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교회-다니엘 6장(이득 없는 계시)121115-8강b -이 근호 목사
가락교회-다니엘 6장(이득 없는 계시)121115-8강b -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한례(IP:203.90.41.16)
가락교회-다니엘 6장(이득 없는 계시)121115-8강b -이 근호 목사
제 8강b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에 한 걸 요약하게 되면, 주변에 있는 나라 바사(페르시야)나라는 그 나라를 하나님이 살리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다니엘을 통해서 숨어있는 하나님의 뜻이 용출된다. 용출이란 말은 샘이 솟아오르는 거죠. 그런데 다니엘이 나서서 설치지는 않았는데 주변 환경이 쫀다 하죠. 다니엘로 하여금 가만있지 못하게 만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가 성령을 받고 예수님의 성도가 되었으면 나는 가만히 있는데 내가 전도한답시고 돌아다니고 이러는 게 아니고 가만히 있는데 주변에서 툭툭 쳐서 시비를 건다니까요. ‘그렇게 나쁜 짓해서 구원받겠느냐’ 하는 식으로. ‘그러면 당신은 착하십니까?’ 하면 ‘나는 착하지, 이런 것도 착하고 저런 것도 착하고, 난 예수 믿고 난 뒤에 착한 거밖에 안 했다고. 나쁜 건 생각도 안 했다고.’ 죽죽 이렇게 나오죠. 그러면 성경 한번 봅시다, 하고 성경을 들이대죠. 누구든지 자기를 미워하라. ‘실례하지만 자기를 미워하십니까?’ ‘아니, 나는 내가 굉장히 좋은데. 나는 내가 너무 좋아.’ 그러면 성경에 요한복음 12장하고 어긋나잖아요. ‘자식을 사랑하십니까?’ ‘아휴, 우리 자식 사랑하지.’ 그러면 마태복음 10장에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에 어긋나고, ‘누구 남을 미워해 본 적 있습니까?’ ‘아휴, 가끔은 미워하죠.’ 그러면 살인했네요. ‘혹시 기도하면서 맹세한 적 있습니까?’ ‘맹세하죠. 맹세 하는 식으로 기도하죠.’ 그러면 예수님께서 ‘맹세하지 말라‘는 것은 위반 했네요.
아까 처음에는 분명히 나는 예수 믿고 착한 일만 했다고 했는데 성경 말씀 직접 들이대 보니까 전부 다 위반되는 거예요. ‘혹시 실례지만 아버지 장례식 때 장례 치렀습니까?’ ‘아버지 장례 치러야지.’ 그러면 예수님께서 ‘죽은 자는 죽은 자로 장례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했는데 아버지 장례를 왜 치릅니까? 죽은 자는 나둬버리지.
성경을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기껏 있는 게 윤리 도덕 밖에 모르는 거예요. 선조들에게 배웠던 윤리 도덕적으로 내가 이 정도 선하면 되겠고 이 정도 악하면 신자답고 이 정도 악하면 안 되겠다 하는 진짜가 아니고, 이것은 모형 때 옛날 율법 십계명 지키고 그런 때 있었는데, 그런 것은 새로운 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나로 인하여 누군가 피해를 본다는 사실, 나는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나 때문에 예수님이 대신 죽었다면 그 정도로 나는 악한 자잖아요. 그런데 잔소리만 해도 구원될 것 같은데 ‘너 같은 인간은 내가 대신 죽지 않으면 구원 안 돼.’ 왜, 너는 강도보다 더 못하니까. 이렇게 될 때, 비로소 그걸 하나의 조합이라 했습니다. 나는 죄인 되고 그분은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분.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라디아서 6장 14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이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린도전서 2장 2절의 말씀. 사도바울이 한 말씀이죠.
바로 그것이 실제기 때문에 모형으로 지금 중간에서 드디어 다니엘을 잡으려고 작업을 시도하는 장면이 다니엘 6장입니다. 신하들이 법을 하나 만드는데 그 법은 순전히 다니엘 잡기입니다. 빼도 박도 못하게 만들어요.
왜 다니엘을 잡으려고 했을까요? 그것은 이게 또 왕이 나빴어요. 사람은 칭찬을 공개적으로 하는 게 아니에요. 사람을 누가 잘한다고 하면 가만있어야지, 만인 앞에서 ‘다니엘 같은 사람 내가 못 봤다. 훌륭하다. 정말 다니엘은 인간의 지혜를 능가해.’ 이렇게 나오면 없는 적도 적을 만든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옛날 어른들 하는 거짓말 중에 이런 거짓말이 있죠.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다. 하는 그런 거짓말이 있어요. 몰라, 나는 자식이 하나 밖에 없으니까 내가 그 자식 예쁜 건 알고 있는데, 자식이 둘되면 아마 상호간에 비교하지 싶어요. 형은 공부 잘하는데 너는 왜 농땡이냐. 동생은 건강한데 형은 왜 아파? 이런 식으로. 자연적으로 편을 갈라요. 아빠 엄마가 대놓고 물어요.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아예 대놓고 묻잖아요. 그러니까 이 세상이라 하는 것은 나 자신은 무조건 신이 돼요. 나는 모조건 절대자가 돼야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가장 기분이 좋아요.
우리가 기분이 좋을 때가 언제냐 하면 나는 독보적인 존재라고 누군가 부추겨줄 때 그 기쁨 때문에 우리는 교회 가잖아요. ‘집사님, 최곱니다.’ 그런 소리 한 마디에 우리는 그 교회를 떠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목회라는 게 간단하죠. 사람들 칭찬만 잘 해주면 목회 잘 되게 돼 있고 부흥되게 돼 있어요. 죄가 어떠니, 죄인이라 지적하는 이런 소리 하면 목회 안 됩니다. 그래서 칭찬 받기 위해서 경쟁적으로 헌금을 더 하게 하고 기도도 더 많이 하게 되고, 칭찬 받으려고. 목사 칭찬은 하나님 칭찬으로 등식을 그렇게 머리가 가도록 그런 식으로 유도를 하죠. 그런데 그것이 그 본인을 망친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다리오 왕이 다니엘에 대해서 그렇게 특이하게 특급 대우를 해주니, 다른 신하들이 다니엘을 잡는 법을 만들었습니다. 그게 다니엘 법이죠. 그러면 다니엘 법은 뭐냐 하면 이게 참 중요한데요. 다니엘 법이 뭐냐, 다니엘이 하는 일 가운데서 다른 사람과 특이하게 다른 사람은 안 하는데 다니엘이 여호와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특이하게 하는 행위, 그걸 찾아내면 되겠죠.
