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처럼 121125
그 때처럼 121125
이름 : 이근호(IP:119.18.78.175)
그 때처럼(미 7:11-17)
이근호
12-11-25 15:47
그 때처럼
2012년 11월 25일 본문 말씀: 미가 7:11-17
(미 7:11, 개역) 『네 성벽을 건축하는 날 곧 그 날에는 지경이 넓혀질 것이라』
(미 7:12, 개역) 『그 날에는 앗수르에서 애굽 성읍들에까지 애굽에서 하수까지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이 산에서 저 산까지의 사람들이 네게로 돌아올 것이나』
(미 7:13, 개역) 『그 땅은 그 거민의 행위의 열매로 인하여 황무하리로다』
(미 7:14, 개역) 『원컨대 주는 주의 지팡이로 주의 백성 곧 갈멜속 삼림에 홀로 거하는 주의 기업의 떼를 먹이시되 그들을 옛날 같이 바산과 길르앗에서 먹이옵소서』
(미 7:15, 개역) 『가라사대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과 같이 내가 그들에게 기사를 보이리라』
(미 7:16, 개역) 『가로되 열방이 보고 자기의 세력을 부끄려서 손으로 그 입을 막을 것이요 귀는 막힐 것이오며』
(미 7:17, 개역) 『그들이 뱀처럼 티끌을 핥으며 땅에 기는 벌레처럼 떨며 그 좁은 구멍에서 나와서 두려워하며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주로 인하여 두려워하리이다』
말씀 속에는 일관되게 움직이는 원칙이 담겨 있습니다. 이것을 모르게 되면 마치 이제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말씀처럼 보일 것입니다. 사실 미가 선지자가 하나님의 성령을 받아서 말씀하는 내용은 일반인들이 알아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당시도 마찬가지이지만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본인 혼자 횡설수설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알아듣고 그대로 실천에 옮긴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마태복음 11:4-6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세례 요한의 물음을 염두에 두고 하시는 이야기입니다. 세례 요한 앞에서 숱한 구약 선지자들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선지자들의 모든 말씀이 예수님 선에서 나타나기는 바로 맹인이 보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식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의 행위는 내부적으로 성령받은 선지자와 예수님에게만 소통되는 내용입니다.
성령 받지 않는 일반인들에게 있어 예수님의 이러한 능력 발휘는 그들이 소원하는 바를 들어주는 무당같은 예수님으로 비취게 마련입니다. 신기한 능력에 대해서 예수님에게 뭔가 챙길 것이 있겠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덧붙이시는 겁니다. “나로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예수님의 모든 기적을 베푸는 취지와 말씀 성취성은 요나의 표적으로 마감됩니다. 곧 십자가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심으로서 근원적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뜻을 이루시는 방식입니다. 따라서 이 정신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미가 선지자의 글에도 담겨져 있습니다. 15절에 보면,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과 같이 내가 그들에게 기사를 보이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문장을 간단하게 줄이면 이렇게 됩니다. ‘출-애굽’. 즉, 애굽에서 나오기입니다. 이 출- 애굽 정신은 예수님의 주기도문에도 담겨 있습니다. 마태복음 6:11의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이틀치를 한꺼번에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몇 달치를 저축하면서 살게 해달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매일같이 하루치만 달라는 겁니다.
이는 천국 사람을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원칙에 속합니다. 출-애굽 사건에서 알다시피 애굽 나라에 히브리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없습니다. 출-애굽 사건은 창조주와 구원주의 만남입니다.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창조적 취지와 구원적 취지가 상호 만나면 출애굽 사건같은 사건이 일어납니다. 창조주라는 것은 ‘없는 데서 새로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있었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아무 것도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곧 없음에서 있음이 발생된 겁니다.
애굽 나라에는 분명 이스라엘은 없습니다. 하지만 창조주께서 창조 능력을 발휘하게 되면 없던 이스라엘 나라도 새로 생기게 됩니다. 그런데 히브리인이 애굽에서 빠져나가 그냥 이스라엘이 되면 진정한 이스라엘일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구속주로서의 일이 담겨져야 합니다.
