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인없는 결과 12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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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이근호(IP:119.18.78.175)
서경수(IP:121.♡.190.236)
12-11-30 20:25
광주 강의(2012. 11. 23) 36-1
에스겔 36장 8절을 보면 “그러나 너희 이스라엘 산들아 너희는 가지를 내고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과실을 맺으리니 그들의 올 때가 가까이 이르렀음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여기에 ‘그러나’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 앞 3절에 보면 “사람의 말거리와 백성의 비방거리가 되게 하였도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벌을 받아서 그렇게 된 겁니다. 하지만 그 다음에 ‘그러나’가 나옵니다. ‘너희들은 하나님께 죄를 지어 벌을 받았다. 그러나 너희들은 나중에 복을 받을 것이다.’ 이런 의미가 되겠지요.
이처럼 ‘그러나’를 기준으로 앞과 뒤가 완전히 전환되는데, 하나님께서 무엇을 제공했기에 갑자기 팔자가 바뀌느냔 말이지요. 수능시험 치는 학생들도 ‘그러나’에 해당되어서 갑자기 좋게 바뀌면 좋겠습니다.
그 바뀐 근거가 뭐냐 하면, 유대인들이 BC 586년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후에 그 땅에 누가 와서 사는가 하면 에돔 사람이 차지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처음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때는 이 땅을 누구한테 준 것입니까? 이스라엘에게 준 땅이잖아요.
이스라엘에게 준 땅인데, 바벨론에게 망한 후에 귀족들이랑 기능공들은 바벨론으로 끌려갔지만 그곳에 가서 약간은 대우를 받으면서 살았습니다. 특히 여호야김 왕은 그곳에서도 궁정생활을 했고 나라에게 모든 삶을 뒷밭침해 주었습니다. BC 561년까지 그들은 건제했습니다.
여호야김은 다윗 족보입니다. 다윗 혈통을 가진 왕이 바벨론에서 대우를 받는다는 것은 그 바벨론에 끌려갔던 유대인들에게 어떤 민족적인 희망을 일으키는가 하면, ‘하나님이 끝까지 다윗 혈통을 보살피고 계시는구나. 그러니 여호야김을 중심으로 다시 옛날 다윗 왕국을 회복할 수 있는 불씨를 남겨두셨다.’ 라는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이런 민족주의적 생각을 ‘시오니즘’ 또는 ‘유다이즘’이라고도 합니다. 유다지파 외에 다른 지파는 정식 이스라엘로 인정하지 않는 사상입니다. 이 사람들이 성경을 보는 안목은, 성경 전체가 하나님께서 시대를 만들어 나갈 때 결국은 유다 자손들만 뽑아내려고 의도적으로 역사를 조정해 왔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민족주의가 정당화 되겠지요. 여호야김을 하나님이 바벨론에서도 지켜 주셔서 다시 유다 나라 회복의 씨가 마련되었다면 왕만 존재해서는 나라가 안 됩니다. 왕도 있고, 국토가 있어야 하고, 백성들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아무나 그 나라에 들어가면 안 됩니다. 유다 지파인지 족보를 확실하게 따져야 합니다. 아무나 넣어주면 안 되겠지요.
사마리아 지역에 있던 사람들은 혼혈족에 되어서 아브라함의 혈통이라고 볼 수 없잖아요. 마태복음 8장에 나오지요. ‘우리는 아브라함의 족속이다. 따라서 천국은 우리의 것이다.’라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말했습니다. 이것이 BC 167년 유다 자손들이 마키비 전쟁을 일으켜서 100년간 이끌어 오다가 나중에 헤롯 가문으로 바뀌고 그 다음에 예수님이 나타나게 되는데, 그들이 제일 먼저 생각했던 것은, 그 가문이 다윗 가문인가, 그리고 제사장도 다윗 가문에서 난 제사장. 즉 사독 계열의 후손인가 이런 것들을 중요시했습니다.
민족주의를 제가 언급했는데 여기에 대해 선지자들이 동의했겠습니까, 안 했겠습니까? 동의하지 않습니다. 하나냐라는 사람이 여호야김이 살아있다는 이유로 독립운동을 일으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신채호같은 인물입니다. 신채호 알지요. 북경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했지요.
옛날 일제시대에 독립운동가들이 두 파가 있었어요. 하나는 상해 중심으로 활동한 파가 있었고, 북경에서 활동한 사람들이 있었어요. 상해파는 좀 성공을 했지요. 테러에 성공했는데 북경파는 사전에 발각되어 성공도 못하고 신채호도 결국은 감옥에서 죽었지요.
이러한 민족주의 같은 것이 예레미야, 에스겔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70년 후에 돌아온다고 하면서 말했습니다. “너희들 포로로 잡혀가면 푹 쉬어라. 70년 후에 돌아오니까 너희 세대는 이제 끝났어. 그러니 그곳에서 편히 살아라.”고 한 거예요.
그런데 하나냐라는 사람은 “아니야, 우리는 여호야김이 있기에 몇 년만 참으면 돌아올 수 있어.”라고 한 거예요. 이런 자들을 향해 예레미야는 ‘거짓 선지자’라고 합니다. 참 선지자(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등)의 특징은 천상회의를 참관했다는 겁니다. 천상회의에 참석하고 온 예레미야는 “포로 잡혀가면 그곳에서 푹 쉬어라.”고 했습니다. 포도도 재배하고 곡식도 가꾸고. ‘너희들 시대는 끝났고, 너희 후손 시대에 돌아올 것이다.’는 겁니다.
실제로 후손 시대에 돌아왔습니다. 고레스 시대(BC 536년)에 세스바살이라는 사람을 앞장세워서 협상해서 왔고, 그 다음에 스룹바벨이라는 사람이 처음에 총독으로 옵니다. 나중에 총독이 어디까지 이어지는가 하면 느헤미야까지 이어지는데 그 기간이 약 100년 정도. 여하간 유대 총독이 있어서 나라가 아니라 바벨론 나라의 한 개 주(미국에는 50개 주가 있지요)가 됩니다.
주가 되어서 그곳에 게달랴라는 총독이 있어요. 그런데 여기서 민족주의자들이 설치게 됩니다. BC 586년에 유다의 귀족들은 다 데려가고 가난한 사람들만 남겨서 농사를 짓게 했는데, 그 때 안 가고 버텨 남은 군벌들이 있었는데, “우리는 다시 합쳐야 된다.”고 해서 등장한 사람이 이스마엘이에요.
이스마엘이라는 사람이 게달랴라는 총독을 살해했어요. 그래서 BC 586년에 끝났는데, BC 582년인가에 다시 와서 “이게 어디 우리 총독을 죽여” 하면서 쳐들어와서 5,000명을 포로로 잡아갑니다. 그 때 이스마엘은 겁나서 애굽으로 도망을 갑니다. 북쪽에서 쳐들어오니까 남쪽으로 도망간 거예요.