예수님 이야깁니다. 제 이야기가 아니고, 예수님은 인간을 둘로 나눕니다. 알곡과 가라지, 염소와 양, 좋은 고기 나쁜 고기, 왼쪽 오른 쪽, 전부 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둘로 나누시는데 그 나누는 기준이 뭘까요? 교회 가는 일, 그게 아니죠. 기준이 뭐예요? 그 기준이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베드로보고 사람들이 왔다가 다 가버렸어요. 참 외롭죠.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아버지가 나에게 오게 하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요한복음 6장 65절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그렇다면 그 기준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실천에 옮길 수 있는 기준입니까? 아닙니까? 지금 그걸 묻는 거예요. 내가 ‘나는 염소 싫어, 양이 되고 싶어. 나는 지옥 가기 싫어. 천국 가고 싶어. 나는 알곡 되고 싶고 가라지 되기 싫어.‘ 라고 하는 그 기준을 우리가 실천에 옮길 수 있는 행위에 속합니까? 아니면 우리의 행위에서 벗어난 기준입니까? 벗어난 기준이죠. 왜냐 하면 “아버지께서 내게 오게 하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가 되잖아요.
요한복음 9장에서 어떤 소경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제자들이 뭘 물어보느냐 하면 ‘저 사람이 소경 된 것은 자기 죄 때문입니까? 부모 죄 때문입니까?’ 물은 거예요. 제자들이 묻는 객관식 항목은 몇 개입니까? 달랑 2개죠. 자기 죄, 아니면 조상 죄, 설마 둘 중에 하나는 맞겠지, 라고 하는데 예수님은 그 둘에 해당되지 않은 제 3의 항목을 제시하죠. 자기 죄도 아니고 조상 죄도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소경되어야만 했다. 소경 되어서 태어나야만 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해놓고 실제적으로 영광이란 말이 뭐로 바뀝니까? 예수님께서 “실로암에 가서 이 진흙 바른 것을 씻어라.” 하죠. 예수님께서 하는 행위가 곧 뭐다? 아버지의 영광이 되는 거예요.
그걸 우리한테 한번 적용시켜 봅시다. ‘예수님이여 내가 천국 가도록 작정된 것이 제 뜻은 아니죠?’ ‘아니지.’ 그래야 맞다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주여, 나 지옥 가기 싫어요. 저 천국 갈 테니까 예수 믿게 해주세요. 손들게요.’ 이것은 예수 믿겠다고 손들고 교회 앞에 나오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잖아요. 그것은 기준이다? 기준 아니다? 그건 기준이 될 수 없는 겁니다. 세례 받는 것, 그리고 성 만찬 떡 먹고 하는 것, 이것은 우리가 예수 믿는 기준이 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면 평소에 우리가 교회서 하는 것이 기준이 될 수 없다면, 평소에 성도에게 발생되고 있는 숨어있는 하나님이 우리를 당겨주시는 기준은 뭐냐, 그게 성경에 나옵니다. 로마서 8장이예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수능 점수 안 나오거나, 교회 교인 수 줄거나 헌금 안 나오거나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리스도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 이유가 뭐냐 하면 정죄하지 않기 위해서. 따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내어줬기 때문에 그래요. ”누가 너를 송사하리요. 누가 너보고 죄 있다고 고소하리요.“ 그 딴 말에 속아 넘어가지 말라는 거예요.
사람이 가장 이기기 힘든 것은 뭐냐, 자기가 자기를 치는 것을 가장 이기기 힘들어요. ‘난 벌 받아야 돼. 난 벌 받아야 돼.’ 이런 짓, 이런 짓을 우리가 멈출 수 없습니다. ‘나 같은 인간 죽어도 마땅해. 이런 짓을 하다니.’ 이렇게 자책하는 것. 자책한다고 구원받습니까? 자책은 바리새인들이 잘했어요. ‘나는 부족합니다.’라고 바리새인들이 잘했다고요. 예수님께서 ‘나는 자책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회개하는 그런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다. 의사가 병든 자라야 의사가 필요하지,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도 필요 없다.‘ 했거든요.
바리새인들은 옛날 법에 의해서 옛 술을 옛 부대에 담지만 내가 너희들의 술이라면 너희를 담는 부대는 사람들이 생각 못하는 어떤 죄인도 구원이 되는 새로운 부대를 마련했어요. 그 부대 담아서 우리를 구원하는 거예요. 그 대표적인 것이 강도, 세리가 구원받잖아요.
저는 신문지상에서 성폭행 범, 징역 25년 받은 걸 보게 되면, 저런 인간은 사형 정도가 아니고 아주 자근자근 밟아서 죽여야 돼요. 그래도 그 피해가족들 아픔을 씻을 수가 없죠. 저건 어떻게 쥐포를 만들어서 하든지 어떤 식으로 해도 저건 그냥 죽여서는 안 돼, 라고 할 때 주님께서 우리보고 뭐라 했습니까? 남을 비판하는 자는 똑같은 기준에 의해서 너를 비 판 한다. 다시 말해서 저 인간이 성폭행 한 것은 성폭행 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른 거예요. 그 사람이 구원받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어떤 상황에 들어갈 수밖에 없고, 네가 아직 성폭행 안 한 것은 네가 아직까지 성폭행할 만한 지경에 아직 이르지 않았고, 그걸 위해서 네가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안 한 거죠. 거기에 우리는 모든 일에 대해서 범사에 감사해야 돼요. 어떤 점에서? 내가 바로 지옥 가도 마땅한 상한 심령 맞습니다.‘라는 그걸 끄집어내는 하나님의 그 작용에 우리가 놓여있는 겁니다.
