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투 아이
[ 아이 투 아이 ] 켄 윌버 저 김철수 역 대원출판(서울: 2004)'눈 대 눈' 혹은 '눈 높이'라는 이름의 이 책은 육체→마음→영혼→영성에 이르는 존재의 연쇄를 보다 정교화시키고 있다. 사람에게는 세 가지 눈이 있다는 것이다. 육신의 눈, 마음의 눈, 관조의 눈이 그것이다. 만약 육신의 눈만 고집하면 어떻게 될까?그것은 모든 것을 감각경험으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은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이다"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떼까지 나아간다. 그저 육안과 육안에 의한 숫자적 수량만이 진실이다고 말하는 것이 된다.그렇게 되니, 심안, 관조의 눈, 신, 붓다, 브라흐만(인도교의 신) 그리고 도 이 모든 것도 다 무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 양적이 아니라 질적으로 생각하게 된다는 그는 과학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미신이 되고 마는 것이다.왜냐하면 과학은 '양의 탐구'이기 때문이다. 즉 숫자들이다. 수가 갖고 있는 문제는, 질은 다른 것보다 더 나을 수 있는 데 비해 숫자는 그렇 수 없다. 사랑은 미움보다 본질적으로 더 낫지만, 3은 본질적으로 5보다 더 좋은 것이다. 이것은 가치나 의미가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모든 지식이 육신, 경험적 지식으로 환원됨에 따라 육신의 지식에 대한 심판관은 수이고 수는 질이나 가치 없는 양이기 때문에 과학이 존재의 위대한 가치사슬을 세심하게 찾아 냈을 때 아마도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기묘한 해석이 나타나게 되었다.과학이 볼 수 있는 모든 것은 숫자로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어떤 수도 근본적으로 다른 수보다 더 낫지 않기 때문에 가치의 모든 위계는 붕괴되고 말았다. 그것은 단순하고 가치 없는 위치 설정자로 전락하여 자연의 나머지 속에 자리잡을 정도, 또한 활기 없는 사건들의 집합체, 즉 소리 없고, 향기 없고, 색깔 없는, 단지 끝도 없이 아무 의미 없는 물질의 법석대는 소동의 일부가 될 정도로 축소되고 말았다.따라서 가치와 존재라는 예전의 위계는 수의 위계를 지지하면서 버려졌다. 그 어떤 영역도 더 이상 다른 영역보다 더 상위라거나 더 진실이거나 더 낫다고 말 할 수 없게 되었다. 그것들은 오직 다른 것보다 더 크다거나 작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유의미의 수준이 크기의 수준으로 대치되었다.과학지상주의자는 단지 "경험적 증명만이 감각영역에서 획득한 사실들에 대한 가장 좋은 방법이다"라고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경험적으로 검증될 수 있는 그런 명제만이 진실이다"라고 말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런 명제 자체는 경험적으로 검증될 수 없는 것이다.생각해보라! 어떤 사람이 언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을 하거나 글쓰기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글을 쓰는 그것으로 인해 과연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인간은 단지 눈만 가지고 보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도구(마음의 눈)의 많은 부분을 갖고 본다. 우리는 지성의 빛(내면의 빛)을 갖고 우리의 신체적 감각으로는 볼 수 없는 사물들을 볼 수 있다. 예컨대 수학은 비경험적 지식 또는 초경험적 지식이다.수학은 육신의 눈이 아닌 이성의 눈에 의해 발견되고 밝혀지며 권한을 부여받게 된다. 수학자는 하나의 진술을 논리적 관계의 진술로 본다. 그는 그 진술의 경험적이거나 사실적인 의미에는-설령 있다 해도- 관심이 없다. 즉 어느 누구도 육신의 눈으로 마이너스 값을 갖는 평방근을 본 적이 없다.그것은 초경험적 실체이며 오직 마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들면, "모든 유니콘(뿔이 하나 밖에 없는 신화속의 괴물)은 죽는다. 타르낙은 유니콘이다. 따라서 타르낙은 죽는다"는 논리적 삼단논법은 타당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말은 논리적으로 타당하지만 무엇보다 아무나 유니콘을 본 적이 없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경험적으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진술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삼단 논법이 무가치한 것인가?