구속주께서 하시는 이념은 ‘죽음에서 생명’입니다. 사람들이 창조주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갖고 있지 않다가 구속주에 대해서 거부감을 일으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우리가 죽은 자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모든 인간은 죽은 자 맞습니다. 구속주의 혜택을 입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 맞습니다. 사람끼리 견주니 마치 산 자처럼 여길 뿐입니다.
홍해란 ‘이스라엘 통과’만을 위한 바다가 아닙니다. ‘애굽인들은 통과 못함’을 보여주는 바다이기도 합니다. 히브리인들이 이스라엘이 되는 이유는 그 와중에 ‘어린양의 피’가 주도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의 운명은 어린양의 실체가 드러나는 식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갈멜, 바산, 길르앗 이라는 지명이 나옵니다. 모두 유다 나라 북쪽에 위치한 곳인데 그곳은 모든 산물이 풍족하게 열매를 맺는 옥토의 공간입니다. 따라서 이 지명의 위치에다 출-애굽 취지를 담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 땅의 풍족함은 거주민인 이스라엘을 위함이 아니라 어린양의 가치나 취지를 드러내기 위한 현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나라는 것은 인간이 주도권을 가질 양식이 아닙니다. 도리어 반대입니다. 매일 주어지는 그 양식에 매일 때, 인간은 사람의 노동의 대가로 사는 것이 곧 천국 백성의 삶의 태도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시장에서 돈 주고 사는 양식이 아니라 어린양되시는 하나님께서 손수 만드셔서 매일 입에 넣어주시는 양식입니다.
이러한 양식이 출- 애굽 정신을 계속 예수님 때까지 이어지게 합니다. 여호수아 4장에서 요단강은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서 물길이 멈춥니다. 이것은 곧 차단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 언약궤는 여기서 멈춰지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단순히 언약궤로 인하여 요단강을 건너온 것이 된다면 사람의 마음상, 이미 건너온 이상, 더 이상 언약궤의 취지에 대해서 잊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여호수아 8:30-33에 보면, “그 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 산에 한 제단을 쌓았으니 이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한 것과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쇠 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새 돌로 만든 제단이라 무리가 여호와께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그 위에 드렸으며
여호수아가 거기서 모세가 기록한 율법을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그 돌에 기록하매 온 이스라엘과 그 장로들과 관리들과 재판장들과 본토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 제사장들 앞에서 궤의 좌우에 서되 절반은 그리심 산 앞에, 절반은 에발 산 앞에 섰으니 이는 전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하라고 명령한 대로 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우리 인간은 매일같이 죄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이 죽을 자는 살려내시는 분이 바로 구속주 하나님이십니다. 그 구속주는 십자가에서 죄인의 모습으로 아버지 앞에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곧 언약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욕심으로 살아가기에 늘 십자가 앞에서 사죄의 떡을 먹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2-11-27 08:00
18강-미7장11-17(그때처럼)12112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미가서 7장 11절에서 17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1297페이지입니다.
미가 7:11-17
“네 성벽을 건축하는 날 곧 그 날에는 지경이 넓혀질 것이라 그 날에는 앗수르에서 애굽 성읍들에까지 애굽에서 하수까지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이 산에서 저 산까지의 사람들이 네게로 돌아올 것이나 그 땅은 그 거민의 행위의 열매로 인하여 황무하리로다 원컨대 주는 주의 지팡이로 주의 백성 곧 갈멜속 삼림에 홀로 거하는 주의 기업의 떼를 먹이시되 그들을 옛날 같이 바산과 길르앗에서 먹이옵소서 가라사대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과 같이 내가 그들에게 기사를 보이리라 가로되 열방이 보고 자기의 세력을 부끄려서 손으로 그 입을 막을 것이요 귀는 막힐 것이오며 그들이 뱀처럼 티끌을 핥으며 땅에 기는 벌레처럼 떨며 그 좁은 구멍에서 나와서 두려워하며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주로 인하여 두려워하리이다“
무슨 뜻입니까? 10번을 읽어도 현대의 사정과 전혀 동떨어진, 그리고 횡설수설하는 느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명확하게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된다 하든지, 구체적으로 이런 이익이 주어진다든지, 그럴 때 어떤 종교 경쟁으로서 사람들을 혹하게 만드는 어떤 요인으로서 성경이 유용하다 이렇게 생각이 들 텐데, 성경에 나오는 이 예언서 미가 예언서를 보면 이건 혼자 아는 소리고, 혼자만 지껄이는 이야기처럼 그렇게 나올 겁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를 이건 성신을 받았던 그 선지자만 알고 당시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를 몰라요. 선지자가 무슨 말을 했는데 그걸 이해하고 있는 분이 나타납니다. 그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을 예수님 마음속에 들어와서 그것이 성령의 힘으로 어떤 실행에 옮기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죽은 자가 살아나고 귀머거리가 듣게 되고 소경이 눈을 뜨고 귀신이 나가고 앉은뱅이가 걷게 되는 겁니다.
