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자의 한탄 121121
남은자의 한탄 121121
이름 : 이근호(IP:119.18.78.175)
남은자의 한탄 (겔 6:8-10)
이근호
12-11-21 20:59
남은 자의 한탄
2012년 11월 21일 본문 말씀: 에스겔 6:8-10
(겔 6:8, 개역) 『그러나 너희가 열방에 흩어질 때에 내가 너희 중에서 칼을 피하여 이방 중에 남아 있는 자가 있게 할지라』
(겔 6:9, 개역) 『너희 중 피한 자가 사로잡혀 이방인 중에 있어서 나를 기억하되 그들이 음란한 마음으로 나를 떠나고 음란한 눈으로 우상을 섬겨 나로 근심케 한 것을 기억하고 스스로 한탄하리니 이는 그 모든 가증한 일로 악을 행하였음이라』
(겔 6:10, 개역) 『그 때에야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내가 이런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겠다 한 말이 헛되지 아니하니라』
‘남은 자’라는 것이 과연 인간 대 인간의 사회에서 허용이 되고 타인들이 용납해 줄까요? “네가 뭔데 특별히 하나님에 의해 구원되기로 남게 된 자들이다 는 주장을 할 수 있느냐?”고 반박이 들어올 공산이 큽니다. 인간들의 사회에서는 특별남을 질타하는 분위기로 잡혀 있습니다.
이는 사람 사는 것이 뻔하고 유별날 것이 없다는 것이 통념화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는 남은 자다‘라는 소리를 하려면 핍박받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인간 세상에서의 종교나 신마저 다 인간들이 얼마든지 제조해 낼 수 있는 대상이나 상품에 해당됩니다. 따라서 아쉬울 때나 신을 찾지만 평소에는 신조차도 무관심의 대상일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남은 자’는 인간들이 스스로 남겠다고 해서 생겨난 친목 단체도 아니요, 신앙생활 잘 해보자도 다짐을 한 결성단체도 아닙니다. 순전히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재앙 내림에 의해서 발생된 특이한 모임입니다. 자진해서 구원받기 위해 버티는 자들의 집합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남은 자’들은 비로소 세상을 보는 눈이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보게 된 자들입니다. 자신들이 고생하고 힘든 생활이 서럽다는 것이 주안점이 아니라 전에 미처 몰랐던 하나님의 ‘말씀 대로’가 실감하는 경험을 하게 된 자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처지는 자신들이 원인이었다는 논지에서 더 깊숙이 들어갑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의 일관된 실행의 결과’로서 자신들이 포로잡혀 와 있고 재앙을 맞은 것입니다. 즉 자신들이 행했던 것 중의 일부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아에 처음부터 자신의 존재가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재앙받아 마땅한 행동들을 유발할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이 ‘남은 자’의 무리는 ‘말씀에 의해서 남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즉 세상 만t사가 한 치도 여호와의 말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지경이다 는 사실을 눈치챈 자들이 바로 이들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심판받고 재앙받으면서도 도리어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할 수 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이 재앙이 오로지 말씀에 입각해서 주어진 재앙이며 더나아가서 오로지 ‘남은 자’들만 구원된다는 말씀의 원칙을 수립하기 위한 경과로서의 재앙이기에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음란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우상이 그만큼 호감이 간다는 뜻입니다. 여호와보다 오히려 친밀성을 유발시킨다는 겁니다.
인간의 공격성향은 타고난 겁니다. 이러한 인간의 본성은 창세기 4장에서부터 이미 알려집니다. 가인이 동생을 죽인 것은 곧 신을 향한 공격성을 보여준 겁니다. “왜 나의 성의를 무시하느냐”는 겁니다. 즉 “나의 것에서 나온 나의 자의적이고 자발적 행위를 왜 하나님은 호응하지 않으냐”는 겁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날 때부터 신에 대한 공격성은 타고난 겁니다. 고칠 수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이나 유다 사람들이라고 예외가 될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그 본성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그 진실됨이 폭로당했다는 점에서 유다와 이스라엘은 이방인들과는 달리 기회와 혜택을 입고 있게 된 것입니다.