도망갈 때 바룩(예레미야 비서입니다)이라는 사람과 예레미야를 잡아가요. 잡아가면서 계속 물어요. ‘우리가 하는 일이 신앙적으로 너무나 옳기 때문에 언제쯤 우리나라가 회복 되겠는가?’ 다윗 혈통 여호야김 모시고, 다윗에 속한 제사장 모셔서 언제 다윗 언약대로 회복될지 물으니까 예레미야는 말합니다. ‘그러지 말고 그냥 바벨론에 포로 잡혀가면 된다.’고 해요.
예레미야는 이미 예언했어요. 에스겔에도 나옵니다. “큰 독수리(바벨론)와 또 다른 큰 독수리(애굽).” 천상회의에 참석한 사람만 영적인 안목에서 역사를 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정치적 안목으로 봅니다. 사실 정치라는 것은 추상적인데, 그 밑바탕은 경제입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잘 보세요. 박근혜, 문제인 이 사람들이 정치인이잖아요. 어제 전국 버스회사가 대모를 했지요. 버스회사가 정치하는 사람들입니까, 기업입니까? 경제활동 하는 사람이잖아요. 그냥 버스 운전해서 월급 받으면 되지 파업은 왜 합니까? 택시는 택시 운행하고, 버스는 버스 운행해서 월급 받으면 되지 정치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우리는 정치인들이 필요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운전사들이 왜 정치적 행동을 합니까? 스스로 자학하듯이 “나는 버스 안 몰래.” 이러면서 삐치는 거예요. 운행 안하면 본인만 손해지요. 그래서 하루 만에 철회를 했는데, 버스를 굴리고, 안 굴리고는 스스로 결정해서 행동하면 되는데 왜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시위를 하는 것입니까?
국회에서 택시를 대중교통으로 인정하는 법안을 만든다고 하니까 정치인들이 보라고 시위를 하는 거예요. 사람이 노동을 해서 이익을 남긴다. 이것은 경제지요. 그런데 여기에서 한 자를 더 넣습니다. ‘더 이익을 보겠다.’ 이것은 경제를 벗어난 거죠. 이렇게 되면 이것은 정치가 됩니다.
이 ‘더’는 어디서 나와야 되는가 하면, 노동을 했는데 ‘덜’이익을 봤다. 이 ‘덜’이 바뀌면 ‘더’가 되는 거예요. 정치꾼은 모사꾼인데, 그러면 정치꾼을 없애면 되지 않겠는가? 정치를 없애려면 한 가지 조건 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노동에서 소득을 얻을 때 ‘더’를 포기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 세상 인간 중에 내 노동의 대가가 어느 정도인지를 정확히 판정하고, 그것에 만족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항상 ‘더’를 원하지요. ‘더 큰 이익’을 바라요.
복지는 사람들이 얻은 소득으로 세금을 내서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는 겁니다. 그런데 복지로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었는데 세금을 잘 내지 않아 복지금을 내린다고 하면 가난한 사람들이 화를 냅니다. 공짜로 받았는데 그 금액이 줄어들면 분노합니다. 공짜를 받을 때부터 그것을 공짜로 여기지 않고 공짜를 받아 챙기는 것이 노동이 되었어요. 이상하지요?
그래서 성경에서 보는 경제는 우리를 빌어먹어도 되는 상태로 만들어버립니다. 우리는 완전히 굶어 죽어도 마땅한 자라고 합니다.
제가 강의 시작하면서 “그러나”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속에 뭐가 있기에 이렇게 갑자기 하나님이 좋은 방향으로 이야기하는가? 그것은 구원 받아야 될 인간이 자기 노동의 대가를 받을 자격이 없음이 완전히 확인될 때, 그 때 주의 이름이 높아지는 겁니다. 내 힘으로 내가 얻겠다는데 하나님이 왜 개입하는가? 이렇게 되면 주의 이름이 욕을 얻어먹어요.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축복을 줄 때는 우리 이름으로 했던 모든 것이 아무 쓸 데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확인시키고 난 그 바탕 위에 하나님의 이름이 비로소 일을 개시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유다 지파 사람들이 거하는 땅에 에돔 사람들이 와서 차지하고 있으니까 하나냐라든지 이스마엘같은 독립투사들은 강력하게 정치적인 호소를 하는 거예요. “우리가 단결해서 옛날 다윗의 영광을 회복합시다. 성경 말씀 그대로 다윗의 혈통으로 계신 그 왕을 모셔서 나라를 회복하기 위해 에돔을 우리 땅에서 몰아냅시다.”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요.
여기에 대해서 예레미야는 뭐라고 합니까? “네가 바로 거짓 선지자다.”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그들은 천상회의를 다녀오지 않았기에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따라 정치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날 교회가 교회가 아닌 이유는 사람들의 뜻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교회가 아닌 겁니다.
천상회의를 다녀온 선지자의 공통점이 있어요. ‘저는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이 땅에 살 가치도 없고 이유도 없습니다. 회개할 가치도 없습니다. 내 이름을 위한 모든 행위를 다 접어야 되고 오직 주의 이름만을 위해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 됩니다.’
에스겔의 출발이 그래요. 그랄 강가에서 계시를 받아요. 포로 잡혀 온지 5년 만에. 포로 잡혀 온 것이 BC 587년이고, 계시 받은 것은 BC 583년입니다. 계시를 받았는데 수레인데 수레의 모양을 보니까 바퀴가 있는데 그 속에 또 바퀴가 있어요. 그리고 바퀴를 지탱하고 있는 모양새는 사람도 아니고 짐승도 아닌, 반인반수의 괴물들이 있고, 그 괴물들이 외부의 모양새를 형성하고, 바퀴를 움직이는데 바퀴 안의 바퀴를 보니까 거기에서 인자(사람)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 사람의 모습은 고난 받는 모습이에요. 인자의 모습인데 죽음을 품고 이 땅에 나타나신 분. 그분이 하나님 안에 들어 있고(바퀴 속에 바퀴가 있고), 그 안에 계신 분이 활동력으로 등장하면서 나중에 인자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게 되지요. 바퀴 속의 바퀴라는 것은 천지창조의 창조자 모습입니다.
창조이전에 창조자의 모습에서 창조가 전개되거든요. 그게 뭐냐? 죽음이 거기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사람의 존재보다 죽음의 존재가 우선이지요. 사람보다 십자가가 우선입니다. 사람보다 죽음이 먼저 있고, 그 죽음을 보여주기 위해 사람이 있는 겁니다. 아담이 흙이 되어야 할 이유는 바퀴 속에 숨어있는 죽으시는 하나님을 소개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선악과에 걸려들어야 되고, 아담이 죽음으로 아담 죽음과 또 다른 마지막 아담의 죽음을 증거하기 위해 아담은 죽게 되는 겁니다.