이런 미가 선지자의 말씀과 예수님 그 당사자끼리만 소통하고 알 수 있는 그 내용의 파이프, 노선, 그의 취지 안에 들어가면 그 흐르고 있는 본래 뜻을 아는데, 그걸 멀찍이서 뒤나 옆에서 이런 미가가 무슨 소리 했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일반인들이 예수님이 하는 걸 보면 ‘야, 예수 믿으면 나도 병 낫는 수가 있겠구나. 예수 믿으면 야, 내가 원하는 갈 가질 수 있겠구나.’라고 일방적인 생각을 가지고 예수님을 어떤 매력을 느끼면서 ‘믿습니다. 앞으로 믿겠습니다. 잘 믿겠습니다. 복 주옵소서.’ 이런 식으로 덤벼들고 달려들죠.
예수님께서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 너희들이 기적을 원하지만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기적은 요나의 기적 밖에 없다.” 라고 하신 말씀은 선지자의 계열과 그 노선의 취지를 모르는 채, 예수님을 어떻게 한번 이용해 볼까, 라는 생각을 한다면 너희들은 나를 오히려 돌아설 수밖에 없는 쪽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제가 운을 뗐으니까 선지자와 예수님 사이만 아는 그 어떤 본래의 취지가 있다고 말씀을 했기에 그 본래의 취지가 뭐냐, 그게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15절에 보면 “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과 같이” 이걸 간단하게 이야기한다면 출-애굽이라고 합니다. 애굽에서 나왔다고 해서 출-애굽 이예요. 그래서 처음 성경에 보면 창세기에 나오죠. 그 다음에 출-애굽 나옵니다. 그걸 몰라도 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시는데 출애굽 정신을 모르면 예수님에 대해서 오해하게 돼 있고 곡해하게 돼 있습니다.
예수님은 출애굽 정신을 확연하게 현실로 드러내기 위해서 이 땅에서 일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 기도 가운데 포함돼 있잖아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죽 나오죠. 중간에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게 뭐냐 하면 옛날 출애굽 시대에 매일같이 하루에 1회용, 이틀 치도 아니에요. 사흘 치도 아니고, 저축해 놓고 빼먹는 식도 아니에요. 집에 뒤주에다 쌀 담아 놓고 먹는 게 아닙니다. 1회용, 매일 줘요. ‘매일 식의 양식을 우리에게 주옵소서.’라는 것이 그게 출애굽 정신이라는 거예요.
오늘 점심 때 단감을 먹었는데 매주 단감을 먹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매주보다 매일같이, 나중에 보면 지겨울 거예요. 그 단감 말고 멜론 같은 거 없나? 이렇게 익숙해지면 다른 새로운 맛을 찾을 수도 있을 거예요. 제가 이 감 이야기를 왜 끄집어냈느냐 하면 인간은 매일같이 똑같은 걸 주면 질려 버립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아무리 하나님께서 출애굽을 했지만 정작 인간들은 출애굽이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차라리 내가 먹고 싶은 것 내가 하겠다는 거예요.
출애굽의 정신을 어렵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창조주의 창조 정신과 구속주의 구원하는 정신이 합치된 것이 출애굽이다. 창조하신 분이 직접 나서서 구원하시는데, 그 창조의 취지와 구원의 취지가 양쪽에 다 합치해서 보여주는 사건이 출애굽 사건이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걸 어렵게 이야기했는데 그걸 풀어야 되겠죠. 이게 풀면 이렇게 되는 겁니다. 애굽에서는 이스라엘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없는데서 출애굽 사건을 일으키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생깁니다. 없는데서 있게 되는 겁니다. 없는데서 있게 되는 이것은 바로 창조정신 이예요.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없었는데,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생겼습니다. 없는데서 있는 겁니다. 사람들은 그것까지는 되게 좋아해요. 없는데서 있다. 그런데 그 다음 말을 하면 사람들이 아주 기분 나빠합니다. 없는데서 있게 하신 것이 창조주라면,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은 구원주입니다. 그거, 사람들이 아주 기분 나빠합니다. 그것도 제대로 들어야 기분 나쁘지, 요새는 듣지도 않아요.