사람에게 어려움이 오게 되면 원상복귀를 꿈꾸게 됩니다. 그러나 구원되기로 작정된 남은 자들은 도로 자신의 것으로 귀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 앞에서 비로소 자신이 죄인됨을 알게 됩니다. 누가복음 5:8에서 예수님은 어부 베드로를 찾게 됩니다. 그 때 베드로는 밤새도록 고기 잡는데 열중했습니다만 만족스러운 수확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배 오른편으로 그물을 던질 것을 지시합니다. 베드로가 던졌더니만 배가 잠길 만큼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이 때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한 말은 무엇이었습니까? 송구스러워 하면서 “제가 잠시 착각 했습니다. 그 수가 있었는 것을 몰랐네요”라고 할까요?
아닙니다.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고기가 몇 마리 잡았느냐 하는 문제는 이제 그에게는 현실이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현실을 읽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자신과 세상을 봅니다. 그랬더니만 자신이 당연히 죄인됨을 받아드렸던 것입니다.
고기 문제로 고민하거나 걱정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모든 게 은혜요 모든 게 감사할 거리 뿐이요 과분한 일입니다.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에게 다음과 같은 부탁을 받게 됩니다. “이 혼인집에 포도주가 떨어졌다” 이 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여자여, 그 일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즉 하나님께서는 개인들의 사정에 관여하지를 않습니다. 사람들의 요구사항에 개입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오로지 말씀을 말씀대로 성취하는데만 종사할 뿐입니다. 그래놓고서는 예수님께서는 물항아리 6개를 준비시키고 모조리 그 물을 포도주로 변모시켜놓았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곧 ‘표적’이다 고 말입니다.
즉 예수님의 관심사는 사람들의 사정이 아니라 말씀 완성이고 그 말씀완성은 십자가 피 흘리심으로 완료되는 겁니다. 이는 인간들이 말씀에 입각하지 않고 자기 것 자신들이 사수하고 키워보겠다는 심보로 거기에 맞는 신을 골라서 믿는 경향이 있음을 아십니다. 오늘 본문 9절에 나오는 ‘음란’이라는 단어나 ‘우상’이라는 단어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나 그렇게 칭해질 뿐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당사자는 결코 자신이 우상을 섬긴다고 인정하지를 않습니다. 참으로 좋은 신을 제대로 믿는다고 우깁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자신이 무엇을 해도 죄라는 것을 받아줄 수가 없기에 결국 십자가의 진정한 취지도 알 길이 없이 되어 버립니다. 즉 은혜라는 것이 곧 말씀 앞에 죄인임이 드러나는 그 자체로 보지 않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죄를 모르게 되면 지속적으로 자기 것을 지키는 것으로 은혜라고 우기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내 것이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말씀 앞에 죄인으로 세워진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십자가 만으로 생명있음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2-11-23 11:26
15강-에스겔6장 8-10(남은자의 한탄)121121-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6장 8절에서 10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56페이지입니다.
에스겔 6:8-10
“그러나 너희가 열방에 흩어질 때에 내가 너희 중에서 칼을 피하여 이방 중에 남아 있는 자가 있게 할찌라 너희 중 피한 자가 사로잡혀 이방인 중에 있어서 나를 기억하되 그들이 음란한 마음으로 나를 떠나고 음란한 눈으로 우상을 섬겨 나로 근심케 한 것을 기억하고 스스로 한탄하리니 이는 그 모든 가증한 일로 악을 행하였음이라 그 때에야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내가 이런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겠다 한 말이 헛되지 아니하니라.”
오늘 본문에 보면 “이방 중에 남아 있는 자가 있게 할찌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에 의해서 남은 자가 이 땅에 있단 말입니까? 만약에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거가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의해서 남게 되었습니다.’라고 고백할 때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너나 나나 똑같은 인간인데 왜 하나님을 거기에 개입시키느냐? 하나님은 보이지 않기에 없는 존재다. 하나님이 있다고 하지만 결국은 다 없는 쪽으로 돌아서더라. 그런데 너는 왜 하나님에 의해서 이 땅에 구원되기로 남아 있다고 자부하느냐?’라고 남은 자를 향하여 그들이 이야기할 때 답변을 어떤 식으로 해야 됩니까?