그런 실재적인 하나님을 봤어요. 그랄 강가에서 환상을 봤는데 그 바퀴 안에 처음에는 없었는데 나중에 뭔가 도달된 게 있어요. 하나님의 신이 바퀴와 달라붙었어요. 원래 하나님의 신은 어디에 계셔야 하는가 하면 성전 동편에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그랄 강가에 날아와서 여기 들어붙어버려요. 그리고 그 들어붙은 곳이 뭐냐? 하나님의 보좌입니다.
그것이 수레바퀴인데 바퀴는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원하는 대로 마음껏, 어떤 방해물이나 저항 없이 자유롭게 움직이는 거예요. 이 환상을 에스겔이 본 거예요. 하나님의 신과 여호와의 이름이 만나는 이 광경을 인자라고 호칭되는 에스겔에게 미리 보여준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성전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의 성전은 어디 있느냐는 것은 성립이 안 되고, 어디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에스겔이 말씀을 듣는 그 자리가 곧 하나님의 성전이 됩니다. 제가 지난 수요일 설교했지요. 구원은 말씀으로 됩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교회가 구원을 준다는 주장이 말씀으로 구원되는 것을 훼손하고 훼방하는 겁니다.
‘나 교회 다녔다’로 ‘나 구원 받았다’를 대신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안 듣습니다. 교회 없으면 안 되지만 말씀은 없어도 살 수 있다고 여깁니다. 이런 인식 때문에 거짓 선지자들이 판을 칠 수가 있는 겁니다. 거짓 선지자의 주 메뉴가 뭔가 하면, 매일 이동하는 말씀의 위력은 모르고 늘 교회만 붙들고 있어요.
좀 더 상세히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솔로몬 이후에 남,북이 갈라집니다. 솔로몬의 잘못 때문에 다윗 언약이 깨어지면서 갈라지는데, 그때부터 제사장은 제사지내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을 가르치는 역할을 했습니다. 에스겔이 제사장 출신입니다. 천상회의에 참석했던 선지자의 말이 성전이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진짜 백성과의 소통이 가능하면 됩니다.
에스겔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했는데, 이것은 에스겔의 요청에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역사였습니다. 그러면 에스겔을 통해서 예전에 없었던 새로운 말씀의 사역이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환상을 본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듣게 되면 실제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일은 지금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활발하게 활동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예루살렘에 있던 성전의 기능은 이제 그 역할을 다 한 겁니다. 그리고 땅, 민족 모두 역할이 다 끝난 거예요.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그 귀족들을 바벨론으로 옮겨 가도록 했습니다. 그 때 예레미야가 뭐라고 했습니까? ‘70년 동안 포로가 되어야 한다.’라는 말씀이 실제로 이루어지면, 그 말씀 안에 담겨 있으면 계속 진척되고 있는 하나님의 언약된 백성입니다. 그런데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문제입니다.
쉬나고게라는 것이 뭔가? 바벨론에 포로 잡혀 간 유다 백성들이 70년 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왜 안 돌아오는가 하면, 돌아오는 것 자체가 새로운 모험입니다. 지금 서울에 잘 살고 있는데 광주에 왜 갑니까? 살던 곳을 떠나면 새로운 곳에서 또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데 쉽게 갈 수 있겠습니까? 못갑니다. 그래서 안 돌아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는가? 애굽으로 많은 사람이 갔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간 것이 아니고요. 예루살렘은 살기 적합한 곳이 아닙니다. 비도 잘 안 내리고 겨울에는 춥고 경작지도 많지 않아요. 지중에 이쪽 동네가 원래 농사가 잘 돼요. 해안지방이라 무역도 활발하고 잘 사는데, 예루살렘이 있는 내륙 지방은 별 볼일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애굽으로 갔습니다.
바사의 고레스 왕이 유대인들을 돌아가라고 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기 좋은 애굽으로 갔고, 사명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들이 성전 짓는데 몰두했지만 성전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을 섬긴다는 것은 완전하게 망해야 비로소 하나님이 보인다는 것을 부각시킨 겁니다.
사람이 망하지 않으면, 인간이 자기 죽음을 긍정하지 않으면, 내가 죽어야 마땅하다는 것을 수용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아무 의미도 없고 소용도 없는 겁니다. 하나님이 의미 없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도 필요치 않는 겁니다. 지금 살만하니까 말씀을 안 듣는 거예요. 떡으로 잘 사는데 말씀이 왜 필요합니까?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오”라고 하니까 “떡으로 살 때까지 한 번 살아보자.”고 하는데 어떻게 말씀에 귀 기울이겠습니까? 성경공부를 하기는 하는데, 그 이유는 혹시 떡을 더 많이 받을까 싶어서 하는 겁니다. 떡은 살라고 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 먹어도 사는 것이 아니구나.” 즉 죽음을 경험하라고 떡을 준 거예요.
에스겔은 말씀으로 사는 것을 보여줍니다. 390일 동안 오른쪽으로 눕고, 40일 동안 왼쪽으로 누워 잠을 잤는데, 390일은 이스라엘의 죄 값을 치르는 거예요. 죄 값이 없는 구원은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인생을 사는 것은 그냥 죄 값으로 사는 거예요. 산다는 자체가 죄 값이에요.
살아가면서 내가 하는 일이 나를 망하게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혹독하게 체험해야 돼요. 백수라면 백수가 나를 망하게 하고, 교사라면 교사의 일이 나를 망하게 하고, 목사는 목사의 일이 나를 망하게 합니다. 그러니 이렇게 해도 망하고 저렇게 해도 망합니다. 죄 값을 치르는 그 자체가 구원의 첫발을 내딛은 거예요. 구원 쪽으로 가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에스겔이 보는 것은 뭔가 하면 갈림길입니다. 인자의 죽음이 보이는 곳으로 갈래, 아니면 내가 사는 쪽으로 갈래? 이것이 한 순간만이 아니고 매일같이 갈림길이 있어요. 그러면 우리는 매일같이 내가 사는 쪽을 선택합니다. 인자의 죽음 쪽으로 사는 것은 말씀으로 가는 것인데, 우리는 떡이 있는 쪽으로 갑니다.
오늘 낮에 십자가마을에 [성경 해석]이라는 글을 올렸는데, 이런 내용입니다. 떡을 먹고 배불러서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고 옵니다. 그러면 따라오는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현실관이 있을 것 아닙니까. “야, 저 예수님은 우리 현실관에 부합된다. 저분만 있으면 우리가 기대했던 현실은 보장된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 말씀이 “너희들이 나를 따르는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 너희들과 같은 현실관 때문에 죽임 당할 내 피와 살이 진정 너희를 살린다.”라고 할 때 사람들은 다 떠나고 다시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지요.
요즘 대통령 선거하면서 야권 후보 단일화가 계속 거론되는데, 제자들과 예수님은 단일화가 안 돼요. 그렇다면 모든 성경이 이 결별성이 포함되어 있어요. 인간은 주님과 결별하고 독자적인 길을 가는데 그런 인간을 주님은 끝까지 찾아가는 그 위력. 그래서 주님의 이름을 믿게 되는 경우가 어떤 경우인가 하면 ‘나는 주님과 결별하고 싶은 마음이 내 속에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발견할 때 비로소 우리는 주의 사랑을 알고 은혜를 알게 됩니다.