자, 다니엘이 기도를 했는데 그 기도를 잡는 법에 의해서 잡혔습니다. 자, 여러분들이 만약 다니엘이라면 여기서 어떤 반응을 보이면 좋겠습니까? ➀번 하나님, 기도하지 말까요? 기도했으면 주께서 이렇게 수월하게 기도하도록 기적이란 축복을 주셔야지 이건 기도 했다는 것 때문에 이렇게 살인 당하게 됐으니까 하나님 책임지세요.‘ 이렇게 나올 수도 있고, ➁번 나라 법이 있으니까 나라 법도 법이고 그 나라를 이끄시는 분도 주의 권세를 입어야 되는 거니까, 나는 나라의 법도 주님의 뜻이라 생각해서 한 두 달만 기도를 안 하겠습니다. ➂번 아무리 나라 법도 나라 법이지만 하나님 법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기도는 하되 몰래 속으로 남한테 안 들키고 속으로 ’하나님 기도했습니다.‘ 요걸로 때우겠습니다. 셋 중에 어느 쪽입니까? 여러분들이 성경 모른다 치고. 성경에 해답 없다 치고.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➀ ➁ ➂번 밖에 더 있겠어요? 왜, 인간은 기어이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근거로 내가 하나님께 복을 따내고 구원도 받으려고 하는 시도가 우리 속에 있기 때문에 ➀ ➁ ➂번외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어떻게 했습니까? 창문을 활짝 열어 제치고 ‘아, 여기는 장목반, 장목반, 아, 아.’ 하니까 기자들이 찰깍, 찰깍 사진 찍느라 난리 났어요. 다니엘 법어기는 것 사진 찍는다고. 다니엘은 활짝 열고 평소에 하는 대로 그렇게 하루 3번 씩 감사기도 했습니다. 다니엘이 하루에 2번 했는데 그날 한 번 더 추가한 것도 아니고, 5번 하던 걸 3번으로 줄인 것도 아니고, 그냥 다니엘 3번 한 것은 그전에 다니엘이 그런 법이 있기 전에 기도한 것이 자신의 뜻이 아니고, 주께서 시킨 겁니다.
이건 참 어려운 이야긴데요.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낫게 했죠. 그 의미가 뭐냐 하면 ‘세상이 그만큼 절망적이다.’ 이 말입니다. 소경이 눈을 뜨며 귀머거리가 나으며, 그만큼 이 세상이라 하는 것은 소경이 눈을 뜨고 귀머거리가 나으며 절뚝발이가 걸으며 죽은 자가 살아난다. 이 말은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자기가 주님의 손이 필요치 아니하는 그러한 소경이 아니라고 우긴다면 그건 구원되지 못한다는 거예요. 말이 좀 어렵게 됐죠? 누구든지 ‘나는 눈을 떠도 소경이고 귀가 들려도 귀머거리며 나는 걸어도 절름발이며 살아도 죽은 자입니다.’라는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주님과 만나야 된다는 이야기예요.
‘나는 소경 아닌데 주님이 뭐 필요해?’ 이렇게 나온다면 그 자체는 이미 그른 거예요. 사람이 보는 것은 보지만, 보고 있는 자기 자신을 볼 수 없어요. 인간은. 그렇잖아요. 사람이 소리는 듣고 있지만 듣고 있는 자기 자신은 들을 수는 없어요. 아무리 애를 써도. 마치 자기 뒤통수를 못 보듯이, 인간은 자기 하는 것만 생각하지, 내 하는 것이 남들이 볼 때 ‘어떻게 생각해.’ 라는 것을 그것까지 도로 알 수 있는 방법은 인간에게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이 네가 일하고 공부하고 하는 행동이 내가 보기에 어떠냐를 미리 다 보여줬어요. 그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네가 어떤, 어떤 행동을 해도 십자가 죽을 수밖에 없는 행동밖에 나오지를 않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라. 왜, 십자가가 너한테 딱 맞는 조치다. 이 말 이예요. 딱 맞는 조치예요.
보통 병원의 의사 선생님이나 또 약사 선생님이 뭐라 합니까? 요거 잡수시고 식사 후 30분에 잡수세요. 라고 처방 전 내리죠? 주님이 내리는 처방 전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 피 없이는 너는 지옥 간다. 그 처방 전 밖에 없어요. 그래서 교회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피로 값 주고 산 그것을 교회라고 합니다. 사도행전 20장 28절. 참, 이런 이야기하면 제가 가슴이 아픕니다. 딴 이야기들을 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교회 가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죕니다. 죄 짓지 맙시다. 여러분 이것이 이단이거든요. 우리는 이단 빠지지 말고 정통으로 갑시다.’ 결국 뭘 증거 한 거예요? 우리는 바른 선택이 우리를 구원한다. 이 소리 밖에 더 되겠어요?
제가 아까 이야기했죠? “아버지께서 오게 하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는 이 기준은 내가 어떻게 변경하거나 내가 어떻게 손을 댈 기준이 아니죠? 그러면 우리 쪽에서 주님께 하늘나라 간다면 우리는 주님 앞에 헌금이고 뭐고 다 내놓고 충성을 다할 거예요. 심지어 베드로처럼 내 목숨 바쳐 가면서 천국 가겠다고 하겠죠. 주님께서는 ’아서라 말아라.‘ 베드로야 네 목숨 바쳐도 갈 수 없는 곳이 바로 천국의 처소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베드로 같은 경우에 자기 목숨 바쳐도 오지 말라는 거예요. 네 목숨 바친다고 해서 네가 구원 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아무리 우리가 교회 충성해 봤자 우리 목숨 바치기까지는 안 하죠. 그 말은 뭐냐, 아무리 해봤자 그건 말짱 소용없는 짓이 되는 거예요. 교회만 살찌우고, 목사만 배불리는 것밖에 안 되고 아무 짓도 안 한 것이 되고, 목사 가정만 밥 먹여 살린 것밖에 안 돼요.