왜 기분 나쁘냐 하면 ‘아니, 목사님 그렇게 이야기하면 우리가 이미 죽은 자란 말입니까?’ 그렇게 나오거든요. 죽은 자 맞거든요. 죽은 자 맞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것은 죄 값으로 사는 거예요.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습니다. 그리고 그 죄는 사라지지 않아요. 그 죄가 장성하여서 사망을 낳습니다. 죽는 걸 서러워하지 마시고 그 죽음은 죄에서 나왔고 그 죄는 딴 데서 나왔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바로 내 속에서 매일같이 일어나는, 매일같이 만나 먹는 이유가 거기 있어요. 매일같이 일어나는 욕심이 계속해서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는 겁니다.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는다 할 때에 그럼 우린 도대체 뭐란 말입니까? 제가 지난 금요일 날 광주에서 했던 하나 예를 들겠습니다. 광주에서 강의할 때에 제가 KBS2에서 일요일 날 하는 개그콘서트에서 하는 코미디 프로 예를 들었습니다. 거기 보면 인형 개가 하나 나오는데 제가 광주 터미널에서 가게에 있어서 한번 알아봤어요. 얼마하나 보니까 59800원해요. 브라우니라는 개입니다. 그 개를 보고 뭘 느꼈느냐 하면 개는 가만히 있는데, 그 개의 의미와 존재 가치는 그 옆에 있는 개그맨이 그 의미를 입혀줘요. ‘물어, 물어’ 하면 인형이니까 가만히 있잖아요. ‘흥, 차도남.’ 이렇게 이야기한다 말이죠. 차갑고 도도한 남자. 이런 식으로 하면 웃어주는데, 그걸 뭣과 연관시키느냐 하면 구약 성경의 욥과 관련돼 있습니다.
욥은 자기한테 의미를 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왜 저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저에게 고난을 줍니까?’ 한두 번 외친 게 아니고 계속 물어요. ‘차라리 태어나지 말게 하지 왜 태어나게 해놓고 아프게 합니까? 아프게 할 거면 태어나게도 말아야지, 이게 무슨 자비롭고, 이런 지경에서 무슨 내가 하나님을 기쁘게 섬긴단 말입니까?’ 하고 계속해서 끝까지 밀어붙여요. 욥도 고집이 한 고집합니다. ‘도대체 이유를 대주세요. 다른 사람은 안 아픈데 왜 나만 아픕니까? 왜 아픕니까?’ 라고 계속 이야기해요. 마지막에 하나님이 직접 등장합니다. 등장해서 ‘황무지에 비가 오는데 그 이유를 아느냐?’ 모르죠. 황무지가 아무 가치도 없는데 비가 내리는 것처럼, 너는 황무지고, 고난은 하나의 빗줄기 같아서 그것은 황무지가 ‘왜 저한테 비를 내립니까?’라고 물을 자격도 안 되고 그런 권리도 없는데, 너는 나한테 피조물이 감히, 감히 자기한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처럼, 내가 존재의 가치가 있는 것처럼, 어떤 물을 권리가 있는 것처럼, 그렇게 대든다 말이죠.
나중에 직접 하나님 만나고 난 뒤에, 하나님 만나기 전까지는 자기가 온갖 생각을 다 하는 거예요. 옆의 친구하고 비교해서 온갖 것 다 이야기하다가 막상 하나님이 자기하고 맞닥뜨리니까 욥은 브라우니(개)가 되고 말았어요. 가만히 있습니다. 재를 뒤집어쓰고 가만히 있어요.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의미를 붙여줍니다. 욥이 기도하므로 알지도 못한, 하나님을 안다고 우기는 욥의 친구가 용서를 받을 것이다. 하나의 인형 개처럼 자기는 그냥 고난만 받고 있을 뿐 이예요. ‘고난’을 써서 붙이고, 가만히 있을 뿐이죠.