이것을 로마서 1장에서는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고 했어요. 그러니 우리가 어디까지 가야되는가 하면, 우리가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그 마음이 나의 가장 근본적인 마음이라는 것이 발각당하는 자리까지입니다. 그러면 구원 받고 발각 안 되면 지옥 갑니다.
하나님께서 늘 갈림길을 주시는 것은 불신자를 만들어 내기 위함입니다. 불신자는 본인이 불신자 되려고 가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불신자 되도록 일하시고, 신자는 신자 되도록 하십니다. 노래 가사 중 이런 것이 있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우리는 사랑 받고 있어요.” 이 가사를 바꿔야 돼요. “당신은 저주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우리는 저주 받고 있어요.” 이렇게.
불신자가 저주 받는 이유는, 본인의 선택이 죽는 쪽이 아니고 매일같이 사는 쪽으로, 그러니까 말씀을 포기하고 떡이 있는 쪽으로 방향을 틀도록 주께서 그렇게 인도하십니다. 이 저주 받을 민족주의가 왜 생겼는지 압니까? 예레미야나 에스겔이 없으면 그것이 저주 받을 일이라는 것이 들통 안 납니다. 주님은 그 많은 사람 가운데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을 천상회의에 참석케 하신 후에 보내니까 비로소 그들 눈에 거짓 선지자가 민족주의라는 것을 알 수 있었지요.
36장 26절을 봅시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여기에 ‘영’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에스겔이 성신을 받았기 때문인데, 뭐가 어려운가 하면, 영의 문제와 외부에서 일어나는 정치적 문제가 어떻게 연관되는가 하는 점입니다.
“내가 성령 받았습니다.” 라고 하면 갑자기 광주에 아파트가 무너집니까? 바깥에 있는 물질적인 변화가 내가 성령 받은 것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이 문제가 난해하지 않습니까? 민족주의자들 입장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이여, 정치적으로 외세를 물리쳐 주시면 우리는 다윗의 자손 여호야김을 왕으로 모시고 장차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겠습니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오소서. 다시는 주의 말씀을 어기는 죄를 짓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나옵니다.
생각이 있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 주님을 에스겔을 통해 해답을 주시는데, “네가 새로운 영을 받아라.” 이렇게 나와요. 새로운 영을 받는 것과 정치적, 경제적 독립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지금 버스 업체에서 택시 회사에 보조금 주지 말라고 데모하는데 에스겔이 와서 “성령을 받으세요.” 라고 했는데, 그러면 버스 업체의 문제가 해결됩니까?
현실적으로 뭔가를 줘야지요.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날 때, “야, 배불리 먹었다. 예수님만 계시면 우리의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된다.”고 할 때, 예수님 말씀이 “내 살과 내 피를 먹으라.”고 하셨는데, 이게 현실성이 있는 말씀입니까? “아, 살과 피를 먹으면 떡도 먹을 수 있겠구나.” 이런 발상밖에 안 나와요.
그러니까 육적인 사람에게 영적인 말씀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요. 예수님 말씀 자체가 이 시대에 전혀 소용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씀에 관심이 없고 실제적으로 돈 버는 쪽으로 갑니다. 이게 바로 “당신은 저주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주께서 이런 쪽으로 몰아세웁니다.
에스겔이 본 환상이 수레인데, 바퀴가 달린 수레 안에 인자가 탔습니다. 죽어야 될 인자가 수레를 타고 왔을 때 이것이 실제로 에스겔을 통해서 나타날 때 에스겔은 뭐라고 부르는가? 인자라고 불렀지요. 인자에서 나온 에스겔의 행동을 보세요. 정상이 아닙니다. 우편으로 390일을 눕고 이게 뭡니까? 에스겔이 보여주는 것은 뭔가? ‘이 백성이 죄를 지었고, 이 죄로 말미암아 멸망을 받고, 너희들이 멸망함으로 내 이름이 세상에서 영광 받으리라.’ 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관심사는 뭡니까? 우리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 자기 이름의 존재감, 그 이름이 영광 받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면 어떤 경우에 이것이 보입니까? 내가 망해야 됩니다. 어떻게 망하는가? 천상회의에 참석한 분의 안목에 의하면 우리는 죄인이고, 죄로 인하여 망한다. 죄와 멸망의 관계가 성사될 때만 이런 일을 행하신 주의 이름을 찬송할 수가 있는 겁니다.
제가 어떤 설교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베드로에게 주님이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를 많이 잡았는데, 그 때 베드로가 “내가 바보같이 왜 오른편에는 그물을 던지지 않았지. 멍청하군.” 이렇게 말했습니까? 아니지요.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라고 했어요.
베드로는 고기를 많이 잡았는지 아닌지 그런 경제적 문제를 떠났습니다. 그런 것은 손을 놓았지요. 이게 에스겔 36장 26절 말씀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새 마음이 온 겁니다. 새 마음이란 어떤 성과 쪽으로 하나님의 일을 엮지 말라는 겁니다. 수능 점수와 하나님을 엮지 말란 말이죠. 수능 시험을 앞둔 학생에게 이게 진짜 복음입니다.
새 마음은, “너희 교회 몇 명 나오니?” 또는 “헌금 얼마나 나왔는데?” “교회 출석한 후에 사업이 얼마나 번창했는데?” 이런 성과가 아닙니다. 육적인 인간이 측정 가능한 그런 쪽이 아니고 도무지 측정이 안 되는 겁니다. 왜냐? 십자가가 보이기 때문에. 예수님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보이는데 거기로 가는 길이 없습니다. 길만 있으면 찾아가지요. 길이 없는데 필요할 때 주님이 만들어 냅니다.
주님 십자가가 보일 때 동반해서 저주의 길도 보여주십니다. 돈을 쫓아가면 저주고, 돈 쫓아가는 것이 나쁘다는 것을 알면 십자가가 보입니다. 제 말은 육적인 행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가짐을 말하는 겁니다. 다시 말하자면, “나는 돈 안 좋아하고 주님만 섬길 거야.”라는 행동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돈만 좋아해!” 라는 것을 발각당하면 그것이 바로 십자가가 보이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내가 목사가 되어 복음 전하는 이것이 나를 망하게 하는 길이라는 것이 보이면 그것이 구원 받은 목사입니다. 이런 목자 찾아보기 힘듭니다. 거의 없어요. 자기가 하는 일이 자기를 망하게 한다는 생각을 왜 못할까요? 그것은 새로운 영을 받지 않아서 그래요. 천상회의를 안 가도 괜찮습니다. 천상회의를 다녀온 에스겔이 새 영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
에스겔의 말은 예언입니다. 인자이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 받으면서 ‘내가 세례 받은 것은 세례를 줄 자이기에 세례 받았다’고 하지요. 인자 되시는 분이 우리에게 세례를 줄 때는, 성령을 받게 되면 새로운 영이 오게 됩니다. 그러면 길이 아닌 곳인데 길이 나와요. 그리고 기존의 인간들이 알고 있었던 길은 지옥으로 통하는 길임이 밝혀집니다.