예수님이 딱 집어서 불러 줄 때는 항상 십자가로 불러주시기 때문에,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뭐냐 하면 항상 죄인 중에 괴수, 죄인의 모습으로 우리는 갑니다. 찡그리면서? 아니죠. 너무너무 감사하며, 나도 몰랐던 내 모습을 이렇게 십자가로 밝히 보여주시니, 세상에 누가 저를 이렇게 사랑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자기가 죄인된 것이 오히려 감사가 돼요. 그래서 예수님께서“간음한 여자 앞에 놔두고 주변에 둘러 싼 방청객들, 또는 심판관들 보고 뭐라 했습니까? ‘이 여자를 치려거든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쳐라“ 다 갔습니다. 그러면 죄 있는 자가 그곳에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아무도 없고 주님께서 ”나는 여기 있잖아?’라는 말을 달리 둘러서 이야기해요. “ 너 주위에 누가 있더냐?” 이렇게 이야기해요. 이게 뭐냐 하면 “지금 너 누구하고 대화하지?” 그런 뜻이다 말이죠. “너를 고소한 자가 주위에 있더냐?" 뻔히 둘 다 보고 있으면서 다 아는 이야긴데 왜 묻습니까? ”나는 너를 저들처럼 그것을 고소하려고 너를 부른 게 아니다. 너를 정죄하려고 부른 게 아니고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정죄 안 하기 위해서 그냥 아버지가 보낸 자기 때문에 그냥 받아주기 위해서 내가 이 땅에 와서 너 대신 십자가 죽는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의 상징은 오직 십자가입니다. 부활이 아니고 십자가예요.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너희를 꾀더냐” 갈라디아서 3장 1절, 십자가뿐입니다.
이것은 바로 평소에 다니엘이 3번씩 기도한 것이 ‘기도하면 응답이 될까?’ 이게 아니고 기도하는 기계로 만든 거예요. 따라서 다니엘은 기도하면서 주께서 시키는 대로 해야 내가 다니엘이지, 시키는 대로 안 하면 난 다니엘도 될 자격도 없다는 것을 늘 느끼면서 기도한 거예요. 그 기도가 자기 아이디어가 아니고 주께서 평소에 시키신 일관된 시나리오 속에 포함된 겁니다. 그 3번씩 기도하는 시나리오를 먼저 깔아놓고, 그리고 기도한 자를 잡아 죽이는 시나리오를 저쪽 이방민족을 통해서 바사나라를 통해서 그것을 거기서 하나로 종합을 시키는 대목이 다니엘 6장의 내용입니다. 여기에 누구까지 동원하느냐 하면, 동물에 있는 사자까지 동원시켜요. 아이쿠, 다니엘 참 대단한 사람이라. 하여튼 동물의 사자까지 동원시켜서 다니엘이 평소에 기도한 것이 다니엘 사적인 의견이 아니고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살아있다는 걸 보여주는 증거로 기도했다는 거죠. 이걸 또 흉내 내서 ‘나는 하루 2번밖에 안 했는데 3번 하겠다.’ 이러면 안 돼요. 왜냐 하면 이것은 어디까지나 건축 설계사 책상 위에 있는 그때 그 당시의 모형이고, 지금은 기도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고, 기도 안 하면 미화원을 하든지 통장을 하든지, 통장하면서 살아가는 그것도 주께서 시키면 통장도 해야 되겠죠.
현재 내가 입는 것, 먹는 것, 마시는 것, 모든 것이 주의 뜻이니까 ‘감사합니다.’ 이렇게 하면 그 입는 것, 먹는 것, 마시는 것, 다 주의 일이예요. 제가 유튜브 ‘헌금’ 할 때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자기 집에 콩나물 사서 먹는 것도 주께서 주신 헌금 가지고 하는 건데, 왜 교회 내는 것만 헌금이냐 말이죠. 자기 집에 침대 사고 애들 피아노 가르치고 콩나물 사먹고, 소고기 사먹으면 뭐하노. 또 사먹고 또 소고기 사먹고. 백날 하는 것이 다 주의 주신 돈 가지고 하는데 다 좋은 돈인데, 꼭 교회 내는 돈만 거룩한 돈이고 자기 쓰는 것은 나쁜 돈이고, 그런 식으로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말이죠. 우리가 헌금하는 것이나 하나님이 매일같이 우리에게 용돈 주고 있다 이 말입니다. 그것도 값없이, 햇빛 주죠. 공기주죠. 잠 잘 때 심장 뛰게 해주지, 위장 뛰게 해주지, 거기다가 비까지 내리죠. 오늘 낮에는 서울에 눈까지 왔다면서요. 웬 보너스! 눈까지 줍니까? 눈에 가다 미끄러져서 관절염까지 보너스로 줄지 모르겠지만.
다니엘은 살아있는 그 자체가 하나님 작품입니다. 그것을 다니엘이 좋아하면 안 돼요. ‘역시 나는 하나님 작품이야.’ 이러면 안 돼요. 이건 다니엘을 위해서 다니엘 되게 한 것이 아니고, 다니엘 있어야 될 존재 이유가 따로 있습니다. 누구하고 연결돼 있어요. 숨어있는 분과 연결돼 있어요. 숨어있다는 이야기했죠. 숨어있는 분이니까 여기 제가 장난을 치겠습니다. 숨어있는 분이 여기 나타난 눈으로 볼 수 있는 인간들의 무리, 인간들의 군집, 이게 무슨 나라죠? 바사나라죠. 바사나라는 바사나라 안에서의 죄를 끄집어내서 다니엘이 갖고 있는 그 주님구원과 연계시키는 겁니다.