오늘 본문 10절에 보면 “그 때에야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내가 이런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겠다 한” 그 다음에 ‘말’이 나와요. “……한 말이” 그 다음에 “헛되지 아니하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이지도 않는데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아느냐, 라고 안 믿는 사람들이 묻게 되면 우리가 답변을 어떤 식으로 해야 할까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있다, 고 답변을 해야 됩니다. 불신자들은 다른 것, 신이 있다 혹은 없다고 하는 그것이 불신자가 아니라 신을 인정하고 신의 존재를 이야기해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이미 주어진 말씀에 대해서 그들이 무관심하다면 그것은 신이 있다는 말 자체가 의미없는 말이 돼요.
사람들이 날이 갈수록 말씀이 없는 생활을 합니다. 말씀이 필요치 않는 생활, 말씀을 떠나도 상관없는 생활, 말씀에 관심 없고 말씀에 대해서 신경 안 써도 충분하게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식으로 살아갑니다. 자기들은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충분히 인정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싫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해 줄 테니까 나한테 잔소리는 하지 마라, 말씀이라는 이름으로 잔소리는 하지 마라,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야기하기를 “하나님에 의해서 구원되기로 남은 자가 되었습니다.”라고 한다면 다른 사람이 “너는 우리와 차이점이 뭔데 너는 구원되기로 남아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느냐?”라고 한다면 구원받은 사람이 할 말은 다른 것이 없어요.
“하나님의 말씀에 보면 남은 자가 있으라고 해서 하나님이 필히 이 땅에 남은 자가 있게 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남은자의 특징이 뭐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남은 자는 필히 남은 자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지요. 거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이대는 겁니다. 그러면 평소에 말씀에 관심 없는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당신과 나 사이에 우리 인간들의 말을 가지고 주고받자. 자꾸 사람 말 빼고 거기에 말씀을 집어넣지 말자.” 그것은 뭐냐, 평소에 하나님의 말씀 없이 사는 것이 버릇이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 없이도 자기는 잘 살 수 있다는 자기를 믿는 신앙이 그 사람들로 하여금 말씀을 외면해도 살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만든 겁니다.
그렇다면 그 쪽은 말씀이 없다 치고 그러면 말씀에 의해서, 오늘 본문 말씀에 하나님의 남은 자가 있다고 했으니까 그 남은 자 된 사람은 ‘그냥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남은 자 되었다.’라고 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겁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남은 자, 라고 할 때 “얘들아, 너희는 남은 자다.”하고 집에 보내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남은 자 만들 때는 그 남은 자를 생산하는 장치와 환경이 역시 말씀에 의해서 쏟아지게 되어 있고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한 말씀이 오늘 본문의 말씀인데요, “너희가 열방에 흩어질 때에 내가 너희 중에서 칼을 피하여 이방 중에 남아 있는 자가 있게 할찌라.”라고 하잖아요.
여기 남은자 하나 만들기 위해서 어떤 단어가 동원되느냐 하면 칼이라는 단어, 또는 심판, 재앙입니다. 제가 정리해서 말씀드리면 남은자라 하는 것은 “그냥 여기 몇 명 남아 있어.”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남은 자가 남은 자 되려면 필히 재앙이 들이닥쳐야 됩니다. 그런데 그 재앙은 어떤 식으로 와야 되느냐, 하나님의 말씀에 위반해서 받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그 재앙 속에서 하나님과 맞닥뜨리면서 “너는 이 재앙에서 남아 있어라.” 해서 생긴 남은 자, 상당히 복잡하지요? 내가 하나님을 믿어서 남은 자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재앙을 주셨고 우리는 그 재앙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위반했기 때문에 온 재앙이라고 인식하는 가운데서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남은 자가 그 속에서 생겨나는 거예요.
아주 유치한 예를 들어 보면, 촌에서 엄마가 밭에서 일하고 있는데 애가 학교에서 돌아왔습니다. “엄마, 수박이 어디 있어?” “집에 가 보면 알아.” 가보니까 아무리 찾아도 집에 수박이 없어요. “엄마, 아무리 찾아도 집에 수박이 없네?” 그 말을 들은 엄마가 “하하, 내가 깜빡했구나. 수박은 집 앞 마당의 우물 속에 넣어놓았다. 거기서 꺼내서 먹어라.” 이렇게 되잖아요. 그러면 그 수박은 뭐냐, 집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물 속에서만 끄집어 낼 수 있는 거예요. 다른 데서는 찾을 수가 없지요. 하나님의 말씀에서 남은 자가 된다는 것은 손들고 “제가 남은 자가 될게요.” 이래서 남은 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그 손 내려!” 참 이런 것이 어려운데, “우리 예수 믿는 사람 모입시다. 남은 자 합시다.”라고 해서 남은 자가 되는 것이 아니에요.