에스겔의 경우에는 자기가 어디로 갈지, 무엇을 할지 예측을 못했어요. 성신이 에스겔을 강권적으로 이끌기 때문이지요. 제게 얼마 전에 [해골 더미]라는 글을 섰는데, 에스겔과 하나님의 대화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됩니까? 바짝 마른 해골 골짜기로 데리고 가서 에스겔에게 말씀을 하시지요.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묻습니다. “저 해골들이 살겠느냐?” 이게 질문이 됩니까? 물을 것을 물어야지.
성도가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때는 꼭 이런 식입니다. 답변할 수 없는 질문을 하십니다. 이 말이 뭔가 하면, 내가 그동안 생각했던 모든 것은 육적인 인간들도 같이 생각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구원은 주님의 은혜로만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안 되는 낯선 길, 주님의 말씀이 임할 때 새롭게 등장하는 길, 이것은 우리가 예측 불가능한 길입니다. 반전이 있지요. 반전이 한 두 번이 아니라 매일 반전이 일어나서 내가 예상치도 못한 쪽으로 인도하십니다.
이것은 불신자도 못하지만 나도 그 생각을 못했고, ‘내 힘으로는 안 됩니다.’ 라고 할 때, 이 짧은 순간은 우리 이름을 포기하고 더 이상 나의 가능성에 의지하지 않습니다.
10분 쉽시다.
(2012. 11. 30. 09:28 녹취 마침)
서경수(IP:121.♡.190.236)
12-12-20 10:14
광주 강의(2012. 11. 23) 36-2
첫째 시간의 주제가 무엇이었나 하면, 정치적 경제적으로 변화되는 것이 사람의 마음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는 거죠. 여기에 대해 결론으로 말씀드린 것이 36장 21절에 나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내 거룩한 이름을 내가 아꼈노라.”
주님은 자신의 거룩한 이름이 훼손되는 것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자신의 거룩한 이름이 이런 식으로 더렵혀졌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들을 동원해서 정치적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하게 해서 멸망에 이르게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사람들이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훼손해서 이렇게 되었구나!” 하고 그 상황을 수용합니까? 아니죠. “재수 없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지.” 그렇게 나오지요. 결코 그런 환경을 맞으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과 연계시키지 않습니다.
이렇게 보면 됩니다. 투명한 막, 투명한데 막이 쳐져 있습니다. 성령의 세계를 육의 세계가 아무리 뚫으려 해도 뚫리지 않습니다. 막 안(성령 세계)에서 거룩한 이름을 위해서 벌어지는 일을 이쪽 동네(육의 세계)에서는 전혀 간섭할 수가 없어요. 이쪽에서 저쪽으로 통하는 통로는 성령(저쪽)편에서 열어줘야 됩니다.
열어줄 때 풍선을 바늘로 찌르면 바람이 빠지듯이, “아, 우리가 주의 이름을 훼손해서 이방 나라에 당했구나.”라고 원인과 결과가 연결되지, 그렇지 않고는 성령의 막을 아무리 뚫으려 해도 뚫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실수 했구나. 다음에는 잘 하자. 고아와 과부를 학대했는데 이제는 고와와 과부를 도와야지.” 이게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아무리 그들이 반성하고 회개해도 성령의 세계를 뚫어낼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은 인간에게는 구원의 능력이 없음을 확인케 하시는 능력으로 작용하지요. 나에게는 구원의 능력이 없다는 것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정말 그렇구나.’하는 것을 다짐하는 가운데 비로소 우리는 주의 이름만 부르게 되어 있습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진짜 “어찌할꼬” 하면서 ‘절망’이라는 말을 하는 것조차 교만할 정도로 완전히 내가 망가질 때 비로소 주의 이름의 고귀함, 주의 이름의 작용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점이 어떻게 연결되지는 마가복음을 보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마가복음 1장 1절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 보면 ‘복음’이란 말이 있어요. 27절을 보면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여기에 ‘귀신’이 나옵니다. 40절에 보면, 병 고치는 이야기가 있고, 2장에 보면 ‘내가 온 것은 병을 고치기 위함이 아니고 죄 사함을 위해 왔다.’고 합니다. 3장에 보면 안식일 이 나와요. 그리고 28절에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는 십자가가 나옵니다.
마가복음 전체를 보게 되면, 복음 이야기를 던져놓고 그 다음에 사람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귀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병을 고쳐주면서 죄 사함을 말합니다. 이 연결고리를 보세요. ‘복음과 귀신’의 고리는 주님과 귀신의 문제이기에 우리가 알 필요가 없어요. 그러면 인간과 관련된 것이 뭐냐? 귀신부터 병 고침입니다. 귀신이 있는데 병이 들었다. 여기서 방향을 거꾸로 한다면, 병든 것은 귀신 때문이다. 그 다음에 보니까, 병 고침과 죄 사함이 관련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죄 지었다고 전부 병이 든 것도 아니고, 병이 들었다고 전부 귀신 든 것도 아닙니다. 복음이 인간 속에 들어올 때는, 복음과 인간이 맺어지는 고리는 인간의 육으로 납득이 되는 노선은 아니지요. 인간은 인간들끼리 이해되고 납득이 되고 통합니다. “너는 왜 병이 들었니?” “요즘 내가 바빠서 쉬지도 못하고 계속 무리하게 일을 했어.” “그래, 좀 쉬면 났겠지.” 이것은 인간들끼리 얼마든지 이해하고 소통이 됩니다.
그런데 복음은 인간이 해낼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해낼 수 없는 것을 복음에 담아 소개하기 위해서 귀신도 동원되고, 병도 들어야 하고, 그리고 그 병은 죄 사함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병 낫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복음을 위하여 병 고침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 제가 병들었습니다. 낫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했다면, 하나님은 “내가 병 낫게 하면 뭘 할건데?” “낫게 하시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습니다.” “그러니까 병을 낫게 못하는 거야. 네가 병들게 한 것은, 나는 죄를 사하는 자임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십자가마을 게시판에 어떤 사람이 “회개해야 되고, 의의 행함을 해야 되고 ---” 이런 이상한 글을 올려놓았어요. 그래서 제가 “우리의 죄가 아니고 아담의 죄입니다.”라고 간단하게 댓글을 달았어요. 아담의 죄를 우리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원인을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해요. 원인을 모르면 사람은 미칩니다.
원인 같지 않아도 반드시 원인을 끄집어내야 일단 안심을 해요. 정서적으로 안정이 됩니다. 아무 이유 없이 뭔가를 당하면 잠을 잘 수가 없어요. 당하는 것은 당해도 이유를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여자가 남자에게 “헤어지자!”고 하면 남자가 미칩니다. 그냥 헤어지자고 하면 안 됩니다.