출애굽할 때는 애굽나라의 사정과 히브리인들의 사정을 엮어서 출애굽을 만들 듯이, 사사시대에는 사사 주변에 있는 블레셋과 사사와 연계해서 그 시대의 죄와 그 시대 구원을 따로 보여주듯이, 다니엘을 바사나라의 형편과 그리고 이쪽의 다니엘과 엮어지는 거예요. 바사나라는 뭐냐, 120명의 총독을 거느리고 세금을 받음으로서 국가에 이득을 주죠. 국가에 이득을 주는데 다니엘은 어떤 이득을 주느냐 이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신하들이 원하는 이득을 주지는 않아요. 이 바사나라를 실제적으로 운영하시고 존재케 하시는 분은 너희들의 하나님이 아니고, 그냥 하나님도 아니고, 그냥 여호와도 아니고, 여기 다니엘 6장 26절에 나오죠. ‘다니엘의 하나님!’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그냥 하나님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신약 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만이 진짜 하나님! 나를 존경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도 없고, 나를 피해서 갈 수 있는 하나님은 그건 우상에 불과하죠. 마귀에 불과한 거예요. 그래서 바리새인보고 여호와 믿는 걸 보고 ‘너희 아비는 악마다.’ 했잖아요.
~~의 하나님, 그래서 하나님 다 떼버리면 지상에 남겨놓는 흔적들은 뭡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세와 예레미야와 에스겔, 다니엘, 그리고 마지막 때는 누굴 증거 한다? 마지막 때는 선지자로 부분과 모양으로 증거 하시는 분이 마지막에는 누굴 통해서 증거 한다 했습니까? 오직 아들을 통해서 증거 한다. 히브리서 1장 2절 맞죠.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 마지막 때는 예수를 보내줬기 때문에 마지막 때 예수님이 오신 게 아니고,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 시대가 뭐가 된다? 마지막이라는 것이 판정난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지금 임박한 진노의 마지막 때 살고 있습니다. 2012년 끝나도 마지막이고 2012년 겨울 돼도 마지막이고 가을돼도 마지막이고 2012년 봄 돼도 마지막이고, 인간의 캘린더는 의미가 없게 됐어요.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숨어있는 하나님께서 누굴 통해서? 다니엘 주변에 일어나는 현상을 통해서 뭘 증거 한다? 숨어있는 하나님의 본색을 드러내죠. 여기서 인간 세상 사람들은 어떤 기적을 원하고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기적을 베풀면 그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 내가 제안하는 그 기적의 테스트에 통과하지 못하면 하나님도 엉터리다. 이렇게 하고 싶은 거예요.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십자가 달릴 때에 어떤 로마 군병이 예수님의 뺨을 때렸죠? 그리고 눈을 가리고 뺨을 때리면서 테스트합니다. ‘네가 진짜 메시아라면 우리 중에 누가 당신한테 귀싸대기 때렸게? 알아맞히면 믿어줄게.’ 이렇게 시험했죠? 또 시험했죠. 어느 강도가 ‘당신이 진짜 메시아라면 나를 이 십자가에서 훌러덩 벗고 다시 사면되면 그때 당신은 나한테 실질적인 이득을 줬기 때문에 내가 생각한 내 테스트에 당신이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내가 믿을 용의가 돼 있다.’ 이렇게 나온 겁니다.
그래서 이번에 책이 나왔어요. ‘복음과 기독교의 차이’라는 책이 나왔거든요. 그 책의 내용이 이런 게 나옵니다. 요즘 예수님은 오디션 받는 예수님이라고. 사람들에 의해서 사람들에게 납득이 되면 믿어주고, 납득이 안 되면 이단, 마귀로 간주하는 그런 예수처럼 사람들에게 심사받는 예수님이 돼 버렸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비교해서 마지막에 다 탈락시키고 자기한테 맞는 예수님을 선택할 정도로, 그 정도로 진짜 엉망입니다.
예수님이 진짜 메시아가 맞느냐 하는 것은 광야에서 이미 세 번식이나 예수님을 시험했잖아요. 돌이 떡 되게 해라. 그리고 기적을 보게 해 달라. 뛰어내릴 때 천사가 오든지, 와서 받혀주면 내가 메시아로 인정할게. 그리고 나한테 절해라. 모든 세상 영광을 주겠다. 세상 영광 싫어하는 인간 누가 있느냐, 너도 마찬가지잖아. 산다는 것이 세상 부귀 영광 보고 사는 건데 그거 마다할 사람 아무도 없다. 그러니까 나한테 절하면 너 원하는 것 다 줄게. 네 영혼을 나한테 거리하고 나한테 팔아라. 그런 뜻이죠.
그런데 제일 마지막 시험이 뭐냐 하면 바리새인가 사두개인들이 예수님한테 시험을 했어요. ‘당신이 진짜 메시아라면 기적을 보여 달라.’ 참 이 말씀이 정말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그 들 앞에서 ‘자, 보세요. 날이 날마다 오는 게 아닙니다. 보세요. 애들은 가라.‘ 해서 기적 세웠습니까? 뭐라고 이야기를 했느냐 하면 ’기적 속에 뭘 포함시키느냐 하면 이 세대, 나한테 기적을 보여 달라고 하는 이 세대를 거기다 재료로 집어넣는 작업을 했어요.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기적을 보여 달라고 하니, 내가 보여줄 기적은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기적을 구성하는 데는 하나님만이 기적에 들어가는 게 아니고 이미 우리가 저질로 살아가는 그것도 뭐가 된다? 주님께서 이루시는 기적에 재료로서 필수적으로 발생돼야 되는 겁니다. 절에 가는 시어머니가 며느리가 교회 간다고 머리 쥐 뜯을 때, 며느리는 기도하기를 ‘어머니가 저렇게 날 핍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기도하겠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뭐냐 머리 쥐 뜯는 시어머니와 그래서 억울하게 당하고만 사는 며느리가 모아져야 그게 둘 다가 있어야 주의 기적의 재료가 돼요.