그렇지 않다. 이처럼 인간이 사물을 볼 때는 육신의 눈으로 확인하는 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을 갖고 사물을 대하는 것이다. 이런 점은 결코 눈의 감각적인 '봄'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마음의 눈은 육신의 눈에 간섭받지 않고 논리작용을 통해 감각운동적 대상을 내적으로 조작할 수 있으며 따라서 실제적인 운동계열을 초월해 있다.마음의 눈은 의미작용을 통해 육신의 본능적이며 충동적인 해소를 지연시킬 수 있으며 따라서 인간이란 단지 유기체적이고 동물적인 측면을 초월해 있는 것이다. 수학상에서, 논리상으로-그리고 더 나아가서 상상, 개념적 이해, 심리적 통찰, 창의성 등에서- 우리는 육신의 눈에는 충분히 현존하지 않는 마음의 눈을 갖고 있는 것이다.정신장이 신체장을 포함하지만 훨씬 초월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성의 눈이 육신의 눈에 그러한 것처럼 관조의 눈은 이성의 눈에 그러하다. 이성이 육신을 초월하는 것도 똑같이 관조는 이성을 초월해 있다. 이성적이 전적으로 육신의 지식으로 환원될 수 없고 그것으로 도출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관조는 이성으로 환원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성으로부터 도출될 수 없는 것이다. 이성의 눈이 초경험적인 것처럼,관조의 눈은 초합리적이며 초논리적이고 초정신적이다. 관조의 눈은 정신영역을 추월하며 감각영역을 넘어선 것이다. 이러한 초월은 '초자연적으로 자연적'인 영지의 기능, 즉 불변의 실재이자 의식이며 희열인 진정한 자아의 관조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철학자의 탐구와 관조와의 탐구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 철학이 중시하는 언어적 적절성이라는 기본원리는 해탈의 최종성, 언어적 세계를 초월하는 어떤 것에도 반대하기 때문이다.이처럼 인간은 육신의 눈, 이성의 눈, 그리고 관조의 눈을 갖고 있고 각각의 눈은 자신의 지식대상(감각적, 정신적 그리고 초월적)을 갖고 있다. 그리고 상위의 눈은 하위의 눈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그 눈에 의해서 전적으로 설명될 수도 없다는 점이 있고, 각각의 눈은 자신의 분야 내에서는 타당하고 유용하지만 상위영역이나 하위영역을 독점적으로 포착하려는 시도할 경우 범주 오류를 범하게 된다. 대체로 경험적-분석적 과학은 육신의 눈에 속하고, 현상학적 철학과 심리학은 마음의 눈에 속하며, 종교/명상은 관조의 눈에 속한다.이 전체를 다음의 한 예를 통해서 적절하게 설명할 수 있다.고전적인 경험적-과학적 방법을 규정하는 특징 중 하나가 자료산출을 위한 측정치의 사용이었음을 알았다. 실로 그것이 케플러와 갈릴레오의 천재성이었다. 물리적인 감각대상과 정신적인 지적 대상 간의 구별에서부터 보면, 데카르트 자신이 설명했듯이, 이들 두 영역간의 커다른 차이점 중 하나는 물리적 세계는 외연extension에 의해 특징지어지고 정신세계는 내연intension에 의해 특징지어진다는 것이다. 예컨대 보통 책의 경우, 세로가 23cm이고 가로는 15cm이며 주변의 디른 물리적 대상과 구별되는 등 분명한 외연을 갖고 있다. 그것은 거친 물질영역, 물리적 외연, 물리적 공간, 물리적 시간의 일부이다.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물리적 대상- 즉 감각영역-은 측정에 이상적으로 아주 잘 부합된다. 물리적 대상들의 길이, 넓이, 높이 및 무게는 측정 될 있다. 그렇다면 희망, 시기, 자부심, 즐거움, 이해는 어떠한가? 희망이라는 개념의 길이는 얼마나 되는가? 통찰의 무게는 얼마나 나가는가? 한 아이디어의 넓이는 얼마나 되는가? 지적 대상을 특징짓는 것은 그들의 외연이 아니라 내연, 즉 그들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間주관적인 이해이다.물리적 시공은 더 이상 이러한 것들에 적용되지 않으며, 따라서 물리적인 측정과 수령화는 상당히 제한된 용도의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말은 지적 영역에 어떤 종류의 특정이나 수량화도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니며 지적 영역이 그 자체의 더 미묘한 형태의 공간-시간을 갖고 있음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왜냐하면 정신영역은 단지 자연적 시간이나 계절적 시간이 아닌 또 다른 시간 양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 시간은 역사적 시간 또는 역사로서, 그 시간양식은 단지 외연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거의 전부가 의도intention에 의해 특징지어진다.