“왜 헤어지자고 했지?” 이에 대한 답변이 없어서 옛 애인을 살해한 사건이 최근에 있었어요. 이유를 모르면 환장한다니까요. “그냥 헤어지자.” 이건 용납이 안 됩니다. 헤어지고 말고가 문제가 아니라 왜 헤어져야 하는지 이유를 알아야 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는 데는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니 구원 받아도 환장할 지경이라. “쓸 데 없는 자를 왜 구원하셨습니까?” 욥이 고난 받지요? 하나님께 따집니다. 고난 주신 이유를 알려달라는 겁니다. 이유를 안 알려주면 차리라 죽여 달라고 해요. 주님은 끝까지 이유를 말씀하지 않습니다. 사막에 비가 내리는데 이유가 없습니다.
이유는 우리가 알 필요 없어요. 우리는 상품 생산의 중간 과정에 있는데 만약에 이유를 알면 나만의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게 됩니다. 그것이 ‘자기 의’라는 겁니다. “아, 이유가 이렇구나. 앞으로는 잘 해야지.” 이게 ‘자기 의’입니다.
KBS에서 하는 [개그 콘서트]를 보면 ‘브라우니’라는 개 인형이 등장합니다. 이 개가 아무 말을 안 합니다. 이게 은혜 받은 욥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멘트를 날려도 주님이 날려요. 욥을 개처럼 옆에 두고 주님이 말씀을 하십니다. [개그 콘서트]를 보면 개 인형을 세워놓고 “우리 브라우니가 얼마나 냄새를 잘 맡는지 몰라요. 냄새 맡아봐!”라고 해도 그냥 가만히 있어요. 그러면 옆에 있는 개그맨이 “코감기가 걸렸구나!” 라고 합니다.
우리는 나에 대한 설명은 내가 하고 싶어요. 이것이 ‘자기 이름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보다 내 이름이 우선이에요. 내 이름을 위해서 자살할 용의도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주기도문에 보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 우리가 있잖아요.
그런데 선악과 타먹고 난 뒤에 우리는 내 이름을 위해서 삽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 존재보다 주님의 죽음이 우선이라고 하십니다. 세상 모든 일을 예수님이 왜 죽으셨는지 그 죽음을 위해서 귀신도 필요하고 소경도 필요한 거예요. 이것을 모르는 제자들은 소경을 보면서 예수님께 물었지요. “저 사람이 소경이 된 것은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자기 죄 때문입니까?”라고.
제자들이 묻는 이유가 뭡니까? 자기들은 지금 볼 수 있다는 거지요. “나도 죄를 짓긴 지었지만 소경될 정도의 죄는 안 지었지요?”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이들의 물음에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요9:3).” 주의 이름을 위해 소경이 된 것이지요.
주님이 “브라우니 이리 와!” 하고 부르셔서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시니까, 눈 떤 브라우니가 되었어요. 복음을 전개하기 위해서 귀신이 등장하고, 병 고침이 등장합니다. 병 고치는 광경을 보고 몰려든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나는 병 고치러 온 것이 아니라 죄 사함을 위해 왔다.”
여기에서 무엇이 우선입니까? 죄가 우선이지요. 죄를 사하니까 병도 나았습니다. 병 고쳤다고 죄를 아는 것은 아닙니다. 죄가 뭐냐? “사람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한다(막3:28-29)”고 하셨지요. 그 전에 안식일 지키는 이야기가 있었지요. 안식일에 예수님이 한 편 손 마른 사람을 세워놓고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묻으신 후 고쳐 주셨지요.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죄는 율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 자체가 잘못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율법을 안 어길 수도 있다’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율법을 잘못 읽은 근원적인 죄입니다. 그렇다면 병 고침을 통한 죄 사함이 율법과 관련이 되니까, 성령은 인간이 죄를 짓는가, 아닌가가 문제가 아니고 성령을 훼방하면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다고 하니까, 영원히 용서되고, 영원히 용서 안 되는 결정권을 성령이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성령께서 예수님을 다루고 계시잖아요. 예수님은 성령에 이끌려 결국은 십자가로 가지요. 그리고 성령께서는 그 십자가만을 사도들을 통해서 증거하지요.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1절)”라고 하신 후에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2절)”라고 물어요.
십자가를 기준으로 성령 받은 것과 율법의 행위가 둘로 구분되는데, 어느 쪽이 십자가로 이끄는 쪽이냐? 율법의 행위로 십자가가 보이는가, 아니면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가 보이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가 보인다는 말은 율법의 행위는 가장 근원적인 죄, 저주 받고 또 받아야 하는 죄로 아직도 율법의 행위에 기대를 갖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병 고치는 것, 귀신도 순종한다는 이야기가 언제 나오는가 하면 풍랑이 일 때입니다. 결국은 대자연의 변화, 인간의 경제적, 정신적인 모든 변화는 우리 마음 자체가 새로운 세계와 연계된 마음이어야 합니다. 기존의 세계와 연계된 마음 말고 새로운 기준과 관련된 마음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이들의 특징은 천상회의에 참석을 했습니다. 아모스, 호세아 다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성신 받은 사람들이죠. 이 사람들은 출애굽과 다윗 언약이 결합되었다고 봅니다. 출애굽을 볼 때 이것을 창조주로 보고, 다윗 언약을 전쟁하는 하나님으로 봅니다.
이것을 달리 보면, 전쟁하는 하나님은 심판하는 하나님이고 창조주는 어진 목자 같은 심정이죠. 달래주고 한쪽에서는 때리고. 때리는 것과 자기 백성을 불쌍히 여기 이끄는 작업이 같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출애굽이 되기 위해서는 애굽에서 나와야 합니다. 애굽에서 나오기 위해서 이 애굽의 영역을 확장시킵니다. 그러면 옛날에 애굽을 하나님이 손댄 이유가 그 안에 언약 백성이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애굽은 특정한 나라가 아니고 언약 백성이 놓여 있으면 그 전체가 애굽이 되지요.
여기에서 자기 백성을 분리해서 끄집어내는 작업을 창조주 하나님이 하시는 거예요. 창조주 하나님이란 없는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데서 살게 하시는 이 두 가지가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 작업입니다. 이것을 ‘빠라’라고 합니다. ‘빠라’는 어떤 노동도 없이 생긴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철학에서는 ‘없는데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제조하는 것 말고 창조하는 것. 있는 것을 다른 것으로 변형시키는 것 말고 그냥 창조하는 것.
[복음과 기독교의 차이]라는 책에서 이 부분을 언급했는데, 이게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무엇이 생겼다는 말은 없는데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있다는 것은 “그 전에는 무엇이 있었는데?”를 반드시 묻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만들었다’고 하면,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는데?” 이렇게 나오지요. 그러면 “하나님을 누가 만들었냐는 질문은 하는 게 아니야.”라고 해도 의문이 깨끗하게 해소되지는 않아요.