남은 자가 되려면 반드시 재앙이 주어져야 됩니다. 그 재앙은 우리가 세금 안내서 재앙이 아니고 군에 안가서 재앙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했고 ……, 그것으로 또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복잡해요, 하나님의 말씀을 위배했고 그 다음에 중요합니다, “이 재앙은 우리가 말씀을 위배한 것 때문에 하나님이 친히 우리에게 퍼부은 재앙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들 속에서 남은 자가 나온다는 말이지요. 어떤 사람이 이런 질문을 할 수가 있어요. 천국에 실제로 간 사람이 있느냐, 이렇게 물을 수가 있어요. 교회는 다니지도 않고 싫어하지만 그래도 궁금한 마음에. “천국에 실제로 간 사람이 있기는 있어? 있으면 내가 천국가기 위해서 교회 나가 주는데 이 세상에서 실제로 천국 간 사람이 있느냐 그 말이야.”라고 물을 때 우리가 뭐라고 이야기해야 되겠습니까?
“천국 가는 사람이 있어.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도 예수 믿고 지금 천국 가 있을 거야.” 이렇게 하게 되면 그것은 성경하고 관계가 없어요. 천국 간 사람이 있느냐고 할 때는 말씀에 입각해서 이야기하면 됩니다. 뭐냐, “천국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히 재앙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라고 답변을 해야 되지요. 그러면 그 쪽에서 “누군데?” “그게 에스겔 6장에 보면 이스라엘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이스라엘, 유다나라라는 것이 그냥 밥 먹고 살다 보니 힘들고 외국에게 쫓겨난 것이 아니고 그들이 바벨론에게 포로 잡힌 것이 다 이유가 있어요.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그들은 재앙을 받았고 포로 잡혀 갔던 거예요.
그게 9절에 나옵니다. “너희 중에서 칼을 피하여 이방 중에 남아 있는 자가 있게 할찌라 너희 중 피한 자가 사로잡혀 이방인 중에 있어서 나를 기억하되 그들이 음란한 마음으로 나를 떠나고 음란한 눈으로 우상을 섬겨 나로 근심케 한 것을 기억하고 스스로 한탄하리니 이는 그 모든 가증한 일로 악을 행하였음이라.” 쉽게 말씀드려서 “우리가 우상을 섬겼기에 우리는 이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쫓겨나서 바벨론 나라에 포로 잡혔습니다.”라는 것을 지식이 아니라 온 몸으로 느끼는 사람이 구원되기로 작정한 남은 자입니다. 우리 이스라엘이 무기가 모자라서 단결성 없어서 망한 것이 아니고 여호와 말고 우상을 섬기고 다른 신을 섬겼기에 우리는 남의 나라에서 이렇게 고생한다는 것을 어디에 입각해서, 말씀에 입각해서, 우상을 섬긴 자는 망할 것이다, 라는 여호와의 직접주신 그 말씀에 입각해서 현재 처지를 제대로 해석이 되어야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바벨론 이라는 나라가 유다나라 옆에 배치가 되어 있고 그 나라가 갑자기 융성해 지고 커지는 것도 바로 바벨론 잘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짜 여호와가 누구며 여호와 이름이 무슨 일을 하시며 여호와가 남긴 유다나라가 재앙 받는 것이 하나님 나라가 있음을 세상만방에 알려주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유다나라는 포로 잡혀 가게 만들었고 포로로 잡아가야 될 역할을 해야 될 바벨론 나라를 크게 한 거예요. 이것은 결국 뭘 뜻하느냐, 세상을 보는 눈이 전부 다 말씀 중심으로서, 세상 보는 안목이 완전히 새로운 안목, 말씀 중심의 안목으로 바뀌어야 이것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서 제가 계속 말씀 위주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말하기를 “교회 몇 명모여요? 헌금 얼마나 나옵니까?” 