주님께서 의미를 붙여 줍니다. 네가 나중에 세 명의 딸을 낳을 것이다. 그 딸은 이 나라에서 미스코리아 진, 선, 미가 될 것이다. 그리고 네가 잃어버렸던 재산보다 갑절의 재산을 내가 줄 것이다. 만약에 욥이 자기한테 하나님 만나고 자기한테 의미와 가치가 있다면 ‘우쌰, 우쌰.’ 할 거예요. ‘야, 이거 뭐 한번 고난 받고 난 뒤에는 재산이 갑절로, 딸도 더 예쁜 딸을 주셨구나. 야, 이거 늘그막에 팔자 고쳐 좋다.’ 이렇게 하겠는데, 이미 그 와중에서 그 중간 넘어가는 과정에서 나한테는 고난이 오든 축복이 오던 이건 나를 위함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흠뻑 소나기 맞듯이 흠뻑 젖어버렸어요. 나라는 존재는 오직 주님의 이름과 주님의 존재하심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나는 존재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게 바로 천국입니다. 거기에 출애굽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은 없고 히브리인들이 있습니다. 히브리인이 그냥 이스라엘 돼 버리면 이것은 히브리인이, 히브리인 돼 버려요. 이스라엘이 되는 게 아니고. 그래서 히브리인이 이스라엘 될 때는 그 중간에 뭐가 삽입돼야 됩니다. 그게 뭐냐, 어린양의 죽음!! 히브리인에다가 어린양의 죽음이 합치 되니까 그게 나라가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이스라엘 나라의 주도권은 히브리인이 주도권을 갖고 있는 게 아니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혈통적 후손이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어린양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어린양이 주도권을 매일같이 반복하는 장소가 언약궤가 있는 장소예요.
그래서 여호수아 1장부터 계속 앞부분을 보면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지고 요단강을 건너갔더니만 물이 흐르고 있는 요단강이 언약궤를 세우니까 물이 양쪽으로 차단되었습니다. 차단! 이게 출애굽 정신입니다.
이 출애굽 정신으로 오늘 본문을 다시 봅시다. 오늘 본문 14절에 보면 “원컨대 주는 주의 지팡이로 주의 백성 곧 갈멜속 삼림에 홀로 거하는 주의 기업의 떼를 먹이시되 그들을 옛날 같이 바산과 길르앗에서 먹이옵소서” 라고 돼 있죠. 바산과 길르앗, 그리고 갈멜의 위치가 어디쯤 되느냐, 항상 대구를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분들은 이해해 주세요. 대구 쪽에서 생각해 보면 봉화 쪽이 길르앗, 그리고 봉화 위쪽에 삼척 쪽 그게 바산, 그리고 대구 쪽에서 방향을 틀어서 제천, 그 쪽이 지중해 바다와 접한 그쪽이 갈멜, 그런데 지명상은 이렇게 길르앗, 바산, 갈멜이 되지만, 사실은 지명을 우표 떼듯이 살짝 떼면 고 안에 뭐가 담겨 있느냐 하면, 어린양의 피, 창조주가 직접 우리를 이 땅에 자기 손수 자기 피를 값 주고 사서 이런 땅에 직접 히브리인이 아니고 이스라엘을 위해서 장만해 주셨다. 따라서 그 땅에서 생산되는 모든 곡식과 모든 풍족한 산물은 우리 그냥 양식이라 여기고 먹으라는 게 아니고, ‘이 모든 것이 어린양의 피에서 용서하심에서 나오는 결과물로 우리가 그걸 매일같이 먹고 있습니다.‘라는 정신으로 살아 달라는 거죠.