그 기적이 뭐냐 하면 이미 기적은 종결됐습니다. 요나의 기적은 끝났어요. 다른 기적 바라면 안 됩니다. 암 낫고 그런 게 아니고 기적은 끝났어요. 요나의 기적입니다. 요나의 기적이 뭐냐, 세 자로 하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났다. 이건 단순히 소생이 아니고, 너희들이 생각하는 죽음은 죽음이 아니고, 너희들이 생각하는 생명은 그것이 죽음이라는 것, 나 봐라, 생명도 아닌 그 생명에 맞아 내가 죽었지만 아버지께서는 사흘 만에 참된 생명으로 살려냈잖아. 그러니까 너도 나처럼 뭘 통과해야 돼요? 가짜 죽음을 빨리 벗어버려야 된다니까.
사도바울이 소원이 그거예요. 이 되도 않은 이 생명(목숨)이라고 걸치고 있는 가짜 생명을 홀랑 빨리 벗고 내가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 내 마지막 소원입니다. 사도바울의 소원이 남북통일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애 성적 올라가고 딸, 아들 시집 장가가는 게 소원이 아니고, 빨리 이 육을 벗어버리고, 고린도후서 5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벗어버리고 누구와 함께? 주와 함께, 얼마나 지독하게 사랑했으면, 그 그리운 사람과 함께 있고 싶은 것, 그래서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뭐할 것이다? 저주를 받을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주가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다니엘이 창문을 열고 기도한 것은 결국은 누구 보고 싶은 거예요? 이처럼 나를 파견근무 시켜놓고 맨날 같이 우리로 하여금 바사나라에서 살게 하시는 주님, 어서 나를 편하게 해 달라. 주님 책임지세요. 라고 주님 바라보는 그 마음으로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기도를 한 겁니다. 기도의 응답은 딴 게 아니에요. 저 죽으렵니다. 이게 기도의 응답 이예요.
‘지금 쌀 떨어졌거든요. 쌀 있어야 되니까 쌀 주시고, 그 다음에 차비도 좀 주셔야 되겠고.’ 이렇게 기도하면 주께서 뭐라 하는지 알아요? “너한테 있어야 할 것을 내가 이미 알고 있으니까 그런 이방인의 기도는 하지 마라” 예수님이 자기가 하는 자기 기도가 예수님을 이 땅에서 죽게 만들었어요. 겟세마네 기도에서!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이 내게서 떠나게 하옵소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것이 예수님한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제자들한테도 이야기했어요. ‘우리 중에 누가 높습니까?’ 하니까 예수님께서 “너희들이 누가 높은가 하는 것은 안철수나 문 제인한테나 박 근혜한테나 묻고 나는 너희들이 그런 것은 하지 말고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도 같이 마셔야 된다는 것, 마실 수밖에 없도록 내가 그렇게 조치를 해줄 테니까 기다려 봐라. 기어이 내 쓴잔을 마시게 될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하는 말이 “예수의 남은 고난을 내가 지금 감당하고 있다. 내가 이렇게 복음 전하는 것은 나를 위함이 아니고 너희들을 살리기 위해서 이건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 부득불 이것이 나한테 곧 이게 상품이니, 착한 일한다고 보너스 받는 게 아니고, 내가 너를 위해서 고난 받는 이것이 바로 뭐다? 주께서 내게 주신 이게 상장과 상품 이예요. 이거 하고 상 받는 게 아니고 이 자체가 상이 되는 겁니다. 받은 면류관을 나중에 요한계시록 4장에 보면 받은 면류관을 주의 발 앞에 다 던져서 반납해 버리고, ‘제가 쓰는 것은 합당치 않습니다.’
무슨 상급에 차등이 있습니까? 차등은 없어요. 현재 내가 어떤 꼬락서니로 살더라도 내가 보기에는 참 초라해 보이고 창기요, 세리요, 도둑놈이요, 강도라 할지라도 주님께서는 완벽해요. 그런데 그런 완벽한 것을 우리는 믿지 못하죠. 왜, 우리의 모델을 세상에서 찾으니까. 가정 화목하고 돈 잘 벌고 인물 잘나고, 키는 180되고, 전부 다 이런 데서 찾는다 말이죠. 요새 아가씨들 힘들어 죽어. 뭐 복음 알면 된다 해놓고, 막상 소개하면 키가 작고 성격이 안 맞고 어떻고, 어떻고 저떻고 대학 안 좋은 대학 나왔고, 아버지가 교회 안 다니시고 온갖 것 다 따지죠.
다니엘이 하나의 모델이 된다는 것은 어떤 모델이냐, 다니엘은 기존의 모델도 그랬지만 이번 일을 통해서 다니엘이 모델로 하나 첨가가 됩니다. 어떤 것이냐, 죽었다가 살아난 존재! 죽었다가 살아난 존재는 장차 오실 예수님으로 보이죠. 그래서 다니엘을 볼 때 뭐라고 부릅니까? 다니엘아, 하지 않고 人子, 이 人子라는 명칭이 다니엘 300년 이후에 예수님한테 붙여지죠. 人子야, 그럼 예수님이 하는 기능 속에 뭐가 담겨 있다? 다니엘에게 일어난 일이 예수님 속에 그대로 다 담겨있겠죠. 그러면 예수님에게 속해있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유다나라는 다니엘 입장에서 무슨 나라가 되겠습니까? 바사나라가 되는 거예요. 바사나라에 모든 일어난 일은 장차 예수님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나라에 앞서 먼저 시범 보인 그런 나라입니다.
그런데 바사나라라고 했지만 우리가 지난, 지난 시간에 그 나라를 바사나라도 무슨 나라의 연장이라 했습니까? 바벨론의 연장이죠. 그래서 이걸 어떻게 보느냐 하면 나뭇가지에 잎사귀가 나오잖아요. 그 잎사귀의 모든 진액은 어디서 나옵니까? 가지에서 나오죠. 아가씨들이 애인과 연못 가에 모여서 데이트하면서 아카시아 잎사귀를 떼면서 ‘사랑한다. 안 한다’ 잎을 떼면서 ‘사랑한다. 안 한다’ 하잖아요. 마지막에 ‘사랑 한다’ 나오면 사랑하는구나, 하고 좋아하고, ‘안 한다.‘가 나오면 다른 가지 잘라다 기어이 ’사랑 한다‘ 나올 때까지 또 하잖아요.