제가 알기로는 천국은 교회로 가는 것이 아니고 말씀을 입으로 시인해서 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교회가 재미가 없더라, 교회가 사랑이 식었더라, 재미없는 교회, 사랑 없는 교회는 아주 훌륭한 교회에요. 왜, 교회는 믿지 말라고 했기에, 교회는 절대로 기대할 것이 있으면 안 됩니다. 교회를 기대하고 온 사람은 교회를 나오지 말아야 돼요. 남 보기에 교회를 재미있게 하고 교회가 사랑이 많아버리면 그 사람은 교회와도 지옥 가는 겁니다. 그 사람은 관심사를 계속해서 교회에 두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옛날에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 잡혀 갔을 때 그들의 관심사가 이스라엘을 포기했다, 유다나라를 포기했다, 아닙니다. 자기 나라를 포기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들이 포기한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어요. 여호와의 말씀을 우습게 봐서 그런 거예요. 이스라엘 나라 우리 스스로 포기하자, 우리나라 지겹다, 그냥 바벨론에 가서 살자, 이래서 바벨론에 간 것이 아니에요. 기어이 유다나라, 자기나라를 지키려고 하는 겁니다. 기어이 이스라엘을 지키려고 한 거예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지키지 말아야 할 것을 지키고 정작 지켜야 할 것은 신경도 전혀 안 쓴 거예요.
내 나라, 우리나라, 이것 지킬 필요 없습니다. 그냥 여호와의 말씀만 지키면 유다나라 되게 하고 이스라엘 되게 하고 남은 자 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결과물로서 반드시 그렇게 되게 해 주시는 거예요. “하나님, 우리 가정을 행복하게 해주세요.” 주께서는 그런 인간문제에 관여 안합니다. 그것은 네 사적인 문제인데 하나님이 왜 관여합니까?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장모를 낫게 했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장모를 낫게 했을 때 “베드로야, 네 가정의 장모가 아파서 힘들지? 네가 수제자니까 내가 낫게 해줄게.” 이렇게 낫게 해 준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장모를 낫게 해 준 그 다음 말이 뭐냐 하면,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 8:17) 십자가, 말씀의 완성을 미리 보여주기 위해서 베드로 장모를 미리 낫게 한 거예요. 가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께서 계실 때 마리아가 말하기를 “이 집에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하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이 집에 포도주 떨어진 것에 왜 내가 관여하느냐? 여자여! 이 집에 포도주 떨어진 것과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 말이지요. 그러면서 결국은 물가지고 포도주를 만들어 줬거든요.
이것은 그 집에 포도주를 만들어 주려고한 것이 아니고 장차 예수님이 십자가 지는 것이 물 같은 인간들을 포도주 같은 인간으로 바꾸기 위한 표적으로서 보여주신 겁니다. 교회 부흥시켜 주는 예수님은 없어요. 우리 가정 행복하게 해주는 예수님은 없습니다. 주님의 모든 말씀은 남은자로 하여금 남은 자 되게 해서 그들만 데려가기 위해서 말씀을 주신 거예요. 그래서 망한다고 구원 받는 것이 아니에요. 망해도 좋으니까 말씀에 의해서 내가 망한다, 고 알아채면 그 사람은 망해도 구원받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말씀 없이 살아온 것이 버릇이 되어서 현재 자기가 갖고 있는 것을 어떻게 키우고 어떻게 그것을 안정되게 지킬 수가 있느냐, 하는데 사람의 모든 공격성향은 타고난 본성입니다.
