의 가슴을 쑤셔 들어오는 거예요. 하나님의 심판을 저지하고 중지할 만한 의인은 단 한명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처음부터 정답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정답인 것을 우리가 시인한다 하더라도 아직 그 정답에 대해서 기쁨으로 동참하고 동의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여전히 하나님의 뜻과 자기 뜻이 뭔가 틀어졌다는 뜻이고 이것은 심판의 대상인 소돔과 고모라뿐만이 아니고 아브라함 자신도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는 이유 때문에 심판 받아 마땅한 거예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꼭 이런 식입니다. 하나님이 하는 일에 대해서 우리가 납득이 안 되게 만들어요. 그 이유는 우리 안에 우상성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여, 십자가를 믿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저주를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무서움을 알았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도 평소의 일과 중에서 일생가운데서 뭔가 자기 뜻대로 안된다면 하나님께 동의하지 못하고 원망 투로 불만을 터뜨린다는 것은 그 십자가가 헛 십자가, 말로 그냥 주워들은 지식나부랭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지요.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주셔서 말씀을 통해서 계속해서 이것을 우리에게 추궁해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겁니다. 끝을 생각하고 잊지 맙시다. 어떤 사람이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재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끝을 보세요. 장례식에 가 봅시다. 싸늘한 시체, 체온을 잃었어요. 36.5도가 아닙니다. 싸늘합니다. 그 싸늘한 그 것 하나, 그 순간을 위해서 평생 재벌로 살아온 거예요. 싸늘한 시체, 입이 있어도 말도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도 못하는 그 시체, 그것이 원래 원천이고 바탕이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인간의 욕심이 잉태해서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해서 사망을 낳는다, 결국 모든 인간은 다 같은 인간이에요. 전부 다 그동안 죽은 시체이면서도 산체 하면서 까불었던 이 모든 것은 전부 다 장난이었고 게임이었고 오락이었어요. 그 끝을 생각해 볼 때 현재 우리가 눈뜨고 아직도 우리가 말씀을 듣고 있다는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덩어리고 기적입니다. 왜 기적인가, 내가 구원 얻었다는 것이 기적이 아니고 하나님이 죽어야 될 것을 아직 안 죽이고 있다는 그 자체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우리에게 말해주는 거예요.

하나님은 지금 당장 죽일 수도 있는 분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게 바로 정답입니다. 그런데 네가 지금 살아 있는 것은 네가 잘나서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죽을 수도 있는 인간을 살려내는 것도 하나님의 정답이니까 모든 것이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입니다, 이런 정답이 나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떻게 하나님을 이용해 볼까, 내 뜻을 달성해볼까, 노리는 그것이 바로 우상이며 끝을 잊어버리고 중간만 생각하는 우리의 잘못된 오류입니다. 그것을 말씀을 통해서 지금 당장 죽어도 할 말이 없는 저희들, 개라는 소리를 들어도 마땅한 저희들, 예수님이 정답이 되시고 마지막이 되셔서 주님 증거 하라고 우리가 성도되었사오니 그 뜻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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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364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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