이것은 서술체의 시간, 즉 자기 자신의 생활상의 이야기 또는 자기 자신의 역사를 특징지어지는 시간이며, 희망과 이상, 계획과 포부, 목표와 비전을 수행하거나 창조하는 시간이다. 이 미묘한 시간은 관심사에 따라 빨라지기도 하고 느려지기도 하며. 늘어나거나 즐어들 수도 있으며. 초월하거나 집중할 수도 있는 시간이다.이에 비해 불쌍한 물리적 시간은 그저 단조롭게 아무 생각 없이 무심코 스쳐지나가는 현재에 들어부터 똑딱거리는 시간일 뿐이다.바꿔말하면, 역사적 시간은 물리적 시간을 초월해 있다는 것, 감각영역처럼 순간에서 순간으로 흘러가는 단순한 시간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역사적 시간은 과거와 미래. 예견과 기억, 회상과 상상에 걸쳐 있을 수 있고 그것을 훑어볼 수 있으며, 따라서 마음으로 하여금 단지 신체적 감각과 지각의 스쳐가는 현재에 속박된 상태를 도피하도록 허용해주기 때문에 역사적 조망이라 불리는 더 큰 의식에 들어간다.따라서 이러한 미묘한 시간양식은 또한 보다 더 많은 것을 품고 초월해 있는 시간의 양식이다. 즉 사물의 움직임이 아닌 사고(思考)의 움직임으로서의 시간, 소박한 현재를 넘어서 연장해 가는 시간, 그리고 비전과 의도와 함께 자신의 보조를 나타내는 시간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즉 '심리적 공간'이라 불리는 바로 그러한 공간을 갖게 된다.그것은 자기 정체감의 공간이자 상상의 공간이고, 꿈의 공간이자 비전의 공간이며, 형식적 조작 상태에서 마음이 만들어 낸 내면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것은 단지 확장과 충동과 인과성의 물리적 공간만이 아니라, 서술체의 공간, 즉 이야기와 의도와 선택의 공간이다. 물리적 공간보다 더 미묘한 이 공간은 물리적 공간을 초월할 수 있다.나의 심리적 공간은 나 자신의 원 안에 나의 친구들, 나의 가족들, 나의 국가조차 포함할 만큼 확장될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을 물리적 공간에서 전혀 움직이지 않고도 확장할 수 있다. 이러한 정신적 공간양식과 그와 관련된 시간양식(역사)은 지적 영역과 그 영역의, 역동성을 특징 짓는다.이제 초월영역을 보자. 이 영역에서는 공간-시간이 너무나 미묘하고, 너무나 초월적이며, 너무나 확장적이고, 너무나 모든 것을 품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시간과 공간이 전적으로 존재를 멈췄다고 말하거나(역설적으로!), 모든 시간과 공간이 이 영원한 순간 속에 지금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신비가들은 이 현재 이 순간이란 말을 사용하면서 단순한 감각영역의 스쳐가는 현재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대단히 조심스럽게 지적한다.바로 여기서 측정문제가 등장한다. 시간과 공간은 오직 감각영역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문제이다. 즉 물리적 영역에서의 시간과 공간은 가장 농축된 것, 가장 거친 것, 가장 확실하게 구체적인 것이라는 점이다.인간의 의식의 스펙트럼을 따라 올라갈수록 시간과 공간은 더욱 더 미묘해지며(따라서 보다 많은 것을 포함하거나 초월적이 되며), 마침내 완전히 무의미한 것이 될 경우 측정은 더더욱 미묘해지고 무한히 더 어려워진다.따라서 측정은 가장 쉽게 그리고 가장 근본적으로 감각대상이라는 영역으로 특징지어진다. 지적 대상영역에 사용될 경우, 측정은 외연의 판단 계측기로부터 의도라는 판단척도로 변환된다.예를 들면, 가치의 강도라든가 어떤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포부 수준 및 지능 측정치에 하여 말할 때 수치를 사용한다. 또한 상대적 가치의 지표로서 수치를 사용할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이 이성에 대해서 1에서 10점 척도에 주관적으로 판단할 때처럼)사회적 현상학이라는 학문분야에서도 정신적인 의도(외연이 아닌)를 수량화하는 많은 연구들이 있다. 뿐만 아니라 초월영역에서조차도 영적인 향상과 이해의 정도(깨달음의 10단계)를 나타낼 때 수치를 의미있게 사용할 수 있다.이들은 모두 적절한 적용이다. 가장 폭넓은 의미에서 측정이란 단지 어떤 자료의 '더 많은' more 혹은 '더 적은' less 것을 의미하며, 모든 영역은 자체의 자료를 갖고 있다.