무엇이 있다는 말은 이것을 있게 만든 원인이 먼저 있어요. 원인이 먼저 있고 그 결과물로 무엇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는데서 무엇이 생겼다면 현재 있음에서 결과만 남기고 원인을 잘라내야 되는데 이런 논리는 인간에게는 있을 수가 없어요. 원인도 없이 뭔가가 생겼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없는데서 새롭게 창조했습니다.” 라고 해도 사람들은 믿지를 못해요. 이처럼 “죽은데서 살았다.”는 것도 말이 안 돼요. 죽음이란 것은 없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중국의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어요. “우리가 죽으면 없어지기 때문에 죽음은 없는 것이다.”
죽을 때가 되면 죽느냐, 사느냐는 말 자체가 의미 없기 때문에 죽음은 없는 것이고, 살아 있을 때는 죽음이 아직 오지 않았기에 죽음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나저러나 죽음은 없는 것인데 왜 죽음을 겁내느냐는 것이지요.
죽게 되면 내가 없잖아요. 내가 없으면 죽음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죽음을 겁내느냔 말이지요. “죽음을 겁내는 것은 네가 산다는 것을 만끽하지 못했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한다. 만약 사는 재미에 푹 빠지면 그 순간만큼은 죽음도 생각나지 않을 것이다. 이 즐거움을 유지해라. 그러면 죽음의 공포도 사라질 것이다.”
애굽 사람과 히브리 사람의 차이가 있는데, 애굽 사람의 신은 현재 있게 된 것을 있게 하는 신입니다. 창조는 한 번 창조하면 그만입니다. 그 후에는 창조한 것이 굴러가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히브리인들은 뭐냐? 매일 창조해야 돼요. 한 번 창조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스스로 원인을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만약 내가 스스로 원인을 가지면 원인 가진 나는 내일이 되면 그 가진 원인인 나를 양보할 수가 없습니다.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어떻게 믿은 예수고, 어떻게 알게 된 성령인데 그것을 죄라고 부정합니까? 안 되는 거예요. 어제 잘 믿었으면 오늘 하루쯤은 쉬어도 괜찮아요.
좋은 패를 많이 가지고 있으면 죽어서 질이 좋은 인간으로 내세를 산다는 것이 인간의 생각입니다. 왜 교회에 나오고, 왜 구제를 합니까? 이것은 좋은 패를 많이 가지는 거예요. 홍단, 청단, 초단 이런 것을 많이 확보하면 조금 나쁜 짓을 해도 괜찮아요. 너무 착한 일을 많이 하면 약간 나쁜 짓을 해서 좋은 패를 소비시켜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좋은 패만 남아있다고 보는 겁니다.
히브리인들에게는 이것이 용납 안 됩니다. 그날 하루는 그날로 끝나는 겁니다. 밤이 있고 낮이 있는 것은 창조가 매일 되풀이 되는 거예요.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취지입니다. “그날 염려는 그날로 족하다.”는 말은 진짜입니다. 내일을 모르는데 어떻게 내일을 염려합니까? 내일 일을 모르기 때문에 어느 도시에 가서 장사해서 이익을 남기겠다는 그런 스케줄을 짜지 말란 말이지요. “주님의 뜻이면 이것도 저것도 하리라.”는 고백이 바로 애굽 같은 세상에서 언약 백성이 취할 유일한 고백입니다.
창조주는 이런 분인데, 창조주가 무엇을 만났는가 하면 속량주를 만났어요. 이 말은 히브리어로 ‘고엘’인데, 이것은 가정 법률과 관련되어 있어요. 어떤 가정이 억울한 일을 당해서 빚을 져서 남의 집 노예로 팔렸을 때 그 가정을 대신해서 자기 본래의 위치와 재산과 명예를 되찾아주는 가까운 친척을 ‘고엘’이라고 합니다.
“저 사람을 내가 잘 압니다. 남이 아닙니다. 저 사람의 일이 곧 나의 일입니다. 저 사람은 채무를 감당할 능력이 없기에 내가 그 채무를 감당하겠습니다.” 라고 나서는 것이 바로 ‘고엘’ 다른 말로 하면 ‘구속자’가 됩니다. 그래서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하나님의 특징이 뭔가 하면, 창조주와 구속주의 만남입니다.
이렇게 만날 때 주의 이름이 영광을 받습니다. 주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려면 우리는 항상 없는 자여야 하고, 항상 죽은 자여야 하고, 항상 우리는 내 의무를 알면서도 그것을 감당할 능력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하고, 절약하고, 있는 것 다 긁어모아 빚 갚는다고 해도 우리 힘으로는 안 됩니다. 이것을 우리가 매일같이 느끼도록 주께서 현실과 상황을 그런 쪽으로 짜 맞춰 주십니다. 이것을 애굽 나라라고 합니다.
36장 18-19절을 봅시다. “그들이 땅 위에 피를 쏟았으며 그 우상들로 더럽혔으므로 내가 분노를 그들의 위에 쏟아 그들을 그 행위대로 심판하여 각국에 흩으며 열방에 헤쳤더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자기 이름이 더러워졌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누구를 혼내줍니까? 이스라엘 자기 백성을 혼내줍니다. 여호와를 믿고 의지해야할 백성들이 우상을 섬겼어요. 그런데 우상 섬긴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뿐입니까?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섬겼잖아요. 바벨론 같은 나라는 벨, 레보, 마르둑, 이시타르 등등의 온갖 신을 다 섬겼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런 신을 같이 섬겼습니다.
이런 모든 신들이 어디서 나왔는가? ‘엘’이라는 신에서 나왔습니다. 이스라엘 근동에 있는 신 중 최고의 신이 ‘엘’입니다. ‘엘’ 그 밑은 신이 뭔가? ‘엘’신을 감히 부를 수 없어서 ‘우와’ 또 ‘야!’ 이렇게 부르다가 ‘야웨’가 되었다고 합니다. 처음 신은 ‘엘’신의 집합체라서 ‘엘로힘’인데, 이것을 E문서라고 합니다.
여호와는 Y로 시작해서 Y문서, 엘로힘은 E로 시작하기에 E문서라고 합니다. BC 700년경에 내려오는 전승들이 편집되어서 E문서가 되었다고 합니다. 잘 모르면 입 다물고 있으면 되는데 사기를 쳐서 온갖 이론들을 만들어 냅니다. 그 때 E문서가 내려오고, Y문서도 내려오고, 그 다음에 P문서(제사장 문서)가 내려오고, 중간에 BC 900년경에 D문서가 내려옵니다.
어쨌든 이러한 우상을 섬긴 것이 이스라엘만이 아니고 바벨론 나라 전부가 그렇게 한 거예요. 바벨론 벨사살 왕을 마지막으로 바사 왕 고레스로 넘어옵니다. 그 고레스가 마르둑 신을 섬겼어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바벨론이 왜 망했는가? 마르둑 신을 잘 섬기지 않고 백성들을 토목공사에 너무 심하게 종사케 해서 마르둑 신이 노해서 망하게 했다.’고 해요.