그처럼 모든 나무의 모든 229, 현재 모든 나라는 ‘바벨론, 바벨론, 바벨론, 바벨론 바벨론이 되는 거예요. 금 신상 다음에 은, 은 다음에 놋, 놋 다음에 철, 철 다음에 진흙과 철이 혼합된 그런 금 신상 안에서 벗어나지를 못해요. 그 말은 하나님이 바벨론을 다루는 법칙에서 어떤 세상 나라도 벗어나지를 못한다는 거예요. 그 말은 바벨론 나라 속에 다니엘이 있는 것처럼, 똑같은 법칙 안에 다니엘 같은 운명을 가져야 될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들이 바로 오늘날 교회고 오늘날 이스라엘입니다. 이제는 교회란 말은 하기가 힘들어요. 교회가 참된 이스라엘! 참된 성령께서 다니엘 같은 입장에 있으니까 이 다니엘 이야기가 이게 옛날이야깁니까? 지금 우리들의 이야기예요.
한번 정리해 보면, 이 다니엘이 갖고 있던 모든 것은 결국은 ‘다니엘 네가 있는 환경이 너를 그렇게 만들기 때문에, 너는 그 환경 속에 주께서 시키는 대로 만들어주신 대로 살아라.’ 그 말이죠. 살면서 주님이 어떻게 나로 하여금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해내시는지, 구원을 해내시는지, 심지어 인큐베이터까지 역할을 하는 주변의 이단들과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이 공격케 해서라도 기어이 작품 하나 만들어 내시는 하나님, 나는 오직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게 없다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하는 교인들이 나와 줬으면 좋겠어요. 맨날 교회 자랑, 신앙의 연조 자랑, 자기 성화된 거 자랑, 선교 비 내는 거 자랑, 교회 섬겨서 자기 자식 잘 된 자랑, 아파트 넓힌 자랑, 차 바꾼 자랑, 교인 수 늘은 자랑, 헌금 자랑, 그런 것 좀 자랑하지 말고, 보세요. 우리가 강한 사람이 누가 있으며, 우리가 잘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약한 자를 택하사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성경에는 그렇게 고린도전서 1장에 그렇게 돼 있잖아요. 그런데 요새는 반대가 돼서 ‘부러워라’ 약한 자를 통해서 강한 자를 부러워하게 하시고, 이렇습니까? 없는 걸 택하사 있는 걸 부러워하게 하시고, 이렇습니까? 없는 걸 택하사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아이구, 인간, 또 집 샀어? 아이구, 안 됐어, 안 됐어.’ 이렇게 모든 게 반대, 거꾸로 예요. 모든 게 교회서 축복이라는 걸 반대로 이야기해야 돼요. 저주가 축복이고 축복이 저주예요. 전부 다 뒤집어 버려요. 자기 사랑밖에 몰라요. 인간은. 사랑밖에 난 몰라, 누군가 이야기했지만, 자기 사랑밖에 모르니까 이게 주님의 십자가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죠.
그리고 이 바사나라의 종교는 고레스 왕은 마르둑 신이었습니다. 마르둑 신은 천지 창조할 때에 어둠과 빛이 싸워서 천지 창조를 했어요.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뭐냐, 창세기 1장에 보면 창조할 때 싸움한 게 아니고 ‘빛이 있으라’ 하매 그냥 있은 거예요. 그것을 해와 달은 알아요. 시편 19편에 보면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이건 들리는 소리는 없으나 서로 저희들끼리 통하는 거예요. 저주파인가 몰라. 고주파인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그 소리가 뭐냐 하면 주께서 친히 우리를 다스리고 만들어내서 이끄십니다. 참새도 알아요. 참새도 주께서 친히 기르시고 들의 들풀도 주께서 기르시는지 아는데, 유독 잘났다는 인간만큼은 솔로몬의 옷가지고 자랑하고, 키 크려고 애쓰고, 자기중심으로 살잖아요. 잡초가 악이 아니고 참새가 나쁜 참새가 아니고 나쁜 놈은 누굽니까? 선악과 따먹어서 안에 마귀 들어있는 인간들이 하나님께 대드는, 하나님을 피해자로 만들고 있는 그런 악마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 앞잡이가 누구냐, 바로 서 있는 저나 여러분들이예요.
주께서 손을 대줘야 우리는 자기가 죄인인 걸 알지, 주께서 손을 안 대주면 우리는 복음 알았다고 그 복음 아는 것도 자기 잘난 체 할 수밖에 없는 것이 또 우리 모습이라. 매일같이 주께서는 매매해야 돼요. 그걸 매매하지 않고 수요일 날 제가 뭐라고 표현했습니까? 손가락 집어넣어서 그 다음에 주께서 한 손으로 등을 두드리면서 “빨리 토해내, 아이쿠, 술도 어지간히 처먹었어. 이렇게 처먹으니까……” 하면서 늘 등을 두드려가면서 속에 있는 악마적인 요소가 우리 속에 이런 게 들어있다는 걸 계속해서 토해서 ‘제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제가 상한 심령입니다.’라는 이러한 엮음, 이러한 조합, 죄인과 의인의 엮임, 이게 바로 성도입니다.
그걸 우리가 할 수 없고 우리 주변의 환경이 그렇게 만들어 냅니다. 그 환경 이야기를 하고 마치겠습니다. 어떤 환경이냐, 다니엘 법이죠. 누굴 잡아 죽인다? 다니엘 죽이기죠. 그러면 이 법을 위반한 국회의원들, 당시에 다른 라이벌 총독들, 라이벌 고위 간부들은 그 사람들은 현재 건재하죠. 아무 탈이 없죠. 이 법은 다니엘을 조지는 법이거든요. 이 사람들은 법을 잘 지켜서 자기 목숨을 살려고 한다 말이죠.