왜 공격하겠어요? 자기 것 지키려고 공격하는 거예요.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는 식으로 점잖은 사람도 남에게 그렇게 베풀어도 막상 그 사람 자존심 건드리고 인격 모독해 보세요. 대번에 왁 하고 달려들지요.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인간의 본성이 드러난 것은 창세기 4장부터라고 했습니다. 가인이 동생을 죽였어요. 그것은 하나님이 먼저 가인을 공격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인은 성의를 다해서 추수감사제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안 받았습니다. 이것은 가인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자기를 공격하는 것을 본 거예요. 왜 자기 것은 안 받고 동생의 것은 받았느냐는 말이지요. 왜 나의 이 자유의지로서, 나의 성심성의껏 드린 이것을 왜 안 받았느냐는 말이지요. 내가 드리면 신은 군말 없이 받아야 된다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내가 교회 와서 기도하면 예수라는 분은 아무소리 하지 말고 내 기도대로 응답을 해야 된다는 거예요. 이런 고집, 이런 공격성을 우리는 가지고 교회 나옵니다. 자기 것을 지키려고 시도한 가운데서 신과 엮어 보려는 것이 나의 확대요 그것이 우상입니다. 본문 9절에 보니까 “그들이 음란한 마음으로 나를 떠나고”라고 하지요. “음란한 눈으로 우상을 섬겨”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음란’이라는 뜻은 뭐냐, 속닥속닥 사이좋고 정이 오간다, 호감 간다, 나는 네가 좋아, 나는 왠지 너한테 마음이 쏠린다, 그런 뜻이거든요.
음란이라는 말이 본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편한테 간다는 뜻이잖아요. 간음, 간통, 이게 뭐냐 하면, ‘나는 섬겨야 될 신이 있는데 그 여호와라는 신의 잔소리가 듣기도 귀찮아. 나는 설교 시간에 잠이나 자고 다 듣기가 싫어. 하지만 내 것을 지켜주고 내 것을 키워주는 신이라면 나는 오히려 왠지 거기에 마음이 더 끌려.’ 끌릴 수밖에 없지요. 그것이 인간의 본성인데요. 사람의 본성이라는 것이 남이야 죽든 말든 나만 살면 되잖아요. 시민들이 불편하든 말든 버스 파업하면 그만이고. 사람의 태어난 본성이 우상 친화적입니다. 성경에서는 음란이라는 말을 했는데 우리가 좋아하는 신을 내가 골라잡는 그것이 무슨 우상숭배입니까? 그냥 좋은 신이나 하나 믿고 있는 거지요.
하지만 어디에 비해서 음란이 되느냐하면, 말씀에 입각해 볼 때 이것은 음란이고 우상숭배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깨닫는 사람은 말씀을 좋아하고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은 말씀을 외면하고 싫어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만 없다고 하면 “내가 좋아하는 신을 내가 만들어내는데 네가 왜?”라고 주장할 수 있지만 말씀이 와버리면 “네가 예수님의 말씀을 버리고 다른 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는데 너는 왜 돈을 사랑하면서 하나님을 섬겨? 하나님이 받겠어?”라고 할 때 듣는 사람이 “이 교회 괜히 왔어. 다른 교회는 그런 소리 안하던데. 돈 버는 것이 축복이라고 하던데 괜히 이 교회 와서 디모데전서 6장의 말씀을 괜히 들었네.”
그러니까 성경 말씀자체가 싫은 거예요.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아, 이 말씀 자체가 싫은 거예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가 없다, 이 말씀 자체가 싫은 거예요. 왜, 돈을 벌어야 되니까, 돈을 벌 때 돈 번다는 이것을 정당화시켜주고 축복이라고 호응해주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이야기해주는 교회, 그런 교회에 가고 싶은 거예요. 자, 그렇게 되면 그런 교회에서는 그 사람을 지옥 간다고 이야기하겠어요? “당신이 돈을 사랑해요? 그러면 지옥 가겠네요.” 이런 소리를 하겠어요? 그럼 손님 다 떨어지지요. 교인 보고 손님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기는 있습니다만, 손님 다 떨어지면 교회 부흥 안 되는데.
다시 이야기할게요. 이스라엘은 훌륭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벌 받았기에 구원받은 거예요. 그런데 그 벌이 같은 벌을 받더라도 “주여, 우리가 주의 말씀을 위반해서 이런 벌을 받습니다.”라고 다시 한 번 멀어졌던 그 말씀, 잊었던 그 말씀, 말씀중심으로 말씀에 입각해서 세상의 편성을 다시 볼 수 있는 눈만 가졌다면 망하고 또 망해도 구원 받아요. 그것은 망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살은 거예요. 그것은 구원받은 겁니다. 시편 137편, 바벨론에 포로 잡혀 있는 사람들의 모습들이 나옵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울었도다.”