그러면 출애굽이 그냥 처음에 홍해바다를 건너 왔을 때만 출애굽이 아니고, 그쪽에 계속 살아가면서도 매일같이 아침마다 밥을 먹고 저녁마다 밥을 먹으면서 출애굽 정신을 매일같이 먹고 사는 거예요. 피를 먹고 산다고 보면 되는 겁니다. 내 살과 내 피를 먹지 않으면 영생이 없다 했잖아요. 하나님이 입에다 넣어주시는 거예요. 우리가 알아서 마트, 장에 가서 사먹고 요리하는 음식이 아니고, 주께서 직접 주는 음식을 먹어야 너는 생명이 있다는 겁니다. 주께서 직접 손으로 먹여준다는 것은 그 손이 무슨 손? 창조, 없는데서 있게 하는 손이예요. 그러니까 주께서 먹여주시는 양식이라는 것은 이 땅 시장에서 팔지 않습니다. 돈 주면 살 수 있는 그런 양식들이 아니에요.
어떤 목사는 자기가 안수해서 이 물 먹으면 모든 병이 낫고 만사형통하고 만병이 낫는다는 물을 또 팔았어요. 예루살렘 교회라 해서 이 초석 그쪽에서 물을 팔았는데,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은 그런 물이 아니고 우리 속에서 매일같이 나오는 물입니다. 속에서 물이 나오려면 우리 속을 새롭게 인테리어 새로 해야 돼요. 우리 속에 뭐가 놓여야 하느냐 하면, 우리 속에 예수님이 주도권을 쥐고 있어야 됩니다. 속에서 나오는 샘은 성령에서 나오는 샘이거든요. 그럼 성령이 우리 속에 자리를 잡아야 되고, 그럼 성령이 자리 잡는다는 말은 성령은 무슨 영이냐 하면, 로마서 8장 11절에 보면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려낸 영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가 예수님을 살려낸 먼저 실습을 보여줬던 그 영이 우리 속에 들어가면, 죽은 예수님을 살려낸 그 영이 우리 속에 있으면 우리도 죽은 예수님을 살려주듯이 매일같이 살려내는 거예요.
그런데 성령께서 죽은 예수님을 살려낼 때 예수님이 어떤 상태에 있었느냐 하면, 육신의 죄를 짊어진 상태에 있었습니다. 여러분, 지금 이 이야기가 이해됩니까? 예수님이 십자가 죽을 때 빵빠레 울려서 멋있게 죽은 게 아니고, 아주 흉측하게 죽었어요. 왜냐 하면 우리 죄를 대신 짊어졌기 때문에 죄인의 모습으로, 그것도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 우리를 심판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나 죄인 맞습니다.’라는 죄인의 모습으로 돌아가셨거든요. 그 죄인의 모습이 사흘 뒤 하나님의 모습으로 바뀌어졌다 말이죠. 그렇게 바뀌는 그 능력이 우리 속에 자리를 잡고 매일같이 우리 죄를 그런 식으로 살려내는 작업을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다 이 말입니다.
주기도문에 보면 이렇게 돼 있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아까 출애굽 정신입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게 뭐냐 하면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함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 하옵소서” 이런 이야기 가지고 기도를 한다는 것은, 그 기도하는 당사자가 우리가 이 땅에서 살고자 하는 자체가 이건 핑계 댈 수 없을 정도로 나만 살고자 하는 그런 ‘욕심이 잉태하여’ 하는 거기에 해당되는 채로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났다는 거죠. 태어나서 욕심이 이끄는 대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좋은 분인지 나쁜 분인지 측정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보다 더 오래 살아야 돼요. 맞잖아요. 하나님보다 더 오래 살아야, 아하, 하나님 맞구나. 이게 확인될 수 있다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은 살았는데 내가 먼저 죽어버리면 아이쿠,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내가 제대로 확인도 못해보고 억울하게 먼저 죽는 셈이 되니까 세상에, 이런 억울할 데가 있습니까? 그러니 인간들이 하나님 있니, 없니, 판단한다는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보다 더 오래 살아서 살펴봐야 되는데 그런 입장이 못 되잖아요.
하나님께서 우리 욕심이 죄가 된다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 욕심대로 해주질 않아요. 나는 딸 낳고 싶은데 아들 낳고, 아들 낳고 싶은데 딸 낳고, 세상의 어떤 일이 내 뜻대로 되는 일이 없어요.