이 법은 다니엘이 다른 사람과 달리 하나님 믿는 것 때문에 특이한 행동, 다른 말로 하나님이 주신 특이한 거, 예수님 같으면 뭐가 특이합니까? 다른 사람은 다 살고자 하는데, 예수님은 혼자 뭡니까? 자꾸 죽으려고 하는 그 특이한 거. 그 특이한 것 때문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을 마귀 들렸다고 했잖아요. ‘저 미쳤어. 미쳤어. 법을 지키면 되는데 왜 자꾸 법도 지키지 않고 죽는다 해. 이상해, 나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다. 왜 자꾸 죽으려고 이야기하느냐.’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 다니엘을 죽이려고 다니엘을 공격하는 사람들, 법을 안 지켜서 죽기 직전에 있는 다니엘, 그리고 우리가 다니엘과 아는 친구나 다니엘과 동거하는 다니엘을 좋게 보는 사람 같으면 이중에서 어느 게 부럽습니까? 다니엘은 안 부럽죠? 왜, 곧 죽으니까. 누가 부럽습니까? 권력을 쥐고 있는 다니엘을 잡아 죽이려는 사람들이 부럽죠. 그 사람들이 더 좋아 보이죠. ‘저 사람 좋겠다. 다치지도 않고 직장 생활 잘 할 수 있고.’ 그런 부러움이 오늘날 우리 속에 있어요? 없어요? 있죠. 그러니까 우리가 바사나라라니까요. 바사나라의 신하들이예요. ‘아휴, 내가 이만큼 예수 믿었으면 이제 전세방이라도 옮기게 넉넉하게 주시지, 집도 옮겨야 되고 겨울에 추운데 보일러도 깔아야 되겠고, 아휴, 저 사람 좋겠다. 하하 웃으면서 보일러 팍팍 돌아가고, 이건 기름 값 아낀다고 비닐을 온 창문에 다 바르고 이건 토굴도 아니고.’ 우린 뭐가 부러우냐 하면 예수 믿는 게 하나도 안 부러워요. 예수 잘 믿는 게 부러운 게 아니고 예수 믿든 안 믿든 잘 먹고 잘 사는 사람이 부럽잖아요. 왜냐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가 없는 거예요. 예수님 복음 전하는 교회가 안 부럽고 헌금 많이 나오는 교회가 부러운 거예요. 큰 교회 다니는 내가 부러운 거예요. 돈도 안 나오는 개척교회는 안 부럽고.
우리 입장이 이 성경에 다니엘만 나오는 게 아니고 겸하여 다니엘 잡아 죽이는 바사나라의 속성이 매일같이 우리에게 샘솟듯이 솟아나는 거예요. 제사 신학교 학생들에게 ‘제발 스데반집사를 부러워하세요.’ 했거든요. 보니까 아무도 안 부러워해요. ‘여러분, 스데반집사 성령이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부럽죠?’ 하니까 안 부럽대요. 얼마 전에 차 바꾼 교회 당회장 목사들이 부러운 거예요. 영락교회, 충현 교회. 순복음은 안 부러워해요. 이단인 줄 다 아니까.
그러니까 결국 마귀가 우리를 유혹하기는 굉장히 쉬운 겁니다. ‘이렇게 이 말씀 지키시고 이렇게 시키는 대로 하시면 복 받습니다.‘ 좌편에는 건강이요. 우편에는 부귀요. 말씀대로 됩니다. 말씀을 믿어야 됩니다. 말씀대로 다 될 겁니다. 할 수 있거든 무슨 말이냐, 능치 못할 게 없습니다.’ 자꾸 이렇게 해서 우리 속에 잠자고 있는 바사나라의 속성을 맘껏 유발시켜서 그것을 축복이란 이름으로 하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의 축복은 뭐냐 하면 바로 “내 이름으로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옛날 선지자들도 이와 같이 고생을 했느니라” 좁은 길로 가는 것이 바로 축복입니다. 이것은 내 힘으로 갈 수가 없어요. 왜, 나는 바사나라가 좋으니까, 나는 바벨론이 좋고 헬라가 좋고, 이건 만날 승리하니까. 남한테 꿀릴 것도 없고 십일조 해서 카아네기처럼 부자 되고 싶고, 그 카아네기의 십일조는 사실은 십일조가 아니고 세금 포탈 용도예요. 그런 것은 사람들 귀에 들어오지 않아요. 어쨌든 부자 됐잖아.
그러니까 내 속에 잠자고 있는 마귀를 목사들이 그걸 자극시켜서 그걸 주의 뜻이라고, 축복이라고 유인합니다. 우리는 그게 아닌 줄 알면서도 그 소리가 듣고 싶어서 오늘도 보람찬 하루 주일 날 교회 나옵니다. 그 희망과 비전과 꿈을 제공하는 교회는 영원히 이 세상에서 망하지 않는다는 그런 모토, 그런 구호 관, 바사나라에서 지금도 바사 하늘을 덮고 있습니다. 우리고 거기 은근히 반 장난삼아 재미삼아 혹시나 될까봐 로또복권 당첨되는 기분으로 우리는 은근히 기대합니다. ‘저 십자가 아니까 주께서 내가 원하는 거 아시죠? 십자가 아니까 아쉬운 것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이런 식으로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절대로 우리 힘으로 구원이 안 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십자가 지신 주님께서 우리를 가만두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것이 믿어진다는 것, 그리고 이 초라한 이 모습 자체가 주님 보시기에 흠도 티도 없는 완벽한 오늘 죽어도 낙원에 갈 수 있는 그 몸이라는 것을 여러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다니엘 모습 보면서 우리가 그 시대 있으면 다니엘을 욕하고 다니엘에게 돌 던지고 다니엘을 반대하는 편승해서 다니엘을 잡아 죽이는 한패인 것을 저희가 알았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주님보다 우리 자신을 더 좋아하는 우리 모습을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 번 발각되게 해주시고, 그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 보혈의 피가 유효함을, 효력이 있음을 저희들이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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