이사야에 보면 그 고레스는 ‘여호와의 기름 부은 종’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고레스는 우상을 섬긴 사람이에요. 다 같이 우상을 섬겼는데 에스겔 36장 22절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이스라엘만 더럽혔다고 할 수 있냐는 것이지요. 우상 섬기는 것이 하나님 이름을 더럽힌 것이 아니지요? 왜냐? 다른 백성들도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우상을 섬겼다고 벌을 준다면 다른 백성들도 벌을 줘야 되는데 유독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주목을 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혔다고 책망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그것은 바로 출애굽에서 애굽이 있어요. 애굽이 있는데 애굽에서 나오게 되지요. 나올 때 사람이 있어서 사람이 나온 것은 아니에요. 그렇게 되면 있는데서 있는 것이 나오지요.
처음 애굽을 나올 때 히브리인들이 있었어요. 히브리인들이 나와서 히브리인의 나라가 되면 이것은 이스라엘이 아니에요. 그럼 여기에 뭐가 섞여야 됩니까? 히브리인을 이스라엘로 바꾸려면 뭔가 섞여 들어가야 돼요. 처음에 섞여 들어갈 때 뭐가 들어갔는가 하면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섞여 들어갔습니다.
어떤 분이 십자가마을에 질문을 했어요. ‘노아 언약의 핵심이 뭡니까?’ 라고. 노아 언약의 핵심은 사람 손으로 죽인 더러운 피와 정결한 제물의 피를 구분해서, 하늘은 누구에게나 자비롭지요. 선인과 악인 모두에게. 그 근거가 어디에서 나왔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정결한 제물의 희생의 피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인간의 손에서 나오는 것은 더럽다는 것을 대조시키면서 보여주는데 그럴 때 노아 언약을 주신 주의 이름이 부각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에스겔 쪽에서 봅시다. 모든 민족이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왜 유다 백성에게만 벌주고 멸망시키는 것입니까? 출애굽을 시키려면 피가 섞여야 하고, 피가 있어야 언약이 담긴 새로운 공동체가 등장합니다. 여기에 여호와의 종이 들어가고, 종이 개인에서 집단으로 이어지고, 다시 집단에서 개인으로 가는 거예요.
여호와의 종은 누구냐?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이죠. 이건 개인이잖아요. 그런데 이들에 의해서 새롭게 뭉쳐진 남은 자가 있어요. 남은 자는 집단이지요. 그 집단이 오는 메시아를 핍박하면 그 메시아가 여호와의 종이 되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찔림은 곧 ‘우리’의 죄 때문이죠.
여기에서 ‘우리’에 해당되면 감사한줄 아시기 바랍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출애굽에 걸려든 사람입니다. “내가 찔린 것은 너희의 허물 때문이다”라고 하셨는데, 십자가 앞에서 자기의 죄를 발견하는 것은 사람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원인과 이유를 우리 쪽에서 찾으면 안 됩니다. 성령의 역사로 십자가를 알게 하시니까 비로소 “예수님의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다.” 라고 고백하게 되는 겁니다. 이것은 개인의 죄가 아니라 아담의 죄입니다.
아담의 죄에 눈Em게 되면 우리가 스스로 나를 자책할 수 있는 이유도 권리도 없습니다. 계속해서 아담의 죄가 토해지고 나와야 됩니다. 그 때 우리는 히브리인에서 이스라엘로 바뀝니다. 세상 죄를 지신 어린양이 동행하니까 우리는 늘 죄인이잖아요.
그러면 여기 에스겔에게 애굽을 어떻게 만드는가? 애굽이 있어야 하니까. 언약백성이 있는 곳 전부를 애굽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들을 만방에 흩어버립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언약에 저촉 받는 사람이 흩어진 모든 곳이 전부 애굽으로 변하지요. 애굽으로 변했다는 말은 출애굽 작업이 지금도 계속 진행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이 기능을 발휘하게 되면 심판을 하면서 그 안에서 인자와 연결되어 있는 에스겔 같은 그런 자기 백성을 찾아내는 작업이 쉬지 않고 계속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동안 그들이 우상을 섬겼는데, 그 우상을 섬긴 마음으로 여호와도 섬겼으니까 눈에 보이는 성전 중심, 또는 민족주의, 우리 영토가 있어야 하고, 왕이 있고 백성이 있으면 진짜 천국 가는 백성이 된다고 여겼습니다. 요즘 말로 바꾸면, 예배당 건물이 있어야 하고, 목사가 있고 교인들이 있으면 된다는 생각과 같지요. 그것이 바로 마르둑, 벨, 르보, 다무스, 그리고 각종 태양신을 섬긴 것이지요.
대구 팔공산에 갓바위가 있는데, 만약 그것이 철거되고 없다면 그곳에 올라가겠습니까? 안 올라가겠지요. 이처럼 예배당이 없으면 사람들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누가 예배당을 지으면 그곳에 가서 기도합니다. 타고난 우상 숭배자가 우리들입니다.
죽은데서 살리고, 없는데서 있게 하는 주님의 말씀의 능력은 생각지 못하고, 내가 종교적인 장소를 찾고, 그곳에서 기도하는 것으로 신앙 생활한다고 여기는 그 자체가 출애굽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모든 인간이 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주님이 십자가를 보여주신다는 말은, 내가 갈 수 없는 저 세계에 주께서 다가와서 나의 옛날 습성을 뜯어내고 십자가의 피를 보여주셔서 이유와 원인을 나에게서 찾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내가 존재한다는 늘 새로운 이유가 우리에게 발생되도록 주께서 인도해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36장 26절에 ‘새 영’과 ‘새 마음’이라고 표현한 거예요. 새로운 마음이 되면 세상 모든 것이 주님의 일하심의 결과임을 알게 됩니다.
27절에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규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보세요. 우리가 지키는 것을 일체 인정하지 않잖아요. 주께서 주의 법을 우리 속에 두는 겁니다. 이 대목을 히브리서에는 십자가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새 언약’이고 ‘성령의 세례’이며, 로마서 8장에는 ‘주의 영’이라고 합니다. 십자가가 오게 되면 우리의 주도권은 우리가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마음은 보기 싫어도 십자가가 보이는 식으로 주께서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그렇다면 그 때마다 이 세상이 애굽이라는 것을 정신 차리면서 깨닫게 합니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한 이 모든 것이 애굽이고, 하나님은 나를 애굽에서 건져 내시는 구나. 내가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는데 주께서 그곳은 애굽이라고 알려주면서 그곳으로부터 우리를 분리시키는 작업, 사랑 받기로 작정된 자를 불리시킴을 알아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주께서 이미 오셔서 일을 시작하셨기에 우리가 따로 할 일이 없는데 자꾸만 나를 위한 일을 쉬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모든 것이 우리가 죄인인 것을 드러내는 일로 쓰임 받는다는 것을 저희들이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2. 12. 20. 10:09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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