책이 새로 나와서 보냈는데 제가 강의하러 가니까, ‘목사님 왜 책이 안 옵니까?’ 글쎄요. 그래서 전화해 보니까 화요일 날 보냈다는 거예요. 화요일에 보냈으면 아무리 늦어도 목요일에 와서 메시지 와서 ‘목사님 감사합니다.’ 이런 게 떠야 되는데 하나도 안 뜨고, 나중에 오늘 물어보니까 천천히 가는 걸로 보냈다는 겁니다. 왜냐 하면 어차피 받아볼 것을 그 돈이 어떤 돈인데, 귀한 돈이잖아요. 그걸 빨리 보내지 않고 천천히 보내는 돈으로 해서 그 하나님의 헌금을 아끼는 그 깊은 마음, 그것도 모르고 사람들은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혹시 사고가 일어났나, 집사님이 잊어버렸나, 그러니 세상이 우리 예상대로 자꾸 걱정 근심을 유발되는 쪽으로 자꾸 뭔가 세상이 알아서 휘말려서 회오리바람이 부는 거예요.
그럴 때 주께서는 ‘믿어라’ ‘뭘요.’ 바로 요단강에 언약궤 때문에 단절 됐음을 믿어라. 주님께서 세상 사람들은 절대로 그걸 못 믿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우리도 못 믿는데 저들이 믿을 수가 있습니까? 절대로 사람의 손으로 안 믿어지게 이끌어내요. 그래서 믿음 자체가 선물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 믿음 자체가 매일같이 믿어지는 양식, 하나님 손으로 직접 넣어주는 그 양식이 뭐냐, 매일같이 믿어지는 겁니다.
그 언약궤가 4장에서 언약궤로 차단되는데 이게 출애굽의 일관된 정신입니다. 여호수아 8장에 보면, 그 언약궤, 요단강을 건너 온 언약궤가 그냥 건너와 버리면 사람들은 ‘야, 언약궤 때문에 우리는 물을 건넜어. 놀랍다네. 참 놀랍지?’ 그저 물 건너온 걸로 언약궤를 다 해버리면 이미 물 건너온 사람한테는 그딴 거 기억할 필요가 없는 거거든요. 이미 건너와 버렸는데 뭐.
아가씨들이 결혼하기 전까지는 얼마나 조심스럽고 ‘나 순대 이런 거 못 먹어요.’ 하면서 부끄러워하고, ‘아유, 나는 공주 같아서 이런 거는 …’ 막상 결혼해 보니까 순대도 막 두 손으로 먹고, 방귀도 뿡뿡 뀌고, 청소도 안 해놓고 하는데, 한번 결혼한 거 물릴 수도 없고, 한번 뭔가 건너와 버리면 다시 본색이 드러나거든요.
하나님께서는 물을 건너온 것이 출애굽 정신이 아니고 언약궤가 그리심 산과 에발 산 앞에 딱 나갑니다. 에발 산은 저주 산이고, 그리심 산은 축복 산 이예요. 하나님의 요단강을 건너왔던 그 언약궤가 여호수아 8장에 보면 그것을 축복 산 밑에 놓는 게 아니고, 그걸 저주 산 밑에 언약궤를 딱 놓아요. 언약궤가 두 개가 아니에요. 두 개 같으면 하나씩 놓죠. 하나밖에 없는 언약궤를 축복 산에 놓는 게 아닙니다. 그걸 저주 산 에발 산 밑에 딱 놓는 거예요. 더 쉽게 말해서 축복 교회는 가면 안 돼요. 교회 이름이 우리 저주교회, 이런데 가야 돼요. 그 밑에 딱 놓으니까 ‘언약궤가 있는 자리에서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면 우리는 이렇게 저주받는 것이 합당합니다.‘라는 고백을 12지파 나누어서 합창하게 만듭니다. 이게 출애굽 정신 이예요.
물을 건너온 것이 다가 아니라 날마다 저주받아야 될 정도로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는 이 원리원칙 안에서 진정 우리가 살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는 그 언약궤 예수님, 어린양의 피가 우리를 살려냅니다. 그 피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한다면 그것이 바로 천국의 풍성함이요, 천국의 영생이고 천국의 영광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하는 일이 우리의 예상 밖으로 주께서 원하는 대로 예수님이 하신 일로 이루어지는 것을 알았습니다. 귀신을 쫒아내고 병을 고치는 것이 우리 원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증거 하기 위해서 영원히 살리기 위한 작업인 것을 우리가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