그러나 외연의 측정으로 의미하는 것을 의도의 측정과 초월성의 측정(혹은 구체적인 초월의 정도)과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경험상 과학지상주의가 갖고 있는 문제점은 측정이란 말로써 가장 쉽게 가장 객관적인 측정형식, 즉 외연적인 거친 감각영역을 의미했다는 점이다. 주관적인 지적 영역을 측정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영적 초월적 영역은 제쳐두고), 과학지상주의자들은 물리적 측정 차원으로 끌어들일 수 없는 자료는 그저 내 팽개쳐 버린다는데 있다. 그러면 어떤 식으로 각각의 영역에 참여하며 또한 그 안에서 유지될 수 있는가? 여기에는 세 가지 절차를 거치게 된다.(1)교시로 가능하다. "당신이 이 세계를 알고 싶으면 이것을 하라"라는 형태로 단순한 지시에 순응하므로 가능하다.(2)그렇게 되면 스스로 파악되고 계발되는 속성을 본인들이 갖게 된다. 이 계발에는 훈련과 숙달과 적응이 요구된다. 만약 지시에 따른 훈련을 거부하게 되면 그 사람은 그 세계의 실상을 보는데서 배제될 대상자에 해당될 뿐이다. 예를 들면, 기하학 배우기를 거부한 사람은 피타고라스 정리의 진실성에 대해 무지하고 관조 수행을 거부한 사람은 불성 혹은 영성의 진실성에 대해서 무지몽매한 자가 된다. 관조의 세계에는 좌선, 진언, 내면의 기도에 관해서 그 분야의 스승들의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갈릴레오의 망원경을 통해 보기를 거부한 그 당시 성직자들은 육안의 세계에서는 부적절한 사람들이어서 그 영역에서는 자신의 의견을 내비칠 권한이 없는 것이다.(3)공동체적 요소가 따라오게 되어 있다. 공동체적 요소란 사적인 지식으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여러 사람과 합의된 검증에 이르게 된다. 신비지식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더불어 같이 누리는 비밀이다. 왜냐하면 훈련된 눈은 사적인 눈이 아니라 공적인 눈이 되기 때문이다.평가저자는 신비주의적 입장에서 세상의 모든 것을 해명하고 파악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진정한 '절대'란 오직 신비주의적 직관에 의해서 알게 되기에 그 어떤 이성적 합리화의 접근을 불허하고 있다. 그런데 '절대 실재'나 신비를 꼭 알아야 될 이유가 무엇인가, 왜 알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가? 에 대해서는 그는 진화론에다 그 권위성을 넘긴다. 인간은 의식은 궁극적인 최고가 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고 이것이 우주의 전체적인 진화의 움직임과 같이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진화론이 가짜가 되면 그의 논리도 와르르 무너지게 된다.저자는, 창세기 3장에서 악마가 인간에게 무슨 마음을 심어주었는지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있다. 악마는 창조자의 피조물 사이의 경계를 넘어서라도 부축였고 거기에 인간은 호응했다. 따라서 그 때부터 인간은 이미 신이 되려는 일념으로 산다. 즉 이미 마음 속에 '절대 실재'에 대한 이미지를 피어내며 존재하게 된다.이처럼 모든 인간에게는 이미 나름대로의 세 가지 관점을 다 갖고 있다. 이것은 저자의 말처럼 지시 받고 훈련받아야 비로소 생겨나고 그 세계에 참여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악마가 사전에 정교하게 만들어 넣어준 것이다. 그리고 그 나름대로 윤리관과 도덕과 가치성을 뽑아내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이다.왜냐하면 그것은 독자적인 의(義)를 수립하여 소유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즉 악마의 목적은 오직 하나, 인간을 신으로, 그것도 의로운 신으로 행세하면서 살도록 해주는데 하는데 있다. 그렇게 해야지만 어떤 식으로도 예수님과 그 의에 매이지 않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오늘날의 교회는 참으로 지루해하고 있다. 예수님만 이야기하는 데는 그 예수 때문에 지루해하고 있고, 세상 축복을 거론하고 교회 부흥이 신의 뜻이라고 교인들을 못살게 구는 교회는 그 사업 활동에 지쳐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름대로 도피를 한다. 바로 '나 스스로 신이 되는 것'이다. 예수도 귀찮고 하나님도 귀찮고 교회도 귀찮고 심지어 가정도 귀찮다. 오직 나 스스로 절대 신이 되어 살고 싶어한다. 그것만이 최고의 행복이고 자유라고 한다. 아마 이 책은 그들의 바이블로 적절할 것이다.