이것을 현대어로 고치면 ‘우리는 지금 천국을 바라보면서 대구 땅에서 울었도다.’ 이런 뜻이에요. 말씀에 입각하면 이렇게 돼요. 그때 그 사랑이 많았던 그 교회가 그립다, 그것이 아니고 시온을 기억하면서, 말씀만 전하던 그 때를 생각하면서 말씀만 좋아하고 말씀을 즐거워하고 말씀 안에서 내가 죄인된 것을 오히려 즐거워하고, 그 안에서 ‘죄인 되었는데 이것이 웬 은혜입니까? 죄인인데 이런 혜택을 받다니!’ 죄인 될 때 근심 걱정도 다 사라지거든요. 사람의 근심 걱정이라는 것은 자기가 죄인이 아니라고 우기기 때문에 발생되는 거거든요. 내가 죄인인 것을 알면 주변의 모든 것들은 내가 신경 쓸 필요도 없고 자격도 없다는 것을 깨달아요.
‘세상이 왜 내 맘대로 안 됩니까?’ 이것은 자기가 죄인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와, 세상 모든 것이 이렇게 아름다운 것을.’ 죄인에게는 모든 것이 과분한 것이고 축복덩어리고, 집안이 홀라당 불에 타도 내가 죄인된 것을 알기만 해도 이것이 웬 은혜인가, 이렇게 살던 그 때가 좋았다는 겁니다. ‘그것을 기억하면서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놀리는 거지요. “야, 너희들! 시온 노래 중에 하나 불러봐라.”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것이 시편 107편 1절에서 5절까지의 내용입니다.
바벨론강가에서, 이것이 유명한 팝송의 가사입니다. 보니M이 불렀죠. 이 내용이 오페라도 나와 있어요. 히브리종의 노래라는 것이 있죠. 그들 보기에 안됐다, 측은하다, 하나님한테 당했다, 하지만 정작 이들은 세상 전부가 말씀으로 가득 찬, 말씀의 포대기 속에 놓여 있는 것을 유일하게 아는 순간입니다. 어느 한 순간도, 발걸음 하나를 떼는 그 순간까지도 말씀구조에서 벗어나서 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온 몸으로 느끼는 겁니다. 세상에 이런 은혜가 어디 있습니까?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산다는 그 의미를 비로소 당해보면서 압니다. 사실은 당해도 몰라요. 당해도 ‘아이고, 내가 실수했다.’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의 잘못의 원인을 너한테 찾지 마라. 찾는 것도 건방지다. 현재 모든 주어진 상황은 그 원인이 네가 잘못한데 있는 것이 아니고 말씀에 있는 것이다. 말씀에 위배했기에 이런 것이 온 것이다. 이렇게 말씀부터 거론해야지 내가 실수했구나, 이런 소리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이번에 나온 책 『복음과 기독교의 차이』 뒷부분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어요. 베드로가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는데 한 마리도 못 잡았어요. 그 때 예수님께서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했습니다.
우리 같으면 이렇게 했을 거예요. ‘배 오른편이라고? 아하, 이런 바보 같으니라고. 왜 내가 그것을 놓쳤지? 깜빡했습니다. 오른편에 던지겠습니다. 역시 오른편에 고기가 다 몰렸구나.’ 이렇게 건지는 것이 우리는 정상적인 행동 같은데 베드로는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그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고기 잡고 못 잡고의 차원에서 이미 떠나버린 거예요. 베드로가 그 이야기를 할 때 베드로는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그 말씀 앞에 서 있습니다. 말씀 앞에 서 있으면서 오늘 고기 몇 마리 잡았지, 라는 걱정 근심은 이미 날라 가 버린 상태에요.
주님의 말씀 앞에 딱 서 있을 때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따라 오너라. 너는 이제부터 고기 낚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 낚는 어부가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남은 자의 의식이고 남은 자의 통과의례고 모든 남은 자는 말씀 앞에서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아는 행복과 즐거움을 누리게 됩니다. 말씀 앞에서만, 그것도 석가모니나 공자의 말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만. “모세는 이렇게 이야기했지만 나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 산상설교잖아요. “나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마음속으로 음란을 품은 것도 간음죄다.” 할 때 “저는 안했거든요.” 그러면 안 돼요. 그러면 안 됩니다. “저는 거기서 빼주세요.” 그런 소리 하라고 말씀 준 것이 아니에요.
‘세상에, 그 말씀 아니었으면! 내가 여태 의인이라고 우기던 그것이 참으로 우습다. 예수 믿어서 그 말씀 아니었으면 나는 의인이라고 계속 착각하면서 살아갈 뻔 했구나. 내가 산다는 것은 말씀으로 사는 것이지, 나를 죄인으로 지적하는 그 말씀으로 사는 것이지 내가 아는 상식선으로 말씀 지켰다는 그 자기 의로 버티는 것이 아니었다.’는 거거든요. 목사가 따지려면 하나만 따져야 돼요. “목사님, 성경 말씀에 왜 위배됩니까? 이러면 안 되잖아요.” 그것만 따져야 돼요. 사랑이 없다느니, 관심이 부족하다느니, 돌아보지 아니한다느니, 어쩌니 저쩌니,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만큼 자신들은 죄인 되기 싫다는 것이고 죄인이 아니기에 현재 갖고 있는 것을 키워줘야 되고 이것을 지켜줘야 그것이 사랑의 하나님답다고 일방적으로 그렇게 말씀 없는 관점에서 세상을 또 교회를 판단하고 있는 거예요. 로마서 9장 27절에 보면 이 말씀이 나옵니다.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찌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그 남은 자는 어떻게 남게 되는가? 그것은 로마서 11장에 나옵니다. ‘남은 자는 자기 행함으로 남는 것이 아니고 오직 은혜로만 남게 된다.’ 여기서 은혜로만 남게 된다는 이것을 분석해 보면 죄로 인하여 심판하지만 그 심판가운데 용서하심의 소식을 들려줘서 심판이 있다는 것은 당연한 처지지만 용서는 웬 떡인가, 심판받는 것은 내 죄에 대해서 합당한 조치인 것은 맞는데 은혜 받을 이유도 없고 안 줘도 괜찮은데 구원해주는 이 사랑이 웬 말인가, 바로 이러한 느낌은 주의 일관된 말씀에서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모든 말씀은 십자가에서 전부 다 완성을 보입니다. 용서는 예수님의 피로 받거든요. 그러니까 모든 말씀을 그물로 엮어서 결국은 어디에 초점이 모이느냐, 십자가에 모이는 겁니다. 그 십자가에서 눈 돌리면 이단 되잖아요. 십자가에서 눈 돌리면 그것은 마귀새끼 되는 거지요. 십자가 앞에 설 때 우리는 ‘내가 죄인에 불과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모든 것은 과분한 혜택이고 주의 십자가와 더불어서 은혜로 엮인 채 살아가는 그것이 바로 생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이처럼 우리의 모든 행동들이 나를 우상화시키는 우상숭배의 산물이며 말씀에 입각해 보면 그런 것은 저주받아야 합당한데 말씀 속에 또 용서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셔서 그 용서하심을 바라볼 때마다 오직 십자가지신 주님의 그 용서하심만 세상의 어떤 것과도 바꾸지 않는 마음, 이것이 성도입니다.
마태복음 16장 26절에 보면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끝 지점을 한 번 다시 봅시다. 인생 잘 살았다, 몇 평짜리 아파트에 산다, 다 좋아요. 다 좋은데 하지만 결국은 누구에게나 끝이 옵니다. 누구나 주의 심판대 앞에 섭니다. 그럴 때 과연 내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주의 십자가만으로도 과분했습니다.”라고 고백할 것인지 아니면 남들처럼 부자 못돼서 한탄으로 살아왔는지. 사람은 말씀의 완성, 그 십자가로 살게 되는 겁니다. 끝 지점에서 확인될 것을 우리가 지금부터 여기서 늘 확인하면서 살아갑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자기 것 챙기기에 급급한 우리들, 그것이 바로 간음이요 음란한 세상 즐거움이니 하나님을 분노하게 하는 짓인 것을 저희들이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 달릴 때 우리가 당할 저주를 미리 당한 것을 바라볼 때마다 그 피로 용서해주시는 놀라운 반전, 그 반전을 우리가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